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94. 고따무카 경(ghoṭamukhasuttaṃ)
41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우데나 존자는 바라나시에서 케미야 망고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고따무카 바라문이 어떤 볼일이 있어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고따무카 바라문은 산책을 하면서 이리저리 걷다가 케미야 망고 숲으로 갔다. 그때 우데나 존자는 노지에서 걷고 있었다. 그러자 고따무카 바라문은 우데나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우데나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우데나 존자의 한쪽 곁에서 따라서 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사문이여, 여기서 나는 '법다운 유행승은 없다(법에 부합하는 출가의 삶은 없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존자 같은 분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또는 여기서 그런 법을 가진 자를 보지 못해서일 것입니다."라고.
*고따무카 바라문(Ghotamukha brahmana)은 본경에만 언급되고 있다. 본 경에서 그는 승가를 위해서 승원을 지어 보시를 했다. 주석서에 의하면 그런 이러한 공덕으로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남을 알아보는 기술(janana-sippa)을 전수 받은 자들은 아무도 천상에 태어나지 못했다. 그는 그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승가에 보시한 것 때문인 줄을 알고서는 인간으로 변장을 하여 천상에서 내려와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던 여동생에게 그가 재물을 감추어두었던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비구 승가에 보시하도록 하여 여동생도 천상에 태어나게 만들었다고 한다."(MA.iii.413-414)
이렇게 말했을 때, 우데나 존자는 걸음을 멈추고 거처로 들어간 뒤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고따무카 바라문도 걸음을 멈추고 거처로 들어간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고따무카 바라문에게 우데나 존자는 "바라문이여, 의자들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앉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우데나 존자가 환영해주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앉겠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초대받지 않고도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고따무카 바라문은 어떤 낮은 자리를 잡아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고따무카 바라문은 우데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사문이여. 여기서 나는 '법다운 유행승은 없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존자 같은 분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또는 여기서 그런 법을 가진 자를 보지 못해서일 것입니다."라고.
"만약, 바라문이여, 그대가 나의 말에 동의하고 싶으면 동의하고, 거부하고 싶으면 거부하고, 내가 말한 것의 의미를 못하겠으면 거기서 '존자여, 어떻게 이렇습니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나에 더 되물어 본다면, 이렇게 함으로써 여기서 우리가 우정의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데나 존자의 말씀에 동의하고 싶으면 동의하고, 거부하고 싶으면 거부하고, 우데나 존자가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모르면 거기서 '존자여, 어떻게 이렇습니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우데나 존자에게 더 되물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기서 우리가 우정의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13. "바라문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넷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자입니다.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자입니다.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자입니다.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입니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갈애가 없는 자, 꺼진 자(모든 오염원들이 제거된 자), 청량한 자(평온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대의 마음에 듭니까?"
"우데나 존자시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이 사람은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시여,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도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시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도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시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이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갈애가 없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문다.'라는 이 사람이 저의 마음에 듭니다."
"바라문이여, 이 세 사람은 왜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을 주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남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을 주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자신과 남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을 주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시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이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갈애가 없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문다.'라는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자신과 남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을 주지 않고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저의 마음에 듭니다."
414. "바라문이여, 이런 두 가지 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둘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어떤 무리는 아내와 자식을 추구하고, 하인과 하녀를 추구하고, 전답과 땅을 추구하고, 금과 은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바라문이여, 여기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지 않은 어떤 무리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하인과 하녀를 버리고, 전답과 땅을 버리고, 금과 은을 버리고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런 이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입니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갈애가 없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뭅니다. 여기 바라문이여, 그대는 아내와 자식을 추구하고, 하인과 하녀를 추구하고, 전답과 땅을 추구하고, 금과 은을 추구하는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진 무리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하인과 하녀를 버리고, 전답과 땅을 버리고, 금과 은을 버리고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지 않은 무리 중에서 어떤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을 많이 봅니까?"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그는 지금‧여기에서 갈애가 없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뭅니다. 나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하인과 하녀를 버리고, 전답과 땅을 버리고, 금과 은을 버리고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지 않은 무리 가운데서 이런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도 바라문이여, 이제 그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문이여. 여기서 나는 법다운 유행승은 없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존자 같은 분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또는 여기서 그런 법을 가진 자를 보지 못해서일 것입니다.'라고.
"우데나 존자시여, 참으로 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배우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법다운 유행승은 있다.'라고 저는 여기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데나 존자께서는 이렇게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우데나 존자께서 저에게 간략하게 말하고 상세히 분석하지 않은 네 가지 사람에 대해 우데나 존자께서 연민으로 저에게 이 네 가지 사람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여."라고 고따무카 바라문은 우데나 존자에게 대답했다. 우데나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415.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나체 수행자이고, 품행에 얽매이지 않는 자이고, 음식을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음식을 주려고] '오시오.'라고 하면 가지 않고, [음식을 주려고] '서시오.'라고 하면 서지 않고, 주어지지 않은 것과 내몫으로 배당되지 않은 것과 초대되지 않은 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그릇의 가장자리로부터 받지 않고, 항아리의 가장자리로부터 받지 않고, 문지방을 넘어서 주는 것, 막대기를 넘어서 주는 것, 절구공이를 넘어서 주는 것, 두 사람이 먹고 있을 때 주는 것, 임신부가 주는 것,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가 주는 것, 남자에게 안긴 여자가 주는 것을 받지 않고,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서 받지 않고, 개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 받지 않고, 파리 떼가 날라 다니는 곳에서 받지 않고, 생선과 고기를 받지 않고, 술과 와 발효하여 끓인 것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는 한 집에 가서 한 입의 음식을, 두 집에서 두 입의 음식을 ··· 일곱 집에서 일곱 입의 음식을 받는 자입니다. 작은 그릇 한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작은 그릇 두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 작은 그릇 일곱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합니다. 하루에 한 번 음식을 먹고, 이틀에 한 번 음식을 먹고 ··· 일주일에 한 번 음식을 먹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뭅니다. 그는 채소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생쌀을 먹기도 하고, 부드러운 뼈를 먹기도 하고, 수초를 먹기도 하고, 왕겨를 먹기도 하고, 쌀 씻은 물을 먹기도 하고, 깻가루를 먹기도 하고, 풀을 먹기도 하고, 소똥을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합니다.
그는 삼베로 만든 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시체를 싸맨 헝겊으로 만든 옷도 입고, 분소의로 만든 옷도 입고, 나무껍질로 만든 옷도 입고, 영양 가죽옷도 입고, 영양 가죽 외투도 입고, 꾸사풀로 만든 옷도 입고, 뱀 껍질로 만든 담요도 입고, 올빼미털로 만든 옷도 입습니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고행을 실천하는 자여서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고, 앉는 것을 거부하는 자여서 똑바로 서기도 하고, 쪼그려 앉는 정진을 실천하는 자여서 쪼그려 앉기도 하고, 가시에 기대는 자여서 가시로 된 침상을 사용합니다. 저녁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은 식의 다양한 방법으로 몸을 괴롭히는 고행을 실천하며 머뭅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416.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양 도살자, 돼지 도살자, 새 잡는 사람, 사슴 사냥꾼, 사냥꾼, 어부, 도둑, 도둑을 죽이는 집행관, 죄수, 또는누구든지 잔인한 행위를 하는 다른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417.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관정의 의식을 치르고(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거나 큰 재력을 가진 바라문입니다. 그는 도시의 동쪽에 새로운 사당을 짓게 하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거친 가죽옷을 입고 버터와 기름을 몸에 바르고 사슴뿔로 등을 긁으면서 첫째 왕비와 왕실의 바라문 제관과 함께 사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거기서 적당하고 황갈색의 땅위에 자리를 만들게 합니다. 같은 색깔의 송아지를 가진 한 마리의 암소의 첫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을 왕이 먹습니다. 두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을 왕비가 먹습니다. 세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을 왕실의 바라문 제관이 먹습니다. 네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은 불에 헌공합니다. 나머지는 송아지가 먹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황소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젖을 땐 숫송아지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젖을 땐 암송아지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암염소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숫양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말들을 도살하라. 제사기둥을 위해서 이만큼의 나무를 베어라. 제사풀로 쓰기 위해서 이만큼의 다르바 풀을 베어라.’라고. 그러면 그의 하인이나 심부름꾼이나 일꾼들은 처벌을 두려워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눈물을 흘리고 한탄하면서 제사를 위한 이러한 여러 준비를 합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418. 바라문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은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이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갈애가 없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문다.'라는 사람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그는 이 세간의 모든 중생들, 즉 마라들, 범천들, 축생들, 사문들, 바라문들, 천신및 인간들에게 스스로 철저히 알았고, 겪어 알아, 갖춘 것을 널리 알립니다. 그는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냅니다.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습니다. 그는 이 법을 듣고서 여래에게 믿음을 가집니다. 그는 이런 믿음을 구족하여 이렇게 숙고합니다. ‘재가의 삶이란 번잡하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완전무결하고 청정무구한 잘 닦여진 자개껍질과 같은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하리라.’라고. 그는 나중에 재산이 적건 많건 간에 모두 다 버리고, 일가친척 또한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이렇게 출가하여 비구들의 학습계목을 갖춘 그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몽둥이를 내려놓았고 칼을 내려놓았고, 모든 살아있는 중생들을 향하여 관대하고 자비한 마음으로 머뭅니다.
그는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준 것만을 받는 자이고, 준 것만을 받으려고 하는 자이고, 스스로 훔치지 않는 청정한 존재로 머뭅니다.
그는 범행(梵行) 이 아닌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범행을 닦는 자입니다. 독신자이고, 저속한 성행위를 멀리 떠납니다.
그는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자이고,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고, 세상을 속이지 않습니다(세상을 위해 진실을 말합니다).
그는 이간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이간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여기서 듣고서 이들을 이간하려고 저기서 말하지 않습니다. 저기서 듣고서 저들을 이간하려고 여기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는 이간된 자들을 합치고 단결을 가져오는 자입니다. 화합을 좋아하고 화합을 기뻐하고 화합을 즐기며 화합하게 하는 말을 합니다.
그는 거친 말(욕설)을 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친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유순하고 귀에 즐겁고 사랑스럽고 가슴에 와 닿고 예의바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그런 말을 합니다.
그는 꾸며대는 말을 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꾸며대는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적절한 때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고, 이익이 있는 것을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합니다. 적절한 때에, 근거를 갖춘, 절제된, 이익되는 말을 합니다.
그는 씨앗류와 초목류을 손상시키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하루 한끼만 먹습니다. 밤에 먹은 것을 여의고 때 아닌때에 먹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춤, 노래, 음악, 연극을 관람하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화환을 두르고 향과 화장품을 바르고 장신구로 꾸미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높고 큰 침상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금과 은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요리하지 않은 날곡식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생고기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여인이나 어린 소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하인과 하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염소와 양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닭과 돼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코끼리, 소, 말 암말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농토나 토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심부름꾼이나 전령으로 가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사고파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저울을 속이고 돈을 속이고 치수를 속이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뇌물을 주고, 속이고, 사기치고, 정직하지 않은 어떠한 종류의 부정한 행위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그는 남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거나 또는 누군가를 강제하고 구속하여 폭력을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납니다.
그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삶을 지탱할 정도의 (탁발)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자구(資具)들만 몸에 지니고 갑니다. 예를 들면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자신의 양 날개만으로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비구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삶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자구들만 몸에 지니고 갑니다.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갖춘 그는 안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즐거움)을 경험합니다.
419. 그는 눈으로 형상을 보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세세한 부분상(受)울 붙잡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의 눈의 근(眼根)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간탐과 고뇌)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습니다. 그는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그는 혀로 맛을 맛보면서 ··· 그는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그는 마음으로 법(마음현상)을 인식하면서 그 표상 붙잡지 않으며, 또 뒤따르는 세세한 부분상을 붙잡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의 마음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습니다.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의 근의 보호를 갖춘 그는 안으로 더럽혀지지 않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는 나아갈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正知] 행합니다. 앞을 볼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구부릴 때도 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먹을 때도 마실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대소변을 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걸으면서 서면서 앉으면서 잠들면서 잠을 깨면서 말하면서 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어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비어 있는 장소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합니다.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머뭅니다.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악의의 오점 [악의와 성냄]을 제거하여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뭅니다.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여 악의의 오점[악의와 성냄]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이 없이 머뭅니다. 광명상(光明想)을 가져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해태와 혼침 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뭅니다.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뭅니다.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건너서 머뭅니다. 선한 법들에 아무런 의문이 없어서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그는 마음의 오염원이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들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하여,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다시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다시 그는 기쁨을 떠난 평정이 머무는,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正念 ‧ 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라고 하는 제3선 (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다시 그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420.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해 냅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계),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으며,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으며,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해냅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중생들의 죽음과 삶에 관련한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天眼)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립니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니어 삿된 견해의 업(사견업.邪見業)을 받았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났다. 혹은 다시, 그러나 이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바른 견해의 업을 받았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립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다. ’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쾌락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존재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압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이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갈애가 없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문다.'라고 불립니다."
421. 이렇게 말했을 때, 고따무카 바라문이 우데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이롭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경이롭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우데나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우데나 존자께 귀의하옵고 또한 그 가르침(법)에 귀의하옵고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우데나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바라문이여, 그대는 나를 의지처로 삼지 마십시오. 내가 의지처로 삼은 오직 그분 세존을 의지처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우데나 존자여,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고따마 존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바라문이여,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는 완전히 열반하셨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만약에 제가 그분 고따마 존자께서 십 요자나 떨어진 곳에 계신다고 듣는다면, 저는 아라한‧정등각이신 그분 고따마 존자를 친견하기 위해서 십 요자나를 갈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그분 고따마 존자께서 이십 요자나 떨어진 곳에 ··· 삼십 요자나 떨어진 곳에 ··· 사십 요자나 떨어진 곳에 ··· 오십 요자나 떨어진 곳에 계신다고 듣는다면, 저는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고따마 존자를 친견하기 위해서 오십 요자나도 갈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그분 고따마 존자께서 백 요자나 떨어진 곳에 계신다고 듣는다면, 저는 아라한‧정등각이신 그분 고따마 존자를 친견하기 위해서 백 요자나도 갈 것입니다.
우데나 존자시여, 그분 고따마 존자께서 완전한 열반하셨다 해도 저희는 의지처인 그분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우데나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우데나 존자여, 앙가의 국왕은 저에게 매일 지속적으로 보시합니다. 저는 그중에서 일부를 우데나 존자께 매일 지속적으로 보시하겠습니다."
"바라문이여, 앙가의 왕은 그대에게 매일 지속해서 하는 보시는 얼마나 됩니까?"
"우데나 존자여, 오백 까하빠나입니다."
"바라문이여, 우리가 금과 은을 받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받을 수 없습니다)."
"우데나 존자에게 그것이 적절하지 않다면 우데나 존자를 위해 승원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대가 나에게 승원을 지어주고자 한다면, 빠딸리뿟따에 승가를 위한 강당(집회소)을 지어주십시오."
"우데나 존자께서는 저에게 승가에 보시할 것을 권하시니 저는 더욱 즐겁고 만족합니다. 우데나 존자여, 그런 저는 이런 지속적인 보시 그리고 이어지는 지속적인 보시로써 빠딸리뿟따에 승가를 위한 강당을 짓겠습니다."
그래서 고따무카 바라문은 이런 지속적인 보시와 또 다른 지속적인 보시로써 빠딸리뿟따에 승가를 위한 강당을 지었다. 그것이 지금 '고따무키'(ghoṭamukhī.고따무카의 것)라고 불린다.
*빠딸리뿟따(Pataliputta)는 지금 인도 비하르 주의 주도인 빠뜨나(Patna)의 옛 이름이다. 디가 니까야 제2권 대반열반 경(D16)에는 빠딸리 마을을 확장하여 빠딸리뿟따 도시가 건설되는 것이 언급되고 있으며, 세존께서는 이 도시는 번창한 최고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존의 말씀대로 그 후 빠딸리 마을은 빠딸리뿟따로 불리게 되며 마우리야 왕조와 굽따 왕조 등의 역대 인도 통일 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고따무카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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