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불교문화」제7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1
불교의 사회참여 문제
- 초기불교를 중심으로 -
( 이 논문은 2008년도 창원대학교 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이 범 홍/창원대학교 철학과 교수
국문초록
불교계의 사회참여가 최근 매우 활발하다.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활동
에서부터 유아교육, 장애인복지, 다문화가정 노인복지문제에 이르기까
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활동범위의 폭은 점차 넓어질 것이며,
진보적 정치활동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방식
의 사회참여에 대해 초기불교시대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분
명히 당시는 전제군주의 절대적 지배력이 강화되고 있던 시대였다. 따
라서 초기불교경전은 국왕의 욕심이나 왕권의 두려움에 대해서 강조하
고 있다. 그러나 각자의 직업을 통한 사회생활은 가능했으며, 열심히 노
력하여 얻은 재물의 축적은 칭찬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문제
에 대한 사회참여운동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예로부
터 인천의 모든 중생이 행복하고 평온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전륜성왕
에 대한 기대가 매우 높았다. 그리고 전륜성왕의 이상적인 정치활동을
통해서 국왕의 역할과 불교의 정치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자비심
을 가지고 정법정치를 하는 전륜성왕의 사상은 곧 초기불교의 이상적
정치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아쇼카
왕에 의해서 구현되었던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근년 종교계의 사회참여가 눈에 띄게 이루어지고 있다. 비교적 보수
적이던 종교계가 70년대 민주화운동에 몇몇 성직자들이 앞장서면서부
터 서서히 사회운동의 표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 같다. 더구나 종교계
내부에서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성직자들이 활동을 주도함으로서 국
민들의 공감을 불러왔다. 그 암담하던 시절 비민주적 정치에 대한 저항
과 참된 민주주의의 확립을 부르짖으며 등장한 종교계의 사회참여운동
은 특히 학생과 지식인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
했다. 애초 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된 종교계의 참여운동은 80년대 후반이
넘어가면서부터 과감히 민족의 자주화와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짙은 정
치성을 띄기도 했다. 현재의 민주화된 사회·정치적 여건조성의 배경에
는 이러한 종교계의 성직자들과 지도인사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대중
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남북교류가 점차 활발해지면서 통일문제와 민족문제에 대한 긍
정적이고 안정된 사회적 분위기는 종교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성직자와 종교계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냉전시대를 통해 적대시되
었던 민족의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해 큰 힘을 기울였다. 그 무렵 각 종
교단체에서는 분단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사찰이나 교회에서 남북의 종
교인들이 함께 모여 공동으로 종교행사를 진행함으로서 민족적 동질성
과 함께 서로의 신앙공동체를 확인하기도 했다1). 이에 따라 남북합동으
로 각자의 종교에 따라 법회를 열기도 하고 미사나 기도회를 개최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종교계는 정부와 무관하게 자
체적으로도 인적교류와 함께 적지 않는 경제적 지원과 협력을 계속하였
다.
1) 불교-평양광법사, 개신교-평양봉수교회, 천주교-평양장충성당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자유로운 시대조류는 타종교에 비해 비교적 보수성향이 강했
던 불교계도 피해가지 않았다. 물론 민주화초기에는 소수 진보성향 출
가자의 두드러진 활동은 있었으나 매우 제한된 목소리에 불과했다. 그
들은 교단의 구성원이긴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나 사회활동이 종단의
공적결론이거나 합의된 의견은 아니었다. 단지 출가자개인이나 혹은 이
념을 같이 하는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사회운동의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참여활동이 불교계 전체의
의사가 아니라 개인적 소신이라고 보아 굳이 교단에서 반대의사를 표명
할 필요가 없었다. 출가자의 자유로운 사회운동과 그 정당성은 막연하
게나마 폭넓은 불교사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이어서 사회 환경의 급변에 따라 종교계의 참여활동도 더욱 적극적으
로 나타났다. 이런 변화는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종래처럼 진보적
소수의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중불교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른바 사부대중의 사회참여이다. 현재 불교계의
사회참여는 누가의 주도가 아니라 누구라도 주도할 수 있는 단계에 이
르고 있다. 따라서 출가 재가에 관계없이 취지를 같이 하는 다양한 불교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이들에게는
승속 등의 신분을 위시한 어떤 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은 불
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도반일 뿐이다. 그리고 종래의 보수성향이
강한 전통적인 불교에서 탈피하여 ‘참여불교’ ‘실천불교’ ‘민중불교’를 표
방하는 새로운 불교대중화운동에 앞장섰다. 단체의 구성원들은 매우 적
극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활동도 피해가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노골적인 정치성이 보이기도 해서 불자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일도 있었
다.
어쨌든 불교계의 참여활동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적극적인 사회
운동을 통해 많은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유아교육, 장애
인복지, 노인복지문제에서부터 최근에는 환경문제, 핵문제, 생명문제, 평
화문제 등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핵심적 과제로 확대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런 추세로 봐서 향후 불교계의 사회참여는 불교계만의 독자적
인 행보를 넘어 타종교와 보조를 같이 하면서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
으로 확산될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불교계의 사회참여에 대한 정당성을 폭넓은 불교사상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불교사상이
라 하더라도 시대나 학파 혹은 지역이나 환경에 따라 실로 엄청난 차이
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대승의 등장이라는 획기적 사건
이후, 붓다의 가르침은 대립정도가 아니라 상대를 부정하고 적대시할
정도였다2). 여기서는 이 관점에 대해 초기불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中村 元,「大乘佛敎의 思想」, 東京: 春秋社, 1995, pp. 84-85 참조.
이와 함께 또 하나는 인도사회의 독특한 종교적 환경에 대한 이해이
다. 고대인도사회는 대개의 경우 종교적 위치가 정치적 위치보다 우월
했다. 그러므로 종교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출가수행자의 활동이
국왕이나 국가권력으로부터 탄압받거나 간섭받는 일이 드물었던 것이
불교흥기 당시 인도의 종교적 환경이었다.3) 그러나 대다수 고대국가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인도 역시 절대권력을 독점한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다시 말하면, 국가나 사회문제에 백성이 참여하는 것은 근본
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국왕의 출현을 통해서만 이
상적인 사회를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는 오로지 수장인 국왕에
의존할 뿐이다4). 그러므로 국왕자신의 개인적 신앙이나 성품은 그대로
사회전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기불교시대의 사회참여문제도
당연히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붓다라 할지라도 불교
도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5) 단지 불교의 세계관
이나 국가관에 입각한 이상적인 국왕의 모습을 그려놓고, 바람직한 국
가를 위해서 취해야 할 현실적인 불교도의 태도와 자세에 초점이 맞췄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中村 元,「東洋人의 思惟方法」1, 東京: 春秋社, 1982, pp. 140-148 참조.
4) “옛날의 왕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정부라는 용어로 대신되어야 한다” (Walpola
Sri Rahula.․진철승 역「붓다의 가르침」. 서울: 대원정사. 1988). p. 126.
5) 오히려 붓다는 개인적 욕망.무명.무지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고타마 붓다는
인류의 위대한 해방자 중의 한 사람이다. ----- 인류의 최고 열망이 오직 자신
의 속박을 강화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이유를 발견하고자 노력했던 점
에서 그는 반항자 중의 반항자다” (Nolan pliny Jacobson,․주민황 역「해방자
붓다! 반항자 붓다!」서울: 민족사, 1989), pp. 15-19.
2. 왕권강화와 불교도의 태도
불교등장 당시, 종전의 사회적 권위를 독점하던 바라문 대신 크샤트
리야계급의 권력이 신장되어 가는 추세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다. 농촌사회로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서로
패권을 다투는 戰國時代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막강한 군사력
을 가진 국가는 약소국을 병합해 갔으며, 국가 간의 대립은 더욱 치열해
졌다. 강력한 무력을 소유한 국왕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국력
을 집중하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
한 국왕의 권력은 곧 국가의 위력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왕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백성에 대한 봉사와 보호에 있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시각이었다. 그러므로 국가에 납부하는 조세의 성격은
사회의 치안을 유지하는 대가로 백성이 국왕에게 지불하는 보수에 해당
하는 것이었다. 즉, 국왕이란 치안유지를 위해서 백성들의 임금으로 고
용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국왕은 임금의 대가로 사회질서와
치안유지를 위해 힘쓰는 것이 본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해 치안의 공백이 생겼다
거나 그로 인해 사회의 질서가 파괴되었다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둑이 들어 재산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치안을 책
임져야할 국왕이 의무에 소홀했으므로 마땅히 변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
고 생각했을 정도였다.6)
6) 국왕의 역할을 전하는 고대인도문헌중「구사론」을 비롯한「마하바라타」카우틸
리아의「실리론」등은 대동소이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中村元,「宗敎と社會倫
理」, pp. 151-154 참조).
그러나 이러한 불교도의 이해나 기대와 달리, 현실적으로 막강한 권
력을 장악하고 있는 국왕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국가 간의 분쟁과 대립이 격심하던 시
대이고 보면 백성의 삶이 평온치 않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넓은 영토에 대한 욕심을 가진 국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왕은 폭력을 사용하여 지상을 정복하고, 해변에 이르기까지 대지를 병
합한다, 이쪽 바다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바다 저쪽까지도 얻으려고 원한
다.7)
7) Jataka. IV, p. 172. (南傳藏 제34권, 小部經典12,「欲愛本生談」, pp. 51-52).
영토에 대한 국왕의 욕심은 결국 전쟁을 통해서 가능함으로 백성의
고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전쟁이란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가
정의 파탄을 초래해 결국 백성은 불행과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 요인은
오로지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한 국왕의 욕심에 있기 때문에,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의 물건을 빼앗아가는 도둑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
다고 불교도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백성을 괴롭히고 고통으로 몰아넣는
이러한 국왕의 모습을 불교도들은 인간을 괴롭히는 뱀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왕위에 있는 왕족은 흡사 뱀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이 화를 냈을 때는
백성에게 벌을 내리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화내지 않게 해서 너
자신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8)
8) SN. I, p. 68. (南傳藏 제12권, 相應部經典1.『拘薩羅相應』, pp. 119-120).
국왕을 화나게 만든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뱀
에 물리면 생명을 잃는 것과 같으므로, 어째든 화내지 않도록 해서 생명
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국왕은 백성에게 두려운 존재였
으며, 초기불교는 이런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전반적으로
국가권력에 다가가는 일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더구나 출가수행
자는 뱀이나 도둑같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백성의 고통을 돌보지
않는 국왕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금했던 것이다. 출가수행자는 국가라는
집단속에 있으면서도 국왕의 권력이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직 출
가수행자들만의 집단을 형성하여 국가의 통제 밖에서 자유로이 활동하
는 것을 희망했다. 출가수행자들에 의해서 구성된 승가(samgha)란 이런
배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출가수행자들의 이상적인 사회가 곧 승가인 것이다.
그러나 승가도 하나의 집단인 이상, 공동생활에 피해를 주거나 해악
을 끼치는 경우에는 자율적으로 제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출가
수행자들의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약속이다. 만약 합의된 약속을 지
키지 않을 경우에는 누구라도 책임을 묻는다. 삼장가운데 율장(vinaya-
pitaka)이란 바로 이러한 계율(vinaya)의 집성집이다. 오직 구성원들의
합의와 의지로 유지되는 승가야말로 초기불교가 지향했던 자율적인 사
회로서 왕권이 미치지 않는 이상적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초기불
교에서는 출가수행자라면 누구라도 국가권력 근처에 접근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이것을 어긴다면 큰 해악이 온다고 계율로서 경고했다.
만약 비구가 왕궁에 들어가서 성문을 닫는 시간을 넘긴다면, (그것은)
바라이죄(波逸提.)에 해당된다.9)
9) 이 戒는 ‘突入王宮戒’라고 한다.『五分律』제9권에 따른다. 또『根本說一切有部
毘奈耶』제44권,『摩訶僧祗律』제20권,『四分律』제18권,『根本薩婆多律攝』제
13권,『十誦律』제18권에도 나온다.(中村元,「宗敎と社會倫理」, p. 129.인용)
이 때문에 출가수행자들은 성문이 닫히는 시간을 넘겨서는 탁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 다.10) 또한 비구니가 화려한 왕궁의 모습에 현혹되어
왕궁에 들어가서도 안 되었다.
10) 中村元,「宗敎と社會倫理」, p. 124.
만약 비구니가 자기 스스로 왕궁의 장식품, 畵堂, 園林, 浴池를 봤다
면 바라이죄에 해당된다. 이 같은 행위를 한다면, 賊女, 婬女와 다를 바
없다.11)
11)『四分律』제26권 (大正藏, 22권 p.768 中). 中村元 같은 책, p.124 참조.
왕궁의 화려하고 사치스런 모습에 홀려 수행자의 청정한 마음을 잃어
버린다면, 곧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이나 음행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만
치 극도로 경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약 이런 계율을 어기게 되면,
잘못된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이 수행자에게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아
예 국왕에게는 접근하지 않아야 된다고 한다. 따라서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행위자체를 처음부터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초
기경전은 출가수행자에게 국가권력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
하게 요구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또 (조심스런) 마음을 가지고, 국가에 접근하지
말라.12)
12) DN. III, p. 61. (南傳藏 제8권, 長部經典3,『轉輪聖王師子吼經』, p. 77).
출가수행자들에게 있어서 국가권력은 도움은 되지 않고 오해를 불러
와 자칫하면 그것으로 인해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다가가서
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수행자가 국가에 접근한
다면 구체적으로 10가지 불행한 일13)이 출가자 때문이라는 오해가 생
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아예 국왕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를 금
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 초기불교의 시각이었다.
13) ①국가에 음모가 발생했을 때 ②대신이 반역했을 때 ③국가의 재보가 분실되었
을 때 ④국왕의 자녀가 결혼하지 않았는데 임신했을 때 ⑤국왕에게 무거운 병
이 생겼을 때 ⑥원래는 사이가 좋던 국왕과 대신이 서로 다투게 되었을 때 ⑦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⑧자선을 좋아하던 국왕이 그 후 인색해져서
자선하지 않게 되었을 때 ⑨정법으로 백성의 재보를 취하던 국왕이 그 후 비법
으로 취했을 때 ⑩전염병이 유행하게 되었을 때 등이다. (같은 책, 같은 곳)
그러나 불교교단이 이 같은 자세를 엄격히 지키면서 국가권력과의 접
촉을 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으로부터 압력이나 간섭받는 일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국왕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의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에는 교단에도 언제든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불교교단이 국왕에 다가가지 않는 것은 계율로 경계할 수 있으나, 역으
로 국왕이 승가에 접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 불교
교단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국가나 국왕은 불교교단의 입장에서는 두려운 존재였다. 앞에서 본데
로, 그것은 도둑이나 뱀과 다를 바 없는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혹
시 그들을 성내게 만든다면 불교교단은 큰 피해나 손실을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국가권력과 관련 있는 부분은 피해야 된다고 했다.
『마하승지율』의 예를 살펴보자.
어떤 수행승이 왕의 신하를 출가시켰다. 그런데 그 사실이 일반관리들
에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재판관은 그 관계자를 각각 처벌하고 수계
한 관리를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런데 빔비사라왕이 이 사실을 듣고,
왕의 신하가 자유롭게 출가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래서 재판관의 직위를
박탈하고 그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세존이 이것에 관한 전후 이야기
를 듣고, ‘일체의 왕이 모두 그와 같이 신심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오늘 이후부터 왕의 신하에게는 출가의 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
했다.14)
14) 大正藏 22권, p. 419 下. (『摩訶僧祗律』제24권), Vinaya Mahavagga I, 40, 3.
즉, 국왕의 개입으로 가부의 결정이 바뀔 수 있는 그런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없애야 된다는 것이 권력에 대한 붓다의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권이 개입하지 못할 문제는 어디에도 없다. 권력에 관련
된 시비곡직의 문제는 수행자들의 목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상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너희 비구들이여, 그런 논의를 하지 말라. 그 이유는 이러하다. 그것
은 義로서 사람들을 饒益하게 하는 것이 아니며, 法으로 饒益하게 하는
것도 아니며, 梵行을 饒益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智도 아니며 正覺도 아
니다, 涅槃으로 향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15)
15) 大正藏 2권, p. 110 上. (『雜阿含經』제16권).
이것은, 당시 인도의 가장 강력한 국가인 마가다과 코살라의 빔비사
라왕과 파세나디왕을 비교하면서, 누가 더 강대하고 부유한가에 대해서
수행자들이 논란하는 것을 듣고 붓다가 그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이다.16)
즉 국가나 국왕에 대한 평가를 해서는 안 되며, 출가수행자는 현실문제
에 논평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이런 관심은 백성들께 도움
되는 일도 아니며 열반을 지향하는 출가자의 수행에 방해만 되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16) 출가수행자에 대한 붓다의 警戒인 이 내용에 대해서, 中村元 선생은 붓다 자신
의 말이 아니라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불교교단이 세존에게 假託하여 창출해
낸 가르침이라고 보고 있다. 즉 “이러한 훈계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고타마 자신
에게서 직접 유래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마우리야 왕조 이후의 불교교단이 석
존에게 附託해서 만든 교설일테지만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中村元,「宗敎
と社會倫理」, p. 127 참조).
그런데 국왕은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여 백성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수행하는 일은 국왕의 고유한 역할이다. 이것을 공정하
게 시행한다면 전륜성왕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폭군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평화로운 국가와 백성의 행복은 국왕이 이 역할을 어떻
게 발휘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왕은 이 점
을 자신의 권력행사에 이용하였다. 따라서 국왕의 권위가 거부되거나
방해받았을 때는 언제든지 처벌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 또한 부여되
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막강한 권력에 의해 유지되었다. 현실적
으로 국왕의 권위란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에서 나온다. 두
려운 이 힘을 이용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국왕은 끝없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
지어 불교교단에 대해서도 직접 간섭하고 명령하기도 했다.
어느 때 수행승들이 정해진 날 우안거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
다. 그들은 세존에게 이러한 사실을 아뢨으나, 정해진 날을 연기하는 것
을 허락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 마가다 국왕인 세니야․빔비사라가 수
행승들에게 사신을 보내서, 다음 달 보름날에 우안거에 들어가면 어떻겠
느냐고 권유했다. 수행승들이 세존에게 그 일을 아뢰었더니, 세존은 ‘수
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여러 왕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나는 허락한다’ 라
고 말하고 연기하는 것을 허락했다.17)
17) Vinaya, Mahavagga III, p. 138. (南傳藏 제3권, 律部3. 大品1.『第三入雨安居犍
度』, p. 247).
불교교단도 직접 국왕의 명령이나 간섭이 있을 경우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법이나 義의 실행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깨달음을 얻고
열반을 이루는데 전혀 유익하지 않으므로 접근하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도, 결국 세속적인 국왕의 권력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국왕의 권력에 협조하거나 접근하는 것은 혐오하지만, 직접
적인 거부와 반대행위가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음
엿볼 수 있다.
이상, 출가수행자들은 이상적 사회를 지향하는 승가라는 자율적인 집
단을 형성했으나, 불교교단 역시 세속적인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
울 수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3. 전륜성왕의 사상과 현실적 등장
불전에 따르면 붓다가 출생했을 때 그의 미래를 예언한 유명한 이야
기가 나온다. 당시 유명한 수행자이던 아시타선인이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이 왕자의 앞날에는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왕
위를 계승한다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만일 출가
한다면 반드시 부처가 될 것입니다” 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이 큰 힘을 가진 자(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는 것이 괴롭고 비탄에 빠져서 슬퍼합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18) 즉, 왕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국왕이 된다면 전세계를 통
일하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수행자가 된다면 세간과 출세간에
관계없이 모든 중생의 정신적 지도자인 붓다(깨달은 자, 각자, Buddha)
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통해서 현실세계와 정신세계의 가장 위대
한 지도자인 전륜성왕과 붓다에 대한 기대가 이미 당시의 인도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수타니파타』, 金雲學 譯, (서울: 汎友社, 1998), pp. 146-149.
그런데, 아시타선인은 무엇을 보고 싯달타의 장래를 예언하면서 자신
의 처지를 괴로워하며 슬퍼했던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 인도인은, 예
로부터 붓다나 전륜성왕이 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보통사람들과 다른
32가지의 신체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19) 다시 말한다면 32
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필연적으로 붓다나 전륜성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32상을 확인한 아시타선인이 싯달타를 보고
붓다가 되든지 아니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이다.20) 그
렇다면 그런 주장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19) L. Renou, J. Filliozat,「印度學大事典」제3권, 山本智敎 譯, (東京: 金花舍,
1982), pp. 191-192 참조. (no. 2275).
20) 같은 책, pp. 190-191. (No. 2272).
어느 때, 바라문을 섬기는 수행승인 케니야는 붓다와 그를 따르는
1250명의 수행자들에게 음식을 공양할 수 있도록 붓다에게 허락받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준비를 하느라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것을 보고 케니야가 섬기고 있는 바라문인 세라가 이상해서 묻자, 내
일 붓다와 그 수행자들을 위한 공양준비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세라 바
라문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눈뜬 사람이란, 이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런
데 우리들 성전속에 위인의 상이 32가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을 갖추고
있는 위인에게는 단 두 가지 길이 있을 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재가의 생활을 한다면, 그는 전륜왕이 되어 정의를 지키는 법왕,
사방의 정복자로서 국토와 백성을 안정시키고 칠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 (중략) --- 그는 이 대지를 사해의 끝에 이르기까지 무력
을 쓰지 않고 정의로서 정복하고 지배한다. 그러나 그가 만약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면 참사람, 깨달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 온갖 번뇌의 가림
을 없앨 것이다.21)
21)『숫타니파타』, 法頂 譯, (서울: 샘터, 1999), p. 168.
위에서 ‘우리들의 성전’이란 바라문수행자들의 성전인 베다(Veda)를
비롯한 天啓書(sruti)22)를 말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32상을 구비한 사람
은 붓다가 되든지 아니면 전륜성왕이 되는 두 길밖에 없다고 했다. 갓
태어난 싯달타를 보고 장래를 예언한 아시타선인이 근거한 것은 바로
이 천계서였던 것이다. 역시 바라문수행자인 세라도 그를 따르는 삼백
명의 젊은 바라문들과 함께 싯달타를 찾아가서 제자들과 함께 32상을
확인했다.
22) 베다(Veda)의 상히타(Samhita), 브라흐마나(Brahmana), 아란야카(Aranyaka),
우파니샤드(Upanisad)를 가리키는 것으로, 啓示에 근거한 일련의 原典類를 말
한다. 그것은 브라흐만(梵)에서 나와, ‘말’의 형태로 신이 내뱉은 것이라고 일컬
어진다. 그런데 그 저작자인 인간, 즉 영감을 받은 聖仙은, 직접 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한다. 한편 이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스무르티
(smrti, 聖仙書)가 있다. 스무르티는 슈르티에 대한 보조적 기능을 가지는 것으
로, 啓示에 의한 것이 아니라 聖仙들에 의해서 註釋된 일련의 문헌을 말한다.
따라서 슈르티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는 반면, 스무르티는 상대적 가치를 가
진다고 할 수 있다. (「印度學大事典」, p. 249. 참조).
스승이시여, 힘이 넘치는 분이시여, 당신은 몸이 완전하여 눈부시게
빛나며 태생도 훌륭하고 … 그리고, 태생이 뛰어난 사람이 갖추고 있는
모습(相)은 모두 당신의 몸에 깃들어 있습니다. … 당신은 전륜왕이 되
어 군대의 주인으로서 사방을 정복하여 인도의 지배자가 되셔야 합니다.
왕족이나 지방의 왕들은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고타마시여,
왕 중의 왕으로서 또한 인류의 제왕으로서 통치하십시오.23)
23)『수타니파타』, 金雲學 譯, (서울: 汎友社, 1998), p. 122.
이렇게 직접 확인한 세라 바라문은 싯달타를 눈앞에서 찬양하였다.
여기에서 이미 전륜성왕이라는 이상적인 국왕의 출현은 바라문수행자
들 사이에서도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륜성왕은 군대
를 거느리고 사방을 정복하여 전인도의 지배자가 되지만, 가만히 있어
도 많은 크샤트리야나 크고 작은 나라의 왕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충성
을 맹세하며 최고의 왕으로 모실 것을 간청한다. 따라서 왕 중의 왕일뿐
아니라 인간사회 최고의 통치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전륜성왕의 사상은 언제부터 나타났으며 그가 지배하는 국
가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이상적인 제왕이 이 세계에 출현해서 전 인도를 통일할 것이라
는 관념은 일찍부터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지배하는 국가는 치안은 물
론 올바른 질서가 유지되는 가장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
였다.24) 그러나 그런 국왕에 대한 구체적인 호칭은 없었으며 막연하게
인도전체를 지배하는 왕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극히 초기의 불교경
전에서는 ‘쟘푸나무숲(전 인도)의 통치자’라는 관념이 나타나고, 또 인도
신화에서 옛날부터 민중이 우러러보던 국왕인 만다트리는 ‘사주의 왕’이
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인도인들이 기대하는 이러한 이상적 제왕을 가
리키는 것25)이라고 볼 수 있다.
24) 존 스펠만,「古代印度의 政治理論」, 이광수 옮김, (서울: 아카넷, 2000), pp.
292-294 참조.
25) 中村元,「宗敎と社會倫理」, (東京: 岩波書店, 1954), pp. 192-198 참조.
그러나 붓다의 출현 이전에는 부족을 대표하는 수장 정도로 생각되던
왕(rajan)이, 점차 도시국가시대로 접어들면서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한
다. 더구나 부족중심의 농촌제 사회형태는 도시중심의 상업제 사회형태
로 변화해 갔던 것이다. 종래와 전혀 다른 사회구조의 변화는 정치․경
제․사상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쳐, 정치적으로는 농촌중심의 폐쇄
적 부족집단에서 탈피하여 도시중심의 작은 국가들이 난립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이에 따라 부족집단의 수장에 불과하던 왕의 지위는 점차 국
가를 지배하는 권력자의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자산가들의 막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강력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붓다의 활동당시 많은 국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6대국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중에는 공화제를 채택하여 군신이 함께 국가운영
을 논의하는 국가도 있었으나,26) 대다수는 강력한 왕권을 장악한 전제
군주가 지배하였다. 이러한 시대변화는 강력한 국가가 약소국을 병합하
는 전국시대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전국시대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가 그렇지 못한 국가를 병합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추세이다. 따라서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일수록 국왕의 권
력은 더욱 강화되고 그것은 다시 이웃나라의 정복으로 이어졌다. 국력
이 클수록 왕권은 강해지고 왕권이 강해질수록 국력이 커져갔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왕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배
자로 군림하고, 그러한 국왕의 관념은 점차 발전하면서 마침내 모든 국
가를 통치하는 전륜성왕이라는 이상적 제왕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따라
서 구체적으로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전 인도를 통치한다는 관념이, 역
사적으로 볼 때는 인도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야왕조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27) 초기의 불교경전에는 아직 전륜성왕에 대
한 신화는 나타나지 않는다.28) 한편 전륜성왕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
으며, 그가 지배하는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 전륜성왕(Cakravartin)이란
용어에 대한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차크라(cakra)의 의미는
수레바퀴(輪)이다. 그러므로 전륜성왕이란, ‘수레바퀴를 돌리면서 천하
를 다스리는 성스러운 제왕’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수레바퀴를
하늘로부터 받은 전륜성왕은, 그 윤보를 굴리면서 산하를 평정하고 사
방의 항복을 받기 때문에 전륜왕 혹은 윤왕이라고 부른다.29) 그러므로,
「모니어 산스크리트 사전」의 저자인 모니어 윌리엄스는 전륜성왕을 “그
의 전차(수레)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통치자,
즉 황제이자 세계군주”라고 해석한다.30)
26) 中村元,「印度古代史」(上), p. 222-223 참조.
27) “국왕의 권위가 신성시된 것은 마우리야 왕조에 의한 통일국가를 맞이한 이후
부터로, 특히 그후 쿠샤나 왕조시대 이후의 특색이다”. (雲井昭善,「佛敎興起時
代の思想硏究」, (京都: 平樂寺書店, 1967), p. 35 註(12) 참조).
28) 中村元,「宗敎と社會倫理」, p. 192.
29) 輪寶에는 금․은․동․철의 4종류가 있는데, 金輪王은 4洲, 銀輪王은 3洲, 銅輪
王은 2洲, 鐵輪은 南閻浮州를 지배한다고 한다. 또한 전륜성왕은 輪寶 이외에
도 象寶․馬寶․珠寶․女寶․居士寶․主兵寶라는 7寶를 구비하고 있다.
30) 존 스펠만,「古代印度의 政治理論」, 이광수 옮김, (서울: 아카넷, 2000), p. 292.
인간세계의 최고통치자로서 신화화된 전륜성왕의 사상은 특히 불교
에 수용되어 크게 발전해 나간다. 다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전륜성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사방을 정복하는 전인도의 통치자로서, 왕 중의 왕이
며 모든 크샤트리야 왕들의 지도자이며 인류의 제왕이라고 한다.
당신은 전륜왕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사방을 정복하여 잠부주(인도)
의 통치자가 되셔야 합니다.31)
31)『숫타니파타』, 法頂 역, p. 171.
왕족이나 시골의 왕들은 당신께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고타마시여,
왕 중의 왕으로서, 인류의 제왕으로 통치를 하십시오.32)
32) 같은 책, 같은 곳.
아직까지는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은 보이
지 않고 막연하게 미래에 출현할 이상적인 제왕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
이다. 그러나 초기경전 중에서도 늦게 성립된 것에는 그런 이상들이 현
실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상세하게 나타난다. 그가 통치하는 국가는 가
장 이상적인 사회로 백성이 풍요롭고 안락한 사회이다. 또한 높은 도덕
성을 지니면서 신뢰하는 사회이므로 부에 대한 욕심이 없으며 서로 화
합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라고 묘사하고 있다.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이상적 국가가 현실적으로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33)
33)『長阿含經』제6권「轉輪王修行經」(大正藏, 1권 pp. 39-40),『增一阿含經』제44
권(大正藏, 2권 pp. 787-788).
ⅰ. 물자가 풍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안락하고 편안해진다.
ⅱ. 백성은 불교에서 설하는 것과 같이 높은 덕성을 가지고 실천하게 되
며 법을 준수한다.
ⅲ. 전 세계에 산하의 차이가 없어지고 교통이 편리해져 촌락이 가까워
지게 된다.
ⅳ.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화합하고 언어도 하나가 된다.
ⅴ. 보석이 남을 정도로 많이 산출되어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분쟁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한 대국만이 가능한 세계
이다. 특히 산하의 차이가 없어지고 언어가 하나로 통한다는 기대는 결
정적으로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을 더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
왕조를 달성한 진의 시황제에 의해서 실현되었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
다.34) 전쟁이 끝난 후 물자가 비축되어 풍부해지면 당연히 생활이 안락
해져서 정신적․경제적 여유가 생길 것이며, 따라서 부의 축적에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역시 통일왕조에서
만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와 같은 세계는 불교의 이상적 사회이므로 불
교도들이 요구하는 높은 도덕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34) “秦은 春秋戰國의 오랜 분열의 뒤를 이어, 정치제도나 나아가 度量衡․通貨․
文字․車軌 등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것에 대한 제도에서도, 철저한 통일을
꾀했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상의 세계에도 미치게 되었다”. (森三樹三
郞,「中國思想史」(上), (東京: 第三文明社, 1996), p. 206).
당시 인도인의 이러한 이상적 사회에 대한 희망은 오직 통일국가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혼란한 전국시대 국가 간의 대결은
수많은 희생을 가져왔으며 불안한 정세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상상하기
란 어렵지 않다. 전란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한
국가를 기대하는 일은 당시의 백성에게는 더없는 희망이라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이런 이상은 전쟁이 사라진 완전한 통일국가에 의해서만 가능
한 것이며 따라서 전 인도를 통일할 위대한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통치자는 그들이 기대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졌
으며, 그것이 곧 전륜성왕으로 나타났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에 부응했던 인물이 바로 아쇼카(Asoka)왕이었던 것이다.
역사상 명실공히 전륜성왕으로 평가받는 아쇼카왕에 대한 인도인들
의 존경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현재 인도국기의 문장
으로 사용하는 법륜이 다름 아닌 아쇼카왕 석주의 맨 위를 장식하던 조
형물이란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법륜은 녹야원에서 이루어진 초전법륜
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녹야원에 세워진 석주의 의미는 불교적 이
념에 근거하여 자비와 평등의 정치를 펼쳐나가겠다는 아쇼카왕의 의지
를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는 힌두교이다. 불교와 쟈이나교를 포함한
인도의 많은 종교들은 거의 대부분 힌두교에 수용되어 오늘날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35) 힌두교가 국가적인 종교임에도 불구하
고 아쇼카왕의 석주에 새긴 불교의 상징인 법륜을 현대 인도의 국기문
양으로 사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35) 인도의 정확한 종교인구를 확인할 수는 없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를 비롯하
여 회교, 기독교, 배화교, 유태교 등 많은 외래종교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헌법
은 모든 종교에 대해 자유를 보장하고 동등하게 대우한다. 통계자료에 따라 차
이가 나지만 불교나 쟈이나교는 거의 1%미만 정도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신분.종교.인종과 무관하게 현재 모든 인도인에게 전
륜성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아쇼카왕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특정
한 종교와 상관없이 아쇼카왕은 모든 통치자의 표상이 되고 있음을 보
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쇼카왕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이념으로 정치를
했기에 모든 인도인에게 전륜성왕으로 숭앙되는 것일까.
역사상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야(Maurya)왕조는 아쇼카왕의
조부인 찬드라굽타(Chandragupta)로부터 시작된다. B.C.317년경, 마가
다국에서 출현한 찬드라굽타는 난다(Nanda)왕조의 제9대 국왕인 다나
난다(Dhanananda)를 살해하여 왕조를 전복시키고 나아가 서부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 세력을 몰아냄으로서 마침내 인도사상 최초로 통
일왕조를 건립했다. 찬드라굽타의 이러한 군사적 승리는, 그의 재상이던
카우틸리야(Kautiliya)의 역할이 컸다. 특히 카우틸리야는 ‘국왕즉국가’
라는 입장에서 국가의 통치술에 관한 정치서라고 할 수 있는「실리
론」36)을 지어 전형적인 전제국가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에 의하면, 국
가는 오직 국왕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백성은 국왕의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조부 찬드라굽타와 아버지 빈두사
라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아쇼카왕이다. 그의
재위(대략 B.C.268∼232경)기간 동안 마우리야왕조는 인도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장악한 후 융성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36)「實利論」(Artha-sastra)을 카우틸리야의 저술이라고 보는 것이 통례이다. 카우
틸리야는 인도 최초로 대제국을 건설한 찬드라굽타왕의 宰相으로, 인도통일을
성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실리론」의 연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異論이 많다. M. Winternitz 같은 학자는 성립시기를 A. D. 3세기 이전
으로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실리론」
의 저자를 카우틸리야라고 하는 점에도 異論이 있으나, 역시 유력한 주장은 아
니다. 이 책의 저자로 카우틸리야를 비롯한 챠나캬(Canakya), 비슈누굽타
(Visnuguota) 3사람이 거론된다. 아르타(artha)는 實利를 의미하며, 다르마
(dharma,法)․카마(Kama,愛)와 함께 인생의 최종목적으로 들고 있다. 여기에
덧붙어 모크샤(moksa,解脫)를 4번째로 드는 경우도 있는데,「실리론」은 그 중
에서 특히 실리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이 책에서 설하는 것은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국가의 질서유지에 필요한 여러 일과 국왕으로서 필요한
모든 사항을 논술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외교․군사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
는 책이다.(水野弘元,「新․佛典解題事典」, (東京: 春秋社, 1971), pp. 332-333 참
조).
아쇼카왕은 일찍이 불교에 귀의했는데 즉위관정 후 7년째 되던 해 우
바새(upasaka)가 되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37) 이어서 9년째 되던
해 영토의 확장을 위해 카링가와 대규모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아쇼카
왕의 승리로 끝났으나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다. 비록 전쟁에서는 승
리했으나 그것으로 인한 백성들의 공포와 분노를 직접 전투의 선두에
섰던 아쇼카왕은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잔인한 전쟁의 참상을 직접
체험한 그는 뼈저린 후회와 책임을 통감한다. 그리고 마침내 단호한 결
심을 내린다. 즉 전쟁에 의한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며 ‘법에 의한
승리’야말로 진정한 승리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을 스스로 결심하는 한편, 평화롭고 행복한 국가를
현실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남은 생애를 바치기로 맹세했다.38) 지금까
지 카우틸리야적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국왕 한사람의 욕망을 위한 정치
로부터 모든 인간을 위한 정치로 바뀌게 된다. 아쇼카왕의 이러한 통치
이념의 전환은, 자비와 평등이라는 불교의 근본정신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국왕의 의무라고 결론지었
다. 이것이 카링가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인도최대의 절대권력자가 내린
정신적 전환이었던 것이다.
37) 小磨崖法勅 제1장. “2년 반 동안, 나는 優婆塞(재가불교신도)였지만, 1년 동안은,
열심히 精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1년 동안은, 나는 僧伽를 따라서 열심히
精勤했다 ….” (塚本啓祥,「アショ-カ王 碑文」, 東京: 第三文明社, 1976, pp.
59-60 참조).
38) 十四章摩崖法勅. 제13장. “天愛喜見王(아쇼카왕) 灌頂8년에, 칼링가가 정복되었
다. 1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이송되었고, 10만의 사람들이 거기서 살
해되었으며, 또 그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 이래, 칼링가가 정복된
지금, 天愛의 열성적인 法의 實修, 法에 대한 愛慕 및 法의 敎誡가 (행해졌다)
… ”. (塚本啓祥,「アショ-カ王 碑文」, p. 102 上).
그는 먼저 이러한 자신의 이상을 새긴 석주를 세우고 변경에는 암석
을 깎아 그 내용을 새겨서 백성들에게 널리 선포했다.39) 아쇼카왕의 조
칙문은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방대한 영토를 획득했다는 자신의 권위
에 대한 자만심이나 공적을 자랑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과 나아가서 그 때문에 동원된 동물에까지 고통을 준 것에
대해서 크게 참회하고 있음을 밝혔다.40) 그리고 이러한 참회와 반성 위
에서 겸허한 자세로 이상적인 국가를 현실정치 위에서 실천해나갈 것을
백성들 앞에 약속했던 것이다. 이상적 국가란 모든 존재의 이익과 안락
과 행복을 가져오게 하는 정치를 시행하는 국가로, 오로지 통치자의 ‘정
법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전인도를
장악한 대제국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작은 국가의 왕
과 똑같이 스스로를 ‘왕’(rajan)이라고 불렀다. 대제국의 수장에 어울리
게 ‘대왕’(maharaja)라거나 ‘인도의 왕’ ‘세계의 왕’이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41)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겸허한 자세로, 오직 ‘법의 실천’
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런 신념 위에서 실천한 아쇼카왕이 통치내
용은 어떠할까.
39) 七章石柱法勅. 제7장. “왜냐하면, 이렇게 준수하면, 현세와 미래(의 이익과 안락)
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法勅은, 灌頂27년에, 나에 의해서 銘刻되었다. 이
것에 관해서, 天愛는 말한다. 이 法勅은, 石柱 또는 石板이 있는 곳에는, 이것을
永續하게 하기 위하여, 銘刻되지 않으면 안 된다” (塚本啓祥,「アショ-カ王碑
文」, p. 136 참조).
40) 칼링가(Kalinga)국의 카라벨라(Kharavela, 약 B. C. 2세기 - B. C. 1세기)왕의
비문에는 그를 ‘聖帝’(전륜성왕, cakravartin)라고 하는데, A. D. 5세기 이전의
비문에서, 국왕을 ‘聖帝’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의 경우뿐이다. ‘聖帝’(전륜성
왕)라는 말과 그 신화적 理想은 아마 그 이전에 성립되어 있었을테지만, 아쇼카
왕의 詔勅文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아쇼카왕의 詔勅文이 그 자신에
게 유래한데 반하여, 카라벨라왕을 칭찬한 비문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
다고 하는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쇼카왕의 詔勅文에는
왕자신의 겸허한 종교적인 반성과 참회가 서술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카라벨라
왕이 씩씩한 무단적 성공자이며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어, 아쇼카왕과 대비된다.
(中村元, ‘轉輪聖王と呼ばれたカリンガ國王カ-ラウェ-ラ’,「印度學佛敎學硏究」
제2권 1호, pp. 109-110 참조).
41) 中村元.「宗敎と社會倫理」, (東京: 岩波書店, 1954), p. 161참조.
첫째, 정법의 실천이다.
아쇼카왕은 모든 인간이 행해야 할 보편적인 원리를 ‘법’(dharma)이
라 하고 여기에 근거한 국가의 통치를 널리 공포했다. ‘법’이란 영원히
타당한 법칙으로, 예전에도 존재했으며 현재도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법’에 대한 아쇼카왕의 이해 속에
는 붓다가 강조한 ‘법’의 설명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에 바르게 깨달은 사람들, 미래에 깨달을 사람들, 현재에 바르게
깨달은 사람(佛), 많은 사람들의 근심을 없애는 사람 --- 그들은 모두
‘바른 법’을 존경하고 있었고 또한 존경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깨달은 사
람(佛)의 정함이었다.42)
42) SN. VI, 1, 2. (中村元.「原始佛敎」, 양정규 역, (서울: 비봉출판사, 1981), p. 107).
즉 삼세의 모든 부처는 이 ‘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법에
근거하여 무수한 부처가 출현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쇼카왕이 강
조한 법도 시간과 공간을 떠난 영원히 존재하는 보편적 원리라는 것이
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란 곧 ‘법의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며, 법의 실천
을 위한 노력에 의해서 전륜성왕으로 평가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
의 실천을 위해서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는 물론 멀리 국외까지 사
절을 파견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게 했다.43)
43) 塚本啓祥,「アショ-カ王」, (京都: 平樂寺書店, 1978), pp. 323-331 참조. 여기에
는, 여러 자료들에 의해 조사한 傳道師의 이름과 派遣地의 이름이 도표로서 상
세하게 나와 있다.
법의 실천이란 한마디로 백성을 위한 정치 그것은 백성의 이익과 안
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정치이다. 따라서 국왕이란 절대군주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백성과 더불어 그들의 안락과 이익
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곳에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국왕의
의무일 뿐 아니라 국가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백성은 평안하고
안락하게 살아야 될 권리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놀랄만하
다.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이런 주장은 오늘날에도 인권을 강조하는
선진국에서나 찾을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이런 주장이 백성들의 요구
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절대군주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인류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언급했듯
이 국왕의 존재이유를 사회질서와 치안유지에 있다고 보고 조세를 그
대가로 국왕에게 지불하는 봉급이라고 생각했던 초기불교의 시각과 궤
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44) 현재 인도사회에서 불교는 거의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45)
44) 본론 2장 각주 6) 참조.
45) 현대인도인들이 아쇼카왕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이 있어, 조금
길지만 발췌.인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도가 수세기에 걸쳐 기다렸던 대망의 독립이 되자, 2500
년 전 아쇼카왕의 정치이상은 前面에 나서게 되었다. 석존이 최초로 설법한 사
르나트(鹿野苑)에 있던 아쇼카왕 石柱꼭대기에는, 4마리의 사자상이 새겨져 있
는데, 그것은 오늘날 印度聯邦의 상징이 되었다. 1950년 1월 26일, 독립민주공
화국으로서 인도연방의 독립식전이 델리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보도에 의
하면, 이날 새로운 대통령 라쥰드라․프라사드 씨의 연방대통령 취임식이 다르
바아홀에서 열렸다. 당일 장엄하고 화려한 의자에는, 소형의 아쇼카왕 석주 꼭
대기의 사자가 새겨져있고, 바로 뒤에는 鹿野苑에서 발견된 等身大의 불상이
마치 지장보살처럼 푸라사드씨를 내려보고 있었다. 프라사드씨는 실로 부처님
앞에서 대법관에게 인도공화국 초대대통령 선서를 했던 것이다.
취임식을 마친 대통령은, 빨간 예복을 입은 기병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무개
마차로 델리 큰길을 전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한바퀴 돌고 나서 아루윈스타디
움 광장에 도착하여 열병식을 가졌다.---대통령이 앉아있는 좌석위 메인스텐드
에는, 4m 높이의 아쇼카왕석주 꼭대기의 4마리 사자상이 장식되어 식장을 굽어
보고 있었다.
이날, 인도의 장교들은 군복에서 영국의 記章을 떼어내고, 아쇼카왕의 獅子記章
을 달았다. 이 4마리의 사자상은, 大統領旗뿐 아니라, 인도정부의 문서와 화폐
를 비롯하여 인도를 상징하는 모든 것에 붙어있다. 녹야원 아쇼카왕석주의 꼭
대기 臺坐에는 法輪이 새겨져 있어, 석존의 최초설법(初轉法輪)을 상징하는 것
인데, 그 역시 인도공화국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다. 아쇼카왕의 정치이상은, 오
늘날 인도연방의 지표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中村元.「宗敎と社會倫理」, pp.
150-151 참조).
그런데, 아쇼카왕이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최선의 노
력을 다했던 것은, 법의 실천자체를 최상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실로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 숭고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46)고 생각한 그는,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구분하여, 현세에 속하는 것과 피안에 속하는 것으로 나누었다.47) 특히
피안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란 종교적 의미로 현세를 초월한 것이지만,
이것은 모두 법의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열
렬한 종교적 신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46) 七章石柱法勅. 제6장 “灌頂12년에, (모든) 法勅이 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나에 의해서 銘刻되어졌다. 그러므로, 이것을 犯하지 말고, 각각의 법의 增進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세간의 이익과 안락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다)고 (생각하
여), 나는 (나의) 親戚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近親者에 대해서도, 遠緣者에
대해서도, 누구에게라도 안락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여, 이와 같
이 실행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모든 部衆에게도 주의를 기울인다 …. (塚本啓
祥,「アショ-カ王碑文」, p. 131 참조).
47) 十四章摩崖法勅. 제10장. “ … 명성 또는 칭찬의 어떤 것도 大利를 가져온다고
는 생각하지 않는다. … (중략). 즉 天愛喜見王이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이것
은 모두 來世에 관한 것(福德) 때문이며, 모든 사람에게 위험을 주기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것, 즉 非德은 위험하다 …”. (塚本啓祥,「アショ-カ王碑文」,
p. 97 참조).
둘째, 종교정책의 관용이다.
카링가 전쟁 후 아쇼카왕은 불교를 국가적 종교로 삼고 독실한 신봉
자가 되었다. 특히 자신이 신앙하는 법의 내용을 석주나 암벽에 새겨 백
성들에게 알리는 한편 각지로 전법사를 보내 법의 실천을 권유함으로서
불교는 널리 유포되었다. 이와 함께 불법의 전파를 위해 시리아와 이집
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등 해외까지 전법사를 파견하여 불교의 홍포에
힘썼다.48) 전설에 따르면 아들인 마힌다(Mahinda) 왕자를 스리랑카로
보내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고 하는데, 이후 그곳은 남방불교의 중심
지가 되기도 했다. 또한 아쇼카왕 자신도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사탑을 건립하고, 붓다의 탄생지와 성도지 등을 찾아서 기념탑을 세우
고 성지로 삼는 ‘법의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49)
48) “그런데, 과거 오랫동안, 法大官이라고 부르는 官吏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
러므로 灌頂13년에 法大官이 나에 의해서 임명되었다. 그들은, 요나, 캄보디아,
간다라, 랏티카, 피티니카에서, 혹은 다른 서방의 이웃나라 사람이 사는 곳에서,
法의 확립과 法의 증진을 위해, 法에 전념하는 자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모든
종파에 관해서 종사하고 있다 … ”. (塚本啓祥,「アショ-カ王碑文」, 1976, pp.
90-91 참조).
49) 十四章摩崖法勅 제8장. “과거 오랫동안, 여러 왕들은 이른바 오락적인 순례를
나섰다. 여기(오락적인 순례)서는 수렵이나 그밖에 유사한 즐거운 일들이 행해
졌다. 그러나 天愛喜見王은 灌頂10년에 三菩提를 방문했다. 이것에 의해서, 法
의 巡禮가 시작되었다. 여기 法의 巡禮서는 다음과 같은 일, 즉 沙門, 婆羅門에
게 대한 방문과 보시, 장로에 대한 방문과 금전의 分與, 지방의 백성에 대한 접
견과 법의 敎誡와 법의 試問이 행해졌다 … ”. (塚本啓祥,「アショ-カ王碑文」,
p. 94 참조).
이처럼 불교를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나, 그는 결코 다
른 종교를 배척하거나 억압하는 일은 없었다. 전통적인 바라문교를 위
시한 당시의 여러 종교들 즉 쟈이나(Jaina)교․아지비카(Ajivika)교 등
도 똑같이 보호하고 지원하였다.50) 특히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교법대
관(dharmamahamatra)을 설치하여, 모든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 태도로
법의 증진에 힘쓰고, 평등하게 보호하고 원조하도록 하였다.51) 아쇼카
왕에게 법의 실천이란 특정한 종교의 신앙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종교
에 근거하여 화합하고 협동하여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따
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한 존재라는 인식 아래,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자비정신과 도덕성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선을 지향하는 순수한
종교적 이념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어떤 종교나 교리에 관계없이 그것
이 곧 법의 실천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실
천하는 종교인 이상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해야 된다는 확신이 여러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로 나타났던 것이다. 역사상 종교간의 대립
과 항쟁은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특정한 종교를 신봉하는 제왕이 등장
했을 때 그것과 다른 종교를 탄압하거나 박해하는 일은 수없이 많다.52)
비록 종교에 대한 관용정신과 관대한 태도가 인도의 종교적 환경이라
하더라도, 아쇼카왕의 이와 같은 실천행은 인류역사상 경험한 적이 없
을 것이다. 전륜성왕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여기서 다시 한번 엿볼 수 있
다.
50) 七章石柱法勅 제7장. “ … 또, 나의 이 法大官들은, 出家와 在家에게 이익을 주
는 여러 일에 종사한다. 또, 모든 宗派에 관해서도 종사한다. 僧伽의 일에 관해
서도, 이들은 종사하도록, 나에 의해서 命해졌다. 마찬가지로, 婆羅門이나 아지
비카에 관해서도 또한, 이들은 종사하도록, 나에 의해서 命해졌다. 니간타에 관
해서도 또한, 이들은 종사하도록, 나에 의해서 命해졌다. 여러 가지 宗派에 관해
서도 또한, 이들은 종사하도록, 나에 의해서 命해졌다. 각각의 大官은, 각각의
宗派에 관해서, 각별하게 종사하도록 命해졌다. 그러나, 나의 法大官은, 이들 및
다른 모든 宗派에 관해서 종사한다 …”. (塚本啓祥,「アショ-カ王碑文」, pp.
133-134 참조).
51) 塚本啓祥,「アショ-カ王」, (京都: 平樂寺書店, 1978), pp. 225-233 참조.
52) 小口偉一․堀一郞 監修,「宗敎學辭典」,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73), pp. 466- 469 ‘政治と宗敎’ 항 참조).
셋째, 보은사상의 실천이다.
정치란, 자신이 백성에게 은혜입고 있는 것에 대한 보답행위라는 것
이 아쇼카왕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보은해야 한
다는 점을 강조했다.53) 이런 이유로 인간은 물론 동물에게도 그들의 입
장에서 수많은 복지사업을 시행했다. 이러한 그의 정치철학은 불교의
연기설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즉, 모든 존재는 다양한
조건 즉 여러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54) 따라서 모든 것
은 서로가 의지하는 관계이므로 항상 상대의 은혜를 감사히 여겨야 된
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인간으로서 반드시 보은할 대상으로 4
가지 즉 부모.중생.국왕.삼보의 은혜를 들어 사은이라고 한다. 사은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55) 어째든 국왕에 대한 은혜 혹은 국가에 대한 은
혜는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국왕은이란 백성이 국왕에게
입고 있는 은혜를 늘 감사히 여기며 잊지 말고 보답해야 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53) 十四章摩崖法勅 제6장. “… 왜냐하면 나에게는, 一切世間의 이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 근본은 이것, 즉 努力
과 政務의 裁斷이다. 실로, 一切世間의 이익보다도 중요한 사업은 존재하지 않
는다. 따라서, 내가 어떠한 노력을 기우리더라도, 그것은 有情에게 (짊어지고 있
는 의무인) 債務를 이행하기 위함이며, 나아가, 그들을 현세에서 안락하게 하고,
또 來世에서 天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 (塚本啓祥.「アショ-カ王碑文」,
pp. 92-93 참조).
54) 多屋賴俊 外 編,「佛敎學辭典」, (京都: 法藏館, 1976), p. 43 ‘緣起’ 항 참조.
55) 같은 책, p. 47, 182의 ‘恩’ 및 ‘四恩’ 항 참조.
그러나 아쇼카왕이 생각하는 보은이란 정반대 입장에서의 보은이다.
모든 인간은 서로서로 은혜를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존재이며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일체의 살아있
는 모든 것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수많은 존재
들 중에서 특별히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깊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중생은에 대한 절실한 자각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절대군주인 자신의 통치행위를 백성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
한 제왕은 역사상 아쇼카왕이 유일할 것이다. 그에게 통치행위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것이 인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통일왕조
의 절대군주 스스로가 확신한 것이다.
넷째, 사회사업을 통한 백성의 구제이다.
아쇼카왕이 전력을 기울려 시행한 사회사업의 근원에서 무엇보다 생
명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와 존
엄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은 많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이외의 생명에 대
한 소중함을 인간과 똑같이 평등하게 강조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
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이 삶이 끝나면 윤회
의 굴레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오직 스스로의 업
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따라서 끝없이 순환하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특정한 생명만이 소중할 수는 없다. 생명자체는 존재양태나 모습과 상
관없이 본질적으로 동등한 가치인 것이다.
이러한 이념에서 나온 아쇼카왕의 사회복지사업은 불교에서 강조하
는 자비정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물론 동물에까지 생명의
소중함이 배려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시행한 몇몇 사회
사업을 보면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인간을 위한 병원은 물론 동물
을 위한 병원도 설립했으며, 약초를 재배하여 언제라도 필요한 약재를
충분히 공급하도록 했다. 또한 거리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휴게소를 두
어 백성을 휴식케 하는 동시에 동물도 쉴 자리를 마련했으며, 많은 우물
을 파서 사람과 동물에게 언제나 물을 공급하고, 도로 옆에는 일정하게
가로수를 심어 사람과 동물에게 그늘을 제공했던 것이다.56)
56) 七章石柱法勅 제2장. “ … 또한 나에 의해서 多種의 眼의 보시가 행해졌다. 二
足類․四足類․鳥類․水棲類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이익을 주는 행위, 내지는
생명의 贈與가 나에 의해서 행해졌다. 또한 나에 의해서 수많은 善事가 행해졌
다 … ”. (塚本啓祥,「アショ-カ王碑文」, p. 126 참조).
불교의 진정한 자비정신에 바탕을 둔 아쇼카왕의 사회사업은 인간은
물론 동물에 대한 배려까지 이어졌으며, 이러한 복지정책은 인도의 전
통으로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하였다.57)
57) 中村元,「古代印度史」(上), p. 553 참조.
4. 국왕의 역할과 불교도의 기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법의 구현’58)에 있
다. 그리고 그 목표를 지향하는 집단이 승가(samgha)이다. 그러므로 승
가는 오직 법을 구현하기 위해서 일체의 세속적 욕망을 버린 출가수행
자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승가란 오로지 깨달음이라는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이므로, 승가 이외 다른 집단의 목표는 상대적 가치를 가
질 뿐이었다. 비록 인간집단의 최대단위인 국가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
니었다. 따라서 국가의 수장인 국왕이라 하더라도, 그가 지향하는 목표
는 상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절대가치인 법을 추구
하는 승가가 상대가치를 지향하는 세속적 목표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초기불교는 국가에 대해 큰 의
의를 두지 않았다. 초기불교가 국가나 국왕에 대한 체계적인 교설이 없
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59)
58) 法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의 dharma이지만,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기는 불가능
하다. 어원적으로는 ‘保持하다’, ‘지탱하다’를 의미하는 동사의 어근 dhr-에서 파
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保持하는 것’, 특히 ‘인간의 행위를 保持하는 것’, ‘행위
의 규범’, 예를 들면 관례, 습관, 의무, 사회제도, 법률 등을 의미한다. 또한 이들
규범이 목적으로 하는 善, 德, 正義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그 반대어는
adharma(非法, 惡)이다. 법은 또한 인륜을 실현시키는 것과 같이 인간을 유지하
는 것으로서의 절대자, 진리도 의미하며, 종교적 행위의 규범이라는 점에서 제
식규정, 제사행위, 종교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규범이 설하는
교설도 dharma이다.
59) “원시불교는 전체적으로, 정치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중점을 두지 않고 있다. 방
대한 聖典 속에 散說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교설의 내면에는 일관해서 理
法尊重의 태도와 慈悲精神의 강조를 엿볼 수 있다. 다만 정치적 문제에 관한 교
설은 체계화되지 않았다. 불교교단이 정치성이 박약하다는 사실은, 그후 교단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中村元,「宗敎と社會倫理」, p. 142 참조).
당시의 불교도들은 국왕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초기불전의
내용을 살펴보자.
불교의 이상적인 국가는 법(dharma)에 의해서 통치하는 법치국가이
다. 여기서 ‘법치’란 국왕의 자의로 제정된 법 즉 왕법에 의해서 통치하
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에 의한 정법 즉 불법으
로 통치하는 것을 뜻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법
이란 근본적인 인륜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먼저 자비정신에 근
거해야 하는 것이다.60) 국왕과 백성이라는 상하관계에서 만들어진 규범
이 아니라, 나와 너라는 수평적 사고 위에서 이웃에 대한 배려심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비에 근거한 규범이며, 그렇게 되었
을 때 비로소 불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국가나 국왕의 이익
을 위한 법이나 생명의 자비심에 근거하지 아니한 법은 불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국왕은 자비심에 근거한 법을 실천하는 국
왕이여야 한다는 점을 초기불교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왕은 법을 행하
라”61)고 하는 직접적인 권유에서 “왕이 만일 법을 따른다면 전왕국은
안락을 누리지만, 만일 왕이 비법을 행하면 전왕국은 고통에 빠진다”62)
고 하여, 백성에게 안락을 주는 정치야말로 정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붓다가 구라단두(究羅檀頭)바라문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빌어서, 국가가 평온하고 백성들에게 행복과 안락을 주는 정치를 구체
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60)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慈悲라는 말은, 慈와 悲가 결합된 말이다. 慈는
산스크리트 maitreya 혹은 maitri의 漢譯으로, 중생을 끝없이 사랑하여 기쁨을
준다는 與樂의 의미이고, 悲는 karuna의 譯語로, 중생의 괴로움을 가엽게 여겨
그 괴로움을 없앤다는 拔苦의 의미인데, 이 둘을 합쳐서 慈悲라고 부른다. 佛의
慈가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삼아 同心同調하는 모습을 同體大悲
라 하며, 그 悲의 광대함을 無蓋大悲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더 이상 위가
없는 크고 넓은 자비를 大慈大悲, 大慈悲라고 한다. 경전에 의하면, 자비를 다시
衆生緣의 자비․法緣의 자비․無緣의 자비 등 3종으로 분류하여, 凡夫와 阿羅
漢의 二乘 및 初地 이상의 菩薩과 佛의 자비에 대해서 각각 설명하고 있다. (多
屋賴俊 外 編,「佛敎學辭典」, p. 180. ‘慈’항 참조).
61) Jataka. V, p. 123. (南傳藏 제36권, 小部經典14,『三鳥本生談』, pp. 19-23).
62) AN. II, p. 76 G. (南傳藏 제18권. 增支部經典2, p. 131).
붓다는 왕의 고문인 구라단두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고 한
다. 옛날 마하비지따라는 왕이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왕의 고문인 바라문은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의 국토에는
재액과 고난이 많습니다. 마을과 거리에서는 살상이 일어나고, 도로에서
는 약탈을 볼 수 있습니다. 전하는 이렇게 재액과 고난이 많은 나라에서
세금을 징수한다면, 전하는 불법행위자를 면할 수 없습니다. 전하는 ‘나
는 (범인을) 사형․포박․몰수․견책․추방에 의해서 이 약탈의 고난을
없애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약탈의 고
난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만일 사형을 면한 자가 있다
면, 후일 전하의 국토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방책에 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약탈의 고난을 올바르게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전하는 전하의 국토에서 농업과 목축에 힘쓰는 자
에게는 종자와 먹는 것을 주고, 상업에 종사하는 자에게는 자금을 주고,
관직에 있는 자에게는 식사와 봉급을 주십시오. 이 사람들이 각자의 직
업에 몰두한다면, 전하의 국토를 어지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
면) 전하에게는 엄청난 재산이 쌓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안녕을 유지하고
있는 국토에는 재액이 없고 고난이 없어, 사람들은 환희하며 반드시 가
슴에 아기를 안고 춤추면서 집의 대문을 잠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
고 하였다. 그래서 국왕이 이 바라문의 가르침대로 실행했더니,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고 한다.63)
63) DN I, p. 135. (南傳藏 제6권, 長部經典1,『究羅檀頭經』, pp. 198-199).
예나 지금이나 국가란 범죄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살상도 약탈도 도
난도 일어난다. 그러나 국가의 수장은 그런 백성의 고통과 관계없이 많
은 세금을 징수하여 재물을 늘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국법에 반하는 행
위에 대한 처벌은 더욱 엄격해진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통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정법의 실천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
실할 수 있도록 국가가 그들에게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정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가 혼란하지 않음으로서 국왕은 재물
이 쌓이고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이상적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희망이고 영원한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정신은 국왕이 기울여야할 백성에 대한 자비심이다. 왜냐하면
자비심이란 불법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법에 의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국왕자신이 모범을 보여
야 한다. 국왕이 그렇게 함으로서 백성들이 따라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
다. 즉
국왕이 올바를 때는 그의 민중도 또한 올바름이 있는 자가 된다.64)
64) Jataka. IV, p. 176. (南傳藏 제34권, 小部經典12,『闍那散陀王本生談』, p. 57).
대왕이시여! 왕은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왕이 올바르지 못할 때는, 그 관리들도 또한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
니다.65)
65) Jataka. V. p. 109. (南傳藏 제36권, 小部經典14,『三鳥本生談』, p. 1).
이와 같이 국왕이 솔선수범해야 하는 이유는, 국가의 존망과 백성들
의 행복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국왕이 교만하거나 방탕하여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필연적으로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국왕은 무거운 책임을 지고 맨 앞에 서서 백성들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
고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국왕이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백성은 행
복과 번영을 누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재액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백성에게 행복을 갖다 주는 왕권의 기준이 정법인지
아닌지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중요한 국왕의 역할에 대해서 강
을 건너는 소 떼의 우두머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물을 건너는 소 떼의 왕이 곧바로 걸어가면 모든 소는 곧바로 걸어간
다. --- (중략) ---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중에서 최상자로 인정받고 있
는 사람이 만약 정의롭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의 길을 갈 것이다. 왕이
만약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나라가 안락하게 된다.66)
66) Jataka. V, p. 222 G. (南傳藏 제36권, 小部經典14,『움바단티녀本生談』, pp.
177-178).
마치 소 떼들이 앞장서가는 우두머리 뒤를 따라가듯이, 백성은 국가
의 우두머리인 국왕을 뒤쫓아 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국왕이
란 세속계의 우두머리이고 최상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정법에 따라서
정의로운 길로 나간다면 백성은 모두 정법에 따라서 각자의 길로 가겠
지만, 만약 비법을 행한다면 국가가 어지러워져서 모든 사람들이 고통
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국가의 우두머리인 국왕이 수범을 보임
으로써 대신을 위시한 모든 사람이 뒤를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만일 법에 따르지 않는 일을 행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더욱 더
(법에 따르지 않는 일을 한다). 그가 만일 법을 실행한다면, 다른 사람들
은 더욱 더 (법을 실행한다).67)
67) A.N. II, p. 76 G. (南傳藏 제18권, 增支部經典2, p. 131).
이렇게 초기불교는 국왕의 도덕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출가.재가
에 관계없이 불교도의 기본적인 실천행은 오계68)이다. 국왕에게도 당연
히 오계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69) 이것은 국왕으로서 실천해야할 귀
감이나 모범일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도덕까지도 기대하
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8) ① 不殺生戒, ② 不偸盜戒, ③ 不邪婬戒, ④ 不妄語戒, ⑤ 不飮酒戒의 다섯 가지
를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戒律이라고 같이 이야기하지만, 인도에는 계율이란 말
이 없다. 일반사회의 개념과 비교한다면, 戒는 도덕에 해당하고, 律은 법률에 해
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戒는 넓고 정신적이고 자율적인 것이며, 律은 좁고,
형식적이며 타율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水野弘元,「佛敎要語の基礎知識」,
(東京: 春秋社, 1977, pp. 195-196).
69) Jataka. III, p. 273. (南傳藏 제32권, 小部經典10,『難提鹿王本生談』, pp. 196-
197).
또한 이상적인 왕의 조건으로 특히 중시되는 ‘10가지 왕법’이 있다. 초
기불전에는 이 “10가지 왕법을 어지럽히지 않고 올바르게 국가를 통치
했다”고 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올바른 법이라고 보았다.70) ‘10가지 왕
법’이란, 보시(dāna)․지계(sīla)․捨離(pariccaga, 施捨)․정의(ajjava,
정직)․유화(maddava, 온화)․정진(tapo, 노력)․무진(akkodha, 무진
에)․무해(avihimsa, 불가해)․인욕(khanti)․무치(avirodhana, 부쟁) 등
을 말한다.71) 이것은 모든 불교도의 기본적 실천행인 ‘팔정도’나 ‘육바라
밀’의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결국 불교의 실천행으로
국가를 통치한다면 그가 바로 이상적인 국왕이라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0) Jataka. III, p. 274, p. 279. (南傳藏 제32권. 小部經典10『難提鹿王本生談』, pp.
197-199).
71) 괄호 속의 譯語는, 앞에 나오는 산스크리트의 또 다른 번역이다. 앞의 譯語는『南傳藏』
의 번역이며, 괄호 속의 번역은 中村元 선생의 번역이다.
이러한 덕목은 국왕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이다. 그러
므로 당시 인도인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덕을 국왕도 준수해야 하며,
국왕이 덕을 갖춘다면 자연히 선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국왕이 부덕하다면 백성의 타락은 물론 천지자연까지도 어
지러워져서 나라 전체가 혼란해진다고 했다.
장래의 국왕들에게 정의감이 없어질 것이다. 그들이 정의롭지 못하면,
온 나라 안의 바라문도 자산가도 도시인도 지방인도, 사문․바라문에 이
르기까지 모든 인간이 정의롭지 않게 된다. 또한 그들의 수호신도, 공양
을 받는 신도, 나무신도, 허공에 있는 신들까지도 정의롭지 않게 되어버
릴 것이다. 이러한 정의롭지 못한 국왕들의 국토에서는, 바람도 일정치
않고 심하게 불어서, 공중의 신전을 흔들리게 하여, 그 흔들림 때문에
신들이 노하여 비를 내려주지 않고, 비록 내려주더라도 전 국토에 골고
루 내려주지 않아, 경작이나 씨뿌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토의 경
우와 마찬가지로 지방, 마을, 연못, 늪에도 골고루 내리지 않아, 연못의
위쪽에 내리면 아래쪽에 내리지 않고, 아래쪽에 내리면 위쪽에 내리지
않을 것이다. 어떤 곳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곡식이 익지 않으며, 어떤
곳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곡식이 말라죽으며, 또 어떤 곳에는 비가 적
당히 와서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72)
72) Jataka, I, p. 340. (南傳藏 제29권, 小部經典7,『大夢本生談』, pp. 155-156).
이와 같이 국왕이 정의롭지 못하면 그 국가에 사는 사람은 물론, 그들
로부터 수호 받는 신들까지도 정의롭지 않게 되어 자연의 질서마저 어
지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곳에서 생활하는 농민을 비롯한
백성들은 수확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따라서 국가는 혼란에 빠지게 된
다. 이런 점에서 국왕의 도덕성은 국왕자신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에 살고 있는 인간을 위시한 모든 천지만물에게 미치기 때문에
강력한 실천을 요구했던 것이다. 국왕의 행동 하나하나는 국왕개인의
행위로 그치지 않고 백성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에, 항상 나라 안을 둘러
보며 백성들의 실정을 파악하는데 주목해야 된다고 했다.
대왕이시여, 온 나라의 마을과 거리를 주의해서 걸어 다녀 보십시오.
거기에서 보고 듣고 그리고 나서 실행하십시오.73)
73) Jataka. V, p. 100. (南傳藏 제35권, 小部經典13,『結節鎭頭迦樹神本生談』, pp.
397-398).
국왕은 늘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그들
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의 목소리를 정확히 듣고 그것을 반영하는 국가야말로 안
락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국가라고 보았다. 아쇼카왕의 순행은
이러한 실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륜성왕이라고 숭앙받는 것도 이
처럼 수시로 국토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자비심을 통해 기쁨으로 전환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의 성
취를 위해 초기불교는 특히 국왕의 나태를 경계했다.
많은 왕들이 게을러서 (백성들의) 이익과 국토를 잃는다. 또한 마을사
람들은 마음을 잃어, 집 있는 사람도 집 없는 사람도 (잃어버린다).74)
74) Jataka. V, p. 99, p. 395.
또한 게으른 국왕은 반드시 화가 미쳐서 국가의 재산을 잃게 되는 것
이 마치 도둑에게 짓밟혀서 풍요로운 마을이 황폐하게 되는 것과 같다
고도 한다.
왕이 나태한 나라에서는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을 국왕의
화라고 부른다. 대왕이시여, 이것은 올바른 이법이 아닙니다. 왕이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나태하다는 것은. 번성하고 풍요로운 마을을 도둑이 짓
밟아서 황폐하게 만든다.75)
75) Jataka. V, p. 100, pp. 395-406.
특히, 나태를 경계하는 것은 불교의 일관된 입장이다. 심지어, 게으름
은 죽음에 부지런함은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다.
게으르지 않음은 영원한 삶의 집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집이다.
게으름을 모르는 사람은 죽음도 모를 것이고, 게으른 사람은 이미 죽
음에 이른 거나 마찬가지이다.76)
76) Vigilance is the abode of eternal life, thoughtlessness is the abode of death.
Those who are vigilant (who are given to reflection) do not die. The
thoughtless are as if dead already. (『法句經』, 徐景洙 譯, p. 19. No. 21).
지혜가 부족한 어리석은 자는 게으름에 빠진다. (그러나) 현자는 부지
런함을 귀중한 재산처럼 지켜나간다.77)
77) Fools, men of inferior intelligence, fall into sloth : the wise man guards his
vigilance as his best treasure. (같은 책, pp. 20-21. No. 26).
부지런함을 즐기고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수행인은 크고 작은 모든 번
뇌를 태워버린다.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리듯이.78)
78) A mendicant who delights in vigilance, who looks with fear on
thoughtlessness (who sees danger in it), moves about like a fire consuming
every bond, small or large. (같은 책, pp. 22-23. No. 31).
부지런함을 즐기고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수행인은 물러남이 없이 열
반에 다가선다.79)
79) A mendicant who delights in vigilance, who looks with fear on
thoughtlessness, cannot fall away (from his prefect state) (but) is close to
nirvana. (같은 책, p. 23, No. 32).
게으름을 경계하는 것은 모든 경전의 일관된 내용이다. 열반 직전 제
자들을 향해 ‘게으르지 말라’고 당부한 붓다의 유계는 특히 유명하다.80)
80) DN. II, p. 156. (南傳藏, 제7권, 長部經典 2,『大般涅槃經』, p. 144).
국왕이 지켜야 할 일은 그뿐이 아니다. 모든 일을 대할 때 성내지 말
고 시간을 두고 충분히 생각해서 판단하여 공평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국왕은 백성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81) 그리고 “깊이 사려해서
행하시오. 사려 없이 행하지 마십시오. 왕이시여, 깊이 사려해서 행하는
자에게는 칭찬과 명성이 증장합니다”82)고 한다. 왜냐하면 성급하게 잘
못 결정하면 그것은 곧 백성의 고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깊이 숙고
하여 판단하므로서 잘못된 결정으로 백성을 괴롭힐 가능성을 근원적으
로 없애는 것이 국왕이 실천해야할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
결정이 백성의 처벌에 관한 것이면 더욱 신중하게 결정해야 된다.
81) Jataka. V, p. 117. (南傳藏 제36권, 小部經典14,『三鳥本生談』, p. 13).
82) Jataka. VI, p. 376. (南傳藏 제39권, 小部經典17,『大隧道本生談』, p. 85).
왕은 조심해서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대지의 지배자시여, 성급하게
행한다면 백성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올바른 결심이 있다면,
당신은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83)
83) Jataka. IV, p. 451. (南傳藏 제35권, 小部經典13,『소마낫사王子本生談』, pp.
142-143).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폐해가 백성에게 미칠 뿐아니라 결국
국왕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신중하게 처리하여 뒷날
후회가 없도록 해야 된다고 했다. 조심성 없이 급하게 결정하면 아무래
도 잘못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 결정은 바로 백성에게 이어지므로
항상 심사숙고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나아가, 국왕의 이런 태도는 국왕자신은 물론 대신이나 관리에게도 가
르쳐서 누구에게도 피해가 없어야 된다고 했다.
왕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다른 사람이 범한 일체의 죄과를 스스로
관찰하지 않고, 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잘 관찰하지 않고
벌을 내리는 왕은,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자가 가시가 있고 파리
가 들끓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벌해서는 안 될 자를 벌하고, 벌해야
할 자를 벌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마치 맹인처럼 험한 길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이 모든 것들을 잘
보고 통치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국가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84)
84) Jataka. IV. p. 192. (南傳藏 제34권, 小部經典12,『大蓮華王子本生談』, pp. 85-
86).
앞을 못 보는 맹인이 먹지 못하는 음식을 먹거나 길이 아닌 곳을 걸
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왕은 백성에 대해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질러
서는 안 된다. 언제나 모든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 신중하게 판단
을 내리는 국왕이야말로 불교도들의 기대였던 것이다.
나아가, 무슨 일이든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은 정법이 아니다. 불교
는 처음부터 중도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일체를 바라보는데 치
우침 없는 태도야말로 모든 불교도의 실천도라 할 수 있다.85) 최고 권
력자로서 공정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과 자비의 실천자로서 백성을 배
려해야 한다는 것이, 자칫하면 엄격하거나 부드러움에 치우친 결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그러나 국왕은 중도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어디에
도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엄격함과 자비로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하
는 것이다.
85) SN. 56, II, V, pp. 420-424.
지나치게 부드럽거나 또 지나치게 엄해서는, 자신의 큰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양자를 잘 병행해야 한다. 지나치게 부드러우면 모욕
을 받으며 지나치게 엄하면 원한을 사게 된다. 이 두 가지를 잘 알아서
그 중간을 행해야 한다.86)
86) Jataka. IV, p. 192. (南傳藏 제34권, 小部經典12,『大蓮華王子本生談』, pp. 86-
87).
즉 부드러우면서도 엄하고 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을 갖추고 있으
면서 이 둘을 잘 병행하는 국왕이야말로 바람직한 국왕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람직한 국왕의 역할이란 무엇이며 불교도의 기대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뛰어난 도덕성과 적극적 실천력을 갖춘 국왕에 대
한 불교도의 기대는, 실로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절대권력을 가진 전제군주로서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백성들의 희망이 32가지의 신체적 특징을 갖춘 위대한 인물로서
붓다와 전륜성왕을 상정했으며, 특히 이상적 제왕으로서 전륜성왕 사상
이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87)
87) 본고, 3장. 전륜성왕의 사상과 현실적 등장 참조.
이와 같이 바람직한 국가인가 아닌가의 문제나, 백성의 행복과 불행
은 전적으로 국왕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백성이
안락한 정법국가와 고통 받는 비법국가의 구체적 설명을 통해88) 관리
나 대신의 등용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면서 그것은 전적으로 국
왕에 의해 결정된다고 강조한다. 능력과 학식 있는 노련한 관리 대신 무
지하고 숙달되지 못한 자를 등용하면 국가적 손실이 크다. 이것이 축적
되면 그 피해는 국왕의 손실로 나타나고 결국 백성은 희생될 수밖에 없
다. 국왕과 백성이 손실과 피해를 보며 능력 있는 자가 소외되는 국
가89), 그것은 곧 비법에 의한 인재등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88) 山崎元一,「古代印度の王權と宗敎」, (東京: 刀水書房, 1994), p. 92 참조.
89) Jataka. I. pp. 337-338. (南傳藏 제29권, 小部經典7,『大夢本生談』, p. 150).
그러나 국왕이 정법에 따라 사심 없이 통치하는 나라는 모든 것이 자
연스럽게 정리된다. 당연히 올바르지 않는 관리가 사라지므로서 피해입
고 희생되는 백성들의 절규도 사라지게 되어 재판소도 필요 없게 된
다.90). 즉, 국왕이 공평하게 정법으로 통치하면 국가는 저절로 평안해져
서 백성은 안락과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90) Jataka. II, p. 2. (南傳藏 제30권, 小部經典8,『王訓本生談』, pp. 2-3).
이상, 국왕의 역할과 불교도들의 기대에 대해서 초기불교경전을 중심
으로 살펴보았다. 백성들의 행복과 불행은 철저하게 국왕의 태도와 자
세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당시 불교도들의 기대는, 오직 자
비심에 바탕을 두고 정법을 실천하는 국왕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법으로 통치하는 국왕이야말로 이상국가의 필연적 조건이라는 사실
도 확인하였다. 나아가, 정법의 통치는 국가의 수장으로서 실행해야 할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국왕 스스로 수범을 보임으로서 백성의 귀감이
되기를 갈망하던 불교도들의 기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왕의
이상적 모습이 아쇼카왕의 출현을 통해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5. 맺는 말
“비구들이여, 나는 하늘과 인간의 모든 그물에서 벗어났다. 비구들이
여 그대들도 역시 하늘과 인간의 모든 그물에서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세상을 불쌍히 여겨, 인간과 하늘
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라. 한 길을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마
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게, 뜻과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해라. 일체의 원만하고 청정한 범행을 설해라. 태어날 때부터 때
나 먼지가 적게 묻은 사람도, 법을 듣지 못한다면 퇴색되고 말 것이다.
그들은 법을 잘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장군촌으로 갈 것이다.”91)
91) SN. I, pp. 105-106. (南傳藏, 제12권, 相應部經典1, 제4 惡魔相應 제1품 p.
180). 이밖에도 律藏「Mahavagga」나 雜阿含「繩索經」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
이 나온다.
이것은 유명한 붓다의 전법선언이다. 간단한 몇 줄의 짧은 문장이지
만 여기에 담긴 의미는 적지 않다. 특히 이 선언을 통해 붓다는 적극적
인 사회참여의 의지와 함께 그의 깨달음이 지향하는 목적을 분명히 말
해주고 있다. 깨달음이란 한 개인의 해탈에서 끝나서는 안 되며 많은 사
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줄 때 그 목적이 성취된다는 붓다의 확신
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출가수행자들에게 전
법을 명하는 동시에 승가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붓다자신도 전법에 당
당히 나설 것을 공포하고 있다. 분명히 전법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
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따라서 사회 속으로 뛰어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
동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사회 속으로 뛰어 들어 법을 전하는 구체적인 전법의 실천방
법에 대해서는 상세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두 사람이 같
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점도 이 방법의 하나겠지만, 보다 적극적이고
치밀한 실천방법을 언명하고 있는 것은 별도로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세속적 정치를 통한 개혁은 붓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으로 현실문제를 개혁하려고 세속의 정치를 하지 않더라도,
붓다는 전쟁, 경제, 바람직한 정치체제, 다양한 인간관계의 윤리 등의 사
회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92)는 지적을 통해 충
분히 짐작할 수 있다.
92) 김재성, 「초기불교의 깨달음과 사회참여」,「불교학연구」제24호, 불교학연구회,
2009. pp. 62-63 참조.
다시 말하면 직접적으로 세속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전법이라
는 방법을 통해서 사회참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붓
다자신은 공화정치의 옹호자이고 민주정치의 신봉자라 할지라도, 절대
권력을 가진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백성들의 사회참여는 근본
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붓다출현 당시의 인도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와 같은 체제아
래서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사회참여를 통해서 요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붓다가 무
모하게 사회참여란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런 점으로 보아 구체적인 사회참여의 실천방법을 설하지 않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이나 조직의 민주적 참여
운동을 통한 정치개혁이란 주권재민의 민주적인 시민사회만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회참여의 의미로 초기불
교의 사회참여를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왕의 욕망에 따라서 국가
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대라는 점을 붓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우회적인 참여방식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과 평안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
에 대해서 왕권강화가 고조되던 시대에 우회적인 방식이란 어떤 것이
며, 불교도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살펴본 다음, 이상적 국왕
인 전륜성왕의 사상과 아쇼카왕의 현실적 등장을 통해서 불교가 지향하
는 바람직한 현실세계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찾아보았다. 끝으
로 전륜성왕처럼 이상적으로 정치하는 국왕에 대한 불교도의 기대와 어
떠한 실천행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
다.
결국 초기불교의 사회참여란 백성들의 직접적인 참여활동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었다. 참여활동을 통해서 성취하려는 목표는, 자비심에 근
거한 나태하지 않고 솔선하면서 백성을 배려하는 정치를 하는 국왕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성취된 사회가 곧 정법이 구현된 국가이며
전법정신이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실현을 위해
활동한 붓다와 그 제자들은, 일생동안의 교화를 통해서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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