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공안집 I

411칙 조주끽다 趙州喫茶

실론섬 2016. 12. 6. 21:21

411칙 조주끽다 趙州喫茶

 

[본칙]

조주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이곳에 온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차나 마시게!” 

이번에는 다른 학인에게 물었다. 

“이곳에 온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차나 마시게!” 

원주가 물었다. 

“어째서 온 적이 있다고 해도 차나 마시라 하시고, 

온 적이 없다고 해도 차나 마시라고 하십니까?” 

조주가 “원주!” 하고 부르자 원주가 “예!” 하고 응답했다. 

이에 조주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

趙州問僧,“ 曾到此閒否?” 僧云,“ 曾到.” 師云,“ 喫茶去!”
又問僧,“ 曾到此閒否?” 僧云,“ 不曾到.” 師云,“ 喫茶去!”
院主問,“ 爲什麽, 曾到也敎伊喫茶去, 不曾到也敎伊喫茶
去?” 師召院主, 主應喏. 師云,“ 喫茶去!”

 

[설화]

‘이곳’이란 조주화상이 주석하고 있는 이곳을 말한다. ‘온 적이 있다’는

것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학인을, ‘온 적이 없다’는 것은 미혹되어 있다

고 생각하는 학인을, 원주는 깨달았거나 미혹되었거나 그 어느 편의 생각

에도 빠지지 않은 학인을 나타낸다.

모두에게‘ 차나 마시게’라고 말한 것:미혹된 자는 깨닫도록 하고, 깨달은 자

는 미혹되도록 하며, 미혹되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은 자는 미혹되기도 하

고 깨닫기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은 보는 안목을 바꾸어 버리는 방법

이다. 또한 미혹된 자는 미혹된 그대로 놓아두고, 깨달은 자는 깨달은 그

대로 놓아두며, 미혹되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은 자는 미혹되지도 않고 깨

닫지도 않은 그대로 놓아둔다. 이것은 파도와 물결이 흐르는 대로 따르고,

죄인이 실토한 말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방법이다.『총수록』1)에서는 “성

문인에게는 모든 해인삼매(海印三昧) 중에서 사제(四諦)의 법을 주고, 연

각인에게는 모든 해인삼매 중에서 연생(緣生)의 법을 주며, 보살인에게는

모든 해인삼매 중에서 육도(六度)의 법을 주고, 근기가 성숙한 돈교인 중

과거세에 본분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또한 모든 해인삼매 중에 있는 모든

법을 준다”라고 했다. 이는 있는 그대로 모두 펼치는 가풍[平展家風]이다.

천동의 송에 ‘가풍을 있는 그대로 펼치지 않았다면, 어찌 파도와 물결의

흐름을 따를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총림에서 납승을 마주하

고 날씨를 소재로 올리는 인사말과 같다. 고인의 송에 ‘화산은 북을 두드

릴 줄 알고,2) 조주는 차를 마시라 한다’라고 운운한 바로 이 말들은 본분

사로써 학인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1)『法界圖記叢髓錄』大45 p.719a21의 인용이다.
2) 화산타고(禾山打鼓). ‘대오대철(大悟大徹)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진제(眞諦)
   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에 대해서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마음
   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향상인이 찾아오면 어떻
   게 대하시겠습니까?’라는 네 차례의 물음에 대해 화산이 한결같이 ‘북을 두드릴
   줄 안다’(解打鼓)고 답한 일화에서 나온 말.『禪門拈頌說話』1181則,『碧巖錄』 
   44則「本則」大48 p.180c21 참조.

此間者, 和尙這裏也. 曾到, 悟地僧;不曾到, 迷地僧;院主迷
悟不干地僧也. 皆云喫茶去者, 迷者打敎悟, 悟者打敎迷, 不迷
不悟者, 打敎亦迷亦悟. 此則換却眼睛也. 又迷者從敎迷, 悟
者從敎悟, 不迷不悟者, 從敎不迷不悟. 則隨波逐浪, 據款決案
也. 叢髓錄云,“ 聲聞人中, 與全海印四諦之法;緣覺人中, 與
全海印緣生之法;菩薩人中, 與全海印六度之法;至於熟頓
人中, 過去本分人也, 亦全全與之爾.” 則平展家風也. 天童頌
曰,‘ 且非平展家風, 豈是隨波逐浪!’ 則叢林中對衲僧寒暄而
已. 古人頌云,‘ 和3)山打鼓, 趙州茶4)云云’ 此是本分事接人也.
3) ‘和’는 ‘禾’자의 오식.
4) ‘茶’ 앞에 ‘喫’자가 탈락되었다.

 

대각회련(大覺懷璉)의 송

 

백토와 지마5)가 어찌 진귀하다 하리오?
북방 사람6)은 누구를 만나도 정성껏 대한다네.7)
지금 만약 말귀 알아듣는 선타파8)가 온다면,
특별히 연고9) 
끓여 최상의 손님으로 대접하리.

大覺璉頌,“ 白土和麻詎足珎? 北人相見話殷勤. 如今若遇仙
陁至, 別煑研膏待上賓.”
5) 백토(白土)와 지마(脂麻). 어디서나 마시는 평범한 차를 대표하며, 조주가 세 번
   권했던 차 곧 특별한 맛이 없는 몰자미(沒滋味)의 차를 나타낸다. 지마는 유마
   (油麻)·지마(芝麻)·호마(胡麻) 등이라고도 한다.
6) 조주를 가리킨다. 조주는 산동성에서 태어나고 하북성 조주에서 주석했기 때문
   에 조주를 가리켜 북방 사람[北人]이라고 한 것이다.
7) 귀한 차를 권하지는 않았지만 ‘차나 마시게’라고 한 조주의 말은 남김없이 진실
   만 담은 화두였다는 뜻. 북방인과 남방인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활용한 구절이
   다. “남방 사람은 손님이 와도 맞이하지 않고 만나면 손을 들어 올릴 뿐 고개 숙
   여 인사하지 않으며 손님을 보낼 때에도 자리에서 내려올 뿐이다. 반면 북방 사
   람은 손님을 맞이하건 보내건 대문까지 나가보고 만나면 고개 숙여 인사한다.
   手而不揖, 送客下席而已;北人迎送幷至門, 相見則揖. 皆古之道也.)
8) 仙陁婆. 조주가 ‘차나 마시게’라고 세 번에 걸쳐 똑같이 한 말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을 가리킨다. 선타파라는 용어는 원래 말이 지시하는 본래의 뜻을 상
   황에 따라 잘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선타파(禪陀婆)·선타파(先陀婆)·선타객
   (先陀客) 등이라고도 하는데, saindhava, sindhava를 음사한 데서 나온 말이
   다. 이 말은 원래 ‘신도에서 생산되는[信度所産]’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고대
   인도의 신도(信度:辛頭 Sindhu) 지방에서 ‘소금·그릇·말·물’ 등 네 종류의
   명산품을 생산한 데서 유래한다. 그 뒤 뜻이 바뀌어 네 종류의 명산품을 통칭하
   는 말이 되었다. 곧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지시하는
   뜻이 된다. “여래의 은밀한 말씀은 대단히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비유하자
   면 대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선타파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선타파란 하
   나의 이름에 들어 있는 네 가지 실물을 말한다. 첫째는 소금, 둘째는 그릇, 셋째
   는 물, 넷째는 말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사물의 이름이 하나로 같지만 지혜로
   운 신하는 이 이름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잘 안다. 왕이 몸을 씻을 때 선타
   파를 찾으면 물을 바치고, 왕이 음식을 먹을 때 선타파를 찾으면 소금을 바치며,
   왕이 식사를 마치고 무언가 마시고 싶어 할 때 선타파를 찾으면 그릇을 바치고,
   왕이 유람을 할 때 선타파를 찾으면 말을 바친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신하는 대
   왕이 내린 네 가지 종류의 은밀한 말을 잘 이해한다.”(『大般涅槃經』권9 大12
   p.662b17. 如來密語, 甚深難解. 譬如大王告諸群臣先陀婆來. 先陀婆者, 一名四
   實. 一者鹽, 二者器, 三者水, 四者馬. 如是四物, 共同一名, 有智之臣, 善知此名. 
   若王洗時, 索先陀婆, 卽便奉水;若王食時, 索先陀婆, 卽便奉鹽;若王食已, 欲
   飮漿時, 索先陀婆, 卽便奉器;若王遊時, 索先陀婆, 卽便奉馬. 如是智臣, 善解
   大王四種密語.)
9) 研膏. 용뇌(龍腦)·사향(麝香) 등의 고급 향료가 첨가된 차.

 

[설화]

이렇게 이 사람에게도 올리고 저 사람에게도 올리는 차가 백토와 지마

이고, 또한 연고와 다른 것이다. 백토와 지마는 흔히 마시는 차 이름 또는

과차10) 이름이다. 연고 또한 차 이름이다.

大覺:此東獻西獻地, 是白土和麻, 亦是別硏膏也. 白土和麻,
常茶名, 又果茶名. 硏膏, 亦茶名.
10) 果茶.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갖은 곡식과 과일을 넣어서 만든 차, 둘째는 차
    에 곁들이는 과자이다.

 

투자의청(投子義靑)의 송

 

학인들을 만나서 온 적이 있느냐고 묻자,

온 적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했다네.

자리에 앉혀 차 마신 뒤 인사하고 보내니,

검푸른 안개가 은근히 녹색 이끼 바꾸네.

投子靑頌, “見僧便問曾到否, 有言曾到不曾來. 留坐喫茶珎重
去, 靑煙暗換綠紋苔.”

 

[설화]

눈동자를 바꾸는 뜻을 나타낸다.

投子:換却眼晴之意.

 

천복본일(薦福本逸)의 송

 

총림의 종장11)도 진실로 덧붙일 수 없으니,12)

일에 임하여 어찌 차등이 있었겠는가?

처음 왔건 오래 머물렀건 상관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은 오로지 한 잔의 차였다네.

薦福逸頌,“ 叢林宗匠實難加, 臨事何嘗有等差? 任是新來將
舊住, 殷勤秪是一甌茶.”
11) 宗匠. 종사(宗師)와 같은 말. 종지를 깨우쳐 학인을 이끌 수 있는 지도자의 위치
    에 선 자. 장인(匠人)이 마음대로 물건을 만들 수 있듯이 학인을 뛰어난 수행자
    로 인도한다는 뜻에서 ‘匠’이라 한다.
12) 조주가 ‘끽다거’라 한 말은 온전히 실현된 화두이기에 그 이상으로 덧붙일 말도
    덜어낼 말도 없다는 뜻.

 

[설화]

있는 그대로 모두 펼치는 가풍을 나타낸다.

薦福:平展家風.

 

장산법천(蔣山法泉)의 송

 

세 등급 나눠 잔 올리고 예의 온전히 갖추었으나,

그 자리에서 추한 것 고운 것 가릴 자 누구인가?13)

돌다리14) 건너 허름한 절15)에는 맛난 차 없으니,

유마16)를 섞어 한 가지 방법으로 차를 끓인다네.

蔣山泉頌,“ 三等擎甌禮數全, 誰能覿面辨媸姸? 石橋破院無
珎品,17) 且夾油麻一例煎.”
13) 서로 다른 세 사람에게 똑같이 응한 조주의 화두에는 추하다거니 곱다거니 하
    고 가려낼 분별의 단서가 없다는 말.『頌古聯珠通集』권20 卍115 p.240b8에는
    ‘똑같이 고르게 따르고 결코 치우치지 않았으니’(一般平挹更無偏)라고 되어 있
    다. 1구에서 ‘세 등급’이라 하였지만 사실은 등급을 나누지 않았다는 뜻이므로
    취지는 다르지 않다.
14) 석교(石橋). 하북성 조주 지방의 명물이며 관음원과 10리 거리에 떨어져 있다
    “나이 80이 되어 비로소 석교와 10리 거리에 있는 조주성의 동관음원에 주석하
    였다.”(『趙州行狀』古尊宿語錄13 卍118 p.304b10. 年至八十, 方住趙州城東觀
    音院, 去石橋十里.) 이 석교는 조주선사의 화두로도 유명하다. “어떤 학인이 조주
    에게 물었다. ‘조주의 돌다리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소문을 들어왔는데, 막상 와 
    보니 외나무다리만 보이는군요.’ ‘그대가 단지 외나무다리만 보고, 조주의 돌다리
    는 보지 못한 탓이다.’ ‘조주의 돌다리는 어떤 것입니까?’ ‘건너오라!’ 또 다른 학
    인이 이전과 같은 질문을 하자 조주도 이전과 같이 대답했다. 학인이 물었다. ‘조
    주의 돌다리는 어떤 것입니까?’ ‘나귀도 말도 건너게 하느니라.’ ‘외나무다리란 
    어떤 것입니까?’ ‘한 사람씩 별도로 건너게 한다.’”(『景德傳燈錄』권10 「趙州
    從諗傳」大51 p.277c12. 僧問, ‘久嚮趙州石橋, 到來只見掠彴.’ 師云, ‘汝只見掠彴, 
    不見趙州橋.’ 僧云, ‘如何是趙州橋?’ 師云, ‘過來!’ 又有僧同前問, 師亦如前答. 僧
    云, ‘如何是趙州橋?’ 師云, ‘度驢度馬.’ 僧云, ‘如何是掠彴?’ 師云, ‘箇箇度人.’)
15) 파원(破院). 조주가 주석했던 관음원(觀音院)을 가리킨다. 평범한 차밖에 없다
    는 구절과 조응한 표현이다.
16) 주석5) 참조.
17) ‘品’이 『頌古聯珠通集』에는 ‘味’로 되어 있다.

 

[설화]

드러난 이야기 자체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린 것이니,18) 취암종열(翠嵓

宗悅)·황룡혜남(黃龍慧南)·천동정각(天童正覺)의 송(頌)과 나머지 다른

송이 모두 이러한 예이다. 어떤 것은 깊고 어떤 것은 얕으며 어떤 것은 깎

아내리고 어떤 것은 치켜세워서 말은 비록 다른 듯이 보이지만 그 취지는

동일하다.

蔣山:據款結案, 翠巖黃龍天童, 與餘頌, 皆此例. 或深或淺,
或抑或揚, 言雖似別, 其旨一也.
18) 문답한 상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송으로 읊었다는 말.

 

취암종열(翠嵓宗悅)의 송

 

조주가 차 마시라는 화두를 남겼는데,

밝은 눈의 납승들 모두 속아서 들먹이네.

속아서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니,

북 칠 줄 안다고 한 화산의 말도 우습구나.

翠嵓悅頌,“ 趙州有語喫茶去, 明眼衲僧皆賺擧. 不賺擧未相
許, 堪笑禾山解打鼓.”

 

황룡혜남(黃龍慧南)의 송 1

 

조주는 학인을 단적19)인 방법으로 점검하니,

무심코 입을 열지만 곧바로 그 뜻 안다네.

눈앞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눈이 없다면,

종풍이 어찌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겠는가!

黃龍南頌, “趙州驗人端的處, 等閑開口便知音. 覿面若無靑白
眼, 宗風爭得到如今!”
19) 端的. 분명하게 눈앞에 보이는 것. 조주의 끽다거 화두는 다른 매개에 의존하지
    않고 본분을 뚜렷이 드러내 보인다는 말.

 

황룡혜남의 송 2

 

만나서 물으면 상대의 내력을 알고,

친소를 가리지 않고 차를 권했다네.

끊임없이20) 오가며 허둥대던 자들 거듭 떠올려보니,

가득 핀 찻그릇의 꽃21)을 누가 바르게 분별했던가?

又頌,“ 相逢相問知來歷, 不揀親踈便與茶. 翻憶憧憧來往者,
忙忙誰辨滿甌花.”
20) 동동(憧憧). 오고감이 끊어지지 않는 것 또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를 묘
    사한다.
21) 구화(甌花). 차를 끓일 때 그릇에 일어나는 하얀 포말을 형용하는 말.

 

해인초신(海印超信)의 송

 

조주가 차 마시라 한 말에,

납승들 모두 어리둥절하네.

눈치 빠른 선타파일지라도

지시 받을 수밖에 없지만,

지시 없어도 차나 마시면 되리라.22)
海印信頌,“ 趙州喫茶去, 衲僧皆罔措. 任是仙陁婆, 未免遭指
注, 非指注喫茶去.”
22) 그 뜻을 알고자 한다면 자세한 말을 들어야 하지만, 지시가 없다면 굳이 알려고
    하지 말고 권하는 차를 마시면 바로 그곳에 조주의 뜻이 있다.

 

동림상총(東林常總)의 송 23)
23) 끽다거 한마디에 모든 도리를 담았기에 조주가 권한 이 차 한 잔의 뜻을 모르면
    그 의중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취지의 송.
 

 

석 잔의 차로 몸소 가풍 널리 퍼뜨리니,

멀건 가깝건 높건 낮건 한길로 통하네.

맑은 향기 맡지 못하고 오가는 자들 중,

동원 서쪽에 거주하는 그를 누가 알까?24)
東林總頌, “三25)甌茶自振家風, 遠近高低一徑通. 未薦淸香往
來者, 誰諳居止院西東.”
24) 조주의 주석처 관음원은 동원(東院)이라고도 한다.『景德傳燈錄』권10「趙州從
    諗傳」大51 p.276c7 참조. 이 게송을 지은 동림상총의 다른 송에 “동원의 서쪽이
    조주의 거처로다.”(『東林雲門頌古』古尊宿語錄47 卍118 p.804a9. 東院西邊是趙
    州.)라는 구절이 있다.
25) ‘三’은 『頌古聯珠通集』권20 卍115 p.240b2에는 ‘一’자로 되어 있다.

 

법진수일(法眞守一)의 송

 

누구나 조주를 찾아왔지만,

차 마시라는 말만 들었네.

까닭 모르던 원주 어리둥절하다가,

또 한 잔 주자 그제야 알아차렸네.

法眞一頌,“ 人來訪趙州, 唯道喫茶去. 無端院主不惺惺, 更與
一甌今惺悟.”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송

 

와 보았다고 하건 그렇지 않건,

차 마시라는 말은 매양 같구나.

기관(機關)을 붙여두지도 않고,

펼치는 기량도 전혀 없도다.

가풍을 있는 그대로 펼치지 않았다면,

어찌 파도와 물결의 흐름을 따를 수 있었겠는가!

오직 간택을 꺼리고26) 분명히 밝히는 말도 없이,

조주 노화상의 뜻을 알아야 하리라.

天童覺頌,“ 到與不到, 喫茶一㨾. 不着機關, 殊無伎倆. 且
非平展家風, 豈是隨波逐浪! 唯嫌揀擇沒分踈, 識得趙州老
和尙.”
26)『信心銘』大48 p.376b20에 나오는 말이다.

 

승천회의 송

 

상황에 응하여 손 가는 대로 끝없이 써먹으니,

처음 왔거나 다시 왔거나 한 가지 차로구나.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모조리 흘려버리니,

더구나 잔 속의 꽃향기 어찌 가려내리오?

承天懷頌, “應機隨手用無涯, 不到曾經一㨾茶. 未入口時全漏
泄, 那堪更辨盞中花?”

 

지해지청(智海智淸)의 송 1

 

조주심노27)는 참된 선지식이었으니,

찾아온 누구에게나 차 마시라 했네.

육우28)가 선경29)을 지은 이래로,

오늘에 이르도록 아무 소식도 없네.

智海淸頌, “趙州諗老眞知識, 來者人人與茶喫. 自從陸羽著仙
經, 直至如今絕消息.”
27) 趙州諗老. 법명이 두 자일 경우 앞 글자를 탈락시키는 것이 일반적인데, 종심(從
    諗)이라는 법명에서 ‘從’을 생략한 호칭이다. ‘老’는 존칭이다.
28) 陸羽(733~804). 자는 홍점(鴻漸). 다도(茶道)의 창시자로, 760년 중용검덕(中庸儉
    德)을 기조로 하는『茶經』 3편을 지었다.
29) 仙經.『茶經』을 이르는 말. 다신(茶神)이라 불리면서 신선(神仙)의 이미지를 가
    지고 있었던 육우가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지해지청의 송 2

 

늙어 꼬부라진 선수행자30)는 바로 조주요,

끽다의 분명한 화두는 딱 맞는 소식이라네.

마구니 떠난 뒤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는데,

공연히 귀왕을 하염없이 기다리도록 하네.31)
又頌,“ 老倒禪和是趙州, 喫茶端的好來由. 魔斯去後無消息,
空使龜王望不休.”
30) 선화(禪和). 본서 110則 주석18) 참조.
31) 귀왕(龜王)이 점치듯이 무소식의 경계에서 소식을 찾느라 쓸데없이 분별한다
    는 말.

 

황룡신의 송

 

조주의 끽다거 화두여!

그 종풍이 남다르구나.

온 적이 있든 없든 차 권하니,

바로 낮도둑32)의 솜씨로다.

黃龍新頌,“ 趙州喫茶! 宗風奇特. 到與不到, 正白拈賊.”
32) 백염적(白拈賊). 대낮[白]에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 조주의 끽다거라는 말 자
    체는 일상에서 늘 주고받는 대화 내용 중 하나이다. 이것에 본분을 은밀히 실어
    화두로 설정했지만 세 사람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낮도둑의 수법이라
    비유한 말이다. 그것은 누구나 보고 있는 대낮에 원하는 물건을 훔치고 아무도
    모르게 달아나는 도둑의 솜씨와 같기 때문이다.

 

상방일익(上方日益)의 송

 

문에 들어선 다음에는 품계의 차이 따지지 않고,

재빠른 법식으로 그들에게 한 잔의 차를 돌렸네.

우습구나, 산동에 태어나 하북에 사는 사람이여!33)

또 다시 차 안에다가 지마34)를 타는구나.

上方益頌, “入門曾不問堦差, 雷例還他一椀茶. 堪笑山東河北
子! 更來裏面著脂麻.”
33) 조주를 말한다. 주석6) 참조.
34) 脂麻. 주석5) 참조.

 

숭승원공(崇勝院珙)의 송

 

조주의 차 이야기 진실로 따지기 어려우니,

밝은 거울에는 본래 한 점의 얼룩도 없다네.35)

당시에 차 올린 모습 거듭 떠올려 보노라니,

순다36)의 마지막 공양처럼 지극 정성이었네.

지극한 정성이었다 해도,

문드러지게 씹어 한 덩어리37)로 삼킨 것과 비교하랴!38)
崇勝珙頌, “趙州茶話實難論, 明鏡從來絕點痕. 飜憶當時獻供
者, 純陁末後最殷勤. 最殷勤, 爭如爛嚼核輪呑!”
35) 조주의 화두는 미추(美醜)와 시비(是非)를 따지며 들어갈 틈이 없는 화두라는
    말이며, 조주가 맛이 전혀 없는[沒滋味] 차를 주어 그러한 수단을 원초적으로 
    빼앗은 것을 얼룩 한 점 없는 거울에 비유한 것이다. 미추와 시비가 나타나면 
    그대로 비추지만 그 자체에는 이러한 구분이 없는 밝은 거울과 같기 때문이다. 
    도독책(塗毒策)의 다음 게송과 통하는 뜻이다. “옛 거울은 본래 한 점의 얼룩도 
    없으니, 곱거나 추한 모습에 따라 눈앞에서 갈라질 뿐.”(『頌古聯珠通集』권2 
    卍115 p.20a12. 古鑑從來絕點痕, 隨其妍醜目前分.)
36) 純陁. Cunda.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자. 부처님과 대중들에게 공
    양을 올리면서 부처님께만 특별히 전단나무에서 나는 버섯으로 만든 음식을 올
    렸는데, 부처님은 이것을 드시고 등창을 앓다가 열반에 들었다.『長阿含經』권3
    大1 p.18b5 참조.
37) 핵륜(核輪). 혼륜(渾圇·渾淪·渾崙·混淪)과 같은 말로 의미상 어떤 구분도 없고
    어떤 조작도 가하기 이전의 상태로 만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혼돈(混沌)을
    가리킨다. ‘核’은 분화되어 싹트기 이전의 단단한 씨, ‘輪’은 덩어리진 둥근 모양
    을 나타낸다. 모든 분별과 대립된 견해를 하나로 만들어버린 상황이다. 곧 언어
    로 전하거나 사려분별로 접근할 수 없는 경계를 가리킨다. “혼륜이란 만물이 서
    로 한 덩어리가 되어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列子』「天瑞」. 渾淪
    者, 言萬物相渾淪, 而未相離也.)
38) “식당에서 죽을 먹거나 밥을 먹거나 음식과 함께 쓸데없는 견해까지 문드러
    지게 씹어 한 덩어리로 삼켜버려야 한다.”(『五祖法演語錄』古尊宿語錄 卍118
    p.435a10. 堂裏喫粥喫飯, 更須爛嚼多見, 是渾圇呑却.)

 

자수회심(慈受懷深)의 송

 

온 적 있다고 해도 차나 마시라 하고,

처음 왔다고 해도 차나 마시라 하누나.

조주 지방의 노련한 선수행자여!

달콤하게 말은 해도 속은 쓰디쓰구나.39)

마음속의 쓰디쓴 맛이여!

지금까지 남아 씻어낼 도리가 없구나.

慈受頌,“ 曾到喫茶去, 未到喫茶去. 趙州老禪和! 口甜心裏苦.
心裏苦! 直至如今無雪處.”
39) 평상적으로 차를 권하는 말이라 그대로 달게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지만, 그 안
    에는 그대로 받아 마실 수 없는 쓰디쓴 화두가 설정되어 있다. 평상의 말에 화
    두라는 장치가 숨어 있어 말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어떤 학인
    이 조산에게 ‘부처님들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의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조산은 그들만 못하다’라 대답했고, ‘세상에 출현한 다음의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음에 ‘조산만 못하다’라고 대답한 문답을 제기하고 천령범기
    (天寧梵琦)가 평가했다. ‘대단한 조산이여! 말은 달콤했으나 독한 마음을 감추
    고 있구나. 누군가 나에게 「부처님들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의 경계는 어떤 것
    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에게「좋구나!」라고 대답할 것이며,「세상에 출현한
    다음의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어도「좋구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에게 두 번에 걸쳐「좋구나」라고 해주어 한평생 참구하도록 하리라.’”(『列祖提
    綱錄』권25 卍112 p.573b12. 復擧, 僧問曹山, ‘諸佛未出世時, 如何?’ 山云, ‘曹山
    不如.’ 僧云, ‘出世後, 如何?’ 山云, ‘不如曹山.’ 師云, ‘大小曹山! 口甜心苦. 或有人
    問壽山,「諸佛未出世時, 如何?」向他道,「好!」「出世後, 如何?」「好!」與他三
    箇好, 且聽一生參.’)『宗鑑法林』권66 卍116 p.833a18에 따라 이 글의 ‘三箇好’
    를 ‘二箇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불해가 말한다. ‘자라난 싹을 보고 밭의 질
    을 가려내거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수준을 판별하는 능력이라면 장자(長髭)선사
    에게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풍속을 어지럽히지 않고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
    지도 않은 공덕은 암주(庵主)에게 돌아간다. 장자가「죽은 다음[百年後]에는 이 
    학인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달콤하게 말은 했어도 독한 마음을 숨
    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拈八方珠玉集』권중 卍119 p.245a5. 佛海云, ‘從
    苗辨地, 因語識人, 不無長髭. 不觸風化, 不墜家聲, 卻還庵主. 百年後討者僧也難
    得, 莫是口甜心苦麽?’)

 

불안청원(佛眼淸遠)의 송

 

조주는 한 잔의 차를 권하여,

당행가40)를 모두 점검했다네.

한 번이야 비록 그럴듯했지만,

실타래처럼 얽힐 일은 어쩌랴!41)
佛眼遠頌,“ 趙州一椀茶, 驗盡當行家. 一期雖似好, 爭免事
如麻.”
40) 當行家. 제방에서 수행을 하는 납승. ‘當’은 본(本)의 뜻이고, ‘行’은 가게[店]라는
    뜻이다. 곧 본점에서 일하는 전문가를 가리킨다. “본체는 모든 장애를 벗어났고,
    작용은 온전히 자유자재한 경지가 되었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분명하
    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색에 응하고 소리에 응하며, 대립도 사라지고 짝도
    사라졌으니, 만두와 호떡과 관세음을 우리 당행가로 보내어 매매하도록 하라.”
    (『宏智廣錄』권4 大48 p.39a6. 其體也, 出諸障礙;其用也, 得大自在. 無去無
    來, 非顯非晦, 應色應聲, 亡對亡待, 饅頭胡餅觀世音, 還我當行家賣買.);“‘구절
    이 있건 구절이 없건 칡넝쿨이 나무에 붙어서 사는 것과 같다는 말은 무슨 뜻입
    니까?’ ‘당행가를 모두 점검했다.’”(『嘉泰普燈錄』권17「月庵善果傳」卍137 
    p.252b16. 問, ‘有句無句, 如藤倚樹時, 如何?’ 曰, ‘驗盡當行家.’)
41) 조주가 한 차례의 방편으로 던진 ‘끽다거’ 화두를 듣고 갖가지 어지러운 분별을
    펼쳐 본래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지경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본서 5則「世尊拈
    花」 대혜종고(大慧宗杲)의 송 참조. “한 송이 꽃을 집어 들자, 풍류가 그 자리에
    서 흘러나왔다네. 만약 심법(心法)을 전했다고 여긴다면, 세상 일 엉킨 실타래처
    럼 복잡해지리.”(拈起一枝花, 風流出當家. 若言付心法, 天下事如麻.)

 

목암법충(牧庵法忠)의 송

 

왔던 자나 처음 온 자나,

매양 한 잔의 차 마셨네.

손님 대접 이와 같을 뿐,

냉담한 그 맛이 승가라네.42)
牧庵忠頌,“ 曾到不曾到, 且喫一盃茶. 待客只如此, 冷淡是
僧家.”
42) 별맛이 없는 냉담한 맛이 승가(僧家)의 살림살이이자 조주의 차 맛이라는 뜻.
    승가에 관해서는 본서 859則「雲居僧家」본칙〈설화〉참조.

 

송원의 송

 

조주의 ‘끽다거’라는 화두여!

독사가 옛길43)을 막고 있네.44)

밟아봐야 비로소 잘못 아니,

부처님이라도 어쩔 수 없네.45)
松源頌,“ 趙州喫茶去! 毒蛇橫古路. 踏着乃知非, 佛也不堪做.”
43) 고로(古路). 옛 성인이나 조사들이 걸어 다닌 길.
44) 끽다거라는 말이 평범한 듯하지만, 독사가 가로막고 있는 길과 같이 위험을 감
    수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다는 상징이다. 곧 끽다거라는 말은 조주가 독사와
    같이 지키고 있는 ‘관문’이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으려는 각오를 하지 않고는 뚫
    고 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45) 끽다거라는 말을 평범하게 여기고 쉽게 밟고 지나려다가 그곳에 독사가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부처님일지라도 통과하지 못하는 관문으로서의 정체
    가 드러나게 된다. 끽다거는 궁극적인 한 구절[末後一句]로서 여기에는 성인도
    범부도 통과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는 독사와 같은 문지기가 있다. “설령 천
    개의 눈이 단번에 뜨이더라도 풀과 나무에 붙어서 기생하는 혼령의 신세를 벗
    어나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면 반드시 바늘 하나 찌를 틈도 없고 거센 바람도 넘
    어뜨리지 못하며 요소가 되는 길목을 단단히 틀어막아 범부도 성인도 통과하지
    못하는 경계가 되어야 한다.”(『圜悟語錄』권6 大47 p.740a2. 直饒千眼頓開, 
    未免依草附木. 到這裏, 要須是針劄不入, 風吹不倒, 把斷要津, 不通凡聖底, 始
    得.);“낙포화상이 대중에게 말했다. ‘궁극적인 한 구절이라야 비로소 견고한
    관문에 도달할 것이니, 요소가 되는 길목을 단단히 틀어막아 범부도 성인도 통
    과하지 못하게 하리라.’”(『人天眼目』권2 大48 p.310a8. 洛浦和尚, 示衆云, 
    ‘末後一句, 始到牢關, 把斷要津, 不通凡聖.’)

개암붕의 송

 

식은 아궁이에 불을 사르고,46)

지저분한 곳에 벽돌 던지네.

물의 흐름 따라 배를 띄우고,47)

발 씻은 자리에서 배 타누나.48)
介庵朋頌,“ 冷處着火, 閙裏抛塼. 順水流舟, 洗脚上船.”
46) 차를 권하는 것과 같은 평상의 행위.
47) 포전(抛塼). 미끼로 던져지는 선어(禪語)의 속성을 가리킨다. 끽다거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더 이상 향상된 경계는 없다. 포전은 포전인옥
    (抛塼引玉)의 줄임말이며, 뇨리(鬧裏)란 잡다하고 허접한 물건이 쌓여 있는 곳
    이라는 말이다. 본래는 벽돌을 버리고 옥을 얻는다는 말로서 값싼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얻는다는 뜻이지만, 귀한 것조차도 부정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조
    주가 제시했던 ‘포전인옥’의 화두를 개암붕이 활용한 것이다. “대중만참에서 조
    주가 말했다. ‘오늘 밤에는 질문에 대답을 해줄 것이니, 제대로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은 나오라.’ 그때 어떤 학인이 나와서 절을 올리자 조주가 말했다. ‘본래 
    돌을 버리고 옥을 받으려는 의도지만, 도리어 굽지 않은 날벽돌을 받게 될 것이
    다.’”(『景德傳燈錄』권10「趙州從諗傳」大51 p.277a29. 大衆晚參, 師云, ‘今
    夜答話去也, 有解問者出來.’ 時有一僧便出禮拜, 師云, ‘比來拋塼引玉, 却引得箇
    墼子.’);“설봉이 경청에게 말했다. ‘옛날에 어떤 노숙(老宿)이 관인을 인도하며 
    승당을 돌면서「이 한 무리 대중들은 모두 불·법·승을 공부합니다」라고 하자 
    관인이「금가루가 비록 귀하다고는 하지만 눈에 붙어서야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는데, 노숙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경청이 그 노숙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본래 벽돌을 버리고 옥을 얻으려는 것입니다.’”(같은 책 권16「雪峰
    義存傳」p.328a19. 師謂鏡淸曰, ‘古來有老宿, 引官人巡堂云, 「此一衆, 盡是學
    佛法僧.」官人云,「金屑雖貴, 又作麽生?」 老宿無對.’ 鏡淸代曰, ‘比來拋塼引玉.’)
    ‘불법승을 공부한다’라고 한 애초의 말이 옥을 얻기 위한 벽돌이었다는 뜻이다.
48) 물가에 자리잡고 있으면 배를 타기에 아주 편리하다는 말.『三國志』「吳志」 
   「呂蒙傳」에 나오는 고사. 끽다거라는 수월하고도 편리한 수단을 마음껏 펼치는 
    조주의 책략을 나타낸다. 아래 보복종전의 말과 같은 취지이다.

 

보복종전(保福從展)의 평

 

“조주는 편리한 수단을 꿰찼다.”

保福云,“ 趙州, 慣得其便.”

 

[설화]

편리한 수단을 꿰찼다는 것은 이미 편리한 수단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아무 일 없는 경계에서 거꾸러진 꼴이기 때문이다.

保福:得便冝, 是落便冝. 何也? 無事處, 著倒故也.

 

법운악의 염

 

“조주화상은 이렇게 가는 것만 알았을 뿐 이렇게 오는 것은 몰랐다. 비

록 이렇기는 하지만, 곡이 끝나자 연주한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강가에는

산봉우리들이 푸르다.49)”
法雲岳拈,“ 趙州和尙, 只知伊麽去, 不會伊麽來. 雖然如此,
曲終人不見, 江上數峯靑.”
49) ‘곡이 끝나자’ 이하의 구절은 전기(錢起)의 시「湘靈鼓瑟」에 나오는 구절이다.
   『舊唐書』권168「錢徽傳」참조. 끽다거라는 곡을 마친 조주의 자취는 어디에
    서도 찾을 수 없다는 뜻으로 활용했다. 이 화두가 지니는 무소식(無消息) 또는 
    몰종적(沒蹤迹)의 본질을 나타내는 동시에 〈설화〉의 해설과 같이 끽다거에 
    모조리 드러내어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는 경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설화]

이렇게 가는 것만 ~ 오는 것은 몰랐다:편리한 수단만 꿰찼을 뿐이다.

곡이 끝나자 ~ 산봉우리들이 푸르다:속속들이 드러내어 남은 것이 없는 경

계이다. ‘곡이 끝나자’라고 운운한 것은「상비고슬(湘妃鼓瑟)」50)이라는 시

의 마지막 연(두 구절)이니, 석 잔의 차를 권한 다음의 소식이다.

法雲:只知伊麽去云云者, 慣得其便也. 曲終人云云者, 徹底
無餘也. 曲終云云, 湘妃鼓瑟詩末聯, 三盞後消息也.
50)「상령고슬(湘靈鼓瑟)」과 같다. 순(舜)임금의 왕비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순임금이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상수(湘水)에서 죽어 상수의 신이 되
    었다. 이 상수의 두 신을 상비라고도 하고 상령이라고도 한다.

 

남명법천(南明法泉)의 소참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기특하도다, 조주여! 한 잔의 소박한 차를

이 사람에게도 주고 저 사람에게도 주는구나! 비록 쓰고 떫어 입에 썩 맞

지 않을지라도, 자기 집 밭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분들은 강남(江南)과 양

절(兩浙),51) 하북(河北)과 서천(西川)52) 등지에 모두 다녀온 적이 있을 것

이니, 말해 보라! 어느 곳의 차 맛이 가장 좋던가? 가지고 온 차가 있지 않

은가? 대중들에게 드러내어 보라!”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설령 내놓더

라도 제멋대로 차를 달이는53) 잘못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南明泉, 小叅, 擧此話云,“ 可憐, 趙州! 將一盞麤茶, 東獻西
獻! 雖然苦澁難當, 要且家園所出. 諸人, 江南兩浙, 河北西
川, 盡曾到來, 且道! 甚處茶最好? 莫有收得底麽? 對衆呈似
看!” 良久云,“ 直饒將得出來, 未免胡點亂點.”
51) 절동(浙東)과 절서(浙西)를 아울러 일컫는 말. 전당강(錢塘江)을 중심으로 나뉜
    다.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지역이다.
52) 사천성(四川省).
53) 點. 점다(點茶). 본서 2則 주석38) 참조.

 

[설화]

조주의 본분가풍을 밝혔다.

南明:眀趙州本分家風.

 

천동정각의 상당

 

이 공안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경청의 문답과 설두의 염을 제기했다. 경

청이 어떤 학인에게 ‘조주의 끽다거 화두는 어떤 뜻인가?’라고 묻자 학인

이 곧바로 떠났고, 경청은 ‘한단(邯鄲)에서 그곳의 큰 걸음걸이54)를 흉내

내며 배우다 자기 나라 걸음걸이까지 잃어버리는 격이다’55)라고 하였다.

설두는 이 문답의 핵심을 집어내어[拈] ‘그 학인은 한단 사람이 아닌데 무

슨 이유로 그곳의 큰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배웠겠는가!’라고 말했다. 천

동이 말했다. “차나 마시게, 차나 마시게. 이렇게 분명하게 가리켜 주었고

특별히 다른 말은 없었다. 가풍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였을 뿐 기관56)이라

곤 전혀 없었거늘 ‘조주가 원주를 속였다’라고 누가 말하는가? 안타깝고

안타깝다! 왕왕 한단에서 그곳의 큰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배우는 경우도

있지만, 무심하게 장안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분

명히 눈은 달렸지만 타고난 소경과 같은 꼴이다. 경청은 ‘한단에서 그 나

라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배우다 자기 나라의 걸음걸이까지 잃어버리는

격이다’라 말했고, 설두는 ‘그 학인은 한단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이유로 그

곳의 큰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배웠겠는가!’라고 말했다. 알겠는가? 기틀

에 그대로 부합하는 자57)는 본질을 잃고, 상대의 생각을 등지는 자58)는 망
한다.59)”
天童覺, 上堂, 擧此話, 兼擧鏡淸問僧, ‘趙州喫茶去, 作麽
生?’ 僧便行. 淸云,‘ 邯鄲學唐步.’ 雪竇拈云,‘ 者僧不是邯
鄲人, 爲什麽學唐步!’ 師云, “喫茶去, 喫茶去. 明明指人無異
語. 家風平展沒機關, 誰道趙州謾院主? 苦苦苦! 往往邯鄲學
唐步, 恰恰長安道上行, 分明有眼如天瞽. 鏡淸道,‘ 邯鄲學唐
步.’ 雪竇道, ‘者僧不是邯鄲人, 爲什麽學唐步?’ 還會麽? 登
機者失, 欺敵者亡.”
54) 당보(唐步). 팔자로 큰 걸음을 떼며 호탕하게 걷는 걸음.
55)『莊子』「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에 기초한다.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결과 자신의 조국 연(燕)나라
    의 걸음걸이도 잃어버렸다는 고사이다. 자신의 주체적 본분을 모르고 남의 흉
    내만 내다가는 양자를 모두 잃어버린다는 비유이다. 근본을 모르고 다른 선사
    들의 표피적인 언행만 모방한 학인을 비판한 말이다.
56) 機關. 상대를 시험하기 위한 방법적 장치를 말한다. 여기에는 상대를 속이는 일
    종의 함정이나 겉으로 드러내는 말과 속뜻이 다른 경우도 포함된다. 조주의 끽
    다거라는 말에는 그와 같이 방법상 숨겨 놓거나 현혹시키는 수단은 전혀 없다.
    끽다거라는 한마디에 조주의 모든 의중이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57) 등기자(登機者). ‘登’은 올라타다·의지하다 또는 부합하다 등의 뜻이다. 곧 기틀
    에 올라타고 의지하는 것, 끽다거라는 말에 담긴 다양한 관념에 동조하여 부합
    하는 자를 나타낸다
58) 기적자(欺敵者). 여기에서 ‘欺’는 속인다는 뜻은 아니며, 경멸하다 또는 등지다 등의
    뜻과 통한다. 곧 상대의 역량을 얕보거나 그 생각을 무시하고 등지는 자를 말한다.
59) 기틀[機]은 끽다거, 상대[敵]는 그 기틀을 제시한 조주를 가리킨다. 조주의 끽다
    거를 올라타고[登] 온전히 수긍하여 그 말에 매몰되는 입장과 그와는 반대로 그
    말을 무시하고 등지는[欺] 부정의 입장을 모두 차단한 것이다. 앞은 경청이 주
    목한 견해, 뒤는 설두가 주목한 견해에 각각 상응한다. 그대로도 안 되고[不卽]
    벗어나도 안 되는[不離] 진퇴양난의 상황을 설정하여 전형적인 관문(關門)으로
    제시한 것이다

 

[설화]

한단에서 그곳의 큰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배우다 ~ 잃어버리는 격이다:그 학인은

오로지 조주가 편리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던 경계만 이해했을 뿐, 조주의

의중은 몰랐다는 뜻이다.

그 학인은 한단 사람이 아닌데 ~ 흉내 내며 배웠겠는가:그 학인은 이미 조주의

의중을 이해했다는 뜻이니, 조주의 의중은 어떤 것일까? 바로 아래의 게

송에서 살펴보라.

차나 마시게[喫茶去]:세 번에 걸쳐 끽다거라 했음에도 여기에서는 두 번만

끽다거라고 하며 들어 보인 것에는 깊은 이유가 있으니, 이 어찌 분명하게

남에게 지시해 주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가풍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였을 뿐 기관이라곤 전혀 없었다:어떤 기관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조주가 원주를 속였다’라고 누가 말하는가:다만 두 번의 끽다거만 들어 보인

것은 조주의 의중이 이 두 구절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원주에게 전한 끽다거는 쓸모 있는 말이 아니거늘 ‘속였다’고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는 뜻이다. ‘기관이라곤 전혀 없었다’라고 한 말과

통한다.

안타깝고 안타깝다:세 번에 걸쳐 ‘차나 마시게’라고 한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왕왕 한단에서 그곳의 큰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배우는 경우도 있지만:도리가 전

혀 없는 것60)에 대하여 착안하려는 잘못을 가리키니, 한단의 결음걸이를

말한다.

60) 몰도리처(沒道理處). 끽다거 화두는 특정한 도리에 근거하여 분별할 단서가 전    

    혀 없기 때문이다. 화두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 중 하나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    

    가 도리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사대부에게 주었다는 ‘몰도리의 인연’도 바로 화
    두를 가리킨다.『大慧語錄』 권14 大47 p.868c17 참조.

 

무심하게 장안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가풍을 있는 그대로 펼친다는 뜻

이다.

분명히 눈은 달렸지만 타고난 소경과 같은 꼴이다:의미가 없는 것61)에서 전도

(顚倒)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도리가 전혀 없는 이 화두를

분별로 이해하려 들면 조주의 본의와 일치하지 못하고, 지시해 준 그대로

이해하려 해도 조주의 본의를 깎아 먹는다.

61) 무의미처(無意味處). 위의 몰도리처와 같은 맥락이다. 어떤 맛도 없는 몰자미(沒   
    滋味)한 화두의 본질을 나타낸다. 의미가 없는 끽다거에서 의미를 찾으며 천착
    (穿鑿)하기 때문에 전도라 한 것이다.

 

기틀에 그대로 부합하는 자는 본질을 잃는다:경청은 도리가 전혀 없는 화두라

는 관점에서 조주의 본의를 드러내었다는 뜻이다.

상대의 생각을 등지는 자는 망한다:설두는 지시한 내용이 있다는 관점에서

그 학인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기틀에 그대로 부합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등지거나 모두 근본과 어긋

난다. 한단의 걸음걸이를 모방하려는 사람의 체구가 왜소하여 큰 걸음걸

이를 배우다가 이전의 걸음걸이까지 잃어버린다.

 

天童:邯鄲學唐步者, 這僧一向趙州得其便處會去, 不知趙州
意也. 這僧不是邯鄲人云云者, 這僧已會得趙州意, 趙州意作
麽生? 看取下面頌. 喫茶去者, 三度喫茶去, 只擧兩句, 深有所
以, 豈不是眀明指人也! 家風至關者, 亦無機關處也. 誰道趙
州云云者, 只擧兩句, 則意不出兩句. 然則第三喫茶, 也無用
處, 何用言謾也. 所言沒機關也. 苦苦者, 會三度喫茶也難也.
往往邯鄲云云者, 而人向沒道理處著眼, 是邯鄲也. 恰恰長安
云云者, 家風平展也. 分明有眼云云者, 却向無意味處著倒故
也. 然則沒道理處會去, 不契趙州意;有指示處會去, 亦食趙
州意也. 登機者失者, 鏡淸向沒道理處, 發揚趙州意也. 欺敵者
亡者, 雪竇向有指示處, 扶見這僧也. 登機欺敵皆相戰. 䫉邯鄲
人體小, 學唐步失向步也.

 

앙산행위(仰山行偉)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원주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차 한 잔을 마

셨으나 차의 내력은 알지 못했다. 조주의 차를 마신 자라면 반드시 간식62)

을 찾아 먹어야 할 것이니, 그의 차는 아무 맛도 없기 때문이다. 빼어난 맛

을 가진 황벽산의 건차63)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64) 그런 까닭에 황룡

(黃龍) 선사(先師)도 ‘누가 맛없는 조주의 차를 마시려 할까?’65)라고 반문

했던 것이다. 내가 오늘 가풍을 간략히 드러내어 대중에게 보이겠다. 나의

가풍은 대단히 평범하니, 한마디에 곧바로 드러낼 뿐 감추지 않는다. 알았

다면 이 자리에서 곧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며, 알지 못했다면 아무렇게나

헤아리지 마라. 말해 보라! 옛사람과 같은가, 다른가?” 주장자로 선상을

한 번 내리쳤다.

仰山偉, 上堂, 擧此話云, “院主, 不問東西, 喫却一椀, 不知來
處. 若是喫着趙州茶者, 須是討藥取下始得, 爲他茶無味. 不
似黃蘗建茶, 滋味好喫. 所以, 黃龍先師道,‘ 誰人, 肯喫趙州
茶?’ 仰山今日, 略露家風, 呈示大衆, 仰山家風事大常, 一言
直下不隱藏. 會卽, 直下便會取, 不會, 且莫亂商量. 且道! 與
古人, 是同是別?” 以拄杖, 擊禪床一下.
62) 약(藥). 오후(午後)에 먹는 약석(藥石)을 가리킨다.
63) 建茶. 차 재배지로 유명한 복건성(福建省)에서 나는 차. 황벽산(黃蘗山)이 복건
    성에 속하므로 황벽산의 차도 건차라 한다.
64) 황벽의 건차가 맛이 좋다는 것과 대조시킴으로써 맛이 없는[沒滋味] 조주 차의
    묘미를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 아래 황룡의 말을 인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65) 황룡삼관(黃龍三關) 중 첫 번째 관문에 대하여 지은 게송의 마지막 구절을 활용
    한 말이다.『黃龍語錄』「三關師自頌」大47 p.639b27. “탄생의 인연에 얽힌 
    말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눈이 없는) 해파리가 새우의 눈을 떠난 적이 있었던
    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만 알았지, 맛없는 조주의 차를 다시 마실 자는 
    누구이겠는가?”(生緣有語人皆識, 水母何曾離得鰕? 但見日頭東畔上, 誰能更喫
    趙州茶?)

 

[설화]

원주는 ~ 알지 못했다:다만 맛이 없는 차만 알았을 뿐 맛이 있는 차는 모

른다는 말이다.

조주의 차를 ~ 맛도 없기 때문이다:반드시 몸을 돌려 막힌 숨을 터지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황벽산의 건차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맛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내가 오늘 가풍을 ~ 감추지 않는다:모든 사람이 그 진실과 마주칠 수 있다는

뜻이다.

알았다면 이 자리에서 ~ 아무렇게나 헤아리지 마라:비록 이렇다고 하더라도 또

한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仰山:院主至來處者, 只知無滋味, 不知有滋味也. 若是喫着
云云者, 須是轉身通氣也. 黃蘗建茶云云者, 有滋味也. 仰山至
不隱藏者, 不妨與一切人相見也. 會卽至亂商量者, 雖然如是,
亦不得伊麽去也.

 

한암승의 입원66)상당

66) 入院. 주지로 부임하는 것. “입원:득법한 후에 세상에 나와 어떤 절로 들어가는
    것이다.”(『禪林象器箋』권9「叢軌類」禪藏 p.590. 入院:出世入某院也.);“옛
    날 사람들의 입원 절차는 다음과 같다. 허리에 바랑을 두르고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산문 앞에 당도하면 쓰고 있던 삿갓을 벗는다. 산문에 들어서면 향을 사르
    고 법어를 내린다. 승당 앞으로 나아가 바랑을 풀고, 가려진 곳(後架 등)에서 손
    과 발을 씻고 가사를 입는다. 승당에 들어가면 향을 사른 다음 성승(聖僧) 앞에서 
    좌구(坐具)를 크게 펼치고 삼배를 올리는데, 시봉하며 따르는 제자들도 함께 절을
    올린다. 이렇게 하여 괘탑(掛搭:掛錫)을 마친다. 불전에 도달하면 향을 사른 다
    음 법어를 내리며, 좌구를 크게 펼치고 삼배를 올린다. 다음에는 토지당과 조사
    당에서 향을 사르고 각각의 장소에서 법어를 내린다. 방장에 들어서면 자리를
    잡고 앉아 법어를 내린다. 다음으로 주지 취임 후 처음으로 법문을 하고[開堂]
    축원한다.”(『百丈淸規』권3「入院」大48 p.1125b13. 古人, 腰包頂笠, 到山門
    首下笠. 入門炷香, 有法語. 就僧堂前, 解包, 屏處濯足, 取衣披搭. 入堂炷香, 聖僧
    前大展三拜, 參隨人同拜, 掛搭已. 到佛殿, 拈香有法語, 大展三拜. 次土地堂祖堂,
     炷香, 各有法語. 入方丈, 據室, 有法語. 次第開堂祝聖.)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대중이여! 조주는 세 척 길이 취모검67)

쥐고서 사방으로 트인 큰길에서 이리저리 마음대로 휘둘렀으나 아무도

그의 칼날과 대적할 자가 없었다. 이와 같이 대부분 멍하니 눈을 뜬 채 입

만 벌리고 있었을 뿐,68) 조주의 차를 마셔본 적은 없었다. 결국 어떻게 해

야 하겠는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

寒嵓升, 入院上堂, 擧此話云,“ 大衆! 趙州把三尺吹毛劒, 向
十字路頭, 旋轉揮弄, 無有當其鋒者. 然雖如是, 大有人, 目瞪
口呿, 不曾得趙州茶喫在. 畢竟作麽生?” 良久云,“ 喫茶去.”
67) 吹毛劍. 칼날에 머리카락을 대고 바람을 불면 잘려나갈 정도로 예리한 칼. 어떤
    말과 행위도 받아들이지 않는 본분의 수단을 나타낸다.
68) 목징구거(目瞪口呿). 분명히 보고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나타낸다.
    “만일 아래로 내려가면 삼승과 오성, 돈점과 편원의 차별이 있지만, 무차별의 경
    계로 올라가면 입으로 말할 거리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임제와 덕산이라
    도 눈뜬 채로 입을 벌릴 뿐이다. 말해 보라!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어느 편에도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머리를 내밀고 나올 사람 누구인가?”(『圜
    悟語錄』권1 大47 p.718a18. 若向下去, 三乘五性, 頓漸偏圓;若向上去, 不唯覓
    下口處不得, 臨濟德山, 目瞪口呿. 且道! 不落上下, 又作麽生? 誰是出頭人?)

 

[설화]

취모검:하나하나 베어버리는 수단이다.

사방으로 트인 큰길에서 ~ 휘둘렀으나:다양한 근기들을 마주하고 있다는 뜻

이다.

寒巖:吹毛劒, 則一一斬斷也. 十字路至弄, 則對機之義.

 

백운지병(白雲知昺)의 염

 

“당장에 내려놓으니 분명히 드러나 숨긴 것이 없고, 눈앞에 드러내니 구

절마다 감춘 것이 없다. 만약 두꺼비가 그대의 귓속에 들어가 있거나 독사

가 그대의 눈동자로 들어와 있다면,69) 바로 그때 어떻게 알아차리겠는가?

달마대사의 수염은 붉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여기 또 붉은 수염이 달린

달마대사가 있었구나.70)”
白雲昺拈, “當頭按下, 明明獨露無私;覿面相呈, 句句曾無盖
覆. 或若蝦蟆, 入你耳朶裏, 毒蛇, 鑽你眼睛中, 當伊麽時, 如
何委悉? 將謂胡鬚赤, 更有赤鬚胡.”
69)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구절이라는 말. ‘차나 마시게’라는 말에 숨긴 것도
    없고 감춘 것도 없이 다 드러났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독사와 두꺼비의 독과 같
    이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작용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말이
    다. “협산이 ‘온갖 현상에서 노승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복잡한 저잣거리에서 천
    자가 누군지 알아내라’라고 한 말을 제기하고 운문이 평가했다. ‘두꺼비가 그대
    의 귓속에 들어가 있고, 독사가 그대의 눈동자를 뚫고 들어간 격이다. 협산의 말
    에서 그 뜻을 알아차려 보라.’”(『雲門廣錄』권중 古尊宿語錄16 卍118 p.356b5. 
    擧夾山云, ‘百草頭上薦取老僧, 鬧市裏識取天子.’ 師云, ‘蝦蟇入爾耳朵裏, 毒蛇穿
    爾眼睛中. 且向葛藤處會取.’)
70) 그것이나 이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끽다거’라는 바
    로 그 말이 동시에 귀와 눈을 멀게 하는 독이라는 뜻이다.『雲門廣錄』권상 
    大47 p.552c11,『大慧語錄』권4 大47 p.827a4 등에도 보이는 구절이다.

[설화]

당장에 내려놓으니 ~ 감춘 것이 없다:조주는 기틀에 합당한 수단을 각각 가

지고 있었으니, 온 적이 있다고 해도 그에게 차를 마시라 하고, 온 적이 없

다고 해도 그에게 차를 마시라 하여 온 적이 있거나 온 적이 없거나 그들

에게 모두 차를 마시라 권했다.

두꺼비에게는 뱀처럼 화려한 무늬는 없지만 독사와 같이 왕성한 독의

작용이 있다.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고 눈동자는 모든 것을 비추어 보는 기

관인데, 그 놈들이 그대의 귓속에 들어가고 눈동자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면 그 말뜻이 무엇인지 알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달마대사의

수염은 ~ 달린 달마대사가 있었구나’라고 말했던 것이다.

白雲:當頭按下云云者, 趙州各有當其機, 曾到也, 敎你喫茶
去, 不曾到也, 敎伊喫茶去, 曾到不曾到, 敎伊喫茶去也. 蝦蟆
沒文彩, 毒蛇有活用. 耳朶領納音聲, 眼睛照破一切, 入你耳
朶, 鑽你眼睛, 則其意可知. 故下云, 將謂胡鬚云云.

 

심문담분(心聞曇賁)의 염

 

“조주는 입으로 인사를 했는데도 입술에 침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안

목을 갖춘 귀빈이라면 그가 그렇게 한 말을 듣고서 다만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이며 ‘번거롭게 일어나지 마십시오’라고 작별인사를 했을 것이다.”

心聞賁拈,“ 趙州口行人事, 且無涓滴沾唇. 若是具眼高賓, 見
他伊麽道, 但高揖云,‘ 不煩起動.’”

 

[설화]

입술에 침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조주가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뜻

이다.71)
71) 조주가 ‘차나 마시게’라고 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말이 있었다고
    하거나 없었다고 하거나 모두 맞지 않도록 설정하는 방법에 따른다.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 화두에 대하여 혜각(慧覺)이 ‘조주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
    의도도 이와 같다. 본서 184則 주석75) 참조.

 

번거롭게 일어나지 마십시오:손님 역시 이해할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心聞:且無涓滴云云者, 趙州曾無此語也. 不煩起動者, 賓家,
亦是無理會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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