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조성택

실론섬 2016. 8. 1. 19:35

『불교학연구』 제23호(2009. 8.)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

(본고는 2008년 7월 26일부터 8월 23일까지 매주 토요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불교의 역사적 이해”(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시리즈09) 제 2주차 강의(인도불교사

의 새로운 이해: 근대불교학 비판2)의 내용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조성택 교수/고려대학교


Ⅰ. 문제제기: 역사의 부재

Ⅱ. 유럽 근대불교학의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대한 검토

Ⅲ. 법(法, dhamma)과 기억

    1. 법(法, dhamma)과 교(敎, sāsana)

    2. 삼명(三明, tevijjā) vs. 명행(明行, vijjā-caraṇa)

    3. 기억의 문제

Ⅳ. 결어


[요약문]

본고는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 된 유럽 근대불교학의 한

성과로 일컬어지는 초기불교사에 대한 재검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유럽 근대불교학은 문헌학적 방법론과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통해 

초기불교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초기불교사, 특히 불멸(佛滅)후 부파 성립에 이르는 기간의 

경우 후대 전승의 문헌 기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그 마저 서로 

상충되거나 ‘역사의 침묵’이라 할 수 있는 많은 결여 부분들

(missing links)이 많기 때문에 그 재구성의 과정에서 추정과 역사적

상상력은 불가피하였다.


본고에서는 초기불교사를 재구성하는데 적용되었던 유럽 근대불교학의 

암묵적 전제들을 재검토하고 불교의 종교적 사상적 특징에 입각한 

새로운 재구성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모색은 

문헌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넘어 고대불교를 ‘상상’하는 다양한 

능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I. 문제제기: 역사의 부재


불교 경전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evam me suttam ekasmin samaye; 如是我聞 一時 佛在...]이라는

정형구로 시작 된다. 이 정형구와 함께 이어지는 내용은 반드시 ‘누가’

(who)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왜’(why) 그리고 ‘어떻게’

(how)라는 소위 역사 서술의 기본 ‘정보’들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언제’(when)에 대해서는 불특정한 어느 때를 가리키는 

‘한때’[ekasmin samaye; 一時]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이 점은 다른 

고대 문화권 특히 한자문화권의 사건 서술과 크게 대비된다.1)

1) 正史에 있어서 정확한 연대의 서술은 가장 기본 사항이고, 모든 기사(記事)마다 ‘某王, 

   某年 某月’의 연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이 차이가 구술(口述)문화 

   전통의 인도문화권과 문자(文字)문화 전통의 중국문화권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미술과 음악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같은 예술 행위

   이지만 미술 작품은 완성되는 순간 시공간적으로 고정된다. 

   한편 음악은 일종의 재현 술이다. ‘재현’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우선 시공간적 

   제약이 없다. ‘재현’의 또 다른 의미는 ‘현현’(manifestation)을 뜻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연주/재현되는 순간---그 재현이 연주를 통해서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머리로 

   떠올리는 것 또한 포함 한다---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재현 예술의 특징은 그대로 

   구전 문화 전통의 특징이 된다. 예를 들자면 브라흐마니즘의 만트라 독송, 대승불교의 

   염불 수행 등은 각각 ‘신성함 힘’(sacred power)과 ‘붓다’의 ‘현현’(manifestation)을 

   위한 것들이다.

   한편, 문자 전승의 특징인 ‘고정성’은 우리에게 무척 익숙하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의 

   대부분의 역사자료가 문자 기록이며, 또한 동아시아인들은 대체로 이 문자의 고정성 

   그리고 고정성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엄정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전통의 춘추사관/춘추필법에 관련한 여러 담론들은 문자 기록의 고정성과 이에따른 

   엄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 주석 전통에서도 ‘한 때’[ekasmin samaye; 一時]에 관하여 정확한 

연대를 제공하기보다 그 종교적 혹은 철학적 의미를 제공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5세기 상좌부 전통의 붓다고샤(Buddhaghosa)에 따르면 ‘때’

(samaya, 時)란 선행하는 사건들의 조화, 즉 공동의 결과를 낳도록

되어 있는 인과관계들이 동시에 합쳐져서 발생하는 ‘고유한’(unique)

한 사건을 뜻한다.


붓다고샤는 이를 씨앗과 싹에 비유하고 있다. 씨앗이 싹으로 움트

위해서는 여러 선행하는 사건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우선 씨앗이 실해야하고, 적절한 장소에 뿌려지고, 이후 물주기, 가꾸기 

햇볕 등 여러 ‘사건’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싹’이라고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2) ‘한 때’[ekasmin samaye; 一時]라는 

절에 대한 붓다고샤의 이러한 설명은 요컨대 ‘씨앗’이라는 因이 싹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싹에 선행하는 여러 연(緣)들이 시공간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소위 불교 전통의 ‘다중인과론’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한 때’(一時, ekasmin samaye), 즉 

붓다의 설법이 이루어지는 그 시간은 과거 전생으로부터 이루어져 온 

여러 인연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우주적 시간’이 되는 것이다.

2) Gokhale(1994), pp5-6. 고케일은 ‘samavaya’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나, 팔리어에서 

   samavaya는 samaya의 한 용례로 볼 수 있다.


인과율은 전후(前後)라는 시간적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 서술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이다. 하지만 인도 불교 

통은 대단히 수준 높은 인과율을 발전시켜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사인식으로 발전시킨 것 같지는 않다.


불교 전통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란 선행하는 여러 인연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바로 ‘그 때’에 발생하는 ‘우주적 사건’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서술도 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초시간적’ 설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 불교의 초시간적 사건 이해는, 그리고 그에따른 

‘역사의 부재’는 약간의 지역 문화적 특성이 가미되면서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 한 좋은 예가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서의 ‘일시(一時)’에 대한 선사들의

석(註釋)이다.3)

3) 그 대표적 예를 소개하면:

   규봉(圭峰): 시(時)의 성취이니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설함과 듣는 일이 완성되어서 

   ‘한때’(一時)라고 한다. 지역마다 시간이 같지 않아서 다만 한때라 하고, 또 번을 설하고 

   법을 알아듣는 그때에 마음과 경계가 없어 지고 理와 智가 융통하고 범부와 성인이 같고 

   本과 始가 함께 모이니 이 두 법이 다 ‘한때’인 것이다. 설의(說誼): 오랜 세월과 일념

   (한순간)이 걸림이 없고, 옛날과 지금과 시작과 끝이 다 하나로 통하도다. 무엇이 이 같은가. 

   動과 靜이 항상 靑山中에 있음이니라.『 [ 金剛經五家解』,無比 譯解, 불광출판부, 

   1992. 78쪽; 87쪽]


고대 인도에 있어 ‘역사의 부재’는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베다

문헌은 아예 ‘先史’에 속하는 전통이고, 서사 문학(epic literature)에

속하는 푸라나(purana)에서도 정확한 연대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위 바라문 전통의 정통 역사서라 일컬어지는 ‘이티하사’(itihasa)에서

조차도 기술(記述)하고 있는 내용의 시기를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 또한 ‘역사’와 ‘신화’가 혼재되어 일반적 의미의 역사서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다문헌과 서사문학에 대해 모리스 

빈테르니츠(Maurice Winternitz)는 “역사의 암흑”(the darkness of 

the history of the Vedic and the epic literature)이라고 불렀다.4)

4) Winternitz(1983, revised edition) vol II, p. 3.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 전통 자체에서도 일반적 의미의 역사

의식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불교는 

고대 인도에서 ‘역사’를 찾는 데 기여를 하고 있다.


다른 인도 전통과는 달리 불교는 인도 밖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수입지에서의 불교 문헌에 관한 여러 연대기와 전래 일화 등을 통해

인도에서의 역사를 추정 혹은 비정할 수 있는 단서들이 존재하고 

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보다 직접적인 단서로서 불교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붓다의 활동시기를 통해 고대 인도사의 앞 뒤 순서 

도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리스 빈테르니츠(Maurice Winternitz)는 “우리의 발아래 역사라는 

밝은 햇볕을 비출 수 있게 된 것은 유일하게 불교문헌에서이다.”5)라고 

하며 그 빛은 거슬러서 베다 문헌과 인도 서사문학의 역사를 추정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6) 그런 점에서 고대 인도에서 ‘역사’는 불교를 통해 

비로소 그 해명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5) Ibid

6) 빈테르니츠의 이러한 언급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는 ‘불확실한’ 붓다의 탄생연대를 

   480 B.C 경으로 잡고 있는데 그 근거를 따로 밝히고 있지 않다.


붓다의 활동 시기에 관한 역사 정보는 아쇼카왕의 즉위 연대에 근거하고 

있다. 당시 통일인도의 마우리야 왕조는 그리스 등 주변국가와의 전쟁, 

대사 교환 등의 국제적 교류가 빈번 했다. 따라서 아쇼카 왕의 즉위 

연대는 그리스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수준의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아쇼카왕의 즉위 연대를 기원전 268년 혹은 

267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연대를 기준으로 붓다의 활동 시기를 정할 수 있는데 여기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역사적 자료가 있다. 불교학계에서는 이들을 각각 

‘긴 연대’(long chronology) 그리고 ‘짧은 연대’(short chronology)라 

부른다. 긴 연대는 상좌부 전통의『 디파밤샤』(Dīpavaṃsa, 島事)

『 마하밤사』(Mahāvaṃsa, 大事)에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불멸

(佛滅)후 218년에 아쇼카왕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럴 경우

붓다가 80세에 돌아가신 것은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붓다의 생몰연대는 기원전 566-486년이 된다.7)

7) 한편, 이 두 문헌에 따르면 야쇼카왕의 즉위년은 기원전 326년경이 되지만 이 연대는 

   그리스 자료에 비추어 볼 때 신뢰 할 수 없다. 하지만 상좌부는 자신들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여 1956년에 불기 2500년을 자축한바 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올해가 불기 

   2552년인데, 이는 상좌부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불교가 

   전승하고 있는 북방전통에 따르면 올해는 불기 2430년이다. 이러한 모순은 아마도 

   해방 후 어수선한 가운데 불교 기원을 정하면서 별다른 검토 없이 이미 세계 불교권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던 상좌부의 연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한편 북방 전승의 ‘짧은 연대’(short chronology)는 산스크리트 문헌, 

한역(漢譯)경전 및 티베트 자료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불멸(佛滅)후 

100년에 아쇼카왕이 즉위했다고 한다. 이럴 경우 붓다의 생몰은 기원전 

448년-368년이 된다. ‘긴 연대’와 ‘짧은 연대’는 118년의 차이가 있으며, 

학자들 간에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는데다가 같은 ‘연대’를 사용하더라도 

참고하는 부가적인 자료의 종류와 해석에 따라 몇 년씩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율장의 전승에 따른 ‘중성점기설’(衆聖点記說)에 의하면 

붓다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566-486년이 되어 ‘긴 연대’와 일치하고 있지만, 

‘긴 연대’를 더 신뢰하는 자료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8)

8) 참고로 역사에 관한 일반적 표준을 제공하는 것을 알려진 Cambridge History of India에서는 

   기원전 563-483년을, 그리고 Inde Classique 에서는 기원전 550-478년을 붓다의 

   활동연대로서 채택하고 있다.


장차 붓다의 활동시기에 관한 다른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이 두 연대기 간의 차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붓다의 활동 시기를 기원전 6세기와 기원 4세기 사이의 어떤 시기로 

잡는 것이 비교적 안전할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시기는 인류 문명사에서 여러 문명지역에서 진정한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유럽 지역은 밀레토스 학파를 

위시한 그리스의 자연 철학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였고, 근동(Near

East)지역에서는 선지자들이 등장하였으며, 중국에서는 공자가 

동하던 시기였고, 그리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의 사색가들과 

로운 자유사상가 그룹인 사문(沙門, śramaṇa)들이 등장하던 시기

였다.


붓다의 등장은 이러한 세계 문명사적 변화의 가운데 일어났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시기는 인류가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적, 종교적 

활동을 추구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9)

9) Frank Reynolds and Charles Hallisey(1989), p. 32.


한편 인도 사회의 경우 이 시기는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철기가 사용됨으로써 농업 생산량이 증대하였고, 

라서 잉여 생산이 가능하게 된 시기이다. 그리고 잉여 생산물을 

환하기 위한 시장이 발달하게 되고 그 시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당시 인도 사회가 누리고 있던 경제적

풍요로움은 당시 파탈리푸트라(Pāṭaliputra)를 다녀갔던 그리스 사신의 

여행기록에도 잘 나타고 있으며, 초기 불교경전에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잘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붓다의 활동 시기를 비록 정확하게 확정할 수는 없지만, 

략적 시기는 비교적 안전하게 추정할 수 있다. 이 추정 시기를 통해

붓다 당시의 세계 문명사적 흐름, 그리고 당시 인도의 사회경제적 

화와 그 변화와 함께 일어나는 종교적 인식 변화를 통해 붓다의 

‘역사적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본고는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 된 유럽 근대불교학의 한

성과로 일컬어지는 초기불교사에 대한 재검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앞 서 언급한 대로 ‘역사의 부재’라는 인도의 일반적 상황, 그 가운데에 

약간의 비정(比定)할만한 불교자료를 가지고 유럽 근대불교학은 

문헌학적 방법론과 비 문헌 자료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통해 

초기불교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과들은 곧이어 일본과 한국 등에 소개됨으로써 전통교학과는 

구별되는 근대적 불교학이 시작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초기불교에 관한 많은 연구 성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초기불교사를 재구성하는 근본적인 틀은 크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사, 특히 불멸(佛滅)후 부파 성립에 이르는 기간의 

경우 후대 전승의 문헌 기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그 마저 서로 

상충되거나 ‘역사의 침묵’이라 할 수 있는 많은 결여 부분들

(missing links)이 많기 때문에 그 재구성의 과정에서 추정과 역사적

상상력은 불가피하였다. 본고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적용되고 있는 불교에 대한 유럽적 상상력과 그 암묵적 전제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전을 중심한 인도 문헌의 성격과 불교의

종교적 특성을 간과한 채 유럽 전통의 문헌학과 역사적 방법론을 

다른 여과 없이 초기불교사에 거의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얼마만큼

유효한가하는 점이다.


본고에서는 초기불교사를 재구성하는 데 적용되었던 유럽 근대불교학의

암묵적 전제들을 재검토하고 불교의 종교적 사상적 특징에 입각한 

새로운 재구성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모색은 

문헌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넘어 고대불교를 ‘상상’하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고대불교사의 전체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문제는 논문 한편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며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본고는 다만 공고해 보이는 ‘고대불교사’라는 근대유럽 불교학의

‘구성물’에서 발견되는 조그만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한 것이다. 그런 점이서 본고에서의 논지의 

개방식은 적극적인 입론(立論)의 방식이라기보다 기존 입장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이 주로 될 것이다. 적극적 입론을 세우기에는

필자의 역량도 문제이거니와 보다 근본적인 것은 초기불교사를 재구성 

할 수 있는 역사적, 문헌적 자료가 부재하는 ‘역사의 침묵’ 문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II. 유럽 근대불교학의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대한 검토


근대불교학은 원산지인 인도에서의 ‘불교의 부재’라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신화’를 역사로 복구해야하는 상황에서 우선 시급한 

것은 방대한 불교 문헌에 대한 종합적 이해와 다양한 문헌의 언어학적 

관련성을 밝히는 일이었다. 팔리어 경전, 산스크리트 사본, 그리고 

한문 및 티베트어 대장경에 포함되어 있는 경전들 간의 언어학적 

관련과 함께 사상사적 관련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발달하였던 유럽의 문헌학은 이러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경전의 언어학적 계통을 구분하고 상호

관련성은 물론 여러 이본(異本)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경전 성립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문헌 비평적 접근은 매우 유효하였다.


이러한 문헌학적 연구 성과들을 중심으로 당시 활발하였던 비문헌 

자료들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들을 활용하면서 700년 이상

원산지에서 ‘사라졌던’ (혹은 힌두교에 흡수되었던) 고대인도 불교의

역사를 어느 정도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근대불교학이 재구성한 불교사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1. [불교는 본래] 하나의 교단에서 출발하여 역사적 과정 속에서 러 

교단으로 분열 되었다.

2. 현존하는 초기 경전(주로 팔리 경전과 아함경)간의 내용적 차이는 

본래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근대불교학이 도달한 결론이지만 어쩌면 근대불교학이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근대불교학의 관점에서는 이 두 가지 전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교단’이라는 전제는 당연히 ‘본래 

동일한’ 텍스트, 즉 현존 경전들의 모본(母本, Ur-text)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며, ‘본래 동일한’ 텍스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단’

이라고 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며 그것도 여럿이 아닌

반드시 ‘하나’의 교단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불교학의 이러한 전제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어느 것도 역사적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막연한 추측과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근대불교학은, 면밀한 

검토나 구체적 증거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브라흐마니즘

(Brahmanism)의 구전 전통이 초기불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재현’

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두 가지 점을 들어 이러한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히려고 한다. 하나는 브라흐마니즘의 구전 전통이 가능하기 위한 

가지 선결 조건들이 초기불교에는 없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라흐만적 구전전통은 초기불교에서 이미 직접적으로 비판할 만큼

비불교적일 뿐 아니라 불교 교리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브라흐만 전통과 불교는 ‘텍스트’에 대한 관념이 전혀 달랐다. 

브라흐만 전통에서 베다 문헌은 신성한(sacred) 기원과 신성한 힘을 

가진 것이지만, 초기불교 전통에서 텍스트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소위 ‘구전 전승’의 선결조건의 문제를 살펴보자. 베다 

문헌이나 다른 브라흐만 전통의 텍스트가 축어적(verbatim

transmission)으로 전승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언어적 배타성’과 제도화 된 ‘사회적 시스템’이 그 두 가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 전통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결하고

있다.


리그베다의 경우 이미 빈테르니츠(Winternitz)가 지적하였듯이

당시 산스크리트와는 많이 다른 ‘Vedic Sanskrit’ 였기 때문에 어떤

다른 언어가 ‘침투’ 하거나 대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10) 또한 

라흐만 전통의 텍스트 언어인 산스크리트 자체가 특정 계급과 

텍스트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구전’을 통해 비교적

변형 없이 전승 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들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10) Winternitz(1983, revised edition) [vol 2, 15 fn. 1; vol. I, 34, 242]


그러나 불교의 경우 특정한 텍스트 언어11)가 없었을 뿐 아니라, 불교는 

산스크리트와 같은 ‘표준어’의 사용을 거부하였다. 붓다 자신이 특정한 

언어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소통적 기능’의 중요성을 잘 알고 해당지역의 

‘속어’를 사용하여 법을 설할 것을 제자들에게 권하고 있다.

11) 여기서 텍스트란 ‘구전 텍스트’를 말함.


따라서 불교는 그 시초에서부터 다양한 지방의 속어(프라크리트)들

로 설해졌고, 붓다 자신도 산스크리트가 아닌 마가다(Magadha)어의

한 종류인 아르다 마가디(Ardha-Magadhi)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12) 그리고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승되어오는 스리랑카 

좌부 경전의 파알리어도 고대 인도의 지방 속어 중의 하나였을 뿐 

일한 불교 ‘표준어’의 역할이나 기능을 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12) 학자들에 따라서는 Ardha-Maghadhi 를 ‘반(ardha)은 마가다어로 [반은 다른 언어로] 

   설법을 했다“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붓다 당시에 이미 다양한 언어가 허용되고, 아니 오히려 권장되었던 

것이 불멸(佛滅) 후 곧바로 일종의 ‘표준화’ 작업(즉 표준 언어와

표준 텍스트)에 들어갔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소위 1차 결집의 역사성을 신뢰하기 어렵다. 결집은 곧 ‘합송’(合誦, 

sangīti)을 의미하며, 표준화가 선행되어 있지 않은 경우, 합송(合誦)은 

가능하지 않다. 또 붓다 사후에 그의 가르침이 훼손되거나 사라질 

것을 염려하였다는 것도 ‘결집’의 이유가 될 수는 있으나 이 또한 

초기불교의 교리적, 수행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신뢰하기 어렵다.13)

13) 이 점에 관해서는 제 III장 “법과 기억”에서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붓다 당시부터 언어의 소통적 기능을 강조하였고 다양한 지방

속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해왔기 때문에, 초기불교는 ‘텍스트 

어’적 측면에서 일종의 ‘무정부적’인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강력한 중앙 통제적 제도를 필요로 하는 ‘축어적 전승’

(verbatim transmission)은, 불교에 있어 그 필요성은 우선 차치하고,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상식적일 것이다.


완전한 구전전승이 이루어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제도화된 ‘사회적 

시스템’이다. 브라흐만 전통에서 종교적 문헌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온전하게 구전되기 위해서는 많은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 했다는 것은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브라흐만 

전통의 이상적 삶과 사회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바르나-

슈라마’(varṇa-āshramas, class-stages of life)전통은 어떤 

면에서는 신성한 텍스트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고안된 사회적 

시스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이 두 가지 조건 가운데 적어도 제도적 시스템이

초기 불교 교단에 갖추어져있다고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14) 그리고

기원 전 2세기 경(보다 정확하게는 기원전 100년-50년 사이)의 

산치나 바르후트에서 발견되는 명문(銘文)에 등장하는 ‘petakin’15) 

혹은 ‘bhāṇaka’16) 등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14) Richard Gombrich(1990A);(1990B) pp.6 참조.

15) [경을 담는] ‘바구니’를 의미하며 나중에 경률론의 삼장(三藏)이 확립되면서 tri-pitaka가 된다.

16) 음송(吟誦)자, 즉 경을 음송하는 사람이라는 뜻.


그러나 이 명문만으로는 당시 어떤 표준화된 텍스트가 있었고 그것이 

불교의 교단을 통해 전승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더구나 이것으로 200-300년 전 (혹은 400년 전) 붓다 입

(入滅)당시에 이미 일정한 표준적 시스템에 의한 전승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그 시기의 차이가 너무 멀다. 한편, 기원전 3세기경의 

아쇼카왕이 남긴 명문 가운데 불교 경전명칭이 일곱 개 정도 등장하는데 

이 모두가 현존하는 경전들과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17)

17) Bhābrā edict(249 B.C.) see, Lamottee(1988), pp. 234-235; 236.


또한 붓다 사후의 초기 교단에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일단 인정한다하더라도, 전승을 위해서는 어떤 표준텍스트 즉 정전

(正典, canon)이 붓다 당시 혹은 그 이후에라도 존재했어야한다. 하

지만 이러한 선행하는 텍스트의 존재를 인정할 만한 어떠한 역사적

증거도 없다. 실제로 근대불교학이 전제하고 있는 ‘초기교단’ 그리고

‘텍스트의 전승’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는 없다. 유일한 것

은 브라흐만 전통에서의 구전 전승이 같은 인도 문화의 산물인 초기

불교의 경우에도 어떤 다른 형태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뿐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이러한 두 가지 ‘선결 조건’의 문제 이외에도 텍스트에 대한

관념이 브라흐마니즘과 불교 전통은 전적으로 달랐다. 브라흐마니즘의 

구전 전통은 반드시 문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경 브라흐미와 카로시티 문자가 만들어지고 아쇼카왕의 

비문 등에서도 사용되었지만 브라흐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불교 전통이나 자이나 전통에서 텍스트를 문자로 옮기는 것을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브라흐만들은 텍스트는 반드시 소리로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의미를 발생하게 하고 

사물 혹은 심지어 우주를 작용하게 하는 어떤 신성한 힘(sacred power)이

 ‘소리’ 혹은 음성에 내재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브라흐만 전통에서 

텍스트는 신성한 기원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 신성한 것이었다. 

실제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텍스트는 브라흐만 전통을 유지하고 브라흐만의 

종교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베다와 관련하지 않는 

브라흐만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18)

18) 이런 점에서 경전은 출가자의 필수품이 전혀 아니다.


불교 전통은, 적어도 초기 전통에서는, 브라흐만적 의미의 텍스트에 

대한 관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브라흐만 전통이 전제하고 있는 

‘음성’의 신성한 힘에 대해서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베다 문헌의 

신성한 기원과 암송의 자부심을 비판하는 내용들은 초기불교 경전에서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19)

19) Sāmaññaphala Sutta[40 이하]; Ambaṭṭha Sutta[1.2]; Soṇaḍanḍa Sutta[2.2] 등.


초기불교에 관한 최근까지의 연구에서 나는 브라흐마니즘의 구전

전통이 초기불교에서도 ‘재현’되었다고 하는 것에 관한 확실한 역사적 

증거나 설득력있는 연구 결과는, 나의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보

못했다. 라모뜨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비록 다른 결론을 의도하고 

있지만, 초기교단과 또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에 관한 구체적

증거가 하나도 없는 가운데 초기불교사가 어떤 전제 위에서 재구성

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전의] 성문화(成文化)가 늦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불교의

[역사적 실재성]을 인정하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증거, 혹은 

징표는 니카야와 아가마 사이의 기본적인 일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증거 혹은 단서는 2500년의 거리를 두고 세워진 학술적인 가설보다

더 큰 무게를 지니고 있다."20)

20) “성문화(成文化)”는 “la codification des écritures”(codification of writing)의 번역이다.

    라모뜨의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를 우리말로 번역 출판한 호진은 이를 “경전의 

    편찬”이라 번역하고 있는데 ‘편찬’이 곧 ‘성문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불명확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용문 번역에서‘에서 괄호속의 ‘역사적 실재’라는 말은 

    라모뜨의 말은 아니다. “pour apprécier le bouddhisme primitif”(in order to appreciate 

    Early Buddhism)이란 표현을 번역하면서 문맥에 따라 내가 보충한 것이다. 위 인용문은 

    초기불교의 역사적 실재, 즉 초기의 경전과 교단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부의 입장을 소개

    하고 바로 이어서 이를 반박하기 위한 단락이다. 따라서 “초기불교를 평가하기 위하여”

    라는 호진의 번역은 다소 어색하며 그 의미하는 바가 모호하기 때문에 ‘역사적 실재’라는 

    말을 보충하였다. 한편 본고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가 되는 표현인 “기본적인 

일치”를 호진은 “근본적인 일치”라 하여 필자 보다 ‘일치’를 좀 더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See Lamotte(1988), pp. 639-640; Lamotte(1958),pp. 708; 호진(2005), 2권, 396쪽.


라모뜨의 말대로 초기불교의 역사성을 대변하는 증거는 “니카야와 

아가마(아함) 사이의 기본적인 일치”라는 사실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기본적 일치’ 조차도 실은 무엇을 정확히 의미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 전승 텍스트를 비교하면 전체 편집 체제상의 일치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파알리 니카야의 한 텍스트와 

아가마 텍스트를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형식적 ‘일치’의 정도 보다 

내용상의 ‘불일치’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21)

21) 한 예로 바라문 도나(드로나)가 붓다에서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텍스트 [Aṅguttara-

    nikāya II.38]에 해당하는 한역 아가마 텍스트『 증일아함경』권31(대정장2, p.717c23)는 

    서사(敍事)의 모티프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Aṅguttara-nikāya II.38]

    [브라흐만 도나(Doṇa)가 붓다는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해 묻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인간도 아니다. 오 브라만이여, 알라. 나는 붓다이다. 그러니까 

    브라만아, 세상에 태어나고, 세상에서 자랐지만, 세상을 극복한 뒤, 나는 세상에 더럽혀 지지 

    않는다. 나를 붓다라 알라. (na kho ahaṃ brāḥmaṇa devo bhavissāmīti…na…manusso 

    bhavissāmīti buddho ti maṃ brāḥmaṇa dhārehīti evam eva kho brāhmaṇa loke jāto loke 

    saṃvaḍḍhao lokaṃ abhibhuyya viharāmi anupalitto lokena. buddho ti maṃ brāhmaṇa 

    dhārehīti. 『증일아함경』권31(대정장2, p.717c23)

    “당신은 천(天)입니까?” 세존께서 답하였다. “나는 천(天)이 아니다” (범지가 물었다)

    “당신은 건달바입니까?” 세존께서 답하였다. “나는 건달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용입니까? 세존께서 답하였다. “나는 용이 아니다” 

    (그럼 당신은) “야차입니까?”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답하였다. “나는 야차가 아니다” 

    범지가 물었다. “당신은 저의 조부님이십니까?” 세존께서 답하였다. “나는 너의 조부가 

    아니다.”

    그리고『 Aṅguttara-nikāya』에서 ‘붓다’라는 존재의 ‘출세간적 의미’를 역설하는 대신 

    아가마에서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지금 여기있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세존께서 답하셨다. “애(愛)가 있으며 수(受)가 

    생기고 수(受)가 있으면 애(愛)가 존재한다. 인(因)과 연(緣)이 화합한 연후에 각각 서로 

    생겨남이 이와 같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괴롭고 치열한 음(陰)이 끊어지지 않을때 애(愛)를 

    알면 오욕(五欲)을 알게 되고 여섯 가지 감각 대상과 여섯 가지 감각 기관도 알게 되니 곧 

    이러한 치성한 오음의 근본과 지말을 알게 된다.” [한글 번역은 해당 부분『 한글대장경』 

    참조

    이 한 예를 보더라도 파알리 니카야의 텍스트와『 증일아함경』의 아가마 텍스트의 모본(母本) 

    텍스트를 상정하기보다, 비슷한 모티프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만들고 

    전승해왔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더구나 라모뜨, 그리고 근대불교학자들은 이 불완전한 ‘일치’를 

실로 전제하여 두 전승에 선행하는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와 

기 교단의 존재를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일치’가 일부

사실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두 텍스트 전승에 선행하는 모본(母本)

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각기 다른 계통을 통한 전승으로

볼 수도 있고, 소위 두 텍스트 간에 어느 정도 ‘일치’하는 점들은 

른 역사적 경우에서 흔히 보아왔듯이 동일 기원을 증명하기보다 

른 계통의 두 텍스트가 서로가 서로를 ‘모방’(copying)하고 ‘베껴온’

(subscribing) 결과인 경우도 많다.


19세기 이래 ‘근대적 역사관’은 과거를 탐구함으로써 ‘있었던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역사란 곧 사실의 집적물이며

사료상의 증거를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근대불교학이 대상으로 삼았던 고대불교문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사역사’(quasi-history)를 전하는 문헌자료에 대하여 적절한 문헌비평과 

정확한 분석을 한다면,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을 가려낼 수 있으며, 따라서 

문헌자료는 ‘사라져 버린’ 역사에 대한 ‘증언’(testimony)과 ‘보고’(report)로 

전환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자신감’ 때문일까? 근대불교학은 그들이 대상으로 한 문

자료들이 붓다의 입멸(入滅)로부터 거의 500년-1000년이라는 상당한 

시기가 경과한 뒤에 만들어진, 부파전통에서 전승하고 있는 자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자료가 내재하고 있는 부파적 경향성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이들 문헌자료에서 언급하는 ‘유사역사’(quasi-history)를 너무 신뢰하였던 것 

같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문헌자료는 각 부파 전통의 입장에서 ‘부파 성립’에 

이르는 인과적 서사(敍事, narrative)로써 ‘전사’(前史)의 초기 불교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근대불교학이 ‘전사’(前史)에 대한 인과적 서사가 ‘구성적

산물’이라는 점과 문헌 자료의 ‘부파적 경향성’을 인식하지 않는 한,

부파 불교가 그려놓은 길을 따라 초기불교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III. 법(法, dhamma)과 기억


1. 법(法, dhamma)과 교(敎, sāsana)

自燈明 法燈明(atta-dīpa dhamma-dīpa)[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22) 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이 유명한 구절은 붓다의 사후에 교단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아난(Ānanda)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이다. 이 일종의 유훈(遺訓)은

붓다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우며, 붓다의

사후 전개되었을 일련의 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23)

22) 그런데 사실은 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은 언어학적으로는 오역이다. 파알리 원어 “atta-

    dīpa, dhamma dīpa”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自洲 法洲”[스스로를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라]가 정확한 번역이다. ‘섬’을 의미하는 dīpa를 ‘燈’ 혹은 ‘등불’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한역경전 가운데서도 ‘洲’라고 정확한 번역을 하고 있는 역본이 없지는 

    않다. 自燈明 法燈明의 불교고전어 및 현대어 번역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이수창(摩聖),

    「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에 대한 고찰」,『 불교학연구』제 6호(2003.6), 157-182참조.

    한편, 파알리어 dīpa에 대응하는 산스크리트어는 ‘등불’을 뜻하는 dīpa와 ‘섬’을 뜻하는 

    dvipa 두 가지이다.

23) 또 다른 한편으로 붓다의 ‘대열반’을 전하는 여러 부파 전승의 열반겅 이본(異本)들이 

    한결 같이 이 구절을 붓다가 남긴 여러 유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배치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유훈이 ‘실제로’ 붓다의 중요한 유훈이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자등명 법등명’의 의미가 불교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초기불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법등명 자등명’은 

    붓다 사후 전개되는 불교사의 중요한 한 ‘지침’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입멸(入滅) 즈음 이미 많은 제자들이 아라한이 되었었고 특히 마하가섭 

같은 경우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서 붓다가 생존하고 있던 

당시에도 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붓다는 

후계자라든지 교단 운영에 관한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다만 

“自燈明 法燈明”이란 말로 아난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왜 붓다는

교단의 ‘미래’에 대해서는 일체의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고 ‘동문서답’을 

하였을까?


나는 붓다가 아난의 질문에 ‘동문서답’을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붓다는 

신이 이끌었던 상가(saṃgha, 교단)를 ‘조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붓다 자신이 ‘상가’라고 불렀던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조직, 다시 말해서 어떤 체계와 위계를 가진

그런 조직이 아니라 대단히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공동체는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쉽을 필요로 하는 조직이

아니라 수행 공동체였다. 매우 느슨한, 이를테면 ‘사방승가’와 같은

정신적 연대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 붓다 당시와 그 이후 얼마간의

‘불교상가’였을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자신이 ‘발견’한 법(法, dhamma)을 자신의 사후에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어떤 제도나

조직적 체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등명 법등명’은 붓다 사후 그 ‘법’을 이어가기 

위한 가장 ‘불교적’인 그리고 당시로서는 가장 적확한 ‘현실적’인

충고였다고 볼 수 있다. 아난에게 주었던 마지막 유훈 “열심히 정진

하라”는 것 또한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불교에서 ‘법’(dhamma)이란 용어가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법등명”을 흔히 “..[나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라”고

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법등명’은 ‘진리’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붓다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선포’되는 것이 아니며, 인식되거나 되지 

않거나에 상관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붓다는 그 진리를 자신이 ‘최초’로 발견했다든지 혹은 자신만이

그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교’(敎, sāsana) 혹은 교법이라고 하여 이러한 ‘법’(dhamma)과 구별

하고 있었다.


법은 그 자체 진리로서 누가 알든 모르든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인 ‘교’(敎)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라고 하는 데서 

외일 수 없는 유위법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대불교인들은 

고타마 붓다를 ‘우리 시대(kalpa, 劫; yuga)’의 스승으로 알았고, 

다음 대에는 또 다른 붓다가 출현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불교에서 정법(正法)의 쇠퇴와 소멸을 의미하는 상법(像法)과 

법(末法)의 관념은 ‘우리 시대(kalpa, 劫; yuga)’의 스승인 고타마 

다의 ‘가르침’의 쇠퇴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지, ‘진리’로서의 법

(法,dhamma)의 쇠퇴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확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삼법인 사성제 12연기 등 불교 교리들은

‘법’에 대한 ‘우리 시대’ 붓다의 가르침(敎法, sāsana)으로서 그 자체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법’ 자체가 진리가 

니라, “연기를 ‘보는’ 것” 즉 법에 대한 직접 체험(즉 현량)이 진리라는 

의미이다. 모든 불교의 교리가 궁극적으로 [법에 대한] 방편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불교의 비도그마적 성격은 법(法)과 교법(敎法)을 구별하였던

이러한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후대에 불교 텍스트의 정전화

(canonization)가 이루어지면서 소위 ‘붓다의 설법’이 ‘법’으로 되고,

다양한 주석적 전통이 이전의 교법(敎法)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가 붓다고샤(Buddhaghosa, 기원후 5c)가 

붓다의 가르침이 일미(一味, eka rasa)임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석들을 

소개하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없는 동아시아 불교는 그 처음에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곧 ‘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조차 그 ‘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늘 존재하였으며 허용되어 왔다. 이러한 ‘열린’ 해석의전통은 자신의 

가르침을 ‘법’과 구별하였던 붓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알리 율장 마하박가(Mahavagga)에서 붓다가 최초로 제자들에게 

전법을 명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요약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 이 세상에는 61명의 깨달은 자, 아라한이 생겼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가라!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세상에 대한 

비심으로, 인간과 하늘에 있는 존재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가서 법을

설하라. 한 길을 둘이 가지 말고,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법을 설하라.…나도 역시 법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야겠다.24)

24) 요약 번역. Mahāvagga[The Great Division of Discipline] I, 11.1; The Book of Discipline IV, 

    pp. 28.


위 인용문에서 불교 최초의 전법의 주체가 붓다를 포함한 61명의

‘아라한’들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비구들은 단순히 붓다의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가 아니다. 붓다와

동등한, 깨달음을 체험한 아라한으로서 자신의 ‘법’ 체험을 “많은 

람들에게”(bahū janāsya) 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길을 둘이 가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한 효율성의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는 모두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이었기 때문에 전법의 내용에 대한

붓다의 ‘신뢰’ 또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라는 전법의 

내용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이라는 전법의 목적만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붓다는 아라한인 제자들에게 “가서,

삼법인을, 사성제를, 팔정도를 전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붓다가 여러 제자들을 다양한 표현과 방법으로 가르쳤듯이 이제

붓다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들도 자신들의 표현과 방법으로

가르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길을 둘이 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법’에 대한 가르침(교법,敎法)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산스크리트와 같은 

종의 ‘표준어’ 대신 해당 지역의 속어를 사용하게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미 붓다 당시부터 일정한 범위의 여러 지역에서 제자들에 

의한 다양한 ‘표현’과 다양한 ‘언어’의 교법(敎法)들이 허용되고 

었으며, 붓다의 입멸 즈음에는 이러한 현상이 상당히 정착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그리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대불교학이 전제하고 있는 ‘하나의 교단’ 그리고 ‘하나의 텍스트’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통일적 용어 사용과 일종의 수행

매뉴얼과 같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표준적 교법’이 붓다 당시에 

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초기불교 경전 

히 디가 니카야(Dīgha Nikāya)의 여러 경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종의 정형적 구절이 있다. 가장 일반적 형태는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존경 받는 고타마에게는 다음과 같은 좋은 명성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25)

그분은 세상에서 존경 받는 아라한이며, 완전히 깨달으신 분

(sammā-sambuddha)이며, 지혜와 행(vijjā-caraṇa)을 다 갖춘 분이며, 

행복한 분(sugata)이며,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며, 사람을 이끌어주는 

최고의 ‘조련사’이며, 하늘의 존재와 인간의 스승이며, 깨달으신 분

(buddha)이며, 세상의 존경을 받는 분(bhagavan)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의 존재들, 마라(Mara) 그리고 범천(brahma)를 포함하는

세상, 그리고 사문과 바라문의 세상을 그의 뛰어난 지혜로 알고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을 그

의미와 표현을 갖추어서 설합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하고 더 없이 청정한 

범행(梵行, brahmacarya)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어, 계(戒, sīla)와 행caraṇa)을 갖추고 선정 수행을 통해 단계

적으로 지혜(vijjā)를 얻는 단계를 설한다.]

이보다 더 뛰어난 지혜(vijjā)와 행(caraṇa)은 존재하지 않는다.26)

25) 혹은 Sāmaññaphala Sutta의 경우 "세상에 여래께서 출현 하십니다." 이하 한글번역은 

    각묵의『 디가니까야』 1권을 참조하였으나,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은 원문과 대조하여 

    필자가 직접 번역하였다. 그 외 본고에서 인용하고 있는 디가니카야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26) 일부만 예시하면, Sāmaññaphala Sutta[확장된 형태로, 40 이하]; Ambaṭṭha Sutta[축약된 

    형태로 1.2]; Soṇaḍanḍa Sutta[Sāmaññaphala Sutta와 비슷한 형태로, 2.2] 등.


이 구절은 동일한 내용으로 한 경전 내에서도 반복되고, 대부분의

경우 이 구절을 언급하기 위해 이야기의 진행과 상관없이 억지로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 정형구절은 애초에 해당 경(經)과는 별도로 성립된, 독립적인 

텍스트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디가 니카야(Dīgha Nikāya)내의 여러 경전 간에도, 그 표현의 

순서나 길이 등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 텍스트의

어떤 모본(母本)이 있었다면 지금의 것 보다는 훨씬 더 소박하고 

순한 형태의 텍스트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도의 

‘최소한’의 통일된 교법이 붓다 당시 혹은 붓다 사후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1차와 2차의 결집 전승이 암시하고 있는 상당한 규모의 경전 

결집은 불멸(佛滅)후 수백년이 경과한 기원년 전후 지역별로 상당한 

규모의 중앙 집권적 교단이 등장한 이후의 시기일 것이다. 그 시기 

동안 붓다에 대한 ‘기억’과 그리고 약간의 통일성을 가진 텍스트는 

여러 지역에서 각 지역 언어를 바탕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전승

되었다. 그리고 세대 간 전승의 과정에서 변형과 왜곡 그리고 새로운 

내용의 추가 등 지역별로 교법과 붓다에 대한 ‘기억’의 변화는 

가피한 것이었다.


2. 삼명(三明, tevijjā) vs. 명행(明行, vijjā-caraṇa)

브라흐만 전통에서의 축어적 전승은 많은 제도적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베다 문헌은 일종의 계시서

(śruti)로서 텍스트의 내용만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신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텍스트는 반드시 바라문의 암송을 통해 ‘음성’(śabda)으로 

재현되어야 했다. 바라문이 주관하는 제사의 효능은 바로 이 ‘음성’이 

가진 신성한 힘(śabda, 혹은 śabdā)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적절한 

암송자의 정확한 암송이 브라흐만 전통의 핵심적 내용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일반적 관례를 따라 베다 ‘문헌’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기록된 

문서나 서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는 

비가시적 텍스트이다. 브라흐만 전통의 교육제도와 그리고 사회적 

시스템은 이 텍스트를 정확하게, 세대를 이어서 전승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들이다.


한편 불교는 유형 무형의 많은 것들을 브라흐만 전통과 공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 많은 점에서 브라흐만 전통과 단절을 

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인 브라흐만 

통의 핵심적 내용인 삼명(三明, tevijjā, the three knowledges)27)을

비판하고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사문이 닦아야 할 것으로 ‘명’(vijjā)과 

행(caraṇa)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명과 행을 완전하게

갖추었다는 의미의 ‘명행족’(明行足)은 붓다의 덕(德)을 찬탄하는 

요한 호칭중의 하나였다.

27) 삼명은 브라흐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지식이다. 그것은 1. 만트라를 외우고 

    삼베다에 대한 지식, 2. 자연학과 언어와 문법에 대한 지식, 3. 대인상(大人相)에 밝을 것 .


초기불교 경전들은 이 내용을 여러 경에서 똑같은 정형구들로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삼명은 브라흐만이 반드시 갖추어야 

‘지식’이며 죽어서 범천(梵天)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닦아야

할 수행의 덕목이다.


그리고 핵심적 내용은 만트라의 암송과 삼베다에 능통한 지식이

다. 붓다는 이러한 지식이 다만 전승에 기초한 것으로 스스로의 

식의 변화28)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암바타경』에서 붓다는 자신을 시험하러 온 브라흐만 암바타에게

“어떤 사람이 왕의 흉내를 낸다고 그 자신이 왕이 되고 왕의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 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28) ‘의식의 변화’는 불교의 핵심적 내용이다. 붓다라는 말은 곧 의식의 변화를 뜻함. cf.군자: 

    윤리적 인간


암바타여, 바로 그렇다. 그대가 얘기 하듯이 최초의 바라문들이 있었다.

그들은 만뜨라를 만들고 만뜨라를 설하는 선인(仙人, isi, rshi)들이었다. 

지금의 바라문들은 그 선조들이 만들고 설한 만뜨라 구절들을 노래하고, 

설하고, 모아왔다. 그들은... 이제 너와 너의 스승은 그 [선조]들의

만뜨라를 전해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그대가 선인이라든가, 

그대가 선인이 되는 길을 수행하였다든지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29)

29) Ambaṭṭha Sutta[2.8;2.10] 의 의역(意譯)


이어서 붓다는 “암바타여, 이와 같이 그대와 그대의 스승(포카리사티 

브라흐만)은 선인도 아니며 선인이 되기 위한 수행을 한 것도 아니다”

라고 단언한다. 즉 붓다는 수행의 핵심은 스스로의 ‘의식의 변화’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브라흐만의 수행의 목표는 전승의 

계승을 통해 범천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뿐 스스로 선인이 

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선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하더라도 선인(ishi, rishi)이 전한 것을 암송하는 것으로는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붓다가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명’(明 vijjā)과 행(行

carana)의 실천이다. 초기 경전군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핵심적 내용은 ‘행’이란 계행과 선정 수행이며 ‘명’은 선정 수행에서 

나오는 여덟 가지의 지혜로서 그 정점은 곧 해탈의 경험이다.30)

30) Ambaṭṭha Sutta에서는 행은 사선까지의 선정을 닦는 것이며, 명이란 선정에서 나오는 

    ‘지혜’를 말한다. 한편, 소다난다경에서는 이를 계와 반야로 나누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붓다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 ‘삼명’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이는 ‘브라흐만’이 되는 것은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행위에 있음을 

    역설하면서 ‘브라흐만’이라는 용어를 유지하고 있는 점과 같은 것이다. 붓다는 라흐만의 

    삼명을 비판하면서도 그 용어를 자신의 용어로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이런 

    “새 술을 새 병이 아니라, 오랜 병에 붓는 것”(... of pouring new wine into old bottles.) 

    방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연구는 흥미로운 주제들 중 하나이다. [T. W.Rhys Davids(1977, 

    Reprinted edition) 141. 참조].


‘삼명’과 ‘명행’의 차이는 곧 브라흐만 전통과 (초기)불교의 차이이다. 

다시 말해서 브라흐만 전통의 요체는 전승 텍스트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과 그 텍스트에 대한 반복적 학습이며, 불교는 계행과 선정

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의식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불교가 당시 강력한 전통이었던 브라흐마니즘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불교적 정체성이며 경전 곳곳에서 드러나는 자신감의 근본이었다. 

붓다의 사후, 적어도 붓다의 직접 제자들의 세대까지는 브라흐만 

전통과 뚜렷이 구별되는 이 ‘불교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31)

31) 그런 점에서 붓다가 소소계의 폐지를 허락하였다는 유훈을 아난다가 대중들에게 

    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하가섭은 폐지의 정확한 내용을 모를 뿐 아니라 장례식에 

    오던 중 만난 ‘붓다의 죽음을 기뻐하던’ 한 비구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계율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마하가섭의 태도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개연성이 

    없으며 어떤 '음모‘를 느끼게 한다. 그의 이런 모습은 스승을 존경하는 한 충실한 

    제자도 아니고 동료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성실한 모습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독단적 결정을 통해 붓다 사후의 교단을 이끌 수 있는 ‘카리스마’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하가섭의 이러한 카리스마는 마하가섭의 실제적 모습이라기보다, 

    붓다 사후 4-500년이 지나 소위 부파불교라고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불교 교단이 

    만들어 질 당시 교단의 권위와 계율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표준적 텍스트를 지향하는 ‘결집’(saṃgīti,

합송)의 역사성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다. ‘결집’ 비슷한 그 무엇이 

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런 텍스트가 

아니라 출가자의 계율을 요약하는 ‘바라제목차’(pratimokṣa) 그리고 

앞서 언급하였던 “세상에서 존경 받는 고타마에게는 다음과 같은 좋은 

명성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혹은 여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로 

시작하여 계(戒)을 갖추고 선정 수행의 과정과 그 최종적 해탈의 경험을 

언급하는 구절과 같은 단순한, 일종의 표준적 수행 매뉴얼 정도였을 것이다.


3. 기억의 문제

최근, 역사에 있어 기억의 문제 그리고 기억에 대한 심리학적, 

화사적 고찰을 시도하고 있는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의

연구는 초기불교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된다.32) 아스만의 연구 내용이 나 자신에게 

직은 다소 생소하기 때문에 얼마나 정확하게 아니 적어도 전혀 

엉뚱하지는 않게, 이 ‘가능성’을 불교 연구에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시론적 차원에서 ‘기억’에 관한 아스만의 연구를 본고의 주제에 

한정하여 적용해보려고 한다.

32) Aleida Assmann, Erinnerungsraume , 변학수 외 번역『 기억의 공간』, 경북대학교 출판부, 

    2003. [이하, 인용은『 기억의 공간』]


우선 불교 전통에서 ‘기억’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33) 사실 ‘기억’(念, smrti)은 불교전통에서 대단히 중요한 

념이다. 우선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기억’(念, smrti)을 우리 마음을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法)중의 하나로 분류하고 그 인식론적 기능과

작용 메카니즘에 관한 많은 논의를 하고 있다. 초기 아비달마

(설일체유부)에서는 ‘기억’(念, smrti)을 ‘명상’에서 경험하는 ‘집중적

인식’으로 보고 선법(善法)의 하나로 분류하였으나, 북방 아비달마

(Vaibhāṣika)전통에서는 ‘기억’을 모든 마음의 상태에서 작용하는 

종의 무기(無記)로 보고 대지법(大地法, mahābhūmika)의 하나로 

류하고 있다. 즉 마음의 기본적 작용/기능의 하나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식은 한 찰나전의 대상에 관한 인식이라고 보았고

그런 점에서 인식이란 곧 ‘기억’된 것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았던 

이다.

33) 불교 전통에서의 ‘기억’의 문제는 In the Mirror of Memory , Janet Gyatso ed., SUNY 

    Press, 1992. 참조. [이하 인용은 Gaytso]


한편 ‘신통력’의 하나로 언급되는 무한한 과거 전생에 대한 ‘기억’ 

또한 불교 전통에서 중요한 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아비달마

전통에서 이 문제는 거의 논의 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전생의 기억’ 문제는 자칫하면 불교의 핵심교리인 

‘무아’의 문제와 상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34) 한편

Saṅghabhadra(衆賢)는 아비달마 논사로서는 드물게 이 문제를 

루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논의의 중심은 ‘전생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선정수행의 핵심인 ‘기억’ (이 경우 기억은 일반적 의미의

‘memory’가 아니라 ‘현재의 대상에 집중하는 마음의 상태 혹은 능력’을 

뜻함. 즉 正念을 의미한다)과 ‘과거’에 대한 기억이 동일한 심리적 

기능인가에 관한 것이다.

34) Gyatso(1992), pp. 9; 10-12.


사실 불교에서 기억이 핵심적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수행에

있어서 ‘기억’의 문제 때문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선정 수행에서 

장 중요한 ‘정념’(正念) 즉 마음의 현재적 집중을 ‘기억’이라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기억이란 ‘과거’에 대한 인출과 회상을 뜻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일반적 의미의 기억과 정념에서의 기억, 즉 ‘마음의 현재적 집중’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마음의 기능으로 보고 있다. 한편, 대승불교 전통의 

염불(念佛, buddha-anusmrti) 수행 또한 ‘붓다’에 대한 기억을 본질로 

하는 수행이었다.


정리하면, 불교 전통에서 기억의 의미와 용례는, 우리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하는 것부터 과거 전생을 기억하는 신통력의 

하나로서 ‘기억’, ‘붓다의 덕’(德)을 회상하는 수행, 그리고 선정수행에서 

마음의 집중적 상태를 의미하는 정념수행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한 불교적 용례는 일반적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을 뜻하는 

기억의 의미와 많이 달라 보인다. 그러나 불교 전통에서는 이 다양한 

용례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마음의 기능이라고 보고 있다.35)

35) Gyatso(1992), pp. 6-10.


한편 흥미로운 것은 ‘암기’를 의미하는 기억에 관한 논의는 불교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점 또한 브라흐만 전통의 구전 

전승을 불교 전통에서 별로 의미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한 간접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억에 관한 불교적 입장을 

염두에 두고 아스만의 기억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자.


아스만은 기억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36) 기술(ars, 技術)로서의 

기억과 ‘활력’(vis, 活力)으로서의 기억이다. 기술로서의 기억이란

다른 말로 ‘저장소’를 의미하며 “저장과 인출의 동일성”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일상적 의미의 ‘암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기술’과 ‘활력’의 차이는 ‘시간’이다. ‘기술’로서의 기억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고 배제되어 있다. 시간이 활성화 되어 기억에 개입할 경우 

그 기억을 활력으로서의 기억이라고 한다. 일상적 의미의 ‘회상’

(recollection)이 바로 활력으로서의 기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활성화 된 활력으로서의 기억의 경우, 저장과 인출의 

근본적인 불일치가 발생하게 된다. 아스만에 따르면 회상은 “근본적으로 

재구성 된 것이며 그것은 항상 현재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회상할 시점에서 기억된 것이 치환, 변형, 왜곡, 가치 전도 

내지는 복구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한다.37) 이 경우 기억은 ‘저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 고유한 활동의 방식과 법칙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에너지와 같은 것이 된다.38)

36) 이하 ‘기술로서의 기억’과 ‘활력으로서의 기억’의 구별과 특징에 관한 내용은『기억의 공간』

33-34쪽 참조.

37)『 기억의 공간』33-34쪽.

38)『 기억의 공간』 35쪽.


인도 고대사에서는 문자에 의한 기록과 전승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기원 전 3세기 경 아쇼카왕의 칙령이 새겨진 명문(銘文)이 최초로 문자 

기록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이후에도 ‘돌’에 새겨진 역사적 기록 

이외 다른 텍스트 자료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인도의 고대사는 ‘기억’에 의한 전승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특히 문자조차도 만들어 지지 않았던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인도 

사회에서는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소통 행위가 필요한

분야들―이를테면 집단적 정체성, 전통과의 연속성, 문화적 창조 등

에 있어 유일한 매체는 ‘기억’이었다. 그 점은 불교의 경우도 마찬

가지였다.


나는 여기에서 아스만이 말하는 ‘활력으로서의 기억’을 주목하고자 

한다. 불교 전통은 앞 서 언급한대로 베다 문헌의 온전한 전승과

같은 브라흐만들의 ‘기술로서의 기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러나 ‘활력으로서의 기억’은 붓다 사후의 불교 교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불교적 수행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


우선 불교의 정체성과 관련한 ‘기억’의 문제를 살펴보자. 아스만의

표현에 따르자면 “기억은 그것이 관련하고 있는 경험이 완결되어 

거지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생긴다.”39) 이 발언의 요지를 불교에 

용한다면 다음과 의미가 될 것이다. “직접 계를 받고 가르침을 받은

첫 제자들에 있어 붓다에 대한 기억은 붓다가 죽고 나서 비로소 

작된다.” 이 점은 기억의 ‘상기적 특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후

전개되는 불교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39)『 기억의 공간』11쪽.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불교사는 붓다에 대한 기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그 정점을 보이고 있는 불교교리에 대한 

다양한 발전과 해석의 이면에는 항상 붓다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함께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에 대한 기억의 문제가 불교사의 핵심적 문제가 되는 것은 

다와의 직접적 경험을 가진 첫 제자들이 죽고 난 이후부터 이다. 

때 부터 붓다에 대한 기억은 교단의 정체성에 관한 핵심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는 마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태어난 손자 손녀가 

들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한 손자 손녀들은 ‘사촌’의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 혹은 반대로 ‘사촌’의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는 한 할

아버지는 기억된다. 이처럼 ‘할아버지’라는 기억은 그들이 서로 ‘사촌’

이라는 정체성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 이렇게 그 기억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4촌-6촌-8촌-10촌-등으로 세대를 이어 전승이 된다.


그렇다면 붓다의 경우 어떻게 세대를 이어가는 기억으로 전승되었을까? 

이미 언급한대로 ‘법’과 출가자들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바라제목차를 

중심한 아주 기본적인 ‘계율’ 이외에 붓다의 인격과 행적에 관한 

일화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전승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사용되는 

기억은 브라흐만 전통에서와 같은 기술로서의 ‘저장기억’이 아니라 

시간이 활성화 된 활력으로서의 기억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하였던 “불교 전통과 브라흐만 

전통과의 차이”이외에도 불교 수행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다.

브라흐만 전통에서 기억의 중요성은 시간과 망각의 장애 없이 저장

되었던 기억을 제사의 과정에서 정확하게 인출하는 기능이 매우 

요하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기억은 단순한 저장기억의 인출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수행’을 통해 

어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기억은 단순히 재생적인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생산을 일으키는 힘이 된다. 이러한 활력적 기억의 사용은 

행에서만이 아니라, 붓다의 인격과 행적에 관한 회상의 경우에도 

찬가지이다. 회상은 시간이 활성화 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인 활력적

기억이다. 아스만은 활력적 기억은 “근본적으로 재구성 된 것이며

그것은 항상 현재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회상할 

시점에서 기억된 것이 치환, 변형, 왜곡, 가치 전도 내지는 복구되는 

것이 불가피하다”40)고 한다.

40)『 기억의 공간』33-34;164;288쪽.


불교 전통에서 붓다에 대한 기억 혹은 회상은 ‘정확한’ 전승을 위한 

것이 아니다. 회상을 통해 붓다를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불교 수행자들은 한편으로 붓다와, 

다른 한편으로 집단 구성원 간에 공동체적 결속과 유대감을 고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초기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붓다의 인격과 

행적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은 그들의 교주인 ‘고타마 붓다’에 대한 

기억을 세대를 통해 ‘정확하게’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보기 어렵다. 현존하는 경전 간에 보이는 불일치와 변용들은 이러한 

‘회상’을 통한 재구성에서 비롯된 변형과 왜곡의 흔적들이라 볼 수 있다.


애초부터 붓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동시적으로 발생하였고, 

전승간의 불일치는 후대의 결과적 산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 부파에서 전승하고 있는

현존하는 불전(佛傳, Buddha’s biography)들은 ‘하나’의 기원에서 

작된 다양한 전개가 아니라, 애초에 여러 기원을 가진 다양한 

‘붓다에 관한 이야기’들을 각 부파의 입장에서 선별하고 윤색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 편집의 결과물(edited version)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저장과 인출’이라는 기술적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활력적 기억에 대한 불교적 선호는 불교의 

행 전통에서 두드러진다.


인도의 전통적 명상과 구별되는 불교 명상의 특징은 ‘정념’수행에 

있다. 여기서 ‘념’(念, smrti)이란 ‘기억’(memory) 혹은 ‘억념’

(recollection)의 의미로서 마음을 ‘현재’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저장된 과거’를 인출하는 의미로서의 기억이 아니라 찰나생 

찰나멸하는 ‘현재’의 순간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 외 수행과 관련한 ‘념’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염불’

(念佛, buddha-smrti) 수행과 그 한 특수 형태인 ‘반주삼매’라 할

수 있다. 둘 다 붓다에 대한 ‘기억’을 현재화 하며 그 과정에서 ‘염불’

(chanting)과 ‘관(觀)’(visualization) 등의 기법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것은 수행의 목적이 과거의 붓다를 기억 속에서 재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붓다를 ‘지금’ ‘여기’에서 붓다를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체험하는 붓다는 ‘역사’속의 붓다가 아니라 

초 역사적인 영원한 붓다인 것은 분명하다. 불교가 역사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다시금 확인 된다.


IV. 결어


나는 불교가, 적어도 초기불교 전통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 

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는 ‘성전(聖典)의 종교’가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실천하는 ‘체험의 종교’라고 생각한다.41) 초기

불교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 불교의 이러한 특징은 결코 간과 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초기불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 경전을 편찬 전승하는 일은 초기불교, 적어도

붓다 입멸 당시의 1차적 관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41) 물론 명상이 유일한 불교적 ‘수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수행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 앞서

언급하대로 근대불교학은 이 경전들의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모본의 시기는 빠르게는 붓다 입멸 후 100년경을 기준으로 

그 직전42)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하거나 또는 그 즈음에- 늦어도 2차 

결집 당시에는 성립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대로 우리는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를 증명 해 줄 역사적 

자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할 만한 불교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나 정황적 증거도 없다.

42) Frauwallner의 설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 of Buddhist Literature," 

    Series Orientale Roma , VIII, Roma, IsMEO. 참조.


붓다는 80세로 입멸할 때 까지 약 35년간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성도 직후의 전법과 붓다의 마지막 몇 달을 전하고 있는 텍스트를 

외하면 나머지 어떤 경전들에서도, 심지어 대승경전에서도 35년 

간 내에서 시간의 경과를 전혀 감지할 수 없다. 과연 당시 붓다가 

세인지, 성도 후 얼마나 경과한 때인지 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모든

시간은 ‘한 때’일 뿐 세월의 흐름에 따른 붓다 설법의 내용이나 어투의 

변화 등을 전혀 읽을 수 없다. 물론 대승경전과 초기 경전은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내용과 서술방식과 내러티브의 전개방식에서 오는 

차이일 뿐 두 경전 간에 실제적 시간의 경과―팔리경이나 아함경을

먼저 설한 뒤 나중에 설했다는 그러한 시간의 경과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이러한 것을 두고 붓다 가르침의 

‘영원성’ 혹은 ‘초역사성’을 역설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교 

전을 하나의 ‘텍스트’라는 입장에서 보면 불교 경전에서 ‘시간’은 

춰있고 시간의 경과를 찾아 볼 수 없다. 붓다가 이 모든 것들을

어느날 ‘하루’에 설법한 것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이 

텍스트들이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전혀 

무리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물론 더 많은 사료 분석과 텍스트간의 비교연구가 

요하지만, 일단 현존 경전이 불교 최초의 경전편찬의 결과물과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것들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여러 경전들은 기원전 1세기와 기원 후 5세기 어느 시기에 

비로소 편찬되기 시작하였으며 짧게는 1세기 길게는 3-4세기를 

거치면서 지금의 경전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초의 편찬은 유럽의 근대불교학자들이 추정하였던 구술에 

의한 편찬이 아니라 ‘문자’에 의한 편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냐하면 당시 편찬의 자료가 되었던 ‘텍스트’들은 그 언어나 체계, 

용 등이 각 지역 별로 워낙 다양했기 때문에 ‘구술’에 의해 일관성 

는 ‘정전’(正典) 체계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43)

43) 문자 편찬이냐, 구술 편찬이냐의 문제는 추후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최초로 불교 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세기경

그리고 그 이후라면 이 시기는 곧 대승경전이 ‘만들어 지는 시기’

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이 만들어지는 시기와 초기경전이 

찬 되었던 시기는 거의 동시대인 것이다.44)

44) 이 점에 관해 Erich Zürcher가 그의 저술 Buddhist Conquest of China 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아함경 등 초기 경전의 번역이 기원 후 4세기 이전까지 없었다”고 하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금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 불교학계에서는 초기 ‘서역승’들의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만약 대승경전의 성립과 

    초기불교의 ‘경전화’ 시기가 거의 동시대이며 이것이 경전의 ‘문자전승’(writing)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우리는 인도불교의 중국진출의 문제에 관해 전면적으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리차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등이 주장하고 있듯이 

불교 경전에 있어 ‘문자’ 사용은 대승 경전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 경전의 편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45)

45) Gombrich(1990) 참조.


앞서 간략하게 언급하였지만, 붓다 입멸 후 각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붓다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이 초기불교 경전들을 편찬하는 

본 원천 자료(source materials)들이었을 것이다. 세대를 걸친 

전승의 과정에서 그 기억의 내용, 순서는 물론 디테일에 있어 많은 

차이가 생겼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각 지방 속어의 

언어학적 차이도 간과 할 수 없을 것을 것이다. 따라서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현존 경전에서 발견되는 여러 ‘기억 장치’

(mnemonic device)들, 즉 ‘정형구’ ‘통일적 체제’ ‘반복’ 등을 모본

(母本)텍스트로부터의 구전 전승의 흔적 혹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구전 전승’을 설득력 있게 입증할 만한 뚜렷한 증거나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기억 장치’(mnemonic device)의 존재만을 가지고

곧 ‘모본의 구전’을 언급하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다.


나는 현존 텍스트의 ‘기억 장치’(mnemonic device)들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장치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인들은 ‘붓다의 가르침’과 ‘붓다의 기억’을 처음으로 편집, 편찬

하는 경전화의 과정에서 비로소 전승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고, 이를

위해 베다문헌 등에서 ‘정확한 저장기억’을 위해 전통적으로 활용되어 

온 여러 ‘기억 장치’(mnemonic device)들을 활용하였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경전화/정전화의 작업은, ‘기억’의 관점에서 보면

‘활력으로서의 기억’을 ‘저장기억’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라는 의미가

있다. ‘활력적 기억’이 있는 한 붓다는 ‘과거’의 경험이 아니라 ‘현재’

적 경험이지만 저장 기억이 되는 순간 붓다는 과거의 경험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팔리 경전 등 초기경전의 편찬자들의 태도와 

승 경전 편찬자/창작자들의 태도는 크게 대조된다.


초기경전 편찬자들이 붓다를 ‘과거’의 기억으로 ‘저장’함으로서 

다는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되게 된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편찬자/

창작자들은 여전히 붓다를 ‘활력적’으로 기억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붓다는 현재적 경험이 된다. ‘반주삼매’와 ‘염불삼매’ 등은 그 대표적인 

현재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붓다는 ‘활력적 기억’을 

통해 ‘항상 현현(顯現)’하는,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상주’(常主)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불신(佛身)에 관한 이론적 고찰의 

정이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색신, 응신, 법신의 삼신(三身)은 이런 

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상좌부 불교와 

승불교의 등장을 교단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붓다에 대한 ‘기억’ 

식의 차이, 즉 ‘저장 기억’이냐 ‘활력적 기억’이냐의 차이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 방식은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이 대승불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이미 지적한 교단사와 

상사의 ‘불일치’에 대한 또 다른 해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