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시선집

鏡虛集 경허집(惺牛 성우)

실론섬 2016. 10. 17. 18:40

鏡虛集 경허집(惺牛 성우)


自梵魚寺向海印寺道中口號

범어사(梵魚寺)에서 해인사(海印寺)로 가는 도중에1)

1) 경허성우는 1894년에 동래(東萊, 지금의 부산광역시)에 있는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 경상남도 합천의 해인사에서 임금의 뜻에 따른 인경불사(印經佛

   事)와 신설하는 수선사(修禪社) 등의 불사를 주도하였다.


識淺名高世危亂   어지러운 세상에 식견은 얕으면서 이름만 높으니

不知何處可藏身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구나.

漁村酒肆豈無處   어촌이든 술집이든 어찌 장소가 없겠는가마는

但恐匿名名益新   이름을 숨길수록 이름이 더 알려질까 두려울 뿐.


題智異山靈源寺 지리산(智異山) 영원사(靈源寺)2)

2) 영원사(靈源寺)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사찰이다. 해발 920미터의 고

   지대인 지리산 중턱 울창한 숲 속에 위치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영원대사가

   창건하여 영원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서산대사와 사명대

   사를 비롯해 청매, 포광, 설파 등 선불교 고승들이 거처간 수도 도량이다. 앞쪽

   으로는 벽소령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경치가 수려하다. 한때는 선방이 100

   칸이 넘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나 6·25 때 소실되고, 지금 건물은 그 이후 다

   시 지어진 것이다.


不是物兮早駢拇   아무 것도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육손이3)

許多名相復何爲   허다한 이름과 모습을 다시 어찌하리오!

慣看疊嶂煙蘿裏   늘 보아오던 겹겹의 봉우리와 안개낀 겨우살이 넝쿨 속에

無首猢猻倒上枝   머리 없는 원숭이가 거꾸로 가지를 타고 오르네.

3) 육손이 : 쓸 데 없는 손가락이 하나 더 있음을 의미한다. 『장자(莊子)』 「변무(騈

   拇)」편에 나오는 이야기.


入甲山路踰江界牙得浦嶺〉

갑산(甲山) 들어가는 길에 강계(江界) 아득포(牙得浦) 고개를 넘으며4)

4) 경허성우는 1904년 돌연 함경도 갑산·강경 등지로 들어가 머리를 기르고 서당

   훈장 노릇을 하며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아마 이 시기에 지은 작품인 것으로 보

   인다.


人間何貴積南金   인간이 어찌 황금 쌓기를 귀히 여기리오?

好是淸閑物外襟   좋은 것은 맑고 한가로운 물외의 생각이로다.

細看松栢深千谷   깊은 골짜기에 자라는 소나무 잣나무를 자세히 살피니

漸上煙霞亘萬尋   피어오르는 안개는 만 길이나 뻗치네.

奇花不變靑春色   기이한 풀은 싱그러운 빛이 늘 그대로이고

怪鳥相傳太古音   이상한 새는 태고의 소리를 전해 주네.

垂白長爲塵臼客   머리가 하얘지도록 속세의 나그네가 된 이들

那能捿此靜身心   어찌 여기에 깃들어 몸과 마음 고요하게 할 수 있으리!


書懷 회포를 적다


邊城留滯誤經營   변방에 머무는 것은 잘못 사는 것이니

鄕思千般詎盡名   천 가지 고향 생각 어찌 다 적으리.

病衰難却苔岑契   병으로 쇠약한 몸은 수행의 뜻 어렵게 하거니와

文術誰求草芥輕   글재주인들 누가 초개처럼 가볍게 얻을 수 있으리.

半天雲盡層峯色   하늘에 구름 흩어지니 층층의 봉우리 자태 보이고

邃壑風生落木聲   깊은 골짜기에 바람이 이니 낙엽 소리 들려오네.

自是不歸歸便得   돌아가지 못하던 몸 문득 돌아가게 되니

好看松菊滿園淸   뜰 가득한 소나무와 국화가 맑아 보기가 좋네.


酒婆商老與之班   술집 할멈이나 장사하는 노인과 함께 어울리니

韜晦元來好圓圜   숨어 살기에는 아주 적격이로다.

未暮火行山豹下   저물기도 전에 표범은 불길같이 산을 내려오고

深秋風搏塞雁還   깊어가는 가을에 날개짓하며 기러기 날아오네.

不貪金玉人間寶   금과 옥을 탐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보배이니

亦忘煙霞物外閑   또한 안개 속에 살아가는 물외의 한가로움조차 잊노라.

超脫無疑心自得   초탈하여 걸리지 않는 마음을 자득한 것은

只緣曩日窺玄關   지난 날 깊은 관문 속을 엿보았던 덕분이로다.


坐熙川頭疊寺 희천(熙川)5) 두첩사(頭疊寺)에 앉아서

5) 희천(熙川) : 평안북도에 있는 지역 명칭.


唱出无生一曲歌   무생(無生)의 한 곡조 불러보니

大千沙界湧金波   삼천대천세계 모두 녹아 금물결이네.

雖云大道不人遠   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다지만

其奈浮生如夢何   뜬 인생이 꿈과 같은 것을 어찌하리오?

永日山光淸入座   날이 길어 산빛은 맑게 자리로 비춰 들고

遙村林影亂連坡   멀리 마을과 숲 그림자 언덕에 이어졌네.

拈來物物皆眞面   물물마다 참된 모습 드러나는데

何必雌黃辨佛魔   부처니 마귀니 따져서 무엇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