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N 141. 진리의 분석 경(saccavibhaṅgasuttaṃ)

실론섬 2016. 6. 17. 16:05

MN 141. 진리의 분석 경(saccavibhaṅgasuttaṃ)

 

37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바라나시(Baranasi)는 세존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 가운데 하나였던 까시까(Kasika, 혹은 Kasi)의 수도였고, 지금도 힌두교의 대표적 성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현재 인도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식 명칭은 Varanasi(와라나시)이다. 까시까(까시)는 세존 당시에는 꼬살라(Kosala)로 합병되어 꼬살라의 ㅃ세나디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고 한다. 바라나시는 강가 강 옆에 있었기 때문에 수로의 요충이었다.    
이시빠따나(Isipatana)는 세존의 초전법륜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지금의 사르나트(Sarnath)로 바라나시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세존께서 우루웰라(Uruvela)에서 고행을 그만두시자 다섯 비구는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주석서는 이시빠따나라는 지명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전에 벽지불(paccekabuddha)들이 간다마다나(Gandhamadana) 산(히말라야에 있음)에서 7일 동안 멸진정에 들었다가 탁발을 하기 위해 허공을 날아 오다가 이곳에 내리서 도시로 들어가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친 후 다시 이곳에서 허공으로 올라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선인(仙人, isi)들이 이곳에 내리고 이곳에서 올라갔다고 해서 이시빠따나((Isi-patana)라 한다."(MA.ii.188)   
사슴공원으로 옮긴 원어는 Migadaya(미가다야)이다. 주석서는 "사슴(miga)들에게 두려움 없이 머무는 장소(abhayattha)로 주어졌기 때문에 미가다야라 한다."(MA.ii.188)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녹야원(鹿野苑)으로 옮겼다. 세존께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 설법을 하신 바로 그 동산이다.
한편 니까야 경전에는 라자가하의 맛다꿋치 사슴동산(S1.38, S4.13, D16), 박가의 악어산 베사깔라 숲에 있는 사슴동산(M15), 사께따의 안자나 숲에 있는 사슴동산(S2.18), 우준냐의 깐나가탈라 사슴동산(M90), 등 여러 곳의 사슴동산이 나타난다. 불교 수행자들 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교단의 수행자들이 유행을 하다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비구들이여, 바라나시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여래·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위없는 법의 바퀴[法輪]가 굴러졌다. 그것은 하늘(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의 그 누구에 의해서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이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고성제.苦聖蹄]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이다.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고집성제.苦集聖諦]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바라나시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여래·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위없는 법의 바퀴[法輪]가 굴러졌다. 그것은 하늘(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의 그 누구에 의해서도 멈출 수 없다 없다. 그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명하고 동료 수행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비구이니,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와 함께 교제하라. 비구들이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와 함께 익히고 닦아라. 말하자면,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낳는 자와 같고(낳아준 친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태어난 자를 길러주는 자와 같다(태어난 자를 길어주는 유모와 같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예류과로 인도하고, 목갈라나는 가장 높은 경지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선서께서는 자리에 일어나셔서 거처로 들어가셨다.

 

372. 세존께서 자리에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리뿟따 존자는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렸다. "도반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바라나시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여래․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위없는 법의 바퀴[法輪]가 굴러졌습니다. 그것은 하늘(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의 그 누구에 의해서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입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입니다.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입니다.

 

373. 그러면, 도반들이요, 무엇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태어남도 괴로움입니다. 늙음도 괴로움입니다. 죽음도 괴로움이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도 괴로움이고, 사랑하지 않은 이와의 만남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 오취온]은 괴로움입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태어남입니까? 

이런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저런 중생들의 태어남, 시작됨, 나타남, 자라남, 오온의 드러남, 여섯 감각장소[六處]의 획득, 도반들이여, 이것이 태어남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늙음입니까? 

이런저런 중생들의 무리 가운데서 이런저런 중생들의 늙음, 노쇠함, 치아빠짐, 주름진 피부, 나이의 다함, 감각기능[根]의 쇠퇴, 도반들이여, 이것이  늙음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죽음입니까? 

이런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저런 중생들의 사라짐, 이동, 파괴, 소멸, 죽음, 끝남, 오온의 파괴, 신체의 소진, 생명기능[命根]의 끊어짐, 도반들이여, 이것이 죽음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슬픔입니까?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괴로운 법에 연류되어 맞게되는 슬픔, 우수, 슬퍼함, 내적인(내면의) 슬픔, 내적으로 가득한 슬픔, 마음의 고뇌와 근심과 슬픔의 화살, 도반들이여, 이것이 슬픔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비탄(悲)입니까?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괴로운 법에 연류되어 행하게 되는 한탄, 비통, 통한, 비탄, 통곡, 통탄, 절규, 울부짖음, 멍한 지껄임, 공허한 지껄임, 도반들이여, 이것이 비탄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고통입니까?

몸의 불쾌감으로서 몸의 고통스러움(신체적 고통),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서 고통스러움을 받는 것(感受. 감수),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서 고통스러운 느낌, 도반들이여, 이것이 고통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근심(憂)입니까?

마음의 불쾌감으로 마음의 고통(정신적 고통),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난 불쾌감으로서 고통스러움의 감수,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서 고통스러운 느낌, 도반들이여, 이것이 근심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번민(惱)입니까?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괴로운 법에 연류되어 처하게 되는 오뇌, 우뇌, 불안, 번뇌, 불안에 빠지는 것, 도반들이여, 이것이 번민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입니까?

도반들이여, 태어남의 법을 지닌 뭇삶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바램) 일어납니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나는 법이 없다면(태어남이 없기를)!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남이 오지 말았으면(않기를)!' 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입니다. 늙기 마련인(늙음의 법을 지닌)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바램) 일어납니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늙음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늙음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 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입니다. 병들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납니다. '오, 우리에게 병듦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그 병듦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입니다. 죽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욕망이 일어납니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죽음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우리에게 죽음이 오지 않기를!' 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입니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번민을 하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욕망이 일어납니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번민하는 법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우리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번민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입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간략히 말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괴로움입니까? 이러합니다.

물질적 요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느낌작용(감수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지각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형성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식별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간략히 말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괴로움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립니다.

 

*본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괴로움도 괴로움에 포함된다. 

①도반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사랑하지 않은 이와 만나는 괴로움입니까? 여기에 어떠한 이들이 있어, 마음에 들지 않고, 원하지 않으며, 매혹적이지 않은 모습(色),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지녔거나, 혹은 다시 어떠한 이들이 있어, 이쪽의 불이익을 원하거나, 손해를 원하거나, 어려움을 원하거나 바로 그들과 만나거나, 동거하거나, 엮이거나, 관계를 맺는 것, 바로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②도반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입니까? 여기에 어떠한 이들이 있어, 마음에 들고, 원하며, 즐겁게 하는 모습(色),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지녔거나, 혹은 다시 어떠한 이들이 있어, 이쪽의 이로움을 원하고, 이익을 원하고, 즐거움을 원하고, 안온하게 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러한 이들 즉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동료, 친족, 친척들과 헤어지거나, 동거하지 못하거나, 엮이지 못하거나,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을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374. 도반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게 하는 갈애로서, 기쁨과 탐냄과 더불어 여기저기서 즐거워하는 것으로서,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있음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는 것(있지 않음에 대한)에 대한 갈애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립니다.

 

375. 도반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이러한 갈애로부터 남김없는 탐냄의 떠남, 소멸, 포기, 버림, 해탈, 무집착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가지의 바른 길로서,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삶),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입니까?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바른 견해라고 불립니다.

 

*"괴로움에 대한 지혜(dukkhe nana)'라는 등으로 네 가지 진리의 명상주제를 보이셨다. 이처럼 처음 두 가지 진리(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는 윤회하는 것(vatta)이고 나중의 둘(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윤회에서 물러나는 것(vivatta)이다. 이들 가운데서 비구가 윤회하는 것을 명상주제로 하여 명상하면 윤회에서 물러나는 것에 대해서는 명상하지 못한다."(DA.iii.801)  
*"여기서 [괴로움과 일어남의] 두 가지 진리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심오하고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의] 두 가지는 심오하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 괴로움의 진리는 일어날 때 분명하다. 몽둥이나 가시 등으로 때릴 때 '아, 괴롭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어남의 진리는 먹고 싶어함 등을 통해서 일어날 때 분명하다. 그러나 특징을 통찰하는 것으로는 이 둘은 모두 심오하다. 이처럼 이 둘은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심오하다.
나머지 둘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마치 우주의 꼭대기를 거러쥐려고 손을 펴는 것과 같고, 무간지옥에 닿으려고 발을 뻗는 것과 같고, 일곱 가닥으로 쪼갠 머리털 끝을 떼어내려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이 둘은 심오하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    
이와 같이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심오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네 가지 진리들에 대해서 익히고 닦음 등을 통해서 처음 단계의 지혜가 일어남을 두고 괴로움에 대한 지혜등으로 설하셨다.  
[그러나] 통찰하는 순간에는 그 지혜는 오직 하나다."(DA.iii.802)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입니까?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으로부터의) 떠남(출리)에 대한 사유, 성내지 않음(악의 없음)에 대한 대한 사유, 해치지 않음(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바른 사유라고 불립니다.

 

*"감각적 쾌락의 반대되는 뜻으로 혹은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남의 뜻으로 출리에 대한 사유(nekkhamma-sankappa)라고 한다."(MA.v.65)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와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와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는 각각 nekkhamma-sankappa, abyapada-sankappa, avihimsa-sankappa를 옮긴 것이다.   
"출리에 대한 사유 등은 감각적 쾌락과 악의와 해코지를 삼가는 인식들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다. 그렇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들 세 경우에 대해서 일어난 해로운 사유의 다리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할 때에는 오직 하나의 유익한 사유가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사유(samma-sankappa)'라 한다."(DA.iii.802)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입니까?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삼가고, 이간하는 말(중상모략)을 하는 행위를 삼가고, 거친 말(욕설)을 말하는 행위를 삼가고, 꾸며대는 말을 말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바른 말이라고 불립니다.

 

*"거짓말을 삼가는 것 등도 거짓말 등을 삼가는 인식들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네 경우에 대해서 일어난 해롭고 나쁜 행위를 가진 의도의 다리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할 때는 오직 하나의 유익한 절제(kusala-veramani)가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말(samma-vaca)'이라 한다."(DA.iii.802)  
절제(veramani 혹은 virati)는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부터 쓰이는 전문술어로서 팔정도 가운데서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셋을 지칭한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입니까?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삼가고, 음행에 대한 삿된 행위를 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바른 행위라고 불립니다.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삼가는 것 등도 산 목숨을 해치는 행위를 것 등을 삼가는 인식들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네 경우에 대해서 일어난 해롭고 나쁜 행위를 가진 의도의 다리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할 때는 오직 하나의 유익한 절제(kusala-veramani)가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행위(samma-kammanta)'이라 한다."(DA.iii.802)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생활)입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들은 삿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합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바른 생계라고 불립니다.

 

*"'삿된(그릇된) 생계(miccha-ajiva)'란 먹는 것 등을 위해 일어난 몸과 말의 나쁜 행위이다. '버리고(pahaya)'라는 것은 제거하고 또는 없애고 라는 말이다. '바른 생계로(samma-ajivena)'라는 것은 세존께서 칭송하신 생계를 통해서라는 말이다. '생명을 영위한다(jivitam kappeti).'는 것은 생명을 지속하고 유지한다는 말이다. 바른 생계는 음모 등을 삼가는 인식들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일곱 경우에 대해서 일어난 삿된 생계라는 나쁜 행실을 가진 의도의 다리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할 때에는 오직 하나의 유익한 절제가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생계(正命, samma-ajiva)'라 한다."(DA.iii.803)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입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아직 생겨나지(일어나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다잡아 힘을 씁니다. 이미 생겨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끊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다잡아 힘을 씁니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을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다잡아 힘을 씁니다. 이미 생겨난 선한 법을 바로 세우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며, 증장하고, 풍성케 하며, 닦고,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다잡아 힘을 씁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바른 정진이라고 불립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anuppanna)'이라는 것은 '하나의 존재에 대해서나 그와 같은 대상에 대해서 아직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이란 말이다. 남에게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오, 참으로 나에게는 이런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일어나지 않기를'이라고 이와 같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한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한다.]"(DA.iii.803)
*"'바램(열의)를 일으키고(chandam janeti)'라는 것은 그들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도닦음을 성취하는 정진의 바램을 생기게 한다는 말이다."(DA.iii.803) 
*"'힘을 쓴다(padahati)'는 것은 '피부와 힘줄과 뼈만 남은들 무슨 상관이랴.'라고 생각하면서 노력하는 것이다."(DA.iii.803)
*"'이미 일어난(uppanna)'이란 습관적으로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것이다. 이제 이런 것들을 일어나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이들을 버리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한다."(DA.iii.803)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유익한)(anuppanna kusala)'이란 것은 아직 얻지 못한 초선 등을 말한다."(DA.iii.803)
*"'이미 생겨난(uppanna)'이란 것은 이들을 이미 얻은 것이다."(DA.iii.803)
*"'바로 세우고(지속시키고)(thiti)'라는 것은 계속해서 일어나게 하여 머물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DA.iii.803)
*"이 바른 정진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움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마음 등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네 경우에 대한 역활을 성취하여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하면서 오직 하나의 유익한 정진이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정진(samma-vayama)'이라 한다."(DA.iii.803)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입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이어 보면서) 머뭅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뭅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뭅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뭅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바른 마음챙김이라고 불립니다.  

 

*"바른 마음챙김 역시 몸 등을 파악하는 마음의 다양함 때문에 처음에는 여럿이지만 도의 순간에는 이 네 경우에 대한 역활을 성취하여 도의 구성요소를 완성하면서 오직 하나의 마음챙김이 일어난다. 이것을 '바른 마음챙김(samma-sati)'이라 한다."(DA.iii.803)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입니까?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伺]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 희열]과 즐거움[樂.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증득하여 머뭅니다.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과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와 미세한 사유(지속적 고찰)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증득하여 머뭅니다.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 ․ 正知]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경험하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라고 하는제3선(三禪)을 증득하여 머뭅니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에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증득하여 머뭅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바른 삼매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바라나시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여래․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위없는 법의 바퀴[法輪]가 굴러졌습니다. 그것은 하늘(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의 그 누구에 의해서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이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기뻐했다.

 

 

진리의 분석 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