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 상좌부 불교의 식문화 고찰

실론섬 2017. 1. 20. 17:33

인도철학 제39집(2013.12), 201~234쪽

초기 상좌부 불교의 식문화 고찰

( 본 논문은 2013년 11월 22일, 인도철학회와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주최의 ‘불교전통과 식문화’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김한상/동국대학교

 

 I 서언. 

Ⅱ 견분을 행상으로 보는 해석. 

Ⅲ 상분을 행상으로 보는 해석. 

IV 견분을 행상으로 보는 해석과 상분을 행상으로 보는 해석의 화회(和會). 

V 결어.

 

[요약문]

본고의 목적은 중도적 관점에서 초기·상좌부 불교의 식문화를 고찰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중도(中道)는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범행

(梵行, brahma-cariya)을 닦는 방식이다.

 

붓다는 첫 설법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중도를 설하여 감각적 쾌락과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깨달음을 얻도록 했다. 똑같은 이치

가 음식에도 적용된다. 붓다는 두 가지 극단적 식사법인 과식과 단식을

각각 감각적 쾌락과 고행으로 간주하여 비판하였다. 마찬가지로 붓다는

출가자들에게 육식을 특별히 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채식을 하더라도

음식에 갈애(taṇhā)를 일으키면 육식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채식 그 자체가 영적인 청정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은 ‘계금취

(戒禁取)’의 한 예이며 ‘음식을 통한 청정’이라는 그릇된 견해일 뿐이다.

마음챙김(念, sati)과 올바른 주의(如理作意) 없이 음식을 먹으면 무엇을

먹든지 갈애가 일어난다. 붓다가 호불호(好不好)의 감정 없이 몸을 유지

시키는 자양분으로만 음식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대로, ‘무엇을 먹

느냐’보다 ‘어떻게 먹느냐’를 더 중요하다.

 

상좌부 아비담마에 따르면, 음식은 소조색(所造色)에 해당한다. 이는

음식 그 자체는 도덕적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무기(無

記)임을 말해준다. ‘마음챙김 식사’를 통한‘음식의 적당량을 알기’는 붓다

가 칭찬하고 권장한 것으로, 그 자체가 수행(bhāvanā)이자 건강을 증진

하는 습관이다. 그래서 초기·상좌부 불교의 식문화는 건강이라는 세간

의 행복과 열반이라는 출세간의 성취를 이루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Ⅰ. 서론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먹지 않고서는 절대 살 수가 없다. 물

은 사흘만 안 마셔도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고, 음식은 일주일만

안 먹으면 체력이 바닥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이렇게 음식은 사

람의 생존에 직결되는 일차적 문제이기 때문에 역사가 시작된 이

후로 인류는 언제나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해결하는 일에 일차적

관심을 가져 왔다.

 

가뭄과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과 전쟁 때문에 인류는 항상 식량

이 부족하였으므로 굶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였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배고픔과 벌이는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다. 이점은 특히 인구 대국 중국의 역사를 보면 분명해진다. 중

국에서는 왕조가 수립된 초반기를 지나 중반기에 접어들면 태평

성대를 이루다가 후반기에는 각종 사회적 모순과 자연재해 등으

로 인한 농민 봉기가 어김없이 일어났다.1)

1) 이러한 현상은 흡사 상좌부 불교에서 설하는 일어남(生, uppāda), 머묾(住,
   ṭhiti), 무너짐(壞, bhaṅaga)과 같은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의
   세 단계 찰나(tayo-khaṇā)에 비유될 수 있다.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자연재해가 뒤덮치면 굶주림에 허덕이

던 백성들은 먹고 살기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기존의

봉건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봉건왕조가 들어서는 역사가 주기적

으로 반복되어 왔다. 당 왕조 때의 황소(黃巢)의 난이나, 명 왕조

때의 이자성(李自成), 장헌충(長獻忠)의 난, 청 왕조 때의 태평천국

(太平天國)의 난과 같은 농민 봉기도 따지고 보면 모두 백성들의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유사 이래로 인육(人肉)을 먹었던 사례들이 드

물지 않았던 것도 다름 아닌 먹거리가 없어 굶어죽기 일보 직전

에 몰린 사람들의 궁여지책이었다. 그래서 중국에는 “백성은 음식

을 하늘로 떠받든다(民以食爲天).’라는 속담이 있게 된 것이다. 이

‘먹지 않으면 살수 없다.”라는 자명한 이치는 빨리 문헌에서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지탱한다(sabbe sattā āhāra ṭṭhitikā).”라는 말씀

으로 표현되고 있다.

 

농업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에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먹여 살

리기에 충분한 음식이 생산되고 있으나, 굶주리는 인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다. 한편 북미와 유럽, 아시아의 일부 부유한 국

가들에서는 과식으로 인한 비만, 고혈압, 위암, 당뇨병 등과 같은

이른바 현대문명병이 증대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낭비되는 음

식물 쓰레기 문제도 심각한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는 붓다가 음식에 대해 지녔던 태도를 고찰

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불교의 식문화와 관련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왔지만, 본고는 붓다의 가

르침의 두드러진 특징인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에 입각하

여 초기·상좌부 불교의 식문화를 고찰하고자 한다.

 

II. 단식(斷食)

 

붓다 당시의 인도에서는 단식(斷食)이 해탈과 지혜를 가져온다

는 그릇된 믿음이 만연하였다. 이는 청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정신

에 비해 신체는 악이라고 보는, 즉 신체와 정신의 이분법을 인정

하는 종교들과 주로 관련된다.2)

2) Nanayakkara, S.K(1961-1996) p. 220.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제12번째 경인「마하시

하난다 숫따(Mahāsīhananda-sutta)」에 따르면 고대 인도에는 “음

식을 통해서 청정해진다(āhārena-suddhī).”3)라는 견해를 가지고

단식을 통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던 사문(沙門, samaṇa)과 바라문

(婆羅門, brāhmaṇa)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아지위까(Ājīvika)4)들

은 신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여겨서, 엄격한 단식, 부동자세 취하

기, 목까지 몸을 땅에 묻는 등의 고행(苦行, tapo)을 닦았다고 한

다.5) 이러한 전통은 자이나교로 계승되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특히 단식 수행법은 자이나교 전통의 대표적인 고행이다.6) 자이

나교 전통에서 단식은 적게는 하루에서 많게는 한 달까지 계속되

며, 오래 단식을 하여 죽는 사람도 적지 않다.7) 그래서 보살도 그

러한 인도의 전통에 따라 단식을 실천하였다. 붓다는 악기웻사나

(Aggivessana)에게 자신이 닦았던 단식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3) MN. I, p. 80.
4) 아지위까(Ājīvika) 또는 아지와까(Ājīvaka)는 ājiva(命, 생계, 생활법)와
   ka(지말접미사)에서 파생된 말로 글자 그대로 ‘엄격한 생활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고행자(苦行者, tapassin)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역으로는 폄칭하여 邪命外道라고 하거나 음사하여 阿夷維, 阿耆維,
   阿時婆, 阿時婆迦, 阿耆毗伽, 阿寅婆迦등이라고 한다. 육사외도(六師外道,
   cha-titthiyā)의 하나인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가 창시한
   교단으로, 그는 사람은 발전을 하 든 타락을 하든 거기에는 원인도 없으며
   조건도 없다고 하는 우연론(偶然論)과 숙명론(宿命論)을 제창했다. 즉
   사람의 행위나 운명은 모두 자연계의 운행이 정한 약속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며, 그대로 방치해 두면 수백
   겁을 경과하여 스스로 해탈에 도달한다고 하는 사상이다. 자이나교의
   전설에 따르면, 이 교단은 자이나교의 개조(開祖)인 마하위라(大雄,
   Mahāvīra)의 제자들이 분파한 것이라고 하지만, 불교의 전승에 따르면
   막칼리는 난다왓짜(Nanda Vaccha)의 후계자인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튼
   자이나교와 특히 가까운 교파로서, 아쇼까왕의 비문이나「아르타샤스뜨라
   (Artha-śāstra)」등에도 이 교단에 관한 것이 설해지고 있을 만큼, 불교와 
   자이나교와 함께 후세까지도 유력한 교단의 하나였다.
5) Basham, A. L(1951) pp. 112, 115.
6) 자이나교의 단식에 대해서는 김미숙(2013), pp. 200, 247 참조.
7) 이것을 자이나교에서는 살레카나(sallekhanā)라고 부른다.

 

악기웻사나여, 그런데 나는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었나니 녹두

죽이건 대두죽이건 완두콩죽이건 검은 콩죽이건 그것을 한 움큼씩만

먹었다. 악기웻사나여, 내가 그렇게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자 내

몸은 극도로 여위어 갔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사지는 마치

아시띠까 넝쿨의 마디나 깔라 풀의 마디와 같았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엉덩이는 마치 낙타의 발처럼 되었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등뼈는 줄로 엮어둔 구슬처럼 되었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갈빗대들은 오래된 집의 서까래가 허물어지고 부서지듯

이 허물이지고 부서졌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내 동공 안에서 눈

동자의 빛은 마치 깊은 우물에서 물빛이 깊고 멀리 들어가 보이듯이

깊고 멀리 들어가 보였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머리 가죽은

마치 익지 않은 쓴 호리병박이 바람과 햇빛에 시들 듯이 시들었다.8)

8) MN. I, pp. 245-246.

 

이러한 극심한 단식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보살은

고행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살은 야윈 몸으로는 선

정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전처럼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

어리 음식을 먹었다.9) 그러자 여태껏 보살을 곁에서 시중들던 다

섯 수행자들10)은 그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진하는 것을 포

기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었다고 판단하여 보살 곁을 떠난다.

9)『자따까(Jātaka)』의 인연 이야기(nidāna-kathā) 에 따르면,
   우르웰라(Urvelā)의 세나니(Senānī) 촌락의 장자 세나니의 딸
   수자타(Sujāta)가 보살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다고 한다. (Ja. I, p. 68f;
   Dhp-a. I, p. 71 등) 이러한 사실은「담마빠다 주석서」와「숫따니빠따
   주석서」에도 기술되어 있다.
10) 다섯 수행자들은 안냐 꼰단냐(Aññā Koṇḍañña), 앗사지(Assaji),
    마하나마(Mahānāma), 밧디야(Bhaddhiya), 왑빠(Vappa)의 다섯
    비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보살이 성도하기 전 함께 수행하였고, 성도
    후에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최초로 붓다에게 귀의하였다.

 

이 다섯 수행자들의 행동만 보아도, 당시 인도에는 단식이 지혜

를 가져온다는 그릇된 믿음이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붓다는 단식은 신체적 고통만을 가져올 뿐 깨달음을 얻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에, 나중에 과식을

나무라긴 했으나 단식도 극구 반대하였던 것이다. 붓다의 중도에

입각하여 단식과 과식이라는 극단적인 식습관을 거부하는 것이

초기·상좌부 불교의 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

 

III. 소식(小食) 또는 음식의 적당량을 알기

 

앞서 언급한 대로 단식과 과식은 모두 붓다가 거부한 극단적인

식습관이다. 초기·상좌부 불교에 따르면, 과식의 반대인 소식(小

食) 또는 ‘음식의 적당량을 알기(bhojane mattaññutā)’는 그 자체

로 삼학(三學, tisso-sikkhā)의 하나인 계학에 해당하는 수행(bhāv

anā)의 일부분이다. 빨리 문헌에서 음식의 적당량을 알기는 항상

감관의 수호(indriya-saṁvara)를 강조하는 말씀들과 함께 나타나

고 있다. 이는 과식이 자기제어나 절제(virati)11)가 부족함을 나타

내기 때문에 불선(不善, akusala)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11) 상좌부 아비담마에 따르면, 절제(virati)는 팔정도(八正道,
    ariya-aṭṭaṅika-magga)에서 계학에 해당하는 정어(正語,
    sammāvācā),정업(正業, sammākammanta), 정명(正命, sammājīva)을
    가리키며, 말과 행동과 생계로 나쁜 행위를 엄격히 절제하는 세 가지
    이름다운 마음작용(淨心所, sobhana-cetasika)이다.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의 제39번째 경인「마하앗

사뿌라 숫따(Mahā-Assapura-sutta)」에서는 수행이 17단계12)로

설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음식의 적당량을 알기는 일곱 번째로 등

장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음식의 적당량을 알기는 그 자체로

삼학(三學, tisso-sikkhā)의 한 부분인 계학을 이루며 수행의 일부

분임을 알 수 있다. 감관의 수호를 못하면 음식의 적당량을 알지

못하게 되고, 과식(過食)이나 폭식(暴食)으로 이어진다. 과식이나

폭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누가 보더라도 꼴사납고 경멸할

만한 습관이다.13)

12) 그 17단계는 다음과 같다: ① 양심(hirī)과 수치심(ottappa)을 지님, ②
    몸의 행위를 청정하게 함, ③ 말의 행위를 청정하게 함, ④ 마음의
    행위를 청정하게 함, ⑤ 생계를 청정하게 함, ⑥ 감관의 수호(indriya-
    saṁvara), ⑦ 음식에 적당량을 알기(bhojane mattaññutā), ⑧ 깨어있음에 
    전념함, ⑨ 마음챙김(sati)과 알아차림(sampajañña)을 구족함, ⑩ 조용한 
    장소에서 정좌하고 선정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āni)를 
    제거함, ⑪ 제1선정(初禪, paṭhamajjhāna), ⑫ 제2선정(二禪, dutiyajjhāna), 
    ⑬ 제3선정(三禪, tatiyajjhāna), ⑭ 제4선정(四禪, cattutthajjhāna), ⑮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智, pubbenivāsānussati-ñāṇa), ⑯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cutūpapāta-ñāṇa), ⑰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滅智, 
    āsavakkhaya-ñāṇa). 이 17단계는 종교심을 일으킴으로부터 수행에 들어 차례로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의 경로를 보인 것이다. 이 가운데 ①에서 ⑧까지는 
    계학에 해당하고, ⑨에서 ⑭까지가 정학에 해당하며, ⑮에서 ⑰까지가 혜학에 해당한다.
    (MN. I, pp. 271-280).
13) Tachibana, Shundō(1981) p. 114.

 

제255번 자따까인「수까 자따까(Suka‐jātaka)」에는 과식을 하

다가 소화불량으로 죽은 비구의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다.14)『담마

빠다(Dhammapada)』와『우다나(Udāna)』에서 붓다는 음식의 절제

가 모든 붓다가 설하는 보편적 선임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욕설을 하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계목을 잘 지켜 스스로 억제하라.

먹는 데 절제하고 고요한 곳에 머물며

높은 선정에 마음을 바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15)

15) Dhp. 185게; Ud. p. 43. Anūpavādo anūpaghāto pātimokkhe ca saṃvaro
    mattaññutā ca bhattasmiṃ pantañca sayanāsanaṃ adhicitte ca āyogo
    etaṃ buddhāna sāsanaṃ.

 

붓다는『숫따니빠따(Suttanipāta)』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몸을 수호하고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

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놓

은 것이다.16)

16) Sn. 78게. Kāyagutto vacīgutto āhāre udare yato saccaṃ karomi
    niddānaṃ soraccaṃ me pamocanaṃ.

 

이렇게 붓다가 음식의 적당량을 알기를 누누이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수행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식을 하면 신체적으

로 졸림과 정신적인 나태에 쉽게 빠지게 된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과식으로 인한 신체적 졸림과 나른함은 정신적인

나른함과 나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 진보를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들(五蓋, pañca-nīvaraṇāni)17) 가운데 하

나인 ‘띠나 밋다(thīna-middha)’라고 하는 현상이다.

17) 니와라나(nīvaraṇa)는 nis(밖으로)와 √vr(덮다)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덮어버림’이란 뜻이며, 한역으로는
    蓋라고 한다. 붓다고사(Buddhaghosa)는 “장애의 모임에서는 마음을
    덮어버린다고 해서 장애라 한다(Nīvaraṇagocchake cittaṃ nīvaraṇan ti
    pariyonandhantī ti nīvaraṇa).”라고 설명하고 있다. (As. p. 49) 
   「빠라맛타디빠니 띠까(Paramatthadīpanī-Ṭikā)」는 장애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善法, kusala-dhamma)을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이미
    일어난 선한 법을 지속하지 못하게 막는 마음작용이라고 설명한다.
    니까야에서는 ① 감각적 욕망(貪欲, kāmacchanda), ② 악의(瞋恚,
    vyāpāda), ③ 해태와 혼침(睡眠, 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掉擧惡作,
    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疑, vicikicchā)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ni)로 정형화 되어있다. 상좌부 아비담마는
    여기에 ⑥ 무명(無明, avijjā)을 더하여 여섯 가지 장애(六蓋,
    cha-nīvaraṇani)를 설하고 있다. 처음 다섯은 주로 선정(禪定, jhāna)을
    증득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이고 무명은 지혜(慧, paññā)가 일어나는
    것을 방애하는 장애이다.

 

음식은 그 자체가 물질(色, rūpa)로서 감각적 욕망(欲染, kāmarāga)

의 대상이 되며, 이 감각적 욕망은 중생을 욕계(欲界, kāmādhātu)

에 묶어두는 거친 족쇄인 오하분결(五下分結, pañca-oramb

hāgiyāni-saṃyojanāni)에 속한다. 색계(色界, rūpa-dhātu)와 무색

계(無色界, arūpa-dhātu)의 범천(梵天, Brahmā)은 음식을 먹지 않

는다는 점도 음식이 감각적 쾌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

사한다.

 

『디가 니까야(Digha-Nikāya)』의 제27경인「악간냐 숫따(Agga

ñña-sutta)」에서 붓다는 음식으로 이 세상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

하고 있다. 이 경에 따르면 최초의 지구 거주 존재들의 몸은 마음

으로 만들어졌으며 빛이 나고 있었다. 그들은 기쁨을 먹고 살았으

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오랜 기간이 지난 후 그들은 수면 위의 달

콤한 땅(rasa-paṭhavī)을 맛보고는 탐욕이 생기게 되었다. 그 뒤

그들에게서 갈애가 생겨났으며, 그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 음식을

맛보았다. 그 결과로 그들의 몸은 점점 더 둔탁해져 갔다. 몸에서

는 빛이 사라지고 기쁨을 먹고 살거나 하늘을 마음대로 돌아다니

는 능력도 잃게 되었다고 한다.18)

18) DN.Ⅲ, pp. 84-86.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진화 과정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음식

에 대한 감각적 욕망 때문에 사람들이 옛날에 지니고 있던 것으

로 생각되는 높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음식에 대한 감각적 욕망은 중생을 욕계에 묶어두는

거친 족쇄이며 여기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해탈과 열반은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

러난다.

 

비구들이여, 음식을 철저히 알 때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五欲樂, pa

ñca-kāmaguṇāni)19)에 대한 탐욕이 철저히 알아진다. 다섯 가지 감각

적 욕망에 대한 탐욕이 철저히 알아질 때 성스러운 제자가 그 족쇄에

묶여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그런 족쇄가 없어진다.20)

19)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五欲樂, pañca-kāmaguṇāni)은 형색(色, rūpa),
    소리(聲, sadda), 냄새(香, gandha), 맛(味, rasa), 감촉(觸, phoṭṭhabba)에
    대한 쾌락을 말한다.
20) SN.II, p. 99, “Evam eva khvāhaṃ bhikkhave kabaliṃkāro āhāro
    daṭṭhabbo ti vadāmi. kabaliṃkāre bhikkhave āhāre pariññāte
    pañcakāmaguṇiko rāgo pariññāto hoti. Pañcakāma-guṇike rāge
    pariññāte natthi taṃ saññojanaṃ yena sañño-janena saññutto
    ariyasāvako puna imam lokam āgacjanena saññutto ariyasāvako puna
    imam lokam āgaccheyya.”

 

음식의 적당량을 알면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소욕(少欲, appiccha)과 지족(知足, santuṭṭhi)

과 같은 선한 덕목들도 증장된다. 음식의 적당량을 알기 위해서

는 식사할 때마다 마음챙김(念, sati)21)과 올바른 주의(如理作意, 

yoniso-manasikāra)를 지녀야만 한다. 그래서 붓다는 우리에게 식

사 전에 다음과 같은 경구를 되새길 것을 권하였다.

21) 사띠(sati)는 √smṛ(기억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므로 어원적으로
    ‘기억’의 뜻을 지닌다. 하지만 수행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깨어있는
    마음’을 뜻한다. 이 사띠는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파지하고
    대상에 확립하고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는 것으로 사마타(samatha)와
    위빳사나(vipassanā)를 가능하게 하는 아름다운 마음작용(淨心所,
    sobana-cetasika)이다. 또한 오근(五根, pañc’indriyāni), 오력(五力,
    pañca-balāni), 칠보리분(七菩提分, satta-bojjhaṅg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빨리 문헌의 수행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띠는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을 뜻하는 삼빠잔냐(sampajañña)와 함께 쓰여
    ‘사띠·삼빠잔냐(sati-sampajañña)’의 형태로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음식의 적당한 양을 아는 자가 되리라. 우리는 지혜롭게 숙

고하면서 음식을 수용하리라. 그것은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취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치장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단지 이 몸을 지탱하

고 존속하고 잔인함을 쉬고 범행을 잘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

리는 오래된 느낌을 물리치고 새로운 느낌을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

이다. 우리는 잘 부양될 것이고 비난받을 일이 없이 편안하게 머물 것

이다.22)

22) MN.I, pp. 10, 273.

 

전하는 바에 따르면, 빠세나디 꼬살라(pasenadi kosala)왕은 끼

니마다 양동이 분량의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은 음식

을 잔뜩 먹고 숨을 헐떡거리며 붓다에게 가서 절을 올리고 한 곁

에 앉았다. 붓다는 그 사실을 알고 이러한 게송을 읊었다.

 

사람이 항상 마음 챙기면서

음식에 대해 적당량을 알면

괴로운 느낌은 줄어들고

목숨 보전하여 천천히 늙어가리.23)

23) SN.I, p. 81. Manujassa sadā satīmato, mattaṃ jānato laddhabhojane;
Tanū tassa bhavanti vedanā, saṇikaṃ jīrati āyuṃ pālaya’nti.

 

이 게송을 들은 왕은 바라문 학도 수닷사나(sudassana māṇava)

에게 이 게송을 잘 배워서 자신이 식사를 할 때마다 그것을 외

우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차츰 음식을 줄여 한 접시 정

도의 밥만을 먹게 되고 건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왕은

“금생과 내생의 두 가지 이익으로 그분 세존께서는 나를 연민하

셨구나.”24)라는 감흥어를 읊었다. 주석가는 이에 대해 “호리호리

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 금생의 이익이요, 계가 내생의 이익이

다. 음식의 적당량을 알기(bhojane mattaññutā)는 계의 한 요소이

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25)

24) SN.I, p. 82. Ubhayena vata maṃ so bhagavā atthena anukampi
    diṭṭhadhammikena ceva atthena samparāyikena cā ti.
25) Spk.I, p. 153, “Diṭṭha-dhammikena c’eva atthena samparāyikena cā ti,
    ettha sallekhita-sarīratā diṭṭha-dhammik’attho nāma. Sīlaṃ
    samparāyik’attho, bhojane mattaññutā hi sīlangaṃ nāma hoti.”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식(小食)이 건강

에 이롭다는 것이 동물 실험으로도 증명된 바 있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동물들에게 먹이의 양을 달리하여 생존 기간을 관찰해보

았다. 그러자 먹이를 40퍼센트 줄였을 때 연명 효과가 가장 높았

으며 수명도 1.4배에서 1.6배나 늘었다고 한다. 포식한 원숭이는

털이 빠지고 피부가 쳐지면서 노화가 진행되었으나, 소식한 원숭

이는 털에 윤기가 흐르고 피부에도 탄력이 생겨났다고 한다.26)

26) 나구모 요시모리(2012) p. 26에서 재인용.

 

청 왕조의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세

황제의 경우도, 상차림은 호화롭고 풍성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소식을 실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 황제들은 단명하던 역

대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장수를 누렸다. 적게 먹는 만큼 신진대

사가 느리게 진행되므로 당연히 노화도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27) 전술한대로 붓다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소식이 건

강과 장수에 이롭다는 진리를 설파했다. 빨리 문헌에는 소식을 실

천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되고 있다.

27) 소식을 하는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장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철갑상어이다. 철갑상어는 상당히 적은
    양만을 먹는다고 한다. 덕분에 신진대사가 느려 상당히 느리게 자라는
    종으로, 생후 1년이 지나야 겨우 금붕어 사이즈만큼 성장하고, 약
    20~25년이 지나야 번식이 가능해지는 종이다. 그 대신 노화도 천천히
    되는 종이라 100살까지 사는 개체도 심심치 않게 보고된다.

 

물기 있는 음식이건 마른 음식이건, 먹을 때는 지나치게 포식하지

말라. 비구는 배를 채우지 말고 적당하게 먹어, 마음챙김으로 편력해

야 한다.

네다섯 덩어리를 덜 먹고 물을 마셔 끝내야 한다. 부지런히 정진하

는 비구가 편안히 머물기에 적당하다.28)

28) Th. 982-983게; Mil. p. 407.
    982: Allaṃ sukkhañ ca bhuñjanto na bāḷhaṃ suhito siyā, Ūnudaro
    mitāhāro sato bhikkhu paribbaje.
    983: Cattāro pañca ālope abhutvā udakaṃ pive, alaṃ phāsuvihārāya
    pahitattassa bhikkhuno.

 

상기 게송에서 “네다섯 덩어리를 덜 먹고 물을 마셔 끝내야 한

다(Cattāro pañca ālope abhutvā udakaṃ pive).”라는 말씀은 소식

을 하려면 배의 3분의 2 정도 채워질 만큼 먹고, 나머지는 물을

마셔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곳인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이 수련을 ‘하라노하치부(はら-はちぶ)’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위를 80%만 채운다’는 뜻이다.29)

29) 잰 초슨 베이(2012) p. 190에서 재인용.

 

이와 같이 장수하기 위한 가장 기본은 소식에 있다. 이는 과학

적으로는 물론이고, 세계의 여러 장수촌들의 사례를 통해서도 이

미 입증되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듯이 적은 분량

의 식사에 만족하고 미련 없이 숟가락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자제

력이 곧 장수의 출발점인 셈이다. 소식의 반대인 과식은 비만, 고

혈압, 협심증 같은 심혈관계 질환 및, 당뇨, 암과 같은 성인병의

요인이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의정(義淨)은「남해기귀내

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사대의 몸에 병이 생기는 일이 있는 것은 모두 많이 먹는 일

로부터 일어나고 혹은 힘든 일을 하는 데에서 일어난다. 야식이 아직

소화되기도 전에 아침 일찍 또 먹고 아침식사가 아직 충분히 소화되

지 않았는데 주식을 또 먹는 일을 하면 탈이 생겨 드디어 급성위장병

을 일으켜 병이 발생한다."30)

30)「南海寄歸內法傳」卷3(大正藏54, 223c17-20). “凡四大之身有病生者.
    從多食而起. 由勞力而發. 夜食未洩平旦便飡. 旦食不消午時還食.
    茲發動遂成霍亂.

 

이와 같이 의정도 과식은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라고 보고 소식

을 권장했다. 우리가 마음챙김과 올바른 주의를 통해서 음식의 적

당량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과식을 멀리하고 소식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IV. 비시식(非時食)과 일식(一食)

 

율장에 따르면, 출가자는 하루에 한번, 그것도 오전 중에만 식

사를 하도록 정해져 있다. 이를 비시식계(非時食戒, vikāla-bhojana

-sikkhāpada)31)라고 한다. 이를 어기면 단타죄(單墮罪, pācittiya)

에 해당한다.32) 그러나 어떠한 의미에서 일식(一食)인지에 대해서

는 여러 가지 불분명한 점이 많다. 율장에서 비시(非時, vikāla)는

정오가 지나 해뜨기 전까지로 규정되고 있다.33)

31) 북방불교권에서는 오후불식(午後不食)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빨리
    문헌에는 ‘시간이 아닌 때의 식사나 수용’이라는 뜻의‘vikāla-bhojana’라고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비시식(非時食)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32) Vin. IV, p. 85.
33) Vin. IV, p. 86. “vikālo nāma majjhantike vītivatte yāva aruṇuggamanā.”

 

그런데 여러 문헌들을 검토해보면 초기에는 비구들의 식사에

대해 정해진 규정이 없었던 듯하며,34) 처음에 비구들은 먹고 싶은

대로 먹었던 것 같다.35) 빨리어로 일식은 ‘에까밧띠까(eka-bhattik

a)’나 ‘에까사나보자나(ekāsana-bhojana)’라고 하는데 모두 같은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도 명확한 규정이 없다.

34) Nanayakkara, S.K(1961-1996) p. 221.
35) 예를 들면, MN. I, pp. 124, 438, 448ff.

 

「수망갈라윌라시니(Sumaṅgalavilāsinī)」에는 설령 정오 전에 식

사를 열 번 하더라도 일식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언급이 있고,36) 

「빠빤짜수다니(Papañcasūdanī)」에도 설령 정오 전에 식사를 일곱

번 하더라도 일식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언급이 있는 걸 보면,37)

이 일식의 규정은 단순히 식사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정오 이후

의 식사를 금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 같다.

36) Sv.I, p. 77.
37) Ps.II, p. 97.

 

오늘날 상좌부 불교권의 사찰이나 수행센터에서도 점심식사 이

전에 죽이나 국수 같은 간단한 아침을 먹고 있기 때문에, 초기교

단에서 실제로 식사를 한번만 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붓다가

일식을 권장한 것은 그저 권장사항일 뿐 모든 비구가 다 일식을

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시(非時, vikāla)에 해당

하는 정오 이후라 하더라도, 망고, 갯복숭아, 대추, 바나나, 꿀, 포

도, 연뿌리, 파루사까(phārusaka)로 만든 여덟 가지 음료의 섭취

는 허용된다.38)

38) Vin.I, p. 246.

 

이와 같이 정오 이후에 식사를 하지 않는 계가 비시식계이다.

붓다가 출가자에게 하루 한번, 그것도 오전 중에만 식사를 하도록

권장한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수

행에도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점은『맛지마 니까야(Majjh

ima-Nikāya)』의 제70번째 경인「끼따기리 숫따(Kīṭāgiri-sutta)」

에서 붓다가 밤에 먹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설한

데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나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간다. 비구들이여, 내가 밤에 먹

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하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먹는 것을 삼

가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

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문다고 인식할 것이다.39)

39) MN.I, p. 473.

 

그런데 이 경을 보면 붓다는 처음에 출가자들이 오후에 먹는

것만 금하게 하였고 저녁에 먹는 것은 허락하였다. 원래 하루에

세 번이었던 식사횟수는 먼저 점심을 먹지 않게 되었고, 그 다음

에는 저녁을 먹지 않게 되어 최종적으로 하루에 한번만 먹는 것

으로 정착된 듯하다.40)

40) 공만식(2008) p. 15(주 38).

 

주석서에 따르면, 붓다는 한꺼번에 점심과 저녁을 다 금하게 되

면 약한 비구들에게는 무리가 따를 것이므로 이렇게 점진적으로

금하였다고 한다.41) 이 역시 차제설(次第說, anupubbi-kathā)42)의

일종일 것이다.

41) Mp.III, p. 186.
42) 차제설(次第說法, anupubbi-kathā)이란 ‘순차적인 설법’을 말한다. 붓다는
    이러한 방식의 설법을 통하여 야사(Yāsa)라는 청년을 교화하였으며,
    마찬가지 방식으로 야사의 부모와 친구들을 교화하였다.(Vin.I, pp. 15,
    20; Dhp-a.I, p. 72). 차제설은 시론(施論, dāna-kathā), 계론(戒論,
    sīla-kathā), 생천론(生天論, sagga-kathā)으로 구성된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먼저 시론은 종교인이나 곤궁한 자에게 옷과
    음식을 베풀라는 것이다. 계론은 오계(五戒, pañca-sīlāni)를 지키는
    도덕적인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생천론은 그러한 선업(善業,
    kusala-kamma)의 결과로 사후에는 천상에 태어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처음부터 사성제(四聖諦,
    cattāri-ariya-saccāni)를 설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이 인과법을 알게
    되어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설명하였다. 그것은 흡사
    염색하는 사람이 염색을 할 때, 먼저 염색할 천에 묻은 때나 이전에
    염색된 색을 세탁하거나 표백하여 순백으로 만든 후,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후에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생천론은 당시 인도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었던 사상이므로, 붓다는 이처럼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난해한 교리를
    설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로서 우선 일반적인
    도덕론을 설했던 것이다.

 

재가자처럼 사회적 활동이나 육체적 노동이 필요 없이 절에서

수행과 공부에 전념하는 출가자에게 비시식은 분명히 필요한 식

습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세속에 사는 재가자는 이러한 비시식

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마음껏 먹어도 되

는지 의문이 생긴다.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의 말씀처

럼, 맛난 음식을 좋아하고 감각적 욕망을 채우는 일은 범부들의

주된 관심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43)

43) Mahasi Sayadaw(1998) p. 71.

 

하지만 수행을 하고자 결의한 재가자는 어느 정도까지 비시식

을 닦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서 재가자들도 재일(齋日, uposatha)44)

에 팔계(八戒, aṭṭha-sīlāni)를 지키거나 수행센터에서 수련하

는 동안에는 출가자와 똑같이 비시식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렇게 재일에 지키는 계를 통틀어 우빠와사(upavāsa)라고 한다.

44) 재일(齋日)이라 옮긴 우뽀사타(uposatha)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비구의 포살과 재가신자의 포살이다. 비구의 포살은 보름마다
    비구들만이 모여 행하는 승가내의 행가를 뜻한다. 반면에 재가신자의
    포살은 매월 6일 또는 4일에 팔계(八戒, aṭṭha-sīlāni)를 지키며 보내는
    날을 뜻한다.

 

비시식은 현대의학에 의해서도 그 실효성이 입증되고 있다. 많

은 의사들은 저녁에 먹은 음식은 잘 소화되지 않는다는 점에 의

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저녁에는 에너지 대사활동이 뚝 떨어지므

로 많은 량의 식사를 하게 되면 소모하고 남는 에너지를 지방으

로 축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이나 점심때는 푸짐하게

식사하고, 저녁에는 약간만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중국에는“아침은 잘 먹고 점심은 배불리 먹고 저녁은 조금만

먹는다(早餐吃得好, 中餐吃得饱, 晚饭吃得少).”라는 속담이 있다. 서

양에도 “아침에는 왕처럼 먹고 점심에는 황제처럼 먹고 저녁에는

거지처럼 먹어라(Eat breakfast like an emperor, lunch like a pri

nce and dinner like a beggar).”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건강을 위

해서는 저녁을 먹지 않거나 먹더라도 적게 먹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에 비슷한 속담이 있는 것도 단지 우

연의 일치만은 아니며, 비시식이 건강에 미치는 효능을 경험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V. 마음챙김 식사

 

대승불교권에서는 출가자들이 절에서 직접 음식을 조달하고 조

리를 하다 보니 지금의 상좌부 불교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불교의 식문화가 발달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사회의 웰빙 붐과 맞

물려 이 불교의 식문화가 ‘사찰음식’이라는 형태로 사회에 소개되

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특징으로 가름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한 연구자가 이미 지적 했듯이, 사찰음식은 웰빙에만 너

무 치중하여 음식의 내용물 그 자체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하

다.45) 그런데 초기·상좌부 불교에 따르면,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

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는 인간은 외부에 의해서가 아니

라 오직 자신의 갈애(taṇhā)에 의해서만 구속된다고 늘 강조하는

붓다의 근본 사상과 연관이 있다.

45) 이자랑(2013)은 최근의 웰빙 붐에 편승하여 형식에만 치우치고 있는
    국내의 사찰음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사찰음식의 본질을 불교 본연의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서 찾고 있다.

 

우리가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음식이 어떻게 분석되고 있는 지

를 살펴보면 이점은 더욱 분명해진다.「위방가(Vibhaṅga)」에 따

르면, 음식은 소조색(所造色, upādāya‐rūpa)46)에 속하기 때문에

도덕적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무기(無記, avyākata)에 해당한

다.47)동일한 이유에서 음식은 세간(世間, lokiya)에 해당한다.48) 그

래서 음식 그 자체는 선(善, kusala)도 아니고 불선(不善, akusala)

도 아닌 그냥 물질(色, rūpa)49)의 하나일 따름임을 아는 것이 매

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음식은 육체를 부양하는 객관적 대상

일 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덕적 성질을 띠지 않으

며 우리가 음식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먹는 가하는 주관적 측면

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마음챙김(念, sati)을 지니고 먹으면

음식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조건일 뿐이지만, 마음챙김 없이 먹으

면 음식은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래서 초기교단의

출가자는 시주받은 음식은 맛있는 것이든 맛없는 것이든 기꺼이

먹었다. 마하깟사빠(Mahā-kassapa)는 문둥병 환자가 발우 안에

밥을 담아 줄 때 그의 문드러진 손가락이 안에 떨어졌을 때 조금

도 역겨워하지 않고 그대로 먹었다고 한다.50) 그 자체로는 가치중

립적인 음식을 호불호(好不好)의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 먹기 위

해서는 마음챙김을 항상 지녀야 한다. 마음챙김이 없으면 식사를

빠르게 하게 되고, 혀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樂受, sukha-ved

an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갈애가 일어나는 것을 방치하여 과식

을 하기 쉽다. 이와 반대로 마음챙김 식사는 맛에 대한 갈애를 방

지하고 소식을 유도함으로써 건강에 도움을 준다. 마음챙김 식사

는 천천히 먹는 식사법, 즉 슬로푸드(slow food)51)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6) 상좌부 아비담마에 따르면, 물질(色, rūpa)은 모두 28가지의 물질이
    있으며, 이들은 크게 사대(四大, cattāri-mahā-bhūtāni)와 24가지
    소조색(所造色, upādāya‐rūpa)으로 구분된다. 사대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들이 여러 형태로
    조합되어 작은 것은 미세한 먼지에서부터 큰 것으로는 큰 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을 구성한다. 그것은 ① 지계(地界, paṭhavī-dhātu),
    ② 수계(水界, āpo-dhātu), ③ 화계(火界, tejo-dhātu), ④ 풍계(風界,
    vāyo-dhātu)이다. 24가지 소조색은 사대로부터 파생되었거나 사대에
    의지해서 생긴 물질의 현상들을 말한다.
47) Vibh. p. 430. “Kabaḷiṇkāro āhāro avyākato. Tayo āhārā siyā kusalā
    siyā akusalā siyā avyākatā.”
48) Vibh. p. 436. “Kabaḷiṇkāro āhāro lokiyo. Tayo āhārā siyā lokiyā siyā
    lokuttarā.”
49) 음식을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로 분류할 경우 물질(色, rūpa)에
    포함된다. 물질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사대(四大,
    cattāri-mahā-bhūtāni)이고, 둘째는 이 사대가 조합하여 이루어진
    물질들로, 소조색(所造色, upādāya‐rūpa)이라고 한다. 이 소조색은 모두
    24가지인데 다시 열 가지 모임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그것은
    감성(pasāda), 대상(gocāra), 성(bhāva), 심장(hadaya), 수명(jiīvita),
    음식(āhāra), 제한(pariccheda), 암시(viññatti), 변화(vikāra),
    특징(lakkhaṇa)이다. 이 가운데서 사대와 음식까지 18가지를 구체적인
    물질(nipphanna-rūpa)이라하고, 제한, 암시, 변화, 특징의 열 가지를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이라 한다. 또한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사대와 색(色, rūpa), 향(香, gandha), 미(味, rasa), 자양분(ojā)의 여덟
    가지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의 아위닙보가(avinibbhoga)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은 항상 서로 묶여서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인 대상에
    현현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양분을 여덟 번째로 한 것’이란 뜻의
    오자앗타마까(ojaṭṭhamaka)라든가 ‘순수한 팔원소’라는 뜻의
    숫다앗타까(suddhaṭṭhaka)라는 등의 용어로도 나타난다. 음식을 온(蘊,
    khandha)으로 구분하는 경우 단식은 색온(rūpakkhandha)에 속한다.
    처(處, āyatana)로 구분하는 경우 음식은 색처(色處, rūpāyatana),
    향처(香處, gandhāyatana), 미처(味處, rasāyatana), 법처(法處,
    dhammāyatana)에 포함된다. 계(界, dhātu)로 구분하는 경우 음식은
    색계(色界, rūpā-dhātu), 향계(香界, gandha-dhātu), 미계(味界,
    rasa-dhātu), 법계(法界, dhamma-dhātu)에 속한다.
50) Th. 1054-1056게.
51) 슬로푸드(slow food)는 패스트푸드(fast food)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만들고 먹는 음식이나 식습관을 가리킨다.

 

마음챙김 식사는 사념처 수행(四念處修行, satipaṭṭhāna-bhāvan

ā)에서 신념처(身念處, kāya-satipaṭṭhāna)에 해당한다. 그러한 의

미에서 게걸스럽게 먹거나, 걸어가면서 먹거나, 책이나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먹는 행위들은 모두 마음챙김 식사와는 거리가 먼

잘못된 식습관이다. 이렇게 먹으면 먹는 행위를 알아차리지도 못

하고, 영양섭취도 제대로 되지 못하며, 포만감의 신호가 대뇌에

미쳐 도달하기도 전에 과식을 하게 된다.52) 반면 대뇌가 인식할

수 있게 천천히 먹으면 과식할 일이 없다. 틱냣한(Thich Nhat Ha

nh)은 마음챙김 식사의 공덕을 이렇게 설명한다.

52) 잰 초슨 베이(2012) p. 173ff.

 

"우리가 마음챙김을 지니고 식사를 하면, 우리는 다른 중생들과의

상호관계를 자각하게 되고, 이러한 자각은 우리 마음속에 연민을 지니

도록 해준다. 우리가 연민을 지니고 식사를 하면, 행복이 일어난다."53)

53) Nhat Hanh, Thich(2005) p. 51.

 

사실상 마음챙김 식사는 ‘올바른 주의(如理作意, yoniso-mānasi

kāra)’54)를 지니고 식사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식사를 할 때 올바른 주의를 지녀야 하는 지는 전술한 대로 붓다

가 설명하였다. 즉 지혜롭게 숙고하면서 식사를 할 때 즐기기 위

해서도 아니고, 취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치장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단지 이 몸을 지탱하고 존속하고 잔인함을 쉬고 범행(梵

行, brahmacariya)을 잘 지키기 위해서임을 지혜롭게 숙고하면서

먹는 것이다.55)

54) 빨리어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는 요니소(yoniso)와
    마나시까라(manasikāra)의 합성어이다. 요니소는 yoni(모태)의 탈격으로
    ‘근원적으로, 올바르게, 이치에 맞게’를 뜻하며, 마나시까라는
    mano(마음)의 처소격인 manasi와, √kṛ(하다, 만들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마음에 만듦, 주의’를 뜻한다. 그래서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는 사려 깊은 성찰이나 올바른 주의를
    뜻한다. 한역으로 如理作意라고 한다. 그리고 그 반대말인 아요니소
    마나시까라(ayoniso-manasikāra)는 사려 깊지 못한 성찰이나 주의를
    가리킨다. 한역으로는 非如理作意라고 한다. 니까야에 나오는 용례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은 올바른 주의를 통해서
    마침내 ‘태어남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으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라고 지혜로 분명하게 꿰뚫어 보았다(Atha
    kho bhikkhave Vipassissa Bodhisattassa yoniso-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 Bhave kho sati jāti hoti bhava-paccayā
    jātīti).”(DN.II, p. 31) “비구들이여, 나는 올바르게 주의하고 지혜롭고
    바르게 노력하여 위없는 해탈을 증득하였고 위없는 해탈을
    실현하였다(Mayhaṁ kho bhikkhave yoniso manasikārā yoniso
    sammappadhānā anuttarā vimutti anuppattā anuttarā vimutti
    sacchikatā).”(SN.I, p. 105) 이렇게 니까야에서는 주로 사려 깊은
    성찰이나 올바른 주의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감각기관들을 통해 맞부딪치는 현상들을 받아들여서
    선(善, kusala)과 불선(不善, akusala)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마음작용으로 쓰이고 있다. 이를 분명히 하려면 먼저
    자와나(javana)라는 용어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와나는 √ju/jū(빨리
    달리다)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인데, 니까야에서는 재빠른
    지혜(javana-pañña)나 재빠른 백조(javana-haṃsa) 등과 같이 ‘재빠름,
    신속’의 사전적인 뜻으로만 쓰인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한
    기능으로서, 대상이 무엇이라고 결정되고 나서 일어나는 일련의
    인식과정에 해당하며, 그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대상을 향해 달리는
    일련의 마음들(보통은 종류가 같은 일곱 가지이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와나의 과정(javana-vīthi)은 도덕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선한 마음(善心, kusala-citta)과 불선한 마음(不善心,
    akusala-citta)이 일어나기 때문이다.(하지만 아라한의 경우는 예외이다.
    왜냐하면 아라한에게 자와나는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대상이 마음에 나타나면,
    선하거나 불선한 자와나의 과정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평범한 사람은
    적을 만나면 증오가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현명하고
    관대한 사람은 적에 대해서도 자애를 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와나
    과정에서 올바른 주의를 적용하여 불선한 자와나가 되지 않고 선한
    자와나가 되도록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55) AN.I, p. 114.

 

또한『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의「뿟따맘사 숫따(Pu

ttamaṁsa-sutta)」에서 붓다는 사막을 건너는 도중 식량이 떨어진

부부가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그 고기로 배고픔을 달래며 사막을

건너는 비유를 들고 있다. 붓다는 이 비유를 통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의 극한 상황에 몰린 부모가 애지중지하는 자식의 살(puttamaṁsa)

을 먹듯이, 우리도 음식을 수행을 위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56) 동시에 어떠한 음식을 먹느냐 보다는 어떻

게 음식을 먹는가가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56) SN.II, pp. 98-99.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 자식의 살이 다른 중생들의 희생을

나타낸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다른 중생들의 고통과 죽임에 기초하고 있다는 냉혹한 현

실을 인정해야 한다.57) 대부분의 사람들이 맛있다고 여기는 고기

(maṁsa)와 어육(maccha-maṁsa)을 맛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

접 그 중생들을 죽이거나 누군가가 대신 죽여줘야 한다.

57) Kim, Han-sang(2012) p. 45.

 

채식만 고집한다고 해서 우리가 살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농산물이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기

까지 수많은 생명체들이 농부의 쟁기 아래에서 죽으며, 농산물을

생산하고 보관하는 과정에서도 벌레, 쥐, 새, 멧돼지 등의 중생들

이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58) 그래서 에드워드 콘즈(Edward Co

nze)가 고찰한대로, 채식을 하든 육식을 하든, 우리가 살아있는 동

안 먹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살생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59)

58) Nyanaponika Thera(2006) p. 5.
59) Conze, Edward(2001) pp. 62-63.

 

우리는 식사 전에 음식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수많은 생명체들의 희생과 죽임을 통해서 음식이

비로소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게 되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면, 우리

는 음식을 소중히 대하게 되어 오직 수행을 위해서 적당한 양만

먹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주의를 통한 마음챙김 식사

이다.

 

VI. 채식과 육식

 

앞서 언급한 채식과 육식도 중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생명을 죽이지 않고서는 고기와 어육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원

칙적으로 모든 불교도들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겠지만, 붓다는

제자들에게 채식을 강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붓다는 살생의 행

위 자체를 비난하였지 이미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비난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60) 더군다나 모든 음식을 탁발에만 의존

하던 인도의 경우 출가자는 보시하는 대로 받아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서 채식만 집착해서는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출가자가 음식을 따지고 고르

기 시작했다면 교단의 존립은 바닥에서부터 흔들렸을 것이다.61)

그러나 자신의 눈으로 죽이는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죽

였다고 듣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죽인 것이라고 의심이 가지 않는

고기와 어육(三淨肉, tikoti parisuddha maccha maṃsa)은 먹을 수

있었다.62) 또한 인습상 혐오스럽다고 인정되거나 사회적으로 문

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고기, 코끼리고기, 말고기, 개고기, 뱀고

기, 사자고기, 호랑이고기, 표범고기, 곰고기, 하이에나고기 등은

먹을 수 없었다.63)

60) Harvey, Peter(2000) p. 159.
61) Conze, Edward, 앞의 책, p. 95.
62) Vin.II, p. 197.
63) Vin.I, p. 252.

 

초기·상좌부 불교에서는 비구들이 걸식(乞食)이나 청식(請食)에

의존하여 식생활을 해결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찰음식, 일본

의 쇼진요리(精進料理), 중국의 자이판(斋饭)과 같은 채식위주의

독특한 불교 식문화가 형성될 수 없었다.64)

64) 공만식, 앞의 글, p. 7. 신공 스님(2007, p. 21)에 따르면, 초기교단에서는
    걸식과 청식의 식생활로 인하여 육식이 상황에 따라 수용되었으나,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보살의 자비정신과 생명존중사상 그리고
    불성사상이 강조되면서 승가의 식생활은 큰 변화가 나타났다고 한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남이 죽인 동물의 고기를 먹는 사람은 그

살생의 과보 절반을 떠맡는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초기·상좌부

불교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제246번째 자따까인「떼로와다 자따까

(Telovāda-jātaka)」에서 니간따 나따뿟따(Nigaṇṭha Ñātaputta)는

자기에게만 공양하기 위해 요리한 고기를 그런 줄 알고 먹었다고

붓다를 비난하였다.65)

65) Ja.II, pp. 262-263.

 

그러나 붓다는 과거 보살이 읊었던 게송을 인용하여 살생의 죄

업은 그 행위자에게 있지 육식(maṁsa-bhojana)을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66)『숫따니빠따(Suttanipāta)』에서

과거불인 깟사빠 붓다(Kassapa Buddha)도 육식이 비린 것이 아

니라 불선행이 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67)

66) Ja.II, p. 377.
67) Sn. 239-252게.

 

이와 같이 초기·상좌부 불교에서는 음식 그 자체가 선도 불선

도 아닌 무기일 따름이며, 먹을 때의 마음가짐 즉 의도(思, cetan

ā)에 따라 도덕적 가치가 결정된다고 본다. 마하시 사야도도 강조

하였듯이, 만약 우리가 맛에 탐착하여 먹는다면 채식이나 육식이

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68) 마음챙김(念, sati)이나 올바른 주의(如

理作意, yoniso-manasikāra)없이 먹게 되면 음식의 종류에 상관없

이 갈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68) Mahasi Sayadaw(2006) p. 97.

 

그러므로 채식 그 자체가 영적인 청정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은 열 가지 족쇄(十結, dasa-saṃyojanāni)의 하나인 계금취(戒

禁取, sīlabbata-parāmāsa)의 한 예일 뿐이다.69) 그렇다고 해서 우

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육식을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도

에 입각해서 볼 때 육식이든 채식이든 어느 한쪽으로의 과도한

경도는 수행자가 따라서는 안 되는 극단이다. 특히 육식은 생명체

와 직결되기 때문에 채식을 먹을 때보다 더 많은 마음챙김과 올

바른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도 이렇게 설하

고 있다.

69) Harvey, Peter(2000) p. 160.

 

"살생을 금하는 계를 철저히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먹는

음식에 세심히 주의하여 우리가 어떠한 살생의 행위에 의해 더럽혀지

기 않도록 해야 한다."70)

70) Mahasi Sayadaw, 위의 책, p. 41.

 

그러므로 육식을 하더라도 지나치게 육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절제가 없는 과도한 육식은 각종 질병과 불선업(不善業, akusalakamma)

을 불러올 수 있다. 레디 사야도(Ledi Sayadaw)도 지적했

듯이, 채소와 유제품을 위주로 하고,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한 약

간의 육식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된

다.71)『숫따니빠따』에 따르면, 과거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질병 밖에 없었으나, 인간이 많은 가축들을 도살한 까닭

에 98가지나 되는 질병이 돌게 되었다고 한다.

71) Ledi Sayadaw(2002) p. 28.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질병밖에는 없었다. 그

런데 많은 가축들을 살해한 까닭에 98가지나 되는 질병이 생기게 된

것이다.72)

72) Sn. 311게. Tayo rogā pure āsuṃ: icchā, anasanaṃ, jarā, pasūnañ ca
    samārambhā aṭṭhānavuti-m-āgamuṃ.

 

레디 사야도는 이 경을 근거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육식을

하는 것은 불선한 행위이며, 특히 소와 같은 가축은 인류에게 노

동과 유제품을 제공하기 때문에 소고기를 먹는 것은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육식을 할 때 올바른 주의

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함을 뜻한다. 

 

「담마빠다 주석서(Dhammapadaṭṭhakathā)」에는 육식에 너무

탐닉하다가 받는 불선한 과보가 묘사되어 있다. 사왓띠(Sāvatthi)

에 55년 동안 도살업에 종사해온 백정(goghātaka)이 살고 있었다.

소를 도살해서 고기를 팔고 자신도 매일 고기반찬을 곁들어 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집에 남겨둔 고기를 다른 사람에

게 팔았기 때문에 그날은 고기반찬이 없었다. 그 사내는 고기 없

이는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외양간으로 달려가 살아

있는 소의 혀를 칼로 베어다 불에 구워 밥을 먹었다. 사내가 소의

혀를 깨무는 순간 자신의 혀도 깨물어버렸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

리다가 사내는 무간지옥(Avīcī-niraya)으로 떨어졌다.73)

73) Dhp-a. III, p. 332ff.

 

제537번 자따까인 마하수따소마 자따까(Mahāsutasoma-jātak

a) 에는 육식을 너무 즐기다가 급기야 사람을 죽여 인육(人肉)을

먹게 된 식인귀(食人鬼) 뽀리사다(Porisāda)의 이야기가 실려 있

다. 이와 같이 육식을 과도하게 즐기면 불선업을 짓는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VII. 결론

 

유기체를 유지하는데 음식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동물

들의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들은 쉴 틈 없이 먹이를 찾고 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주

석가도 세상의 사람들은 하루의 음식을 얻기 위해 다양한 직종의

일을 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설명하고 있다.74) 생계를 꾸

린다는 것은 결국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며, 이

렇게 음식을 구하는 일은 모든 중생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괴로

움이다.

74) Spk. II, p. 27, “Kabalīṅkārāhāre hi nikantiṃ katvā sītādinaṃ
    purakkhatā sattā āhar' atthāya muddā‐gaṇanādīni kammāni karontā
    anappakaṃ dukkhaṃ nigacchanti.”

 

우리는 일생 동안 신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아무리 잘 먹여도 신체는 물리는 법 없이 다시금 배고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붓다는『담마빠다』에서 배고픔이야말로 가장

고약한 질병이라고 말씀하였다.75)

75) Dhp. 203게, “Jighacchāparamā rogā saṇkhāraparamā dukkhā etaṃ
    ñatvā yathābhūtaṃ 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

 

하지만 음식은 유기체가 필요로 하는 자양분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로 이루어진 유기체의

원만한 성장과 존속을 위해서는 덩어리 음식(段食, kabaliṅkārāhāra)

이라 불리는 물질적 음식(色食, rūpāhāra) 외에도 접촉의 음식

(觸食, phassāhāra), 의도의 음식(思食, manosañcetanāhāra), 식의

음식(識食, viñāṇāhāra)과 같은 정신적 음식(名食, arūpino-āhāra/

nāmāhara)들이 필요하다고 붓다는 말씀하였다. 이것이 빨리 니까

야와 아비담마에서 설해지는 ‘네 가지 음식(四食, cattāro-āhāra)’76)

이다.

76) 네 가지 음식(四食, cattāro-āhāra)은 덩어리 음식(段食, kabaḷiṅkārāhāra),
    접촉의 음식(觸食, phassāhāra), 의도의 음식(意思食,
    manosañcetanāhāra), 식의 음식(識食, viññāṇāhāra)을 말한다. ① 덩어리
    음식은 덩어리로 된 물질의 음식으로 육체의 몸을 지탱해준다. ②
    접촉의 음식은 즐거운 느낌(樂受, sukhā-vedanā), 괴로운 느낌(苦受,
    dukkhā-vedan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
    adukkhamasukhā-vedanā)의 세 가지 느낌(三受, tisso-vedanā)을
    가져오는 접촉(觸, phassa)으로 느낌(受, vedanā)을 지탱하여 준다. ③
    의도의 음식은 삼계(三界, tisso-dhātuyo)에서 재생연결(結生
    paṭisandhi)을 가져오는 의도(思, cetanā)로 3가지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지탱하여 준다. ④ 식의 음식은 재생연결의 순간에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을 가져오는 식(識, viññāṇa)으로 정신과 물질 즉 오온(五蘊,
    pañcakkhandhā)을 지탱하여 준다. 덩어리 음식은 네 가지 물질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생기는 물질(rūpa-samuṭṭhāna)을 지탱해 주고,
    나머지 세 가지 음식은 그 각각과 함께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지탱해준다. 이렇게 네 가지 음식은 각각의 영역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개별 존재를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반복되는 윤회(輪廻, saṃsāra)의 원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수마나빨라 갈망고다(Sumanapāla Galmangoda) 교수도 지적했

듯이,77) 불교에서 물질적 음식 외에 세 가지 정신적 음식을 설한

이유는 사람에게는 정신이 물질보다 더 중요하고 복잡하다는 사

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 음식을 도외시

하고 물질적 음식에만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해서는 안 된다. 별미

를 맛보기 위해서라면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미식가, 식이요법을

마치 만병통치의 주술인 양 맹신하는 건강편집증 환자, 칼로리 과

잉섭취의 대식가, 그리고 병적인 허영심으로 체중감량을 추구하여

배를 주리고 있는 신경성 무식욕증 환자들은 모두 단순히 유기체

를 위한 연료에 불과한 음식의 의미를 과장하고 있는 것이며 스

스로의 어리석음(癡, moha)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78)

77) Galmangoda, Sumanapāla(2006) p. 52.
78) 아잔 뿐나담모(2011) p. 35.

 

이와 마찬가지로 채식이나 육식도 전적으로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며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것

이다. 중요한 것은 음식의 내용물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는 우리

의 태도와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초기·상좌부 불교의 식문화에 담

긴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다면 이른바 사찰음식도 그저 현대인들

이 ‘잘 먹고 잘사는’ 정도의 의미로 언급하는 하나의 고급스러운

웰빙 문화에 지나지 않게 되며,79) 음식을 자식의 살(putta-maṁs

a)처럼 여기며 오직 범행을 닦기 위한 목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붓

다의 말씀을 망각하는 것이다.

79) 이자랑(2013) p. 59.

 

중도의 스승인 붓다는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는 항상 마음챙김

과 올바른 주의를 지녀야만, 음식의 소중함을 깨닫고 금생의 행복

이라는 세간의 목적과 열반이라는 출세간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

여하는 필수품으로 음식을 간주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러므로 초기·상좌부 불교의 식문화는 ‘마음챙김 식사’를 통한 ‘음

식의 적당량을 알기’와 ‘소식’으로 요약되며, 그 궁극적 지향점은

건강이라는 세간의 행복은 물론, 열반이라는 출세간의 행복을 이

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