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시선집

雪巖亂藁 설암난고(秋鵬 추붕)

실론섬 2016. 10. 17. 18:19

雪巖亂藁 설암난고(秋鵬 추붕)


深谷 깊은 계곡


淸泉鳴石齒   맑은 샘물은 돌의 이빨을 울리고

秋日照山眉   가을 해는 산의 눈썹을 비추네.

谷邃行難遍   골짜기가 깊다 보니 두루 다니기 어려워

愁倚一藤枝   갑갑한 마음으로 지팡이에 기대어보네.


贈客僧 객승에게


袖裏長風滿   소매 속엔 긴 바람 가득하고

筇邊片月斜   지팡이 곁으로는 조각달이 기울어졌네.

斷雲無住著   머무는 곳 없는 조각 구름

何處是君家   어느 곳이 그대의 집이런고?


田中秋事 가을의 들판


荒田穀已熟   거친 들판에도 곡식이 이미 익어서

霜後風前落   서리가 내리자 바람 앞에 떨어지네.

粟粒似金沙   곡식 알이 금모래와도 같은데

忍看群鳥啄   수많은 새들이 쪼아먹는 것 차마 보리오?


古寺 오래된 절


嶽寺甚岑寂   산 속의 절 몹시도 고요하기만 하고

溪雲閑去來   골짜기의 구름은 한가로이 오고 가네.

庭中復何有   뜰 가운데엔 또 무슨 일이 있나?

片雪點蒼苔   한 송이 눈이 푸른 이끼에 점을 찍네.


雨中行 비 속에 길을 가며


斜風時撲面   비스듬한 바람 얼굴로 불어오고

細雨又沾衣   보슬비는 옷속까지 적시네.

杖拂垂林露   지팡이로 수풀에 맺힌 물방울 떨구면서

山中獨自歸   산 속으로 홀로 돌아가네.


觀空僧 공(空)을 관(觀)하는 스님


岑崟幽邃寄高情   높은 이상 품고서 심심산골에 들어오니

弟是松雲鶴是兄   아우는 소나무와 구름이요 학은 형이로다.

隱豹豈曾嫌霧重   숨은 표범이 두터운 안개를 어찌 싫어하리오?

盤龍元自喜潭淸   서린 용은 원래부터 맑은 연못을 좋아한다네.

心閑一境長觀壁   마음은 경계에 한가로와 늘 벽을 관(觀)하고

目對千山獨倚欞   눈은 천 산을 마주하여 홀로 난간에 의지하네.

機息不知寒暑變   생각이 그치니 추위와 더위 바뀌는 것도 알지 못하고

也知霜降驗鍾鳴   서리 내리고 종 울리는 것만 알 뿐이네.


春日感興 봄날의 감흥


巖前澗水碧於藍   바위 앞의 산골물은 쪽빛보다 푸르고

雨後梨花白如雪   비 온 뒤의 배꽃은 눈처럼 희구나.

物物自開大施門   물물마다 큰 보시의 문을 여니

也知不費娘生舌   굳이 혀를 놀릴 필요가 없겠구나.


聞溪 시냇물 소리 들으며


溪聲自是廣長舌   시냇물 소리는 절로 장광설이어서

八萬眞經俱漏洩   팔만대장경을 모조리 누설시키네.

可笑西天老釋迦   가소롭게도 서쪽 나라 석가모니는

徒勞四十九年說   쓸데없이 사십구 년이나 설법을 하였도다.


山居 산에 살며


秋月春花老此身   가을 달 봄 꽃 속에 이 몸은 늙어가고

家無四壁不知貧   집에는 사방에 벽이 없어도 가난한 줄을 모르도다.

閑居寥落生高興   고요한 곳에 한가로이 사니 높은 흥이 생겨나고

白眼看他世上人   저 세속의 사람들을 백안시한다네.


感懷 감회


歲歲無如老去何 한 해 한 해 늙어감을 어찌할 수 없는데다

故人零落已無多 아는 이도 세상을 떠나고 얼마 없다네.

門前不見歸軒至 문 앞에는 찾아오는 이 보이지 않고

惟見棠梨一樹花 오직 한 그루 팥배나무 꽃만 보이네.


寫經次偶吟 사경을 하던 중에 우연히


世界茫茫隔大千   삼천대천세계만큼이나 넓고 넓은 이 세계

玉燈淸夜得參禪   옥 등불 맑은 밤에 참선을 하노라.

寫經豈爲求鵝去   사경을 하는 것이 어찌 거위를 얻으려 함이랴?1)

但以修行薦佛前   다만 부처님 앞에 바칠 수행일 따름일진저.

1) 중국 진(晋)나라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산음(山陰) 지방에 사는 한 도사(道

   士)에게『도덕경(道德經)』을 글씨로 써 주고 대신에 거위를 얻어 왔다는 고사가

   있다.


石竇鳴泉入夢淸   돌구멍으로 울리는 샘물 소리 잠결 속에 맑으니

眼前塵累一毫輕   눈 앞의 번뇌가 터럭 하나만큼이나 가볍구나.

山樓靜夜昏無月   산 속 누각 고요한 밤은 달도 없이 어두운데

簷角疎星耀彩楹   처마 끝에 성근 별들이 단청한 기둥을 비추누나.


詠懷 회포를 노래함


鑚極忘形二十年   진리를 찾느라 몸을 잊은 지 이십 년

一朝功透入寥天   하루 아침에 그 공이 태허(太虛)로 뚫고 들었네.

虛空發焰燒三界   허공에선 불꽃이 일어 삼계(三界)를 다 태우고

劫海生烟涸九泉   겁(劫)의 바다에선 연기가 일어 구천(九泉)2)을 마르게 하네.

無影樹頭花爛熳   그림자 없는 나무 끝에 꽃이 난만하고

不萌枝上果團圓   싹 없는 가지 위에 과실이 둥실하구나.

自知休覓還丹草   이제 알겠도다, 환단초(還丹草)3) 찾기를 그만둘지니

卽此勞生大覺仙   바로 이 고된 인생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신선이로다.

2) 구천(九泉) : 죽어서 가는 땅 속의 세계. 황천(黃泉)과 같은 말.

3) 환단초(還丹草) : 먹으면 즉시 신선이 된다는 풀.


雨後 비 온 뒤


晩晴宜眺望   저녁 무렵 비가 개니 바라보기가 좋고

淸興屬詩魂   맑은 흥은 시상을 일으켜 주네.

麗日通林罅   고운 해는 숲 사이로 비쳐 들고

香泉出石根   향기로운 샘물은 돌 뿌리에서 솟아나는데

林藏初霽雨   숲은 갓 개인 비를 머금었고

月送欲歸雲   달은 돌아가려는 구름을 전송하는구나.

搜句遲來得   멋진 시구가 잘 떠오르질 않기에

遠山縱目看   먼 산을 이리저리 마음껏 살펴보노라.


幽居雜興 은둔의 삶을 살며


道林林壑遠於閻   도의 수풀과 골짜기는 속세에서 멀고

白日晴窓但黑甛   한 낮의 개인 창에선 그저 낮잠이나 잘 뿐.

左右導從唯虎豹   좌우에 얼른거리는 건 오직 호랑이와 표범이며

百年家活卽虀鹽   백 년 동안 살 계책이란 김치와 소금이라.

危峯逼戶雲生榻   집이 우뚝한 봉우리에 가까우니 걸상에 구름이 생겨나고

飛瀑臨軒雪入簾   처마 앞에 폭포가 있어 눈이 주렴으로 들어오네.

多少世間機永息   수많은 인간세상의 일들이 영원히 사라지니

近來心月政開匳   달같은 마음에 향그릇이 열린 듯하네.


漫興 흥에 겨워


物外多空地   사물 그 너머는 텅 빈 곳 많고

壺中有寶坊   병 속에는 보배로운 마을이 있네.4)

得僧詩脫俗   중이 탈속한 시를 얻는다면

鍊骨氣無傷   뼈를 단련하면서도 기에는 손상이 없지.

壑月閑窺室   골짜기의 달은 한가로이 방안을 엿보고

天花亂撲床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은 어지러이 침상에 부딪치네.

微吟終永夕   시를 읊으며 긴 저녁을 지내노라니

尤覺興還長   흥이 더욱 깊어짐을 알겠도다.

4) 중국의 전설에 한 노인이 병 속을 드나들었는데, 그 병 속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호천(壺天) 혹은 호중천(壺中天)이라 한다.


樵夫 나무꾼


一生蹤跡寄巖阿   한 평생 자취를 바위 언덕에 맡기니

斤斧生涯日月磨   날마다 도끼를 가는 것이 일상이라.

傲世心關辛苦事   세상에 오만한 마음 고통스런 일이지만

遏雲聲唱太平歌   태평가 부르는 소리는 가는 구름 멈추게 하네.

石林深處無心去   돌 숲이 깊은 곳을 무심으로 지나가고

山路險邊信脚過   험한 산길을 발 가는 대로 다니네.

天子無緣難見面   천자라도 인연 없이는 얼굴 보기 어려운데

爲何王質爛其柯   왕질(王質)은 어찌하여 도끼 자루 썩게 하였나5)?

5) 중국의 전설에 왕질(王質)이란 사람이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정

   신을 차려보니 그 사이에 도끼 자루가 다 썩어 있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