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2. 모든 번뇌의 경(sabbāsavasuttam)
1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존귀하신(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모든 번뇌의 단속을 위한 법에 관해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라고.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사왓티(Savatthi)'는 꼬살라(Kosala)국의 수도였다. 꼬살라는 인도 중원의 16개 국의 하나였다. 세존 당시에는 바세나디(Pasenadi) 왕이 꼬살라의 왕이었다.
*제따(Jeta)는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의 왕자 이름으로 vji에서 파생되었으며 '승리자'라는 뜻이다.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장자가 자신의 고향인 사왓티에 승원을 만들려고 이 땅을 구입하기 위해 수많은 수레에 황금을 가져와서 땅에 깔았고 그 신심에 감동한 왕자가 이 숲을 기증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MA.i.50;Uda.56)
*아나타삔디까 승원(원림)의 원문은 Anathapindikassa arama 이다. 아나타삔디까는 급고독(給孤獨)으로 한역되었으며 '무의탁자에게 음식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승원(급고독원)은 기원정사로 잘 알려진 곳이다. 세존께서는 말년 19년을 이곳에서 보내셨다고 한다. 사왓티의 동쪽 원림에 있는 미가라마따(녹자모) 강당에 머무신 것을 합치면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만 24년을 보내셨다. 세존께서 아난다 존자를 시자로 삼으신 것도 이곳에 머물면서 부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맛지마 니까야 152개 경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69개의 경들이 이곳에서 설해진 것으로 나타난다.
*번뇌로 옮긴 asava는 '흐르는 것'이라는 문자적 뜻에서 원래는 종기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오랫동안 발효된 술(madira)을 뜻했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해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정착된 것이며 중국에서는 번뇌(煩惱)라고 옮겼다. 이런 마음 상태들을 아사와(asava,a+vsru, 생기는 것, 흐르는 것)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도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악취나는 술과 같기 때문이다.
*'단속'은 samvara를 옮긴 것이다. 청정도론 (Vis.i.18)과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MA.i.62)는 게목을 통한 단속(patimokkha-samvara), 마음챙김을 통한 단속(sati-samvara), 지혜를 통한 단속(nana-samvara), 인욕을 통한 단속(khanti-samvara), 정진을 통한 단속(voriya-samvara)의 다섯 가지 단속을 둔 뒤에 경을 인용하여 이 다섯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주석서는 계속해서 본경에서 7가지로 분류되고 있는 번뇌들 가운데서, 피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중의 적합하지 않은 자리에 앉거나 갈 곳이 아닌 곳에 다니는 것을 피하는 것을 계목을 통한 단속의 보기로 들고 있다. 그리고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을 마음챙김을 통한 단속의 보기로, 7가지 항목에 나타나는 '지혜롭게 숙고하여'라는 구문을 지혜를 통한 단속의 보기로, 버림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을 정진을 통한 단속의 보기로,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을 인욕을 통한 단속의 보기로 들고 있다.
15. “비구들이여, 알고 보는 자에게 번뇌들의 부서짐을 나는 말한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에게가 아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 자에게 번뇌들의 부서짐을 나는 말하는가?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여리작의. 如理作意)과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이다. 비구들이여,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생기지 않은 번뇌가 생기고, 생겨난 번뇌들은 늘어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생기지 않은 번뇌들은 생기지 않고, 생겨난 번뇌들은 버려진다.
*"여기서 '아는 자(janato)'와 '보는 자(passato)' 단어만 다를 뿐 같은 뜻이다. 아는 자란 지혜의 특징과 관련하여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아는 특징(janana-lakkhana)을 가지기 때문이다. 보는 자란 지혜의 힘과 관련하여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보는 힘(passana-ppabhava)을 가지기 때문이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마치 눈을 가진 사람처럼 눈으로는 형색을 보고 지혜로는 드러난 법들을 본다. 그는 무엇을 알고 보는 자인가? '지혜롭게(이치에 맞게)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도록 아는 자이고, '지혜없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렇게 보는 자이다. 이렇게 알고 보는 자의 번뇌는 소멸한다."(MA.i.63)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은 중국에서 여리작의(如理作意)로 옮긴 yoniso-manasikara를 옮긴 것이고,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기울임'은 중국에서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 등으로 옮긴 ayoniso-manasikar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치에 맞게(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임'이란 [바른] 방법에 의해서 마음을 기울임이고 길에 따라 마음을 기울임이고 일어남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임이다.(SA.iii.165) 이것은 무상한 [것]에 대해서 무상이라고, 괴로운 [것]에 대해서 괴로움이라고, 무아인 [것]에 대해서 무아라고, 더러운 것(부정,不淨)에 대해서 더러운 것이라는 이러한 방법으로 진리에 순응하여 마음이 굴러가고 함께 전개되고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두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이라 한다.(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기울임은 이와 반대로 설명하고 있다.)(MA.i.64)
16. 비구들이여, 봄(見)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있다(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 있다). 단속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있다. 수용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있다. 감내를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있다. 피함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있다. 제거(버림)를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있다. 닦음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있다.
17.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봄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무지한 범부가 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다. 그는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꿰뚫어 알지 못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 알지 못한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 알지 못하는 그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법들'과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법들'이라고 했다. 이 법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고, 이 법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상 법으로서는 정해진 것이 없고, 방식으로서는 있다. 즉 주의를 기울일 때 해로운 법들이 일어날 가까운 원인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주의를 기울일 때 유익한 법들이 일어날 가까운 원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MA.i.67)
복주석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아름다움, 행복, 영원함 등으로 주의를 기울일 때 달콤함 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고 손해와 괴로움을 가져오며, 해로운 법들에 대해서도 무상함 등으로 주의를 기울일 때 염오 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바난받을 일이 없고 이익과 행복을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법으로서는 정해진 것이 없고, 방식으로서는 있는 것이다."(MAT.i.69)
비구들이여, 어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는가?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의 번뇌(욕루.慾漏)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의 번뇌가 늘어난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의 번뇌(유루.有漏)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존재의 번뇌가 늘어난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무명의 번뇌(무명루.無明漏)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무명의 번뇌가 늘어난다. 비구들이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이런 법들을 주의를 기울인다.
비구들이여, 어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의 번뇌(감각적 쾌락에 의한 번뇌)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의 번뇌는 버려진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의 번뇌는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존재의 번뇌는 버려진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무명의 번뇌는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무명의 번뇌는 버려진다. 비구들이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런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들은 생기고, 이미 생겨난 번뇌들은 늘어난다.
18. 그는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과거에 있었을까(존재했을까)? 나는 과거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이 되었을까? 나는 미래에 존재할까?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에 어떻게 존재할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이 될까?'라고. 지금 현재에 안으로 의심이 있다(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있는가(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없는가(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으로 있는가(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나는 어떠한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 존재가 될까?'라고.
*'나는 과거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에 없었을까(atitamaddhanam ahosim nu kho nanu kho)?'라는 것은 상견의 측면과 우연발생론의 측면에서 과거에 자신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미친 사람처럼 어리석은 범부는 아무거나 마음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었을까(kim nu kho ahosim)?'라는 것은 계급(태생), 성별, 재생과 관련하여 끄샤뜨리야, 바라문, 와이샤, 수드라, 재가자, 출가자, 신, 인간 중에 무엇이었는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어떻게 지냈을까(katham nu kho)?'라는 것은 모습과 관련하여 긴 것, 짧은 것, 흰색, 검은색 중에 어떠했을 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무엇이었다가 무엇이 되었을까(kim hutva kim ahosim)?' 라는 것은 계급 등과 관련하여 끄샤뜨리야이었다가 바라문이었을까, 신이었다가 인간이었을까라고 계속적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미래에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anagatamaddhanam bhavissami nu kho nanu kho)?'라는 것도 상견의 측면과 우연발생론의 측면에서 미래에 자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같은 방법을 적용하면 된다.(MA.i.68-69)
19.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생겨난다.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가 진실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진실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인식한다(자아로써 자아를 인식한다).’라는 견해가 진실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인식한다.’라는 견해가 진실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인식한다.’라는 견해가 진실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그리고 이런 견해가 있다. ‘말하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업들의 과보를 경험하는 나의 이 자아는 항상하고, 상주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로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의 치우침, 견해의 두터움, 견해에 의한 어려움, 견해에 의한 장애, 견해에 의한 속박, 견해에 의한 분쟁, 견해의 족쇄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견해의 족쇄에 묶인 배우지 못한 범부는 태어남·늙음과 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①'나에게 자아는 없다' - "나에게 자아가 있다(atthi me atta)'는 것은 상견이라는 사견이 자아를 거머쥐는 것이고, '자아가 없다(natthi me atta)'는 것은 단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무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유물론자들의 주장을 거머쥐는 것을 말한다."(MA.i.70)
②'나는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인식한다.' - 이것은 인식의 무더기(상온(想蘊),sanna-kkhandha)를 선두에 두고, 그 인식의 무더기로 다른 무더기들에 대해 자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 나머지 무더기들을 인식하면서 나는 이 자아로써 이 자아를 인식한는 견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MA.i.70)
③'나는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인식한다.-이것은 인식의 무더기는 자아이고,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은 무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써 인식하면서 이러한 견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MA.i.70)
④'나는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인식한다.'-이것은 인식의 무더기는 무아이고,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은 자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 그들을 인식하면서 이러한 견해가 일어난다.(MA.i.70)
*"'여기저기서(tatra tatra)'라는 것은 각각의 모태, 태어날 곳(gati), 머뮮, 거처, 부류나 혹은 각각의 대상을 말한다."(MA.i.71)
*"'항상하다(nicca).'는 것은 일어남과 멸함이 없다는 것이고, '상주한다(견고하다)(dhuva).'는 것은 정수(sara-bhuta)를 나타내고, '영원하다(sassata).'는 것은 어느 때에나 항상 있다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법(aviparinama-dhamma)'이란 자아의 본성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이고, '영원히 지속된다(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sassatisama)'는 것은 달, 태양, 바다, 땅, 산은 세상의 용어로는 영원한 것이라고 불리는데, 그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들이 머무는 한 이 자아도 머문다고 이와 같이 견해가 일어난다."(MA.i.71)
20. 비구들이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며,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있다. 그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꿰뚫어) 알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 안다. 그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 알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 아는 그는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는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을 주의를 기울인다.
비구들이여, 어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의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의 번뇌가 늘어난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의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존재의 번뇌가 늘어난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무명의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무명의 번뇌가 늘어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이런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어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을 주의를 기울이는가?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의 번뇌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의 번뇌가 버려진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의 번뇌는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존재의 번뇌는 버려진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무명의 번뇌는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무명의 번뇌는 버려진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런 법들을 주의를 기울인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야 하는 법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들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번뇌들은 버려진다.
21. 그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이치에 맞게(지혜롭게)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인다. 이렇게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 몸이 있다는 견해(유신견.有身見), 의심,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계금취.戒禁取)의 세 가지 족쇄들이 버려진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봄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라고 불린다.
*"사성제를 명상주제로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갈애를 제외한 삼계의 무더기들을 '괴로움'이라고, 갈애를 '괴로움의 일어남(dukkha-samudaya)'이라고, 둘 모두 일어나지 않음을 '소멸(nirodha)'이라고, 소멸을 성취하는 것을 '도(magga)'라고 이렇게 이전에 스승의 곁에서 습득하여 마음을 기울였다. 그는 그 다음에 위빳사나의 도에 올라서서 [조건(연,緣, paccaya)과 더불어 정신.물질을 무상 등으로 명상하면서-MAT] 삼계의 무더기들을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인다. [이렇게 하여 위빳사나의 지혜가 일어난다.-MAT] 예류도까지는 주의를 기울임이라는 주제로 위빳사나를 말한 것이다.
이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고 생기게 하는 갈애를 '이것이 일어남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인다. 괴로움과 일어남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소멸하고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열반이라 부르는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인다. 소멸을 성취하는 성스러운 팔정도를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인다."(MA.i.72)
*"'세 가지 족쇄(tini samyojanani)'는 스무 가지 유신견과, 여덟 가지 의심(불,법,승,학습[계],과거,미래,과거와 미래,연기법의 8가지를 의심하는 것-Dhs.183)과, 계를 통해 청정해지고 의례의식을 통해 청정해진다고 집착하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 네 가지 번뇌 중에서 유신견과 계금취견은 사견의 번뇌에 속하기 때문에 번뇌이면서 족쇄다. 그러나 의심은 오직 족쇄이지 번뇌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asava dassana pahatabba)'라 했는가? 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에 포함되기 때문이다."(MA.i.73-74)
여기에 대해서 복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해서 설명한다.
"마치 바른 사유가 그 역활이 지혜와 비슷하기 때문에 지혜의 무더기에 포함되듯이, 의심도 그 역활이 비슷하기 때문에 번뇌에 포함되었다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네 가지 번뇌'란 아비담마의 방식에 따른 것이지 경의 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다. 경에서는 결코 네 가지 번뇌를 설한 적이 없다."(MAT.i.63)
*"'봄[見]으로 없애야 할(dassana pahatabba)'에서 봄(dassana)이라는 것은 예류도(sotapatti-magga)를 말한다. 그 예류도로써 없앤다는 말이다. 어떻게 예류도를 봄이라 하는가? 처음으로 열반을 보기 때문이다."(MA.i.74)
22. 비구들이여, 무엇이 단속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치에 맞게(지혜롭게) 숙고하면서 눈의 감각기능(안근.眼根)의 단속을 단속하는 자로 머문다. 비구들이여, 눈의 감각기능의 단속을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눈의 감각기능의 단속을 단속하며 머무는 자에게 그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없다.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귀의 감각기능(이근.耳根)의 단속을 단속하는 자로 머문다. ··· 코의 감각기능(비근.鼻根)의 단속을 단속하는 자로 머문다. ··· 혀의 감가기능(설근.舌根)의 단속을 단속하는 자로 머문다. ··· 몸의 감각기능(신근.身根)의 단속을 단속하는 자로 머문다.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마음의 감각기능(의근.意根)의 단속을 단속하는 자로 머문다. 비구들이여, 마음의 감각기능의 단속을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마음의 감각기능의 단속을 단속하며 머무는 자에게 그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없다.
비구들이여, 단속을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단속을 단속하며 머무는 자에게 그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없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단속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라고 불린다.
23. 비구들이여, 무엇이 수용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가사를 수용한다. '추위를 막고 더위를 막거나 모기, 바람, 뙤약볕, 파충류와의 닿음을 막거나 수치스러운 곳을 가리기 위한 목적만큼.'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탁발 음식을 수용한다. '이것은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요,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아니요,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요, 보기 좋게 가꾸고자함도 아니니, 다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이 몸을 유지하여 청정수행을 돕기 위함이다. 바른 관찰로써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을 제거하고 배루름의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져 안온하게 머물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 이 탁발 음식을 수용한다.'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거처를 수용한다. '오직 추위를 막고 더위를 막고, 날파리, 모기, 바람, 뙤약볕, 파충류와의 접촉을 막기 위한 만큼, 계절적 변화(기후변화)의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홀로 머묾을 기뻐할 목적만큼.'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수용한다. '오직 생겨난 고통스러운 느낌을 물리치고, 병 없음을 최상으로 하기 위한 만큼.'
비구들이여, 수용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수용하며 머무는 자에게 그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없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수용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라고 불린다."
24. 비구들이여, 무엇이 감내함(참음)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추위와 더위와, 굶주림과 목마름을 감내한다. 날파리, 모기, 바람, 뙤약볕, 파충류와 닿음과 심하고 언쨚은 말들과 괴롭고 날카롭고 예리하고 고통스럽고 불만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생겨난 몸에 속한 느낌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감내함'은 adhivasan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 문헌들은 감내함을 인욕이나 관용과 동의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관용(titikkha)'이란 인욕(khanti)의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관용이라 불리는 감내하는(adhivasana) 인욕이 최상의 고행이라는 뜻이다."(DA.ii.478)
"인욕이란 감내함을 말한다."(SA.i.166)
비구들이여, 감내하지 않는 자에게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감내하는 자에게 그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없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감내함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라고 불린다.
25. 비구들이여, 무엇이 피함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고 사나운 말을 피하고, 사나운 소를 피하고, 사나운 개를 피하고, 뱀과 나무등걸과 가시덤불과 웅덩이와 절벽과 오물 구덩이와 마을 주변의 더러운 물웅덩이를 피한다. 그는 앉아 있는 그 적절하지 않은 자리, 행동하고 있는 그 적절하지 않은 장소, 현명한 동료 비구들을 나쁜 형편에 처하게 할 수 있도록 교제하는 그 나쁜 동료들을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피한다.
비구들이여, 피하지 않는 자에게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피하는 자에게 그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없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피함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라고 불린다."
26. 비구들이여, 무엇이 버림(제거)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치에 맞게(지혜롭게) 숙고하면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버리고 존재하지 않게 한다.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이미 일어난 분노의 생각(악의에 찬 생각)을 품지 않고 ··· 해코지(폭력)의 생각을 ··· 반복해서 떠오르는 악한 불선법들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버리고 존재하지 않게 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kamavitakkam nadhivaseti)'라고 하셨다. 지혜 없이 주의를 기울임에서 생겼고, 탐욕 등과 함께하고, 유익함과 반대되는 이런 이유로 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은 해로운 것(akusala)이고, 이런 이유로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이런 이유로 이것은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해친다.(MA.i.115)라는 방법으로 지혜롭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을 숙고하여 각각의 대상에서 생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는 말씀이다."(MA.i.81)
*여기서 언급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과 '악의에 찬 생각'과 '해코지하려는 생각'에 반대되는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를 팔정도의 두 번째안 바른 사유라고 여러 경들은 정의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버리지 않는 자에게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버리는 자에게 그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없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버림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라고 불린다.
27. 비구들이여, 무엇이 닦음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냄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여 내놓음에 이르는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염각지.念覺支). ···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택법각지.擇法覺支). ···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이 요소를 닦는다(정진각지.精進覺支).··· 기쁨(희열)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희각지.喜覺支). ···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경안각지.輕安覺支). ···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정각지.定覺支). ···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냄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여 내놓음에 이르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사각지.捨覺支).
*뜻과 특징과 역활과 나타남에 따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기억한다는 뜻(saranattha)에서 마음챙김(sati)이다. 특징은 확립함이다. 혹은 반복함이다. "마치 왕의 창고지기가 '이만큼의 금이 있고, 이만큼의 은이 있고, 이만큼의 재물이 있다.'라고 왕의 재물을 반복하여 생각하듯이, 그와 같이 마음챙김이 있을 때 유익함과 해로움, 비난받아 마땅함과 비난받을 일이 없음, 저열함과 수승함, 흑백으로 상반되는 여러 법을 반복해서 생각한다. 이것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Minl.37)라고, 역활은 대상에 깊이 들어감이다. 혹은 잊어버리지 않음이다. 나타남은 대상과 직면함이다.
②사성제의 법들(catusacca-dhamma)을 간택하기(vicinati) 때문에 법을 간택함이라 한다. 즉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이렇게 검증한다는 말이다. 특징은 간택함이고, 역활은 밝게 비추는 것이다. 즉 법들의 진실한 본성을 덮은 어리석음을 흩어버린다. 나타남은 미혹하지 않음이다.
③적절한 방법으로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정진(viriya)이라 한다. 특징은 용감함이고, 역활은 굳건하게 지지함이고, 나타남은 가라앉음과 반대되는 것이다.
④만족하기 때문에 희열(piti)이라 한다. 특징은 충만함 혹은 만족함이고, 역활은 몸과 마음을 강하게 함이고, 나타남은 의기양양함이다.
⑤몸과 마음의 피로를 편안하게 하기 때문에 편안함(passaddhi)이라 한다. 특징은 고요함이고, 역활은 몸과 마음의 피로를 가시게 함이고, 나타남은 차분함이다.
복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몸과 마음의 피로를 가시게 함'에서 '몸'은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행들의 무더기인 세 가지의 무더기를 말하고, '마음'이란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를 말한다. '피로'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원인인 들뜸 등의 오염원을 말한다.(MAT.i.175)
⑥모으기 때문에 삼매라 한다. 특징은 흩어지지 않음 혹은 산만하지 않음이고, 역활은 마음과 마음부수들을 결합시키는 것이고, 나타남은 마음이 계속해서 머무는 것이다.
⑦공평하기 때문에 평온(평정)이다. 특징은 식별함 혹은 공평함이고, 역활은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을 막음 혹은 편견을 끊는 것이고, 나타남은 중립적인 상태이다.
비구들이여, 닦지 않는 자에게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닦는 자에게 그 번뇌와 고뇌와 열기들이 없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닦음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라고 불린다.
28.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봄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봄을 통해서 버려지고, 단속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단속을 통해서 버려지고, 수용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수용을 통해서 버려지고, 감내를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감내를 통해서 버려지고, 피함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피함을 통해서 버려지고, 버림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버림을 통해서 버려지고, 닦음을 통해서 버려야 하는 번뇌들이 닦음을 통해서 버려졌을 때, 비구들이여, '비구는 모든 번뇌를 단속을 잘 단속하면서 머문다. 갈애를 잘랐고, 족쇄를 풀었고, 자만의 바른 통찰을 통해 괴로움을 끝냈다.'라고 불린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모든 번뇌의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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