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99. 수바 경(subhasuttaṃ)
46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는 어떤 일로 사왓티에 있는 어떤 장자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또데야의 아들 수바 바라문 수행승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의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사왓티에는 아라한들이 있다.'라고. 참으로 우리가 오늘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방문하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존자여, 그분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십니다. 존자여, 그분 세존을 방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는 그 장자의 말을 듣고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또데야의 아들인 젊은 바라문 수바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가자는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만, 출가자는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라고. 여기에 대해서 고따마 존자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Subha māṇava Todeyyaputta)는 본경을 통해서 세존께 참된 바라문에 대해서 질문 드리고 있으며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재가신도가 된 사람이다. 이 젊은 바라문 수바가 세존의 입멸 후에 사왓티로 온 아난다 존자를 찾아가서 세존의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아난다 존자가 이것을 계·정·혜로 설명하고 있는 경이 『디가 니까야』 「수바 경」(D10) 이다.
그의 아버지 또데야(Todeyya) 바라문은 사왓티 근교의 뚜디 마을(Tudigāma)의 수장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또데야(Todeyya, 뚜디에 사는)라고 불렸다고 한다.(DA.ii.384) 그리고 또데야 바라문은 본경과 「와셋타 경」 (M98)과 『디가 니까야』 「삼명 경」 (D13) 등에서 짱끼 바라문등과 더불어 유명한 바라문으로 언급되고 있다.
463. "젊은 바라문이여, 이것에 대해 나는 분석해서(분별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나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말하지 않습니다(획일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나는 재가자에게도 출가자에게도 그들의 삿된 실천(닦음)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젊은 바라문이여, 재가자도 출가자도 삿되게 실천하는 자는 삿된 실천으로 원인으로 옳은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재가자에게도 출가자에게도 바른 실천을 나는 칭찬합니다. 참으로 젊은 바라문이여, 재가자도 출가자도 바르게 실천하는 자는 바른 실천을 원인으로 바른 방법인 유익한 법을 성취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가자는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어서 결실이 많다. 출가자는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어서 결실이 적다.'라고. 여기에 대해서 고따마 존자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이 경우에도 나는 분석해서(분별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나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말하지 않습니다(획일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이 있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이 있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이 있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이 있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어떤 것이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입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농사가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어떤 것이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입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농사가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어떤 것이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입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상업이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어떤 것이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입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상업이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464. 젊은 바라문이여, 마치 농사가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인 것처럼, 그와 같이 재가자의 삶도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줍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마치 농사가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인 것처럼, 그와 같이 재가자의 삶도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고 온갖 노력이 있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 줍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마치 상업이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인 것처럼, 그와 같이 출가자의 삶도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실패하면 적은 결실을 가져다 줍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마치 상업이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일인 것처럼, 그와 같이 출가자의 삶도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고 별다른 노력이 없지만, 성공하면 많은 결실을 가져다 줍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로 이끄는 다섯 가지 법들을 선언합니다."
"그대가 괜챦다면,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로 이끈다고 선언하는 그 다섯 가지 법을 이 대중들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
"고따마 존자여, 존자나 존자와 같은 분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저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젊은 바라문이여, 말해 보십시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진리를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로 이끄는 첫 번째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고행(종교적 삶)을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로 이끄는 두 번째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범행을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로 이끄는 세 번째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성전(만뜨라)의 공부를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로 이끄는 네 번째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베풂의 공덕을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로 이끄는 다섯 번째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이런 다섯 가지 법이 공덕의 성취와 유익함의 성취로 이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고따마 존자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부담이 되지 않는다(na kho me garu).'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현자인 체하는 자들(paṇḍita-paṭirūpakā)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들은 구절마다 단어마다 결점만(dosa)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의 현자들(ekanta-paṇḍitā)은 이야기를 듣고 이치에 부합하는 이야기는 칭송하고 이치에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성전의 구문과 뜻과 단어들에서 어긋나는 것은 바로잡아 설명해준다. 세존과 같은 최고의 현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앉아 계시거나 세존과 비슷한 분들이 앉아 계시는 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MA.ili.445~446)
*여기서 '진리(sacca)'란 말의 진리(vacī-sacca), 즉 진실한 말을 뜻한다.(MA.iii.446)
*여기서 '청정범행(brahmacariya)'이란 음행을 금하는 것(methuna-virati)을 말한다.(MA.iii.446)
*여기서 '성전을 공부하는 것(ajjhena)'이란 만뜨라를 외우는 것(manta-gahaṇa)을 말한다.” (MA.ii.446)
465. "그런데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 가운데 '나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을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알아 실현한 뒤에 그 결과를 선언한다.'라고 말하는 바라문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런데,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 가운데 '나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을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알아 실현한 뒤에 그 결과를 선언한다.'라고 말하는 스승이 한 명이라도, 일곱 선대의 스승에 이르기까지, 스승의 스승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런데,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 가운데 만뜨라를 만들었고, 만뜨라를 전승하여 준 바라문들의 조상인 선인들도, 암송되고 반복하고 말해진 것을 반복하고 암송된 것을 이어서 암송하는 지금의 바라문들 중에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웨사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바라드와자, 와셋타, 깟사빠, 바구 등도 '우리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을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알아 실현하여 그 결과를 선언한다.'라고 말했습니까?"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이렇게,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나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을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알아 실현한 뒤에 그 결과를 선언한다.'라고 말하는 바라문이 한 명도 없습니다. 바라문들 가운데 단 누구라도 '나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을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알아 실현한 뒤에 그 결과를 선언한다.'라고 이렇게 선언하는 스승이 한 명도 없고, 스승의 스승이 일곱 선대의 스승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없습니다. 만뜨라를 만들었고 만뜨라를 전승하여 준 바라문들의 조상인 선인들도, 암송되고 반복하고 말해진 것을 반복하고 암송된 것을 이어서 암송하는 지금의 바라문들 중에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웨사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바라드와자, 와셋타, 깟사빠, 바구 등도 '나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을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알아 실현한 뒤에 그 결과를 선언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머리를 꼬아 줄을 지어 꼬은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는 장님들은 앞의 사람도 보지 못하고 중간 사람도 보지 못하고 맨 뒤 사람도 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젊은 바라문이여, 머리르 꼰 장님의 비유를 생각하건데, 바라문들이 말한 것은 앞의 사람도 보지 못하고 중간 보지 못하고 맨 뒤 사람도 보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466. 이렇게 말씀하시자, 세존께서 장님의 비유로써 말한 것 때문에 화가 나고 불쾌한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는 세존께 거친 말을 하고자 세존을 경멸하고자, 세존께 '사문 고따마는 말은 잘못이다.'라고 말하고자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수바가 숲의 소유자이고 오빠만냐 성을 가진 뽁칼라사띠 바라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여기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에게 어울리는 차별적 지와 견의 성취와 실현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주장은 참으로 궁핍하고, 단지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공허하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어떻게 인간이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차별적 지와 견을 알거나 보거나 실현한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그런데 젊은 바라문이여, 수바가 숲의 소유자이고 오빠만냐 성을 가진 뽁칼라사띠 바라문은 모든 사문·바라문들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립니까?"
참으로 "고따마 존자여, 수바가 숲의 소유자이고 오빠만냐 성을 가진 뽁칼라사띠 바라문은 자신의 하녀인 뿐니까의 마음도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문·바라문들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리겠습니까?"
"예를 들면, 젊은 바라문이여,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은 검은 색과 흰 색을 볼 수 없고, 푸른 색을 볼 수 없고, 노란 색을 볼 수 없고, 황색을 볼 수 없고, 붉은 색을 볼 수 없고, 진홍색을 볼 수 없고, 고르고 울퉁불퉁한 것을 볼 수 없고, 별의 형상을 볼 수 없고, 달과 태양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검은 색과 흰색은 없고, 검은 색과 흰 색을 보는 사람도 없다. 푸른 색은 없고, 푸른 색을 보는 사람도 없다. 노란 색은 없고, 노란 색을 보는 사람도 없다. 붉은 색은 없고, 붉은 색을 보는 사람도 없다. 진홍 색은 없고 진홍 색을 보는 사람도 없다. 고르고 울퉁불퉁한 것을 보는 사람도 없다. 별의 형상은 없고, 별의 형상을 보는 사람도 없다. 달과 태양은 없고, 달과 태양을 보는 사람도 없다.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은 없다.'라고. 참으로 젊은 바라문이여, 그는 바르게 말하는 사람으로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고따마 존자여. 검은 색과 흰색은 있고, 검은 색과 흰색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푸른 색은 있고 푸른 색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란 색은 있고 노란 색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붉은 색은 있고 붉은 색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홍 색은 있고 진홍 색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르고 울퉁불퉁한 것은 있고, 고르고 울퉁불퉁한 것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별의 형상은 있고, 별의 형상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달과 태양은 있고, 달과 태양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은 없다.'라는 것은, 고따마 존자여, 바르게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젊은 바라문이여. 수바가 숲의 소유자이고 오빠만냐 성을 가진 뽁칼라사띠 바라문은 장님이고 눈이 없습니다. 참으로 그가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차별적 지와 견의 성취를 알거나 보거나 실현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467.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짱끼 바라문, 따룩카 바라문, 뽁카라사띠 바라문, 자눗소니 바라문, 그리고 그대의 부친인 또데야 바라문 같은 꼬살에 사는 대부호인 바라문들 가운데서 동의하에 말하는 것과 동의 없이 말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동의하에 말하는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들 가운데서 베다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과 베다의 가르침 아닌 것을 말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베다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들 가운데서 가늠하여(숙고하여) 말하는 것과 가늠하지 않고 말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가늠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들 가운데서 이익으로 이끄는 말을 하는 것과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 말을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이익으로 이끄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이러함이 있을 때, 수바가 숲의 소유자이고 오빠만냐 성을 가진 뽁칼라사띠 바라문은 동의하에 말했습니까, 동의 없이 말했습니까?"
"동의없이 말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베다의 가르침을 말했습니까, 베다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말했습니까?"
"베다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말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가늠하여 말했습니까, 가늠하지 않고 말했습니까?"
"가늠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이익으로 이끄는 말을 했습니까,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 말을 했습니까?"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 말을 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젊은 바라문이여, 이런 다섯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어떤 다섯 가지입니까? 감각적 쾌락의 장애와 성냄(악의)의 장애와 해태와 혼침의 장애와 후회의 장애와 의심의 장애입니다. 이것이, 젊은 바라문이여,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수바가 숲의 소유자이고 오빠만냐 성을 가진 뽁칼라사띠 바라문은 이런 다섯 가지 장애에 의해 가려지고 덮이고 장애가 되고 묶여 있습니다. 참으로 그가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차별적 지(知)와 견(見)을 알거나 보거나 실현할 것이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468. 젊은 바라문이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섯입니까?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입니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입니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입니다. ··· 혀로 인식되는 맛들입니다.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이것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수바가 숲의 소유자인 오빠만냐 성을 가진 뽁칼라사띠 바라문은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에 의해 욕심내고, 열중하고, 집착하고, 잘못됨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을 위한 지혜를 가지지 못한 자로서 즐깁니다. 참으로 그가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차별적 지와 견을 알거나 보거나 실현할 것이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마른 풀과 나무토막의 연료를 연(緣)하여 불을 일으킨 것과 마른 풀과 나무토막의 연료없이 불을 일으킨 것 중에 어떤 불이 불꽃과 색깔과 빛이 더 있겠습니까?"
"고따마 존자여, 만약 마른 풀과 나무토막의 연료 없이 불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 불이 불꽃과 색깔과 빛이 더 있겠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신통력 외에는 마른 풀과 나무토막의 연료없이 불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바라문이여, 마른 풀과 나무토막의 연료를 연(緣)하여 불이 일어나는 비유에 대해, 젊은 바라문이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연(緣)한 희열(기쁨)을 나는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젊은 바라문이여, 마른 풀과 나무토막의 연료 없이 불이 일어나는 비유에 대해, 젊은 바라문이여, 감각적 쾌락과 다르고(상관없고) 선하지 않은 법들과도 다른 희열을 나는 말합니다.
*'마른 풀과 나무토막의 연료를 연하여 일으킨 불(타오르는 불)(tiṇa-kaṭṭhupādānaṃ paṭicca aggi jalati)'은 연기와 재와 숯(dhūma-chārik-aṅgāra)이 있기 때문에 결점이 있듯이(sadosa),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조건으로(연하여) 일어난 희열은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근심(jāti-jarā-byādhi-maraṇa-soka) 등이 있기 때문에 결점이 있다. 그러나 '마른 풀과 나무토막 같은 연료없이 일으킨 불(nissaṭṭha-tiṇa-kaṭṭh-upādāno aggi)'은 연기 등이 없기 때문에 깨끗하듯이, 출세간의 두 禪(lokuttara-jjhāna-dvaya)과 관련된 희열(pīti)은 태어남 등이 없기 때문에 청정하다.(MA.iii.448)
그러면, 젊은 바라문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과 다르고 선하지 않은 법들과 다른 희열입니까? 여기, 젊은 바라문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것도, 젊은 바라문이여, 감각적 쾌락과 다르고, 선하지 않은 법들과 다른 희열입니다. 다시 젊은 바라문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것도, 젊은 바라문이여, 감각적 쾌락과 다르고 선하지 않은 법들과 다른 희열입니다.
469.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은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선함)의 성취를 위하여 그 다섯 가지 법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바라문들은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를 위하여 더 큰 결실을 가지는 법이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를 위하여 선언된 이런 다섯 가지 법들에서 바라문들은 베풂이 더 큰 결실을 가진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바라문이 큰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어떤 바라문이 큰 제사를 지낼 것이다.'라고 하면서 두명의 바라문이 올 것입니다. 거기서 한 바라문에게 '오, 참으로 나 혼자 식당에서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 으뜸가는 음료, 으뜸가는 음식을 얻고, 다른 바라문은 식당에서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 으뜸가는 음료, 으뜸가는 음식을 얻지 못했으면!' 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바라문이여, 다른 바라문이 식당에서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 으뜸가는 음료, 으뜸가는 음식을 얻고, 그 바라문은 식당에서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 으뜸가는 음료, 으뜸가는 음식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바라문이 식당에서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 으뜸가는 음료, 으뜸가는 음식을 얻고, 나는 식당에서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 으뜸가는 음료, 으뜸가는 음식을 얻지 못했다.'라면서 그는 화가 나고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바라문들은 어떤 과보를 선언합니까?"
"여기서,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이 보시로 다른 사람이 화나고 만족하지 못하기를' 하는 생각으로 보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라문들은 오직 연민에서 우러나온 보시를 합니다."
"그렇다면,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에게 '오직 연민에서 생긴 것'은 여섯 번째 공덕의 결실 있음의 토대가 됩니다(토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함이 있을 때,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에게 '오직 연민에서 생긴 것'은 여섯 번째 공덕의 결실 있음의 토대가 됩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은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를 위하여 그 다섯 가지 법을 선언합니다. 그대는 이 법들을 재가자와 출가자 중에 어디에서 어디서 많이 봅니까?"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이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를 위하여 선언한 이 다섯 가지 법들을 저는 출가자에게서 많이 보고, 재가자에게서는 적게 봅니다. 고따마 존자여, 참으로 재가자의 삶은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아서 항상 계속해서(변함없이)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따마 존자여, 출가자의 삶은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어서 항상 계속해서 진실을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참으로 재가자의 삶은 할 일이 많고, 돌볼 것이 많고, 떠맡은 일이 많아서 항상 계속해서 고행의 삶(종교적 삶)을 살지 못합니다. ··· 범행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 성전(만뜨라)을 많이 공부하지 못합니다. ··· 많이 보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따마 존자여, 출가자의 삶은 할 일이 적고, 돌볼 것이 적고, 떠맡은 일이 적어서 항상 계속해서 고행의 삶을 삽니다. ··· 범행을 실천합니다. ··· 성전을 많이 공부합니다. ··· 많이 보시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이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를 위하여 선언한 이 다섯 가지 법들을 저는 출가자에게서 많이 보고, 재가자에게서는 적게 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를 위하여 선언하는 그 다섯 가지 법이라는 마음의 필수품들에 대해 '성냄(악의) 없고 원망 없는 마음을 닦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여기 비구는 진실을 말합니다. 그는 '나는 진실을 말하다.'라면서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수반되는 환희를 얻습니다. 그 유익함에 수반되는 환희라는 마음의 필수품에 대해 '성냄 없고 원망 없는 마음을 닦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여기, 젊은 바라문이여, 비구는 고행의 삶을 삽니다. ··· 범행을 실천합니다. ··· 많이 공부합니다. ··· 많이 보시합니다. 그는 '나는 많이 보시한다.'라면서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수반되는 환희를 얻습니다. 그 유익함에 수반되는 환희라는 마음의 필수품에 대해 '성냄 없고 원망 없는 마음을 닦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공덕의 결실과 유익함의 성취를 위하여 선언하는 그 다섯 가지 법이라는 마음의 필수품에 대해 '성냄 없고 원망 없는 마음을 닦기 위한 것'이리고 나는 말합니다."
470. 이렇게 말씀하시자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는 범천의 동료로 이끄는 길을 알고 있다.'라고 들었습니다."라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여기로부터 날라까라 마을은 가깝습니까, 여기로부터 날라까라 말은 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시여. 여기로부터 날라까라 마을은 가깝습니다. 여기로부터 날라까라 마을은 멀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젊은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날라까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날라까라 마을로부터 막 떠난 그에게 날라까라 마을로 가는 길을 물을 것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날라까라 마을로 가는 길을 질문 받은 날라까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 사람에게 우둔함(길을 모르거나)이나 주저함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그 사람은 날라까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는 날라까라 마을로 가는 모든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날라까라 마을로 가는 길을 질문 받은 날라까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 사람에게 우둔함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천의 세상이나 범천의 세상으로 가는 실천을 질문받은 여래에게 우둔함이(길을 모르거나) 주저함이 없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나는 범천과, 범천의 세상과, 범천의 세상으로 가는 실천을(익히고 닦음) 꿰뚫어 압니다. 어떤 실천한 자가 범천의 세상에 태어났는지도 꿰뚫어 압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는 범천의 동료로 이끄는 길을 설한다.'라고 들었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 저에게 범천의 동료로 이끄는 길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471. "그러면 젊은 바라문이여, 무엇이 범천의 동료가 되는 길입니까? 여기, 젊은 바라문이여, 비구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이렇게 자애가 함께한 마음의 해탈을 닦을 때 제한적으로 지어진 업은 거기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바라문이여, 힘 센 소라고둥 부는 사람은 어려움 없이 사방에서 소리를 듣게 합니다. 이렇게, 젊은 바라문이여, 여기 비구는 자애를 ··· 젊은 바라문이여, 이렇게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의 해탈을 닦을 때 제한적으로 지어진 업은 거기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이것도 범천의 동료가 되는 길입니다. 다시, 젊은 바라문이여, 비구는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이렇게 평정이 함께한 마음의 해탈을 닦을 때 제한적으로 지어진 업은 거기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바라문이여, 힘 센 소라고둥 부는 사람은 어려움 없이 사방에서 소리를 듣게 합니다. 이렇게, 젊은 바라문이여, 여기 비구는 평정을 ··· 젊은 바라문이여, 이렇게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의 해탈을 닦을 때 제한적으로 지어진 업은 거기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이것도 범천의 동료가 되는 길입니다.
*여기서 '제한된 업(pamāṇakata kamma)'이란 욕계(kāma-avacara)의 업을 말한다. 무량한 업(apamāṇakata kamma)이란 색계와 무색계(rūpa-arūpa-avacara)의 업을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여기서는 범주(梵住, 거룩한 마음가짐)의 업(brahmavihāra-kamma)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 것은 한계(pamāṇa)를 넘어 한정적인 것과 무한정적인(odhisaka-anodhisaka)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disā-pharaṇa-vasena) 증장시켜 확립되었기 때문에 무량한 업이라 한다.”(MA.iii.450)
*그 제한된 [욕계의] 업은 그 색계와 무색계의 업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남아있지 않다. 무슨 뜻인가? 욕계의 업은 색계의 업과 무색계의 업 속에 붙어 있거나 남아 있거나 혹은 색계와 무색계의 업을 뒤덮어버리고 고갈시켜 자기의 과보를 생산할 기회(okāsa)를 확보하여 머물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색계와 무색계의 업은 마치 작은 물을 뒤덮는 큰 폭류처럼 욕계의 업을 덮어서 자기의 공간을 확보하여 머물러서 그것의 과보를 생산할 기회를 가져 자기 스스로 범천의 일원이 되게(brahma-sahabyatā) 된다.”(MA.iii.450)
472. 이렇게 말씀하시자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쟈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법)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이제, 고따마 존자시여,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저희는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젊은 바라문이여, 지금이 적당한 시간이라면 그렇게 하라."
그러자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는 세존의 설법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났다.
그때 자눗소니 바라문이 온통 흰색으로 장엄한 마차를 타고 사왓티를 나가고 있었다. 자눗소니 바라문은 멀리서 오고 있는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를 보았다. 보고나서 또데야의 아들 젊은 바라문 수바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바라드와자 존자는 이런 한낮에 어디를 다녀오는 길입니까?"라고.
"존자여, 저는 사문 고따마를 친견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바라드와자 존자여? 사문 고따마의 지혜의 성취는 현자라고 생각하게 합니까?"
"존자여, 제가 어떻게 사문 고따마의 지혜의 성취를 알겠습니까? 아마도 그분과 같은 자라야 참으로 사문 고따마의 지혜의 성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드와자 존자는 참으로 사문 고따마를 크게 칭찬합니다."
"존자여, 제가 어떻게 사문 고따마를 칭찬할 것입니까(사문 고따마를 칭찬한다는 말입니까)? 그분 고따마 존자는 신과 인간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거듭 칭송됩니다. 그리고 존자여, 바라문들이 공덕의 결실을 위하고 유익함을 성취하기 위해 선언하는 다섯 가지 법이라는 마음의 필수품들에 대해 '악의 없고 원망 없는 마음을 닦기 위한 것'이라고 사문 고따마는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자눗소니 바라문은 온통 흰색으로 장엄한 마차에서 내려 윗옷을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채 감흥어를 읊었다.
"빠세나디 꼬살라 왕에게 이익입니다. 그의 왕국에 여래·아라한·정등각이 머무는 것을 빠세나디 꼬살라 왕에게 참으로 큰 이익입니다."라고.
수바 경이 끝났다.
'빠알리어 경전 > 맛지마 니까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1장 대와다하 품-MN 101. 데와다하 경(devadahasuttaṃ) (0) | 2016.05.20 |
---|---|
MN 100. 상가라와 경(saṅgāravasuttaṃ) (0) | 2016.05.12 |
MN 98. 와셋타 경(vāseṭṭhasuttaṃ) (0) | 2016.05.10 |
MN 97. 다난자니 경(dhanañjānisuttaṃ) (2) | 2016.05.10 |
MN 96. 에수까리 경(esukārīsuttaṃ) (0) | 2016.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