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101. 데와다하 경(devadahasuttaṃ)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데와다하라는 삭까족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지은 업)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결과를 주지 않게 한다).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이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이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풀려나게 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주장을 하는 자는 니간타들이다.
*""데와다하(Devadaha)'라고 했다. 여기서는 데와(deva)는 왕들을 말한다. 삭까 왕들(Sakya-raja)에게는 행운의 호수(mangalapokkarani)가 있었는데 아주 아름다웠고 보호시설(arakkha)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것이 왕들의(devamam) 호수(daha)였기 때문에 데와다하라고 불렸다. 그 호수와 연관 지어 그 성읍(nigama)도 데와다하라는 이름을 가졌고 세존께서는 그 마을 부근의 룸비니 숲(Lumbini-vana)에 머물고 계셨다."(MA.iv.1)
*"'그것은 모두 이전에 지은 [업에] 기인한 것이다(sabbam tam pubbe-katahetu)'라는 것은 이전에 지은 업을 조건으로 한 것(kamma-paccaya)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논리는 없을 짓는 [마음의] 느낌(kamma-vedana)과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의] 느낌(kiriya-vedana)은 배제한 채 오로지 과보로 나타난 느낌(vipaka-vedana)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MA.iv.1)
한편 「앙굿따라 니까야 복주석서」는 "업을 짓는 [마음의] 느낌(kamma-vedana)이란 유익한 업이나 해로운 업과 함께 생긴 느낌이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의] 느낌(kiriya-vedana)이란 유익하거나 해로운 업의 느낌도 아니고 또한 업의 과보의 느낌도 아닌,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과 함께 생긴(kiriya-citta-sahaja) 느낌이다."(AAT.ii.142)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상윳따 니까야」 제4권 「시와까 경」(S36.21)에도 나타나는데 세존에 의해서 비판되고 있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외도의 주장 경」(A3.61)에도 나타나는데 역시 세존에 의해서 비판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렇게 주장하는 니간타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지은 업)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결과를 주지 않게 한다).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이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이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라고.
이렇게 질문받은 그 니간타들은 '그렇습니다'라고 인정한다.
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은 '우리는 이전에( 전생에) 존재했다거나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압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은 '우리는 이전에 악업을 지었다거나 짓지 않았다.'라고 압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은 '우리는 이러저러한 악업을 지었다.'라고 압니까?"
'아닙니다,도반이여.'
'그러면,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은 '이만큼의 괴로움은 다했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은 소멸해야 한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이 다할 때 모든 괴로움이 다할 것이다.'라고 압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은 지금·여기에서 선하지 않은 법들이 버려지고 선한 법들이 성취되는 것을 압니까?'
'아닙니다,도반이여.'
2. '이렇게,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은 '우리는 이전에 존재했다거나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알지 못하고, '우리는 이전에 악업을 지었다거나 짓지 않았다.'라고 알지 못하고, '우리는 이러저러한 악업을 지었다'라고 알지 못하고, '이만큼의 괴로움이 다했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은 다해야 한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이 다할 때 모든 괴로움이 다할 것이다'라고 알지 못하고, 지금·여기에서 선하지 않은 법들이 버려지고 선한 법들이 성취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럴 때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지은 업)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결과를 주지 않게 한다).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이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이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라는 니간타 존자들의 설명은 부적절합니다.
도반 니간타들이여, 만약 그대들이 '우리는 이전에 존재했다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안다면, '이전에 악업을 지었다거나 짓지 않았다.'라고 안다면, '우리는 이러저러한 악업을 지었다.'라고 안다면, '이만큼의 괴로움은 다했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은 다해야 한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이 다할 때 모든 괴로움이 다할 것이다'라고 안다면, 지금·여기에서 선하지 않은 법들이 버려지고 선한 법들이 성취되는 것을 안다면, 이런 때에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이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 의해 느낌이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이 다함이 있게 된다.'라는 니간타 존자들의 설명은 적절할 것입니다.
3. 예를 들면, 도반 니간타들이여, 독이 진하게 묻은 화살을 맞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화살을 맞은 것을 원인으로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외과 의사에게 치료받게 할 것입니다. 그를 위해 그 외과 의사는 칼로 상처 부위를 도려낼 것이고, 그는 상처 부위를 도려내는 것을 원인으로 고통스럽고 예리하고 가혹한 느낌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를 위해 그 외과 의사가 조사해야 하는 화살을 화살을 조사할 것이고, 그는 조사해야 화살을 조사하는 것을 원인으로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를 위해 그 외과 의사는 화살을 뽑을 것이고, 그는 화살을 뽑는 것을 원인으로도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를 위해 그 외과 의사는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를 것이고, 그는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르는 것을 원인으로도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할 것입니다.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면, 건강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회복한 그는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전에 나는 독이 진하게 묻은 화살에 맞았다. 나는 화살을 맞은 것을 원인으로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했다. 그래서 나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외과 의사에게 치료받게 했다. 나를 위해 그 의사는 칼로 상처 부위를 도려냈고, 나는 상처 부위를 도려내는 것을 원인으로도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했다. 나를 위해 그 의사는 조사해야 하는 화살을 조사했고, 나는 조사해야 하는 화살을 조사하는 것을 원인으로도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했다. 나를 위해 그 외과 의사는 화살을 뽑았고, 나는 화살을 뽑는 것을 원인으로도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했다. 나를 위해 그 외과 의사는 상처 부위에 약을 발랐고, 나는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르는 것을 원인으로도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을 경험했다. 그런 나는 이제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회복하여서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라고.
이처럼, 도반 니간타들이여, 만약 그대들이 '우리는 이전에 존재했다거나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안다면, '우리는 이전에 악업을 지었다거나 짓지 않았다.'라고 안다면, '우리는 이러저러한 악업을 지었다.'라고 안다면, '이만큼의 괴로움은 다했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은 다해야 한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이 다할 때 모든 괴로움이 다할 것이다.'라고 안다면, 지금·여기에서 선하지 않은 법들이 버려지고 선한 법들이 성취되는 것을 안다면, 이럴 때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진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의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의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라는 니간타 존자들의 설명은 적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이 '우리는 이전에 존재했다거나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알지 못하고, '우리는 이전에 악업을 지었다거나 짓지 않았다.'라고 알지 못하고, '우리는 이러이러한 악업을 지었다.'라고 알지 못하고, '이만큼의 괴로움은 다했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은 다해야 한다거나, 이만큼의 괴로움이 다할 때 모든 모든 괴로움이 다할 것이다.'라고 알지 못하고, 지금·여기에서 선하지 않은 법들을 버려지고 선한 법들이 성취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의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의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라는 니간타 존자들의 설명은 부적절합니다.'
4.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그 니간타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일체지자요 일체견자인) 니간타 나따뿟따는 '나에게는 걸을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계속해서(한결같이) 앎(知.지)와 봄(見.견)이 확립되어 있다(나타난다).'라고 완전한 앎과 봄을 선언합니다. 그는 '니간타들이여, 이전에 그대들이 지은 악업이 있다. 그것을 이 가혹하 행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부숴야 한다. 또한 이제 여기서 몸으로 단속하고 말로 단속하고 마음으로 단속하는 것이 미래에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의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의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찬성하고 받아들이고 거기에 만족하고 있습니다.'라고.
5.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그 니간타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도반 니간타들이여, 지금·여기에서 두 가지 과보가 있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이 있습니다. 어떤 다섯입니까? 믿음, 성향, 구전, 이론적 추론, 사색하여 얻은 견해입니다. 도반 니간타들이여, 지금·여기에서 두 가지 과보가 있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니간타 존자들에게 과거를 말하는 스승에 대한 어떠 믿음, 어떤 성향, 어떤 구전, 어떤 사색하여 얻은 견해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하는 나는, 비구들이여, 니간타들에 대해 어떤 법다운 대답도 보지 못한다.
*'과거를 말하는 스승에게 어떠한 믿음이 있는가?'는 ka atitamse satthari saddha를 옮긴 것이다. 즉 '과거의 이론(atitavada)을 믿는 그대들의 니간타에 대한 믿음은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MA.iv.4)의 말이다.
*"'법다운 대답(sahadhammika vadaparihara)'이란 원인이 있는(sahetuka), 논리를 갖춘(sakarana), 대론(對論,paccagamanaka-vada)을 말한다."(MA.iv.4)
다시 비구들이여, 그 니간타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이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고된 정진과 고된 노력) 할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됩니까? 그리고 그대들이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하지 않을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되지 않습니까?'라고.
'도반 고따마여, 우리가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할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하지 않을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되지 않습니다.'
6. '이렇게,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이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할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예리하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됩니다. 그리고 그대들이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하지 않을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예리하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의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이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라는 니간타 존자들의 설명은 부적절합니다.
만약,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이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할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되지 않고, 그대들이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하지 않을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된다면, 이럴 때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업의 부서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의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의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라는 니간타 존자들의 설명은 적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이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할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되고, 그대들이 힘든 방법으로 힘든 노력을 하지 않을 때 힘든 노력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이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힘든 노력 자체에서 생긴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그대들은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이전에 행해진 것이 원인이다. 이렇게 이전의 업들은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업의 부수짐이 있고, 업의 부서짐에서 괴로움의 부서짐이 있다. 괴로움의 부서짐에서 느낌의 부서짐이 있고, 느낌의 부서짐에서 모든 괴로움의 다함이 있게 된다.'라고 무명과 무지와 혼란스러움을 익게 합니다(무명과 무지와 혼란스러움에 기인한 것으로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나는, 비구들이여, 니간타들에 대해 어떤 법다운 대답도 보지 못한다.
7. 다시 비구들이여, 그 니간타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반 니간타들이여, 지금·여기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다음 생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다음 생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지금·여기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반 니간타들이여, 즐거움이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괴로움이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괴로움이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즐거움이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반 니간타들이여, 이미 성숙하여 경험되어야 하는 업(즉시에 그 과보를 경험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이미 성숙하여 경험되어야 하는 업이 아니게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반 니간타들이여, 이미 성숙하여 경험될 업이 아닌 것을(즉시에 그 과보를 경험하지 않을 업)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이미 성숙하여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어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반 니간타들이여, 많이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조금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반 니간타들이여, 조금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많이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반 니간타들이여,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경험되지 않을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벗 니간타들이여, 그러면 과보가 경험되지 않을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과보가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즉시에 그 [과보를] 경험할 업(kamma paripakka-vedaniya)'이란 성숙되었고 완성된 이 생애 그 과보를 경험하는 업으로, 금생에 그 과보를 경험하는 업(dittha-dhamma-vedaniya)의 동의어이다.
'즉시에 그 [과보를] 경험하지 않을 업(aparipakka-vedaniya)'이란 아직 성숙되지 않은 내생의 몸에서 경험해야 할 업으로, 내생에 그 과보를 경험하는 업(samparaya-vedaniya)의 동의어이다.
'즉시에 그 [과보를] 경험할 업'과 '금생에 그 [과보를] 경험하는 업'은 동의어로 설명이 되고 있지만 이 둘에는 차이점이 있다. 초년(pathama-vaya)에 지은 업은 초년이나 중년이나 말년에 그 과보(vipaka)를 받고, 중년(majjhima-vaya)에 지은 업은 중년이나 말년에 그 과보를 받고, 말년(pacchima-vaya)에 지은 업은 바로 그 말년에 과보를 받는 것을 '금생에 그 과보를 경험할 업'이라 한다. 그러나 7일 이내에 그 과보를 받는 것을 '즉시에 그 과보를 경험할 업'이라 한다. 그것은 유익한 업이건 해로운 업이건 모두 해당된다."(MA.iv.4-5)
8. "'이렇게, 도반 니간타들이여, 지금·여기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다음 생에 경험해야 하는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음 생에 경험해야 하는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지금·여기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즐거움이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괴로움이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이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즐거움이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미 성숙하여 경험되어야 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이미 성숙하여 경험되어야 하는 업이 아니게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미 성숙하여 경험될 업이 아닌 것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이미 성숙하여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많이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조금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조금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많이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경험될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과보가 경험되지 않을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경험되지 않을 업을 방법이나 노력에 의해 경험될 업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니간타 존자들에게 방법은 결실이 없고, 노력은 결실이 없습니다.'
비구들이여, 니간타들은 이런 주장을 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주장을 하는 니간타들에게 법다운 말들에 의해 열 가지로 비난의 이유가 생긴다.
9.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이전에 행해진 것(지은 업)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을 경험하는 니간타들은 나쁜 업을 지은 자들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을 경험하는 니간타들 악한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자들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결합의 상태(운명과 우연의 일치)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을 경험하는 니간타들은 나쁘게 결합된 자들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출생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을 경험하는 니간타들은 출생이 나쁜 자들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지금·여기의 방법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을 경험하는 니간타들은 이런 [고통스럽고 날카롭고 가혹한 느낌을 경험하게 하는] 지금·여기의 방법을 가진 자들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이전에 행해진 것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이전에 행해진 것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결합의 상태(운명과 우연의 일치)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결합의 상태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출생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출생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만일 중생들이 지금·여기의 방법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지금·여기의 방법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니간타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니간타들은 이런 주장을 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주장을 하는 니간타들에게 법다운 말들에 의해 이런 열 가지로 비난의 이유가 생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들의 방법은 결실이 없고, 노력은 결실이 없다.
10. 비구들이여, 어떻게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속박되지 않은 자신을 괴로움에 의해 속박되지 않은 자신을 속박되게 하지 않고, 법다운(가르침의 실천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고, 그 즐거움에 대해 기울지도(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이렇게 분명히 안다.
'행(行)에 대해 노력할 때 노력 때문에 나에게 이런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단지 바라보며(바라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 평정을 닦을 때 나에게 이 괴로움의 인연(원인)이 사라진다.'라고.
행에 대해 노력할 때 행에 대한 노력 때문에 괴로움이 원인이 사라지는 거기서 그는 행에 대해 노력한다. 단지 바라보며 평정을 닦을 때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지는 거기서 그는 평정을 닦는다. 행에 대해 노력할 때 행에 대한 노력 때문에 거듭 그에게 이런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이렇게도 그에게 괴로움이 부서진다. 단지 바라보며 평정을 닦을 때 거듭 그에게 이런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이렇게도 그에게 괴로움이 부서진다.
11.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여자에게 강한 애욕과 마음이 묶였고 강한 관심과 강한 기대를 가진 남자가 있다. 그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고 대화하고 농담하고 웃고 있는 그 여자를 볼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고 대화하고 농담하고 웃고 있는 그 여자를 보고서 그 남자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원인은 무엇인가?"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강한 애욕과 마음이 묶였고 강한 관심과 강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고 대화하고 농담하고 웃고 있는 그 여자를 보고서 그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그 남자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여자에게 강한 애욕과 마음이 묶였고 강한 관심과 강한 기대를 가졌다. 그러 나에게 다른 남자와 함께 잇고 대화 하고 농담하고 웃고 있는 그 여자를 보고서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긴다. 나는 그 여인에 대한 나의 욕탐(欲貪)을 버려야겠다.’라고. 그는 그 여자에 대한 욕탐(欲貪)을 버릴 것이다. 그가 나중에 다른 남자와 함께 있고 대화하고 농담하고 웃고 있는 그 여자를 볼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고 대화하고 농담하고 웃고 있는 그 여자를 보고서 그 남자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가 생기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원인은 무엇인가?"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 남자는 그 여자에 대한 욕탐(欲貪)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고 대화하고 농담하고 웃고 있는 그 여자를 보고서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속박되지 않은 자신을 괴로움에 의해 속박되게 하지 않고, 법다운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고, 그 즐거움에 대해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는 이렇게 분명히 안다.
'행에 대해 노력할 때 노력 때문에 나에게 이런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단지 바라보며 평정을 닦을 때 나에게 이 괴로움의 원인은 사라진다'.라고.
행에 대해 노력할 때 행에 대한 노력 때문에 괴로움이 원인이 사라지는 거기서 그는 행에 대해 노력한다. 단지 바라보며 평정을 닦을 때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지는 거기서 그는 평정을 닦는다. 행에 대해 노력할 때 행에 대한 노력 때문에 거듭 그에게 이런 로움의 원인의 사라진다. 이렇게도 그에게 괴로움이 부서진다. 단지 바라보며 평정을 닦을 때 거듭 그에게 이런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이렇게도 그에게 괴로움이 부서진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12.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렇게 숙고한다.
'즐겁게 머무는 나에게 선하지 않은 법들이 증장하고 선한 법들이 줄어든다. 그러나 괴로움에 대해 나에 대해 노력할 때 선하지 않은 법들이 줄어들고 선한 법들은 증장한다. 참으로 나는 스스로 괴로움을 위해 나에 대해 노력해야겠다.'라고.
그는 괴로움을 위해 자신에 대해 노력한다. 괴로움을 위해 자신에 대해 노력하는 자에게 선하지 않은 법들이 줄어들고 선한 법들이 증장한다. 나중에 그는 괴로움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비구가 어떤 목적에서 그 괴로움을 위해 노력해야 했던 그 목적이 달성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는 괴로움을 위해 자신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화살 만드는 기술자가 두 불꽃 사이에 화살촉을 가열하고 달구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곧게 만들면, 나중에 화살 만드는 기술자는 두 불꽃 사이에 화살촉을 가열하여 달구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곧게 만들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화살 만드는 기술자가 두 불꽃 사이에 화살촉을 가열하고 달구어 사용할 수 있도록 곧게 만들려는 목적이 달성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화살 만드는 기술자는 두 불꽃 사이에 화살촉을 가열하고 달구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곧게 만들지 않는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즐겁게 머무는 나에게 선하지 않은 법들이 증장하고 선한 법들이 줄어든다. 그러나 괴로움을 위해 나에 대해 노력할 때 선하지 않은 법들이 줄어들고 선한 법들이 증장한다. 참으로 나는 괴로움을 위해 나에 대해 노력해야겠다.'라고.
그는 괴로움을 위해 자신에 대해 노력한다.괴로움을 위해 자신에 대해 노력하는 그에게 선하지 않은 법들이 줄어들고 선한 법들이 증장한다. 나중에 그는 괴로움을 위해 자신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비구가 어떤 목적에서 괴로움을 위해 노력해야 했던 그 목적이 달성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는 괴로움을 위해 자신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도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즐거운 도닦음(sukha patipada)도 그것이 적당하지 않으면 비록 그가 촉감이 좋은 옷을 입고 호화로운 집에서 거주하더라도 마음이 흩어진다(vikkhipati). 그러나 괴로운 도닦음일지라도 그것이 적당할 때에는 비록 그가 찢어지고 헤어지고 감촉이 거친 옷을 입고 묘지나 나무 아래 등에서 머물지라도 마음은 집중된다. 여기서는 괴로운 도닦음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MA.iv.14)
13.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이 세간의 모든 중생들, 즉 마라들, 범천들, 축생들, 사문들, 바라문들, 천신및 인간들에게, 스스로 철저히 알았고, 겪어 알아, 갖추신 것을 널리 알린다. 그는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낸다.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는다. 그는 이 법을 듣고서 여래에게 믿음을 가진다. 그는 이런 믿음을 갖추고 이렇게 숙고한다.
‘재가의 삶이란 갇혀 있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완전무결하고 청정무구한 잘 닦여진 자개껍질과 같은 청정한 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야겠다.’라고.
그는 얼마 뒤에 재산이 많이 있거나 적거나 간에 모두 버리고, 일가친척 또한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14. 이렇게 출가하여 비구들의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 그것과 더불어 생활한다.
그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는다. 모든 살아있는 중생들을 향하여 관대하고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머문다.
그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다. 준 것만을 받고 준 것만을 받는 자이고, 준 것만을 바라는 자, 스스로 훔치지 않는 청정한 존재로 머문다.
그는 금욕적이지 못한 삶을 버렸기 때문에 범행을 닦는다. 독신자가 되어 저속한 성행위를 멀리 떠난다.
그는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다. 진실을 말하는 자여서 믿을만하고, 신뢰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고, 세상을 위해 진실을 말한다.
그는 이간하는 말을 버렸기 때문에 이간하는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다. 여기서 듣고서 이들을 이간하려고 저기서 말하지 않는다. 저기서 듣고서 저들을 이간하려고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와 같이 이간된 자들을 합치고 우정을 장려하며 화합을 좋아하고 화합을 기뻐하고 화합을 즐기며 화합하게 하는 말을 한다.
그는 거친 말(욕설)을 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친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다. 그는 유순하고 귀에 즐겁고 사랑스럽고 가슴에 와 닿고 예의바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그런 말을 한다.
그는 꾸며대는 말을 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꾸며대는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다. 그는 적절한 때에 말하는 자이고, 사실을 말하는 자이고, 이익되게 말하는 자이고, 법에 맞게 말하는 자이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여서 적절한 때에, 근거를 갖춘, 절제된, 이익되는 말을 한다.
그는 씨앗류와 초목류을 손상시키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하루 한끼만 먹는 자여서 밤에 먹은 것을 떠나고 때 아닌때에 먹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춤, 노래, 음악, 연극을 관람하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화환을 두르고 향과 화장품을 바르고 장신구로 꾸미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높고 큰 침상을 멀리 떠난다.
그는 금과 은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요리하지 않은 날곡식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생고기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여인이나 어린 소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하인과 하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염소와 양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닭과 돼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코끼리, 소, 말, 암말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농토나 토지를 받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심부름꾼이나 전령으로 가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사고파는 것(상행위)을 멀리 떠난다.
그는 저울을 속이고 돈을 속이고 도량을 속이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뇌물을 주고 속이고 사기치고 어떠한 종류의 부정한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다.
그는 남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거나 또는 누군가를 강제하고 구속하여 폭력을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몸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한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자구(資具)만을 몸에 지니고 간다. 예를 들면,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자기 양 날개만으로 날아가는 것과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몸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자구만을 몸에 지니고 간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구족하여 안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15. 그는 눈으로 형상을 보면서 그 표상(相)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것(세세한 부분상.受)을 붙잡지 않는다. 만약 그의 눈의 근(眼根)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법(마음현상)을 인식하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것을 붙잡지 않는다. 만약 그의 마음의 근(意根)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이 성스러운 감각 기능들의 보호(단속)를 갖춘 그는 안으로 더럽혀지지 않는 행복을 경험한다.
그는 나아갈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 의복을 지닐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 서면서 앉으면서 잠자는 때도 깨어 있는 때도 말하면서도 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16.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 기능의 보호를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어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간탐을 제거하여 간탐을 버린 마음으로 머물고, 간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성냄(악의)의 오점을 제거하여 성냄(악의)이 없는 마음으로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며 머물고, 성냄(악의)의 오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광명상(光明想)을 가지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가진 자로 머물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아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머물고,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건너 유익한 법들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자로 머물고,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그는 지혜를 무력화 시키는 마음의 오염원인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한 뒤에,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伺)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도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 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과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도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평온)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도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도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17.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한다.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계),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도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18.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중생들의 죽음과 삶에 관련한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한다.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天眼)으로 중생들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좋은 곳(善處), 나쁜 곳(惡處)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린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사견업.邪見業)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났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정견업.正見業)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좋은 곳, 나쁜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린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도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19.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과로움이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그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쾌락에 기인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도 방법은 결실이 있고, 노력은 결실이 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런 주장을 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주장을 하는 여래에게 법다운 말들에 의해 열 가지 칭송의 이유가 생긴다.
20.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이전에 행해진 것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번뇌없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래는 이전에 좋은 업을 지은 자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번뇌없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래는 훌륭한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자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결합의 상태(운명과 우연의 일치)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번뇌없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래는 유익하게 결합된 자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태생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번뇌없는 즐거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래는 출생이 좋은 자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지금·여기의 방법(노력)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 이렇게 번뇌없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래는 지금·여기에서 유익한 방법을 가진 자이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이전에 행해진 것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이전에 행해진 것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결합의 상태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결합의 상태를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출생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출생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지금.여기의 방법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지금.여기의 방법을 원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여래는 칭송받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런 주장을 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주장을 하는 여래에게 법다운 말들에 의해 열 가지 칭송의 이유가 생긴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데와다하 경이 끝났다.
'빠알리어 경전 > 맛지마 니까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MN 103. 무엇이라고(어떻게 생각하는가) 경( kintisuttaṃ) (0) | 2016.05.20 |
---|---|
MN 102. 다섯이면서 셋 경(pañcattayasuttaṃ) (0) | 2016.05.20 |
MN 100. 상가라와 경(saṅgāravasuttaṃ) (0) | 2016.05.12 |
MN 99. 수바 경(subhasuttaṃ) (0) | 2016.05.11 |
MN 98. 와셋타 경(vāseṭṭhasuttaṃ) (0) | 2016.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