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랑카섬 국가종교의 내부분열에 대한 비판적 小考

실론섬 2016. 7. 4. 22:38

 

랑카섬 국가종교의 내부분열에 대한 비판적 小考
-Dīpavaṃsa 19章에 묘사된 Abhayagiri-vihāra의기원을 중심으로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44호(2015.09) pp. 101∼127 
김경래/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wizkyung@naver.com)

 

I. 서 론 

II. Mahāvaṃsa에 근거한 해석과 그 문제점

III. Dīpavaṃsa 19장 분석 

IV. 결 론 

 

요약문

마하왕사(Mahāvaṃsa)를 비롯한 빠알리 문헌들은 스리랑카 테라와다 내부분열의 원인을 아바야기리 사원(Abhayagiri-vihāra)의 등장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아바야기리 사원은 왓따가마니 아바야 통치기에 건립되었으며, 왕권의 후원을 받아 인도본토의 급진적인 사상을 수용하면서 당시 기득권이었던 마하위하라 세력을압도 했다고 한다.그러나 현존하는 빠알리 문헌을제외하면, 1,000년이상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했다고 알려진 아바야기리 사원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빠알리 문헌을 제작한 것이 마하위하라 세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바야기리 사원과 관련된 일반론들은 면밀한 재검토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존에 통용되던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기 위해 논자가 선택한 텍스트는 『디빠왕사(Dīpavaṃsa)』이다. 현존하는 빠알리 문헌 중 최초로 ‘Abhayagiri’라는 고유명사를 언급하고 있는 이텍스트는 여타의 빠알리 문헌들과 달리 당대의 상황을 비교적 건조한 관점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를 정리해보면, 자이나수행자‘기리’가 살던 곳에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이 붙여졌고, 이후 왓따가마니 아바야가 이 지역 수행자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디빠왕사』는 Abhayagiri라는 지명만을 언급할 뿐, ‘아바야기리 사원(Abhayagiri-vihāra)’이라는 복합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음은물론, 이 사원이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단서를 남기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왓따가마니 통치기에 아바야기리 사원이 분파의 거점으로서, 그리고 독립된 사원세력으로서 인식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I. 서 론

 

본 논문은 랑카섬1)의 국가종교였던 테라와다 교단의 내부분열에 대한 비판적 試論으로서, 한때 랑카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알려진 ‘아바야기리 사원(Abhayagiri-vihāra)’의 기원을 재검토할 것이다. 빠알리 문헌들, 특히 『마하왕사(Mahāvaṃsa, 이하 Mhv)』로 대표되는 연대기들 속에서 아바야기리 사원은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내부분열을 초래한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Mhv가 전하고 있는 아바야기리 사원의 기원과 전개는 다음과 같다.  

1) 현재 통용되는 ‘스리랑카’라는 명칭은 현대 국가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본 논의에서 다루는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적절치 않다.

    따라서 논자는 빠알리 문헌에서 자주 언급되는 ‘랑카섬 (Laṅkā-dīp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용어사용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Gethin, Rupert, Was Buddhaghosa a Theravādin? 
    Buddhist Identity in the Pāli Commentaries and Chronicles. In How Theravāda is Theravāda? Exploring 
    Buddhist Identities, eds. Peter Skilling, Jason A. Carbine, Claudio Cicuzza, and Santi Pakdeekham
    (Chiang Mai: Silkworm Books, 2012), p.1.

 

왓따가마니 아바야 통치기(Vaṭṭagāmani Abhaya, BCE 43, 29-17)2)에 남인도 세력이 랑카섬을 침략한다. 이에 왕은 수도를 버리고 피난 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기리(Giri)’라는 이름의 자이나 수행자가 도망 다니던 왕을 조롱한다. 왓따가마니는 이후 불교 승려 마하띳사(Mahātissa)의 도움을 받아 다시 왕권을 회복한다. 수도로 돌아온 왕은 예전에 자신을 조롱했던 자이나 수행자의 거처를 몰수하고, 그 자리에 ‘아바야기리(Abhayagiri)’라는 이름의 사원을 건립한다. 왕은 자신을 보필했던 마하띳사에게 아바야기리 사원을 기증하고 정치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에 불만을 품게 된 당시 기득권 세력인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승려들은 마하띳사를 교단에서 축출한다. 이 사건을계기로 마하띳사의 제자들은 마하위하라 승려들과 반목하게 되었고, 아바야기리 사원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독자적인 사원세력을 형성하게된다. 그리고 이로인해 마하위하라 세력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랑카섬의 테라와다 전통은 두 개의 사원세력으로 분열된다. 아바야기리 세력은 인도로부터 산스끄릿(Sanskrit)에 기반 한 대승전통을 수용하면서 기존의 보수적인 테라와다 전통에 새로운 사상을 수혈했다. 또한 통치자들과도 원활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왕권의 후원을 얻으며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세력을 압도한다. 그러나 1,000년 이상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바야기리 세력은 CE 12세기에 이르러 마하위하라 세력으로 통폐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이 전승하던 문헌들은 모두 소실되었다. 그 결과 현존하는 테라와다 문헌은 모두 마하위하라 세력이 전승한 빠알리 문헌들뿐이다.3)  

2) 왓따가마니 통치기는 침입세력이 세운 왕조로 인해BCE 43년에 단절되었다가  29년부터 다시 시작된다. 고대 랑카섬

    통치자들의 통치기간및 계보는 Adikaram, E. W. Early History of Buddhism in Ceylon(Colombo: M.D. Gunasena & CO.,

    LTD., 1953), Appendix III을 따름. 
3) 아바야기리 사원의 기원과 내부 분열에 대해서는 Mahāvaṃsa 33.43-44; 80-98; 산스끄릿수용에 대해서는

    Samantapāsādikā III pp.582-583; 대승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Malalasekera, G.P., Pāli Literature of 
    Ceylon(Colombo: M.D. Gunasena & CO., LTD., 1928), p.53; CE 12세기 통폐합에 대해 서는Ronald Inden,

    Jonathan S. Walters, and Daud Ali, Querying the Medieval, Texts and the History of Practices in South 
    Asia(New York: Oxford Univ. Press, 2000), p.144.

 

그러나 위와 같은 일반론에는 심각한 논리적 비약과 사료적 한계가 전제되어 있다. 첫째, 현존하는 빠알리 문헌을 제외하면 위와 같은 드라마틱한 대립구도와 긴장관계는 다른 어느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 아바야기리 세력이 마하위하라 세력과는 다른, 독립적인 수계전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셋째, 아바야기리 세력이 산스끄릿 대승전통을 수용한 시점이인도에서의 산스끄릿 전개사와 서로 모순된다. 넷째, 후대문헌을 통해 두 세력이 지속적으로 소통 및 교류해왔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상 제기된 다양한 비판적 논의들을 재검토하기 위한 시발점으로서, 이미 밝혔듯, 논자는 바야기리 사원의 기원을 살펴보고자 한다.그리고 빠알리 연대기들이 전하는 일반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위한 사료로서 『디빠왕사(Dīpavaṃsa, 이하 Dpv)』를 분석할 것이다. Dpv는 현존하는 最古의 빠알리 연대기로서, 총22개의 章으로 구성되어 있고, 붓다시대부터 CE 4세기 랑카섬의 통치자였던 마하세나(Mahāsena)의 행적까지를 다루고 있다. Dpv의 성립시기와 관련하여자들간에는 다양한 논란이 있어 왔지만, 이들 모두 CE 5세기이전에 이 연대기가 제작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다.4) 이는 붓다고사(Buddhaghosa, CE 5세기)로 대변되는 마하위하라 주석가들이 편집한 빠알리 주석서(Pāli-aṭṭhakathā)는 물론, 테라와다 전통의 가장 대표적인 연대기인 Mhv보다도 시기적으로 Dpv가 앞서 있음을 의미한다.5) 물론 이러한 TK실이 Dpv가 마하위하라의 세계관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점은, Dpv 제작시기가 마하위하라 세계관이 표면적으로 확고히 드러나기 이전이라는 것이다. 이는 여타의 빠알리 문헌들과 달리 Dpv 속에 마하위하라와는 무관한, 가필되지 않은 역사정보가 들어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4) Oldenberg, Hermann, Dīpavaṃsa, An Ancient Buddhist Historical Record(Oxford, London: The Pali 
    Text Society, 2000), pp.8-9; G.P. Malalasekera, op. cit., p.138; Norman, K.R., A History of Indian 
    Literature(Wiesbaden: Otto Harrassowitz, 1983), p.115; Hinüber, Oskar von, A Handbook of Pāli 
    Literature(Berlin: Walter de Gruyter, 1996), p.89; Hazra, Kanai Lal, The Buddhist Annals and 
    Chronicles of South-East Asia(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vt. Ltd., 2002), pp.4-5. 
5) 붓다고사와 마하 위하라간의 관계, 그리고 이것이 지닌 정치·종교적 함의에 대해서는 김경래, 「붓 다고사의

     행적에 대한 연대기의서술과 의도-Mahāvaṃsa 37장 215-246송을 중심으로」, 「한국불 교학」제63집  
    (서울: (사)한국불교학회, 2012b), pp.415-441.

 

그러나 이러한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Dpv는 조악한 문장들과 개연성 없는 내용구성은 물론, 일관성 없는 서술방식-예컨대 운문과 산문의 혼용-등으로인해, 이를 연구하려는 학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Dpv를 처음으로 편집·번역했던 올덴베르그(Hermann Oldenberg)는 이러한 텍스트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Mhv를 토대로 Dpv의 난문들을 재해석했다. 이후 그의 해석방식은 Dpv의 난문들을 해독하는모범적인 해석방법론으로서 정착되었고, Dpv는 Mhv와 함께 랑카섬의 고대사를 다루는 가장 대표적인 텍스트로서 함께 연구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올덴베르그의 방법론에 전제된 몰역사적인 태도이다. Mhv에 비해 Dpv는 상대적으로 앞선 사료들을 보다 건조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6) 그러므로 올덴베르그 이후 정착된 해석방법론은 후대의 특정 사관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고대사료를 재단하는 해석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올덴베르그는 Mhv에 투사된 마하위하라 세력의 관점을 중심으로 Dpv만이 전하고 있는 고유의 증언을 외면하고 곡해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6) Dpv와 Mhv 각각의 연대기적 특징과 상호간 서술상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김경래, 「Theravāda 정통성에 

    대한 小考-Dīpavaṃsa와 Mahāvaṃsa 비교연구를 중심으로」, 「한국불교학」제62집(서울: (사)한국불교학회,

    2012a), pp.303-336.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Dpv에 대한 최근 연구들중 가장 주목할만한 성과로는 2012년에 출판된 카즌스(Lance Cousins)의 논문, ‘아바야기리 학파의 사상들(The Teachings of the Abhayagiri School)’을 들 수 있다. 카즌스는 이 연구를 통해 아바야기리 사원(Abhayagiri-vihāra)의 기원과역사, 문헌,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이 견지했던 교리적 관점들에 대해 종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동안 Mhv에 비해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던 Dpv의 새로운 가치를 부각시켰다. 그에 따르면, Mhv에 비해 Dpv는 후대의 가필에서 벗어난 보다 노골적인 전거이며, 고대 사료들을 ‘날 것’ 그대로 종합한 문헌이다. 따라서 Dpv야말로 베일에 가려진 랑카섬의 역사와 신비로운 사원인 아바야기리의 실체를 드러나게 해 줄 결정적인 사료임을 역설했다.7)   

7) Cousins, L.S., The Teachings of the Abhayagiri School. In How Theravāda is Theravāda? Exploring
    Buddhist Identities, eds. Peter Skilling, Jason A. Carbine, Claudio Cicuzza, and Santi Pakdeekham
    (Chiang Mai: Silkworm Books, 2012), pp.75-83.

 

이상의 기존 연구들을 바탕으로, 본 논문의 논점을 보다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논자가 검토해 볼 텍스트는 Dpv 19장(章)이다. 19장은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이 언급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빠알리(Pāli) 전거이다. 뿐만 아니라 1,000여년간 경쟁 세력이었던(혹은 후대 빠알리 문헌들 속에서 경쟁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는) 마하위하라와 아바야기리 사원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19장은 테라와다 내부분열과 아바야기리 사원의 기원을 재고하기 위해 반드시 검토해 보아야 할 텍스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19장 대부분의 송들은 난삽한 문장과 개연성이 부족한 문맥구조로 인해 다양한 해석상의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논자는 Mhv를 토대로 재구성된 올덴베르그의 19장 해석과, 이에 대한 카즌스의 비판적 해석을 되짚어보고, 이 두 가지 해석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19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향후 테라와다 내부분열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II. Mahāvaṃsa에 근거한 해석과 그 문제점

올덴베르그는 19장의 난해한 구성과 모호한 내용을 지적하며, Mhv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Dpv 19장을 분석했다.8)
8) Hermann Oldenberg, op. cit., p.208. note.1.

v1: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ni Abhaya)의 로하빠사다(Lohapāsāda) 건립
vv2-4: 둣타가마니의 마하투빠(Mahāthūpa) 건립을 위한 다양한 준비작업
vv5-9: 마하투빠 건립을 기념한 행사에 참석한 비구들
v10: 마하투빠건립
vv11-17: 랏지띳사(Lajjitissa)의 너그러운 치세, 그의 후계자들
vv18-20: 왓따가마니 아바야(Vaṭṭagāmani Abhaya)의 7전사들이 건립한 건물들
vv21-22: 왓따가마니의 후계자인 마하쭐리 마하띳사(Mahācūli Mahātissa)
v23: 둣타가마니의 죽음

 

위와 같은 분석에 따르면, 19장은 총 9명의 통치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둣타가마니 아바야(vv1-10; 23), 랏지띳사(vv11-13), 왓따가마니 아바야(vv14; 16-20), 5명의 다밀라 왕들(v15), 그리고 마하쭐리 마하띳사 (vv21-22).  

이들의 행적을 연대기순으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둣타가마니는 로하빠사다를 건립했고(v1), 마하위하라 대탑을 건립한 후(v10), 잠부디빠로부터 승려들을 초청했다(vv1-9). 이후 죽어서 도솔천에 태어났다(v23). 그의 뒤를 이은 랏지띳사9)는 비구들과 비구니들을 후원했고(vv11-12),쩨띠야山에 사원석탑을 건립했으며(v13a), 잘라까(Jalaka)라는 대중방을 만들어 보시했다(v13b).왓따가마니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5명의 다밀라 왕들이 14년 7개월간 통치했다(v15). 왓따가마니는 마지막 5번째 다밀라 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어(v16) 아바야기리 사원을 건립했고(v14), 쩨띠야에 아바야기리석탑을 세웠다(v17a). 그는 12년 5개월간 통치했는데(v17b), 이 기간 동안 왕을 따르던 일곱 명의 전사들이 사원건물들(vihāra, ārama 등)을 건립했다(vv18-20). 왓따가마니에 이어 왕이 된 마하띳사는 숨마(Summa) 장로를 후원했다(vv21-22).    
9) Lañjatissa 혹은Lañjitissa라고도불린다. Geiger, Wilhelm, The Mahāvaṃsa or The Great Chronicle of 
    Ceylon(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80), p.229.

그러나 Mhv에 근거한 위와 같은 해석은 Dpv의 빠알리 원문만으로는 유추할 수 없는내용들이다. 일단 Dpv 원문은 15송 이전까지 행위주체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19장에서 특정한 왕의 이름이 언급된 곳은 단 4개의 송들-5명의 다밀라 통치자들(15송), ‘삿다띳사’와 ‘아바야’(16송), ‘마하띳사’(21송), 그리고 ‘둣타가마니’(22송)-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1-14송까지의 내용이 다밀라 왕조 이전의 여러 통치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밀라 이전의특정한 한 왕에게 귀속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 나아가올덴베르그가 언급한 통치자들의 목록-둣타가마니(BCE 101-77), 랏지띳사(BCE 59-50), 왓따가마니(BCE 43: 다밀라 이전), 다밀라 5왕(BCE 43-29), 왓따가마니(BCE 29-17: 다밀라 이후), 마하띳사(BCE 17-3)-에는 적지 않은 연대기적 간극이 발견된다. 예컨대, 둣타가마니와 랏지띳사 통치기사이에는 삿다띳사(Saddhātissa, BCE 77-59)와 툴라타나(Thūlathana, BCE 59)가 생략되었고, 랏지띳사와 왓따가마니 사이에는 칼라따나가(Khallāṭanāga, BCE 50-43)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더 나아가 19장 마지막 송은 연대기적으로 가장 앞서는 둣타가마니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성이 결여된 편집 구조속에서, 19장을 구성하고 있는 23개의 송들에 언급된 행적을 몇몇 특정 통치자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일반적인 독자수준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해석이다. 

물론 Dpv 18장의 마지막 송(53송)에는 까까완나의 아들인 둣타가마니가 언급되고 있다.10) 따라서 내용상 18장과 연결된 19장의 도입부가 둣타가마니의 행적을 서술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Mhv와 달리, Dpv의 장(章) 배열은 연대기적 일관성을 지니지 않고 있기에, 이러한 반론 역시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Dpv에는 ①붓다의 랑카섬 방문 ②통치자들의 연대기 (rājavaṃsa) ③결집이후 인도와 랑카섬의 불교승단 전개사 ④위자야(Vijaya)부터 마하세나에 이르는 랑카섬의 일화 등이 언급되어 있다. 11) 그러나 Dpv 최종 편집자는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재구성하거나 편집하지 않고, 당대에 전승되던 다양한사료들을 가감없이 나열했다.12) 이는 Dpv가 일관적인 역사관에 입각하여 체계적인 구조로 제작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18장을 근거로 19장 도입부를 해석하는것 역시 Dpv연구를 위한 적절한 해석방법은 될 수 없다.
10)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두 頌에도 또한 정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Kākavaṇṇassa yo putto Abhayo nāma khattiyo. 18.53a; Saddhātissassāyaṃ putto Abhayo nāma khattiyo. 19.16a; 왓따가마니 아바야는 까까완나띳사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18장 53송의 ‘Kākavaṇṇa’는 까까완나 띳사를 지칭하고, ‘Abhaya’는 둣타가마니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왓따가마니 아바야는 삿다띳사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19장 16송에 언급된 ‘Abhaya’는 왓따가마니를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DPPN I p. 558; II p.817; 그러나 18장과 19장에 언급된 이 두 송이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검토가 요구된다. 예컨대 ‘Kākavaṇṇassa yo’와 ‘Saddhātissassāyaṃ’은 서로 다른 형태를 지닌 문구이다. 만약 yo나 ayaṃ이 오자가 아니라면, 이 두 문장은 그저 유사한 문장일뿐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18장과 19장 역시 별개의 정보를 언급하고 있는 독립된 章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것이다.    
11) Oskar von Hinüber, op. cit., p.90.
12) 동일인물의 이명표기(22.18; 22.30), 1~3차 결집 중복서술(1차 결집 4.1-26, 5.1-15; 2차 결집 (4.47-
     53, 5.16-38; 3차결집 7.34-43, 7.44-59), 아소까의 전법승 파견(9.32-40; 12.1-4; 17.83-86) 등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 Dpv의 내용은 당대 전승되던 다양한 자료들을 편집자의 가필 없이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K.R. Norman, op. cit., p.116.

 

또 다른 문제점은 아바야기리 사원의 기원이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19장의묘사들을 통해 아바야기리 사원이 건립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어떤 사건을 계기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Dpv 19장에서 아바야기리 사원과 관련된 정보를 담고있는 것은 14송과17송이다. 올덴베르그는 특히 14송이 아바야기리 사원의기원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4송은 paññatti와 vohāro라는 용어를 통해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 단원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14송만으로는 아바야기리 사원이 건립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반면, 17송은 이미 아바야기리 사원이 건립되었음을 분명히 암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아바야기리 사원은 14송 이후 17송 이전의 시기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건립시기와 주체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Dpv는 Mhv에 근거하여 통용되고 있는 일반론과는 상이한 역사적 상황을 담고 있다.

올덴베르그는Mhv를바탕으로Dpv의텍스트적한계를보완함으로써, 복잡하게 얽혀있는 내용들을 질서정연하게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분명 유의미한 해석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하위하라의 역사관이 투영된 후대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고대 사료를 재구성하는 오류를 범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음 단원에서는 Dpv 19장을 여타의 다른 연대기들과 비교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해석하며 위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III. Dīpavaṃsa 19장 분석

 

1. 아바야기리 등장 이전: 1-13송

Dpv 19장 1송은 왕이 궁전(pāsāda)을 건립했음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왕은9층높이이며, 값을따질 수 없을[만큼훌륭]하고, 4개의 출입구를 갖춘 궁전을 30꼬띠를 들여 건립했다.’ (1)13)

13) “pāsādaṃ māpayi rājā ubbedhaṃ navabhūmikaṃ, anagghikañ catumukhaṃ, pariccāgā tiṃsa 
    koṭiyo.” Dīpavaṃsa 19.1. 

 

앞서 밝혔듯, 올덴베르그는 일반명사 pāsāda를 특정건축물인 로하빠사다(Lohapāsāda)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문장의 주어인 rājan의 주격형태 rājā를 둣타가마니로 규정했다. Mhv에따르면, 로하빠사다는 데와낭삐야띳사(Devānaṃpiyatissa)시절 마하위하라에 건립된 포살당(uposatha)으로서, 훗날 둣타가마니에 의해 9층 건물로 증축되었다고 한다.14)

14) DPPN II p.795.

 

그러나 1송이 묘사하는 것은 단지 어떤 왕이 거대한 궁전을 건립했다는 것 뿐이다. 물론 Mhv와의 비교를 통해 ‘9층’이라는 단서를 바탕으로 이것이 로하빠사다임을 주장할수도 있다.그러나 Dpv의문구에만 주목한다면, 1송만으로는 19장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행위주체가 어떤 통치자를 지칭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이어지는 송들은 1송에 등장한 왕이 거대한 탑을 건축한다는 내용이다. 올덴베르그는 마찬가지로 Mhv를 근거로 이 묘사들을 마하투빠(Mahāthūpa), 즉 마하위하라 대탑에 대한 묘사로 해석했다. 그러나 Dpv 원문은 당시에 사용된 건축재료들과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준비를 매우 건조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석회판과 거대한 바위, 진흙, 구운 벽돌틀,

빛나는판, 철로 만든 망사장식, 모래, (2)

작고 단단한 돌, 8겹으로 된 8가지 돌, 12가지 수정과 은. (3)

끄샤뜨리야는 이러한 기초공사들을 하게 한후,

비구 승가를 쩨띠야 주변에 집결시켰다. (4)15)

15) “sudhābhūmi thūlaselaṃ mattikaṃ iṭṭhakāya ca, visuddhabhūmikā c’ eva ayojālaṃ tato marumpaṃ. 
     īsasakkharapāsāṇā aṭṭhaaṭṭhalikā silā phalikarajatena dvādasa, etāni bhūmikammāni kārāpetvāna 
     khattiyo, bhikkhusaṃghaṃ samodhānetvā cetiyāvattasammiti.” Dīpavaṃsa 19.2-4

 

이어 당시 집결한 사람들의 이름을 장황하게열거한 후(5-9송), 이것이 마하위하라 대탑을 위한 기초공사였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왕은] 가장 높은 마하위하라 대탑을 짓게 했다. 값을 따질 수 없는20[가지 보석(?)을] 

들여 보시가 [행해졌다.] (10) 16)

16) “kārāpesi mahāthūpaṃ mahāvihāram uttamaṃ, anagghaṃ vīsati datvā pariccāgo.”
      Dīpavaṃsa 19.10.

 

10송의 동사인 kārāpesi가 사역형(causative)이므로 이 거대한 탑이 왕의 명령하에 건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Dpv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단지 어느왕(rāja: 1송)이 거대한 궁전(pāsāda: 1송)을 건립했고, 이후 동일한 왕 혹은 그 다음 왕(khattiya: 4송)이 대대적인 기초공사(bhūmikammāni: 4송)를 통해 마하위하라 대탑(mahāthūpaṃmahāvihāram)을 완성했다는 내용에 불과하다. Dpv의 맥락에서 ‘pāsāda’는 단순한 ‘궁전’일 뿐이며, ‘mahāthūpa’는 마하위하라에 건립된 수많은 ‘탑’들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궁전’을 건립한 사건과 ‘거대한 탑’을 완성한 사건을 별개의 사건으로 볼 경우, 19장 도입부에 2명의 통치자가 전제되었다는 해석 역시 가능하다. 물론 이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또한 아무런 단서를 찾아 볼 수 없다.

 

11-13송은 왕이 승단을 위해 헌신한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비구 무리들이 여행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왕은] 여행에 [필요한] 약과 안식처를 제공했다. (11)

그리고 또한 ‘하리의 시절(?)’에 비구니들의 善說을 듣고서

왕국의 통치자는 비구니들이 원하는것이면 무엇이든 제공해 주었다. (12)

쩨띠야山에 석탑사원을 짓게 했고,

잘라까라 불리는 최고의 대중방(앉을자리가 있는 큰 거처)을 만들게 했다.(13)17)

17) “gamikavattaṃsuṇitvā bhikkhusaṃghassa bhāsato, adāsi gamikabhesajjaṃphāsuvihāraṃ. 
     bhikkhunīnaṃ vaco sutvā harikāle subhāsitaṃ, adāsi c’ eva bhikkhunīnaṃ yadicchaṃ rājaissaro. 
     silākathūpaṃ akāresi vihārañ Cetiyapabbate, kāresi āsanasālaṃ Jalakaṃ nāma uttamaṃ.” 
     Dīpavaṃsa 19.11-13. 

 

먼저 11송과 12송은 그 의미가 모호하다. 11송의 경우, ‘gamika-vatta’에서 vatta를 맡은 임무(duty,service, custom)로 이해할 경우, 이는‘소임에서 벗어난’이 된다. 반면, vatta를 vṛtta(Sk. news)의 변형형태로 볼 경우, 이는 ‘떠나있다는 소식’이 된다. 맥락상 후자의 의미, 즉 비구무리들이 정착하지 않고 여행을 한다는 소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된다.18)

18) PED p.597; Apte p.1490.

 

12송 역시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harikāle’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hari는 황색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이를 확대 해석할 경우 ‘왕국의 황금시대’, 즉 최전성기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보다는, 당시 통용되던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 즉 당대에 통용되던 ‘하리의 시기’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harikāle’라는 용어를 보다 분명히 밝힐수 있다면, 12송을 특정 시기에 귀속 시키는 명백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분명한 내용들에도 불구하고, 두 송(11-12송)은 동일한 통치자의 행적이 분명하다. 이 두 송은 동일한 동사형태(adāsi)가 반복되고 있으며, 비구와 비구니를 후원했다는 순차적인행적이 내용상 대구를 이루고 있다. 또한 12송에언급된 ca는11송과12송의 동사 adāsi를 연결하는접속사로서, 11송과 12송이 증언하고 있는 행적들이 한 명의 통치자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물론 이 동일한 한 명의 통치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다.

 

13송은 문장 구조상 앞선 두 송과는 별개의 사건으로서, 어떠한 개연성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11-12송과 대구를 이루지 않는 이전의 1-10송, 그리고 이후의 13송은 각각 다른 통치자의 행적일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다음 단원에서 다룰 14송, 즉 ‘아바야기리의 등장’ 이전까지 Dpv는 최소 3명의 통치자를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단서도 찾아 볼 수 없다.

 

2. ‘Abhayagiri’라는 명칭의 기원: 14-15송

14송은 ‘아바야기리’를 언급하는 최초의 전거로서, Pāli 원문은 아래와 같다.

 

Girināmanigaṇṭhassa vuṭṭh’ okāse tahiṃ kato,

Abhayagirīti paññatti vohāro samajāyatha. (14)

 

올덴베르그는 Mhv를 근거로 14송 이후를 왓따가마니 아바야 통치기로 간주하며 위의 송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계통을 이은 통치자 왓따가마니에 의해,] 자이나 수행자인 Giri가 머물던 곳에 [사원이] 건립되었다. 아바야기리라는 호칭과 이름은 [이러한 사건으로부터] 기원했다 

([By the next king, Vaṭṭagāmani, a monastery] was constructed at the place where the
Nigaṇṭha Giri had dwelt. [From this circumstance,] the appellation and the name of
Abhayagiri derived its origin.).”19)
19) Hermann Oldenberg, op. cit., p.209.

 

그러나 카즌스는 Mhv에 언급된 자이나 수행자 ‘기리’와 ‘아바야기리’에 대한 일화를 당시 떠돌던 야사로 간주하며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14송을 통해 아바야 언덕(giri)에 한때 기리(Giri)라는 이름의 자이나 수행자가 거주했었다는 정보를 제외하면, 다른 어떠한 언급들도 신뢰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4송을 둣타가마니 통치기로 규정하며, 이 송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Giri’라는 자이나교도가 거주했던 곳에 Abhaya 언덕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한 사원이 등장했다(The designation of Abhayagiri was made for that place which the Jain named Giri had inhabited. A monastery came into existence.).”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서 카즌스는 14b송의 vohāra를‘사원(vihāra)’으로 해석하면서, 앞 단어 paññatti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변형형태가 발생했다고주장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20)

20) L.S. Cousins, op. cit., pp.68-74.

 

"따라서 Dīpavaṃsa가 진술한 것은, 어떤 사원이 (둣타가마니) 아바야에 의해 아바야 언덕 이름을 본 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아바야 언덕이 그 사원의 이름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원은 보통 아바야 사원(Abhayārāma)으로 불린다."

 

카즌스는 14송이 왓따가마니가 아닌, 둣타가마니 아바야 통치기를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에서 ‘기리(giri)’는 ‘언덕’을 지칭하는것으로서, 자이나 수행자의 이름과는 무관함을 역설했다. 이는 올덴베르그 이후 별다른 비판 없이 수용되어왔던 기존의 Dpv 해석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의 주장이 적용될 경우, 아바야기리 세력의 시발점, 혹은 테라와다 내부분열의 맹아는 BCE 2세기, 즉 둣타가마니 아바야 통치기까지 소급 가능해진다.여기서 주목할 점은,이러한 해석의 여지가 단순한 시기상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둣타가마니는 Mhv를 비롯한 주석서들에서 마하 위하라를 수호하는 성군으로 그려지고 있다.21) 마하위하라와 경쟁하며 긴장관계를 형성했던 아바야기리 세력이 만약 둣타가마니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면, 랑카섬의 역사는 물론, 더 나아가 테라와다의 내부분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카즌스의 이러한새로운 해석은 Dpv 19장은 물론, 테라와다 교단의 전개과정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과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21) 김경래, 「랑카섬의 국가종교 수호자들과 아비담마-연대기(Vaṃsa)와 주석서(Pāli-aṭṭhakathā)를 중심으로」, 

    「한국불교학」제70집(서울: (사)한국불교학회, 2014), pp.342-345.

 

그러나 여기서 그가 제시한 14송 해석은 명백한 오역이다. 카즌스는 불필요한 교정 작업을 통해 원전의 의미를 오히려 불분명하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 이를 토대로 자의적인 해석을 이어갔다. 그 결과, 그가 제시한 가치 있는 여타의 지적들마저 재검토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먼저, 14송에 언급된 samajāyatha를 vihāra와 결부 시키는 것은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samajāyatha는 접두어(verbal prefix)인 sam과 ajāyatha가 결합되어 형성된 단어이다. 여기서 ajāyatha는 jāyati의 3인칭 단수 중간태(attanopada, middle) 아오리스트(ajjatanī, aorist) 형태이다.빠알리 형태jāyati는 동사어근√jan과 관련된 동사로서, ‘生하다(to be born)’, ‘자라나다(to grow)’, ‘되다(to become)’, ‘발생하다(to occur)’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22) Dpv 5장의 용례들을 통해 이 동사의 용법이 더욱 명백해진다.

 

tato aparakālamhi tamiṃ bhedo ajāyatha. 

(40a: 그 이후에 그 [분열된 무리]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visuddhatheravādamhi puna bhedo ajāyatha. 

(45a: 청정한 테라와다에서 또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vajjiputtakavādamhi catudhā bhedo ajāyatha. 

(46a:왓지뿟따까에서 네 갈래로 분열이 일어났다.)

 

위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 Dpv에서 동사어근√jan은 ‘건축(to build)’이나 ‘제작(tomake)’이라는 의미가 아닌 모종의 ‘유래(origin)’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특히 Dpv에서는 주로 부파의 기원과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19장 14a송에 언급된sam-ajāyatha는 ‘사원의 등장’이 아닌, ‘단어의 기원’을 의미한다. 특히sam-ajāyatha 앞에 언급된 vohāro가 ‘명칭’ 혹은 ‘용어’를 의미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다음과 같은 번역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판단된다: “‘Giri’라는이름의 자이나 수행자가 머물던 곳에 [그의 이름을 본따] Abhayagiri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게해서‘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이 생겼다.”

 

14b송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밝혀지는 정보는 다음과 같다. 첫째, Abhayagiri에서 giri는 ‘언덕(hill)’이 아닌 자이나 수행자의 이름이다. 카즌스는 Abhayagiri를 ‘아바야 언덕(Abhaya Hill)’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바로 앞서 14a송이 ‘기리’라는자이나 수행자를 언급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어지는 14b송에 언급된 giri는 언덕이라기보다는 자이나 수행자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

스럽다. 이와관련하여, 구법승 법현(法顯, CE 4-5)의 기록에서도 아바야기리의 명칭에 대한 혼란– 즉, 무외산정사(無畏山精舍)와 무외정사(無畏精舍)-이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자세히 검토하겠다.

 

둘째, 아바야기리 사원(Abhayagiri-vihāra)은 건립되지 않았다. 14송에는 자이나 수행자가 머물던 곳에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이 부여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 vihāra라는 표현은 없다. 이를 서술하는 문구 vohāro samajāyatha가 이에 대한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올덴베르그의 해석은 Dpv 텍스트가 허용하는 해석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으며, 카즌스 역시 불필요한 교정작업을 통해 원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암묵적으로 14송이 아바야기리 사원의 기원을 묘사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셋째, Abhayagiri라는 명칭이 등장한 시점은 다밀라 세력이 랑카섬을 침략하기 이전이다. 이어지는15송은 14년 7개월간 랑카섬을 통치한 5명의 다밀라 왕들-알라왓따(Ālavatta), 사비야(Sābhiya), 빠나야(Panaya), 빨라야(Palaya), 다티까(Dāṭhikā)-을 언급하고 있다.23) 이는 가이거(Wilhelm Geiger)가 편집한 Mhv의 내용과 다르다. 앞서 서론에서 밝혔듯, Mhv 속에서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은 다밀라 세력으로부터 왕권을 회복한 직후 아바야기리 사원의 건립과 함께 처음으로 등장한다. 또한여기서는 지역에 대한 명칭이 아닌 철저히 사원의 이름으로만 ‘아바야기리’가 언급되고 있다.24)

23) “Ālavatto Sābhiyo ca Panayo Palaya-Dāṭhikā, cuddasavassaṃ satta māsā pañca rājāno kārayuṃ.” Dīpavaṃsa 19.15. 
24) Mahāvaṃsa 33.78-83.

 

정리해보면, 14-15송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밀라 침략 이전에 이미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었지만, 아바야기리 사원은 아직 건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 아바야기리 사원의 건립 이후: 16-23송
16송에 따르면, ‘아바야(Abhaya)’라는 왕이 다밀라 세력의 마지막 왕인 다티까를 몰아내고 랑카섬의 통치계보를 다시 이어간다.

삿다띳사의 아들인 ‘아바야(Abhaya)’라는 이름의 크샤뜨리야가
다밀라[통치자였던] 다티까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16)25)
25) “Saddhātissassāyaṃ putto Abhayo nāma khattiyo, Dāṭhikaṃ Damilaṃ hantvā rajjaṃ kāresi khattiyo.” Dīpavaṃsa 19.16.

16송은 처음으로 통치자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앞서 15송에서도 5명의 통치자들에 대한 이름이 열거되었으나, 이들은 아바야기리 사원과는 무관한 다밀라 출신 통치자들이었다. 반면 16a송에서 언급된 삿다띳사의 아들 ‘아바야’는 후대 빠알리 전통에서 아바야기리 사원을 건립하고 후원한 인물로 묘사되는 ‘왓따가마니 아바야’이다. 16a송 원문은 아래와 같다:   

 

Saddhātissassāyaṃ putto Abhayo nāma khattiyo

위의 문구를 통해 16송 이전의 행적들 혹은 그중 일부의 행적이 삿다띳사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독자 수준에서 이 텍스트를 해석한다면, 16a송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삿다띳사의 통치기, 그리고 이후는 그의 아들 아바야의 통치기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Saddhātissassa ayaṃputto’라는 문구는 이전의 행적들이 삿다띳사와 무관한 것임을 시사한다. 만약 앞선 송들의 주체가 삿다띳사였다면, 이 문구는 ‘Saddhātissassa tassa putto’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tassa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앞서 이미 전제되었던 왕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제까지 언급한 바로 그 삿다띳사의 아들’을 의도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Abhayo를 강조하는 ayaṃ은 23송에서 언급될 또다른 아바야, 즉 둣타가마니 아바야와의 차별을 두기 위한 장치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미 앞 송들에서 왓따가마니가 아닌 다른 ‘아바야’-예컨대 둣타가마니 아바야-가 전제되었을 가능성 또한 시사한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16송 이전의 행적들, 다시 말해 자이나 수행자의 거처에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왓따가마니 아바야는 물론 그의 아버지 삿다띳사의 통치기 보다 앞선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17a송은 아바야 왕과 아바야기리사원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앞서 14송이 단순히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의 기원만을 언급했다면, 17a송은 이미 아바야기리 사원과 관련된 정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17a송 원문 역시 다양한 해석상의 여지를 남긴다. 

 

Abhayagiriṃ patiṭṭhapesi silāthūpaṃ cetiyam antare.

Dpv의 산만한 언어구조를 감안한다면, 17a송은 patiṭṭhahati(pati+√sthā, to stand firmly, be established)의 사역형 아오리스트인 patiṭṭhapesi를 제외한 다른 단어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먼저 올덴베르그는 Mhv를 근거로, “그가 석탑과 쩨띠야 사이에 아바야기리 사원을 조성했다(He erected the Abhayagiri monastery between the Silāthūpa and the Cetiya).”로 해석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왕은 이미 완성되어 있던 쩨띠야와 석탑 사이에 아바야기리 사원을 조성한 것이 된다. 그러나 카즌스는 올덴베르그의 해석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쩨띠야 내부에 있는 ‘아바야 언덕 석탑’을 건립했다(He erected the stone stūpa of Abhaya Hill[which is] within the shrine).” 혹은 “그는 내부에 석탑을 지닌 ‘아바야 언덕 쩨띠야’를 건립했다(He erected the Abhaya Hill shrine with a stone stūpa inside).”26)
26) Hermann Oldenberg, op. cit., p.209; L.S. Cousins, op. cit., p.75.

카즌스의 재해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17a송에 대한 해석은 결국 2격(accusative) 형태를 지닌세개의 명사들-Abhayagiri,silāthūpa, cetiya-을 서로 어떻게 연결할 것이며, 더 나아가 이들이 동사 patiṭṭhapesi와 형용사 antara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antara는 복합어 어미(in fine compositi, at the end of a compound)에 첨가되어 ‘a different/another...’라는 의미를 형성한다.27) 따라서 7격(loc.)형태 antare는 cetiya와 결합되어 ‘다른 쩨띠야에 …을 건립했다’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올덴베르그와 카즌스의 해석과 달리, 명사 Abhayagiri는 앞서 14송 분석을 통해 밝혔듯, 사원이나 언덕의 명칭이 아닌, 자이나 수행자가 거주하던 장소를 지칭한다. 따라서 Abhayagiri는 이미 앞서 14송에서 확립된 거주처의 명칭이므로 patiṭṭhapesi와 단독으로 연결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진다.
27) Cone I p.148.

원문: Abhayagiriṃ patiṭṭhapesi silāthūpaṃ cetiyamantare.
①Abhayagiri-silāthūpaṃ patiṭṭhapesi cetiya-m-antare: 다른 쩨띠야에 아바야기리 석탑을
건립했다.
②Abhayagiri-cetiya-m-antare silāthūpaṃ patiṭṭhapesi: 다른 아바야기리 쩨띠야에석탑을 
건립했다.

 

위의 해석들은 서로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모두 ‘아바야기리’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모종의 종교행위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당시 통치자였던 왓따가마니 아바야가 아바야기리 사원, 혹은 이 지역과 관련된 모종의 집단을 후원했다는 것 역시 이 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종교행위가 시작되었고, 더 나아가 ‘아바야기리라는 이름을 지닌 석탑 혹은 쩨띠야가 건립되었다는 것은, 이미 이 지역에 사실상 승려들이 거주하는 거대한 사원이 건립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이 지역 집단을 하나로 응집시키는 모종의 중심지-빠알리 문헌들이 묘사하는 아바야기리 사원과 유사한 중심-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비록 누가 아바야기리 사원을 건립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17송에 이르러 아바야기리 사원, 혹은 그에 상응할 만한 상징적인 거점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고, 또 그사원(혹은 거점)을 중심으로 석탑과 쩨띠야도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바야기리 지역에 거주하는 승려들의종교활동이 왕권의 후원을 받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송들에서는 더 이상 아바야기리 사원과 관련된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8-20송은 왓따가마니를 따라 전공을 세웠던 일곱 명의 전사들이 행한 공덕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21-22송은 마하띳사(Mahātissa)의 치세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23송은 이제까지 언급된 왕들중 연대기적으로 가장 앞선 통치자인 둣타가마니 아바야가 생전에 지은 공덕으로 인해 도솔천에 다시 태어났음을 언급하고 있다.   

IV. 결 론


본 연구를 통해 논자는 Dpv 19장을 바탕으로 아바야기리 사원의 기원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Dpv 원문이 제공하는 범위 내에서만 바라본 아바야기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은 자이나 수행자의 거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복합어 Abhaya-giri에서 ‘giri’는 일반명사(giri, 산 혹은 언덕)가 아닌 고유명사(Giri, 자이나 수행자의 이름)를 지칭한다. 이는 Mhv가 전하는 극적인 일화-왓따가마니와 자이나 수행자와의 만남-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Dpv가 규정하고 있는 이 사원의 정확한 명칭은 아바야 언덕사원(Abhaya Hill Monastery, 혹은 無畏山寺)이 아닌, ‘아바야기리 사원(Abhayagiri Monastery)’이다.  

 

둘째, 지명으로서의 ‘아바야기리’는 다밀라 침략 이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물론 19장 도입부에 어떠한 통치자의 이름도 명시되어 있지 않기에 이 지명이확립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바야기리라는 지명은 다밀라 침략 이전, 더 나아가 왓따가마니 아바야와 그의 아버지 삿다띳사의통치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음에는 틀림없다. 이는 Mhv가 묘사하고 있는 아바야기리의 기원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Mhv 속에서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은 다밀라와의 전쟁을 끝내고 왕권을 회복한 왓따가마니가 전란 도중 자신에게 모욕을 준 자이나 수행자에게 복수를 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Mhv에서 ‘아바야기리’는 - 그것이 사원의 이름이었든 아니면 지명이었든 간에 - 시기적으로 최소한 다밀라 침략 이후를 그 기원으로 한다.  

 

셋째, 아바야기리 사원(혹은 모종의 거점)은 왓따가마니 아바야 통치기 이전에 이미 건립되었다. 그가 아바야기리 지역을 중심으로 결속된 승려집단을 후원했다는 문구가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흥미로운 점은, Dpv가‘아바야기리’라는 지역명칭과 그곳의 종교시설물들을 언급하면서도 ‘아바야기리 사원’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Mhv는 아바야기리 사원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매우 분명하고 적극적인 서술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왓따가마니 아바야가 아바야기리 사원을 건립했고, 그 직후 아바야기리 소속 승려들이 마하위하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두 사원세 력간의 첨예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위의 내용들과 관련하여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Dpv 19장 10a송에 언급된 ‘마하위하라(Mahāvihāra)’라는 표현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Mhv를 중심으로 한 빠알리 문헌들 속에서 마하위하라는 단순히 사원건물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들은 테라와다의 정통성과 보수성의 상징이었으며, 더나아가 랑카섬 국가종교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Mhv는 마하위하라와 경쟁관계였던 아바야기리 세력 역시 독립적인 분파의 거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진술하고있다. 그리고 이를바탕으로, 엄격한자성에입각하여 아바야기리 사원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정치적 후원을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Dpv는 마하위하라 만을 언급할 뿐, 아바야기리 사원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는, 최소한 Dpv에서 만큼은, 당시 아바야기리 지역의 승려들이 거주하던 사원이 독립적인 분파의 거점으로서 인식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건물’은 완성되었으나 이것이 분파의 ‘거점’은 아니었기에 10a송의 ‘Mahāvihāra’에 상응할 만한 표현, 즉 ‘Abhayagiri-vihāra’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후대에 이곳이 실제로 신흥세력의 거점으로서 테라와다 세력의 분파를초래한 원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Dpv의 역사관속에서 왓따가마니 아바야 통치기에이러한 조짐은 찾아볼 수없다. 이는 테라와다가 기원전까지 어떠한 내부분열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만약 당시 내부분열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아바야기리 사원의 등장과는 무관했음을 암시한다.

 

결론적으로, Dpv가 제공하고 있는 단서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가설이 제기된다. 삿다띳사 통치기 이전, 짐작컨대 둣타가마니 아바야 통치기 전후(BCE 2세기)를 기점으로 특정 지역에 ‘아바야기리’라는 명칭이 부여된다. 이 지역은왓따가마니 통치기때 이미 승려들이 거주하며 집단을 이루고있었다. 통치자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내부분파로서의 맹아를 짐작해볼 수는 있으나, 아직 이들에게서 분열의 조짐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랑카섬의 단일한 국가종교집단, 다시 말해 마하위하라 사원을 구심점으로 하고있는 테라와다 교단의 일원이었다. 아바야기리 지역에있는 사원은 그저 하나의 이름 없는 위하라(vihāra), 혹은 마하위하라 산하의 수많은 사원들 중 하나에 불과했기에 당시로서는 거론될 필요조차 없었다.

 

이상 Dpv 19장 분석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이 텍스트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비역사적인 관점과 비논리적인 태도로 일관되어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의 독립된 사료로서 Dpv는 보다 정밀한 역사적·문헌학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Dpv라는 까다로운 텍스트 속에 숨겨진 테라와다의 초기역사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빠알리 문헌을 통해 외도로 묘사되어 온 신비의 사원인 아바야기리 역시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 될수있을 것이다. 또한 Dpv와 Mhv에서 발견되는 서술상의 불일치를 통해, 현존하는 빠알리 문헌들에 투사된 마하위하라의 저술의도 역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을 통해서만이 현재 무비판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테라와다 내부분열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적 관점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