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깨달음의 사회화’에 관련한 몇 가지 고찰/조성택

실론섬 2017. 2. 6. 15:44

불교학연구 제24호 (2009. 12.)

‘깨달음의 사회화’에 관련한 몇 가지 고찰

조성택/고려대학교 교수

 

I. 들어가는 말

   I-1. 문제의 소재

   I-2. ‘깨달음의 사회화’

II. 왜 참여하지 않는가?

   II-1. 조계종의 역사적 정체성

   II-2. 禪的 깨달음의 초월적 성격에 관하여

III. 개혁종단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의 성격과 한계

IV. 결론: 法의 불교(dhammic Buddhism)와  業의 불교(kammic Buddhism)

Ⅳ. 나가며

 

[요약문]

초기불교 이래 중생제도(衆生濟度)는 불교의 근본 사명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러한 사명은 대승불교 전통에 와서 더욱 강조되어 심

지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할 때까지 나 자신의 깨달음을 미루겠다”

고 하는 극단적인 선언으로까지 이어졌다. 중생제도가 중생들의 ‘안

녕(hita)과 행복(sukha)’을 포함하여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만

큼 중생제도의 실천만큼 분명한 깨달음의 사회화는 없다고 할 수 있

다. 그런 만큼 깨달음의 사회화는 교리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불교

의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점을 두고 불교는 내외

로부터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왔다. 전통시대 동아시아에서 불교의

‘비사회적 성격’에 대한 유학자들의 비판은 논외로 한다하더라도 근

대 이후에도 불교는 사회적 참여에 대한 소극성으로 비판을 받아왔

다. 그런 한편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문제는 불교 내부의 문제제기

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불교가 출세간적 가치에 매몰되어 세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의와 사회적 모순, 그리고 중생들의 일상적 고통을 

돌보고 있지 않다는데 대한 자기반성이며 비판인 것이다.

 

본고에서는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사회참여에 대한 불교의 소극성의 

연원을 교리적·역사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나아가 불교적 사회참여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론적 틀을 제안하고자 한다.

 

I. 들어가는 말

 

I-1. 문제의 소재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언명은 별도의 입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

큼 자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전통에서 독각(獨覺)혹은 연

각(緣覺)의 존재가 상정되고 있는 것은 법(法, dhamma)의 보편

성에 대한 불교인들의 신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법(傳法)을 통

해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였던 고타마 붇다

(Gotama Buddha)의 역사적 의미를 차별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고타마 붇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깨달음을 성취한(혹은 성취할) 사람들

은 있을 수 있지만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 것은 고타마 붇다

가 최초이며 바로 그 점에 고타마 붇다의 위대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불교의 역사적 시작이었다.

 

초기불교 이래 중생제도(衆生濟度)는 불교의 근본 사명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러한 사명은 대승불교 전통에 와서 더욱 강조되어 

지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할 때까지 나 자신의 깨달음을 미루겠다”

고 하는 극단적인 선언으로까지 이어졌다. 중생제도가 중생들의 ‘안

녕(hita)과 행복(sukha)’을 포함하여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만

큼 중생제도의 실천만큼 분명한 깨달음의 사회화는 없다고 할 수 있

다. 그런 만큼 깨달음의 사회화는 교리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불교

의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점을 두고 불교는 내외

로부터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왔다. 전통시대 동아시아에서 불교의 

‘비사회적 성격’에 대한 유학자들의 비판은 논외로 한다하더라도 근

대 이후에도 불교는 사회적 참여에 대한 소극성으로 비판을 받아왔

다. 그런 한편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문제는 불교계 내부에서 제기

되어 온 문제이기 하다. 요컨대 불교가 출세간적 가치에 매몰되어 

세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의와 사회적 모순 그리고 중생들의 일상

적 고통을 돌보고 있지 않다는, 자기반성이며 비판인 것이다.

 

1960년대 이래 동남아시아 그리고 인도에서의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 새로운 불교운동

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나라는 그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목표와 지향

점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깨달음의 사회성과 현세적 의

미를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 촌락, 국가 그리고 궁

극적으로는 전 인류를 포함하는(sarvodaya) 해방/해탈의 추구를 일

상적 깨달음(mundane awakening)이라고 하여 집단적, 현세적, 정

치적 관점에서 깨달음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나중에 별도로 상

술하겠지만 한국에서도 ‘깨달음의 사회화’는 1994년 출범한 당시 개

혁종단의 중요한 개혁과제로서 추진되기도 하였다.

 

불교가 그 출발점에서부터 그리고 그 이후 다양한 교리를 통해 중

생제도를 그 근본 사명으로 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그 실천의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불교가

교리적으로 구세(救世)와 중생제도를 스스로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또 교리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불교가 깨달음을 사회화 하지 않는다고 하는 내외의 비판은 단지 구

세(救世)에 대한 실천을 촉구하는 내용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 당

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실천을 촉구하는 것을 넘어 보

다 근본적으로 실천을 불가능하게 하는 장애로서 불교 교리 그리고

불교적 깨달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만약 그

러한 비판이 정당하다면 깨달음의 사회화에 대한 불교적 내용이라

할 중생제도 혹은 구세(救世)는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을 창출할

수 없는 종교적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 비판은 불

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인가?

 

본고는 이러한 의문에 답을 찾는 한 과정에서 마련된 것이다. 다

시 말해 본고의 관심은 이러한 비판이 왜 제기되고 있으며, 또 이러

한 비판이 어떤 점에서 유효하고 어떤 점에서 유효하지 않은지를 살

펴보는데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논점이 되고 있는 ‘깨달음의 사회화’

가 의미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I-2. ‘깨달음의 사회화’

불교 전통에서 ‘깨달음’(覺, bodhi)의 용례는 매우 다양하다.1) 

보리수 아래에서 고타마 붇다가 체득하였던 ‘최상의 바른 깨달음’

인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에서부터 대승보살의 서원인 ‘발보리심’

(bodhicittotpada)에서의 ‘깨달음’ 그리고『대승기신론』에서와 

같이 시각(始覺)의 네 단계로서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과 같은 수행과정의 단계적 깨달

음이 있다. 요컨대 열반 혹은 해탈과 동의어로서 수행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최종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으며, 시각(始覺)

의 네 단계에서처럼 수행의 과정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1) 깨달음을 의미하는 또 다른 한문불교 용어로 悟가 있다. 悟는 동아시아 선종에서 
   흔히 보이는 용례이지만 본고의 논의에서는 覺 혹은 ‘bodhi’와 특별히 구분할 필
   요가 없을 것 같다.

 

한편 불교교학 전통에서는 깨달음(bodhi)을, 그것을 구성하는 요

소 즉 보리분법(bodhipaksa)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리분법이 의미하는 것은 수행의 최종적 정점으로서 깨달음을 설

명하기보다 수행의 관점에서 깨달음을 구성하는 요소를 통해 깨달

음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로

버트 지멜로(Robert M. Gimell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2)

2) Robert Gimello, “Bodhi” Encyclopedia of Buddhism, ed., by Robert Buswell, 
  Macmillan (Thomson & Gale), 2003, vol. 1, pp. 51-52.

 

"깨달음을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 즉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과정

으로 이해하는 것은 깨달음이 그것에 이르는 수단과 결코 분리된 하나

의 [독립된] 목적이거나 깨달음의 실현이 수행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사실은 불교 전통에서 [깨달음

의] 실현과 수행이 일체(unity)라는 것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혹은 수행

이 [깨달음의] 실현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의 방식으로 분명하게 언급되

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깨달음을 전적으로 [수행과는 상관없는] 자

발적인(autonomous), 자체발생적인(self-generated), 그리고 완전

히 선험적인(transcendent) 경험으로 여기려는 경향에 대한 일종의 주

의/경계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실제로 이 점은 [불교적]깨달음을 일

종의 ‘경험’ ─순수경험, 종교적 경험 혹은 신비적 경험 등─으로 이해하

는, 근대적이며 다분히 서구적인 관점을 차단하는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지멜로는 수행은 과정일 뿐만 아니라 바로 깨달음을 구성하는 내

용적 요소라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적 깨달음을

어떤 특수한 ‘종교적 체험’과 같은 선험적·초월적인 경험으로 간주

하는 근대적 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본고의 주제인 ‘깨달음의 사회

화’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깨달음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의 깨달음이

며 따라서 최종적 깨달음만이 아니라 그에 이르는 수행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깨달음을 논의의 대상으로 할 것이다.

 

한편 깨달음을 사회화한다고 할 때 ‘사회화’의 의미는 어떤 것인

가? 위 글에서 나는 다소 의도적으로 불교전통에 있어 깨달음의 사

회화의 의미를 중생제도 혹은 구세(救世)라고 단정하였지만 근현

대 사회에 있어 불교의 사회참여 혹은 깨달음의 사회화를 논의하면

 

서 불교를 비판하는 경우 그 ‘사회화’의 맥락은 중생제도라든가 구세

(救世)의 의미맥락과는 다소 다른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물론 

중생제도나 구세(救世)와 전적으로 다른 의미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판자들이 의미하는 ‘사회화’는 주로 근대적 관점의 사회윤리 혹은 

실천철학적 맥락에서의 ‘사회화’이다. 요컨대 선불교의 경우를 예를 

든다면 길희성교수는 선에서의 정신적 자유와 윤리적 실천이 양립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선적 깨달음의 초월성이 사회적 

윤리 실천의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다.3) 그런가 하면 윈스

톤 킹(Winston King)은 상좌부불교이든 대승불교이든 개인적 해탈

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불교는 소홀하

든가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4)

3) 길희성 “민중불교, 선, 그리고 사회 윤리적 관심,”『종교연구』제 4집, 1988, 28쪽. 또한 
   길희성「禪과 민중해방:임제의현의 사상을 중심으로」에서도 마찬가지의 물음을 제기
   하고 있다.
4) Winston King, “Is There a Buddhist Ethic for the Modern world?” Eastern Buddhist vol. 
   25, no. 2, 1992, pp. 1-13. Also, Winston King, “Buddhist Self-world Theroy and 
   Buddhist Ethics,” Eastern Buddhist 22, vol. 2, 1989, pp. 14-26.

 

그 외 불교의 출세간적 가치 지향 때문에 불교에서의 사회철학

은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들의 주장하는 내용

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비판 할 예정이지만, 그들이 ‘깨달음의 사

회화’의 문제를 사회윤리나 실천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정

당할 뿐 아니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의 사회화 문제는 지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며 그런 만큼 오늘날 현대사회

에서의 사회적 철학적 관심이 사회화의 구체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논의하는 ‘사회화’는 중생제도나 구세(救世)와 같

이 포괄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이념을 오늘날 사회에서 구체

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사회윤리와 실천철학적 관심이라고 봐도 좋

을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본고에서 논의할 깨달음의 사회화는 한 마디

로 불교적 가치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현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 혹은 열반과 같은 개인적이며 초세간적 가치의

사회적 의미를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불교적 가치를 사회

에 유용하게 적용하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고(苦) 무아(無我) 자비

(慈悲) 지혜(智慧) 등과 같은 불교 교리를 사회적 담론으로 전환하

려는 노력과 실천을 깨달음의 사회화의 의미로 이해하겠다는 것이

다. 그런 점에서 본고에서 논의 할 깨달음의 사회화란 곧 통상적 의

미의 참여불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한편 깨달음의

사회화 혹은 불교의 사회 참여란 현실의 문제인 만큼 현실과 현장을

떠나 순전한 이론적 논의만으로는 공허해지기 쉽기 때문에 본고에

서는 현대한국불교를 그 주된 논의의 대상으로 하려고 한다.

 

다음 장에서는 우선 현대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사회

적 참여에 대한 소극성의 원인을 살펴보고, 나아가 1994년 개혁종단

이 기치로 내걸었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대한 비판적/반성적

검토를 통해 불교의 사회참여를 위한 몇 가지 이론적 틀을 제시하려

고 한다.

 

II. 왜 참여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우려하고 있듯이 한국불교는 사회정의

(social justice), 인권, 사회복지, 사회적 약자, 통일문제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최근 들어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타종교

의 사회참여에 비해서는 그 규모나 체계성 면에서 여전히 부족한 것

이 사실이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적극적으로 불교의 사회적 

참여를 선도하는 일부 출재가자들에 대해 냉담하거나 냉소적인 분

위기가 여전히 종단 엘리트 그룹의 주류적인 분위기라는 사실이다. 

왜 참여하지 않을뿐더러 냉소적인가? 이러한 분위기를 현상적으로

만 본다면 종단 내의 파벌과 권력 다툼의 부산물로 이해할 수도 있

겠지만 그러한 이해는 국외자의 피상적인 관찰과 인상비판에 지나

지 않을 것이다. 사회참여에 대한 종단의 ‘소극성’은 근본적으로 다

음 두 가지 측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조계

종의 역사적 정체성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禪的 깨달음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지는 문제이다.

 

II-1. 조계종의 역사적 정체성 5)

5) 이하 제 II장 1절의 “조계종의 역사적 정체성”은 참여불교재가연대 창립10주년 
   기념 평가토론회에서 발표하였던 토론문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자료집
   『新대승불교운동10年의 성찰과 새로운 모색』, 참여불교재가연대, 2009, pp. 
   90-93. 참조.

 

20세기 초 이래 시작된 한국 근현대불교사의 맥락에서 대한불교

조계종의 역사적 정체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20세기 초 한국불교는 

조선 500년의 질곡을 벗어나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 하에서 다

양한 개혁과 실험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모색과 시행착오

는 결국 불교의 근대적 유용성과 한국불교의 정체성, 이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다.6) 근대라는 새로운 종교 환경 속에서

[전통적 종교인] 불교의 유용성을 증명하는 것, 그리고 근대 민족주

의와 국가주의의 세례를 받은 일본불교로부터 한국불교의 차별성

을 확보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지상과제

였다. 당시 불교계는 새로운 사회에서도 [전통적 종교인] 불교가 유

용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프로그램을 모색

하였다. 이런 모색과 실험의 과정에서 전통을 스스로 부정하는 과감

한 개혁적 제안들도 등장하였다. 만해의 대처육식, 염불당 폐지, 근

대적 승려교육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대중불교

주장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문명개화’와 ‘국권상실’로 대

표되는 당시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고 불교는 그 급변하는 사회에 능

동적으로 적응하고자 하였다. 근대의 후발주자인 한국 불교의 입장

에서 기독교와 일본불교는 경쟁과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종

교의 사회적 유용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일종의 선진적 모델이기도

하였다.

6) 필자의 관점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리조나 주립대학의 박포리 교수 또한 한국 근대불
   교의 과제를 ‘social viability’와 ‘national identity’ 두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Pori Park,
   The Modern Remaking of Korean Buddhism: The Korean Reform Movement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and Han Yongun’s Buddhism (1879-1944), Ph.D. dissertation,
   UCLA, 1998.

 

한편, 일본불교로부터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또한 앞의

유용성 문제와 함께 포기할 수 없는 숙제였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일본 불교는 메이지 정부의 ‘폐불훼석’이라는 정치적 박해

를 겪으면서 빠른 시일동안 천황에 충성하고 국가 이념에 봉사하는

국가주의 불교로 변모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첨예하게 드러

난 식민자과 피식민자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한국의 불교인들은 일본

불교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간파하게 되었고 더 이상 일본 불교를 단

순히 근대불교의 한 선진모델로서만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한국 근대불교의 두 가지 과제 즉 ‘근대적 유용성 확보’와 ‘정체

성 확립’은 양립하기 어려운 상호 모순적 관계로 인식되게 된다. 당시 

선진적 근대불교의 모델로 인식되었던 일본불교를 따르자니 한국불

교의 정체성을 잃게 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다보면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유용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근대적 

유용성’과 ‘정체성’이란 과제는 상호배타적 관계로 인식되고 실제 실

천의 현장에서 두 과제에 대한 절충과 조화의 시도가 없지는 않았으

나 지속적 형태의 운동으로 이어지기에는 내적 추동력이나 구체적 

방향성이 부족하였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근대적 유용성을 추구하면서도 일본의 

국가주의적 불교와 구별되는 한국적 근대불교의 모델을 생각할 수 있

겠지만 당시의 한계적 상황에서 그러한 제3의 모델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지난 오백년의 질곡이 너무 깊

었으며 불교계의 인재와 재원은 부족했고 피식민이라는 사회적 여건

도 불교에 우호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대적 유용성’과 ‘한국적 정체성’이 대립적으로 설정되는 이런 상태

가 채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해방을 맞게 되었고 이제 이 문제는 대처

와 비구의 갈등 문제로 단순화 되어 버린다. 그리고 대처와 비구의 문

제는 분쟁의 과정에서 다시 민족불교 vs. 왜색불교라는 구도로 인식되

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근대적 유용성’과 ‘한국적 정체성’의 두 과제가 민족불교와 왜색

불교의 구도로 왜곡·변질되는 과정에서 조계종은 정통복고의 길을

택함으로써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정통 불법의 수호자’로서의 자신

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근대

적 유용성을 모색하던 한국 근대불교의 다양한 모색과 실험들은 친

일과 민족, 혹은 파계 대처와 청정 비구의 대립적 구도 하에서 역사

의 전면에서 일단 사라졌던 것이다.7)

7) 지금까지 불교근대화에 대한 조계종단의 노력이 전혀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
   나 근대 당시 불교의 근대적 유용성 확보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되었던 불교근
   대화의 방향, 이를테면 근대적 지식과 불교의 결합, 출가승 중심의 전통적 교단의 변화
   등과 같은 획기적이며 전면적인 불교근대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조
   계종단의 근대화 노력은 단편적이며, 부분적인 대증적 요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는 힘
   들다고 본다. 근대불교의 출발점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오히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요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

니었다. 사회적 유용성이란 문제는 어쩌면 종교 본연의 기능이며 또

한 근대이후의 사회에서 더욱 더 요구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전통 교단인 조계종단이 현대 사회의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적절히 대응해 왔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고도로 분업화 되고 있는 전문성 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법(佛法)의 ‘정통’을 수호한다는 미명하에 ‘전통’을 전유하고 고착

화하는 종단의 일부 행태가 현대 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유용성을

가로막는 주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II-2. 禪的 깨달음의 초월적 성격에 관하여

한편, 사회 참여에 대한 조계종단의 ‘소극성’ 문제는 근대불교이래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되어 온 조계종의 역사적 정체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깨달음을 세간적 윤리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으로 잘못 이해해 온 측면에서 기인하는 ‘소극성’이다. 사

실 윈스톤 킹(Winston King) 교수나 길 희성 교수는 불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혹은 사회 윤리적 관심의 결여)는 원천적으로 불교 교리 

자체, 특히 ‘깨달음의 초월성’에 기인하는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8)

8) 이 문제에 관해 두 사람의 다음과 같은 논문을 참조 할것. 길희성, “민중불교, 선, 그리
   고 사회 윤리적 관심,”『종교연구』제 4집, 1988, pp. 27-40.
   Winston King, “Is There a Buddhist Ethic for the Modern world?” Eastern Buddhist 
   vol. 25, no. 2, pp. 1-13. 한편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졸고 “Buddhism and Society: 
   On Buddhist Engagement with Society,”[Korea Journal, Vol. 42 No. 4 Winter 2002] 
   에서 이 두 사람의 견해를 비판한 바 있다.

 

길희성 교수는 질문의 형식으로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의 사회윤리적 

행위와 실천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9)

9) 길희성 상게서

 

(1) 불교는 문제의 해결을 선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데서 찾는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불교는 근본적으로 존재론

적 성향을 띤다. … 불교의 문제해결이 과연 윤리적 문제 그 자체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교의 “존재론적 성향”, 즉 “선

도 악도 아닌 무아의 깨달음”은 윤리적 문제를 해결 했다기보다는 

融解시켜버린 것은 아닐까?

 

(2) 正과 邪, 善과 惡, 美와 醜, 涅槃과 生死, 佛陀와 衆生, 그 밖에

세상을 특징짓는 모든 대칭적 개념들은 실재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미혹된 마음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공은 사물의 진실한 존

재방식을 의미한다. … 여하한 고정된 관념이나 입장도 완전히 떠난

공이 어떻게 진지한 윤리적 관심과 실천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공

의 초월적 지혜는 우리들의 모든 도덕적 확신과 실천들을 무의미하

고 공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3) 禪的 깨달음의 경지에 우리들과 똑같은 강도의 괴로움과 정

열과 확신을 수반하는 윤리적 관심이 존재할 수 있을까? … 色과 空,

此岸과 彼岸 사이의 絶對的 同一性이야말로 禪으로 하여금 진지한

역사적 선택과 실천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다. … 깨달은

禪師의 눈에 모든 色이 空으로 비친다면 윤회하는 경험세계는 어떤

부분은 惡으로서 부정하고 어떤 부분은 善으로서 선택할 근거를 그

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4) 공의 지혜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고정관

념과 독선적 선입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는 있다. 하지만

지혜가 우리의 전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도덕적 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동기를 줄 수도 있을까? 공은 우리에서〈 무엇으로부

터의 자유〉는 줄 수 있겠지만 …〈 무엇을 위한 자유〉는 줄 수 없을

것 같다.

 

(5) 공과 자비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공은 중생의 실재하는

고통을 위한 실재적인 자비심을 融解시켜버리는 것은 아닌가? … 고의 

지혜에 근거하고 있는 불교의 자비가 사회윤리적 실천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공과 사회윤리적 실천사이의 관계에서 야기되

는 難題의 해결을 대승적 자비에서 찾으려 할 때 우리가 다시 한번 풀어

야 할 심각한 문제의 일단인 것이다.

 

앞서 각주에서 언급한대로 나는 졸고 “Buddhism and Society: on 

Buddhist Engagement with Society,”[Korea Journal, Vol. 42 No. 

4 Winter 2002]를 통해 길희성 교수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비판을 

한 적이 있다. 비판의 요지는 불교의 사회적 무관심은 불교의 발생

과 그 전개 과정의 ‘역사적’ 문제이지 교리 자체에서 기인하는 문제

가 아니며 불교 교리 자체는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사회적 관심과 

실천의 이론적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10) 또한 불교적 깨달

음 특히 禪的 깨달음은 길희성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의 

초월적 형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隨緣的’ 성격은 현상세계

에서 드러나는 깨달음의 또 다른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현상세계란 

상식의 세계로, 선악, 정사가 구별되는 세계이다. 따라서 윤리적 善

을 초월해야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善은 깨달음에 이

르는 필수적 요건이자 깨달음이 드러나는 바이기 때문이다. 초월해

야 할 것은 도덕적 행위 자체가 아니라 집착이다.

10) Sungtaek Cho, 전게논문 p. 126.

 

한편 길희성 교수는 자신의 논의에 대해 “[이] 문제는 선불교인들이 

사회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사실적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점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들이 갖는

관심은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논의가 현실불

교에 대한 분석이 아닌 이론적 분석이라고 하고 있다.11) 그러나 내가

보기에 길희성 교수의 ‘이론적’ 분석은 ‘이론’ 자체에 기반하고 있는

분석이라기보다 현실 분석에 기초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

회참여에 소극적인 불교역사 특히 한국근현대불교의 역사적 현실이

길희성 교수의 ‘이론적’ 분석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12) 근대

일본불교가 선불교의 교리를 적극적인 현실참여─물론 전쟁을 정당

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의 철학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최근 역사의 경우를 보더라도 선불교의 교리 자체

가 사회참여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다. 따라서 사회참여에 대한 선불교의 소극성을 지적하고 있는 길희

성 교수의 주장은 본인의 전제에도 불구하고 ‘이론적 분석’이라기보

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이 그의 분석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일종

의 역사적 해석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11) 길희성, “민중불교, 선, 그리고 사회 윤리적 관심,” p. 29.
12) 가다머가 Truth and Method 에서 말한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정확히 자신의 선입관
    이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텍스트의 의미가 실제로 우리
    에게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게함”이라고 하는 것과 그 의미를 같이 하고 있다. Hans-
    Georg Gadamer, Joel Weinsheimer, and Donald G. Marshall, Truth and Method. 2nd,
    rev., edition, Continuum Impacts, pp. 390-398. 이상의 부분은 이정환, “敎化로부터 평
    상에서의 초월로: 주희의 중용 재해석”(미발표 원고)에서 재인용.

 

그런 점에서 볼 때 현실참여에 대한 한국불교의 소극성은 ‘깨달음

의 초월성’과 같은 불교 교리의 내재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종단 스스로 현실과 관계를 맺는 방식 즉 역사적 인식의 문제에서 비

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III. 개혁종단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의 성격과 한계

 

현실문제에 대한 참여는 종교의 부차적 기능이 아니라 본연의 기

능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현실문제에 대한 적 

극적 참여는 선택이 아닌 의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러한 의무는 불교인들만의 의무가 아니라 모든 진지한 시민과 종교

인의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나 사회윤리, 철학

과는 구별 되는 불교적 참여 방식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

가 우리가 지금부터 논의해야할 핵심적 문제가 될 것이다. 우선 1994년 

개혁종단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의 성격과 

한계를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

 

개혁종단의 지도부가 시동을 건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당시 한국

불교가 처하고 있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자기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국외적으로는 동 유럽 사회주의 붕괴에 따른 세계화의 가속화, 국

내적으로는 산업화에 따른 물질적 풍요와 함께 인간 소외, 정의적 윤리

의 실종, 환경 문제 등 한국사회가 처하고 있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

는 가운데 이러한 “한국 사회의 사회적 환경은 불교계로 하여금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회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3) 이러한

현실인식과 함께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행태에 대한 진솔한 반성을

한다.14)

13) 송월주,『깨달음의 사회화 운동』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사서실, 불기2504(1996), 
    6쪽. 한편 개혁종단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관한 자료집과 기사들을 제공해준 법보
    신문의 이재형 기자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14) 상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단 내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한국사

회의 여러 가지 사회적 요구를 외면하거나 최소한 방기해왔다. 근현대

불교사를 보더라도, 한국불교는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으

며 그 후유증으로 발발한 불교정화는 이후 끊임없는 종단분규로 이어졌

고 정권이 바뀔 때 마다 호국불교라는 미명 아래 세속적인 정권과 결탁

하여 수많은 비리를 남기기 일쑤였다.

 

사회적 현실을 개선하고자하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 그리고 뼈아

픈 자기반성의 기반 위에서 개혁종단은 다음의 여섯 개 과제를 깨달

음의 사회화 운동의 구체적 사업으로서 제시한다.15)

15) 상게서, p. 7, 그리고 이 6개의 과제를 다시 재구성하여 사회불평등문제, 환경문제, 
    통일문제, 비인간화현상의 문제 등 4개 과제로 정리하기도 한다.

 

─ 도덕성 회복과 경제정의실현에 참여하는 과제

─ 통일시대에 대비하는 과제

─ 환경보존을 위한 대안 마련의 과제

─ 노동과 인권 사업

─ 소외된 계층을 위한 지원 사업

─ 복지사업

 

당시 불교계의 일반적 의식으로 볼 때, 아니 15년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보더라도 이러한 과제 설정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 

다. 근현대 한국불교사를 통 털어 이러한 ‘비불교적’ 과제를 종단이 

제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개혁종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과제에 대해 “매우 중요한 사

회적 과제인 동시에 불교적 과제이기도하다”고 하여 그들의 불교인

식이 전통적 불교인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

하고 있다.16) 깨달음, 불성, 자비, 무아 등 전통적인 불교적 과제를 

그들은 도덕성, 경제정의, 통일, 환경, 노동, 인권, 소외계층 등의 키

워드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17)

16) 상게서, p. 7.
17)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방식의 과제 설정─즉 불교 고유의 본체론적 담론
    을 사회 현상적 담론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교의 사회참여를 논의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개혁종단은 전통적 의미의 깨달음을 ‘가치의 내면화’라고 규정하

면서 이러한 소극성은 대승불교 전통의 한국불교가 극복해야할 대 

상으로 보고 깨달음의 경험을 우리 사회에 적극적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불교의 사회참여는 “대승불교 본래의 취지에 따른 것”이라고 

하여 자신들의 운동에 불교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18) 종단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부분과 전체라는 연기적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보고 깨달음이 실천되어야 할 곳은 “불교공동체 내부를 포

함한 우리 현실 그 자체”이며 따라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시민

사회 운동이자 현실참여 운동이며 정치참여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19)

18) 상게서, p. 12.
19) 상게서, p. 24.

 

이러한 자기규정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상술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러한 규정이 실천의 방향성에 대한 선언적 표현을 넘어 정언적(定言

的) 표현이라면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러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뒷받침하는 불교적 교리에

관해 “사상적 측면에서는 연기사상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보살도의

정신으로 그것을 실천”20)한다고 하여 현실인식의 복잡성이나 설정하

고 있는 방대한 과제에 비해 다소 ‘단순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물

론 연기사상이나 보살사상이 ‘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리에 대

한 좀 더 구체적인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20) 상게서, p. 25.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개혁종단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정확

한 현실 인식과 철저한 자기반성의 기반 위에서 시작된 운동이었음

에도 불구하고 15년이 지난 지금 평가를 한다면 실패한 운동이었다

고 할 수 밖에 없다. 운동의 의의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고 그 진보적 안목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지속성이나 사회적

파급력의 측면에서 볼 때 일정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개

혁종단 또한 이러한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운동을 주

창한지 3년차에 들었을 당시 개혁종단은 이 운동이 이론과 실천의

양 측면에서 모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 원인으로서 다

음의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21)

21) 상게서, pp. 7-9.

 

첫째,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다. 운동의 필

요성에 대해서는 대다수 공감하면서도 불교의 사회참여를 매우 한

정된 영역, 즉 포교나 사회복지 활동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

해하고 있다.

 

둘째, 불교의 주요 경전들 특히 대승경전들이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과 관련된 사상적 근거를 풍부하게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를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하게 재해석하고 의미를 재구성해 내지 못

하고 있다.

 

셋째, 인문학 분야에 한정된 한국불교학의 한계로서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위한 불교적 관점의 사회과학적 이론이나 체계를 제공해주

지 못하고 있다.

 

넷째, 오늘날의 사회문제에 대한 전문적 지식의 부족할 뿐 아니라 

사회문제와 불교적 처방을 적절하게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섯째,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위한 구체적 전략과 방법론이 부

재하거나 충분하지 못하다.

 

이상의 다섯 가지 자평(自評)은 내용상 서로 중첩되는 점도 있는 바, 

이를 다시 정리하면 첫 번째의 경우는 종단 내 소수 엘리트 승려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이자22) 근대 이래 현실참여에 소극적

이었던 한국불교계의 역사적 한계이며 나머지 네 가지 경우는 본고

의 핵심적 주제로서 불교의 본체론적 담론(ontological discourse) 

을 어떻게 사회 현상적 담론(phenomenological discourse)으로 전

환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와 관련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

기에 관해서는 제 4장 결론 부분에서 자세하게 논하게 될 것이다.

22) 이 점은 유승무 교수가 출범 초기에 이미 지적하고 있다. 유승무「깨달음의 사회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사회과학적 측면」『깨달음의 사회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제 6회 한일불교 학술대회, 한국교수불자연합회(1996년12월 10일), p. 34.

 

한편 당시 불교학자들 또한 개혁종단의 사회참여 운동에 공감하

면서 제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그 가운데 본고의 논의와 관

련하여 다시 음미해볼만한 몇 가지 중요한 논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경준 교수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초기

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고찰 한 뒤 마지막 결

론에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 앞으로 풍요로운 결실을 맺고 오랜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이념에 있어서나 실천방법론에 있어서

나 무엇보다도 불교적 정체성(Identity)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라

하면서 ‘주의 환기’를 하고 있다.23) 이념과 실천방법에 있어 불교적

정체성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박경준 교수가

실제로 의도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박교수의 지적은 앞서 언급

한대로 개혁종단이 이 운동을 스스로 시민운동, 정치참여운동, 현실

참여운동으로 규정하는데 대한 일종의 주의 환기인 셈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경준 교수의 글은 불교적 정체성의 유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이 문제점만 지적한 채 끝을 맺고 있다.

23) 박경준,「깨달음의 사회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 : 교리사상적 측면」「깨달음의 사회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제 6회 한일불교 학술대회, 한국교수불자연합회(1996년12월 10
    일), p. 33.

 

아마도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의욕적이며 적극

적인 반응을 보였던 학자는 유승무 교수인 것 같다. 유승무 교수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 “‘위로부터의 운동’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운동이 실제로 얼마나 큰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고 하면서 운동의 대

중성, 조직성, 지속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24) 그러면

서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불교계의 다양한 공식 비공식 단체의 동

참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적극

성을 보이고 있다.25) 한편 유교수는 박경준교수의 다소 조심스러

운 입장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대한 개

념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는 “… 우리사회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불교의 본래 

목적이자 당위이다. 불교는 한국사회의 역동성의 일부로 자리 잡

고 있으며, 따라서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매개로 한국사회의 담론

구조에 참여해야 한다“26)고 하여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불교

적 영역을 넘어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는 개혁

종단 지도부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24) 유승무 전게논문, p. 33.
25) 상게논문, pp. 43-44.
26) 상게논문, p. 39.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대해 다소 방법론적 거리를 두면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학자는 허우성 교수이다. 허우성 교

수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그 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선우도량을 거론하면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

지만 그 제기하는 내용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관한 것이다. 허

교수는 선우도량이 주장하는 “깨달음의 역사화 또는 사회화라는 말

은 전통불교에 대한 재해석이거나 새로운 해석이”라고 보고 있다.27)

이 점은 “깨달음의 사회화”에 대해 불교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

는 박경준 교수, 유승무 교수 등과는 다른 관점이다. 허 교수는 선우

도량이 제시하는 새로운 불교에 대해 상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는 “선우도량의 불교는 그렇다면 재해석된 불교, 특

히 ‘역사’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된 것이다. 해석에 대해서는 상이

한 평가가 가능하다. 하나는 불교사를 해석사로 간주하여 모든 재해

석을 시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재해석이 불교의 근본주의

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28)

불교사에 대한 허 교수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이 글만을 통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나 자신은 불교사를 해석의 역사로 보고 있으며 그렇게

볼 때만이 불교전체의 역사를 보다 정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

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여러 번 언급한 바가 있기

때문에 더 거론하지 않겠다. 한편 본고의 논의와 관련하여 허 우성

교수는 매우 중요한,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선 허 교수는 선우도량이 주창하고 있는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이

나 조화가 그리 쉬운 일인가”라고 자문하면서 그것이 어려운 이유로

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갈등양상을 언급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

과 같다.

27) 허우성「 허우성의 근대불교 인물탐구: 선우도량」법보신문 (1996년 5월 13일, 지령
    362호)
28) 상게 기사.

 

첫째, 영원의 현재에 대한 경험과 역사의식의 갈등이다. 개인의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영원한 현재는 과거의 업이나 미래의 투기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자족, 충만 그리고 법열의 경지이다. 그러나 역

사의식이란 개인 보다는 민족이나 인류, 충만 보다는 결핍이다. 여

기에 영원의 현재가 주는 법열과 역사 인식이 주는 결핍 사이에 날

카로운 대조가 있다. 이는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

이다.

 

둘째, 자재를 희구하는 인간이 어떻게 타율의 영역으로 빠져 들어

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역사참여는 반드시 나를 타율적 영역에 

맡기게 되는 측면이 있다. 이런 타율적인 부분은 법열이 가져다주는 

자재와 대조된다. 통일문제든 환경문제이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나를 맡겨야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자재하고 싶은 인간의 속성과, 타율을 감내해야 하는 일 사이의 갈

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도 불교의 참여주의가 해결해야할 

문제의 하나이다.

 

셋째, 앞서 두 문제와 마찬가지로 출발은 인식론적인 것이지만 결

과는 두 문제와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것이다. 절대주의를 버리면서

도 역사계에서 어떻게 윤리 가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사회에 역사의 완성은 아니더라도 진보가 가능할 것인가? 역사의 진

보에 대한 이해방식과 진보를 실현할 수 있는 의견의 일치를 우리사

회 내에서 도출 할 수 있을 것인가? 선우도량이 관심을 갖고 있는 많

은 문제는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과연 현실정치에 참여

할 수 있을 만큼 세간과 인간의 언어를 믿을 수 있을까? 세간을 삼계

화택이라 불러온 불교의 전통적인 태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회의나 부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개인

적 법열과 충만이 역사의식을 잠재울 것이다.

 

허우성 교수는 요컨대 깨달음의 초월성과 무상·고·무아로 표상

되는 세간과의 본질적 차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허 교수는 불

교의 전통적 관점과 가치관에서 볼 때 세간 곧 사회참여는 ‘떠나야

할 곳’에 더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며 ‘버려야 할 세간적 가치’에 집착

하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근본적인 가치관이나 교리와 상충하는 것

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허 교수의 이러한 관점은 사회참여

에 대한 소극성이 불교적 가치관과 교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

고 있는 일군의 학자들의 주장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윈스톤 킹(Winston King)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29)

29) Wiston King, “Is there a Buddhist Ethic for the Modern World?”, Eastern Buddhist,
    vol. 25, no. 2, p. 1.

 

"대승이든 상좌부이든 불교 전통에서 ‘완성’(pāramitā) 혹은 깨달음은

선한 윤리적 행위를 추구하는 일상적 동기를 초월할 때만이 획득될 수

있다. 상좌부 전통에서 어떤 특정 목적이나 결과를 염두에 둔 행위는 본

질적으로 세간적 오염(samsaric impurities)에 물든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적 선”(moral goodness)을 원하거나 “선한 결과”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제한적 시공간’(필자 주: 즉 세간 혹은 윤회의 세계)의

재화를 욕망하는 것으로 이 현세에 대한 집착으로 깊이 오염된 것이기

때문이다."

 

윈스톤 킹 이외에도 바드웰 스미스(Bardwell L. Smith), 리차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등 초기불교 연구자들, 그리고 동아

시아 불교 연구자인 조셉 키타카와(Joseph M. Kitakawa) 조차도 

사회참여나 개혁은 불교 본래의 전통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그

들에 따르면 붓다의 관심은 개인을 변화하게 하는데 있었으며, 현실

세계를 변화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영원히 떠날 것을 가

르쳤다는 것이다.30) 허우성 교수의 생각이 이들의 주장과 같은 것인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허 교수가 제기하고자하는 것은 불교가 사회

참여를 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대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0) Christopher S. Queen, “Introduction,” Engaged Buddhism: Buddhist Liberation 
    Movements in Asia, Christopher S. Queen and Sallie B. King, eds., SUNY Press, 
    1996, pp. 17-18.

 

과연 그럴까? 불교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유일한 가치는 모든 

욕망의 무화(無化)라 일컫는 ‘열반’일뿐 일까, 그리고 이 열반이라는 

절대적 가치 하에서 어떠한 세간적 노력이나 도덕적 추구도 무가치

한 것일까? 윈스톤 킹의 언명대로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구제불가

능한 것”31)이라는 것이 현실세계에 대한 유일한 불교적 입장일까?

31) (Unsalvability of the space-time order) Winston King(1992), pp. 3-4.

 

내가 볼 때 이러한 입장들은 불교사를 통해 등장하였던 다양한 불

교 교리 가운데 ‘깨달음’ 혹은 ‘열반’ 등과 관련한 교리를 지나치게 특

권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불교적 깨달음 혹은 열반

의 세계를 ‘절대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와 세간의 간

극 또한 절대화하고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깨달음과 수행의 일체

성을 이미 언급한바 있으며 또 로버트 지멜로를 인용하여 “깨달음을

수행과는 상관이 없는 완전히 선험적인(transcendent) 경험으로 여

기려는 경향에 대한 주의/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윤리적 행위는 윈스톤 킹의 주장대로 깨

달음을 얻기 위해 초월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할 필수조건이다. 불교 전통에서 가장 근본교리로 일컬어지는 팔정

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팔정도는 최종적인, 열반의 세계(nibbanic

world)로 나아가기 위해 세간적 세계(samsaric world)에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윤리적 덕목들로서 윤리적 행위와 윤리적 행위를 기반

으로 하는 명상 수행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윈스톤 킹이 상

좌부전통을 언급하면서 세간에서의 모든 윤리행위를 곧 집착과 동

일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열반을 절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세간에 대한 지나치게 고식적인 이해도 문제가 있다고 본

다. 허우성 교수는 삼계화택을 인용하면서 “세간과 인간의 언어”에

대한 불교전통의 강한 불신을 언급하고 있다.32)

32) 허우성 전게 기사.

 

세간(samsāra, 혹은 생사윤회)은 초기불교경전의 하나인『 사문

과경』에 잘 나타나고 있듯이 고대 인도사회의 세계관으로 인생의 고

(苦)를 설명하는 한 개념이다. 불교적 맥락에서도 세간이란 영원한

고(苦)의 세계로서 피해야할 대상인 반면, 그 짝 개념인 열반은 추

구해야할 궁극적 가치의 세계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버려할 것’으로서 세간(samsara) 그리고 ‘추구해야 할 것’

으로서 열반이라는 양극화된 개념을 고대인도적 세계관이 아닌 오

늘날 우리의 세계관으로 재해석할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세간과 

열반을 개선해야할 ‘현실세계’와 추구해야할 ‘더 나은 세계’라는 관

점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나는 불교사를 통해 발전해 온 세간과 열반의 다양한 의미 층위와 

그 짝개념의 동적(動的)인 의미 진화를 이해한다면 충분히 가능하

다고 본다. 사실 불교사에서 세간과 열반이라는 개념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미로 정의되어 왔다. 열반을 ‘특수한 심적 상태’로 이해하

는 것으로부터 본래적 열반을 강조하는 ‘불성’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

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상대 개념으로서 세간의 

의미 또한 그에 상응하면서 진화해 왔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전통에

서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하여 세간과 열반의 본원적 

동일성을 강조하였으며 대승의 새로운 종교적 이상(理想)이라 할 

보살의 윤리적 행위는 세간에서의, 세간을 위한 행위라는 점이 특별

히 강조되기도 하였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허우성 교수가 불교의 사회참여가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갈등을 “심리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서 사회 문제에 대한 불교의 소극성을 불교적 가치관과 교리에 내재

하고 있는 어떤 본질적 성격으로 보고 있는 다른 학자들과 구분된

다. 다시 말해서 허우성 교수가 이들 갈등이 심리적이라고 하는 것

은 불교의 사회참여가 불교적 가치관에서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든지 

혹은 비불교적 행위라고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택의 문

제’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허 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심리적 문제’라는 것을 보다 적극적으

로 해석한다면 그 세 가지 갈등은 전(全) 불교전통을 관통하는 본질

적인 것이라기보다 불교전통이 역사 속에서 보여 온 한 경향성 그리

고 그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국불교에 대한 현실 진단을 의

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적극적 해석이 가능하다면 나

는 허 교수의 관점과 현실진단에 어느 정도 동의 할 수 있다. 불교사

는 분명히 ─대소승을 막론하고─ 깨달음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

고 깨달음의 추구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한편, 세간적 가치를 무

상(無常)한 것으로 여기고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순수한 영

적 전통(spiritualism)을 한 주요 흐름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

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초기불교에서 나타나는 주된 흐름이지만 대

승불교 전통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33)

33) 아마도 최근의 예로서는 성철의 ‘돈오돈수’의 주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대승에 있어
    서 깨달음의 절대화 경향에 대해서는 졸고「 法과 業: 초기불교의 사회철학적 이론을
    위한 시론」『, 한국불교학』제 34집, p. 252. 각주 5번 참조.

 

그러나 이러한 영적 전통(spiritualism)의 추구와 함께 불교사의

중요한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은 깨달음의 세계와 세간의 본원적 동일

성을 강조하면서 세간에의 참여를 곧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는 전통

도 염연히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범부보살의 등장과 보살행의 실

천 윤리적 성격을 강조하는 대승경전 전통이 그것이며 대승의 교학

전통에서, 이를테면『 대승기신론』 등에서 본각(本覺)을 강조함으로

써 깨달음과 무명, 부처와 중생의 본원적 동일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은 바로 이러한 전통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른바 ‘일상을 통한 초월’ 혹은 ‘일상에

서의 초월’을 통해 세간과 출세간의 이원성을 극복하고 그 본원적 동

일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불교 전통은 아이러니칼하게

도 오늘날 한국불교가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근거를 

끌어오고 있는 선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선종에서 수행이란 세간의 일상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며, 깨달음이란 부처와 범부의 본원적 동일성을 체험하는 것이기 때

문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 혹은 출세간의 세계란 세간을 초월해 존

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세간에서의 ‘진실’됨이 간단없이 연속적으

로 실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선 전통인 것

이다.

 

이러한 선종의 성격은 어찌 보면 깨달음을 절대화하는 불교의 영

적 전통과 보살행을 통한 세간적 참여를 강조하는 참여의 전통이 교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자세한 논의는 다음

으로 미루기로 한다. 어쨌든 불교사에서 영적전통과 참여적 전통은 

초기불교이래 서로 교차하면서 때로는 병행하면서 또 때로는 결합

하면서 그리고 시대에 따라 어느 한쪽이 더 강조되기도 하면서 흘러

온 중요한 두 전통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에 있어 참여냐 초월적 깨달음의 추구냐의 

문제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이기만 한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초기불교의 경우 영적 전통이 그 주도적 흐름이었던 것은 불교가 

생하였던 고대 인도사회의 이원적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한편으로 동아시아의 대승불교의 경우 불교

의 사회참여가 소극적이었던 것은 동아시아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사정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각각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영적 전통이 근거하고 있는 사회적 환경은 붇다 당시의 이원적 사

회구조이다. 잘 알려진 대로 고대 인도사회는 재가-출가(life-in-

the-world vs. world renunciation)의 이원적 패러다임을 제도화하

고 있었으며 불교의 출가제도는 이러한 이원적 사회구조를 반영한

불교적 제도라고 생각될 수 있다.34) 고대 인도사회의 이러한 이원적

구조는 불전문학에서도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아시타 선인은 싯

다르타 왕자가 태어나자 “이 아이가 자라서 출가하지 않으면 (세속)

세상을 구할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를 하면 세상을 구제할 ‘깨

달은 자’(buddha) 가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이 전설적 예언이 함의

하고 있는 바는 당시 인도 사회가 재가-출가라고 하는 이분법적 구

분이 완전히 제도화 되어 있었으며 전륜성왕과 붇다로 상징되는 재

가-출가의 삶이 양자택일의 길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전륜성

왕이 되면 붇다가 될 수 없고 붇다가 되면 전륜성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35) 초기불교 경전에서 비구들에게 세속정치와 관련한 논의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36)은 이러한 선택적 구도 하에서 깨달음

을 선택한 수행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럼 점에서 볼 때 초기불교에서 나타나는 초월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영적 전통의 경향은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34) 졸고「 法과 業: 초기불교의 사회철학적 이론을 위한 시론」『, 한국불교학』제 34집,
    p. 253.
35) 상게논문, pp. 254-156.
36) “國界之事”의 금지. 해당 원문은 졸고「 法과 業: 초기불교의 사회철학적 이론을 위한
    시론」『, 한국불교학』제 34집, p. 252. 참조.

 

한편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스스로의 깨달음을 미루겠다고

하는 보살의 자비심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경우 오늘날 사회윤리

로도 적용될 수 있을 만한 윤리적 이상과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

들이 대단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대승불교가

번성하였던 동아시아에 있어 이러한 대승 윤리가 실제 사회에서 적

용되고 있는 경우를 거의 찾을 수 없다. 있다하더라도 대단히 간

헐적이며 삼계교의 경우처럼 민중반란과 같은 세속의 정치이해와 맞

물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승윤리로서 일반화하기 힘들다. 대

승경전의 교리적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 대승의 윤리가 역사 속에서 

실천되었던 경우가 거의 부재한 이유에 대해 데이비드 채팰(David 

W. Chappell)은 설득력 있는 여섯 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그 가운

데 본고의 논의와 직접 관련이 있는 세 가지 이유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37)

37) David W. Chappell, “Are There Seventeen Mahayana Ethics?, 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 3, 1996, p. 46.

 

우선 하나는 인도대승 전통에서 고행적 수행과 명상적 힘에 대한 

강조는 사회적 실천과는 거리가 먼 관념주의적 윤리관을 낳았기 때

문이다.

 

두 번째로는 매우 강력한 유교적 사회인 동아시아에서 불교 승려들의 

사회참여는 불법적인 것이거나 제한 적이었기 때문에 사원의 계율을 

넘어선 사회적 문제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한다든가 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최근의 동아시아 근대불교의 경우 재가중심의 신불교 

운동에서 조차 유교적 윤리를 채택하든가 혹은 출가자들의 엄격한 

계율을 자신들의 윤리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

승불교의 교리가 대단히 사회참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가 세속사회의 주된 윤리이자 사회철학으로 기능하는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불교의 대 사회적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불교의 영적 전통이 기반하고 있던 고대 인도

사회의 이원적 구조와도 다르며, 불교의 사회참여를 사회적으로 제

도로서 제한하거나 금지하였던 조선시대와도 다르다. 이미 역사적

으로 경험하였듯이 조선 시대가 끝나면서 불교에 대한 제한이 풀리

자말자 근대 한국불교가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이 바로 사회참여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 또한 당시 식민지라는 특수한 사정 속에서 무산

되고 말았다.

 

근대 사회에서 그리고 탈근대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오늘날, 불교

의 사회 참여는 단순히 교세의 확장이라는 집단이익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필요라는 차원에서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

적 성장의 피로감 속에서 이제 종교는 고중세 사회의 절대적 세계관

으로서가 아니라 근대적 문명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문명으로서 기

능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개인의 이기심을 사회의 기초 원리로서

인정하고 있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체제하에서 이기적 욕

망의 자제를 미덕으로 하는 종교의 비판적 대안적 기능이 더욱 더 요

구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종교적 기능의 대부

분을 기독교가 맡고 있다고 한다면 과연 지나친 과장일까? 한국 사

회에서의 기독교의 긍정적 측면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만 다원적

종교 상황에서 한 종교가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 바람직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인구의 분포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불교의 사회적 지분(social

share)은 더욱 더 확대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참여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차원이라고 하는 것은 바

로 이런 점에서이다. 그렇다고 모든 불교인이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

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균형의 문제일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도 영적 전통의 복음신학과 참여전통의 진보신학이 적절하게 균형

을 유지할 때 건강한 것처럼 불교 또한 영적 전통과 참여의 전통이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불교의 경

우 영적 전통이라 할 깨달음의 추구에 거의 전적으로 쏠려있다. 아

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깨달음을 핑계로 참여를 도외시하고 있

다는 말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1994년 개혁종단이 기치로 내세웠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은 한국 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현실 인식과 스스로에 대한 반성에서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려는 

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깨달음의 불교적 의미를 확대하려는 운동이었

다고 평가한다.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이해할 뿐 만 아니라 자신

의 내부적 욕망과 모순 그리고 사회적 욕망과 모순이 별개의 것이 아

니라 상호 연기적 관계에 있다는 인식으로 까지 깨달음의 불교적 의

미를 확대하였던 것이다.

 

종단의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다소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린 것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한국불교사에서의 

모처럼의 ‘불교의 사회 참여운동’을 20년도 채 안된 이 시점에서 실패

로만 단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 지금도 그때 뿌려진 씨앗들이 어딘가

에서 싹이 트고 줄기를 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은 처음부터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출발하였던 것 같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

한 문제점을 살펴보고 참고가 될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결론에 

대할까 한다. 

 

IV. 결론: 法의 불교(dhammic Buddhism)와 業의 불교(kammic Buddhism)

 

지금까지 깨달음의 사회화와 관련하여 불교의 사회 참여에 대한

불교사적 정당성과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역사적

으로 불교의 사회문제에 대한 소극성의 문제는 교리와 관련한 불교

의 내재적 문제라기보다 역사적 문제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

면 불교는 ‘어떻게’ 사회의 문제에 참여 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회

과학적 이론과 구별 되는 불교적 참여 이론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

가? 박경준 교수가 95년 당시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대해 단서

를 달았던 대로 어떻게 해야 “참여하되 불교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불교교단이 세간의 문제에 참여할 경우 어떻게 해야

일반 시민단체나 NGO와 구별되는 불교적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

 

이러한 여러 물음들은 결국 불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불교의 사회

참여 이론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체계적인 불교의 참여

이론을 전개하는 것은 한편의 논문에서 해결할 일도 아닐 뿐더러 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

만 나는 여기서 지금까지의 한국학계에서 단편적으로 시도 혹은 제

시되고 있는 참여이론들을 보면서 느꼈던 문제점을 지적하고 체계

적인 참여 이론을 만들기 위한 몇 가지 방법론적인 틀을 제안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불교학계에서 보면 불교의 사회참여를 정당화 하

기위해서 혹은 어떤 특정 사회적 현안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제시

하는 경우 불교 경전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

교적 이론의 근거를 불교경전에서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이러한 방법론은 

대단히 위험할 수 있으며 실효성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

고자 한다.

 

첫째, 불교 경전은 그 전체로서 하나의 정합적 내용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경전의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해주는 이 구절 저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이 문제에 대

한 불교적 대안 혹은 해답”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할 수 

있다. 경전은 성립의 공간적 역사적 환경에 따라 서로 상충되고 모

순되는 내용들이 함께 경전 전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여간 세심

하게 텍스트의 역사적 성격 그리고 맥락을 살피지 않고서는 경전의 

내용을 인용해서 사회적 문제해결을 위한 해답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든다면, 경전에서 우리는 세속의 일에 참여

할 근거도 찾을 수 있지만 세속의 일에 결코 참여해서는 안 되는 

근거 또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몇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생명윤리의 문제가 사회적 현안

으로 대두되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학자가 처음에는 경전의 이러저

러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반대’의 입장을 취하다가 나중에는 또 다른 

경전을 인용하면서 ‘찬성’의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경

우는 한 사람에게서 벌어진 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많은 경우 서로

입장이 다른 두 학자가 경전의 서로 다른 곳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소

위 ‘불교적 논지’라는 것을 펴고 있는 것은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일

이다.

 

둘째, 불교 경전은 특히 경(經)의 경우 논리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체계적 이론서가 아니라 어떤 ‘사태’를 설명하고 그 사태에 대한 해

결을 제시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 ‘사태’의 상황적 맥락을 떠날

경우 설명력을 상실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경

(經)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전거로 전혀 상황이 다른 현안에

대한 불교적 입장으로 일반화 하거나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 경(經)이 논리적 정합성의 추구가 아닌 ‘사태’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사실성(reality)이 뛰

어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활용한다면 사회적 현안 문제에 대한 매

우 훌륭한 해석학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사태’에 따른 상황적 맥락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지

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적용의 오류’에 관한 문제이다. 우선

두 가지 종류의 ‘적용의 오류’를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종류의 오류는 출가자 혹은 출가자 집단인 상가에 대한

담론을 세속사회에 적용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경우이다. 불교 경전

은 양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대부분 출가자를 위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사회를 (공간적으로, 심리적으로) 떠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대반열반경』에서 붇다가 “너희들은 정치와 관련 

된 일에 대해 논의하지 말 것이며…”라는 구절을 불교가 정치적 일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확대해서 이해하는 경우이다. 이 구

절은 명백하게 비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또 초기불교의 승단의 

구조와 제도에 주목하여 불교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적 공동체“ 심

지어 ”무정부주의“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는 붇다 당시의 출가-재가라고 하는 이원적 구조를 간과한 적용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38)

38) 졸고「法과 業: 초기불교의 사회철학적 이론을 위한 시론」, 『한국불교학』제 
    34집, p. 266.

 

두 번째 오류는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무아’ 혹은 ‘열반’과 같은 

본체론적인 담론을 사회적 현상이나 개인 윤리의 문제에 곧 바로 

작용함으로써 공허하고 현실성 없는 결론으로 맺어지는 경우이다. 

따라서 불교적 참여 이론을 염두에 둘 경우 불교 경전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본체론적 담론(ontological discourse)을 사회현

상적 담론(phenomenological discourse)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이며 선행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무아 혹은 열반과 같은 불교의 개념들을 개인의 윤리나 실천철학적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로 그 점이 불교의 참여 

이론을 세속의 사회철학이나 사회과학적 이론과 구별 시켜주는 불

교적 정체성의 핵심적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관점에서 혹은 깨달음을 절대

적 위치에 놓고 사물 혹은 사태를 바라보는 본체론적인 담론을 사

회현상적 담론(phenomenological discourse)으로 재해석 혹은 전

환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무아’의 절대적 경지는 불교적 실천철학

을 구성하는 근본 근거나 바탕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 개념 그대로 일

반적인 사회철학이나 실천의 원리로서 제공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아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해석을 도출하는 등의 다양한 현

상적 담론화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한 다른 논문에서 존 롤즈(John Rawls)의 사회정의론의 핵

심적 개념인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과 ‘무지(無知)의 베일’

(veil of ignorance)과 같은 개념을 틀 속에서 불교의 무아론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 적이 있다.39) 얼핏 보아 개인의 이기심을 사회의 제

일차적 구성 원리로 삼는 한편 사회공학적(social engineering)입장

에서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를 확립함으로써 사회정의를

달성하고자하는 존 롤즈의 입장은 자비와 이타행을 중요 가치로 여

기는 불교의 입장과 정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39) Sungtaek Cho, “Selflessness: Toward a Buddhist Vision of Social Justice,” Journal
    of Buddhist Ethics , vol. 7, 2000, pp. 76‐85. [독일어 번역으로는“Selbstlosigkeit: Zu
    einer buddhistischen Sich von sozialer Gerechtigkeit,” trans., By Wolfgang Tomaschitz
    Polylog: Zeitschrift für Interkulturelles Philosophieren , Nr. 7, 2001, February.]

 

그러나 불교적 참여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한, 이렇게 본체론적

인 담론을 사회현상적 담론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다양하

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40) 왜냐하면 참여하고자 하는 이상 오늘

날 현대사회의 다종교 다문화라는 다원적 환경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고 다양한 가치관과 종교를 가진 다양한 대중들로부터 일반적 

설득력을 획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40) 이 점에 관해서는 오늘날의 사회복지 이론이 기독교 신학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을 상
    기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복지 이론에서 기독교 교리나 신학
    의 ‘냄새’조차 맡을 수없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만
    약 불교적 사회복지 이론을 정립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일반 사회 이론으로 전
    환, 확대하고자 한다면 불교에 입각하되 ‘불교냄새’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개혁종단이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제시하였던 여섯 개 

과제의 키워드는 도덕성, 경제정의, 통일, 환경, 노동, 인권, 소외계

층 등이다. 이것은 깨달음, 불성, 자비, 무아 등 전통적인 불교적 과

제를 새로운 사회적 의제로 전환하려는 시도로서 본체론적인 담론을 

사회현상적 담론으로 전환하려는 한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단순한 대응적 개념을 찾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내용에 대한 

해석학적 전환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사회적 적실성도 확보하면서 

불교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체론적 담론을 사회 현상적 담론으로 전환 혹은 재해석하기 

위한 한 방법론으로서 나는 법의 불교(dhammic Buddhism)와 업의 

불교(kammic Buddhism)를 구분할 것을 제안한 바가 있다.41)

41) 이하 한 단락은 졸고「法과 業: 초기불교의 사회철학적 이론을 위한 시론」,『한국불교학』
    제 34집, p. 254에서 요약 부분 수정.

 

여기 다시 소개하면, 법의 불교란 불교 고유의 본체론적 담론을 의미

하며 업의 불교란 행위의 불교를 의미한다. 본체론적 담론이 생사윤

회를 벗어나기 위한 초월적 담론이라면 행위의 불교는 (물론 불교의 

본체론적 담론에 입각하여) 생사의 현장인 사회 속에서의 윤리적 행

위를 위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이 가지는 장점은 출가-재가 혹은 열반-공덕이라는 

도식적 구분을 벗어나 담론의 내용에 따라 법의 불교 혹은 업의 불교

로 구분함으로써 불교적 실천철학 혹은 참여 이론을 구성하는데 도

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법의 불교를 사회 현상적 담론으로 재

해석하는 한편 업의 불교를 중심으로 불교적 참여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불교의 사회참여를 논의 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

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불교적 이상(理想)의 실현이다. 오늘날

세속의 사회과학이론이나 그 이론에 근거한 시민운동의 목표는 ‘공

동선’의 실현에 있다. 그리고 그 공동선은 목표의 극대화가 아니라

‘최소주의’라는 원칙에 입각해 있다. 이는 다원적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원칙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불교적 이상(理想)은 공동선의 실현을 넘어 인류가 추구

해야할 더 크고 중요한 가치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한 예로 인

권을 넘어서는 생명권 개념과 같은 것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

는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대하고자 하는 불교적 이상과 가치관은 사

회적 공동선으로서 인권의 실현을 넘어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권리

를 존중하는’ 생명권 사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실현에 있어서도 마찬가

지이다. 우리는 20세기 이래 대부분의 사회철학이나 정치 철학이 추

구해온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이론이 근본적으로 각 사회 구성

원의 이기심(self interests)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는 점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

 

교환정의를 주장하든 분배적 정의를 주장하든 모든 세속적 정의

론은 기본적으로 이기심이라는 인간 존재의 현 상태를 불가피하고

개선 될 수 없는 (혹은 개선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이기심은 극복 

될 수 있으며 그 극복은 나로부터 출발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불

교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적 삶이 더 행복한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불교의 사회참여는 인간적 생존의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사회적 공

동선의 실현이 중요한 일차적 목표이지만, 그것의 실현으로 그 목

적이 다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불교의 사회 참여는 공동선의 실

현 그 너머에 있는 모든 생명의 보다 근원적인 행복의 실현이라는 

더 큰 목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