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불전에 나타난 산냐(saññā 想) 개념의 위상/김준호

실론섬 2017. 1. 13. 19:00

불교학리뷰(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9권 (2011. 6) 119p~142p

초기불전에 나타난 산냐(saññā 想) 개념의 위상

김준호 (부산대학교 철학과)

 

[국문요약]

이 글은 초기불전에 나타나고 있는 산냐(saññā) 개념의 의미에 대한 하

나의 고찰이다. 산냐 개념은 오온의 세 번째 요소로서 ‘표상, 지각, 판단’

정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단독으로 쓰일 경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의식을 발생, 확장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하지만 지혜를 불러일으키

는 근거로 자리매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주로 명상

수행과 연관성을 맺기도 한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산냐의 의미에 주목하

여 그 의의를 가늠해보려는 작은 시도이다.

 

연구방법론으로는 남전 5니까야와 북전 4아함의 비교・대조 방법을 채

택한다. 몇몇 개별 경전을 논거로 삼아 논의를 진행시키는 방법을 지양하

고, 남북전의 내용이 일치하는 즉 공통의 요소를 근거로 하는 것이 자료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전제에서 채택하는 방법임을 밝혀둔다. 나아가 하

나의 개념에 내재된 의미의 다양성은 사유와 선의 관계와 같은 문제를 이해

하는 데에도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I. 시작하며

 

주지하다시피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행위는 초기불전에서

열반에 도달하는 수행법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색수상행식의 활동

으로 발생하는 자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영역은 사고 작용의 활동 없이는 처음부터 성

립할 수 없는 살림살이이기도 하다.

 

지각, 표상 등으로 해석되는 산냐(saññā)의 의미에 대해서는 초기불교의

심식론1) 및 오온설에 대한 연구에서2) 주로 다루어졌는데, 이미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곧 산냐 개념이 나타나는 초기불전

및 제논서의 해당 출전은 이미 충분히 밝혀져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산냐 개념에 주목하는 이유는 오온의 세 번째 구

성요소가 아니라 단독으로 나타나거나3)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용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산냐는 욕망과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개념

이 아닌 수행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긍정적 측면으로서의 의의가 드러나

는 것으로 보인다.

1)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의 ?パーリ佛敎を中心とした佛敎の心識論?(ピタカ, 1978)가 대표적
   인 연구서이다.
2) 오온설의 연구 경향에 대해서는 졸고, 「초기불교의 산냐 개념과 오온설」(?대동철학?제20집,
   2003, pp.2-3) 참고.
3) 육상신(六想身 cha saññā-kāyā 色想・聲想・香想・味想・觸想・法想 ; DN.Ⅲ, 33, p.244), 7가
   지 인식(satta saññā 7想 ; DN.Ⅱ.16,p.79 ; DN.Ⅲ, p.253), 구차제정(DN.Ⅲ, p.266) 등에
   등장하는 산냐 개념도 이에 해당된다.

 

이 글에서 ‘想’ 대신 팔리어 산냐를 그대로 쓴 것은 오온의 구성요소로

등장하는 산냐가 아니라 단독의 산냐가 나오는 경문을 분석해 보면 그 의의

가 다르게 여겨지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산냐를 오온설과

연관 지어 논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선행논문에서 연구한

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냐 개념을 통해 사유와 선정의 문제를 거

론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초기불전을 분석하는 방법론으로는 남북 양전의 비교・대조방법을 채택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다른 논문의 서두에서도 이미 밝힌 바 있으

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본문의 논술과정에서 제시되는 經證은

남북 양전이 일치하는 내용을 우선으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또 다른 경증

이 발견되더라도 내용이 불일치된 자료는 근거로 삼지 않거나 생략하였다.

선행 논문에서 밝혔지만, 이미 우시(羽失)는『숫타니파타』에서 발견되는

산냐 개념을 ‘부정되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지

는 것’으로4) 파악한 바 있어, 이미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은『숫타니파타』에만 한정되지 않고, 초기불전 전체에서 나타난다. 나

아가 지각 또는 사유를 의미하는 ‘cintā, saṃkappa, vitakka, vicāra’ 등

의 술어에도 동일한 성격과 의의를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5) 다루지 않을 것이다.

4) 졸고 참조(p.4).
5) 이에 대해서는 임승택의 「vitakka(尋) 개념의 수행론적 의의에 대한 고찰」(「불교학연구」제12
   호, 2005)과 졸고, 「초기불교 선정설의 체계에 관한 연구」(부산대 박사학위논문, 2007,
   pp.46-53) 등 참조.

 

여기서는 산냐의 긍정적 성격을 살펴봄으로써 지각, 판단, 사유 등의 ‘앎

의 과정’이 ‘수행의 과정’에서 언제나 하위개념에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사유의 닦음이 바로 선이라는 규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논의하

고자 한다.

 

II. 산냐 개념

 

1. 앎과 산냐

초기불교의 인식론적 측면을 파악하는 데에는 주의 깊은 태도가 필요

하다. 왜냐하면 초기불전의 팔리어에는 ‘앎, 지각, 인식’을 의미하는 용어

가 ‘알다, 생각하다, 지각하다’ 등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곧 ‘알다’의 동사어근인 ‘√ñā’는 물론이고, ‘보다’의

동사어근인 ‘√pas’와 ‘√das’, 그리고 ‘생각하다’의 동사어근인 ‘√man,

√cint’ 등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인식론에 대한 기존의 국내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인식의

성격을 두 가지로 나누어 접근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들의 논의를

간단히 말하면, 보통사람들의 인식과 불교의 앎과 인식은 다르다는 입장

이다. 일찍이 김동화는 이를 知覺적 인식설과 證悟적 인식설로 구분한6)

적이 있다. 그는 지각적 인식설을 6根, 6境, 6識, 6觸으로 설명하고, 증

오적 인식설은 추리판단에 그치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의해 증

득한 것 즉 心證體達한 實證的 인식이라고7) 말하였다. 이중표도 이 구

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는 김동화의 의견에 덧붙여, 증오적 인식설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조작되고 있는가를 正觀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이중표는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문을 통해 이러한 증

오적 인식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8)

6) 김동화,「원시불교사상」, <불교사상전집> 2, p.205
7) 김동화, 같은 책, pp.206-211 참조.
8) 이중표,「아함의 중도체계」, 불광출판부, pp.81-84 참조.

 

조준호가 ‘알다’의 동사어근 ‘√ñā’에서 파생된 용어를 ‘sañjānāti

vijānati abhijānāti, parijānāti, pajānāti’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면서9)

‘sañjānāti’와 vijānati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인식방법에 해당하는 데

비해, 뒤의 세 가지는 如實知見과 관련되어 선수행의 인식방법이라고 구

분한 경우도 같은 사고방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전 니까야

전체에서 ‘yathābhūta’와 함께 ‘sañjānāti’나 ‘vijānati’가 쓰이는 용례는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pajānāti’나 이에 상응하는 수준의 용어들이 사용

되었다고10) 한다.

9) 조준호, 「위빠사나의 인식론적 근거」,「보조사상 제16집」(2001), pp.45-46 참조.
10) 조준호, 같은 논문, pp.47-51.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초기불전에 사용된 인식관련 용어는 대단

히 다양하다.『숫타니파타』만 살펴보아도 인식과 관련되는 용어는 모두

18가지 단어가11) 다양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조준호의 지적대로

‘vijānati’는 일상적인 인식에 해당되는 것이 맞지만, ‘jānāti’의 파생어를

검토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jānāti’의 용례에는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서

서 불교의 이상경지나 如實知見에 비견되는 앎을 의미하는 말로도12) 쓰

이기 때문이다.

11) 알다 jānāti, vijānāti, ājānāti(=aññāti), abhijānāti, pajānāti, parijānāti, sammasati,
    vid(kovida), sameti, nibbijjhati, anuvijjati ; 보다 dassati, passati. ; 생각하다 maññati,
    vicinteti. ; 지각 muti, saṃkhāyati =saṃkhāti. ; 구별하다: vicinati.
12) Samitāvi pahāya puññapāpaṃ virajo ñatvā imaṃ parañ ca lokaṃ(Sn.520, p.96) 寂靜하
    여 선악행을 버리고 더러움을 떠나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아 ; Therī.159,p.139 …
    yathābhuccam ajānantī saṃsari ‘haṃ anibbisaṃ. (전생은 이러 이러했다고) 있는 그대로
    를 알지 못하여 나는 평온하지 못하고 윤회하였다. ; 동사어근 ‘vid’의 경우도 마찬가지 예를
    들 수 있다. Thera.260, p.32 sambhavā suviditā asārakā saṃkhatā pacalitā sad’ eritā ;
    taṃ viditvā maham attasambhavaṃ santim eva satimā samajjhagan ti. 존재의 근원은
    견실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은 흔들리고 늘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것은 나 자신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적정, 念에 도달하였다.

 

이상의 경문을 검토해 보면, 일상적인 앎의 성격을 띠는 용례도 있지

만13) 알아야 될 이치나 불교교의와 관련된 내용, 나아가 수행과 연관된

내용이 훨씬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불전에 나타난 인식과

관련된 개념의 이해에는 몇몇의 용례로써 하나의 주장을 논증하는 데에

는 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산냐(saññā) 개념의 용례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13) Sn.116-134, pp.21-23. ; Sn.699,p.136 ; Sn. 93, 95, 97, 99, 101, 103, 105, 107, 109,
    111, 113, pp.18-20.

 

2. 산냐의 두 측면

1) 부정적 의미: 소멸지향형

오온의 무아・고・무아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산냐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은 그 부정적인 성격에 대한 진단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보인다.

곧 탐욕과 집착을 낳게 하는 원인으로서 산냐의 부정적 속성에 대해 지

적하면서, 산냐의 부정적인 측면을 점차 소멸시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산냐에 대한 탐욕을 벗어난 이는 결박이 없다. 지혜에 의해 해탈한 자는 미혹

이 없다. … (Saññāvirattassa na santi ganthā, paññāvimuttassa na santi

mohā … Sn.847, p.166)

 

여기서 산냐에 대한 탐욕의 대상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구체적으

로 드러나지 않지만 산냐에 대한 탐욕 또는 집착14)을 경계하는 주장으로

서의 성격은 충분히 드러나 있다. 이른바 ‘오염된 지각작용’에 대한 지적

으로서 오염된 산냐를 잘 알아야 한다는15) 당위의 논리를 지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오염된 지각작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중부 제18 「마두핀

디카(Madhupiṇḍika)」 경에 보인다.

14) Sn.792, p.155.
15) Sn.779, p.153 : Saññaṃ pariññā vitareyya oghaṃ ….

 

“(눈[眼]과 시각의 대상[色]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眼識]이 생겨나고, 이

3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며,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작용[受]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으

로서의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16)

16) MN.Ⅰ.18, pp.111-112 : … yaṃ vedeti taṁ sañjānāti, yaṁ sañjānāti taṁ vitakketi, yaṁ
     vitakketi taṁ papañceti, yaṁ papañceti tatonidānaṁ purisaṁ papañcasaññā-saṅkhā
     samudācaranti atītānāgatapaccuppannesu cakkhu-viññeyyesu rūpesu.

 

인용문에서는, 지각작용이 오염되는 과정을 ‘느낌 → 지각 → 사유 →

희론’으로 설정하고 있다. 경문에서는 지각작용뿐만 아니라 사량(思量

saṅkhā)까지 언급되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지각작용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산냐는 감각정보를 지각한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다시 지각한 내용을 ‘사유하는(vitakketi)’ 과정이 들어가 있다. 또한 ‘사

유’는 한자어로는 尋(vitakka)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감각정보를 1차적으

로 해석하려는 기능이 산냐이고, 그것을 다시 해석하려는 기능을 위타카

[尋]로 파악하고 있다. 곧 주관적인 판단과 해석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망상분별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이 경전과 대응

하는 한역은 중아함 제115 「밀환유경(蜜丸喩經)」인데, 서술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 대의는 일치하고 있어서17) 신뢰할 만한 자

료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지각대상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좀 더 풍부

한 서술은 중부 제1 「물라파리야야(Mūlapariyāya)」에서 발견된다.

17) 大正藏 권1, 중아함 권제28, p.604中. : … 若所覺便想, 若所想便思, 若所思便念, 若所念
    便分別. …

 

그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sañjānāti),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saññatvā), 땅

을 생각한다. 땅에 대해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고 ‘땅은 내 것이다’라고 생

각하며 땅에 대해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완전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이하 반복구) … 물(Āpa) … 불(Teja) … 바람

(Vāya) … 생물(Bhūta) … 천신(Deva) … 창조주(Pājapati) … 범천(Brahma) …

光音天(Ābhassara, 極光天) … 遍淨天(Subhakiṇṇa) … 廣果天(Vehapphala) …

勝者天(Abhibhū) … 空無邊處(Ākāsānañcāyatana) … 識無邊處(Viññāṇañcāyatana)

… 無所有處(Ākiñcaññāyatana) … 非想非非想處(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 보인 것(Diṭṭha, 見) … 들린 것(Suta, 聞) … 생각된 것(감각적 지각)(Muta,

覺・思) … 의식된 것(Viññāta 知・識) … 하나인 것(Ekatta, 유일성) … 여럿인

것(Nānatta 다양성) … 모든 것(Sabba) … 열반(Nibbāna) …18)

18) MN.Ⅰ, pp.1-4 : … paṭhaviṁ paṭhavito sañjānāti, paṭhaviṁ paṭhavito saññatvā
     paṭhaviṃ maññati, paṭhaviyā maññati, paṭhavito maññati, paṭhaviṃ - me ti maññati,
     paṭhaviṁ abhinandati ; taṁ kissa hetu : apariññātaṁ tassāti vadāmi. (이하 반복구 생략)

 

인용문의 내용은 탐진치를 소멸하지 못한 범부들에게 벌어지는 지각작

용의 예로써 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산냐의 대상을 살펴보면, 외부

대상과 인식과정이 거의 모두 망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근거하면,

알아야 하는 부적절한 지각작용의 대상은 인용문의 끝부분에 보이듯이

사실 우리가 보고 듣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 된다. 이 경의 후반 서술에서

는 수행자들이 산냐의 대상을 완전하게 알아(pariññāta) 탐진치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이것은 지

각 대상에 대한 소유의식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즐김을 경계하기 위해서

인 것이다.

 

그런데 이 경전에 대응하는 한역은 중아함 제106 「想經」인데, 地想을

비롯하여 일체에 대해 想을 내고도 정작 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논리구조는 일치하지만 내용표현에는 차이가 많다.19) 더구나 淨想에 대해

서도 같은 논리가 나오는데 이 부분은 팔리본에는 없어서 일치되는 서술

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와 유사한 서술형태는 북전 「佛說樂

想經」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地想, 淨想의 구조’는 중아함 「想經」

과 같지만, 내 것이라는 관념과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서술이20) 존재하는

점에서는 남전의 내용에 부합하는 자료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19) 大正藏 권1, 중아함 권제27, p.596中 : 若有沙門梵志, 於地有地想, 地卽是神, 地是神所.
    彼計地卽是神已便不知地. 如是水火風, 神天生主梵天, 無煩無熱. 彼於淨有淨想, 淨卽是
    神, 淨是神所, 神是淨所. 彼計淨卽是神已便不知淨. 無量空處, 無量識處, 無所有處, 非有
    想非無想處. 一別若干見聞識知得觀意所念意所思. 從此世至彼世. 從彼世至此世. 彼於一
    切有一切想. 一切卽是神, 一切是神所, 神是一切所. 彼計一切卽是神已便不知一切.
20) 大正藏 권1, p.851上-中 : 諸有沙門婆羅門於地有地想. 樂於地計於地爲我. 彼言地是我.
    我說彼未知水火風 … 淨有淨想…

 

이와 같이 지각대상에 대한 소유관념과 그것을 즐긴다는 설정에 따르

면, 오염된 지각 또는 판단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것은 욕

망일 터인데, 초기경전에서는 이와 같은 산냐의 대상으로서 다양한 문제

점이 지적되고 있다. 운문계열의 경전에서는 비교적 간략한 형태로 나타

나고 있는데, 다음 세 가지 경우로 정리된다.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지각(kāmasaññā)21)

시각대상에 대한 지각(rūpasaññā)22)

즐겁다는 지각(sukhasaññā)23)

21) Sn.175, p.30 virato kāmasaññāya sabbasaṃyojanātigo ajjhacintī satimā …
22) Sn.1113, p.215 vibhūtarūpasaññissa sabbakāyapahayino ajjhattañ ca bahiddha ca n’
    atthi kiñci ti passato ñāṇaṃ …
23) Therī.78, p.131 pariyuṭṭhitā kilesehi sukhasaññānuvattinī samaṃ cittasa nālabhiṃ
    rāgacittavasānugā.

 

먼저 까마 샨냐에 대해서는 일체 속박의 근원으로 규정하여 그로부터

떠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의력 기울이기(sati)를 권유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산냐의 소멸을 위해

서 명상수행이 필요하다는 하나의 귀결을 보여준다.

 

남전 중부 제78 「사마나만디카(Samaṇamaṇḍikā)」 경에서는 無欲想(nekkhamma-

saññā), 無恚想(abyāpāda-saññā), 無害想(avihimsā-saññā)등이 제시되어 있고, 

불건전한 세 가지 의도(akusala-saṁkappa; kāmasaṁkappa,byāpāda-saṁkappa, 

vihimsā-saṁkappa)가 생겨나는 토대로 설정되어 있다.24) 곧 상카파보다 산냐가 

좀더 근원적인 사유의 성격을 지닌다는 지적으로 보인다.

24) MN.Ⅱ, 78 Samaṇamaṇḍikā-suttaṁ, pp.27-28. ; 대응한역인 중아함 제175 五支物主經
    에서도 각각 欲念, 恚念, 害念과 欲想, 恚想, 害想으로 일치된 내용이 보인다.(大正藏권1,
    중아함 권제47, p.721上). ; 대응한역은 없지만, 남전 증지부에도 欲想, 恚想, 害想을 언급
    하고 있다.(AN.Ⅲ, p.446).

 

두 번째 루파 산냐 역시 제거의 대상이다.『숫타니파타』게송 1113에

따르면 자신의 내외부에서 그 어떤 신체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

이 루파 산냐의 제거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만으로는 루파 산

냐의 소멸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남전 장부 제33 「상기티(Saṅgīti)」 경에서 자세한 서술을 만날

수 있다.

 

① 내적으로(자신에 대해서) 色想(rūpa-saññī)이 있어 외부의 약간의 色을

   보고는 조금이나마 아름답다거나 흉하다는 것을 극복하여, ‘나는 본다, 나

   는 안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saññī)한다.

② 내적으로(자신에 대해서) 色想(rūpa-saññī)이 있어 외부의 한량없는 色을

   보고는 아름답다거나 보기에 흉하다는 것을 극복하여, ‘나는 본다, 나는 안

   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saññī)한다.

③ 내적으로(자신에 대해서) 色想(rūpa-saññī)이 없고, 외부의 약간의 色을

   보고는 아름답다거나 보기에 흉하다는 것을 극복하여, ‘나는 본다, 나는 안

   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saññī)한다.

④ 내적으로(자신에 대해서) 色想(rūpa-saññī)이 없고, 외부의 한량없는 色을

   보고는 아름답다거나 보기에 흉하다는 것을 극복하여, ‘나는 본다, 나는 안

   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saññī)한다.

⑤ 내적으로(자신에 대해서) 色想(rūpa-saññī) 없이, 외부의 靑, 靑色, 靑澤,

   靑光을 보고 그것을 극복하여, ‘나는 본다, 나는 안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

   (saññī)한다.

⑥ 내적으로(자신에 대해서) 色想(rūpa-saññī) 없이, 외부의 黃, 黃色, 黃澤,

   黃光을 보고 그것을 극복하여, ‘나는 본다, 나는 안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

   (saññī)한다.

⑦ 내적으로(자신에 대해서) 色想(rūpa-saññī) 없이, 외부의 赤, 赤色, 赤澤,

   赤光을 보고 그것을 극복하여, ‘나는 본다, 나는 안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

   (saññī)한다.

⑧ 내적으로(자신에 대해서) 色想(rūpa-saññī) 없이, 외부의 白, 白色, 白澤,

   白光을 보고 그것을 극복하여, ‘나는 본다, 나는 안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

   (saññī)한다. 25)

25) DNⅢ. Saṅgīti-suttanta, pp.260-261. ; 대응한역인 장아함 「십상경」에도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大正藏 권1, 장아함권제9, p.55下-p.56上.

 

이 경에서는 자신과 타인의 용모 또는 색깔에 대한 판단 과정을 담고

있는데, 특히 아름답거나 추하다는 가치적 판단의 개입을 문제 삼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이 8가지 루파 산냐의 제거 과정을 八勝處(aṭṭha

abhibhāyatana)라 명명하고 있는 데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때의 산냐는 자타를 구별하여 분리하는 의식이며 자신의 주관을 개입

시켜 대상의 好惡를 결정지어 그로부터 번뇌가 생겨나는 불건전한 마음

작용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에서 산냐는 가치판단의 성격을26) 지니는 개

념으로 볼 수 있다.

26) 산냐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선행논문에서 이미 주장한 바 있다. - 졸고, 「초기불교의 산
    냐개념과 오온설」, pp.7-10.

 

세 번째 수카 산냐의 제거는 앞의 두 가지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

각된다. 곧 감각적 쾌락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이란 인식과정에서 반드시

시각대상[色]과의 접촉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테리가타』게송

제78에서, ‘번뇌에 사로잡힌 수카 산냐’ 때문에 탐욕스런 마음에 지배되

어 마음의 평정(sama)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산냐의 소멸이 바로 궁극적인 즐거움이라는 표현도27) 동일한 맥

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7) Therī.6, p.124 : Dhīre nirodhaṃ phusehi saññāvūpasamaṃ sukhaṃ. ārādhayāhi
    nibbānaṃ yogakkhemaṃ anuttaraṃ.

 

이렇게 보면, 산냐 개념의 부정적 의미는 오온의 무상・고・무아관에

서 추구하는 바와 동일선상에 놓여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산냐

개념이 오온의 세 번째 요소이든 단독의 개념이든 제거해야 할 이유는

자아의식의 발로, 감각적 쾌락에 따른 즐거움에의 집착, 현상의 왜곡된

이해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2) 긍정적 의미: 지혜의 추구와 명상

욕망과 집착이 개입되어 인식 과정이 진행될수록 점차 산냐가 오염되

는 것과는 달리, 사유의 힘에 의해 지혜를 추구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식 행위 자체가 명상 또는 그에 준하는 닦음에 해당

되거나 특정한 명상법이 지향하고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조력

의 역할을 감당하는 경우도 가정해볼 수 있겠다.

 

남전 중부 제19『드웨다위따까(Dvedhāvitakka)』경에서 이에 대한 시

사점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하루 밤낮이라도 그러한 것을 사유하고(anuvitakkeyyaṁ) 숙고하면(anuvicāreyyaṁ),

이를 원인으로 나는 결코 두려움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

도하게 사유하고 숙고하면 나의 몸이 피로해진다. 몸이 피곤해지면 마음이 혼란

스러워지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면 마음이 삼매에서 멀어진다.28)

28) MN.Ⅰ.19, p.116 rattiñ ce pi naṁ bhikkhave anuvitakkeyyaṁ anuvicāreyyaṁ n’ eva
    tatonidānaṁ bhayaṁ samanupassāmi. Api ca kho me aticiraṁ anuvitakkayato
    anuvicārayato kāyo kilameyya, kāye kilante cittaṁ ūhaññeyya, ūhate citte ārā cittaṁ
    samādhimhā ti. ; 大正藏 권1, 중아함 권25 제102, p.589中. 我復作是念. 多思念者身定
    [之]喜忘則便損心. 我寧可治內心, 常住在內止息. 一意得定令不損心.

 

인용한 경문은 비록 ‘산냐’가 아닌 ‘vitakka(尋), vicāra(伺)’이지만, 사

유력에 의한 지혜 추구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

한다. 이 경문의 배경은 붓다 자신이 과거 보살이었을 시절에 수행하던

장면인데, 여기서 사유의 대상은 앞에서 언급한 욕애에 대한 사유(kāmavitakko),

분노의 사유(byāpādavitakko), 폭력의 사유(vihiṃsāvitakko)

따위가 나와 남을 해치고 지혜를 억누르고 곤혹을 일으키고 열반을 멀리

하게 만든다는 사실로 나온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부적절한 사태에 대해

깊이 사유함으로써 두려움이 없어지게 된다는 서술구조에서29) 인식기능이

지혜의 추구로 이어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논

리적 사유력의 부작용 또한 지적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과도하게’에 지

나지 않는다.

29) MN.Ⅰ.19, p.114-115 ; 대응한역 내용일치(大正藏 권1, p.589上).

 

이제 산냐 자체가 직접 명상수행법과 연관되는 경우를 살펴보자. 먼저

『테라가타』의 게송 217에서 “붓다에 대해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주의집중

의 확립을 얻었다.”는30) 서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붓다에 대한

산냐가 사띠 수행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六隨念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산냐가 적절한 또

는 건전한 대상에 대한 지각 또는 인식으로 작용하면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0) Thera.217, p.28 : Assatthe haritobhāse saṃvirūḷhamhi pādape ekaṃ buddhagataṃ
    saññaṃ alabhitthaṃ patissato.

 

“무상이라는 인식, 무아라는 인식, 부정하다는 인식, 세상은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닦으라”는31)『테라가타』경문에 따르면, 산냐가 바

로 수행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백골에 대한 인식’으로 감각적

쾌락과 탐욕을 제거할 수 있다는32) 서술에서도 백골관과 거의 차이가 없

는 경우가 된다. 이와 같이 인식에 의한 수행은 7가지 인식[七想] 또는 9

가지 인식[九想]33)이라는 형태로 정형화된 모습을 띠기도 한다.

31) Thera.594, p.61 bhāveyya aniccan ti anattasaññaṃ asubhasaññañ ca lokamhi ca
    anabhiratiṃ
32) Thera.18, p.4 kevalaṃ aṭṭhisaññāya aphari paṭhaviṃ imaṃ. maññe ’haṃ kāmarāgaṃ
    so khippam eva pahīyatīti.
33) ‘인식’이라는 번역어를 썼지만, 일상적인 수준의 앎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또렷한, 뛰어난,
    분명한’ 등의 수식어를 부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적절한 번역어에
    대한 고민이 잘 해결되지 않아서 아직은 그저 ‘인식’이라는 말로 쓰고 있다. 그러나 한편 달
    리 생각하여 철학의 목표가 ‘진리를 인식함’에 있다는 데 도달하면, 일상어에 꼭 수식어를
    달아서 다르게 포장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의문이 들기도 한다.

 

① 7想 : 無常想(anicca-saññā), 無我想(anatta-saññā), 不淨想(asubhasaññā),

   患想(ādīnava-saññā), 斷想(pahāna-saññā), 離貪想(virāga-saññā),

   滅想(nirodha-saññā)34)

② 9想 : 不淨想(asubha-saññā), 死想(maraṇa-saññā), 食嫌惡想(āhāre pa-

   ṭikkūla-saññā), 世間厭離想(sabba-loke anabhirati-saññā), 無常想(anicca-

   saññā), 無我苦想(anicce dukkha-saññā), 苦無我想(dukkhe anattasaññā),

   斷想(pahāna-saññā), 離貪想(virāga-saññā)35)

34) DN.Ⅱ.16, p.79 ; DN.Ⅲ, p.253 ; 大正藏 권1 장아함 권제2, p.11下 一者觀身不淨, 二者觀
    食不淨, 三者不樂世間, 四者常念死想, 五者起無常想, 六者無常苦想, 七者苦無我想.
35) DN.Ⅲ.34, pp.289-290 ; 大1, 장아함 권제9, p.56下 不淨想, 觀食(不淨)想, 一切世間不可
    樂想, 死想, 無常想, 無常苦想, 苦無我想, 盡想, 無欲想.

 

여기서 7想은 쇠망하지 7가지 법으로, 9想은 생겨나게 해야 할 9가지

법으로 각기 등장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무상・고・무아에 대한 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다시 부정에 대한 인식, 근심거리가 된다는

인식, 끊음에 대한 인식, 탐욕에서 벗어남에 대한 인식, 소멸에 대한 인

식, 죽음에 대한 인식, 음식을 싫어하는 인식, 세속적인 즐거움을 멀리하

려는 인식 등이 강조되고 있다. 비록 ‘제거, 떠남, 염리, 소멸’ 등의 부정

적인 속성으로 비치지만 想을 念 또는 觀으로 바꾸면 사띠 및 위빠사나

명상이 지향하는 바와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7상과 9상은

이미 그 자체로 지혜를 추구하는 뛰어난 수행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는 남북전의 일치라는 연구방법에 의거하여 7상과 9상만을 논거

로 삼았지만, 불일치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5상, 7상, 9상으로 나타나

며36) 확대된다. 역시 대응한역은 없지만 생겨나게 해야 할 10가지 법으로

10상을 제시하는 경우도 발견되는데,37) 그 내용은 不淨想(asubha-saññā),

死想(maraṇa-saññā), 食嫌惡想(āhāre paṭikkūla-saññā), 世間厭離想

(sabba loke anabhirati-saññā), 無常想(anicca-saññā), 無我苦想(anicce

dukkha-saññā), 苦無我想(dukkhe anatta-saññā), 斷想(pahāna-saññā),

離貪想(virāga-saññā), 滅想(nirodha-saññā)으로 앞에서 제시한 7상과

9상 중에서 ‘患想(ādīnava saññā)’을 제외한 항목을 열거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용한 7상과 9상만을 논거로 들어도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36) 졸고, 「초기불교의 산냐(saññā)개념과 오온설」(p.12)에서 재인용. ; <5상> 不淨想, 死想, 患
    想, 食厭忌想, 一體世間不樂想(AN.Ⅲ, p.79), 無常想, 無我想, 死想, 食厭忌想, 一體世間
    不樂想(AN.Ⅲ, p.79), 無常想, 無常苦想, 苦無我想, 斷想, 離貪想(AN.Ⅲ, p. 277) <7상>
    不淨想, 死想, 食厭忌想, 一體世間不樂想, 無常想, 無常苦想, 苦無我想(AN.Ⅳ, pp.
    46-53) <9상> 不淨想, 死想, 食厭忌想, 一體世間不樂想, 無常想, 無常苦想, 苦無我想, 斷
    想, 離貪想(AN.Ⅳ, p. 387).
37) DN.Ⅲ.34, p.291.

 

이제 산냐가 명상수행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문제를 검토해 보자.

『테리가타』에는 四禪定의 첫 번째 선정에 들어서 무상에 대한 인식

(aniccasaññā)을 닦고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는다는(manasikaroti) 서술

구조가38)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적정과 삼매를 지향하는 명상의 계열에

서도 산냐 수행이 긴밀하게 연관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무상

의 인식이 선정수행의 예비단계 또는 하위에 불과하다는 설정이 나타나

지 않았다. 오히려 사유의 완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정수행이 필요한 것

이 아닌가 하는 여지가 비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필

요가 있는 경문은 남전 장부 제9 「포타파다(Poṭṭhapāda)」 경에 보인다.

38) Therī.481, p.170.

 

이 경전의 줄거리는 행각사문 포타파다가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인간의

인식(saññā)이 생성 소멸한다는 여러 사상가들의 견해에 의문을 품고 붓

다를 찾아와서 질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에 붓다는 산냐가 원인과 조건

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한다고 말한 뒤, 배움(sikkhā)에 따라 산냐가 일어

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포타파다가 이 배움의 내용을 묻

자, 붓다는 곧 수행의 덕목들을 차례로 설하는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붓다가 제시한 수행의 덕목은 청정한 三業, 청정한 생활(parisuddhājīva),

諸根守護, 正念正知로 요약된다. 이들 덕목을 실천한 이들에게는 5가지

장애[五蓋]가 제거되어 환희, 희열, 輕安이 생기고 마음은 삼매에 들게

된다고 하면서 사선정, 사무색정의 수행과정을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여

기서 선정의 각 단계를 성취할 때마다 생겨나는 ‘진리에 대한 미묘한 인

식(sukhuma sacca saññā)’을 얻게 된다는 반복구가 등장하는데 산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된다. 제1선에서

제8선까지 선정의 각 단계를 모두 인용하기는 번거로우므로 첫 번째 선

정을 성취하는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리고 불건전한 법들을 떨쳐버리고, 사유[尋]와 숙

고[伺]가 있고, 떨침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1선을 구족하여 머문

다. 거기에서 그는 이전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떨쳐

버림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진리에 대한 미묘한 인식만이 있다. 이때

에는 떨쳐버림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진리에 대해 미묘하게 인식하

는 자만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인식은 배움에 의해 생겨나고, 어떤 인식은 배움

에 의해 사라진다. 이것이 배움이다.”39)

39) DN.Ⅰ, p.182 ; So vivicc’ 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jjhānam upasampajja viharati. Tassa yā
    purimā kāma-saññā sā nirrujjhati. Vivekaja pīti sukha sukhuma sacca saññā tasmin
    samaye hoti, yeva ivekaja-pīti-sukha-sukhuma-sacca-saññī yeva tasmin samaye
    hoti. Evam pi sikkhā ekā saññā uppajjanti, sikkhā ekā saññā nirujjhanti. Ayaṃ sikkhā
    ti Bhagavā avoca.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요소를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타의 사선정 정형구와 다를 바가 없기 때

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선정의 성취 결과 얻어지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의 소멸에 대해 ‘진리에 대한 미묘한 인식’이라는 자리매김은 사유와

선정의 관계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선정

을 성취하면, 앞 단계의 참된 인식이 소멸하는 대신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새로운 참된 인식이 생겨난다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리 구조는 이하의 서술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므로, 이

경문의 의거하면 선정의 목적은 참된 인식의 획득을 목표로 한다고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때의 참된 인식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다시

다음 단계에서 생성소멸을 반복하게 되지만, 적어도 더 높은 참된 인식을

획득하려는 데 선정수행의 의의가 있다는 주장은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이러한 인식이 배움에 의해서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반복구는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경전에 대응하는 장아함 제28 「포타바루(布吒婆樓)」 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전과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특히 ‘진리에 대한 미

묘한 인식(sukhuma sacca saññā)’과 완전히 일치하는 술어가 보이지 않

는다. 또 남전에서 무소유처정의 성취까지 서술한 데 비해 북전에서는 상

수멸정[想知滅定]까지 언급하고 있어서 내용의 불일치 때문에 자료의 신

뢰성에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이와 같은 남북전의 불일치는 상수멸정의

위상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북전에서 ‘진리에 대한 미묘한 인식’이란 말은 없지만, ‘미세한

인식이 사라지고 거친 인식은 생겨나지 않는다(微妙想滅, 麤想不生)’는

구절에서 동일한 취지를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결

과의 묘사에서 이전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

움의 인식이 생겨난다는 서술 또한 존재한다. 계속해서 이와 같은 서술은

제2선-제9선까지 이어지는데 모두 앞 단계에 성취한 인식이 사라지고 다

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난다는 논리구조는40) 남전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거듭되는 선정 수행을 통해 참된 인식에 도달한다는 전체 논지는

양자에 동일하게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40) 大正藏 권1, 장아함 권제17 제28, p.110上-110中. ; … 先滅欲想, 生喜樂想, 以是故知, 有
    因緣想滅, 有因緣想生. … 彼初禪想滅, 二禪想生 … 彼三禪想滅, 四禪想生 ….

 

남전 「포타파다(Poṭṭhapāda)」 경의 후술 부분을 보면, 궁극적인 인식

의 소멸(abhisaññā nirodha)41)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서 이 경의 전체 대

의를 산냐의 소멸에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북

전의 내용 즉 상수멸정까지 고려하면 이 문제제기는 정당하게 보인다. 그

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궁극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41) 여기에 등장하는 ‘abhisaññā’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쿠모이 쇼젠
    [雲井昭善] 박사는 ?팔리어불교사전?(p.118)에서 ‘增上想’으로 풀이는 하였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선정(혹은 구차제정)의 각 단계
    를 성취할 때마다 ‘인식작용’이 좀 더 또렷하고 청정하게 되는 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을 일차
    적으로 드러내며, 나아가 궁극에 이르면 그러한 인식의 상태에조차 구속되지 않는 그 어떤
    경지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생각은 금강대 김성철, 이영진, 동국대 안승준
    선생이 각각 논평 및 질의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덕분이라서 지면으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인식과 지혜의 선후관계를 질문하는 포타파다에게 붓다는 다시 말한다.

“인식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긴다. 인식이 생기면 지혜도 반

드시 생긴다”라고.42) 이 경문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산냐의 두 번째 의의

는 바로 지혜의 생성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 시작하여, 인식의 상태이든 그 과정이든 그 속에서

어떠한 욕망이나 집착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가 완전히 사라진 인식의

경지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존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배움

이든 수행이든 명상이든 적어도 그 과정에서는 먼저 더 높은 참된 인식

의 성취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하나의 주장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42) DN.Ⅰ, p.185 ; Saññā kho Poṭṭhapāda paṭhamaṃ uppajjati, pacchā ñāṇaṃ, saññuppādā
    ca pana ñāṇuppādo hoti. ; 大正藏 권1, p.110下 先有想, 生然後智. 由想有智.

 

III. 맺으며

 

필자는 지금까지 명상을 중심으로 초기불교의 연구 작업을 수행했다.

현재 우리나라 초기불교 전공자의 대부분도 직・간접적으로 명상을 주제

로 삼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사띠, 사념처, 위빠사나, 심리치유

등의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나고 이러한 성과물이 실제 현장의 수행과도 직접적으로 연

관되는 모습은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구작업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문제의식도 늘어간다. 한국

사상의 역사가 말해주듯,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상반된 주장이나 다양성의

문제를 끈질기게 다루면서 하나의 사상을 재해석하려는 노력보다는 검증

된 것처럼 보이는 특정한 신념이나 구호, 그리고 그 시대의 유행에 따라

하나의 주장을 유일한 주장으로 간주하려는 태도가 여전히 존재하며 필

자에게는 그것이 경직된 사고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초기불전 안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개념에 대해 논의할 게 여전히 많다.

이 글에서 다룬 산냐 개념만 하더라도 오온의 구성요소일 때와 단독으로

쓰일 때, 그리고 다른 교의와 연결될 때와 수행의 덕목과 연결될 때에는

그 의미와 의의를 동일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자주 발견되기 때문

이다. 이는 특정한 하나의 개념을 교학이나 선학, 인식론이나 수행론 등

으로 미리 한정지어 논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으로도

이어진다.

 

산냐는 오온에서는 지각작용이지만 단독으로 쓰일 때에도 오온 무상・

고・무아관에서 지향하는 것처럼 자아의식의 발로, 탐욕과 집착의 개입으

로 오염되는 과정을 제대로 알고 다스려야 한다는 논지를 넘어서지 않는

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흔히 聞思修로 표현되는 지혜를 염

두에 두면 산냐의 역할은 聞慧・思慧를 넘어 修慧와도 연관되는 지점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사고 작용을 의미하는 수많은 개

념을 인식과 지혜, 사유와 명상 등의 연관 고리를 염두에 두고 깊이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과제가 다시 남는다. 부파불교의 제 논서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분석해볼 필요성이 다음 순서로 기다

리고 있다. 더불어 ‘지각 또는 인식’을 의미하는 여타의 수많은 개념과 비

교・분석함으로써 이 글에서 주장한 논지가 동일한 지평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과정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