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칙 백장재참 百丈再參1)
1) 백장회해(百丈懷海)가 스승인 마조도일(馬祖道一)과 나눈 문답을 기초로 한 공
안. 조사선 초기의 문답방식과 선사상이 잘 나타나는 공안이다. 이것 그대로의
‘즉(卽)’과 이것을 떠나는 ‘리(離)’ 가운데 그 어느 것인지를 묻는 형식이 이 공안
의 주안점이다. 이것은 후대 간화선에서 화두를 제기하거나 설정하는 전형적인
양식이 되었다. 백장이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는 것은 즉과 리 그 어느 것도 통
하지 않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의 경계를 나타낸다.
[본칙]
백장이 마조에게 법을 물으러 다시 찾아갔을 때 마조가 불자를 꼿꼿이
세우자 백장이 말했다. “이것 그대로의 작용입니까, 이것을 떠난 작용입
니까?” 마조가 불자를 원래 있던 자리에 걸어 놓았다.2) 백장이 말없이 있
자 마조가 말했다. “너는 훗날 이렇게 두 입술을 놀리면서 무엇으로 남들
을 가르치려 하는가?” 이번에는 백장이 불자를 가져다 꼿꼿이 세우자 마
조가 말했다. “이것 그대로의 작용인가, 이것을 떠난 작용인가?” 백장이
다시 불자를 원래 있던 자리에 걸었더니, 마조가 한 소리 크게 내질렀다.
그 소리에 백장은 사흘 동안 귀가 멀었다. 〈훗날 황벽이 백장 문하에 있다가 어
느 날 작별인사를 하며 “마조께 예배하러 가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백장이 말했다. “마조
께서는 이미 입적하셨다네.” “마조께서는 무슨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백장이 마조를 다
시 찾아가 법을 물었던 인연을 들려주며 말했다. “당시에 나는 마조에게 할을 한 번 당하
고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네.” 황벽이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백장이
말했다. “그대는 다음에 마조의 법을 잇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스님
의 말씀을 듣고서 마조의 근본적인 기틀에서 나오는 작용을 알기는 했으나, 마조의 본체
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마조의 법을 잇는다면, 훗날 우리의 후손들을 망칠 것입니다.”〉
百丈再叅馬祖, 祖竪起拂子, 師云,“ 卽此用, 離此用?” 祖
掛拂子於舊處, 師良久, 祖云,“ 你已後, 開兩片皮, 將何爲
人?” 師遂取拂子竪起, 祖云, “卽此用, 離此用?” 師亦掛拂
子於舊處, 祖便喝. 師直得三日耳聾. 〈後黃蘗到百丈, 一日辭, “欲
禮拜馬祖去.” 丈云, “馬祖已遷化也.” 蘗云, “未審馬祖有何言句?” 丈遂擧再叅
因緣云,“ 我當時被馬祖一喝, 直得三日耳聾.” 黃蘗聞擧, 不覺吐舌. 丈云,“ 子已
後, 莫承嗣馬祖否?” 蘗云,“ 不然. 今日因師擧, 得見馬祖大機之用, 且不識馬祖.
若嗣馬祖, 已後喪我兒孫.”〉
2) 앞에서 불자를 꼿꼿이 세운 것은 학인을 맞이하는 예법으로 설법을 하겠다는
표시이며, 여기서 불자를 원래의 자리에 걸어놓은 동작은 할 말을 다했으니 물
러가라 또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낸다. 아래 <설화>에서 전자를 방
행(放行), 후자를 파주(把住)에 각각 대응시킨 해설도 이 맥락에 준한 것이다.
[설화]
백장이 마조에게 법을 물으러 다시 찾아갔다:방장에 주석하다가3) 다시 찾아간
것이다. 이는 평상시 회중에 있으면서 터득한 법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말
한다. 그러므로 ‘다시 찾아갔다’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화엄
경』을 설하실 때 보광법당(普光法堂)에서 두 차례 설법4)한 것과 같다.
3) 자신도 독립하여 한 총림의 대중을 이끄는 최고 지위에 있었다는 말.
4)『화엄경』설법은 모두 일곱 곳에서 아홉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이를 ‘칠처구
회(七處九會)’라고 한다. 보광법당은 두 번째와 일곱 번째 설법이 이루어진 곳
이다.
총림에서 이 공안에 대하여 헤아리며 이렇게 말한다. “마조가 꼿꼿이 세
운 것은 털이 길게 늘어진 불자이다. ‘이것 그대로의 작용입니까, 이것을
떠난 작용입니까?’라고 한 말은 ‘이 불자 그대로의 작용입니까, 이 불자를
떠난 작용입니까?’라고 물은 말이니, 배촉관5)이다. ‘마조가 ~ 자리에 걸어
놓았다’라는 것은 배(背)와 촉(觸)을 모두 떠난 것이다. 백장이 ‘불자를 가
져다 꼿꼿이 세운 것’과 ‘불자를 원래 있던 자리에 걸어 놓은 것’은 하나의
그릇에 담긴 물을 고스란히 다른 그릇에 부어서 전하는 것과 같았다.6)” 강
론하는 자들은 이처럼 획일적으로 말하며,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바꿀 수
없는 견해라고 한다.
5) 背觸關. 즉(卽)과 리(離)를 모두 차단하여 관문을 설정하는 방식이다. 즉은 촉
(觸), 리는 배(背)에 각각 상응한다. 본서 108則 주석2), 165則 주석3), 1331則
주석1) 참조.
6) 여수전기(如水傳器). 사병전기(寫甁傳器)와 같은 말이다. 스승의 법이 남김없이
제자에게 전승되는 관계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이 아난비구는 많이 알고 그대
로 간직하여 큰 지혜를 지니고 있으며, 항상 여래를 따르기에 범행이 청정하고,
불법을 들으면 하나의 그릇에 담긴 물을 다른 그릇에 조금도 남김없이 옮겨서
전하듯이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았다.”(『佛祖歷代通載』 권3 大49 p.496c15.
此阿難比丘, 多聞總持, 有大智慧, 常隨如來, 梵行淸淨, 所聞佛法, 如水傳器, 無
有遺餘.);『釋氏要覽』권중 大54 p.293b4에 따르면, “병의 물을 쏟아 다른
그릇에 전함:경에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불법을 전수받은 것은 마치 물병에
담긴 물을 쏟아 다른 그릇에 모두 전하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것과 같았다’라
고 하였다. 물병과 그릇은 비록 다르지만 주고받은 물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寫甁傳器:經云, ‘阿難, 領受佛法, 如瀉甁水, 傳之別器, 更無遺餘.’ 甁器雖殊,
水則無別.)라고 하였는데, 인용한 경전은 40권본『大般涅槃經』권40 大12 p.
601b26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백장이 마조가 앞서 한 동작을 그
대로 재현한 것을 두고 그것이 마조의 법을 고스란히 이은 징표라는 일부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하여 끌어들인 비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백장은 당시에 대사
(大事)를 밝히지 못한 상태였는데, 마조가 불자를 세우는 것을 보자마자
배촉관을 질문으로 삼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배촉관은 안목을 제대
로 갖춘 종사가 자유자재로 써먹는 경계이지 수행하는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의 그릇에 담긴 물을 고스란히
다른 그릇에 부어서 전하는 것과 같이 마조의 경지를 온전히 깨달아 관문
을 통과하고 더 이상 뒤에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마조에게 한 번의
할을 당한 뒤에야 비로소 대사를 마쳤다는 말 또한 옳지 않다. 상세히 따
져보기 바란다.
마조가 꼿꼿이 세운 것은 한 자루 불자이다. 그러므로 털이 길게 늘어진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찾을 것은 없다. 불자를 꼿꼿이 세운 동작은 찾아온
학인을 응접한 것이니 곧 방행(放行)이고, 불자를 걸어 놓은 것은 학인을
응접하지 않겠다는 뜻이니 곧 파정(把定)7)이다.
7) 파정과 방행. 본서 1則 주석37) 참조.
이것 그대로의 작용입니까, 이것을 떠난 작용입니까:어떤 책에는 “이것뿐입니
까, 또 다른 것이 있습니까?”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 그대로의 작용’은 불
자를 세운 것을 가리키고, ‘이것을 떠난 작용’은 불자를 걸어 놓은 것을
가리킨다.
말없이 있자[良久]:설법하다가 잠깐 침묵하는 사이를 말한다.
너는 훗날 ~ 남들을 가르치려 하는가:궁극적인 도리로 학인을 가르치려고 간
절하게 밀어 붙이며 따진 것이다.
백장이 불자를 세웠다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걸어 놓은 것:하나의 그릇에 담긴
물을 고스란히 다른 그릇에 부어서 전하듯이 마조의 뜻을 아직 다 터득하
지는 못했다고 해도 그날 비로소 배운 것도 아님을 뜻한다. 만약 그날 배
워서 마조가 불자를 세우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것 그대로의 작용입니까,
이것을 떠난 작용입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백장은 들오리 소리를 듣고 마조에게 코를 비틀리고 나서야 깨달은 것
이 있었는데,8) 다음 날 마조가 법좌에 오르자 나와서 배석(拜席)을 걷어버
린 것9)은 자신이 본 그 경계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할 중생
이 없는데 법좌에 올라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라는 뜻이다. 마조가 방
장으로 돌아가 백장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내가 설법을 시작하지도 않았
는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배석을 걷어버렸는가?” “화상께 코가 비틀렸기
때문입니다.” “어제 그대는 어디에다 마음을 두었는가?” “오늘은 코가 오
히려 아프지 않습니다.” 마조가 “그대는 오늘의 일[今日事]10)을 훤히 알았
구나”라고 말하자 백장이 예배하고 물러갔다고 한다.11) 오늘은 코가 오히
려 아프지 않다고 한 말은 ‘비록 본래부터 있기는 하나 반드시 새로운 경
험[新熏]에 의지해야 한다’라는 뜻이다. 시자의 요사로 돌아가서 문득 소
리 내어 울다가 다시 웃었던 것은 어제는 코가 아파서 울고 오늘은 코가
아프지 않아서 웃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대체로 금일사(今日事)와 본분
사(本分事)를 모두 갖추어 깨달은 경계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기 때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조가 불자를 꼿꼿이 세우는 것을 보자마자 “이것
그대로의 작용입니까, 이것을 떠난 작용입니까?”라고 말했던 것이다. 만약
에 터득한 바가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체(體)를
갖추기는 했으나 미미하여 그 극치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극문(眞淨克文)은 “나그네의 마음은 걸음마다 상대를 따라 변하니 근
본적인 위광이 있더라도 나타낼 수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8) 본서 177則「百丈野鴨」본칙 참조.
9)『景德傳燈錄』권6「百丈懷海傳」大51 p.249c3,『碧巖錄』53則「評唱」大48
p.188a18 참조.
10) 본래사(本來事)·본분사(本分事)의 상대어이다. 본래사가 무차별의 본분을 깨닫
는 일이라면 금일사는 매일의 일상과 시절에 따라 변화하는 차별된 현상을 알
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므로 금일의 차별된 일을 밝
히는 것에 의하여 무차별의 본분사에 도달하는 방법이 선가의 상용 수단이다.
11) 뒤에 생략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장이 시자의 요사(寮舍)로 돌아와 울자 함
께 일하는 시자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우느냐?’ ‘화상께 가서 물어보아라.’ 시
자가 마조를 찾아가 묻자 마조가 말했다. ‘그에게 가서 물어보아라.’ 시자가 다
시 요사로 돌아와 백장에게 묻자 백장이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시자가 ‘조금
전에는 울더니 지금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웃는 게냐?’라고 묻자 백장이 대답
하였다. ‘내가 조금 전에는 울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웃음이 난다.’”(『碧巖錄』
53則「評唱」大48 p.188a24. 却歸侍者寮哭, 同事侍者問云, ‘爾哭作什麽?’ 丈
云, ‘爾去問取和尚.’ 侍者遂去問馬祖, 祖云, ‘爾去問取他看.’ 侍者却歸寮問百丈,
丈却呵呵大笑. 侍者云, ‘爾適來哭, 而今爲什麽却笑?’ 丈云, ‘我適來哭, 如今却
笑.’);『百丈語錄』 卍119 p.817b9에는 마조의 상당 법문에서 백장이 배석을
걷은 일화 없이 코가 비틀린 뒤에 바로 요사로 돌아와 우는 상황으로 묘사되어
전후의 이야기 배치가 다르다.
마조가 한 소리 크게 내질렀다:이 한 소리[一喝]는 바로 위음왕불 이전12)의
무늬 없는 도장13)이니, 이 도장으로 한 번 찍어버렸다는 뜻이다. 어떤 책에
‘위세를 떨치며 한 소리 크게 내질렀다’라고 한 말은 있는 힘을 다해 들어
보였다는 뜻이다.
12) 위음나반(威音那畔). 위음왕불 시기 저쪽 너머라는 말. 위음왕불이전(威音王佛
以前)과 같은 말이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공겁이전(空劫以前) 등과 같은
말이다. 본서 988則 주석13) 참조.
13) 무문인자(無文印子). 무늬가 없는 도장. 곧 언어문자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심인(心印)을 가리킨다. 무자인(無字印) 또는 불조심인(佛祖心印)이라고도 한다.
사흘 동안 귀가 멀었다:이전에 얻었던 하나하나가 산산이 부서졌으니 여
기에 이르러 궁극의 상세한 소식을 체험으로 알아차려 마조의 뜻을 깊이
터득했다는 말이다. 앙산혜적(仰山慧寂)이 ‘백장은 마조의 대기(大機)를
얻었고 황벽은 마조의 대용(大用)을 얻었다’14)라고 한 말이 이 뜻이다. 그
러나 불자를 세운 방행과 불자를 걸어 놓은 파정을 떠나서 대기대용15)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이 파정과 방행 그대로 깨달은 것이다. 옛사람이 “말
후구16)를 그대에게 설하니, 밝음과 어둠이 하나의 짝이 되는 결정적인 순
간이다”17)라고 한 말도 대체로 이 의미와 같다. 그런데 애초에 백장이 마
조가 불자를 세웠다가 걸어 두는 바로 그때 그 의미를 속속들이 터득했다
면, 마조가 파정과 방행 외에 무엇을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백장이 그렇
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조가 바로 위세를 떨치며 한 소리 크게 내질렀
던 것이니, 달 속의 계수나무를 베어 없애면, 밝은 달빛이 더욱 많이 쏟아
진다는 점18)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14)『仰山語錄』 大47 p.587b18.
15) 大機大用. 속박을 벗어난 활발한 작용. 분별하고 사고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모
든 언행이 본분과 하나가 되어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발휘되는 작용을 말한다.
대체로 마조(馬祖)로부터 시작되어 임제(臨濟)에서 완성된 선풍(禪風)이라고
본다. 대기와 대용을 구별하는 경우 대기는 법체(法體) 또는 근본을 깨달은 경
지, 대용은 그것을 밖으로 활발하게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16) 末後句. 본서 1則 주석26) 참조.
17) 설두중현(雪竇重顯)의 게송에 나오는 구절.『碧巖錄』51則「頌」大48 p.186c17
참조.
18) 두보(杜甫)의 시「一百五日夜對月」에 나오는 구절. 달빛을 가리는 계수나무를
베어 없애면 달빛이 더욱 밝아질 것이라는 말. 선가에서는 틀에 박힌 집착을 제
거하면 실상을 보는 밝은 눈이 열린다는 비유로 쓰인다. “집 떠나 한식을 맞으
니, 눈물이 달빛처럼 흐르네. 달 속의 계수나무 베어 없애면, 밝은 달빛 더욱 많
이 쏟아지리라. 떨어져 있어도 붉은 꽃 피었겠지만, 고운 눈썹 찡그리고 있을 님
떠올리네. 견우와 직녀는 하염없이 시름하며 그리워하니, 가을 칠석이면 은하
수 건너 만나리.”(無家對寒食, 有淚如金波. 斫却月中桂, 淸光應更多. 仳離放紅蘂,
想像顰靑蛾. 牛女漫愁思, 秋期猶渡河.);“달의 맑은 빛이 계수나무에 가려진다는
말이다.”(『九家集注杜甫詩』권19. 言月之淸光, 爲桂所掩也.)
그렇다면 백장과 황벽은 모두 마조의 일할(一喝)을 빈틈없이[親] 이어
받은 것이다. 왜 그런가? 황벽이 “만약 마조의 법을 잇는다면, 훗날 우리의
후손들을 망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다만 대용만을
밝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약 마조의 일할(一喝)을 빈틈없이
이어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대기대용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장은
대기만 얻었을 뿐이지만 더 이상 대용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황벽은 대용
만 얻었을 뿐이지만 더 이상 대기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단이라곤
전혀 모르는19) 사람들은 말하기를 “대기 중에 대용이 있고, 대용 중에 대
기가 있다”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꿈엔들 백장과 황벽
의 경계를 알겠는가? 이렇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순간을 맞아서는 옛사
람도 그저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요 사람을 살리는 검[活人劒]이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20)
19) 무파비(無巴鼻). 보통은 ‘언어로 표현하거나 사유분별로 파악할 수 없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이 단절된 경지’를 말한다. 마치 소의 고삐[巴鼻]가 없어서 소를 끌
고 갈 방법이 사라진 상태와 같다. 여기서는 이 뜻으로는 통하지 않으며 마조의
할(喝)을 이해할 본질적인 수단이 없다고 보는 해석이 무난하다.
20) 마조의 할이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기도 했다가 사람을 살리는 검이 되기도 하
며 자유자재로 긍정·부정을 바꾸어 가며 학인을 이끄는 기용(機用)이라고 평가
하는 정도가 최선이며, 그 의미를 세세하게 풀어낼 수 있는 방편은 없다는 뜻이
다. 굉지정각(宏智正覺)이 임제의 할에 대하여 이 방식으로 평가했다. “임제가
양당의 수좌에게 일제히 할을 내지르자 어떤 학인이 물었다. ‘손님과 주인이 나
누어집니까?’ ‘손님과 주인이 뚜렷이 나누어졌다.’ 이 일화를 제기하고 굉지정
각이 평가했다.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사람을 살리는 검이 임제의 손안에 들어 있
다. 그러나 그 당시에 수좌들이 곧바로 할을 하여 설령 그들이 크게 신통을 보였
더라도 같은 목소리로 응한 결과가 될 뿐이다.’”(『宏智廣錄』권3 大48 p.29b21.
擧, 臨際兩堂首座齊下喝, 僧問際, ‘還有賓主也無?’ 際云, ‘賓主歷然.’ 師云, ‘殺人
刀活人劍, 在臨際手裏. 雖然如是, 當時便與一喝, 直饒他大逞神通, 也祇得同聲相應.’)
仰山再叅潙山21)者, 住方後再叅也. 此則常在會中, 所得法
與昔不同. 故曰再叅也. 例如佛重會普光也. 叢林中商量此
話云,“ 馬祖竪起地, 毛毶毶地拂子也. 卽此至用者, 卽此拂
子用, 離此拂子用, 卽背觸關. 祖掛至處者, 背觸俱離也. 師
遂取拂子竪起, 又掛拂子於舊處者, 如水傳器.” 講若畫一云
云, 此古今不易之論. 愚以爲不然. 何者? 百丈, 當時未明大
事矣, 才見馬祖竪起拂子, 直以背觸關爲問, 無有是處. 又背
觸關, 具眼宗師受用, 非行李邊事也. 若也如水傅器, 已透得
關, 更無後事, 被一喝然後事畢, 亦無有是處. 請詳辨之. 馬
祖竪起地, 一條拂子也. 然非離毛毶毶地外別討也. 竪起則
接待來機, 卽放行也;掛拂子則不待來機, 卽把定也. 卽此用,
離此用者, 一本云, “只這箇, 別更有在?” 則卽此用, 指竪起
拂子處;離此用, 指掛拂子處. 良久者, 說法須臾之間也. 你
已後, 至爲人者, 末後爲人, 曲折推徵也. 師竪起拂子, 又掛
拂子者, 雖未盡得馬祖意, 如水傳器, 又非今日方始學得也.
若也今日學得, 才見竪起拂子, 便問卽此用離此用, 無有此
理. 聞野鴨子聲, 被馬祖扭得鼻孔, 遂有省, 値陞座, 出捲拜
席, 是呈似已見也. 意謂無有衆生可度, 陞座圖箇什麽也. 祖
下座歸方丈, 問曰, “我適來未曾說法, 你爲什麽捲却拜席?”
師曰,“ 被和尙扭得鼻孔.” 祖曰,“ 你昨日, 向什麽處留心?”
師曰, “今日鼻孔又不痛.” 祖曰, “你深明今日事.” 師乃作禮
云云. 今日鼻頭又不痛者, 意謂雖是本有, 必借新熏也. 却歸
侍者寮, 忽然哭, 又忽然笑者, 昨日鼻頭痛故哭;今日鼻頭
又不痛故笑. 盖今日本分, 俱備見處, 不偏枯故也. 是以, 才
見馬祖竪起拂子, 便道卽此用離此用. 若也無所得, 爭能伊
麽? 雖然如是, 具體而微, 未臻其極. 故眞淨文云,“ 客情步
步隨人轉, 有大威光不能現.” 祖便喝者, 這一喝, 直在威音
那畔, 無文印子, 一印印破也. 一本云,‘ 振威一喝者’, 盡力
提持也. 三日耳聾者, 前來所得, 一一撲落, 到此, 體會末後
曲折, 深得馬祖意. 仰山所謂,‘ 百丈得大機, 黃蘗得大用.’
然非離竪拂放行, 掛拂把定, 會得大機大用, 卽此把定放行
而會得. 古人云, “末後句爲君說, 明暗雙雙地時節.” 盖此義
也. 然則當初百丈, 若於馬祖竪拂掛拂處, 深得其意, 把定放
行外, 圖箇什麽? 百丈旣不能故, 馬祖直得振威一喝, 信知
斫却月中桂, 淸光應更多. 然則百丈黃蘗, 莫不親承馬祖一
喝. 何故? 黃蘖云,“ 若承嗣馬祖, 已後喪我兒孫.” 此無他,
但明得大用故云耳. 若不親承馬祖一喝, 何名大機大用? 故
百丈只得大機, 更不要大用;黃蘖只得大用, 更不要大機.
有一般無巴鼻地道,“ 大機中有大用, 大用中有大機.” 若伊
麽, 何曾夢見百丈黃蘗. 到這時節, 古人, 只道得箇殺人刀活
人劒.
21) ‘百丈再叅馬祖’로 되어야 옳다.
분양선소(汾陽善昭)의 송
언제나 일 없이 스님 곁에서 시봉을 들었는데,
스님이 선상 모서리에 걸린 불자를 가리켰다네.
들거니 놓거니 하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서니,
분명하게 내지른 소리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노라.
〈이 게송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따라 지은 것이다. 백장이 마조를 다시 찾아가 시봉을
들던 중 마조가 눈짓으로 선상 모서리에 걸려 있는 불자를 가리켰다. 백장이 마조에게 말
했다. “이것 그대로의 작용입니까, 이것을 떠난 작용입니까?” “너는 훗날 이렇게 두 입술
을 놀리면서 무엇으로 남들을 가르치려 하는가?” 백장이 불자를 가져다 꼿꼿이 세우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 그대로의 작용인가, 이것을 떠난 작용인가?” 백장이 불자를 원래 있
던 자리에 걸었더니, 마조가 위세를 떨치며 한 소리 크게 내질렀다.22)〉
汾陽昭頌, “每因無事侍師前, 師指繩床角上懸. 擧放却歸本位
立, 分明一喝至今傳.” 〈此本, 百丈再叅侍立次, 祖以目視禪床角拂子. 丈
曰, “卽此用, 難此用?” 祖曰, “你向後, 開兩片皮, 將何爲人?” 丈取拂子竪起.
祖曰,“ 卽此用, 離此用?” 丈掛拂子於舊處, 祖振威一喝.〉
22) 이렇게 구성된 내용은『雪竇語錄』권3 大47 p.685b21,『虛堂語錄』권2 大47
p.1000a26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설화]
들거니 놓거니 하다 ~ 오늘날까지 전해지노라:불자를 세우거나 놓는 행위로
위세를 떨치며 한 소리 크게 내지른 경지를 빈틈없이 이어받지 않음이 없
었다는 뜻이다.
汾陽:擧放却歸本位立云云者, 竪拂放拂, 無不親承振威一
喝也.
대각회련(大覺懷璉)의 송
우(羽) 두드리니 상(商)23)으로 응하여 닿는 곳마다 통하니,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의지하며 종풍을 드러냈다네.
위세 떨친 한 번의 할에 서리 내리고 폭풍이 치니,
뚜렷이 드러난 무늬야 보건 말건 듣지는 못하리라.
大覺璉頌, “叩羽鳴商觸處通, 師資交互現宗風. 振威一喝霜飇
起, 任是昭文也不聰.”
23) 우와 상은 모두 오음계(五音階)의 음자리이다.
천복본일(薦福本逸)의 송
대웅봉24)에서 다시 만났을 때,
함께 걸어갈 길에 풀이 무성히 자라 늘어졌네.25)
돌아보며 지른 한 소리에 하늘과 땅 어두워지고,
두 귀는 모두 먹어 전혀 들리지 않았노라.
薦福逸頌, “大寂雄峯再會時, 相將行處草離離. 迴頭一喝坤
黯, 兩耳都聾摠不知.”
24) 대적웅봉(大寂雄峯). 대웅봉(大雄峯)을 말하니 곧 홍주의 백장산(百丈山)을 말
한다. 백장이 제시한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이라는 공안으로 유명하다. 현재
중국 강서성(江西省) 봉신현(奉新縣) 서쪽 120리 지점으로 파양호 부근에 있다.
25) 사람의 발길이 드문 풍경을 나타내는 선종의 상용구이다. 마조의 할과 그것에
대한 백장의 응답이 한 치의 방편도 허용하지 않는 본분의 기틀에서 이루어졌
다는 뜻이다. 모든 인지 수단을 틀어막아 학인들의 접근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
는 선풍을 나타낸다. 3구와 4구에 그 맥락이 이어진다.
장산법천(蔣山法泉)의 송
놓았다 거두어들인 이곳에 누가 관문26)이 없다 하는가!
마조가 누설한 기관27)을 보았는가?
천둥 같은 한 할에 듣는 자들의 귀는 모두 상할 것이니,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린 것도 오랜 기간은 아니리라.
蔣山泉頌,“ 放收誰道沒謷訛! 漏洩機關見也麽? 一喝如雷
者喪, 耳聾三日未爲多.”
26) 오와(謷訛). 효와( 訛)와 같다. 화두에 대한 어떤 분별이나 정의에도 뿌리내리
지 못하도록 반복하여 ‘교란’시키며 속이는 언행을 보이기 때문에 효와라 한다.
이러한 현혹의 장치가 관문(關門)이다.
27) 機關. 일정한 장치를 가진 관문. 간화선은 이러한 기관을 활용하므로 기관선(機
關禪)이라고도 한다.
해인초신(海印超信)의 송
한 할의 뜻도 총림에서 가려내는 자 드문데,
예나 지금이나 귀먹은 까닭 억지로 뚫어보려 하네.28)
등롱은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고,
노주는 머리 숙이고 눈썹 찌푸린다.29)
海印信頌, “一喝叢林辨者稀, 耳聾今古强針錐. 燈籠撫掌呵呵
笑, 露柱低頭却皺眉.”
28) 귀가 먹은 것은 마조의 대용(大用)으로서 인지 수단으로는 파고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뜻. 바늘과 송곳의 뚫는 작용을 인식에 비유했다.
29) 등롱(燈籠)은 등불을 담는 기구로서 마조의 할을 알아챈 자를 비유하고, 노주
(露柱)는 빛이 없는 기둥으로서 할을 알아채지 못한 우둔한 사람을 비유한다.
진정극문(眞淨克文)의 송
나그네의 마음은 걸음마다 상대를 따라 변하니,
근본적인 위광이 있더라도 나타낼 수가 없네.
갑작스런 한 할에 두 귀가 모두 멀어버리자,
나타30)의 눈이 황벽의 얼굴에 열렸네.
眞淨文頌, “客情步步隨人轉, 有大威光不能現. 突然一喝雙耳
聾, 那吒眼開黃蘗面.”
30) 那吒. Nalakūvara, Nalakūbala. 불법을 지키고 신봉하는 국왕과 국토를 수호
하는 선신(善神)이다. 나타태자(那吒太子)·나나천(那拏天)·나라구발라(那羅鳩
鉢羅), 나타구발라(那吒俱鉢羅·那吒鳩跋羅) 등이라고도 한다. 북쪽 비사문천왕
(毘沙門天王)의 다섯 왕자 중 셋째로, 세 개 또는 다섯 개의 머리와 여섯 개 또는
여덟 개의 팔을 가지고 있다. 손에는 항상 금강장(金剛杖)을 들고 양 눈으로는
사방을 관찰한다. 밤낮으로 국왕과 대신·백관(百官)·비구·비구니·우바새·우
바이 등을 수호하고, 만약 이들에 대하여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나타태자가 금
강장으로 악인의 머리를 때리거나 가슴을 찔러 죽인다.
[설화]
갑작스런 한 할에 ~ 황벽의 얼굴에 열렸네:황벽이 대용을 얻었다는 뜻이다.
眞淨:突然一喝至黃蘗面者, 黃蘖得大用也.
보령인용(保寧仁勇)의 송
목마는 염부제 사람들을 모두 짓밟아버리고,31)
진흙용은 바닷물을 남김없이 마셔버렸도다.32)
하늘 가득 천둥 울려 퍼지자 산악 무너지고,
서서히 무사한 평지에서 파도 일어나는구나.
保寧勇頌, “木馬蹋殺閻浮人, 泥龍飮竭滄溟水. 霹靂滿空山岳
摧, 看看平地波濤起.”
31) 목마는 마조를 나타낸다. 주석44) 참조.
32) 마조가 방거사(龐居士)에게 ‘한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이켜면 말해 주겠다’라
고 한 취지를 가리킨다. 본서 161則 「馬祖一口」 참조. 1~2구는 모든 차별의 대상
이 사라져 분별할 여지가 사라진 경계를 나타낸다.
동림상총(東林常總)의 송
궁극적인 지혜 밝히지 못해 다시 찾아 법 물으니,
서로 쫓고 따르나 그 작용 떠맡지 못했다네.33)
파도 끊고 물결 막아 온전한 본체 드러났지만,34)
귀먹은 뒤 사흘 지났으니 누군들 그 뜻 알랴!
東林總頌, “未明大智再叅尋, 相逐相隨用不任. 斷浪截流全體
現, 一聾三日孰知音!”
33) 마조가 불자를 꼿꼿이 들고 제자리에 놓은 작용을 그대로 따라 했으나 받아들
이기에 역량이 부족했다는 말.
34) 마조의 할로 망상의 흐름이 모두 단절되면서 온전한 본체가 드러난 것.
상방일익(上方日益)의 송
비 개었어도 뜬 구름 여전히 걷히지 않았는데,
맑은 하늘에 갑자기 외마디 천둥소리 울리네.
대유령의 매화35)는 벌써 봄소식을 전했으니,
한꺼번에 피는 복숭아꽃과 비교할 수 없노라.36)
上方益頌, “雨霽遊雲尙未歸, 晴空忽地一聲雷. 嶺梅已得春消
息, 不比山桃一例開.”
35) 본서 5則 주석31) 참조.
36) 눈 덮인 계절에 땅 밑의 봄기운을 전하는 매화는 외마디 천둥소리와 같은 마조
의 할, 따뜻해진 뒤에 무리지어 피는 복숭아꽃은 이 말 저 말로 이해하려는 분별
심을 상징한다.
불인지청(佛印智淸)의 송
마조는 친히 옛 부처의 마음을 전했으니,
대웅산의 회해가 그 뜻을 알아 차렸도다.
그때 한 할로 사흘 동안 귀가 멀었으나,
보지도 듣지도 못한 소식 지금껏 전해지네.
佛印淸頌, “馬祖親傳古佛心, 大雄懷海是知音. 當時一喝聾三
日, 無見無聞直至今.”
숭승원공(崇勝院珙)의 송
한 할이 도리어 사흘 동안 귀 멀게 하니,
만났을 때 누가 큰 인물인 줄 알았으랴?
봄볕은 비록 사사롭게 발휘한 힘없지만
꽃잎은 어찌하여 점점 붉어지는가?
점점 붉어짐이여!
사씨 집 셋째 아들 이제 어부가 아니라네.37)
崇勝珙頌,“ 一喝翻令三日聾, 相逢誰識大家公? 春陽雖有無
私力, 花臉寧敎取次紅? 取次紅! 謝三不是釣魚翁.”
37) 사씨 집 셋째 아들[謝三郞]은 현사사비(玄沙師備)를 말한다. 현사는 속성이 사씨
이며 집안의 3남이다. 출가하기 전에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 업이었다. 출
가하여 불도를 깨달은 어부 출신의 현사의 경우와 같이 할에 귀가 먹은 뒤 본분
을 깨우치게 되었다는 뜻이다.
불안청원(佛眼淸遠)의 송 1
불자 걸고 꾸지람 들어 귀가 멀어버렸다 하니,
납승이 어떻게 그 종풍의 진실을 증명하리오?
금강신장의 뒤통수에 박힌 생철을 뽑아내니,
화악산 세 봉우리가 거꾸로 하늘 향해 섰네.
佛眼遠頌,“ 掛拂遭呵耳便聾, 衲僧奚若驗宗風? 金剛腦後抽
生鐵, 華岳三峯倒卓空.”
불안청원의 송 2
집안이 넉넉해야 효자가 나고,
패권 국가에 모신38)이 있는 법.
주먹으로 정면에서 후려쳤다면,
후손을 망치는 일은 없었으리라.
〈이것은 황벽이 혀를 내두른 것에 대해 읊은 송이다.〉
又頌,“ 家肥生孝子, 國覇有謀臣. 拳頭劈口搥, 未到無兒孫.”
〈此頌黃蘗吐舌〉
38) 謀臣. 지혜가 뛰어난 신하.
자수회심(慈受懷深)의 송
아비와 자식이 만나 뜻이 통하니,
용천의 보검39)을 다시 갈았다네.
당시 마조의 할 밝히고자 한다면,
대지와 산하가 모두 귀 먹으리라.
慈受頌,“ 父子相逢臭味同, 龍泉寶劒再磨礱. 要明馬祖當年
喝, 大地山河盡耳聾.”
39) 용천보검(龍泉寶劔). 고대 초나라에서 제작한 보검이다. 원래 이름은 용연(龍淵)
이었는데, 당(唐)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자를 휘해 용천이라고 불렀다. 월나라
구야자(歐冶子)와 오나라의 간장(干將)이 합작하여 만들었다. 구야자와 간장의
또 다른 합작품인 태아(太阿)와 한 쌍을 이룬다.
원오극근(圜悟克勤)의 송
불자를 세웠다가 제자리에 걸어놓으니,
남김 없는 기틀이 나타났다 사라지네.
이것 그대로의 작용과 이것 떠난 작용,
하나로 그은 듯 일치하여 분명하도다.40)
정수리로 곧바로 천둥 같은 할을 울려,
고황41)에 든 불치병 침으로 뽑아내네.
한 할을 당하고 사흘 동안 귀먹었으니,
사자의 위엄으로 마음껏 몸을 던진 것이라네.42)
수없이 담금질한 순금도 빛을 잃고 말리라.
다시 말했다. “있는가, 있는가? 돌!”
蔣山勤頌,“ 立拂掛拂, 全機出沒. 卽此離此, 講若畫一. 頂門
當下轟霹靂, 鍼出膏肓必死疾. 承當一喝聾三日, 師子神威資43)
返擲. 百鍊眞金須失色.” 復云,“ 有麽? 有麽? 咄!”
40) 본칙에 나온 대로 마조와 백장이 불자를 두고 똑같은 언행을 한 사실을 나타낸다.
41) 膏肓. 심장과 횡경막 사이. 이곳에 병이 생기면 낫기 어렵다고 한다.
42) 반척(返擲). 사자가 웅크리고 있다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먹이를 덮쳐 잡는
동작. 탁월한 선사의 활발한 작용을 상징한다.
[설화]
사자의 위엄으로 마음껏 몸을 던진 것이라네:사자가 먹이를 향해 몸을 던지는
비결을 얻었다는 말이다.
수없이 담금질한 순금도 빛을 잃고 말리라:마조의 할에는 수없이 담금질한 순
금도 빛을 잃고 말리라는 뜻이다.
있는가, 있는가:백장과 같은 자가 있느냐는 말이다.
돌: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쓸모가 없다는 부정이다.
蔣山:師子神威資返擲者, 得獅子返擲決也. 百鍊眞金云云者,
馬祖喝下百鍊眞金, 也須失色. 有麽有麽者, 如百丈子, 有麽
也. 咄者, 設有, 也無用處.
대혜종고(大慧宗杲)의 송
망아지44)의 할에 가풍은 망가졌지만,
온 세상이 이로부터 소식이 통했다네.
뜨거운 화염 속에서 달을 건져낸 뒤,
우뚝한 기상으로 대웅봉에 홀로 앉았노라.45)
雲門杲頌, “馬駒喝下喪家風, 四海從玆信息通. 烈火燄中撈得
月, 巍巍獨坐大雄峯.”
44) 마구(馬駒). 마조를 가리키는 말. “처음에 6조 혜능(慧能)이 남악회양(南嶽懷讓)
에게 ‘인도의 반야다라삼장(般若多羅三藏)이 「그대의 문하에서 망아지 한 마리
가 배출되어 세상 사람들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하
였는데, 그것은 바로 마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회양의 제자 여섯 명 중에서 오
직 마조만이 심인(心印)을 친밀하게 전수받았다.”(『馬祖語錄』卍119 p.810b2.
初六祖, 謂讓和尙云, ‘西天般若多羅讖,「汝足下出一馬駒, 蹋殺天下人」 蓋謂師
也.’ 讓弟子六人, 惟師密受心印.)
45) 백장에게 어떤 학인이 “기특한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백장이 “홀
로 대웅봉에 앉아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한 구절에 따른다.(『碧巖錄』26則 大48
p.166c26. 僧問百丈, ‘如何是奇特事?’ 丈云, ‘獨坐大雄峯.’)
죽암사규(竹菴士珪)의 송
마조의 할에 하늘과 땅이 흔들리니,
온전한 기틀 남김없이 써 가문을 멸망시켰네.
사흘 귀먹은 일이 나무 스쳐간 바람인 듯하여,
저 황벽까지 연루시켜 후손들을 망쳐놓았도다.46)
竹庵珪頌, “江西一喝動坤, 大用全機是滅門. 三日耳聾風過
樹, 累他黃蘗喪兒孫.”
46) 바람은 아무 향기도 없지만 꽃나무를 스쳐 가면 그 향기를 싣고 멀리 퍼뜨릴 수
있듯이 마조의 할[바람]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백장의 말을 거쳐 황벽에까
지 하나의 의미로 전해졌다는 뜻이다.
백운지병(白雲知昺)의 송
큰 기틀과 큰 작용이 헛되게 전해지지 않았으니,
불자 거는 순간 당한 한 소리 어찌 우연이었을까!
그림 속의 병을 깨뜨리고 돌아간 뒤로,47)
천고의 세월 흐르도록 암흑만 가득 펼쳐져 있도로,48)
白雲昺頌,“ 大機大用不虛傳, 掛拂遭呵豈偶然! 打破畫甁歸去
後, 從敎千古黑漫漫.”
47) 그림 속의 병이라는 하나의 착각과 깨뜨린다는 또 하나의 착각이다. 불자를 들
고 제자리에 걸어둔 동작과 그것을 무너뜨린 마조의 할이 모두 착각이다. 착각
으로 착각을 대하는 ‘장착취착(將錯就錯)’의 방법이다.
48) 할(喝)에 대한 분별이 통하지 않는 무소식(無消息)의 경계를 나타낸다.
심문담분(心聞曇賁)의 송
용은 저녁놀을 휘감고 동부49)로 돌아가고,
기러기는 가을 빛 끌고 형양50)을 넘어가네.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험한 산길,
나뭇잎 지고 원숭이 울음에51) 애끊는 슬픔이여!
心聞賁頌, “龍帶晩煙歸洞府, 鴈拖秋色過衡陽. 不堪迴首關山
路, 木落猿啼正斷腸!”
49) 洞府. 도교의 전설에 나오는 신선이 거주하는 지방. 명산의 깊은 골짜기를 비유
할 때 쓰기도 한다.
50) 衡陽. 중국 호남성에 있는 지역. 이 형양의 형산(衡山)에 기러기가 되돌아간다는
회안봉(回雁峰)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소식을 전하는 기러기가 높은 회안봉을
넘지 못하여, 회안봉을 경계로 소식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51) 각각 사령운(謝靈運)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목락(木落)은「石門巖上宿」, 원제
(猿啼)는「登石門最高頂」에 나온다. 두 시 모두 나그네의 애환을 읊은 시이다.
송나라 황제52)의 송
평상 모서리에 걸린 불자 하나,
들거나 놓거나 벌써 다 틀렸네.
백장은 얼마나 느리고 둔했던지,
할을 당하고야 미세한 경계로 들어갔네.
大宋皇帝頌,“ 牀頭一拂子, 擧放已皆非. 百丈何遲鈍, 一喝入
精微.”
52) 남송 2대 황제인 효종(孝宗 재위 1162~1189).『歷朝釋氏資鑑』권11 卍132 p.217a3
참조.
무진거사의 송
외마디 할에 대웅봉이 쓰러지니,
해골의 두 귀 사흘 동안 멀었다네.
황벽은 듣는 순간 놀라 혀를 내둘렀으니,
이때부터 강서에는 비로소 가풍이 섰다네.
無盡居士頌, “一聲喝倒大雄峯, 三日髑髏雙耳聾. 黃蘗纔聞驚
吐舌, 江西從此立家風.”
본연거사의 송
대단한 한 번의 할이여!
천 균의 쇠뇌를 쏘는 것과 같았으니,
바로 알아차리기는 몹시 어렵도다.
구름 한 점 없이 아득히 펼쳐진 드넓은 하늘처럼,
불자 잡고서 죽였다 살렸다 자유자재로 하였네.
本然居士頌, “好一喝! 似把千鈞弩機撥, 直下承當也大難. 萬
里無雲見空闊, 拂子拈來有殺活.”
열재거사의 송
불자만을 가지고 희롱하는 솜씨 빼어나니,
씨줄과 날줄 오가는 이치 아는 이 드물다.
가을이 가면 연꽃이 지는 이치와 같으니,
초록빛 귤이 노랗게 익는 10월이로구나.
悅齋居士頌, “拂子偏他弄得奇, 絲來線去少人知. 恰如秋盡芙
蓉老, 橘綠棖黃十月時.”
위산영우(潙山靈祐)와 앙산혜적(仰山慧寂)의 문답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백장이 다시 법을 물으러 찾아갔을 때 마조
가 불자를 세운 인연이 있으니, 이 두 존숙의 뜻이 무엇이냐?” “이는 대기
(大機)의 작용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조에게서 84인의 선지식이 배출이
되었는데, 그중 몇이 대기(大機)를 터득하고, 몇이 대용(大用)을 터득했느
냐?” “백장은 마조의 대기를 터득했고, 황벽은 마조의 대용을 터득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창도사53)에 불과합니다.” “그래, 그렇다.”
潙山問仰山,“ 百丈再叅, 馬祖竪拂因緣, 此二尊宿意旨如
何?” 仰山云, “此是顯大機之用.” 潙山云, “馬祖出八十四
人善知識, 幾人得大機? 幾人得大用?” 仰山云,“ 百丈得
大機, 黃蘗得大用, 餘者盡是唱道之師.” 潙山云, “如是,
如是.”
53) 唱道師. 법문을 설법하는 스님. 대기대용의 활발한 작용이 없이 말로 이치를 설
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설화]
위산과 앙산의 문답은 본칙 설화 중에 이미 인용했다.54) 창도사(唱道師)
의 창도(唱道)는 창도(唱導)라고 적어야 맞다. 이는 법의 이치를 펼쳐서
중생을 이끈다는 뜻이다.
潙仰問答話中, 已引入. 唱道者, 當作導, 敷唱法理, 開導羣
生也.
54) “백장은 마조의 대기(大機)를 얻었고 황벽은 마조의 대용(大用)을 얻었다”라고
한 앙산의 말을 말한다.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염
“이상하구나, 여러 선덕들이여! 지금 지엽적인 현상에 대하여 늘어놓는
사람들은 매우 많지만, 그 근원을 궁구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드물다. 모
두들 ‘백장이 마조의 할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 말이 단적으로
딱 들어맞는 말일까? 조(刁)자와 도(刀)자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같지 않
고, 어(魚)자와 노(魯)자도 보기와는 달리 뜻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니, 눈
밝은 사람이라면 조금도 속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조가 ‘너는 훗날
두 입술을 놀리면서 무엇으로 남들을 가르치려 하는가?’라고 질책하자 백
장이 불자를 꼿꼿이 세웠던 것은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다가 우연히 무늬
가 생긴 것과 같은 응답이었을까? 아니면 어미닭이 알 밖에서 쪼고 병아
리가 알 속에서 쪼아 동시에 일치했던 것과 같이 본분에 호응한 응답이었
을까? 여러분은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는 뜻을 알고자 하는가? 탁월한 장
인(匠人)이 단련한 순금은 결코 빛이 변하는 일이 없는 법이다.55)”
雪竇顯拈,“ 奇怪, 諸禪德! 如今列其派者, 甚多;究其源者,
極少. 惣道百丈於喝下大悟, 還端的也無? 然刁刀相似, 魚魯
參差, 若是明眼漢, 謾他一點不得. 只如馬祖道,‘ 你他後, 開
兩片皮, 將何爲人?’ 百丈竪起拂子, 爲復如蟲禦木? 爲復啐啄
同時? 諸人要會三日耳聾麽? 大冶精金, 應無變色.”
55) 탁월한 장인은 마조, 단련된 순금은 백장을 각각 비유한다. 사흘 동안 귀가 먹은
것은 본분의 소식에 통하도록 성숙된 극치의 상태로서 결코 퇴보하지 않는 백
척간두의 경계라는 뜻이다.
[설화]
지금 지엽적인 현상에 ~ 지극히 드물다:아래서 ‘탁월한 장인이 단련한 순금
은 결코 빛이 변하는 일이 없는 법’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雪竇:如今列其派至極少者, 下云大冶精金應無變色故, 如是
道得也.
분주선소(汾州善昭)의 염
“깨달았으면 그만이지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는 말은 무엇 때문에 하
는가?”
汾州昭拈,“ 悟去便休得, 說什麽三日耳聾?”
[설화]
금일사(今日事)로 깨달은 문을 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汾州:不立今日悟門.
석문온총(石門蘊聰)과 분주(汾州)의 평
“만약 사흘 동안 귀가 먹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이 말을 분주가 듣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 했던 말과 석문의 말을 비교하
면 보름 정도의 차이가 난다.”
石門聰云,“ 若不三日耳聾, 何得悟去?” 汾州聞云,“ 我與麽道,
較他石門, 半月程.”
[설화]
석문의 뜻은 반드시 금일사로 깨닫는 문에 의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했던 말과 ~ 차이가 난다:석문의 말에 오히려 장점이 있다는 뜻
이다.
石門意, 須借今日悟門也. 我伊麽道云云者, 石門却有長處
故也.
동림상총의 거
이 공안과 더불어 분주(汾州)와 석문(石門)의 염을 제기하고 말했다.
“말을 하면 혀가 절단되는 화를 피하지 못하고, 화로 옆에 있으면 불티를
피하지 못한다. 불법(佛法)이 어찌 범인들의 평범한 생각을 친절하게 따
르겠는가? 내가 오늘 검은 용56)의 굴로 들어가 여의주를 빼앗으리라. 백장
도 사흘 동안 귀를 먹은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니, 분주와 석문인들 어찌
둘 다 장님이 되는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세 노장들이 도대체
깨닫기는 했는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조상이 당대에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하여 후손들에게 재앙이 미쳤다.”57)
東林總, 擧此話, 連擧汾州石門拈, 師云,“ 當言不避截舌,
當爐不避火. 佛法豈可曲順人情? 東林今日, 向驪龍窟內
爭珠去也. 百丈, 不無他三日耳聾, 汾州石門, 爭免箇二俱瞎
漢! 只這三箇老, 還曾悟也無?” 良久云,“ 祖禰不了, 殃及
兒孫.”
56) 여룡(驪龍). 흑룡(黑龍)과 같다. 턱 아래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여주(驢
珠) 또는 주옥(珠玉)이라 한다. 본본의 핵심을 비유한다. 이 구슬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본분을 추구하는 것을 이것
에 비유한다.『莊子』「列禦寇」의 다음 내용에서 유래한다. “천 금의 가치가 있는
구슬은 틀림없이 구중의 못 속에 있으나 검은 용이 턱 아래 두고 지키고 있다.
네가 구슬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 용이 잠자는 틈을 탔기 때문일 것이
다.”(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驢龍頷下. 子能得珠者, 必遭其睡也.)
57) 백장이 사흘 동안 귀가 먹은 사실에 대하여 완결된 화두를 제시하지 않아 후대
에 분주와 석문이 다시 그것을 문제로 내놓게 된 일을 가리킨다. 그들 또한 이
화두에 대한 완결된 해답을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앙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결론적으로 굳히는 말은 죽은 말[死句]이며 활발하게 생동하는 산 말
[活句]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을 다 못 마친 듯이 주어지는 것이 화두이다. 본서 2
則 주석132) 참조.
[설화]
분주와 석문인들 ~ 면할 수 있겠는가:금시사(今時事)와 본분사(本分事)에 대
하여 모두 장님과 같다는 말이다.
바로 이 세 노장들이 도대체 깨닫기는 했는가:분주와 석문과 백장을 아울러
세 명이다.
조상이 당대에 ~ 재앙이 미쳤다:조상인 백장이 할 일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
에 후손인 분주와 석문에게 재앙이 미쳤다는 말이다.
東林:汾州石門爭免云云者, 今時本分摠是瞎漢也. 只這三箇
老還曾悟也無者, 汾州石門幷百丈, 爲三箇. 祖禰不了殃及兒
孫者, 祖百丈是不了故, 殃及兒孫汾州石門也.
장로종색(長蘆宗賾)의 거
“이 공안은 세상에 전해진 지 오래되었는데, 황벽과 앙산만이 그 취지
를 깊이 알고 있었다. 산승이 비난을 무릅쓰고 한번 판단해 보겠다. 백장
이 불자를 꼿꼿이 세웠을 당시 그는 마조의 대기(大機)를 얻었을 뿐이었
는데, 다시 불자를 제자리에 걸었으니 결국 마조의 대용(大用)은 얻지 못
한 것이다. 마조가 내지른 할을 알고자 하는가? 사람을 죽이는 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을 살리는 검이기도 하다. 사흘 동안 귀먹은 이유를 알고
자 하는가? 마조의 방행(放行)만 알았을 뿐이고, 마조의 파정(把定)은 알
지 못했기 때문이다.”
長蘆賾, 擧此話云,“ 這个公案, 流布來多時也, 唯黃蘗仰山,
深相委悉. 山僧不避譏嫌, 試爲斷看. 當時百丈, 竪起拂子, 只
得馬祖大機, 却掛拂子於舊處, 不得馬祖大用. 要會馬祖一喝
麽? 非但殺人刀, 亦乃活人劒. 要會三日耳聾麽? 只知馬祖放
行, 不知馬祖把定.”
[설화]
법의 조례(條例)와 규장(規章)을 전혀 살피지 않았다는 뜻이다.
長蘆意, 大殺不顧條章.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소참
어떤 학인이 물었다. “마조의 한 할에 백장이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소리는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귀는 소리가 있
어야 제구실을 하는 법이다.” “대상과 인식기관이 떨어져 나가고 소식도
침몰되었다고 할 만하군요.” “결코 억지로 뚫어 보려 하지 마라.”58) 천동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마조의 한 할은 본분 밖에서 착안할 일인가? 본분의
밖에서 도리를 지어내어 알 여지가 있는가? 만약 그 당시에 바로 알아채
지 못하여 마음만 급하게 되었다면 업식(業識)이 흘러 들어왔을 것이요,
반대로 짓눌러 앉거나 비틀어 열듯이 제압하여 한 올의 실과 한 톨의 쌀
도 들어설 수 없도록 했다면 무엇을 가리켜 ‘마조를 다시 찾아가 법을 물
었다’라고 했겠는가? 그 사이에는 터럭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으니, 만약
본분 밖에서 조금이라도 착안하였다면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고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설두가 ‘탁월한 장인이 단련한 순금은 결코 빛이 변하는 일
이 없는 법이다’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요즘 어떤 사람들은 몸으로 직접
체험하지도 못하고 견해가 철저하지도 못하면서 갈고리로 당기고 송곳으
로 찌르듯이 온갖 수단으로 무리하게 도리를 만들어낸 끝에 자신을 매몰
시키고 선대의 종사까지 그 잘못에 연루시킨다. 만약 깨끗이 씻어내지도
못하고 온전히 벗어나지도 못하고서 다시 이 공안에 대해 한 겹의 견해를
덧붙인다면, 진흙탕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 격이라고 하리라.”
天童覺, 小叅, 僧問, “馬祖一喝, 百丈三日耳聾, 作麽生?” 師
云,“ 聲在耳處, 耳在聲中.” 僧云,“ 可謂塵根脫落, 消息平沈
去也.” 師云, “切莫强針錐.” 師又云, “只如馬祖一喝, 還分外
着得事麽? 還分外有造道理處麽? 若也个時承當不下, 草草
地, 又是業識流注;若是坐得斷斡得開, 一絲一糝立不得, 喚
什麽作, 再叅馬祖? 其閒毫髮不容, 若分外着得些子, 不喚作
三日耳聾. 不見雪竇道,‘ 大冶精金, 應無變色.’ 而今有般漢體
不到, 見不徹, 使鉤使錐, 作道作理, 埋沒自己, 帶累先宗. 若
是洗不淨潔, 脫不了當, 又向這裏, 添一重去也, 喚作泥裏洗
土塊.”
58) 대상[聲塵]과 인식기관[耳根]이라는 범주를 가지고 알아맞히려 하지 말라는 뜻.
[설화]
천동 소참의 뜻은 문장에 다 드러나 있다.
天童小叅, 文見.
용문신의 상당
“웅장한 봉우리의 우뚝 솟은 정상에는 소식이 통하기 어려우니,59) 가벼
운 할에도 상대는 귀가 멀었다. 사흘 동안 어디로 갔었는지 모르다가 오
늘 저녁에는 이전과 변함없이 진실한 종지를 퍼뜨린다. 예전에 백장이 다
시 법을 물으러 갔다가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렸고, 훗날 설두는 ‘이상하
구나, 여러 선덕들이여! ~ 탁월한 장인이 단련한 순금은 결코 빛이 변하
는 일이 없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오늘 길에서 공평하지 못한 일을
보았으니60) 설두에게 묻고자 한다. 탁월한 장인이 단련한 순금이라면 빛
이 변하는 일이 없어야 하거늘, 백장은 어째서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렸는
가? 알겠는가? 예로부터 땀 흘리며 전장을 누빈 말의 노고는 아무도 모르
고, 한 시대를 풍미한 장군의 공적만 거듭 찬미할 뿐이다.61)”
龍門新, 上堂云, “雄峯孤頂信難通, 輕喝當機耳便聾. 三日不
知何處去, 今宵依舊播眞宗. 昔日百丈再叅, 至三日耳聾. 後
來, 雪竇道,‘ 奇怪諸禪德, 至應無變色.’” 師云,“ 雲嵓今日,
路見不平, 要問雪竇. 旣是大冶精金, 應無變色, 百丈爲什麽,
三日耳聾? 還會麽? 從前汗馬無人見, 只要重論蓋大62)功.”
59) 어떤 방법으로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엄격하게 본분을 고수하는 마조의 선풍
을 가리킨다.
60) 노견불평(路見不平). 설두의 말이 마조의 공적에 치우쳐 있어 백장에게는 공평
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고 본 평가이다. 노견불평소이안검(路見不平所以按劍)
이라 하면, 공평치 못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칼을 뽑아 조치를 취한다는 뜻이
다.『景德傳燈錄』권22「羅山義總傳」大51 p.381a17 참조.
61) 마조가 백장을 이끌어 준 공적뿐만 아니라 그와 대면하며 모든 망상분별이 끊
어진 귀머거리의 경계까지 내달린 백장의 노고를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는 의
미이다. 이 공안을 완성함에 순금인 백장은 조연의 역할이 아니라 탁월한 장인
이었던 마조와 마찬가지로 주연이라는 평가이다. 설두의 표면적인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어 공평하지 못하다고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설화>의 해설과 차
이가 있다.
62) ‘大’는 ‘代’ 또는 ‘世’의 오식.
[설화]
웅장한 봉우리의 우뚝 솟은 ~ 진실한 종지를 퍼뜨린다:백장이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린 경계를 말한다.
예로부터 땀 흘리며 전장을 누빈 말의 노고는 ~ 거듭 찬미할 뿐이다:설두가 그렇
게 한 말로 인해 백장이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린 공적이 더욱 높아졌다.
龍門:雄峯孤頂至播眞宗者, 言百丈三日耳聾處也. 從前汗馬
云云者, 因雪竇伊麽道, 百丈三日耳聾之功轉高.
불안청원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대중이여! 무슨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렸
다고 말하는가? 내가 북을 치고 법좌에 오르고 대중들이 모두 구름처럼
모이자 승당(僧堂)이 불전(佛殿)을 제멋대로 삼키고, 노주가 등롱에 거꾸
로 매달린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우며 달은 밝고 바람은 맑다. 비는 때
맞추어 적당히 내리고 바람은 온화하게 불며, 황하는 맑아지고 바다는 잠
잠하다. 배고프면 그대와 함께 쓴 나물을 먹고, 목마르면 그대와 함께 찬
샘물을 마신다.63) 설령 하늘 저 먼 곳에서 꽃비가 내린다고 한들 방으로
돌아가서 차 마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佛眼遠, 上堂, 擧此話云, “大衆! 說甚三日耳聾? 直得龍門打
鼓上堂, 大衆盡皆雲集, 僧堂橫呑佛殿, 露柱倒掛燈籠. 天高地
厚, 月白風淸. 雨順風調, 河淸海晏. 飢則共君餐苦菜, 渴則與
子飮寒泉. 直饒天外雨花飛, 爭似歸堂喫茶去!”
63) 자연이 조화롭고 세상은 태평성대를 누리는 현상을 묘사한다.
[설화]
내가 북을 치고 ~ 구름처럼 모이자:당시의 상황이다.
승당이 불전을 제멋대로 삼키고 ~ 거꾸로 매달린다:생각으로 알 수 없고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계이다.
하늘은 높고 ~ 찬 샘물을 마신다:평상64)의 경계이다.
설령 ~ 꽃비가 내린다고 한들:드물고 기이한 현상이다.
방으로 돌아가서 ~ 비교할 수 있겠는가:평상의 본본사이다.
그러므로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린 일은 특별히 새롭게 만든 조목일 뿐
이라는 뜻이다.
佛眼:龍門打鼓至雲集者, 當時事. 僧堂橫呑佛殷云云者, 不
思議也. 天高地厚云云者, 平常也. 直饒云云者, 希奇也. 爭似
歸堂云云者, 平常本分事也. 然則三日耳聾, 特地新條.
64) 平常. 특별한 일도 없고 한결같은 것.
원오극근의 거
이 공안과 더불어 분주·석문·설두의 염을 제기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작가65)들이 함께 제기하여 내세운 말에는 틀림없이 각자 남들을 이끄는
안목이 있었지만, 문제는 마조와 백장의 대기(大機)만을 밝혔을 뿐이고
마조와 백장의 대용(大用)은 밝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눈썹을 아끼지 않
고66) 하나의 소식을 드러내어 여러 선사들의 점검을 받고자 한다. 이 하나
의 할을 아는가?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것과 똑같아서 그 소리를 듣
는 사람은 간이 떨어지고 넋이 나간다.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린 뜻을 알
고자 하는가? 도독고67)를 치는 것과 아주 흡사하여 듣는 자는 목숨을 잃게
된다.” 불자를 들고 말했다. “누군가 ‘이것 그대로의 작용인가? 이것을 떠
난 작용인가?’라고 묻는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때리고 곧이어 한 소리
크게 내지르리라.” 다시 말했다. “마조와 백장의 경계를 보았는가?”
蔣山勤, 擧此話, 連擧汾州石門雪竇拈, 師云,“ 然則作家共
相提唱, 不妨各有爲人眼, 要且, 只明得馬祖百丈大機, 未明
馬祖百丈大用. 不惜眉毛, 露个消息, 也要諸方檢責. 還知這
一喝麽? 直似奮雷霹靂, 聽者喪膽亡魂. 要會三日耳聾? 正
如擊塗毒鼓, 聞者喪身失命.” 擧拂子云,“ 或有个問,‘ 卽此
用, 離此用?’ 和聲便打, 隨後與喝.” 復云,“ 還見馬祖百丈
麽?”
65) 作家. 선의 달인인 선장(禪匠)을 나타내는 말. 본서 165則 주석8) 참조.
66) 불석미모(不惜眉毛). 불법을 잘못 이해하여 말하면 눈썹과 수염이 모두 떨어진
다는 설에 따른다. 잘못 말하거나 보잘것없는 견해를 담은 한마디일지라도 피
력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혹은 부끄러움을 무릅쓴다
는 말로 결정적인 말을 할 때 겸손하게 이르는 상용구이다.
67) 塗毒鼓. 듣기만 하면 죽게 되는 독이 발린 북. 듣는 자의 번뇌를 모두 소멸시키
는『涅槃經』의 교설을 비유하는 말이다. 본서 44則「涅槃塗毒」본칙 및 주석2)
참조.
[설화]
간단명료한 핵심만 밝혔다. 대용은 간단명료하니 다시 무슨 대기를 찾
을 일이 있겠는가? 비록 위세를 떨치며 한 소리 크게 내지르기는 했지만
또한 이것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때리고:이것 그대로의 작용과 이것을 떠난 작용 바로
그것을 있는 힘을 다해 들어 보인 것이다.
곧이어 한 소리 크게 내지르리라:이 어찌 마조의 할과 다르겠느냐는 뜻이다.
마조와 백장의 경계를 보았는가:어디에서 찾겠느냐는 말이다.68)
蔣山:但明直截. 大用直截, 則更討什麽大機? 雖是振威一喝,
亦不越此也. 和聲便打者, 當卽此離此, 盡力提持也. 隨後與
喝者, 豈非馬祖地. 還見馬祖云云者, 向什麽處尋討.
68) 스스로 마조의 대용을 눈앞에서 보여주었다는 뜻.
대혜종고의 거
불자를 들고 황벽이 ‘우리의 후손을 망칠 것입니다’라고 한 부분까지 제
기하고 말했다. “백장은 마조가 내지른 할에 사흘 동안 귀가 멀어버렸으며
황벽은 백장이 들려준 말을 듣고서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는데, 백장
은 황벽이 마조의 법을 그대로 이어받지 않을까 우려했다. 훗날 임제가 세
차례 불법(佛法)의 대의(大意)를 물었을 때 황벽이 세 차례 모두 60방을
때려69) 사흘 동안 귀가 멀었던 백장에게 안도의 숨을 쉬게 해주었고, 임제
도 비로소 황벽의 몽둥이가 쑥대70)로 만든 불자와 같음을 깨달았던 것이
다. 대중들에게 묻겠다.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은 법에는 동일한 근거가 있
는 법인데, 어떤 이유로 활용한 방법은 같지 않았을까?71) 알겠는가? 조계
(曹溪)의 물결이 서로 비슷했다면 아무 일 없던 무수한 사람들이 땅속에
묻혔으리라.”
雲門杲, 秉拂擧, 至黃蘗喪我兒孫, 師云,“ 百丈被喝, 直得三
日耳聾, 黃蘗聞擧, 不覺吐舌, 百丈疑其承嗣馬祖. 後因臨濟,
三度問佛法大意, 三度打六十棒, 便與三日耳聾出氣, 臨濟始
覺如蒿枝拂相似. 敢問大衆. 旣是師承有據, 因什麽, 用處不
同? 會麽? 曹溪波浪如相似, 無限平人被陸沈.”
69) 본서 607則 「臨濟佛法」 본칙 참조.
70) 호지(蒿枝). 본서 607則 주석30) 참조.
71) 마조는 할을 내질렀고, 황벽은 세 차례 방(棒)을 휘둘렀던 작용이 달랐던 점. 황
벽이 마조의 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우려했던 백장의 생각과 다른 면모
를 보여준 일화이다.
[설화]
백장은 ~ 귀가 멀어버렸으며:대기를 터득했다.
황벽은 ~ 혀를 내둘렀다:대용을 터득했다.
백장은 황벽이 ~ 이어받지 않을까 우려했다:황벽이 마조의 할을 곧이곧대로
이어받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훗날 황벽이 임제에게 60방을 때렸던 그
작용이 바로 대용이니 백장에게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해주었던 것이다.
임제도 비로소 ~ 쑥대로 만든 불자와 같음을 깨달았다:임제가 대중에게 “내가
선사(先師:황벽)의 회하에 있을 때~”72)라고 한 말을 뜻하니, 다시 한 방
을 때린다고 해도 쑥대로 만든 불자와 같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조·백장·황벽·임제가 각자 활용한 방법이 모두 서로 동일
하지 않은 것이니, 청원(靑原)과 석두(石頭7)3) 그리고 대대로 그 뒤를 이은
후손들이 존귀한 사람들이 보여준 본분사만 밝힌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잡동사니를 파는 점포[雜貨鋪]74)라고 한다.
조계의 물결이 ~ 땅속에 묻혔으리라:온갖 물결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모두
조계를 근원으로 하는 물이다.
雲門:百丈被喝至三日耳聾者, 得大機也. 黃蘗不覺吐舌者,
得大用也. 百丈疑其承嗣馬祖者, 恐黃蘖一向承嗣馬祖一喝也.
後來黃蘖, 打臨濟六十棒, 是用大用, 則與百丈出氣. 臨濟云云
者, 臨濟示衆云, “我於先師處云云” 又打一棒, 是蒿枝拂子也.
然則馬祖百丈黃蘗臨濟, 用處不同, 非如淸源石頭子子孫係,
只明得尊貴人邊事也. 此則所謂雜貨鋪也. 曺溪波浪云云者,
千波萬浪盡皆不同, 然俱是曺溪水也.
72) 본서 607則 주석30) 참조.
73)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혜능에게서 득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혜능이
입적하자, 청원에게 참학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호남의 석두, 강서의 마조’라
고 불리며, 마조와 더불어 2대 감로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석두희천의 문하는
조동종·법안종·운문종 등으로 이어졌는데, 앙산혜적(仰山慧寂)은 뛰어난 선사
들이 즐비한 그 법계가 순금을 진열한 점포와 같다고 하여 진금포(眞金鋪)라고
평가했다.
74) 앙산혜적의 말. 본분사를 중시하는 석두의 문하를 순금만 파는 가게[眞金鋪]에
비유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구체적 현실에서 다양한 활용의 방편을 갖추고 있는
마조의 문하 홍주종을 비유한 말이다.『仰山語錄』 大47 p.585c20~c27 참조.
백운지병(白雲知昺)의 염
“마조의 할은 위음왕불 이전75)의 경계에서 나온 것이다. 백장이 비록 사
흘 동안 귀가 멀었다고 해도 사실은 절반밖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白雲昺拈,“ 馬祖一喝, 直出威音王已前. 百丈雖則三日耳聾,
要且, 只承當得一半.”
75) 주석12) 참조.
[설화]
마조가 위세를 떨치며 내지른 할에 대해서만 밝혔다.
白雲:但明得馬祖振威一喝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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