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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 10. 대념처 경(mahāsatipaṭṭhānasuttaṃ)

실론섬 2016. 3. 28. 08:39

MN 10. 대념처 경(mahāsatipaṭṭhānasuttaṃ)

 

10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꾸루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꾸루(Kuru)는 인도 16국 가운데 하나였는데 지금의 델리 근처 지역이다. 
*세존께서는 무슨 이유로 이 경을 여기서 설하셨는가? 꾸루 지방 주민들은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꾸루 지방의 비구와 비구니, 청신사와 청신녀들은 아주 좋은 기후 등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한다. 적당한 기후 조건, 음식 등으로 인해 그곳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항상 건전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건전하고 지혜의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심오한 법문을 파악할 능력이 있었다. 세존께서는 그들이 심오한 법문을 파악할 능력을 가졌음을 보시고 21가지 경우로 사성제의 명상주제를 아라한과에 담아서 이 심오한 법문인 대념처경을 설하셨다. 마치 사람이 황금으로 만든 함을 얻으면 칠보를 담아두는 것처럼 세존께서도 꾸루 지방 사람들을 만나 이 심오한 가르침을 설하셨다고 한다.(MA.i.227-228)  

 

 106.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四念處)이라는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근심(愁)과 비탄(悲)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憂)의 사라짐을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경로(길)이다.

 

*"길(magga)이라는 것은 어떤 뜻에서 길인가? 열반으로 간다(nibbana-gamana)는 뜻에서, 열반을 원하는 자들이 가야 한다(magganiya)는 뜻에서 길이다."(MA.i.231)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sattanam visuddhiya)'라는 것은 이 길은 애욕 등의 더러움과 욕심이라는 그릇된 탐욕 등의 오염원들로 인해 오염된 마음을 가진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MA.i.231)  
*"'방법을 얻게 한다(nayassa adhigamaya)'는 것에서 옳은 방법이란 이 성스러운 팔정도를 말한다. 이 길은 그것을 얻게 한다, 증득하게 한다는 말이다. 예비단계에서 세간적인 마음챙김의 확립인 도를 닦으면 출세간도의 증득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옳은 방법을 얻게 하고'라고 말씀하셨다.(MA.i.236)  
*"'열반을 실현하게 한다(nibbanassa sacchikiriyaya)'라는 것은 갈애라는 욕망이 없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이름을 얻은 불사를 실현하게 한다. 이 도를 닦으면 순차적으로 열반을 실현한다. 그래서 '열반을 실현하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MA.i.236)  
*주석서는 '유일한 길(ekayana)'의 의미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①'비구들이여, 이 길은 유일한 길이어서'라고 설한 것은 이 길은 오직 한 갈래 길이어서 두 갈래로 갈라지지 않았다(nadvedhapathabhuta)'는 뜻이다.
②혹은 혼자서 가야 하기(ekena ayitabbo) 때문에 '유일한 길'이다. '혼자서'라는 것은 무리 짓는 것을 버리고 홀로 머무는 자가 가야한다는 말이며, '가야 한다(ayitabbo).'라는 것은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혹은 그 길을 가지 때문에 길(ayana)이다. 윤회에서 열반으로 간다는 뜻이다.  
③한 사람의(ekassa) 길이 '유일한 길'이다. '한 사람의'라는 것은 '최고로 수승한 분의'라는 말로 모든 존재들 가운데 최고 수승하신 세존이시다. 그러므로 '세존의 [길]'이라는 말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이 [길을]간다 하더라도 이것은 세존의 길이다. 그분께서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라문이여, 그분 세존께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를 일어나게 하셨습니다."(MN108)라는 말씀이 있다.  
④혹은 '간다'고 해서 '길'이다. '가다, 나아가다'라는 뜻이다. 한 곳에 있는 길이라고 해서 '유일한 길'이다. '오로지 이 법과 율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다.'는 말이다.  
⑤하나를 향해 가기 때문에 '유일한 길'이다. 예비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수행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인 열반으로 간다라는 말이다."(MA.i.229-230)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간탐과 고뇌)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세상에 대한(loke)'에서 '세상'은 바로 그 몸을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몸은 무너지고 부서진다는 뜻에서 세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지 몸에 대해서만 탐욕과 근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느낌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버린다. 그러므로 "집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들도 또한 세상이다."(Vbh.193)라고 「위방가(분별론)」에서 설하셨다."(MA.i.244)     

 

107.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 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리고 그는 마음을 챙기며 마시고, 마음을 챙기며 내쉰다. 

길게 마실 때에는 '길게 마신다'라고 알아 차린다. 길게 내 쉴때에는 '길게 내쉰다'라고 알아 차린다.

짧게 마실 때에는 '짧게 마신다'라고 알아 차린다. 짧게 내 쉴때에는 '짧게 내쉰다'라고 알아 차린다.

'온 몸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라고 익힌다. '온 몸을 느끼면서 내 쉬겠노라'라고 익힌다. 

'육체적 현상(몸의 작용.身行)을 가라앉히면서 마시겠노라'라고 익힌다.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내 쉬겠노라'라고 익힌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숙련된 도공이나 도공의 제자는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라고 알아 차리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라고 알아 차린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길게 마실 때에는 '길게 마신다'라고 알아 차린다. 길게 내 쉴때에는 '길게 내쉰다'라고 알아 차린다. 짧게 마실 때에는 '짧게 마신다'라고 알아 차린다. 짧게 내 쉴때에는 '짧게 내쉰다'라고 알아 차린다. '온 몸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라고 익힌다. '온 몸을 느끼면서 내 쉬겠노라'라고 익힌다. '육체적 현상(몸의 작용.身行)을 가라앉히면서 마시겠노라'라고 익힌다.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내 쉬겠노라'라고 익힌다.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이렇게 안으로(iti ajjhattam)'라는 것은 이와 같이 자기의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 것을 말한다."(MA.i.249)
*"'또는 밖으로(bahiddha va)')'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 것을 말한다."(MA.i.249)
*"'또는 안팎으로(ajjhatta-bahiddha va)'라는 것은 때로는 자기의 들숨과 날숨, 때로는 다른 사람의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에서 관찰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친숙해진 명상주제에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안팎으로 거듭해서 움직이는 때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ekasmim kale) 자기의 들숨.날숨과 다른 사람의 들숨.날숨을 관찰할 수는 없다."(MA.i.249)     

*"'또는 일어나는 현상들(samudaya-dhamma)을 관찰하며'라는 것은 마치 대장장이의 자루와 풀무의 튜브와 적절한 노력을 연(緣)하여 바람이 계속해서 움직이듯이, 비구의 육체와 콧구멍과 마음을 연하여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여기서 몸등의 현상들을 일어나는 현상이라 한다. 들숨과 날숨이 일어나게 된 원인인 이런 몸과 콧구멍과 마음을 보면서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하며 머문다.'라고 설하셨다."(MA.i.249)    
*"'또는 사라지는 현상들을 관찰하며'라는 것은 마치 자루를 치워버리거나 풀무의 튜브가 부서지거나 적절한 노력이 없으면 그 바람은 생기지 않듯이, 몸이 무너지고 콧구멍이 부서지거나 마음이 소멸하면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 등이 소멸할 때 들숨과 날숨도 소멸한다. 이와 같이 보면서 '또는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관찰하며 머문다.'라고 설하셨다."(MA.i.249)  
*"'또는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관찰하며'라는 것은 때로는 일어나는 현상들을, 때로는 사라지는 현상들을 관찰한다는 말이다."(MA.i.250)     

*"'몸이 있구나'라고 그의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는 것은 '몸이라는 것만 있을 뿐이고 중생도 없고 인간도 없고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자아도 없고 자아에 속하는 것도 없고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없고 누구의 것도 없다.'라고 이렇게 그의 마음챙김이 확고하다는 말이다.(MA.i.250)  
*'그것은 오직 앎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는 yavadeva nanamattaya patissatimattay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yavadeva는 목적을 한정하여 확정짓는 말이다. 즉 이렇게 잘 확립된 그 마음챙김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직 지혜의 한도를 위한 것이다. 더 넓고 더 높이 지혜를 키우고 오직 마음챙김을 강하게 한다. 즉 마음챙김과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증장하게 한다는 말이다.(MA.i.250)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의지하지 않고 머문다).'는 것은 갈애의 사견에 의지하던 것을 이제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는 뜻이다."(MA.i.250)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라는 것은 세상에서 물질이나 느낌이나 인식이나 형성들이나 혹은 의식을 '이것은 나의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움켜쥐지 않는다는 말이다.(MA.i.25)  

 

108.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갈 때에는 '가고 있다.'고 알아 차리며(꿰뚫어 알고), 서 있을 때에는 '서 있다.'고 알아 차리며,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다.'고 알아 차리며, 누워 있을 때에는 '누워 있다.'고 알아 차린다. 또한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알아 차린다.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109.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돌아올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구불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갈 때도 서 있을 때도 앉아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110.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은 발바닥에서부터 위로는 머리털에 이르기 까지 피부로 덮어져 있으며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들을 관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창자‧장간막‧위장‧배설물‧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비계‧침‧콧물‧관절활액‧오줌·뇌수등이 있다.'라고.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벼, 보리, 녹두, 콩, 깨, 쌀, 완두 같은 여러 가지 곡식을 채운 양쪽에 아가리가 있는 자루를 눈 밝은 사람이 그 자루의 아가리를 풀고서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벼, 이것은 보리, 이것은 녹두, 이것은 콩, 이것은 깨, 이것은 쌀, 이것은 완두이다.'라고.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은 발바닥에서부터 위로는 머리털에 이르기 까지 피부로 덮어져 있으며 여러 가지 부정한 것들을 관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창자‧장간막‧위장·배설물‧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비계‧침‧콧물‧관절활액‧오줌·뇌수등이 있다.'라고.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11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을 놓인 대로 자세를 취한 대로(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계. 界]별로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地]의 요소, 물[水]의 요소, 불[火]의 요소, 바람[風]의 요소가 있다.'라고.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숙련된 도축업자나 그 제자가 소를 도살하여 각 부위별로 잘라서 큰 길 네거리에 부위별로 이를 펼쳐놓고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을 놓인 대로 자세를 취한 대로 요소별로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라고.

 

*"비유와 함께 해설을 하면 다음과 같다. 마치 어떤 백정이나 혹은 그의 제자가 소를 도살한 다음에 큰 길 사거리에 부분씩 나누어 놓고 앉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가 네 가지 자세 가운데 어떤 하나의 형태로 처해 있고 놓여 있는 이 몸을 그렇게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이 몸에는 땅의 요소가 있고 ...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 관찰한다. 
무슨 뜻인가? 백정이 소를 키울 때도, 도살장으로 끌고 올 때도, 끌고 와서 묶어둘 때도, 도살할 때도, 도살된 것을 볼 때도, 그것을 베어서 부분마다 나누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내어 앉아있을 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고기'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그는 '나는 소를 팔고, 그들은 소를 사가져 간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나는 고기를 팔고, 그들은 고기를 사가져 간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를 하였어도 [명상주제를 들지 않은]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덩어리를 분해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관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MA.i.272)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112.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나 부풀어 오르고 검푸르게 되고 고름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다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 매, 독수리, 개, 표범, 호랑이, 자칼등에 의해서 먹혀지고, 갖가지의 벌레에 의해서 파 먹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다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 있고, 살점이 붙어 있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있고 살점은 없이 핏자국만 얼룩진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만 남아있고 살점이나 핏자욱이 없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여기에 손뼈, 저기에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뼈, 등뼈, 가슴뼈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다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백골이 되어 뼈가 하얗게 변하여 조개껍질 색깔처럼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백골이 되어 단지 뼈 무더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백골이 여러 해를 넘기면서 삭아 가루가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이켜 관찰한다. '이 몸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라고.

 

이렇게 안으로 [자기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 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navasivathikapabbaṃ niṭṭhitaṃ. 시체에 대한 아홉 가지 부분을 마침.
*cuddasakāyānupassanā niṭṭhitā. 열네 가지 몸의 이어보기를 마침.

 

113.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여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세속적인(개발되지 않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세속을 떠난(개발된)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세속을 떠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세속을 떠난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세속을 여읜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세속을 떠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세속을 떠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라고 알아 차린다.

 

이렇게 안으로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느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느낌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느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이 있을 때 까지, '느낌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느낌들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vedanānupassanā niṭṭhitā. 느낌의 이어보기를 마침.

 

114.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탐욕을 떠난 마음을 탐욕을 떠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고귀한 마음을 고귀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고귀하지 않은 마음을 고귀하지 않은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을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해탈하지 않은 마음을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어리석음이 있는(samoha) 마음;이란 의심과 함께한 마음과 들뜸이 함께한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두 가지 마음이다.(MA.i.280)
*"'수축한(sankhitta) 마음'이란 해태와 혼침에 빠진 마음이다. 이것은 움츠러든 마음이기 때문이다."(MA.i.280)
*"'흩어진(vikkhitta) 마음'이란 들뜸과 함께한 마음이다. 이것은 흩어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MA.i.280)
*"'고귀한(mahaggata) 마음'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이다." (MA.i.280)
*"'고귀하지 않은(amahaggata) 마음'이란 욕계의 마음이다." (MA.i.280)
*"'위가 있는(sauttara)' 마음'이란 욕계의 마음이다." (MA.i.280)
*"'위가 없는(anuttara) 마음'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이다. 이 색계와 무색계 마음들 중에서도 색계 마음은 아직 위가 남아있는 마음이고, 무색계 마음은 더 이상 위가 없는 마음이다." (MA.i.280)

 

이렇게 안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밖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또는 안팎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마음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오직 앎(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이 있을 때 까지, '마음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cittānupassanā niṭṭhitā. 마음(心)의 이어보기를 마침.

 

115.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장애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안에(자기에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을 때, '내 안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다.'라고 알아 차리고, 안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없을때 '내 안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없다.'고 알아 차린다.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알아 차리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아 차리고, 사라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알아 차린다(비구는 전에 없던 감각적 쾌락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알아 차리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이 어떻게 해서 제거되는지, 그 원인을 알아 차리며, 어떤 [이유로] 제거된 감각적 쾌락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그것을 [그 원인을] 알아 차린다).

 

*"아름다운 표상(subha-nimitta)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표상이란, 아름다움 그 자체도 아름다운 표상이고, 아름다운 대상도 아름다운 표상이다.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인다(ayoniso-manasikara)'이란 잘못된 방법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바른 길을 벗어나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무상한 것에 대해서 항상하다고, 괴로움에 대해서 즐겁다고, 자아가 없는 것에 대해서 자아라고, 부정한 것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어난다."(MA.i.281)   
*"부정한 표상(ausbha-nimitta)에 대해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제거된다. 부정한 표상이란 부정함 그 자체도 부정한 표상이고, 부정한 대상도 부정한 표상이다.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임'이란 옳은 방법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바른 길을 따라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무상한 것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괴로움에 대해서 괴롭다고, 자아가 없는 것에 대해서 무아라고, 부정한 것에 대해서 부정하다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제거된다."(MA.i.281)   
 

안에 악의가 있을 때 '내 안에 악의가 있다.'라고 알아 차리고, 안에 악의가 없을 때 '내 안에 악의가 없다.'라고 알아 차린다. 일어나지 않은 악의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고, 일어난 악의가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아 차리고, 사라진 악의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알아 차린다.

 

*"적의를 일으키는 표상(patigha-nimitta)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악의(byapada)가 일어난다. 여기서 적의(敵意) 그 자체도 적의를 일으키는 표상이고 적의를 일으키는 대상도 적의를 일으키는 표상이다.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임이란 모든 곳에서 같은 특징을 가진다. 이런 것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악의가 일어난다."(MA.i.282)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에 대해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일 때 그것은 제거된다. 여기서 '자애(자비)'라고 말할 때는 본삼매와 근접삼매가 해당되고, '마음의 해탈'이라고 말할 때는 오직 본삼매만 해당된다. 이런 것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악의가 제거된다."(MA.i.282)  

 

안에 해태와 혼침(혼침과 졸음)이 있을 때 '내 안에 해태와 혼침이 있다.'고 알아 차리고, 해태와 혼침이 없을 때 '내 안에 해태와 혼침이 없다.'고 알아 차린다. 일어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알아 차리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아 차리고, 사라진 해태와 혼침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알아 차린다.

 

*"권태(arati) 등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해태와 혼침(thina-middha)이 일어난다. 권태는 몸의 게으름을 뜻하고, 하품은 몸의 늘어짐을 뜻하고, 식곤증은 식사 후에 오는 피곤함을 뜻하고, 마음의 가라앉음은 마음의 무기력함을 뜻한다. 이들 권태 등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해태와 혼침이 일어난다."(MA.i.283)  
*" 세 가지 정진들에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일 때 해태와 혼침이 제거된다. 세 가지 정진이란,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arambha-dhatu)와 벗어나는 요소(nikkama-dhatu)와 분발하는 요소(parakkama-dhatu)다. (MA.i.283)  

 

안에 들뜸과 후회가 있을 때 '내 안에 들뜸과 후회가 있다.'고 알아 차리고, 들뜸과 후회가 없을 때 '내 안에 들뜸과 후회가 없다.'고 알아 차린다. 일어나지 않은 들뜸과 후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알아 차리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가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아 차리고, 사라진 들뜸과 후회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알아 차린다.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가 일어난다."(MA.i.284)
*"삼매라고 불리는 마음의 고요함에 대해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일 때 들뜸과 후회가 제거된다."(MA.i.285)

 

안에 의심이 있을 때 '내 안에 의심이 있다.'고 알아 차리고, 의심이 없을 때 '내 안에 의심이 없다.'고 알아 차린다. 일어나지 않은 의심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알아 차리고, 일어난 의심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아 차리고, 사라진 의심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알아 차린다.

 

*"의심스러운 법들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의심(vicikinnha)이 일어난다."(MA.i.285)
*"유익한 법등에 대해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일 때 의심이 제거된다."(MA.i.285)

 

이렇게 안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밖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안팎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이 있을 때 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 대해서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nīvaraṇapabbaṃ niṭṭhitaṃ. 장애 부분을 마침.

 

116.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五取蘊.오취온]의 법들에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상.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행.行)들이다. 이것이 형성들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들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이것은 물질이다(iti rupam)'라는 것은 '이만큼이 물질이고 이것을 넘어서서는 물질이 없다.'라고 고유성질을 통해서 물질을 아는 것을 말한다. 느낌 등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MA.i.287)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iti rupassa samudayo).'라는 것은 이와 같이 '무명이 일어남으로써 물질이 있다.'라는 등의 다섯 가지 상태로 물질의 일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느낌등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MA.i.287)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iti rypassa atthangamo).'라는 것은 이와 같이 '무명이 소멸함으로써 물질이 소멸한다.'라는 등의 다섯 가지 형태로 물질의 사라짐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간략하게 설한 것이고, 청정도론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지혜의 해설(XX장.93이하)에서 상세하게 설했다.(MA.i.281)   

 

이렇게 안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밖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안팎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이 있을 때 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五取蘊.오취온]의 법들에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khandhapabbaṃ niṭṭhitaṃ. 온(蘊) 부분을 마침.

 

117.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육내외입처.六內外處]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을 철저히 알고(꿰뚫어 알고), 형색들을 철저히 알고, 이 둘을 연(緣)하여 일어나는 족쇄를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철저히 알며, 사라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철저히 안다.

 

*"눈을 철저히 안다는 것은 눈의 감성을 역활과 특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는 말이다."(Ibid)
*"형색을 철저히 안다는 것은 [업.마음.온도.음식의] 넷에서 생긴 밖의 물질을 역활과 특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는 말이다."(MA.i.287)
*"이 둘을 연하여 일어난 족쇄도 철저히 안다는 것은 눈과 형색이라는 이 둘을 연하여 ①감각적 쾌락의 족쇄 ②적의의 족쇄 ③자만의 족쇄 ④사견의 족쇄 ⑤의심의 족쇄 ⑥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의 족쇄 ⑦존재에 대한 욕망의 족쇄 ⑧질투의 족쇄 ⑨인색의 족쇄 ⑩무명의 족쇄라는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역활과 특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일어나는가?
①눈의 문의 영역에 나타난 원하는 대상을 감각적 쾌락의 달콤함을 통해서 그것을 맛보고 즐길 때 감각적 쾌락의 족쇄가 일어난다. ②원하지 않는 대상을 증오할 때 그에게 적의 족쇄가 일어난다. ③'나 말고 다른 누가 이 대상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여길 때 그에게 자만의 족쇄가 일어난다. ④'이 형색은 항상하고 견고하다.'라고 움켜쥘 때 그에게 사견의 족쇄가 일어난다. ⑤'이 형색은 중생인가, 아니면 중생의 것인가?'라고 의심할 때 그에게 의심의 족쇄가 일어난다. ⑥미래에도 계행과 의례의식을 받들어 이런 [형색을] 얻을 수가 있기를 하면서 계행과 의례의식을 받들 때 그에게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의 족쇄가 일어난다. ⑦'이 [원하는 형색은] 수승한 존재에서 쉽게 얻어질 것이다.'라고 [수승한] 존재를 원할 때 그에게 존재에 대한 욕망의 족쇄가 일어난다. ⑧'오, 참으로 이 형색을 다른 사람들은 얻지 못하기를.'하고 시샘할 때 그에게 질투의 족쇄가 일어난다. ⑨자신이 얻은 형색을 남에게 인색하게 굴 때 그에게 인색의 족쇄가 일어난다. ⑩이 모든 것과 함께 생긴 무지함을 통해서 무명의 족쇄가 일어난다."(MA.i.287-288) 
*"무슨 이유로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는가? 사견.의심.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질투,인색이라는 이 다섯 가지 족쇄는 예류도를 얻으면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과 적의의 두 가지 거친 족쇄는 일래도에 의해서, 미세한 것은 불환도에 의해서, 자만과 존재에 대한 욕망과 무명의 세 가지 족쇄는 아라한도에 의해서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MA.i.288)   

 

귀를 철저히 알고, 소리를 철저히 알고, 이 둘을 연하여 일어나는 족쇄도 철저히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철저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해서 제거되는지 그 원인을 철저히 알며, 어떻게 해서 제거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그 원인을 철저히 안다.

 

코를 철저히 알고,. 냄새를 철저히 알고, 이 둘을 연(緣)하여 일어나는 족쇄를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철저히 알며, 사라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철저히 안다.    

 

혀를 철저히 알고, 맛을 철저히 알고, 이 둘을 연하여 일어나는 족쇄도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철저히 알며, 사라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철저히 안다.    

 

몸을 철저히 알고, 감촉을 철저히 알고, 이 둘을 연하여 일어나는 족쇄도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철저히 알며, 사라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철저히 안다.   

 

의식을 철저히 알고, 법을 철저히 알고, 이 둘을 연하여 일어나는 족쇄도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철저히 알며, 사라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철저히 안다.   

 

이렇게 안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밖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안팎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이 있을 때 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육내외입처.六內外處]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āyatanapabbaṃ niṭṭhitaṃ. 처(處) 부분을 마침.

 

118.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안에(자기에게)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念覺支.염각지]가 있을 때 '내 안에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철저히 알아 차리고,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철저히 안다(전에 없던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철저히 알고, 일어난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그 원인을 철저히 안다). 

 

안에 법에 대한 선별(간택)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택법각지]가 있을 때 '내 안에 법에 의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철저히 알고, 법에 의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법에 의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법에 의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법에 의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철저히 안다.

 

안에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정진각지]가 있을 때 '내 안에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철저히 알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철저히 안다.  

안에 희열(기쁨)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喜覺支.희각지]가 있을 때 '내 안에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철저히 알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철저히 안다.  

안에 편안함(평온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경안각지]가 있을 때 '내 안에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철저히 알고,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철저히 안다.  

안에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定覺支.정각지]가 있을 때 '내 안에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철저히 알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철저히 안다.  

안에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捨覺支.사각지]가 있을 때 '내 안에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철저히 알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철저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철저히 알고,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철저히 안다. 

 

이렇게 안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밖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안팎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이 있을 때 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bojjhaṅgapabbaṃ niṭṭhitaṃ. 각지(覺支) 부분을 마침.

 

119.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서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120.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고성제.苦聖諦)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음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우비고우뇌.愁悲苦憂惱)]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은 이와의 만남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121. 비구들이여, 무엇이 태어남[생(生)]인가? 

비구들이여, 이런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저런 중생들의 태어남, 시작됨, 나타남, 자라남, 오온의 드러남, 여섯 감각장소의 획득, 비구들이여, 이것이 태어남이라고 불린다. 

 

122. 비구들이여, 무엇이 늙음인가?

비구들이여, 이런저런 중생들 무리 가운데서 이런저런 중생들의 늙음, 노쇠함, 치아빠짐, 주름진 피부, 나이가 다함, 감각기능의 쇠퇴, 비구들이여, 이것이 늙음이라고 불린다. 

 

123. 비구들이여, 무엇이 죽음인가?

비구들이여, 이런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저런 중생들의 사라짐, 이동, 파괴, 소멸, 죽음, 끝남, 오온의 파괴, 신체의 소진, 생명 기능의 끊어짐, 비구들이여, 이것이 죽음이라고 불린다.

 

124. 비구들이여, 무엇이 슬픔[수.愁]인가? 

비구들이여,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괴로운 법에 연류되어 맞게되는 슬픔, 우수, 슬퍼함, 내적인(내면의) 슬픔, 내적으로 가득한 슬픔, 마음의 고뇌와 근심과 슬픔의 화살, 비구들이여, 이것이 슬픔이라고 불린다.   

 

125. 비구들이여, 무엇이 비탄[비.悲]인가? 

비구들이여,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괴로운 법에 연류되어 행하게 되는 한탄, 비통, 통한, 비탄, 통곡, 통탄, 절규, 울부짖음, 멍한 지껄임, 공허한 지껄임,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탄이라고 불린다. 

 

126.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통[고.苦]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불쾌감으로서 몸의 고통스러움(신체적 고통),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서 고통스러움을 받는 것(感受. 감수),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서 고통스러운 느낌,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통이라고 불린다. 

 

127. 비구들이여, 무엇이 근심[우.憂)]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의 불쾌감으로 마음의 고통(정신적 고통),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난 불쾌감으로서 고통스러움의 감수,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서 고통스러운 느낌, 비구들이여, 이것이 근심이라고 불린다.  

 

128.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민(惱)인가?
비구들이여,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괴로운 법에 연류되어 처하게 되는 오뇌, 우뇌, 불안, 번뇌, 불안에 빠지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이 번민이라고 불린다.   

 

129. 비구들이여, 무엇이 사랑하지 않은 이와 만나는 괴로움인가? 

여기에 어떠한 이들이 있어, 마음에 들지 않고, 원하지 않으며, 매혹적이지 않은 모습(色),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지녔거나, 혹은 다시 어떠한 이들이 있어, 이쪽의 불이익을 원하거나, 손해를 원하거나, 어려움을 원하거나 바로 그들과 만나거나, 동거하거나, 엮이거나, 관계를 맺는 것, 바로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불린다.

 

130.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인가?

여기에 어떠한 이들이 있어, 마음에 들고, 원하며, 즐겁게 하는 모습(色),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지녔거나, 혹은 다시 어떠한 이들이 있어, 이쪽의 이로움을 원하고, 이익을 원하고, 즐거움을 원하고, 안온하게 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러한 이들 즉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동료, 친족, 친척들과 헤어지거나, 동거하지 못하거나, 엮이지 못하거나,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을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이라고 불린다.

 

131. 비구들이여, 무엇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의 법을 지닌 뭇삶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바램)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나는 법이 없다면(태어남이 없기를)!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남이 오지 말았으면(않기를)!' 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늙기 마련인(늙음의 법을 지닌)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바램)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늙음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늙음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 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병들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난다. '오, 우리에게 병듦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그 병듦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죽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욕망이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죽음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우리에게 죽음이 오지 않기를!' 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번민을 하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욕망이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번민하는 법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우리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번민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라고 불린다.

 

132. 비구들이여, 무엇이 간략히 말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괴로움인가? 
물질적 요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느낌작용(감수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지각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형성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식별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이다. 이것들이 간략히 말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괴로움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립니다.

 

133.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게 하는 갈애로서, 기쁨과 탐냄과 더불어 여기저기서 즐거워하는 것으로서,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있음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는 것(있지 않음에 대한)에 대한 갈애이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그런 갈애(愛)는 일어날 때 어디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어디에 자리 잡는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무엇이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인가? 

눈(眼)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귀(耳)는 세상에 있는 ··· 코(鼻)는 세상에 있는 ··· 혀(舌)은 세상에 있는 ··· 몸(身)은 세상에 있는 ··· 마음(意)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형상(色)은 세상에 있는 ··· 소리(聲)은 세상에 있는 ··· 냄새(香)은 세상에 있는 ··· 맛(味)는 세상에 있는 ··· 감촉(觸)은 세상에 있는 ··· 법(法)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눈의 의식(眼識)은 세상에 있는 ··· 귀의 의식(耳識)은 세상에 있는 ··· 코의 의식(鼻識)은 세상에 있는 ··· 혀의 의식(舌識)은 세상에 있는 ··· 몸의 의식(身識)은 세상에 있는 ··· 마음의 의식(意識)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감각접촉(眼觸)은 세상에 있는 ··· 귀의 감각접촉(耳觸)은 세상에 있는 ··· 코의 감각접촉(鼻觸)은 세상에 있는 ··· 혀의 감각접촉(舌觸)은 세상에 있는 ··· 몸의 감각접촉(身觸)은 세상에 있는 ··· 마음의 감각접촉(意觸)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코의 감각접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마음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형상의 인식(色想)은 세상에 있는 ··· 소리의 인식(聲想)은 세상에 있는 ··· 냄새의 인식(香想)은 세상에 있는 ··· 맛의 인식(味想)은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의 인식(觸想)은 세상에 있는 ··· 법의 인식(法想)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형상에 의한 의도(色思)는 세상에 있는 ··· 소리에 의한 의도(聲思)는 세상에 있는 ··· 냄새에 의한 의도(香思)는 세상에 있는 ··· 맛에 의한 의도(味思)는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에 의한 의도(觸思)는 세상에 있는 ··· 법에 의한 의도(法思)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형상에 의한 갈애(색애.色愛)는 세상에 있는 ···  소리에 의한 갈애(성애.聲愛)는 세상에 있는 ··· 냄새에 의한 갈애(향애.香愛)는 세상에 있는 ··· 맛에 의한 갈애(미애.味愛)는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에 의한 갈애(촉애.觸愛)는 세상에 있는 ··· 법에 의한 갈애(법애.法愛)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형상에 의한 거친 사유(色尋)는 세상에 있는 ··· 소리에 의한 거친 사유(聲尋)는 세상에 있는 ··· 냄새에 의한 거친 사유(香尋)는 세상에 있는 ··· 맛에 의한 거친 사유(味尋)는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에 의한 거친 사유(觸尋)는 세상에 있는 ··· 법에 의한 거친 사유(法尋)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형색에 의한 미세한 사유(色伺)는 세상에 있는 ··· 소리에 의한 미세한 사유(聲伺)는 세상에 있는 ··· 냄새에 의한 미세한 사유(香伺)는 세상에 있는 ··· 맛에 의한 미세한 사유(味伺)는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에 의한 미세한 사유(觸伺)는 세상에 있는 ··· 법에 의한 미세한 사유(法伺)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일어날 때 여기에서 일어나고,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얼어남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134.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이러한 갈애로부터 남김없는 탐냄의 떠남, 소멸, 포기, 버림, 해탈, 무집착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갈애는 버려질 때 어디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무엇이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인가? 

눈(眼)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귀(耳)는 세상에 있는 … 코(鼻)는 세상에 있는 ··· 혀(舌)는 세상에 있는 ··· 몸(身)은 세상에 있는 ··· 마음(意)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형상(色)은 세상에 있는 … 소리(聲)는 세상에 있는 … 냄새(香)는 세상에 있는 … 맛(味)은 세상에  있는 … 감촉(觸)은 세상에 있는 … 법(法)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눈의 의식(眼識)은 세상에 있는 ··· 귀의 의식(耳識)은 세상에 있는 ··· 코의 의식(鼻識)은 세상에 있는 ··· 혀의 의식(舌識)은 세상에 있는 ··· 몸의 의식(身識)은 세상에 있는 ··· 마음의 의식(意識)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눈의 감각접촉(眼觸)은 세상에 있는 ··· 귀의 감각접촉(耳觸)은 세상에 있는 ··· 코의 감각접촉(鼻觸)은 세상에 있는 ··· 혀의 감각접촉(舌觸)은 세상에 있는 ··· 몸의 감각접촉(身觸)은 세상에 있는 ··· 마음의 감각접촉(意觸)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코의 감각접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 마음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형상의 인식(色想)은 세상에 있는 ··· 소리의 인식(聲想)은 세상에 있는 ··· 냄새의 인식(香想)은 세상에 있는 ··· 맛의 인식(味想)은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의 인식(觸想)은 세상에 있는 ··· 법의 인식(法想)은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형상에 의한 의도(色思)는 세상에 있는 ··· 소리에 의한 의도(聲思)는 세상에 있는 ··· 냄새에 의한 의도(香思)는 세상에 있는 ··· 맛에 의한 의도(味思)는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에 의한 의도(觸思)는 세상에 있는 ··· 법에 의한 의도(法思)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형상에 의한 갈애(색애.色愛)는 세상에 있는 ···  소리에 의한 갈애(성애.聲愛)는 세상에 있는 ··· 냄새에 의한 갈애(향애.香愛)는 세상에 있는 ··· 맛에 의한 갈애(미애.味愛)는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에 의한 갈애(촉애.觸愛)는 세상에 있는 ··· 법에 의한 갈애(법애.法愛)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형상에 의한 거친 사유(色尋)는 세상에 있는 ··· 소리에 의한 거친 사유(聲尋)는 세상에 있는 ··· 냄새에 의한 거친 사유(香尋)는 세상에 있는 ··· 맛에 의한 거친 사유(味尋)는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에 의한 거친 사유(觸尋)는 세상에 있는 ··· 법에 의한 거친 사유(法尋)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형색에 의한 미세한 사유(色伺)는 세상에 있는 ··· 소리에 의한 미세한 사유(聲伺)는 세상에 있는 ··· 냄새에 의한 미세한 사유(香伺)는 세상에 있는 ··· 맛에 의한 미세한 사유(味伺)는 세상에 있는 ··· 감각접촉에 의한 미세한 사유(觸伺)는 세상에 있는 ··· 법에 의한 미세한 사유(法伺)는 세상에 있는 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버려질 때 여기에서 버려지고, 소멸할 때 여기에서 소멸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135.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비구들이여, 오직 이것,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삶),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견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으로부터의) 떠남(출리)에 대한 사유, 성내지 않음에 대한 사유(분노하지 않는 사유), 해치지 않음에 대한 사유(비폭력의 사유)이다. 비들이여, 이것이 바른 사유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 이간하는 말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 거친(욕설)말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 꾸며대는 말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말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인가?
비구들이여,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 주지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 음행에 대해 삿된 행위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행위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삶)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들은 삿된 삶(생계)을 버리고 올바른 삶으로 생활을 영위(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생계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다잡아 힘을 쓴다. 이미 생겨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끊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다잡아 힘을 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을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다잡아 힘을 쓴다. 이미 생겨난 선한 법을 바로 세우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며, 증장하고, 풍성케 하며, 닦고,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다잡아 힘을 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정진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이어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마음챙김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伺]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 희열]과 즐거움[樂.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과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 ․ 正知]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경험하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라고 하는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에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삼매라고 불린다.

 

136. 이렇게 안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밖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안팎으로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앎(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이 있을 때 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법을 따라가며(이어보면서) 보면서 법에 머문다.    

 

137.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렇게 칠 년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집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不還果]이다.

 

칠 년은 그만 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렇게 육년을 닦는 사람에게 ··· 오 년을 ··· 사 년을 ··· 삼 년을 ··· 이 년을 ··· 일 년을 ··· 일 년는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렇게 일곱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집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이다. 일곱 달은 그만 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여섯 달을 ··· 다섯 달을 ··· 네 달을 ··· 세 달을 ··· 두 달을 ··· 한 달을 ··· 보름을 ··· 보름은 그만 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렇게 칠 일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집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이다.

 

138.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고통[고(苦)]과 고뇌[우(憂)]의 사람짐을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라고 설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하였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마음챙김의 확립 경(M10)이 끝났다.

제1장 근본 법문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