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니까야를 바탕으로 한 중도의 이해와 실천/이 유미

실론섬 2017. 4. 27. 19:06

[중도포럼 2017 -중도中道, 이 시대의 길]

니까야를 바탕으로 한 중도의 이해와 실천

이유미/스리랑카 켈라니야대학 불교철학 박사

(스리랑카 국립 빠알리 불교대학에서 학사, 스리랑카 켈라니야 대학에서 불교철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Beyond Asava & Kilesa (빠알리 경전에 나타난 괴로움의 뿌리에 

대한 이해) (Sri Lanka BCC, 2009)가 있고, 논문으로는 “Role of Mano(Mind)” (Buddhism: 

Contemporary Studies, Sri Lanka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2008) 등이 있다.)

 

차 례

Ⅰ. 서론 : 부처님의 법

Ⅱ. 중도의 이해

    1. 법과 진리 : 연기법과 사성제

    2. 중도

    3. 중도와 팔정도

    4. 팔정도의 삼매[正定]

    5. 성도聖道(ariyamagga)의 두 가지: sāsava/anāsava

Ⅲ. 중도의 실천

    1. 아사와의 소진: yoniso manasikāra

    2. 아사와를 버리는 일곱 가지 방법

Ⅳ. 결론 : 무아와 중도

 

[요약문]

본 논문은 빠알리 니까야에 나타난 중도와 그 관련 단어들을 탐구해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인 중도의 바른 이해와 실천을 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법과 진리가 어떻게 다른지, 중도와 팔정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중도와 팔정도 그리고 사성제의 관계는 어떠한지, 또

한 무아와 중도는 어떤 관계인지를 고찰한다. 대사십경에 팔정도의 요

소들이 두 가지로 설해지고 있는데, 왜 두 가지로 설해졌으며 두 가지는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본다. 부처님의 법과 율에서(dhammavinaye) 최

고의 경지에 도달한 아라한을 아사와가 소진된 이(khīṇāsava)라고 부르

는데 아사와(āsava)가 무엇이며, 아사와는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모든 

아사와경에서 아사와 소진에 대한 가르침을 들어본다.

 

Ⅰ. 서론: 부처님의 법

 

부처님이 존귀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법(Dhamma,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법이 실로

우리의 진정한 의지처고 귀의처다.1 부처님은 “내가 가고 난 후에 내가 설하고 천명한 법과 율

이 너희들의 스승이다”2 라고 했으니, 우리는 이 법과 율에 의지해서 훌륭한 성인의 경지에 도

달할 수 있다.3 불법이 존속하는 한 부처님은 존재들 속에 함께 계신 것이니,《대반열반경》에

남겨진 부처님의 유훈도 그래서 이와 같다. “자신을 섬으로 하여 머물러라, 자신을 의지하라,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4

1 mayaṁ dhammapaṭisaraṇā ti (MN III 9).
2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DN II 154).
3 evaṁvādī so ye te kulaputtā tathāgatappaveditaṁ dhammavinayaṁ āgamma evarūpaṁ uḷāraṁ visesaṁ
  adhigacchanti sotāpattiphalam pi sacchikaronti sakadāgāmiphalam pi sacchikaronti anāgāmiphalam     

  pi sacchikaronti arahattam pi sacchikaronti (DN I 229).
4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N II 100).

 

사람들은 ‘불법’이 너무 높고 어렵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은

직후 스스로 ‘내가 도달한 이 법은 심오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5 라고 하지 않으셨던

가.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법을 펴실 때 그같이 깨닫기 어려운 법을 중생들이 이해하여 깨닫기

쉽도록 정리하여 설하셨다고 믿어진다. 바른 법을 구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접근이 가능하도록

법의 문을 열고 가르침을 주셨기에 우리는 부처님을 스승(satthā)이라고 부른다. 스승이란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이가 아니라,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펴는 이를 일컫는다. 부

처님은 ‘만인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세상에 나셨다’6고 하고, ‘법은 부처님에 의해 잘 표현되었

다’7고 한다. ‘법’(Dhamma)은 듣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가자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재가 불자에게도 그 가르침이 적용되고 실천될 수 있게 설해진

것이다. 

5 adhigato kho me ayaṁ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MN I 167).
6 asammohadhammo satto loke uppanno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MN I 21). 미혹되지 
  않은 존재가 만인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세상에 나셨다. 
7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MN I 37). 세존에 의해 잘 설해진 법.

 

부처님은 실천이 필요 없는 이론이나 논리를 위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불법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론으로 맞서려는 외도들의 도전과, 논리를 내세우는 학자들로부터 수없는 공격을

받아왔다. 세상에는 늘 그러한 사상적 논쟁을 즐기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들을 무력하게 하는 정연한 방법으로 법을 설했기에, 순수하게 신심으로 접근하는 이들보다

도 오히려 공격적이고 논쟁을 좋아하는 이들이 더 빨리 불법에 설복되는 사례들을 경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불법은 어떤 특별한 이들을 위한 가치체계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지극히

당연하며 누가 들어도 수긍 가능하고 어떻게 따져 봐도 바른 법이기에 정법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올바른 방법으로는 불법을 비난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고 했다. 

 

부처님은 세상에 대해 설했지만, 불법은 그 초점이 인간에 맞추어져 있다고 본다. 인간의 덕

과 계가 정법의 요소로 경전에 강조되어 있고, 부처님을 ‘사람을 길들이는 데 있어 위없는 최

고의 지도자’(anuttaro purisadammasārathi : MN I 37)라고 한 사실로도 불법은 인간 중심으로

설해진 가르침인 것으로 여겨진다.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일 것

이다. 부처님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참사람(sappurisa, 眞人)의 길을 걸었고, 부처님의 법을

듣고 불문에 든 이들 또한 참사람이 된다. 범부(puthujjana)란 이들 참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하

고, 참사람의 법에 숙달되지 못하고, 참사람의 법에 따라 지도 받지 못한 이를 이르는 말이다.8

그러므로 참사람이 만들고 참사람이 되게 하는 ‘참사람의 법’이 실로 부처님의 법이다. 

8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ṁ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ṁ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MN I 1)

 

Ⅱ. 중도의 이해

 

1. 법과 진리: 연기법과 사성제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진리는 스스로의 깨달음이나 체험으로만 터

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은 이들은 그들이 깨달은 진리를 법(가르침)

의 형태로 세상에 전해 왔다. 진리의 깊은 이치를 궁구해 밝힌 법을 통해서 진리를 전하는 것

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법어法語로 극복하고, 세상에 가르침을 편 부

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였기에 위대한 분이고, 존경할 만한 분이다. 부처님이 벽지

불(paccekabuddha)과 다른 점은, 벽지불들은 스스로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법을 설하지 않고

떠났고, 부처님은 세상에 법을 폈다는 점이다. 

 

법은 ‘잘 만들어진 뗏목’에 비유되는데, 이것은 법이 수단이라는 의미다. 즉 진리를 전하는

수단이다.《수따니빠따》《다니야경》에서 부처님은 ‘실로 뗏목은 튼튼하게 엮여 잘 만들어졌다’ 

고 하셨는데, 여기서의 뗏목은 성도聖道(ariyamagga)를 의미하고 있다(Pj II 21). 즉 부처님에 의

해 법이 잘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어진 뗏목이라 할지라도 뗏목이 저

편까지 자동으로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뗏목으로 급류를 건너려면 자신의 팔다리로 열심히 잘

저어야 표류하지 않고 목적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듯이,9 법이 잘 설해져 있다고 해도, 법으로

진리에 도달하려면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뗏목의 비유는 담고 있다. 

《중부》《뱀의 비유경》에서 부처님은 “뗏목에 비유되어 설해진 나의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다. 뗏목의 비유를 아는 이들은 법조차 버릴 것인데 법 아닌 것들이랴 

…!”10 라고 하셨다. 법을 ‘건너가는 수단’ 이상으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건너 간

자에게 뗏목은 더 이상 필요가 없듯이11 법으로 진리에 도달한 이에게 법의 쓰임은 사라진다. 

법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9 taṁ kullaṁ nissāya hatthehi ca pādehi ca vāyamamāno sotthinā pāraṁ uttareyya (MN I 135). 그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로 노력하면서 안전하게 저편으로 건너갈 것이다.
10 kullūpamo mayā dhammo desito nittharaṇatthāya no gahaṇatthāya kullūpamaṁ vo bhikkhave
   ājānantehi dhammā pi vo pahātabbā pageva adhammā (MN I 135).
11 baddhā hi bhisī susaṁkhatā iti bhagavā tiṇṇo pāragato vineyya oghaṁ, attho bhisiyā na vijjati. (Sn v.
   21) 뗏목이 엮여 참으로 잘 만들어져, 폭류를 이겨내고 건너서 저편으로 갔으니 뗏목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

 

[연기법과 사성제]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에는 “걸어서 돌아다니는 모든 생명체들의 발자국은 어떤 것이든 가

장 발이 큰 코끼리 발자국 안에 놓여질 수 있듯이 유익한 법은 어떤 것이든 모두 사성제에 내

포된다”(MN I 184)고 설해져 있다. 사성제는 진리지만 사성제의 진리는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는 자”12 라고 했으니, 불법의 ‘법’은 크게 보아 연

기법緣起法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사성제의 진리를 연기법으로 중생들에게 전한 분인 것이다.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존재는 해탈을 못 해 재생을 되풀이하고, 사성제를 철저히 이해하면

재생이 끝난다는 내용이 모든 경에 일관되게 설해져 있다. 이 사성제를, 우리는 연기법을 통해

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성제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법의 역할이

라 할 것이다. 

12 yo paṭiccasamuppādaṁ passati so dhammaṁ passati (MN I 191).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의 일어남으로 이것이 일어난다”13는 연기는 십이연기에

서 무지로 시작해서 슬픔과 괴로움, 절망으로 끝나고,14 사성제는 괴로움으로 시작해서 괴로

움의 생겨남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즉 희망의 소식으로 끝난

다. 이렇게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절망과 희망의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절

망의 끝에서 희망이 열리는 구조를 만나게 된다. 

13 imasmiṁ sati idaṁ hoti imassuppādā idaṁ uppajjati (MN I 263).
14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na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ṁ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ṁ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apaccayā
   upādānaṁ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    

   omanassupāyāsāsambhavanti (SN II 1).

 

연기법(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의 일어남으로 이것이 일어난다)의 ‘이것’에 무엇을

대입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것’에 무지(avijjā)를 넣으면 ‘괴로

움’(dukkha, 苦)이 생겨나지만, ‘이것’에 팔정도의 바른 견해를 넣으면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중

도가 나타난다. 팔정도 역시 연기의 방법으로 설해졌기 때문이다. 무지로 시작된 십이연기는
고통과 절망으로 끝나고, 바른 견해로 시작된 팔정도의 정점에서는 바른 앎과 바른 해탈이라
는, 모두가 소망할 만한 결과가 산출된다.15 괴로움의 일어남과 괴로움의 소멸이 모두 연기의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통해 부처님이 연기법을 설한 진정한 목
적이 ‘괴로움에서 벗어남’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를 지닌 이에게 바른 사유가 생겨나고, 바른 사유를 지닌 이에게 바른 말이 생겨
   난다. 바른 말을 지닌 이에게 바른 행위가 생겨나고, 바른 행위를 지닌 이에게 바른 생계가 생겨난다. 바른    

   생계를 지닌 이에게 바른 노력이 생겨나고, 바른 노력을 지닌 이에게 바른 사띠가 생겨난다. 바른
   사띠를 지닌 이에게 바른 사마디가 생겨나고, 바른 사마디를 지닌 이에게 바른 앎이 생겨난다. 바른 앎
   을 지닌 이에게 바른 벗어남(해탈)이 생겨난다(MN III 76). 

부처님은 “이전에도 지금도 나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한다”16고 하셨다. 이 말씀
을 곡해한 이들은 부처님이 괴로움을 말하는 허무주의자라고 비난했지만 그것은 대단한 오해
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한다고 하신 것은, 괴로움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고, ‘괴로
움의 소멸’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불법이 설해진 목적은 그것(법)을 받아 행한 자의 괴로
움의 소진을 위한 것이다’17 라고 경은 설하고 있다. ‘괴로움은 소멸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6 pubbe cāhaṁ bhikkhave etarahi ca dukkhañce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ṁ (MN I 140).
17 yassa ca khvāssa atthāya dhammo desito so niyyāti takkarassa sammā dukkhakkhayāyāti (MN I 69).

부처님은 괴로움이 끝난 경지, 열반을 최상의 행복18 이라고 하셨다. 즉 괴로움이 아니라 괴
로움이 소멸된 행복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직후 7일간씩 몇 주간을 보리수
아래 앉은 채로 해탈의 행복을 누리셨다고19 전해진다. 길고 긴 윤회고 끝에 마침내 경험한 완
전한 행복이었다. 후에 한 천신이 “아라한들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을 때도 부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18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MN I 508).
19 bhagavā bodhirukkhamūle sattāhaṃ ekapallaṅkena nisīdi vimuttisukhapaṭisaṃvedī (Vin I 1).

 

“어리석은 그대, 실로 알지 못하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멸하는 법이라는 아라한들의 말을,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그것들의 가라앉음이 행복이라는 것을!”20
20 na tvaṁ bāle pajānāsi yathā arahataṁ vaco /aniccā sabb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ṁ vūpasamo sukhoti (SN I 6).

사성제는 ‘이것이 괴로움이고,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으며 생겨난 괴로움은 소멸된다. 그리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모든 존재는 고통과 두려움을 피하
고 행복과 안온을 구한다. 이러한 존재들에게 괴로움이 근치된, 위험이 없는 행복이 있다는 것
을 알렸다.《수따니빠따》《화살경》은 “행복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에게 (박힌) 화살을 뽑아야
한다”21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화살은 자신이 지닌 비탄과 갈망과 불만족, 즉 괴로움이다. 그
러므로 사성제의 마지막 진리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다른 말로 하면 ‘행복에 이르
는 길’이 된다. 행복에 이르는 이 길을 부처님은 ‘중도’라고 하셨다. 
21 paridevaṁ pajappañ ca domanassañ ca attano / attano sukham esāno abbahe sallam attano (Sn v.
   592).

 

괴로움의 소멸이 가능하다고 해도 길을 모른다면 결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부처님은

이제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길을 가셨고, 또한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분

이기에 여래(그렇게 간 분)라고 하고 스승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의 상속자

가 되지 말고 내 법의 상속자가 되라”22 고 이르셨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이 길은 중생들

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부처님이 전해 준 위대한 유산이니 지금도 우리는 법을 통해 부처님과

만날 수 있다.

22 dhammadāyādā me bhikkhave bhavatha mā āmisadāyādā (MN I 12). 

 

2. 중도

현상세계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따라서 ‘이것만이 진리고 다른 것은 헛되다(허구다)’23 라

는 말은 치우친 견해일 뿐임을 경은 밝히고 있다. 이런 견해자들의 질문에 부처님은 직답하지

않았다(avyākata). 그러므로 단지 ‘이런 점에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세상

에 존재하는 다양한 교의나 주의주장들은 모두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인식하여 만들어

진 상대적 신념체계들이다. 각각의 체계는 그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질 수는 있으나 다른 면은

잘 보지 못하는 단점과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은 경시되거나 무

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23 idam eva saccaṁ mogham aññan (DN I 187)

 

진리인 중도는 상대적 세계를 초월한 것인데, 우리가 머무는 세상은 이렇게 모든 것이 상대

적이다. 상호 대립적인 관계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물과 모든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가치

판단은 늘 개념과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 관념을 허상(mosadhamma, 虛法)이라

고 단정하고 허상이 아닌 것은 열반(amosadhammaṁ nibbānaṁ)뿐이라고 하셨다. 존재들의 인

식 자체가 ‘표현되어지는 것에 확립’되어24 있기 때문이라는 부처님 말씀은 존재들의 인식이

허상인 명색(nāmarūpa)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허상에 의지한 가치 판단과

개인의 주관은 항상 올바르지가 않다.《수따니빠따》《화살경》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생각하

든지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이 된다’25 고 설하고 있다. 

24 akkheyyasaññino sattā akkheyyasmiṁ patiṭṭhitā (SN I 11).
25 yena yena hi maññanti tato taṁ hoti aññathā (Sn v 588).

 

이런 허상의 관념세계에 사는 중생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처님은 법을 이용

하셨다. 개념에 기초한 언어의 한계를 법어法語로 극복하고 연기법을 설한 것이다. 중도적 이해

는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모두 다 참되게 아는 것이라고 경에 설해져 있다. 말하자면

연기하는 만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중도적 이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중도는 

상대적 세계의 체계들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진리가 된 것이다. 

 

중도의 의미가 담겨진 법문들을 니까야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경의 기저에 중도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층 경전이라 여겨지는《수따니빠따》는 첫 장

부터 중도의 의미를 담고 있고,《상응부》도 첫째 경부터 중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중도는

매우 추상적으로 설해져 있기 때문에 그 깊은 의미를 끌어내어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중도

는 대부분 부정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중도는 이런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고, 양

변 또는 양쪽의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 부정의 방법으로 설해져 있는데, 이는 언어가 갖는 개

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방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정법을 통한 설명은 상대적인 현상세

계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양편의 어느 한쪽으로는 항상 완전하지 않다는 가르침으로 이

해되어야 할 것이다.

 

《수따니빠따》첫 장인,《뱀 장, Uragavagga》 제1경에 중도의 의미를 담은 게송이 나온다. 

《뱀 경》17게송의 후렴구는 (수행이 된) “비구는 마치 뱀이 오래된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이쪽

저쪽을 (다) 버린다”이다. 여기서 이쪽저쪽으로 번역된 ‘orapāraṁ’은 강(바다)의 이쪽 기슭과

저쪽 기슭(차안피안)이라는 뜻으로, 이승과 저승, 나와 남, 안팎(내처외처) 등 어느 한편으로 상

대, 대응하는 것이 있는 세계, 즉 내가 속한 세계(oraṁ)와 내가 바라보는 대상 세계(pāraṁ)를

상징하는 상대적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이 게송은 이런 상대적 세계를 버려야 중도가 가능해

진다기보다, 중도를 걷는 이가 이런 상대적 세계를 버릴 수 있다는 의미로 설해졌다. ‘양편을

모두 버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중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는 목표가 아니라 실천방도다. 

그래서《뱀 경》 게송들의 첫 구가 중도를 말하고 있고 후렴구는 실천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 중에서 중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게송이 제8게송이다. 

 

“지나쳐가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고 모든 이 생각의 번짐을 극복한 자, 

그 비구는 이쪽저쪽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오래된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 sabbaṁ accagamā imaṁ papañcaṁ,
So bhikkhu jahāti orapāraṁ urago jiṇṇamiva tacaṁ purāṇaṁ. (Sn v. 8) 

 

이 게송은 지나쳐서 (넘어가거나) 되돌아가지 (후퇴하지) 않고 (중도에 들어) 이 모든 ‘생각의

번짐’을 극복한다는 뜻이다. 이 두 단어, ‘지나쳐가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고(nāccasārī na pac- 

casārī )’26 는 양쪽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가는데, 전자는 지나쳐서 바르지 않고 후자는 뒤로 물러

서기에 바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너무 나가지도 말고 뒤로 물러서지도 말고 ‘중도中

道’에 들어야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26 na accasārī na paccasārī : ati+sarati나 paṭi+sarati의 어근은 √sṛ ‘가다’, ‘움직이다’, ‘이동하다’이고
   sarati 앞에 붙은 접두사 ‘ati’는 ~넘어서 혹은 과도하게, paṭi는 되돌리거나 거스르는 역逆의 의미를 지니
   고 있다. atisarati는 ‘지나쳐가다’, paṭisarati는 ‘되돌아가다’로 번역할 수 있다. 

 

《수따니빠따》게송 8~13까지 반복되고 있는 ‘na accasārī na paccasārī’가 부정법으로 표현된

중도라면 accasārī paccasārī는 중도를 벗어난 양극단이다. 중도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여기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생각의 번짐’(확산= 번뇌)을 극복한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

로 되돌아가거나 오지 않은 미래로 넘어가지 말고 ‘현재에 머묾’으로써 생각의 번짐을 극복한

다고 이해될 수 있다. 불법에서 ‘현재에 머묾’은 온갖 번뇌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행법

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천신상윳따, Devatāsaṁyutta》에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게송이 있다.

 

“그들은 지나간 과거를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갈망하지 않으며

현재를 살아간다. 그로 인해 그들의 얼굴빛은 밝다. 

오지 않은 미래를 갈망하고 지난 과거를 슬퍼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로 인해 시들어간다. 잘려나간 갈대가 시들어가듯.”27

27 atītaṁ nānusocanti nappajappanti nāgataṁ/ paccuppannena yāpenti tena vaṇṇo pasīdati
   anāgatappajappāya atītassānusocanā/ etena bālā sussanti naḷo va harito lutoti. (SN I 5)

 

또한《상응부》첫 장《폭류경》에도 중도의 의미가 담긴 부처님과 천신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한 천신이 제따와나로 찾아와 세존께 여쭈었다:

 

“존자시여, 당신은 폭류(ogha)를 어떻게 건너셨습니까?” 

“벗이여, 나는 딛고 서지(발붙이지) 않고 버둥거리지 않으면서 폭류를 건넜다네.” 

“존자시여, 딛고 서지 않고 버둥거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벗이여, 내가 딛고 서 있을 때에는 빠졌고 버둥거릴 때에는 (폭류에) 휩쓸렸기에

나는 이와 같이 딛고 서지 않고 버둥거리지 않으면서 폭류를 건넜다오.”28

28 kathaṁ nu tvaṁ mārisa ogham atarīti appatiṭṭhaṁ khvāhaṁ vuso anāyūhaṁ ogham atarinti yathā
   kathaṁ pana tvaṁ mārisa appatiṭṭhaṁ anāyūhaṁ ogham atarīti yadā svāham āvuso santiṭṭhāmi 
   tadāssu saṁsīdāmi yadā svāham āvuso āyūhāmi tadāssu nibbuyhāmi evam khvāham āvuso 
   appatiṭṭhaṁ anāyūhaṁ ogham atarinti (SN I 1).

 

폭류는 행(saṅkhārā)의 거센 흐름, 즉 윤회를 말한다. 거기에 딛고 선다는 것은 행에 의지

하여 거기에 자리 잡고 정착하고 안주함을 말하고, 버둥거린다는 것은 행의 처지에서 벗어나

려고 고투하며 애쓴다는 말이다. 의지하려고 디디면 빠지고, 행 속에서 행과 싸우면 오히려 행

에 휩쓸린다는 내용으로 행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발 디딜(안주할) 곳이 없으며 행과의 싸움은

헛된 수고일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에 중도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와 같이 안주

와 버둥거림, 양쪽을 다 버리고 중도로서 폭류, 즉 행의 세상을 건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중도를 벗어난 극단은《초전법륜경》에 설해진 양 극단, 즉 ‘감각적 욕망의 행복에 빠

짐’과 ‘자신을 지치게 하는 (고행)에 몰두함’이다. 어떤 것이든 감각적 욕망의 행복에 빠지는

것은 천하고 범부의 것이며, 자신을 지치게 하는 고행에 몰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둘은 모두 성스럽지 못하고 (수행자가) 목적하는 바에 부합되지 않는다.29 부처님이 깨닫기 이

전에 겪고 그 두 가지 모두 바른 길이 아님을 알고 버린 것들이다. 그것들은 윤회에서 벗어나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그 후에 양 극단을 떠난 중도가

열반으로 이끄는 길임을 깨달았다. 눈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중도는 고요함, 초월적 앎, 깨달

음, 열반으로 이끄는 데 이 중도가 바로 팔정도라 설해진다.30 중도는 보게 하고 알게 하는 것

이 그 속성이고, 그러한 속성으로 인해 고요함, 초월적 앎, 깨달음, 열반이 생산된다. 즉 중도

를 원인으로 하여 열반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29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ṁhito; …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ṁhito (Vin I 10, MN III 23).
30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ṁvattati katamā ca sā gāmaṇi majjhimā 
   pati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    
    ya nibbānāya saṁvattati ayam eva ariyo atthaṅgiko maggo seyyathidaṁ sammādiṭṭhi pe 

    sammāsamādhi (SN IV 331).

 

3. 중도와 팔정도 31

31 팔정도의 원어는 ‘ariyo aṭṭhaṅgiko maggo’로 성팔지도聖八支道라 해야 하지만, 오랫동안 팔정도로 불려
   왔기에 여기서도 팔정도를 병용하여 쓴다. 성팔지도를 줄여 성도(ariyamagga)라고도 한다.

 

중도와 팔정도는 모두 ‘도’를 의미하나 다른 면이 있다. 중도는 진리(sacca)로, 팔정도는 길

(magga)로 설해졌다. 중도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고, 팔정도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Dhamma)

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진리인 중도는 ‘추상적 올바름’으로, 가르침인 팔정도는 ‘구체적 올바름’ 으로 

설명되고 있다. 원전에서 중도는 ‘majjhimā paṭipadā’고, 팔정도는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성스러운 여덟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길, 聖八支道)다. ‘성스러운’(ariya)이라는 형용사가 여덟 가

지로 된 길[八支道]을 수식하는 것은, 원래 성스러운 것은 아닌 여덟 요소들이 부처님에 의해 ‘성

인의 수준에 맞는’ 여덟 요소들로 만들어져 설해진 성스러운 길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팔정도는 부처님의 발자취(paṭipadā, 足跡)를 따라가는 ‘성스러운 길’(ariyamagga, 聖道)이라는 의

미가 된다. 

 

《초전법륜경》은 ‘여래가 깨달은 것은 중도’(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라

고 명백하게 설하고, 그 중도가 바로 팔정도라고 부연하고 있다. 즉 진리인 중도에 닿는 방법

으로 팔정도라는 ‘법’(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팔정도의 모든 요소들을 선도하는 것이 바른 견

해인데, 바른 견해는 두 가지 조건의 충족으로 생겨난다. ‘참법을 듣는 것과 들은 법을 지혜롭

게 숙고함’이다.32 그러나 부처님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서’33 사성제의 진리를 확인

했다고 했고, 그것들에 대해 여실한 지견이 생겨났다고 하셨다. 부처님에게는 애초부터 견해

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견해’(diṭṭhi )는 어떤 것이든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개념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중생들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진리로 향한 ‘법’인 바른 견해로 길을 안내한

것이다.《중부》《대사십경》에서 바른 견해는 ‘법’이라 불리며, 바른 견해로 인하여 바른 앎과

바른 해탈이 생겨난다고 설해졌다. 즉 바른 견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야 팔정도가 완성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도의 진리에 도달할 때까지 부처님이 설하신 법(가르침)을 놓치지 말

라는 뜻이다.

32 바른 견해가 일어나기 위한 두 가지 조건: 다른 이의 소리와 지혜로운 숙고(dve kho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a parato ca ghoso yoniso ca manasikāro : MN I 294). 여기서 다른 이의 소리란    
   진법의 가르침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과 지혜로운 숙고가 그 둘이다. 
33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SN V 422).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서 눈이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지혜가 
   일어났고, 명지가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중도가 곧 팔정도다’라고 한 것은 팔정도가 중도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표현이다. 

보게 만들고 알게 만드는 중도의 특성이 팔정도를 통해서 발현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뜻

이다. 팔정도의 모든 요소들을 수식하는 형용사 ‘sammā’는 통상 ‘올바른’으로 번역되지만, 본

래의 의미는 ‘부합(합치, 상응)하는’에 더 가깝다. 따라서 팔정도의 각 요소들을 수식하는

‘sammā’는 진리에 ‘부합하는’ 혹은 성도(ariyammaga)에 상응하는 요소들이란 의미가 된다. 

정도가 중도에 부합하는 길이 되도록, 부처님에 의해서 법(聖八支道)이 잘 설해진 것이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중도와 팔정도의 또 다른 점은, 중도는 ‘부처님이 깨달으셨다’(abhisambuddhā)고 했는데 팔

정도의 직접적 결과는 ‘바른 앎’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앎에서 바른 해탈이 생겨난다고 했

다.34 즉 팔정도는 전혀 모르던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제자들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설계된

부처님의 가르침(法)이다. 

34 sammāsamādhissa sammāñāṇaṁ pahoti sammāñāṇassa sammāvimutti pahoti (MN III 76).

 

팔정도는 중도를 ‘참사람’의 기준에서 설한 것이다. 인간이 팔정도라는 참법으로 인해 진리

에 도달한 참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자들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에

도달하도록 인간의 언어로 잘 표현된 중도가 바로 팔정도라는 뜻이다. 팔정도는 진리로 이끌

기에 참법(saddhamma, 眞法)이고, 참법을 만난 이는 참사람이 된다.《천신상윳따》에 이러한 

송이 있다.

 

“참된 이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참된 이들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 

참된 이들의 참법을 알고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35

35 sabbhir eva samāsetha sabbhi kubbetha santhavaṁ sataṁ saddhammam aññāya sabbadukkhā
   pamuccatīti (SN I 18). 

 

그러므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은 ‘팔정도’(聖八支道)라고 정의할 수 있다. 팔정도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

남은 십이연기로 설명되고,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로 설명된

다. 즉 십이연기와 팔정도는, 법으로 설명된 사성제인 것이다. 십이연기나 팔정도나 둘 다 연

기법으로 설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연기법’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길은 팔정도라고 답할 수 있다. 십이연기로는 불선한(akusala)

조건들의 생겨남을, 팔정도로는 선한(kusala) 조건들의 생겨남을 설했다. 선한 조건들의 생겨

남은 곧 불선한 조건들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연기법이 겨누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렇

게 십이연기와 팔정도는 둘이면서 하나를 목표로 삼고 있다. 따라서 팔정도를 계발하면 십이

연기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 사성제의 내용이다. 십이연기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을

이해하면 괴로움의 소멸을 찾게 될 것이고, 그때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은 바로 팔정도(聖八

支道)다’라고 한 것이다. 

 

《수따니빠따》《두 가지 관찰경》은 사성제를 둘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둘

이란 ‘이것이 괴로움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는 것이 한 가지 관찰이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찰하면서 열심히 정진하는 비구에게는 두 가지 결과 중에 한 가지 결과가 예상

된다.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거나 불환자의 경지가 기대된다고(Sn p. 140) 경은 설하고 있다. 

즉 십이연기와 팔정도를 관하면서 열심히 실천하는 비구는 불제자가 얻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정도로 중도를 구현한 이는 성스러운 이(ariya), 참사람(sappurisa)이라 불린다. 법으로 참

(진리)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진리를 먼저 깨달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

르친, ‘참사람의 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참사람은 세상에 머물면서도 세상에 대해 초연하

다. 불법에서의 해탈자는 세상을 등지거나 떠난 자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어떤 속박이나 장

애 없이 자재하는 이를 일컫는다. 자재하지만 어긋나지 않고 항시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가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이, 그가 실로 참사람이다.

 

4. 팔정도의 삼매(正定)

중도의 구체적 실천인 팔정도는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으로 구성

되어 있다.《대사십경》에 따르면 이들 여덟 요소는 따로따로의 요소가 아니라 원인과 조건으

로 성립되는 관계다. 팔정도는 정견부터 정정까지 앞의 요소가 다음 요소를 생生하게 하는 관

계, 즉 서로 연기적인 관계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팔정도를 말하겠다.’고 하지 않고 ‘성스러

운 정정을 말하겠다’고 하시면서 이 정정을 ‘직접원인과 요소를 두루 갖춘 정정’36 이라고 설하

셨다. 앞선 일곱 요소들 없이는 정정이 성립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36 ariyaṁ vo bhikkhave sammāsamādhiṁ desissāmi saupanisaṁ saparikkhāraṁ (MN III 71).

 

부처님은 “그러면 어떤 것이 직접원인이 있고 요소를 두루 갖춘 성스러운 정정인가? 말하자

면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이라는 이들 일곱 요소들에 의해 마음이 하나되

고 (요소가) 갖추어진, 이것을 직접원인이 있고, 요소를 두루 갖춘 성스러운 정정이라고 한

다”37 고 규정했다.

37 katamo ca bhikkhave ariyo sammāsamādhi saupaniso saparikkhāro seyyathīdaṁ sammādiṭṭhi
   sammāsaṁ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ajīvo sammāvāyāmo ammāsati yā kho 
   bhikkhave imehi sattaṅgehi cittassa ekaggatā parikkhatā ayaṁ vuccati bhikkhave ariyo 
   sammāsamādhi saupaniso iti pi saparikkhāro iti pi (MN III 71).

 

정정은 정견부터 시작하여 정념까지가 일련의 직접원인이 되고, 일곱 요소들이 두루 갖추어

진 마음의 단일성으로 이 경에 표현되어져 있다. 달리 말하면 정정은 부분과 전체의 구별이

없는 하나가 된 마음으로, Pāli 원문에서는 마음이 주어가 아니고 일곱 가지 요소들에 의해 하

나가 된 마음의 ‘단일한 상태’(cittassa ekaggatā)가 주어다. 마음이 능동적으로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일곱 요소들에 의해서 마음이 이러한 상태가 ‘된 것’으로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오히려 일곱 요소들이다. 앞선 일곱 요소들의 순차적 직접원인의 역할과 일곱 요소의 충

족 없이는 이러한 상태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팔정도의 삼매는 선행하는 일곱 요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불법에서 말하는 바른 삼매(sammā samādhi, 正定)는

따로 떨어진 하나의 요소로서 단순한 ‘집중이나 몰입’이 아니라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전체로

서 통합된 마음의 상태라는 의미다. 

 

정정에 이르게 한 일곱 요소들을 크게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와 ‘바른

견해, 바른 노력, 바른 사띠’의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 말, 행위, 생계는 곧 사람의

삶 전체로, 한 개인이 살아서 활동하는 삶의 요소들이다. 반면에 견해, 노력, 사띠는 삶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생각이 말과 행위와 생계를 이끌게 되어 있고, 견해는 삶의 필수요소가 아니므

로 그것 없이도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런데 성도聖道에 들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 바른 견해를

생각 앞에 세워 그것들을 이끌게 했다. 생각이 바른 견해에 의해 제어될 때 수행자의 삶은 비

로소 도(magga) 위에 올라설 수 있게 되고, 도道에 올라서야만 바른 노력이 뒤따르고 바른 사

띠가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가 없는 노력과 사띠는 바른 노력도 바른 사띠도 아닌

것이다. 

 

이처럼 첫 그룹의 네 요소들은 사람의 삶 전체이고, 뒤의 세 요소들은 삶의 요소들의 지원군

들이다.《대사십경》은 이들 세 요소(바른 견해, 바른 노력, 바른 사띠)만을 법의 요소(tayo 

dhamma)라고 칭하고 있다. 이들 세 가지 법의 요소가 인간의 삶을 성스러운 도(ariyamagga)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것이다. 세 요소들은 법의 인자로서 삶의 요소들을 받쳐주어 돕는 기

능(indriya)을 한다. 바른 견해는 선두에서 삶의 모든 요소들을 인도하는 삶의 길잡이로, 이 길

잡이의 선도에 따라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가 인간의 삶을 감싸고돌면서 일념상태가 되도록

한다. 이런 능력을 지닌 인드리야(根)들의 도움으로 인간의 삶 전체가 하나의 마음 상태가 된

것이 정정이고, 이러한 정정에서 바른 앎과 바른 해탈이 생산된다는 것이 대사십경의 가르침

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법의 요소들(바른 견해, 바른 노력, 바

른 사띠)의 적극적이고 결정적인 역할과 지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5. 성도聖道(ariyamagga)의 두 가지: sāsava/anāsava

《대사십경》에는 팔정도의 요소들 중 다섯 요소에 두 가지 (상태)가 있다고 설해져 있다. 이

들 다섯 요소는 바른 견해와 삶의 요소들(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인데, 한편

은 ‘아사와가 있고(sāsava), 공덕으로 이어지고, 재생의 토대가 남는’ 다섯 요소들의 상태고, 다

른 한편은 ‘아사와가 없고(anāsava) 세상을 초탈한 성스러운 도의 요소인’ 다섯 요소들의 상태

다. 전자는 중도에 아직 완전히 들지는 못했지만 중도를 향해 가는 중이고, 후자는 팔정도를

통해 중도가 구현된 요소들로 완성된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 두 가지 상태

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바로 아사와가 있느냐 없느냐(sāsava/anāsava)다. 이 경에서 바

른 노력과 바른 사띠가 두 가지로 설해지지 않은 것은, 노력과 사띠는 사람에게 내재된 능력

으로 그 사람이 지닌 의지意志의 인도에 따르기 때문이다. 

 

성도의 요소들이 이렇게 둘로 나뉜 것은, 진리로 인도하는 성도를 공덕의 수준에서 닦을 것

인가, 아니면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도(magga)로 닦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제

자들이 입문할 수 있도록 길은 열어두지만, ‘ariyamagga’(聖道)에는 아사와가 없다는 것을 부처

님이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남아 되풀이되는 재생을 받으며 괴로움

을 겪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초탈하여 괴로움을 끝내겠는가 하는 것이 아사와의 유무有無에

달려 있음을 지적한 이 설법은 고통의 소멸을 추구하는 이라면 ‘아사와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우리가 왜 중도인 팔정도를 닦아야 하는지, 팔정도의 목적이 뭔지 바로

알고 시작하라는 촉구인 것이다. 

 

아사와38 는 사성제의 괴로움(dukkha)에 버금갈 정도로 불법의 정수가 담겨진 단어임에도 아

직 그 의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감이 있다. 그러므로 그 본디 뜻의 이해를 위해 원전

原典에서 그 의미를 끌어내보고자 한다.

38 아사와는 그 뜻이 심오하고 용례가 넓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단어다. 그 어원은 ā
   +sru to flow ‘흘러들다, 흐르기 시작하다’인데 한역은 Pāli어원을 살려 ‘새다, 스며들다’의 뜻에서 ‘漏(누)’
   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국어로는 한역을 따라 유루流漏라고 하지만 ‘번뇌’라는 번역이 가장 일반적이다. 
   영어 번역 또한 매우 다양하다. 서구의 일부 학자들은 번역하지 않고 원어 ‘āsava’를 그대로 쓰기도 하
   는데, 그것은 자국어의 어휘부족 문제라기보다는 이 단어를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중부》《범천의 초대경》39 에 “아사와는 부패(타락)하는 속성이 있고, 계속 생성에 드는 것이

고, 고난을 품고 있으며, 괴로움으로 결과 되고, 미래에 나고 늙고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40 라

는 부처님의 말씀이 나온다. 부처님에게서는 이런 아사와가 다 버려졌고, 뿌리가 잘렸으며 다

시 생겨나는 법이 없다(anuppādadhammā)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한 존재에게서 연기가 끝났

다는 선언이다.

39 Brahmanimantaṇikasutta: 이 경은 히말라야 근처 코살라국의 작은 시市, Ukkaṭṭhā의 Subhaga樹林에서
   설해졌는데, 중부의 첫째 경인《Mūlapariyāya경》도 같은 장소에서 설해졌다. (모든 것의 뿌리에 관한 설
   법이라는 의미의) 《Mūlapariyāya경》에는 ‘나의 것’이라고 취取하고 즐길 수 있는 스물네 가지 인식의 대
   상에 대해 말씀하셨고, Brahmanimantaṇika경은 부처님이 범천에 올라 법을 설한 경이다. 부처님은 상주
   견常住見에 빠져 있는 Baka 범천신을 ‘무지한 자’(avijjāgato)라고 하면서 법을 설하는데 마라가 끼어들어
   방해한다. 마라는 범천신을 (모든 존재들의) 창조주라 부른다. 범천신을 욕되게 한 사문과 브라만은 죽
   어서 낮은 몸을 받고 칭찬한 이들은 좋은 곳에 몸을 받는다고 하면서 범천의 말을 무시하지 말라고 경
   고한다. 서로 관련이 깊은 이 두 경은 존재성과 존재 처處에 관한 것으로, 난해해서 학자들이 해석에 어
   려움을 겪는 경이다.
40 āsavā saṅkilesikā pono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ṁ jātijarāmaraṇiyā (MN I 331).

 

괴로움으로 귀착되고, 계속 생성에 들고, 생노사가 그 미래의 운명이라는 것이 모든 존재가

처한 현실(reality)이다. 아사와가 곧 우리의 현실인데, 아사와의 결과가 괴로움이라 했으니 아

사와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이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연기는 계속되어 괴로움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법을 들은 이들의 궁극의 목적이 아사와에서 벗어나는[解脫] 것이고, 아사와

에서 벗어났을 때 마침내 더 이상 연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아사와에 대한 이 설법은 부처님이 범천梵天에 올라가셨을 때 범천신의 무리 안에 있던 마

라에게 하신 것이었다. ‘마라’(Māra)는 존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신으

로 자신의 영역(Māradheyya)에 들어온 세상의 존재들을 관장한다. 아사와가 있는 존재는 누구

나 마라의 영역 안에 있는데, 존재들이 이 영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끔 지키는 것이 마라

의 역할이다. 이 경에서 마라는 대범천신을 존재들의 조상이고 지배자며 아버지고 창조주로, 

모든 것을 만든 최고의 신이라고 칭한다. 그 대범천신은 아사와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에 정반

대되는 “이것은 영원하고 늙지도 죽지도 다시 태어나지도 않고 여기서 더 다른 벗어남은 없

다”(M I 326)는 견해(常住論)를 지닌 신이다. ‘범천은 영원하고 그 이상의 해탈은 없다’는 견해를

가진 대범천신에 대해 부처님은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아는 무지한 자’(avijjāgato)라고

질타했다. 그리고 ‘이것 이상의 벗어남은 없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당신이 알지도 보지도 못

하는 존재계가 더 있다”며 그 증거로 대범천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목소리만으로 범천의 신들

을 향해 이렇게 설파했다.

 

“존재(bhava)와 비존재(vibhava)를 찾는 자들 가운데

나는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고서

어떤 형태의 존재도 환영하지(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존재의) 어떤 즐거움도 취하지 않았다.”(MN I 330)

 

부처님은 대범천신과 마라가 닿을 수 없는 계界에 들어 이 설법을 해 줌으로써 그들이 전부

라고 믿는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때 언급된 비존재(vibhava)는 존재

를 벗어난 해탈이 아니라 존재를 거부(부정)하는 존재형태를 말한다. 그러자 부처님의 가르침

에 따라 존재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빠져나가게 될 것을 두려워한 마라가, 한 범천신의 몸을

빌려 부처님께 그러한 법을 제자들이나 다른 출가자들에게 설하지 말아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래에게는 아사와가 버려졌고, 그 뿌리가 뽑혀 다시는 생성에 들지 않으니 미래에

생겨나는 법은 없다”고(MN I 331) 선언하셨다. 이처럼 아사와는 생성에 든 존재의 속성을 나타

내는 단어다. 

 

부처님이 출가 전 더 없이 안락한 생활 속에서도 바로 이 문제, 즉 생사 고를 만들어내는 존

재성의 위험을 보고, 출가하여 찾은 것이 바로 생사가 없는 불사不死의 상태, 즉 존재성의 굴레

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안전한 열반이었다.41 그리고 깨달으신 후 한 존재의 생사의 기원은 무

엇이며 어떻게 해서 괴로움으로 결과 되는지를 인연법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연기緣起다.42 십

이연기는 무지를 시작으로 존재로 태어난 것은 괴로움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적 사실로 끝난

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는《중부》《정견경》에서 연기의 시발인 무지와 아사와의 관계를 “아

사와의 일어남으로 무지가 일어나고 아사와의 소멸로 무지가 소멸한다”43 고 천명하였다. 연기

의 첫째 ‘조건’(paccaya)이 무지(avijjā)일 때 그 ‘원인’(hetu)은 아사와고 이 둘은 상호 의존관계

로 함께 생生하고 함께 멸滅하게 된다는 것이다.44 괴로움의 결과를 낳는 원인이 아사와이므로

십이연기의 모든 조건들(paccaya)의 원인(hetu) 또한 아사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존재

의 괴로움은 아사와가 없어져야 비로소 끝이 나게 되는 것이다. 

41 Ariyapariyesanasutta (MN I 163 참조).
42 Nidānasaṁyutta (SN II 1).
43 āsavasamudayā avijjāsamudayo āsavanirodhā avijjānirodho (MN I 54).
44 인연因緣법은 ‘원인’(hetu 因)과 ‘조건’(paccaya 緣)으로 인하여 생기生起하는 것을 일컫는데 원인과 
   조건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스러지는 특성 때문에 상좌부 불교권에서 이 둘(hetu-paccaya)을 동의어로 
   간주하여 굳이 구별하지 않고 있다.

 

괴로움(dukkha)은 ‘감각’ 혹은 ‘느낌’(vedana)으로, 개별적인 경험이다. 즉 존재의 개별 존재

성으로 인하여 한 존재가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 십이연기는 존재성에 무지한 존재가 생성 안

에 개별존재로 경계 지어져서 괴로움의 결과를 받는 모습에 대한 설명이다. 무지로 인하여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면서 개체에 묶여 갇힌 것으로, 이렇게 존재가 개체에 묶인 것을 

결박(saṁyojana)이라고 한다. 결박에는 열 가지가 있는데,45 그 중 마지막 결박인 무지의 결박

이 풀려야 존재는 비로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45 다섯 가지 낮은 결박(하오분결)과 다섯 가지 높은 결박(상오분결)을 합하여 열 가지. 하오분결은 유신
   견, 의심, 계금취와 욕구와 반감의 다른 표현인 육욕충동과 악의(분노)다. 또한 아라한이 되어야 끊어지
   는 상오분결은 존재욕구라 할 수 있는 색욕과 무색욕(rūparāga-arūparāga) 그리고 아만, 들뜸, 무지다.

 

아사와āsava는 ‘흘러 들어옴’(流入), 혹은 샌다는 의미의 한역, ‘누漏’로 직역할 수 있지만, 그

것만으로는 정확한 원의를 이해하기 어려워 다양한 번역어들이 만들어졌다(주석 38 참조). 여

기서는 여러 경들에 나타난 관련 법어들을 연계해 이해하는 방법을 택했다. 부처님은 아사와

가 존재의 속성인 괴로움과 고난을 품은 것이라고 했고, 사리뿟따는 ‘아사와가 있을 때 무지가

있다’고 했으니, 아사와는 생성에 ‘흘러드는’[流入] 개별 존재의 현상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사와를 ‘개체에 유입되는 어떤 존재성’으로 보고, ‘개아성個我性의 유입’(이하

‘개아성’이라 한다)이라고 의역해 보고자 한다. 이런 시도는 아사와에 대한 이해를 도와 부처

님의 가르침에 한 발짝 더 접근하는 방편으로 유용하리라는 생각에서다. 

 

개별존재에게 생기는 문제들은 모두가 아사와(개아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괴로움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이들의 걸림돌은 모두 아사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가 맞닥뜨리는 모든

장애를 ‘모든 아사와들’(sabbāsava)이라고 정의한 경이 있다. 이는 곧 개인의 모든 문제는 개아

의 성품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괴로움이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듯 개아성도 버리고 싶

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아사와는 재생하는 것(ponobhavikā)이기에 생멸의 과정이 있

을 뿐, 죽더라도 계속 다시 생겨나기 때문이다. 개아성에 집착하면 존재-갈애(bhavataṇhā)가

되고 개아성을 거절하면 비존재-갈애(vibhavataṇhā)가 된다. 이 세상의 길은 양극단으로 가는

길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중도’만이 이 양극단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중

도의 가르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한 십이연기의 첫째 조건인 무지는 자기의 존재성에 대한 ‘앎이 없음’을 의미한

다. 무지가 바로 개아성에 대한 무지(avijjāsava: MN I 7, 55) 인 것이다. 그래서 아사와와 무지는

하나처럼 함께 생멸한다고 했다.46 부처님이 아사와를 역설한 것은 ‘자기 존재성을 바로 알아

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괴로움의 소멸, 그것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바른

앎을 강조했고 무지를 연기의 첫째 조건으로 설했던 것이다. 앎이 생기면 무지가 사라지고, 무

지가 사라지면서 개아성이 끝나고, 개아성이 없으면 괴로움이라는 결과가 없다. 개아성이 없

으니 개체를 묶고 있던 결박도 사라져 비로소 개아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이처럼 모든

존재들은 각자 태어나고 각자 떠나는 개아의 성품을 지닌 개별 존재들로써, 법을 깨달을 때도

‘각자’ 깨닫게 된다(paccattaṁ veditabbo)고 설하고 있다. 

46 āsavasamudayā avijjāsamudayo āsavanirodhā avijjānirodho (MN I 54). 아사와의 일어남으로 무지가 일
   어나고 아사와의 소멸로 무지가 소멸한다. avijjāsamudayā āsavasamudayo avijjānirodhā āsavanirodho
   (MN I 55) 무지의 일어남으로 아사와가 일어나고 무지의 소멸로 아사와가 소멸한다. 

 

부처님의 위대성은 존재가 개아성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나는, 즉 재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법을 세상에 알려주었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는 마침내 ‘나’라는 존재에 대
한 철저한 탐구에 나섬으로써 괴로움을 끝내는 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곳으로 인도
하는 것이 중도요, 중도는 곧 팔정도이며, 팔정도를 선도하는 것이 바른 견해다. 

사리뿟따 존자는《정견경》에서 아사와를 바로 알고, 아사와의 일어남을 바로 알고. 아사와
의 소멸을 바로 알고, 아사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바로 아는 것이 불제자의 바른 견해라고
했다. 이렇게 아사와를 바로 안다는 점에서 그는 견해가 똑바른 자고, 법에 확고한 믿음을 지
닌 자고, 참법[眞法]으로 온 자라고 한다(MN I 55). 그러므로 아사와를 알아야 바른 견해를 지닐
수 있고 바른 견해를 지녀야 성도에 든다. 성도에 들면 괴로움이 소멸되는 중도가 되는데, 괴
로움의 소멸은 실은 아사와의 소멸이 가져온 ‘결과’일 뿐이다. 아사와가 괴로움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끝을 이룬 이(dukkhassa antakaro)인, 아라한을 다른 말로 ‘아사와
가 소진된 이’(khīnāsava)라고 한다. 아라한은 자기 존재성에 대한 철저한 이해로 개아성이 타
파되어 그의 괴로움 역시 소멸된 이를 일컫는다. 괴로움의 종식은 아사와의 소진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중도인 팔정도의 요소들 중 아사와가 있고 없고(sāsava anāsava)가 중도가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 하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Ⅲ. 중도의 실천

1. 아사와의 소진 : yoniso manasikāra
아사와가 괴로움의 원인으로 설해졌으니, 괴로움을 없애려면 아사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더구나 팔정도의 요소들이 세상을 초탈한 성도의 요소들이 되려면 아사와가 없어
야 한다(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 MN III 72)고 했으니 ‘아사와의 버림’을 중도의 실천
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동안 다른 경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
았던《모든 아사와경》에서 그 실천의 방도를 찾아보고자 한다. 

《모든 아사와경, sabbāsavasutta》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이르신다. “비구들이여, 나는 알고 보
는 자의 아사와의 소진을 말한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의 (아사와의 소진을 말하지) 않
는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 자의 아사와가 소진되는가? 지혜로운 숙고와 지혜
롭지 못한 숙고다. 비구들이여, 지혜롭지 못하게 숙고하는 자에게 일어나지 않은 아사와가 일
어나고, 일어난 아사와는 증대된다. 지혜롭게 숙고하는 자에게 일어나지 않은 아사와는 생겨
나지 않고 일어난 아사와가 버려진다.”47
47 jānato ahaṁ bhikkhave passato āsavānaṁ khayaṁ vadāmi no ajānato no apassato kiñca bhikkhave
   jānato kiṁ passato āsavānaṁ khayo hoti yoniso ca manasikāraṁ ayoniso ca manasikāraṁ ayoniso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yoniso ca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na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hīyanti (MN I 7).

 

아사와를 없애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숙고와 지혜롭지 못한 숙고를 알고 보아야 한다는 가르

침이다. 여기서 ‘지혜로운 숙고’라고 번역된 ‘yoniso manasikāra’는 불법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용어로, ‘yoniso manasikāra’의 ‘yoniso’의 원의는 ‘근원(원천)적으로’이고 ‘manasikāra’는 ‘의지

작용’ 혹은 ‘정신행위’다. 

 

경은 ‘yoniso manasikāra’를 팔정도를 선도하는 바른 견해를 생기게 하는 두 가지 조건 중 하

나로 언급하고 있다. 바른 견해의 두 가지 조건은, ‘다른 이의 소리와 지혜로운 숙고’48 인데, 

여기의 ‘다른 이의 소리’란 참법의 가르침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의 가르침

을 받아 듣는 것과 지혜로운 숙고가 바른 견해를 일으키는 조건이다. 말하자면 ‘외부로부터의

소식과 내면적 고찰’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지면 바른 견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

처님은 법을 설할 때 언제나 “내가 말할 것이니 그것을 듣고 잘 숙고하여라”49 라고 하셨다. 여

래인 내가 법을 설할 것이니 바른 견해가 일어나도록 그것을 듣고 잘 숙고하라는 뜻으로, 두

가지 조건의 충족을 한번에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바른 견해가 바른 길로 인도하

여 바른 앎과 바른 해탈이라는 결과를 낳게 한다. 부처님과 벽지불은 다른 이의 소리(가르침)

를 들은 적 없이 지혜로운 숙고만으로 스스로 깨달은 분들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으니 법을 들을 기회만 얻는다면 지혜로운 숙고만으로도 그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48 dve kho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a parato ca ghoso yoniso ca manasikāro (MN I 294).
49 taṁ suṇātha sādhukaṁ manasikarotha bhāsissamīti (MN I 1).

 

그러면 ‘지혜로운 숙고’란 어떤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바로 ‘연기법에 대한 고찰’ 이다. 

바른 견해가 법을 들음과 지혜로운 숙고를 조건으로 한다면 지혜로운 숙고는 들은 법의

이해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른 견해는 법의 이해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불법의

‘법’은 광의로 ‘연기(paṭiccasamuppāda)법’이다. 연기법을 듣고 그것의 이해를 위해 고찰하는 것

이니, 의지를 작동(manasikāra)시켜 연기법에 대해 고찰하라는 뜻이다. 즉 모든 현상들이 ‘조건

따라 일어나고 조건 따라 멸하는 법’에 대한 고찰이다. 연기법에 대한 고찰이 바른 견해의 조건

이 되는 것은, 연기법을 통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idaṁ dukkhaṁ)’라는 사성제의 진리에 도달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이야말로 원래의 뜻 그대로 근원적(yoniso)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고에서는 아사와를 ‘개아성個我性의 유입’으로 해석했고 지혜로운 숙고는 ‘연기법에 대

한 고찰’로 보았다. 그럼 다시《모든 아사와경》의 부처님 말씀으로 돌아가서 위의 해석에 따라

의역해 보자.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 자에게 있어 개아성이 소진되는가?

연기법에 대해 고찰함과 연기법에 대해 고찰하지 못함이 (기준이다).

연기법에 대해 고찰하지 못하는 자에게, 일어나지 않은 개아성이 일어나고, 일어난 개아성은 

증대된다. 연기법에 대해 고찰하는 자에게, 일어나지 않은 개아성은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아성이 버려진다.”

 

더 나아가, 지혜로운 숙고는 바른 견해의 조건이니 좀 더 쉬운 접근과 이해를 위해서 바른

견해로 바꾸어 의역하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 자에게 있어 개아성이 소진되는가?

바른 견해와 바르지 못한 견해에 (따른다).

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한 자에게, 일어나지 않은 개아성이 일어나고, 일어난 개아성은 증대된다. 

바른 견해를 지닌 자에게, 일어나지 않은 개아성은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개아성이 버려진다.”

 

《대사십경》에 ‘바른 견해가 어떻게 수행자의 삶을 선도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그릇

된 견해를 그릇된 견해로 바로 알고, 바른 견해를 바른 견해로 바로 알기에 그것이 그의 바른

견해가 된다.’50 이는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연기법에 대해 고찰하여 법을 이해한 자는 어

떤 것이 바른 견해고 어떤 것이 그릇된 견해인지 참되게 알고 구별할 수 있게 되고, 그때 그는

바른 견해를 따라 ‘눈이 생기고 앎이 생기는 중도’를 걷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부처님

의 법을 듣고 연기법에 대해 고찰하면 바른 앎이 생겨 개아성의 소진의 길에 들어서고, 개아

성이 소진되면 괴로움이 끝나고 재생도 없게 되는 것이다. 

50 kathañ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 micchādiṭṭhiṁ micchāditthīti pajānāti
   sammādiṭṭhiṁ sammādiṭṭhīti pajānāti sāssa hoti sammādiṭṭhi (MN III 71).

 

이 경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아사와는 버리는 게 아니라 ‘버려진다’(pahīnā honti)는 점

이다. 아사와와 직접 씨름해서는 안 되고, 연기법에 대해 고찰하기만 하면 아사와는 자연히 소

진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견해를 다 버려야 바른 견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빛

이 일어나면 모든 어둠은 사라지듯이, 바른 견해가 일어나면 잘못된 견해는 모두 버려지는 것

과 같다. 그것이 바로 법의 역할이고, 법이 지닌 능력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에 대한 고찰’이야

말로 양편을 다 극복할 수 있는 중도적 고찰방법인 것이다. 이런 이해를 통해 앞에서 설한 부

처님의 “나는 알고 보는 자의 아사와의 소진을 말한다”는 말씀은 ‘연기법을 알고 연기를 보는

자의 아사와가 소진된다’라는 의미라는 결론에 이른다.

 

2. 아사와를 버리는 일곱 가지 방법

아사와를 그대로 둔 채 괴로움의 소멸은 달성되지 않는다.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자는 어떻게든 아사와를 극복해야만 한다. 따라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중도는

아사와의 극복을 조건으로 그 효력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아사와경》

은 중도의 실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경이다.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가르침을 우리가 생

활의 지침으로 삼아 일상에서 실천한다면 괴로움의 상당 부분이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된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도 아사와가 남지 않고 완전히 제거되도록, 수행자의 삶

전체에 적용해야 할 아사와에 대처하는 법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 일러주셨다. 

 

① 보아서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② 방호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③ 수용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④ 참고 견뎌(참아내어)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⑤ 피해서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⑥ 물리쳐서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⑦ 계발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으니.51

51 atth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saṁvarā pahātabbā atthi āsavā paṭisev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adhivās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parivajj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vinod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bhāvanā pahātabbā (MN I 7)

 

① 보아서 버려야 할 아사와는 보아야 버려지고

② 방호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는 방호해야 버려지고

③ 수용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는 수용해야 버려지고

④ 참고 견뎌 버려야 할 아사와는 참고 견뎌야 버려지고

⑤ 피해서 버려야 할 아사와는 피해야 버려지고

⑥ 물리쳐서 버려야 할 아사와는 물리쳐야 버려지고

⑦ 계발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는 계발해야 버려진다.52

52 y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te dassanā pahīnā honti ye āsavā saṁvarā pahātabbā te saṁvarā 
   pahīnā honti ye āsavā paṭisevanā pahātabbā te paṭisevanā pahīnā honti ye āsavā adhivāsanā 
   pahātabbā te adhivāsanā pahīnā honti ye āsavā parivajjanā pahātabbā te parivajjanā pahīnā honti 
   ye āsavā vinodanā pahātabbā te vinodanā pahīnā honti ye āsavā bhāvanā pahātabbā te bhāvanā 
   pahīnā honti (MN I 12).

 

1) 보아서 버려야 할 아사와

“불법을 들어보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숙련되지 않은 자는 숙고해야 할 것을 숙고하지 않

고 숙고하지 않아야 할 것을 숙고한다. 그는 ‘과거에 나는 존재하였을까 존재하지 않았을까?

과거에 나는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있었을까? 무엇이 되었다가 무엇이 되었을까?’ 또는 ‘미래

에 나는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이 되었다가 무엇이 될 것인가?’ 또는 지금 현재의 자신에 대해 의문을 지닌다. ‘나는 있

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있는 것인가? 어디로부터 온 이 존재가 어디

로 가게 될 것인가?’라고 숙고한다. 이와 같이 지혜롭지 못하게 숙고하는 그에게 ‘나에게 자아

가 있구나’ 혹은 ‘나에게 자아가 없구나’라는 등의 확고한 견해가 생겨난다. 그때 그는 ‘나의

이 자아가 말하고 겪고, 여기저기에서 선악 행위의 결과를 경험한다. 나의 이 자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이고 항상 거기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가 생기게 된다. 이것을 견해에

빠졌다고 하고, 견해에 결박되었다고 한다. 견해의 결박에 묶인, (불법을) 듣지 못한 범부는 생

노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불법을 듣고 성스러운 법에 잘 숙련된 성스러운 제자는 숙고해야 할 법과 숙고하지 않

아야 할 법을 올바로 알면서 숙고하지 않아야할 법을 숙고하지 않고 숙고해야 할 법을 숙고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고, 이것이 괴로

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지혜롭게 숙고한다. 이와 같이 숙고하는 그에게 세 가지 결박

인, 유신견과 의심과 계금취견이 버려진다.53 이것들이 보아서 버려야 할 아사와다.”(MN I 9)

53 이렇게 지혜롭게 숙고하는 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결박 중에) 세 가지 결박들, 유신견(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 (법에 대한) 의심, 계금취견(의례 의식을 통해 해탈 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에 대
   한 집착)이 버려진다. 이 제자는 법을 듣고 지혜롭게 숙고하였기 때문에 성인의 길에 들어 ‘예류자’(흐름
   에 든 이 sotāpanna)가 된다. 법을 알고 바른 길에 들었기에 그는 이제 범부가 아니다. 

 

이 경은 자아문제에 집착하여 골몰하는 자는 법을 모르는 자고, 이러한 자에게는 잘못된 견

해가 일어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자기의 존재성이나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끊임없이

파고드는 자는 불법을 들은 적이 없는 자라고 단정한다. 한 존재가 연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부처님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는 괴로움에서 헤어날 길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불법을 듣고 법에 숙련된 성스러운 제자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숙고한

다. 즉 연기법으로 설해진 사성제를 숙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혜롭게 숙고한 이는 오취온 자

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을 바르게 보게 된다. 이렇게 바르게 보는 이에게 바른 견해가 생겨나서, 

세 가지 결박인 잘못된 견해들을 버리고 흐름에 든 이가 되어 참사람[眞人]의 대열에 합류하여

해탈열반으로 향한다.54

54 ‘바르게 봄’은 염오를 위함이요 염오는 이욕을 위함이고, 이욕은 해탈을 위함이요 해탈은 열반을 위함
   이라고 경(SN III 189)에 설해진다. 바르게 봄으로써 열반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모든 아사와경》은 결박도, 개아의 문제라는 점에서, 아사와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있다. ‘결

박’이니 ‘아사와’니 하는 단어들은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결박은 결박이라는 표현이 목적하는 바가 있고 아사와는 아사와대로의 표현목적이 있다. 이것

들은 상황에 따라 어느 때는 같은 것이 다른 이름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무지’는 결

박(avijjā-saṁyojana)이면서 잠재성향(avijjānusaya)이고 또한 아사와(avijjāsava)이기도 하다. 

지와 아사와는 모든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에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다. 십이연기의 첫째 조건

인 무지가 아사와니, 존재가 있는 한 아사와가 있다는 뜻이다. 아사와에 걸리지 않는 존재의 

문제는 없다는 뜻에서 이 경의 제목이 ‘모든 아사와경’인 것이다. 무지는 자기 존재성에 대한

무지이기에 이 무지에서 나온 의구심은 잘못된 견해로 발전한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의심 혹

은 의혹(vicikicchā)은 중도에 들지 못하는 결정적 장애다. 궁극적으로는 무지가 사라져야 아사

와도 완전히 사라지지만 그 이전에는 부처님이 설하신 법에 대한 믿음(saddhā)을 가지고 접근

해야 한다. 

 

2) 방호(간수)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

‘안이비설신의’(六根)의 감각기능을 잘 지키며 머문다. 지킴을 놓치면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

가 일어나게 되고, 성찰하여 지혜롭게 지키며 머무는 비구에게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는 없다.

‘안이비설신의’는 육체와 정신을 지닌 개인에 대한 분석법의 하나다. 이것들이 외부세계(外處)

와의 접촉의 통로일 때는 십이연기에서 촉(phassa)의 조건이 되는 육처六處(saḷāyatana)로 불리

기도 한다. 한편 감각기관으로서 각각의 순수기능을 할 때는 근根(indriya)이라 한다. 이것들은

밖을 향해 열려 있기에 방호되어야 할 문門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증지부에 “빛나는 이 마음은

(밖에서) 온 더러움에 의해 오염되었다”고55 설해져 있다. 그러므로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로부

터 이 문을 잘 지키지 않으면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가 일어나게 되니 잘 관찰하여 지켜야만

곤혹과 번민이 생기지 않는다. 이것이 근방호根防護(indriya-saṁvara)로, 버려야 할 아사와라고

한다. 

55 pabhassaram idaṁ bhikkhave cittaṁ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 ti (AN I 10).

 

《중부》《앗싸뿌라경》은 사문이라면 부끄러움을 알고, 악을 두려워하고, 몸이나 입이나 뜻의

행위가 청정하고, 생계까지 청정하다 할지라도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더 해야 할 일

들이 있으니 그 중 하나가 이 감각기능들의 문을 지키는 일(indriyesu guttadvārā: MN I 273)이

라고 이른다. 예를 들어 눈으로 대상을 보더라도 그 지각의 표상이나 세부적 상을 취하지 말

아야 한다.56 이 문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악하고 불선한 법들이 그

에게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56 cakkhunā rūpaṁ disvā na nimittaggāhī nānubyañjanaggāhī (MN I 273).

 

3) 사용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

옷과 음식과 거처와 의약품의 사용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

구가 성찰하여 지혜롭게 가사를 사용한다. 단지 추위나 더위를 막기 위해서, 날벌레, 모기, 바

람, 태양열기, 독충들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서, 또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 위해서 가사를

사용한다. 그는 성찰하여 지혜롭게 탁발공양을 한다.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취하기 위해서

도 아니며, 몸을 꾸미거나 단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이 몸의 유지 존속을 위해서, 해침

을 그치고 청정 행을 돕기 위해서.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탁발공양을 한다): “이전의 느

낌은 없애고 새 느낌은 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비난 없는 편안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는

성찰하여 지혜롭게 자리(앉거나 누울 장소)를 사용한다. 단지 추위와 더위를 막기 위해서, 날

벌레, 모기, 바람, 태양열기, 독충들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서, 기후의 위험을 피하고, 외딴 곳

에서의 독좌獨坐를 위해 사용한다. 그는 성찰하여 지혜롭게 의약품을 사용한다. 이미 일어난

괴로운 느낌을 물리치고 병 없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의약품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않는 이에게는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가 일어나게 되고, 성찰하여

지혜롭게 사용하여 머무는 비구에게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는 없다. 이것을 사용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 출가자들은 길에서 생활하며 온갖 역경을 견뎌내야 했는데 거기에 더해 혹독한

고행이나 두타행을 하는 출가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서 정신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었다. 경에는 가사조차 거부하고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는 벌거

숭이 자이나 수행자(裸行外道)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불교신도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은

이처럼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은 오히려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며 수행자의 필

수용품에 대해서도 중도적 자세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받아들여할 최소한의 것들은 받아들이

되 그것들을 사용할 때는 성찰하여 지혜롭게 사용하라는 가르침이다. 특히, 탁발공양이 ‘해침

을 그치기 위함’이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존재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4) 참고 견뎌(참아내어) 버려야 할 아사와

“어떠한 것들이 참고 견뎌 버려야 할 아사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성찰하여 지혜

롭게 참아낸다. 그는 추위나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 날벌레, 모기, 바람, 태양열기, 독충들과의

접촉, 모욕적이고 불쾌한 언행이나 육체에 일어난, 날카롭고 가혹하고, 찌르는 듯한, 달갑지

않고 즐겁지도 않은, 목숨을 앗아갈 듯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참고 견디는 자가 된다. 이와 같

이 참고 견디지 못하는 이에게는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가 일어나게 되고, 성찰하여 지혜롭게

참고 견디는 비구에게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는 없다. 이것을 참고 견뎌 버려야 할 아사와라고

한다.”

 

사용하여야 할 최소한의 필수품을 받아들여 사용하더라도, 가정을 떠나 유행하는 출가자가

그것들만으로는 혹독한 자연조건을 다 막아낼 수 없다. 그처럼 어려운 환경과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신체적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은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한다. 또한 모욕적이고 불쾌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것을 참아내어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은 성인의 경지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다.《중부》《톱의 비유경》(MN I 129)에 좋은 예가 하나 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도둑이

나 도둑의 부하들이 양날의 톱으로 사지를 절단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마음을 더럽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면서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

고, 악한 말을 내뱉지 않을 것이고, 미움을 품지 않고 자애의 마음으로 (존재들을) 불쌍하고 가

련하게 여기며 온 세상에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퍼뜨리며 머물 것이다”라고 수련해야 한다

고 가르치셨다. 

 

모든 존재는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괴로움의 존재

들임에도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주거나 해치는 것은 존재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

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는 자기 자신부터가 고통의 존재임을 알고 고통에서 벗어남을 그 삶

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한 이는 모든 존재들이 다 같은 처지임을 이해하여 모든 생명을 자

기 목숨처럼 여기게 된다.《자애경》에 선한 목적을 가진 자(atthakusalena)는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자애의 마음을 계발하여야 한다

는 가르침이 있다. 즉 괴로움에서 벗어남(해탈)을 목적으로 삼는 이는 모든 존재가 고통이 없

기를 바라는, 자애의 마음을 필수적으로(karanīya) 지녀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겠다는 불살생계가 불제자의 첫 번째 계목이다.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존재를 불쌍

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의 계발로 가해가 버려질 것이다”57라고 가르치셨다. 불법을 듣고 존재

의 본성을 이해한 이는 존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연민)이 일어나 해치려는 생각이 저절로 떨

어지게 된다. 

57 karuṇaṁ hi te rāhula bhāvanaṁ bhāvayato yā vihesā sā pahīyissati (MN I 424).

 

5) 피해서 버려야 할 아사와

“어떤 것들이 피해서 버려야 할 아사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성찰하여 지혜롭게

피한다. 그는 사나운 야생 코끼리, 야생마, 들소, 들개, 뱀 혹은 그루터기, 가시풀숲, 구덩이, 낭

떠러지, 수렁, 오물 웅덩이를 피한다. 앉을 자리가 아닌 자리에 앉고, 다니지 않아야 할 곳에

드나들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림은 청정행을 같이하는 현명한 도반이 그의 바르지 못한 행위

를 추측하게 한다. 그는 앉지 않아야 할 자리, 다니지 않아야 할 곳, 나쁜 친구들을, 성찰하여

지혜롭게 피한다. 이러한 것을 피하지 않은 자에게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가 일어나게 되고, 성

찰하여 지혜롭게 피하는 비구에게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는 없다. 이것을 피해서 버려야 할 아

사와라고 한다.”

 

위험하거나 더러운 곳은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앉을 자리가 아닌 자리, 다니지 않아야 할

곳, 나쁜 친구 또한,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기에 피해야 할 범주에 들어간다. ‘앉을 자리가 아닌

자리를 피하라’는 이 설법은 명망名望을 좇는 이들에게 주는 매우 엄중한 가르침이다. 명성은

출가자들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불법에선 선도반善道伴의 중요성이 무엇

보다 강조되고 있다.《코살라 상윳따》에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이 청

정행의 절반인 것 같다는 아난다 존자의 말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좋은 친구, 좋

은 동료, 좋은 도반과의 사귐은 청정행의 전부다.” 이러한 이는 팔정도를 계발하고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58 이르셨다. 좋은 친구를 지닌 이는 계행을 지니고, 법담을 나누고, 정진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구족하는 것이 기대되기(AN IV 352~3)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친구들과 사귀어야 한다59 는 것이 항상 강조되고 있다. 좋은 친구를 얻지 못하면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낫다는 가르침도 있다.60 좋은 친구는 선법으로 이끌고 악한 친구는 불선법으로 이

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지부에 ‘악한 친구를 가진 자에게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이 생겨나고

일어난 선법들은 쇠퇴한다. 선한 친구를 가진 자에게 일어나지 않은 선법이 생겨나고 일어난

불선법은 쇠퇴한다고 설해져 있다.61

58 mā hevam ānanda mā hevam ānanda sakalam eva hidam ānanda brahmacariyaṁ yad idaṁ 
   kalyāṇamittatā kalyāṇasahāyatā kalyāṇasampavaṅkatā kalyaṇamittassa etam ānanda bhikkhuno 
   pāṭikaṅkhaṁ kalyāṇamittassa kalyāṇasahāyassa kalyāṇasampavaṅkassa ariyam aṭṭhaṅgikam 
   maggaṁ bhāvessati ariyam atthaṅgikam maggam bahulīkarissati (SN I 87~88)
59 mitte bhajassu kalyāṇe (Sn v. 338).
60 addhā pasaṁsāma sahāyasampadaṁ seṭṭhā samā sevitabbā sahāyā
   ete aladdhā anavajjabhojī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Sn v. 47)
   진정 우리는 도반을 얻음을 칭찬한다. (자신보다) 뛰어나거나 동급의 동료와 교제하여야 한다.
   그러한 자들을 얻지 못하면 비난 없는 것으로 생을 유지하면서 외뿔의 무소처럼 홀로 가야 하리라. 
61 kalyāṇamittassa bhikkhave anuppannā ceva kusalā dhammā uppajjanti uppannā ca akusalā dhammā
   parihāyantī ti (AN I 14).

 

《수따니빠따》《무소의 뿔경》에, 수행자에게 친구는 그가 목적하는 수행의 의미를 놓치게 만

드는 위험이 따름을 경고하는 게송이 있다. “벗이나 친근한 이들에 대한 연민에 걸린 마음은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잃게 한다. 친하게 사귐에는 이런 이롭지 못함이 있다는 것을 알

고 홀로 가는 것이 좋다”고 설해져 있다.62 가정을 떠난 출가자는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도

원하지 않을진대 (밖의) 동료를 무엇 때문에 원할까?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는 외뿔의 무소처

럼 홀로 살아가야 하리라”고 하였다.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뛰어난 도반은 선법을 일

으키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대단히 이롭다. 경은 이렇게 벗이나 동료에 대해 엄중한 제한

을 두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중도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62 mitte suhajje anukampamāno hāpeti atthaṁ paṭibaddhacitto
   etaṁ bhayaṁ santhave pekkhamāno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Sn v. 34).
   친구들이나 가까운(사랑하는)이들을 동정하며 얽매인 마음은 목적을 약화시킨다.
   친분관계(親交)에서 이런 두려움을 보면서 외뿔의 무소처럼 홀로 가리라. 63 na puttam iccheyya kuto 
   sahāyaṁ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Sn v. 35).
63 na puttam iccheyya kuto sahāyaṁ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Sn v. 35)

 

부처님은 우리에게 부처님 자신을 선도반으로 여기라고 하셨다. “나를 좋은 친구로 해서, 태

어남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태어남에서 벗어난다. 늙음, 질병,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불만족, 

절망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그것들에서 벗어난다.”64 부처님을 좋은 친구로 여기라는 말은

법을 도반으로 삼으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자기를 이끌어줄 진정한 선도반은 바로 법이니, 법

을 도반으로 해서 숙명적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다.《대반열반경》의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65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이다.《모든 아사와경》은 선

법으로 이끌어주지 못하는 친구를 피하지 않은 자에게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가 일어나게 된다

고 했으니, 성찰하여 지혜롭게 피하는 것이 중도적 자세인 것이다.

64 mamaṁ hi ānanda kalyāṇamittam āgamma jātidhammā sattā jātiyā parimuccanti jarādhammā … 

    vyād    hidhammā … maraṇadhammā …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adhammā

    sattā sokaparidevad    ukkhadomanassupāyāsehi parimuccanti (SN I 88).
65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N II 100 ).

 

6) 물리쳐서 버려야 할 아사와

“어떤 것들이 물리쳐서 버려야 할 아사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가 성찰하여 지혜

롭게, 일어난 감각적 욕망의 생각을 허용하지 않고 버리고, 물리치고, 끝내고, 없애버린다. 일

어난 적의의 생각을 허용하지 않고 버리고, 물리치고, 끝내고, 없애버린다. 일어난 해치려는

생각을 허용하지 않고 버리고, 물리치고, 끝내고, 없애버린다. 악하고 불선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허용하지 않고 버리고, 물리치고, 끝내고, 없애버린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물리치

지 않는 자에게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가 일어나게 되고, 물리치는 자에게 이와 같은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는 없다. 이것을 물리쳐서 버려야 할 아사와라고 한다.”

 

여기서 ‘생각’으로 번역된 ‘vitakka’는 언어활동을 위한 ‘생각 일으킴’으로 구행口行

(vācāsaṅkhārā)의 요소다. vitakka는 개념적(언어적) 사고에 기초한 것이어서 개념적 사고가 없

으면 vitakka도 없다.66 vitakka는 선정(jhāna)의 요소들 중 하나지만 제이선정(二禪定) 이상에서

는 사라진다. (vitakka는 행의 요소이기 때문에) 촉(phassa)에 기인한 vitakka는 번뇌로 이어진다

(M I 112). 그래서 vitakka는 꺼야(없애야) 할 것으로 표현되기도67 하지만 vitakka가 모두 다 해

롭거나 불선한 것은 아니다. 경은 부처님에게 일어나는 무해한 vitakka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

다.68 불선不善이 떨어져 나간 vitakka도 있는 것이다. vitakka를 정복한 자재자(vasī )는 원하는

생각은 하고 원하지 않는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갈애를 끊고, 결박을 내던지고, 아만

我慢을 바르게 이해하여 고통의 끝을 이룬 사람이다(MN I 122). 즉 생각(vitakka)에 끌려가지 않

고 생각을 자유자재로 하는 이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vitakka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

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 사용하느냐 하는 ‘생각의 제어’의 문제인 것이다.

66 papañcasaññāsaṅkhāya asati vitakko na hotīti (DN II 277).
67 Yassa vitakkā vidhūpitā ajjhattaṁ suvikappitā asesā,
   So bhikkhu jahāti orapāraṁ urago jiṇṇam iva tacaṁ purāṇaṁ (Sn v. 7).
   그의 생각들이 남김없이 다 타고 안으로 잘 처리된 (안에서 잘 정리된) 자,
   그 비구는 이쪽저쪽을 [다] 버린다. 뱀이 낡고 오래된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68 sammāsambuddhaṁ dve vitakkā bahulaṁ samudācaranti khemo ca vitakko paviveko (It 31). 부처님에
   게 두 가지 vitaka, 안온한 vitakka와 (불선으로부터 멀어진) 원리遠離의 vitakka가 자주 일어난다.

 

감각적 욕망의 생각, 적의의 생각, 해치려는(kāma-vyāpāda-vihiṁsā) 생각은 팔정도의 두 번

째 요소 정사유(sammāsaṅkappa)와 반대되는 생각이다. 중도인 팔정도는 아사와의 소진으로

이끄는 길이기에 그러한 생각들을 ‘물리쳐서 버려야 할 아사와’라고 한다. 그러나 생각 중에는

아사와가 없는 생각도 있으므로(MN III 73), 생각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불선한’ 생각을

물리치라는 뜻이다. 

 

《중부》《생각 멈추기 경, Vitakkasaṇṭhānasutta》에는 수행자에게 불선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 이 생각들을 가라앉혀 생각을 제어하는 방법이 설해져 있다. 여기서 vitakka는 탐진치를 충

동질하고 수행자의 집중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산란한 생각들의 일어남은 수행자에게 최대의 적이다. 이 경은 실수행에서 삼매에 들려고 하

는 자에게 생각들이 떠오를 때의 대처방법을 다섯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로, 어떤 표상(nimitta)에 닿아 그 표상을 숙고하는 자에게 탐진치를 (유발하는) 불선한

생각들이 일어난다면, 그는 그 표상과 다른 유익한 표상을 숙고해야 한다(aññaṁ nimittaṁ

manasikātabbaṁ kusalūpasaṁhitaṁ). 그 유익한 표상을 숙고하는 그에게 불선한 생각은 버려질

것이다. 그것을 버림으로 안으로 그의 마음은 멈춰서고 가라앉고 하나가 되어 집중된다. 

 

둘째로 그가 다른 유익한 표상을 숙고하고 있음에도 그에게 탐진치를 유발하는 불선한 생각

들이 일어난다면 그 불선한 생각들의 위험을 세세히 검토해야 한다(ādīnavo upaparikkhitabbo).

‘이래서 이 생각은 불선하다. 이래서 이 생각은 비난 받을 수 있다. 이래서 이 생각은 괴로움으

로 귀결된다’고 검토한다. 그 생각들의 위험을 검토하는 그에게 불선한 생각은 버려질 것이다. 

그것을 버림으로 안으로 그의 마음은 멈춰서고 가라앉고 하나가 되어 집중된다. 

 

셋째로 그가 불선한 생각의 위험을 검토하고 있음에도 그에게 탐진치를 유발하는 불선한 생각

이 일어난다면, 그 생각에 마음챙기지 않고 숙고하지 않아야 한다(asati-amanasikāro āpajjitabbo).

이렇게 하는 그에게 불선한 생각들은 버려질 것이다. 그것을 버림으로 안으로 그의 마음은 멈춰

서고 가라앉고 하나가 되어 집중된다. 

 

넷째로 그 생각들에 마음챙기지 않고 숙고하지 않음에도 그에게 탐진치를 유발하는 불선

한 생각들이 일어난다면, 그 불선한 생각들의 생겨남(형성)의 가라앉힘을 숙고해야 한다

(vitakkasaṅkhārasanthānaṁ manasikātabbaṁ). 이렇게 하는 그에게 불선한 생각들은 버려질

것이다. 그것을 버림으로 안으로 그의 마음은 멈춰서고 가라앉고 하나가 되어 집중된다. 

 

다섯째로 그 생각들의 생겨남(형성)의 가라앉힘을 숙고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에게 탐진

치를 유발하는 불선한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는 이를 악물고, 혀는 입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

마음을 제지하고 억누르고 족대기어 굴복시켜야 한다(cetasā cittaṁ abhiniggaṇhitabbaṁ abhi- 

nippīḷetabbaṁ abhisantāpetabbaṁ). 이렇게 하는 그에게 불선한 생각들은 버려질 것이다. 그것

을 버림으로써 안으로 그의 마음은 멈춰서고 가라앉고 하나가 되어 집중된다.

 

7) 계발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

“어떤 것들이 계발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성찰하여 지혜롭게, 

분리(이탈)와 이욕과 소멸에 의지하고 놓아버림으로 무르익는 사띠 깨달음의 요소(覺支)를 계발

한다. 성찰하여 지혜롭게 법 조사 깨달음의 요소를 계발한다. … 정진 깨달음의 요소를 계발한

다. … 희열 깨달음의 요소를 계발한다. … 경안 깨달음의 요소를 계발한다. … 집중 깨달음의

요소를 계발한다. … 평온 깨달음의 요소를 계발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요소들은) 분리, 이

욕, 소멸에 의지하고 놓아버림으로 무르익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계발하지 않는 자에게 곤혹

과 번민의 아사와가 일어나게 되고, 계발하는 자에게 이와 같은 곤혹과 번민의 아사와는 없다. 

이것을, 계발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라고 한다.”

 

《모든 아사와경》은 비구들에게 설해진 경이다. 팔정도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 가르침이라면, 아사와를 직접 다루고 있는 이 경은 그 차원이 매우 높다고 하

겠다. 이 경은 출가자들, 그 중에도 특히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회의하고 고뇌하는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아사와 경이 설해진 것 같다. 부처님 당시에는 현생에서 반드시 생사에서 벗어나겠

다며 바른 법을 찾아 출가하는 열의에 찬 사문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이들이 대상이었을 것이

다. 부처님은 깨닫기 이전의 자신이 그러하였듯이 참법을 간절히 찾는 사문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숙고해야 할 것과 숙고하지 않아야 할 것’부터 일러줘서 연기법에 대해 숙고하게 함으로

써 바른 견해를 지니게 하셨다. 그때까지 지녔던 갖가지 사견과 회의懷疑와 삿된 관념들에 대

한 집착을 바른 견해를 통해 버리게 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보아서 버려야 할 아사와다. 보아

서 버려야 할 아사와만 버려져도 불문佛門에 든 예류자(흐름에 든 이)임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불법에서 아사와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잘 보여준다. 바로 봄을 시작으로 방호할 것은

방호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참고 견딜 것은 참고 견디고, 피할 것은 피하고, 물리칠

것은 물리친다. 그리고 사띠각지부터 깨달음의 요소를 계발한다. 팔정도의 형식으로 표현하자

면 정견을 먼저 지니고 모든 면에서 각고의 노력을 하여 사띠가 확립되면 정정正定의 준비를

마친 것이 된다. 

 

칠각지의 깨달음의 요소(bodhi + aṅga)는 그것이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야 할 요소라는 의미

다. 진리는 부처님에 의해 사성제로 설해졌으니 무엇보다 먼저 사성제를 숙고하여 바로 보고, 

그 숙고에 의지하여 실천해 가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요소들은 ‘계발해야 할’ 요소들인데, 

일으켜 키워야 하는 것들이란 뜻이다. 이렇게 계발되고 되풀이된 칠각지는 명지와 해탈

(vijjā-vimutti)을 채운다고69 이르셨다. 연기법으로 설해진 사성제(고· 집· 멸· 도)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요소들을 계발하면 명지와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지는 무지를 깨는 앎

이며 해탈은 아사와에서 벗어남이다.70 즉 칠각지 계발은 무지아사와(avijjāsava, 개아성에 대한

무지)의 소진을 곧바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69 satta bojjhaṅgā bhāvitā bahulīkatā vijjāvimuttiṁ paripūrenti (MN III 82).
70 āsavehi cittaṁ vimucci (MN I 501).

 

부처님은 무지를 깨는 명지(vijjā)를 세 가지로 설하셨다.《삼명 왓차곳따경》에서 부처님은

스스로를 ‘tevijja’(三明者)라고 칭하면서 이렇게 설하셨다.

 

“사문 고따마는 일체를 아는 자고 일체를 보는 자다. 걸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항상 계속해서 지와 견이 나에게 현현한다고 사문고타마가 (완전)무결한 지와

견을 공언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허위로 나를

헐뜯는 것이다. 사문 고타마는 삼명을 지닌 자라고 설명하면 그대는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것이고 허위로 나를 헐뜯는 것이 아니며 정당한 논거에 따른 어떤 비난도 받지 않게 될 것이

다.” (MN I 482)

 

이는 유행수행자 왓차곳따Vacchagotta가 ‘부처님은 전지全知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그것이

맞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었다. ‘tevijja’는 당시 ‘세 가지 지식에 통달한

자’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단어였다. 범천과의 합일을 희구하는 브라만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베다Veda에 정통한 자라는 뜻이다.《장부》《삼명경》에서 부처님은 브라만들에게, 그러한 세

가지 지식에 통달해서 범천(梵天)과 합일한다고 하는데 범천을 실제로 만난 브라만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그러한 베다 지식의 무익함을 지적했다(DN I 237~53). 그런 부처님이 자신을 tevijja라

고 칭하면서 tevijja의 개념을 ‘세 가지 명지를 지닌 자’라는 의미로 새롭게 정립하셨다. 

 

세 가지 명지明知(vijjā)는, 

 

①자신의 과거 생을 기억하는 앎(pubbenivāsānussati-ñāṇā)

②다른 존재들의 가고 옴을 보는 앎(cutūpapāta-ñāṇā)

③아사와의 소진을 앎(āsavakkhaya-ñāṇā)이다. 

 

세 가지 명지(三明)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던 날 밤 초경, 이경, 삼경에 차례로 깨달은 내

용이다.71 이 명지들은 초월지(abhiññā)로 초월지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초월적 앎’이라는

의미인데 부처님이 세 가지 초월지를 명지(vijjā)라고 한 것은 그것들이 바로 무지를 깨는 앎

(ñāṇā)이기 때문이다. 

71 MN I 22~23 참조.

 

삼명은 일반적으로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신통六神通 중에 세 가지

신통을 말한다. 부처님은 육신통(chaḷabhiññā) 모두를 명지(vijjā)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는 괴로

움을 이해하고 괴로움을 멸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신통은 명지에 넣지 않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능력인 신통은 대단히 기이하고 강력하여 잘못 사용하면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파괴력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중생을 제도

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신통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단단히 이르시며, 육신통 중

세 가지만을 특별히 지적하여 명지라고 하셨다. 육신통 중에서 특히 세 가지만이 명지인 것은

이들을 통해 윤회와 업의 결과를 스스로 확인하여 알고, 보고,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아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앎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명지는 신통력이라기보다

‘무지를 깨는 앎’으로 알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특히 ②다른 존재들의 가고 옴을 보는 앎(cutūpapāta-ñāṇā)은 다른 존재들이 죽어 이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면서 자기들이 몸과 말과 뜻(身口意)으로 지은 업대로 악처나 선처에 나는 것

을 보는 능력인데, 이 앎을 그냥 ‘천안통’이라고 해버리면 앎의 의미가 퇴색하고 부처님의 원

래 취지와 부합되지 않는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다. 천안통은 인간의 육안으로 보는 것을 초

월한 신들의 보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 앎의 진정한 가치는 행위가 다음 생에 영향을 주는 인

과법因果法을 실제로 보아 안다는 데 있다. 자기를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지은 행위의 결과를

받으며 재생을 거듭한다는 것을 스스로 보고 알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이것이 괴로움이

다’(idaṁ dukkhaṁ)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알고 보면서 아사와로부터 벗어난다. 그래

서 아사와(개아성)는 버리는 게 아니라 괴로움이 그에게 철저히 이해되었을(pariññātaṁ tassāti

: MN I 4) 때 버려진다고 표현되는 것이다. 해탈하였을 때 해탈한 것을 알고, 재생이 무너져서

다시 윤회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직접 알게 되는데, 이때의 마지막 앎이 바

로 아사와가 소진된 것을 아는 명지(漏盡通)다. 

 

숙명통과 천안통은 부처님 이전에도 그것을 경험한 수행자들이 더러 있었을 것이나, 누진통

만은 부처님께서 깨닫고 처음 소개한 앎이다. 개아성이 소진되어 괴로움이 끝났다는 것을 직

접 아는 앎이 누진통인데, 부처님 이전에는 세상에 괴로움을 끝낸 이가 있었다고 알려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앎(누진통)이 신통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통의 자리에 놓인 것은 인간이

나 신도 해 낼 수 없었던 위없는 신성한 통찰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부처님은 “이전에도

지금도 나는 고와 고의 멸을 가르친다”(MN I 140)고 했으니 숙명통과 천안통도 이 마지막 앎을

위해 있어야 할 앎으로 명지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세 가지 명지는 사선정(catuttha-jhāna)에 든 자가 마음을 이들 앎으로 기울일 때 이룬다고

경은 설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차례대로 마지막 명지에 이른다(M I 22~23). ①자신의 과거 생

을 기억하는 앎에 이어 ②다른 이의 가고 옴을 보는 앎을 이루는데, 이 두 앎이 바로 알고 보

는(jānato passato) 바탕이 되어 마침내 ③아사와의 소진을 아는 앎에 도달한다. 눈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중도72 의 특성이 팔정도의 정정상태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숙명통과 천안

통, 두 가지 앎을 얻었더라도 부처님이 완전히 깨달은 분이고 법은 잘 설해졌으며 승가는 바

르게 수행하고 있다는 결론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다(M I 184)고 한다. 오직 마지막 앎, ‘아사

와의 소진을 앎’(āsavakkhayañāṇā)을 통해서 아사와로부터 해탈하여 자신에게 더 이상 재생이

없음을 명확히 알 때, 제자는 여래의 길에 대한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모든 아사와

경》에 설해진 대로 아사와 법을 따라 칠각지로 채우는 명지해탈이나, 팔정도의 정점인 사선정

상태에서 일으킨 세 가지 앎이나 모두 그 최종 목적은 ‘무지아사와’(avijjāsava)의 소진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것은 아사와가 사라져야 괴로움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72 majjhimā patipaṭipadā ...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SN IV 331).

 

IV. 결론: 무아와 중도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참사람(sappurisa)들이다. 이 참사람들을 만나야 참법을 듣고, 참법을

들어야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열린다.73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참사람을 가까이 하

는 일이다. 참사람에게서 참법을 듣고 배워야 하는데, 참사람 만나기가 어려운 이에게 가장 신

뢰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원음이 그대로 전승되어 기록된 빠알리 니까야 원전(Pāli Nikāya

原典)이다.

73 참사람들을 만나야 참법을 듣고, 참법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충만하면 지혜롭게 숙고하게
   되고, 지혜로운 숙고가 온전하면 사띠와 알아차림을 갖추게 된다. 사띠와 알아차림을 갖추면 감각기능
   을 방호하게 되고, 감각기능이 방호되면 세 가지 (신구의로 짓는) 좋은 행위를 지니게 된다. 세 가지 좋
   은 행위를 지니면 사염처가 채워지고, 사염처의 네 가지 사띠가 확립되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구족하게 된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구족하면 명지와 해탈이 완성된다(A V 118)고 경은 설하고
   있다.

 

《인연 상윳따, Nidānasaṁyutta》에서 바른 견해가 무엇인가를 묻는 깟짜야나에게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다. “깟짜야나여, 세상은 거의 모두 ‘있다, 없다’(有性無性, 존재 비존재)라고 하

는 두 가지에 의지하고 있다.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

없다’는 것(無性)은 없을 것이고, 세상의 소멸을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 있다’는 것(有

性)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은 거의 모두, 다가가고 움켜쥐고 집착함으로 얽어 매여 있다. (그러

나 바른 견해를 가진 자는) 다가감이나 움켜쥠이나 마음의 고집인 집착의 성향으로 다가가지

않고, ‘나의 자아’라고 움켜쥐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괴로움은 일어나고, 사라지

는 괴로움은 사라진다고 (알면서) 의문을 품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의 앎(ñāṇa)은

다른 이에 의존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바른 견해다. 모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 하나

의 극단이요 모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여래는 이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

고 중도로(majjhena) 법을 설한다.”74

74 sabbam atthīti kho kaccāyana ayam eko anto sabbaṁ natthīti ayam dutiyo anto ete te kaccāya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m deseti (SN II 17). 여기서 중도로 번역된
   ‘majjhena’의 원의는 ‘가운데로’다. 부처님은 ‘조건에 따른 생멸의 현상을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
   는) ‘가운데’(中)라고 명명하셨다. 중도의 원어는 ‘majjhimā paṭipadā’로 ‘가운데 길’이란 뜻이다. 

 

여기서 세상(loka)이라는 것은 한 ‘존재’를 뜻한다. 생겨난 오취온의 존재는 개아個我의 성품

을 지니게 마련이지만, 바른 견해를 지닌 자는 그것을 나의 자아라고 고집하지 않으면서 일어

나는 괴로움은 일어난다고 알고 사라지는 괴로움은 사라진다고 안다. 그는 오온에 대한 취착

이 바로 괴로움인 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과 그것의 사라짐을 안다. 즉 괴로움을 이해하고

그것의 생멸生滅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는 것이다.《인연상윳따》에서 부처님이

설하신 중도는 바로 인연법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바른 견해는 ‘있다 없다(유무, 존재 비존재)’

라고 하는 양극단의 어느 쪽도 취하지 않고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이

것이 없는’ 조건에 따른 생멸의 법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바른 견해가 강조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른 견해의 형태로 받아들여 제자들이 괴로움의 소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법은 당시 많은 외도들의 도전을 받았다.《상응부》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의 가르침이 있다: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이 나와 다툰다. 법을 말하는 이

는 세상에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75 세상에 지혜로운 이들이 없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없

다고 하고,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있다고 한다. 영속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색수상행

식(五蘊)은 없다고 하고 무상하고 고이고 변하는 색수상행식은 있다고 한다. 여래가 깨닫고 (중

생들에게) 설해 주고 열어서 알려주는 세상의 세상현상(lokadhamma)이 있다. 색수상행식이 그

것이다. 여래에 의해 이같이 설해질 때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 그 어리석은 범부, 눈이

없어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장님과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마치 물에서 태어나고 물에서

자랐으나 물위로 솟아 오른 연꽃이 물에 오염되지 않고 서 있듯이 여래도 세상에서 태어나고

세상에서 자랐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채 머문다.”76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오온)은 조건 따라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현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변하는 오온의 존재

는 있다고 알고, 변하지 않는 오온의 존재는 없다고 아는 그것이 중도적 앎이라 할 것이다.

75 nāham bhikkhave lokena vivadāmi loko ca mayā vivadati na bhikkhave dhammavādī kenaci lokasmiṁ
   vivadati (SN III 138).
76 SN III 139~140.

 

《라다상윳따Rādhasaṁyutta》에서 부처님은 오온을 마라로 보라고 가르쳤다. “색수상행식이

있을 때 마라가 있고 죽이는 자가 있고 죽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라다여, 너는 색수상행식을

마라라고 보고 죽이는 자라고 보고 죽는 자라고 보아라. 병이라고 보고, 종양腫瘍이라고 보고, 

화살이라고 보고, 화禍라고, 액厄이라고 보아라. 이와 같이 보는 자가 바르게 보는 자다.”77

77 rupe … viññāṇe sati māro vā assa māretā vā yo vā pana mīyati tasmāti ha tvaṁ  rādha viññāṇam    

    māro ti passa māretā ti passa mīyatīti passa rāgo ti passa gaṇḍo ti passa sallanti passa aghanti 

   passa aghabhūtanti passa ye nam evam passanti te sammāpassantī ti (SN III 189).

 

‘자기를 죽이는 것은 바로 자기’라는 이 설법은, ‘자기를 구할 수 있는 것 또한 자기 자신뿐’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일깨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로 오취

온이 괴로움이구나!’라고 보는 것이 불법이해의 시작이다. 항상하지 않고 변하는 이런 오온을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움켜쥠(取着), 그것이 괴로움인데, 괴로움 혹은 고통(dukkha)은 느낌

(vedana)이기에 자기 안에서만 경험된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형이상학적 논리가 아니다. 내 안

에서 느껴지는 고통, 그 아픔이야말로 현실이고 참인 것이다. 사성제의 고성제에는, 이 현실의

고통이 실재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부처님은 ‘경험되는 현재’(sandiṭṭhika)를 부정한 적이 없

다. 오히려 우리에게 그것을 제일 큰 공부과제로 주셨다. 더 나아가 ‘모든 형성된 것은 항구하

지 않다’(sabbe saṅkhārā aniccā)는 원리에 따라, 생겨난 고통은 소멸되기 마련이라는 것 또한

진실이다. 그것을 ‘나의 것’이라고 붙잡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해서 이 현실의 ‘나’에서 고

통의 소멸이 가능하다고 부처님은 일러주셨다. 고통이 소멸되고, 중도가 실현되는 곳은 바로

식識을 지닌 이 몸(saviññāṇake kāye)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이 몸[身]이 바로

진리의 실현체인 것이다. 오취온의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곳은 밖

이 아닌, 식을 지닌 이 몸이니 자신을 들여다보라, 진리를 밖에서 찾지 말고 자신에게서 보고

알라는 것이 부처님이 설하신 중도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자에게 개아성이 소

진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자에게는 (개아성이 소진되지 않는

다).”78 또한 “이와 같이 알고 보면서 식識을 지닌 이 몸과 밖의 모든 대상들에서 ‘내가 했다, 

나에게 했다’라는 아만 잠재성향이 사라진다”79 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78 MN I 7.
79 evaṁ kho bhikkhu jānato evaṁ passato imasmiñ 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ṁkāramamaṁkāramānānusayā na hontīti (MN III 19).

 

여기서 ‘이와 같이’는 ‘여래가 설한 연기법과 같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부처님은 첫 제자

들인 다섯 비구들에게 법을 전할 때 무아를 설하셨다. “색수상행식(오온)은 무아다. 색수상행

식이 내 것이었다면 이들(오온)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오온은 이렇게 되고 이

렇게 되지 말라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색수

상행식은 나의 것이 아니다. 오온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이렇게 무상하고 괴로

움인 이것을, 나의 것이고, 이것이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설하셨고, 그 설법을 듣던 다섯 비구들 모두가 취착 없이 아사와(개아성)로부터 마음이 해방되

었다고80 전해진다. 부처님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라훌라에게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라고81 ‘무

아無我’의 깨달음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제법이 무아다’라고, 실로 세존은 이와 같이 제자들을

이끄신다고82 설해졌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무아법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법이 궁극에 가 닿는 곳은 바로 무아의 경지인 것이다. 

81 MN I 421~3.
82 sabbe dhammā anattā ti evaṁ kho bhagavā sāvake vineti (MN I 228).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가 있다’라는 아만(asmīti māno)을 지니고 있다. 제자들 중에서 수행

이 잘 되어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오른 불환不還자83 조차 아직 풀지 못

한 높은 결박이 아만이다. 아만은 나를 남과 견주어 판단하는 것이라고 경은 밝히고 있다.84

즉 안팎(자기와 남)을 구별하는 것이다. 아만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지

닌 것으로 개아성(아사와)으로 인해 생긴 것이어서 오직 개아성이 소진된 아라한에게만 아만

이 없다.85 성도의 두 가지 구별에서 보듯이 아라한이 세상의 다른 존재와 다른 점은 아사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아의 성품이 남은 이는 아만이 있고, 개아의 성품이 없는 이는 아

만이 없다. 개아의 성품이 사라져서 아만이 없는 이는 견줄 것이 없고, 견줄 것이 없는 이는

겨루기를 하지 않는다. 겨루기를 하지 않는 이에게는 다툼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이 나는 세상

과 다투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툼이 없는 아라한을 ‘araṇa’(無諍者)라고 부른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평화는 이렇게 성취된다. 개아의 성품을 지닌 이들에게 다툼이

없는 완전한 평화는 확립되지 않는다. 

83 불법의 제자들(아라한, 불환자, 일래자, 예류자) 중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下五分結)를 부수고 화
   생자로 그 세계로부터 되돌아오는(퇴전하는) 법 없이 그곳에서 [직접]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 네 부류의
   제자들은 결박된 정도로 구분된다. 아라한은 생성의 [하위, 상위의] 열 가지 결박을 완전히 부순 이들이
   고, 불환자는 하위 다섯 결박, 일래자와 예류자는 하위 세 결박을 부수었다는 점에 따르는 구분이다. 불
   환자의 낮은 쪽 결박은 사라졌으나 아직 높은 쪽의 결박(上五분결: rūparāga, arūparāga, māna,
   uddhacca, avijjā)이 남아있다. 즉 rāga(욕구)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rāga는 잠재성향이
   다. 잠재성향이라는 것은 깊이 잠복해 있다가 조건이 생기면 언제든 일어난다. 잠재성향의 원천은 “내가
   있다”라고 하는 (아만) 잠재성향(asmīti anusayo : S III 130)일 것이다. 이 잠재성향은 존재욕구, 무지와
   관계가 깊다. 그래서 아만 잠재성향과 존재욕구 잠재성향 그리고 무지 잠재성향은 마지막에 함께 제거
   된다.《중부 정견경》에도 아만 잠재성향이 근절되면서 무지를 버리고 명지를 일으킨다(MN I 47)고 되어
   있다. 
84 seyyo ham asmīti samanupassanti sadiso ham asmīti samanupassanti hīno ham asmīti vā
   samanupassanti (SN III 48).
85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na kiñci attānaṁ vā attaniyaṁ vā samanupassāmi na camhi arahaṁ
   khīṇāsavo api ca me āvuso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smīti adhigatam ayam aham asmīti ca na
   samanupassāmī ti (SN III 128).

 

《모든 아사와경》은 끝으로 이렇게 일곱 가지 방법에 의해서 아사와가 버려진 비구를 모든

아사와가 제어된 채 머무는 이라고 칭하고, 갈애를 끊은 이라고 하고, 결박을 푼 이라고 하고, 

아만을 바르게 해득(이해)하여 고통의 끝을 이룬 이라 한다86 고 설하고 있다. 무지와 함께 생

멸하는 아사와는 갈애와 아만과도 그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개아성이 사라지면 갈애가

끊겨 오온에 대한 취착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我]를 얻는(atta-paṭilābho: DN I 195) 재생을 받지

않고, 개아성이 소진된 아라한(arahant-khīṇāsava: MN I 339)은 ‘개아’의 성품이 없으므로 아만

도 버려진 자다(pahīnamāna-anāsava: Dh 27). 이렇게 개아로 특징될 만한 것이 없는 아라한을

부처님은 “그에게는 언어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이르셨다.87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아라한은 단지 ‘탐진치가 없는 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 ‘나’라는

것이 없는 ‘무아’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아라한도 ‘나’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에게 언어는

단지 의사 전달의 수단일 뿐이다.88

86 ayaṁ vuccati bhikkhave bhikkhu sabbāsavasaṁvarasaṁvuto viharati acchecchi taṇhaṁ vāvattayi
   saṁyojanaṁ sammā mānābhisamayā antamakāsi dukkhassāti (MN I 12).
87 taṁ hi tassa na hotīti yena naṁ vajjā na tassa atthi (SN I 11).
88 yo hoti bhikkhu arahaṁ katāvī khīṇāsavo antimadehadhārī / ahaṁ vadāmīti pi so vadeyya mamaṁ
   vadantīti pi so vadeyya / loke samaññaṁ kusalo viditvā vohāramattena so vohareyyāti (SN I 14). 
   “개아를 깨부수고 할 일을 마친, 마지막 몸을 지닌 아라한 비구, 그는 (또한) ‘나는 말한다’고 하고,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라고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언어에 정통한 그는 (언어는 단지 의사 전달의 수단
   임을) 알고서 언설言說에 필요한 정도로만 (언어를) 사용할 것이다.”

 

‘무아’는 중도로 개아성을 타파하여 도달된 경지고, 중도로 도달된 무아는 ‘있다 없다’를 극

복한 것이다. 중도는 존재를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는’ 조건

에 따른 생멸의 법으로 알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개아성을 타파하여 무아(anatta)의 경지에 도달하였을 때 괴로움이 소멸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설해졌다는 결론에 이른다. 무아의 진리는, 중도인 연기법으로 도달

된 것이고, 연기법은 십이연기와 팔정도로 설해졌다. 십이연기로는 아사와가 괴로움으로 결과

되는 과정이 설명되었고, 팔정도로는 아사와가 없어야 도(magga)가 된다는 것이 설해졌다. 즉

십이연기는 개아성이 생겨나는 길이요, 팔정도는 개아성이 소멸되는 길이란 의미다. 따라서

십이연기로는 개아성을 이해하고, 팔정도로는 개아성의 소멸을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 사성제

의 가르침이며 이것이 바로 중도의 이해와 실천이다. 십이연기와 팔정도를 통해 사성제를 알

고 보면서 참사람(sappurisa)이 걷는 길이 바로 중도(majjhimā paṭipadā)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

처님은 중도의 설명을 위해 사성제를 설하셨고, 이 사성제를 십이연기와 팔정도라는 연기법으

로 세상에 전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중도는 참사람이 걷는 길이고, 팔정도는 참사람이 되려는 사람(sekha)을 위한 길이다. 팔정

도의 모든 요소들을 선도하는 바른 견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아사와가 있는(sāsava) 바른 견

해와 아사와가 없는(anāsava) 바른 견해다. 바른 견해가 성스러운 도의 요소가 되려면 아사와

가 없어야 하는데, 아사와를 지닌 바른 견해도 있다고 한 것이다. 즉 아사와를 지닌 채 팔정도

에 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팔정도가 법(가르침)이라는 명백한 증거고, 진리인 중도와 다

른 점이다. 팔정도는 부처님이 범부를 참사람이 되게 가르쳐 이끄는 길로써, 아사와를 지닌 제

자들이 팔정도 안에서 닦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따라서 팔정도는 개아성을 지닌

자가 개아성을 버리기 위해 닦는 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개아성이 없는 자에게 팔정도는

그대로 중도요, 개아성이 있는 자에게 팔정도는 중도에 닿는 길이다. 즉 팔정도는 ‘개아성이

없는 무아’가 될 때 비로소 중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계발되어야 할’(bhāvetabbaṁ) 요소들

이 계발된(bhāvitaṁ) 팔정도가 중도가 되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이런 팔정도(ariyo

atthaṅgiko maggo, 聖八支道)가 성스러운 가르침(ariyadhamma)이고, 성스러운 진리(ariyasacca)에 

부합하는 바른 길이다. ‘중도가 곧 팔정도다’라는 부처님 말씀은, 팔정도를 중도가 되도록 잘

설해 놓았으니, 팔정도를 중도가 되게 실천하라는 뜻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