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98. 와셋타 경(vāseṭṭhasuttaṃ)
45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잇차낭갈라에서 잇차낭갈라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주 잘 알려진 바라문의 대부호들이 잇차낭갈라에 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짱끼 바라문, 따룩카 바라문, 뽁카라사띠 바라문, 자눗소니 바라문, 또데야 바라문과 다른 아주 잘 알려진 많은 바라문의 대부호들이었다. 그 무렵 젊은 바라문 와셋타와 바라드와자가 산책을 하면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어떻게 바라문이 되는가?'라는 토론이 그들 간에 벌어졌다. 젊은 바라문 바라드와자는 이렇게 말했다.
"존자여, 모계와 부계의 양쪽 모두로부터 순수혈통을 이어왔고, 일곱 선대 동안 태생에 관한 한 멸시당하지 않고 비난받을 일이 없을 때, 존자여, 이만큼 바라문이 됩니다(그를 일러 바라문이라 합니다)."라고.
젊은 바라문 와셋타는 이렇게 말했다.
"존자여, 계와 실천을 구족할 때, 존자여, 이만큼 바라문이 됩니다."라고.
젊은 바라문 바라드와자는 젊은 바라문 와셋타를 설득할 수 없었고, 젊은 바라문 와셋타는 젊은 바라문 바라드와자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러자 젊은 바라문 와셋타가 젊은 바라문 바라드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라드와자 존자여, 삭까의 자손이고, 삭꺄 가문에서 출가한 사문 고따마가 잇차낭갈라에서 잇차낭갈라 숲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그분 고따마 존자에게는 이런 좋은 명성이 퍼져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우리가 찾아 갑시다, 바라드와자 존자여, 사문 고따마에게 갑시다. 가서 사문 고따마에게 이 뜻을 질문합시다. 사문 고따마가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대로 명심합시다."라고.
"알겠습니다, 존자여."라고 젊은 바라문 바라드와자는 젊은 바라문 와셋타에게 대답했다.
455. 젊은 바라문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아서 젊은 바라문 왓세타는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저희 둘은 세 가지 베다에 통달했다고 인정받았고, 또 스스로도 그렇다고 인정합니다.
저는 뽁카라사띠 바라문의 제자이고, 이 사람은 따룩카 바라문의 제자입니다.
세 가지 베다에 통달한 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저희는 모두 완전히 알았습니다.
언어와 문법에도 그러하며, 토론에 있어서도 스승들과 버금갑니다. 그런 저희에게 태어남에 대한 토론에서 다툼이 있습니다, 고따마여.
눈 밝은 분께서는 이렇게 아십시오. 바라드와자는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고 말하고,
저는 행위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고 말합니다.
저희 둘은 그것들에 대해 서로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깨달으신 분이라 널리 알려진 존자께 질문드리러 왔습니다.
달이 점점 차올라서 만월이 되면 사람들이 합장을 하듯
예배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고따마님을 공경하고 귀의합니다.
세상에서 눈을 갖추어 계신 고따마께 저희는 질문드립니다.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됩니까? 아니면 행위에 의해 바라문이 됩니까?
바라문에 대해 알기를 바랍니다. 알지 못하는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456. "(와셋타여라도 세존이 말함) 생명체들의 태생은 각각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의 차이를 순서대로 있는 그대로 그대들에게 설명하겠다.
풀과 나무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비록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지만(알지 못하지만)
그들의 태생은 특징이 있다. 그들의 태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태어남은 제각각이다).
*"'풀과 나무(tina-rukkha)'라고 하셨다. 먼저 업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anupadinnaka-jti)에 대해 설명하시고, 나중에 업에서 태어난 것(upadinnaka-jati)에 대해서 설명하실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태생의 분류(jati-bheda)에 대해서 분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MA.iii.433)
*"'우리는 풀이다, 우리는 나무다.'라고 이렇게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MA.iii.433)
*풀의 종류가 다르고 나무의 종류가 다르다. 풀 가운데서도 야자와 코코넛 야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태생(jati) 때문에 다르다는 것은 자신이 인정하거나 혹은 남이 지칭하지 않아도 종류가 다르다고 특별히 알려져 있다. 만약에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인정하거나 남이 지칭하지 않아도 무사 계급의 사람과 농민 계급의 사람과 천민 계급의 사람과는 다르게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MA.iii.433-434)
그 다음에 나방을 비롯하여 메뚜기와 그리고 개미에 이르기까지도 알아야 한다.
그들의 태생은 특징이 있다. 그들의 태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작든 크든 네발 짐승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들의 태생은 특징이 있다. 그들의 태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등이 길고 배로 기어 다니는 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들의 태생은 특징이 있다. 그들의 태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물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어류)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들의 태생은 특징이 있다. 그들의 태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허공을 날아다니는 날개가 있는 새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들의 태생은 특징이 있다. 그들의 태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 태생은 태생에 따른 특징이 다르지만
사람은 태생에 따른 이러한 특징이 다른 것이 없다.
머리카락에도 없고 머리나 귀나 눈이나
입이나 코나 입술이나 눈썹에도 없고
목이나 어깨나 배나 등이나
엉덩이나 가슴이나 항문이나 생식기에도 없고
손이나 발에도 손가락이나 손톱에도
종아리나 허벅지에도 피부 빛이나 소리에도 없다.
다른 태생에서처럼 인간은 태생에 따른 특징이 없다."
457. "사람의 몸에서는 이런 다른 점이 없다.
사람의 몸에서 구별은 단지 명칭에 있을 뿐이다.
*"'명칭(vokara)'은 다른 점(nanatta)을 말한다. 동물들(tiracchana)은 모태에 들 때부터 머리카락 등 몸의 형태가 다르지만 바라문 등의 경우에는 각자의 몸에 그런 다른 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가운데서 바라문 계급이니 무사 계급이니 하는 구별이 있는데, 그 구별은 단지 명칭에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MA.iii.435)
*사람들에서 구성요소(삶을 구성하는 행위 즉 직업)를 지시하여 불린다는 것이다.
사람 가운데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는 농부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농사를 지으면서'로 옮긴 원문은 go-rakkha인데 이것은 소치기 혹은 목축업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서에서 "여기서 gorakkha는 들판을 보호하는 것(kehtta-rakkha) 즉 농사 일(kasi-kamma)을 말한다. 여기서 go(소)는 땅(patthavi)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MA.iii.435)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 가운데 제각각의 기술로써 살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는 장인(기술지)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사람 가운데 장사로써 살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는 상인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사람 가운데 남의 일을 해 주면서 사는 자는 누구든지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는 하인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사람 가운데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훔친 것으로) 사는 자는 누구든지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는 도둑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사람 가운데 활쏘기로 살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는 무사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사람 가운데 사제의 직책으로 살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는 제관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사람 가운데 마을과 왕국을 통치하는 자는 누구든지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는 왕이지 바라문이 아니다.
나는 모태나 혈통 때문에 바라문이라 말하지 않는다(자궁에서 생긴 바라문, 태어남에서 만들어진 바라문을 말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존자이라는 이름이다(존자라고 불릴 뿐이다).
아무 것도 없고 집착에서 떠난 사람(집착하지 않는 자),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고 부른다."
458. "모든 족쇄를 잘라 동요하지(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집착을 극복하고(넘어서고), 풀려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열 가지 족쇄(dasa-vidha-samyojana)를 말한다."(MA.iii.437)
*"'동요하지 않는다(na paritassati)'라는 것은 갈애에 기인한 동요(tanha-paritassati) 때문에 동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MA.iii.437)
*"'집착을 극복한 자(sangati-ga)'이란 감각적 쾌락의 집착(raga-sanga)등을 극복한(atikkanta) 사람을 말한다."(MA.iii.437)
*"'풀려난 자(visamyutta)'란 네 종류의 모태(태생, 난생, 습생, 화생) 혹은 모든 오염원(kilesa)에서 풀려난 자를 말한다."(MA.iii.437)
가죽 끈, 채찍, 고삐, 굴레를 잘라버리고
빗장을 들어올린 깨달은 자,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가죽 끈(naddhi)'이란 적의(upanaha)를 뜻하고, '채찍(varatta)'이란 갈애(tanham)을 뜻한다. '고삐(sandana)'란 올가미(yuttapasa)를 말하는데 이것은 견해에 묶여 있음(ditthi-pariyutthana)과 동의어이다. '굴레(sahanukkama)'에서 올가미(pasa)에 들어가게 만드는 매듭(pavesana-ganthi)를 말한다. 여기서 굴레는 견해의 잠재성향(ditthanusaya)을 뜻한다."(MA.iii.437)
*"'빗장(paligha)'이란 무명을 말한다."(MA.iii.437)
비난과 폭력과 구속을 성내지 않고 견뎌내며(용서하며)
인내력으로 무장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여기서 '인내력'은 khanti-bala를 옮긴 것이고, '무장한 자'는 bala-anik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내력으로 무장한 자(khantibala balanika)'라는 것은 인내력을 항상 겸비하고 있다(adhivasana-khanti-bala)는 뜻이다. 인내력(khanti-bala)이 한 번만 생기는 것으로는 무장한다(bala-anika)고 하지 않고, 항상 계속해서(puna-ppunam) 생길 때 무장한다고 하기 때문이다."(MA.iii.437)
화내지 않고 서계를 가진, 계를 중시하고, 교만하지 않고
길들여졌고, 마지막 몸을 가진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여기서 '서계(vata)'란 두타행(dhutanga)을 말한다."(MA.iii.437)
연잎의 물처럼, 송곳 끝의 겨자 씨처럼(마치 물이 연잎에, 마치 겨자 씨가 송곳 끝에 달라붙지 않듯이)
감각적 쾌락들에 물들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지금·여기에서 자신에게 괴로움이 부서진 것을 꿰뚫어 아는 사람,
짐을 내려놓았고, 벗어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괴로움이 부서졌다(dukkhassa khaya)'는 것은 아라한과를 뜻하고, '꿰뚫어 안다(pajanati)'는 것은 증득하여(adhigama-vasena) 안다(janati)는 뜻이다."(MA.iii.438)
*"'짐을 내려놓은(panna-bhara)'이란 집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의 짐, 오염원의 짐, 업형성력의 짐, 얽어매는 감각적 쾌락의 짐(khandha-kilesa-abhisankhara-kamaguna-bhara)이라는 이러한 짐을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머문다는 말이다."(MA.iii.438)
심오한 지혜를 가진 현명한 사람, 길과 길 아닌 것에 능숙하며.
궁극의 이치를 터득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집 없이 유행하고, 원하는 것이 적은 자,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유정이나 무정의 모든 생명들에 대해 몽둥이를 내려놓은 사람,
죽이거나 죽이게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적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대적이지 않고, 몽둥이를 든 사람들 가운데 적멸에 들며,
집착하는 사람들 가운데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송곳 끝의 겨자씨처럼(마치 겨자 씨가 어떤 경우에도 송곳 끝에 달라붙지 않듯), 탐욕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이 소멸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459. "거칠지 않고 의미 있고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
누구에게도 화내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해치고자 하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긴 것이건 짧은 것이건,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깨끗한 것이건 더러운 것이건(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세상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갈망들이(갈애들이) 없는 사람,
갈망하지 않아 갈망들에서 벗어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더 이상 집착이 없고, 구경의 지혜를 가져 의심이 없는 사람,
불사(열반)의 실현을 성취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이 세상에서 공덕과 죄악의 두 가지 매듭을 모두 극복한 사람,
슬픔을 넘어서서 흠 없고 청정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두 가지 매듭(ubho sanga)'이라고 하셨다. '공덕(punna)'도 '죄악(papa)'과 마찬가지로 매듭(끈끈이)이다. 공덕은 천상(sagga)에 들러붙게 하고(laggapeti), 죄악(apunna)은 악처(apaya)에 들러붙게 하기 때문에 둘 다 매듭이라 부른다."(MA.iii.439)
티 없고 청정하고 밝고 깨끗한 달처럼
소망(즐거움)과 존재[有]가 완전히 부서진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이 늪과 진흙탕과(이 위험한 길과 위험한 곳) 윤회와 미혹을 건넌 사람,
건너서 저편에 닿은 선(禪)을 닦는 사람, 동요 없고, 의심이 없는 사람,
집착하지 않아서 고요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늪과 진흙탕과 윤회와 미혹'은 각각 palipatha, dugga, samsara, moh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바로 무지(avijja)를 두고 속인다는 뜻(visamvadak-attha)에서 '늪'이라 한다. 건너가기 아주 어렵기 때문에 '진흙탕'이라고 했고, 윤회하게 한다는 뜻에서 '윤회'라 했고, 미혹하다는 뜻에서 '미혹'이라 했다."(MA.iii.439)
*"네 가지 폭류를 건넜다는 말이다."(MA.iii.439)
*'선을 얻음(jihayi)'이란 대상을 명상하고 특상을 명상함에 의해 선을 얻었다는 뜻이다."(MA.iii.440)
*"'동요없음(aneja)'이란 갈애가 없는 것(nittanha)이다."(MA.iii.440)
*'집착하지 않아서 고용한 사람(anupadaya nibbuto)'란 더 이상 어떤 것도 취하지 않고 모든 오염원들이 소멸되어 적멸에 들었다는 말이다."(MA.iii.440)
여기서 감각적 쾌락들을 버린 뒤 집 없이 유행할 수 있는 사람,
감각적 쾌락과 존재를 완전히 부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여기서 갈애를 버린 뒤 집 없이 유행할 수 있는 사람,
갈애와 존재가 완전히 부서진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사람의 굴레를(속박을) 부수고 천상의 굴레를 극복한 사람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속박(yoga)'이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쾌락의 속박(panca-kamaguna-yoga)를 말하는데, 인간의 감각적 쾌락은 '인간의 속박(manusaka yoga)이고, 천상의 감각적 쾌락은 '천상의 속박(dibba yoga)이다."(MA.iii.440)
기뻐함과 싫어함을 버려 침착하고 집착이 없는 사람
세상을 완전히 정복한 영웅,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기뻐함(rati)'이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쾌락을 기뻐하는 것이고, '싫어함(arati)'이란 유익한 법을 닦는 것(kusala-bhavana)을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다."(MA.iii.440)
중생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완전히 아는 사람
집착이 없고 잘 가셨고 깨달은 분,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신들도 간답바들도 인간들도 그가 간 곳을 모르는 사람
번뇌가 다한 아라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이전에도 나중에도 중간에도(앞에도 뒤에도 중간에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
아무 것도 없고 집착에서 떠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황소이며, 가장 뛰어난 영웅, 대선인, 위대한 정복자
동요없고 묙욕했고 깨달은 분,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전생의 삶을 알고, 천상과 지옥을 보는 사람
그래서 태어남의 부서짐을 성취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460. "세상에서 이름과 성을 사용하는 것은 인습적인 것이고
임의로 생겨난 것이라서 여기저기에 사용된다.
*"이렇게 세존께서는 공덕(guna)의 측면에서 오직 번뇌가 다한 자가 바라문이라고 하시고,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고 천착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해 그것이 그들에게 사견, 아주 나쁜 사견이 됨을 보이시면서 '인습적인 것(samanna)이라는 이 게송을 말씀하신다."(MA.iii.441)
*"'임의로 생겨난 것이라서(samudagatam)'라고 하셨다. 이것은 각자 태어날 때에 친지들이 지어준 것이라서 만약 이렇게 짓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이 사람이 바라문이라거나 바르드와자라고 알지 못 할 것이다."(MA.iii.441)
[이것을] 모르는 자에게 오랫동안 그릇된 견해가 잠재하여
알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말한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라고.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바라문이 아닌 사람이 된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장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행위에 의해 하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도 된다.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왕도 된다.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있는 그대로 행위를 본다.
조건따라 생겨남(연기)을 보는 자이고, 업과 과보에 능통하다.
행위[業]에 의해 세상이 전개되고, 행위에 의해 인간이 이어진다.
중생은 행위에 묶여 있다. 마차 수레가 바퀴를 축에 고정하는 쐐기에 의해 나아가는 것처럼.
고행(종교적 삶)과 청정범행, 자기제어와 길들임(자제)
이것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 이런 사람이 최상의 바라문이다.
*'고행과 청정범행과 제어와 자제'는 각각 tapa, brahmacaniya, samyama, dam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행'이란 두타행의 고행(dhutanga-tapa)이고. '청정범행'이란 음행을 금하는 것(methuna-virati)이고, '제어'란 계행(sila)이고, '자제'란 감각 기관을 자제하는 것(indriya-dama)이다."(MA.iii.443)
*"즉 이렇게 수승하고(settha) 지극히 청정한(pansuddha) 최상의 존재(brahma-bhuta)인 범천의 행위(kamma)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는 듯이다."(MA.iii.443)
와셋타여, 이렇게 알아야 한다. 삼명을 갖춘 자, 고요하고 다시 존재됨이 다한 자가
현자들에게는 범천과 인드라로 알려진다."
461. 이렇게 말씀하시자 젊은 바라문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법)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희를 오늘부터 살아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와셋타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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