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단절인가, 계승인가?/김성철

실론섬 2017. 6. 27. 17:35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0호(2017.3) pp. 1∼26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단절인가, 계승인가?

김성철/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I. 대승불전은 불설인가?

II. 초기불전과 아비달마교학에서 찾아본 대승불교 교리

III. 대승불교는 양파의 껍질과 같은 불교의 본질이다.

 

[요약문]

대승불전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설인지 여부에 대한 의문은 대승불교의 출현 이후

계속되어 온 문제였다. 무착의 대승장엄경론에서는 여덟 가지 근거를 들어 대승이 불

설이라고 주장하지만, 현대 불교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하나 타당한 것이

없다. 대승불전은 모두 후대에 창작, 편집된 위경(僞經)으로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할 수

없다. 티벳의 경우는 뗄마(gTer Ma)라는 이름의 위경이 계속 출현하여 정경(正經)으로서

역할을 하며 대승불전 역시 뗄마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한역 아함경이

나 빠알리 니까야의 경문 역시 부처님의 교설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이들 초기불전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직설에 근접하긴 하지만 아쇼카왕 비문의 기록이나 그 성립시기에

비추어 볼 때 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의

근본을 추구해 들어가는 작업은 마치 양파 까기와 같다. 그러나 초기불전에서 그 전거

를 찾을 수 있고 사성제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불설로 인정한다는 기준을 세울 경

우 대승불전의 가르침 역시 불설로 수용된다. 예를 들어 대승불전의 보살은, 본생담

에 등장하는 석가모니의 전신(前身)을 불자들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인간

상으로 확장한 것이며, 타방불토사상은 초기불전과 아비달마교학의 삼천대천세계설

의 논리적 귀결이며, 반야경의 법공사상은 법의 방편성을 가르친 뗏목의 비유와 그 취

지를 같이 한다. 또 이들 세 가지 대승교리는 불교의 핵심인 사성제의 가르침과도 어긋

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본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부정적 의미

에서 어떤 일을 양파에 비유하곤 한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양파의 경우 벗겨

지는 껍질들이 모두 양파의 육질(肉質)이고 본질(本質)이다. 대소승의 불전들은 바로 이

런 양파와 같으며 현재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신봉하는 대승불전들 대부분은 각 시대와

지역과 문화에 부응한 법신불(法身佛)의 대기설법으로 불교의 본질이 담겨 있다.

 

I. 대승불전은 불설인가?

 

1. 대승장엄경론의 대승불설론에 대한 검토

불교관련 금석문에 근거한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 1947~)의 혁신

적 연구1) 이후, 대승불교는 재가교단에서 출발한 것2)이 아니라 대승불전의 창

작과 함께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었다는 사실이 불교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3) 또 대승(大乘, Mahāyāna)이라는 용어는 원래 보살승(菩薩乘, Bodh-

isattvayāna)을 높여 부르는 말일 뿐이었고,4) 소승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고 

대승이 그에 대해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었다.5)

1) 이와 관련한 쇼펜의 논문 모음집은 다음과 같다. Gregory Schopen, Figments and fragments of
   Mahāyāna Buddhism in India: more collected papers(Hawaii: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5).
2) 이는 平川彰의 학설이었다. ‘平川彰, 인도불교의 사상과 역사, 이호근 역(서울:민족사, 1991),
   pp.290-291’ 참조.
3) 이에 대해서는 ‘시모다 마사히로, 「경전을 창출하다. 대승세계의 출현」, 대승불교의 탄생, 사이
   토 아키라 외 저, 이자랑 역(서울:씨아이알, 1996), pp.35-70’ 참조.
4) Jan Nattier, A few good men: the Bodhisattva path according to the Inquiry of Ugra(Hawaii: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3), p.172.
5) Ibid., p.174.

 

여기에 몇 마디 덧붙인다면 인도불교적 의미에서 ‘대승’이란 ‘교단’이 아니

라 ‘이념’이며, ‘보살’ 역시 ‘신분’이 아니라 대승의 불자들이 추구하는 ‘이상

(理想)’이라는 점이다.6) 대승이 교단이라면 율도 새롭게 제정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든 대만이든 티벳이든 대승불교권에서도 출가율은 소위 소승율을

따른다.7)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사용하는 대승계로 범망경의 보살계가 있긴

하지만, 범망경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이며,8) 혹시 대승계로서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해도 재가 5계를 받거나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와 같은 출가율

을 수지한 후 그에 덧붙여 다시 받는 것이지, 출가자가 대승계만 수계하는 것

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 보살이 신분이라면 대승불교권에서 재가자와 출가자

는 동일한 보살 신분으로서 평등해야 하겠지만 이는 신분이 아니라 대승불자

들의 지향점이고 이상이기에, 남방의 상좌부 불교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출가

와 재가는 확연히 구분된다.9)

6) ‘김성철, 「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 참여불교(서울:참여불교재가연대, 2003), p.132’
   참조.
7) 우리나라의 경우 법장부(法藏部, Dharmaguptaka)의 사분율(四分律)에 의해 구족계를 받는다.
8) 望月信亨, 佛敎經典 成立의 硏究, 金鎭烈 역(서울:불교시대사, 1995), pp.345-381.
9)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직접적인 음행의 금지와 허용’ 여부다. ‘김성철, 앞의 책’ 참조.

 

인도불교적 의미에서의 대승불교는 불탑신앙과 같은 새로운 신행 방식으

로 인해 출현한 것이 아니라, 창작의지 가득한 익명의 저자들에 의해 새롭게

편찬된 다양한 불전들에 근거하여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었다. 이렇게 창작

된 대승불전들이 한문 불교권에 유입되면서 비로소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대

승불교교단이 형성되었다.10) 그런데 대승불전의 가르침이 불교이기 위해서

는 초기삼장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아야 하리라. 이런 문제의식에서 일찍부

터 대승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논리들이 개발되었다. 무착(無着, Asaṅga, C.E. 

4세기 경)의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11)에서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이

유12)를 들어서 대승이 불설이라고 주장한다.13)

10) 시모다 마사히로, 앞의 책, p.48.11) 成唯識論了義燈 巻1(大正藏43, p.666中)이나 解深密經疏

     卷4(卍新續藏21, p.272上) 등에 의하면 미륵(弥勒)이 본송을 지었고 그에 대해서 세친(世親)이 

     주석했다고 전한다.
12) 산스끄리뜨 원문에서는 총 일곱 문단이지만, 한역본에서는 다섯 번째 문단을 둘로 구분하기에
    [⑤⑥] 여덟 가지가 된다[大乘莊嚴經論 卷1(大正藏31, p.591上)]. 그러나 이를 그대로 인용하는 
    成唯識論 卷3(大正藏31, p.14下-15上)에서는 문단의 수 그대로 일곱 가지로 구분한다.
13) 이하 대승장엄경론의 산스끄리뜨 원문은 ‘http://gretil.sub.uni-goettingen.de/gretil/1_sanskr/4_
    rellit/buddh/asmahsbu.htm(검색일자:2016.9.2.)’에서 채취한 것이다.

 

① 애초에 예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avyākaraṇāt, 不記). 만일 이것[大乘]

   이 정법에 장애가 있을 때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째서 애초에 당신[世尊]께서 미래의 위험을 예언하시지 않았겠는가?14)

   ādāv avyākaraṇāt yady etat saddharmāntarāye paścāt kenāpi utpāditaṃ | kasmād 

   ādau bhavatā na vyākṛtam anāgatabhayavat.

 

②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samapravṛtteḥ, 同行). 대승이 성문승 이후가

   아니라 동시에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이것[대승]이 불설이

   아니라고 생각되겠는가?15)

   samapravṛtteḥ samakālaṃ ca śrāvakayānena mahāyānasya pravṛtter upalabhyate na 

   paścād iti katham asyābuddhavacanatvaṃ vijñāyate.

 

③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agocarāt, 不行). 이와 같이 위대하고 심오한

   가르침(dharma)은 일반 사상가(tārkika)들의 영역이 아닌데, 외도(tīrthika)

   의 논서(śāstra)에서는 그런 류의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

   른 이들에 의해서 설해졌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데, 현재 [대승을] 말하

   는 중인데도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16)

   agocarān nāyam evam udāro gambhīraś ca dharmas tārkikāṇāṃ gocaraḥ | 

   tīrthikaśāstreṣu tatprakārānupalambhād iti | nāyam anyair bhāṣito yujyate | ucyamāne 

   'pi tadanadhimukteḥ.

 

④ 성립하기 때문이다(siddheḥ, 成就). [대승이] 설혹 다른 자가 깨달음을

   얻어서 설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불설이라는 점은 성립한다. 깨달음

   을 얻어서 그와 같이 설한 자, 그 자가 바로 부처다.17)

   siddhe athānyenābhisaṃbudhya bhāṣitaḥ | siddham asya buddhavacanatvaṃ | sa eva 

   buddho yo 'bhisaṃbudhya evam bhāṣate.

 

⑤⑥ 존재한다. 비존재라면 없기 때문이다(bhāvābhāve 'bhāvāt, 體非體).

   [⑤]만일 어떤 대승이건 존재한다면 그것의 존재로 이것[대승]이 불설임

   이 성립한다. 다른 대승은 없기 때문이다. [⑥]만일 [대승이] 존재하지 않

   는다면, 그것[대승]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성문승도 역시 없기 때문이

   다. 성문승은 불설이고 대승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불승

   (佛乘) 없이는 부처님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18)

   bhāvābhāve 'bhāvād yadi mahāyānaṃ kiṃcid asti tasya bhāva siddhim idaṃ 

   buddhavacanam ato 'nyasya mahāyānasyābhāvāt | atha nāsti tasyābhāve 

   śrāvakayānasyāpy abhāvāt | śrāvakayānaṃ budhavacanaṃ na mahāyānam iti na yujyate 

   vinā buddhayānena buddhānām anutpādāt.

 

⑦ 대치(對治)하기 때문이다(pratipakṣatvāt, 能治). 지금 대승을 수행할 경

   우 모든 무분별지에 의지함에 의해서 온갖 번뇌를 대치하게 된다. 그러

   므로 [대승은] 불설이다.19)

   pratipakṣatvād bhāvyamānaṃ ca mahāyānaṃ sarvanirvikalpajñānāśrayatvena kleśānāṃ 

   pratipakṣo bhavati tasmād buddhavacanaṃ.

 

⑧ 소리와 다르기 때문이다(rutānyatvāt, 文異). 또한 이것[대승]은 소리 나

   는 대로의 의미가 아니므로, 그러므로 소리 나는 대로의 의미를 수용하

   여 불설이 아니라고 알아서는 안 된다.20)

   rutānyatvāt na cāsya yathārutam arthas tasmān na yathārutārthānusāreṇedam 

   abuddhavacanaṃ veditavyaṃ.

 

이런 여덟 가지 이유는 성유식론에도 거의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21) 합

리적으로 판단할 때 ①, ②, ③, ⑤, ⑧은 설득력이 없다. 부처님이 불교에 대한

모든 위험을 예언한 것이 아니며[↔①],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 성과에 비추어

볼 때 대승불전은 소위 성문승의 초기불전들보다 후대에 나타난 것이고[↔

②], 외도들의 논서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도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가 대

승이 위대하고 심오하기 때문이라고만은 볼 수 없으며[↔③], 대승이 존재한

다는 사실만으로 불설로 봐야 한다면 다른 어떤 허구의 경전도 그것이 존재한

다는 사실만으로 불설이 되어야 할 것이고[↔⑤], 대승이 설혹 소리 나는 대로

의 의미가 아닌 것이라고 해도 그런 것이 모두 불설일 수는 없기에[↔⑧] 이들

다섯 가지 이유는 대승불설론의 근거일 수 없다.

21) 成唯識論 卷3(大正藏31, p.14下-15上).

 

그러나 일견(一見)하면 이 가운데 ④, ⑥, ⑦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승
불전이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 다른 어떤 분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해도 그가 
깨달은 자라면 이는 불설로 수용할 수 있으며[④], 성불을 지향하는 대승의 수
행이 있었기에 부처가 있게 되고, 부처에게 가르침을 듣는 성문승이 가능하며
[⑥], 대승불전에서 설하는 무분별지의 가르침을 통해서 번뇌가 제거되기에
불설에 포함시킬 수 있다[⑦]는 논거는 우선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④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대승불설론(大乘佛說論)’의 ‘불’은 석가모
니 부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깨달은 자 모두’를 지칭하는 보통명
사여야 하며, 대승불전을 창작한 그 누군가도 모두 부처여야 할 것이다. 즉, 석
가모니 부처 이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익명의
부처’들이 대거 출현하여『반야경』,『무량수경』,『화엄경』,『법화경』,『금강경』,
『능가경』,『능엄경』,『원각경』,『범망경』등의 대승불전들을 저술했다는 말이
된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⑥에 해당하는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직설
이라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대승불전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의 전
생에 대한 통칭인 ‘보살(Bodhisattva)’의 삶을 모은『본생담(本生譚, Jātaka)』이
고 ⑦에 해당하는 대승불전도 석가모니 부처의 직설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
다. 그러면 대승의 불설 여부에 대해서 어떻게 판정해야 할 것인가?

2. 티벳불교의 뗄마(gTer Ma)와 위경(僞經)의 문제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대승불전의 진위 여부를 놓고 고심을 하지만, 이에 대
해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티벳의 불교인들이다. 왜냐하면 티벳에서
는 지금도 계속 새로운 불전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티벳의 4대종파 가운데 닝
마파(rNying Ma Pa, 昔古波22))의 경우 이러한 불전의 발굴이 바람직한 전통으
로 굳어져 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새롭게 발굴한 불전들은 위경으로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정전(正典)으로 인정받아 티벳불교인들의 신행지침서
로서 존중된다. 티벳인들은 이런 불전을 뗄마(gTer Ma: 秘藏經)라고 부른다.23)
22) 티벳불교의 4대 종파 가운데 닝마(rNying Ma)파는 ‘옛 학파’라는 의미에서 석고파(昔古派), 까규
    (bKa' brGyud)파는 ‘말(bKa')로 전승(brGyud)한다.’는 의미에서 구전파(口傳派), 사꺄(Sa sKya)파는
    ‘회색(sKya) 땅(Sa)에 건립한 사원’이라는 의미에서 회토파(灰土派) 그리고 겔룩(dGe Lugs)파의 경
    우는 ‘쫑카빠가 창설한 dGa' lDan(도솔천) 사원의 전통(Lugs)을 따른다.’는 원래적 의미에서는 도
    솔파(兜率派), 변음인 ‘공덕(dGe)의 체계(Lugs)를 따른다.’는 의미에서는 공덕파(功德派)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23) 이하 본 절의 내용 중 뗄마와 관련된 내용은 대부분 ‘김성철, 「대승신화와 가상수행 그리고 불교의 미래」,     

     인도철학(서울:인도철학회, 2006), pp.19-21’에 근거한다. 

뗄마는 대부분 밀교와 관련된 경전들인데 뗄마 출현의 전통을 창시한 인물
은 닝마파의 시조 빠드마삼바바(Padmasambhava, 8C경)였다. 빠드마삼바바는
티벳의 전통적 샤마니즘인 뵌교(Bon敎)를 제압하고 삼예 사원을 건립한 후 티
벳불교의 초석을 다지면서 수많은 밀교경전들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심어 놓
았다고 한다.24) 그리고 수백 명의 이들 제자들이 계속 윤회하면서 티벳의 불교
계를 이끌어 가다가 시절인연이 되면 뗄마를 발견하여 유포시킨다.25)
24) Tulku Thondup Rinpoche, Hidden Teachings of Tibet - An Explanation of the Terma Tradition of 
    Tibetan Buddhism -(Somerville:Wisdom Publication, 1986), pp.67-68.
25) Ibid., p.71

뗄마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세 부류의 것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빠드마삼
바바의 가르침이 담긴 것이고, 둘째는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이 담긴 것, 그리고
셋째는 닝마파의 수행법인 족첸(rDzogs Chen)26)의 가르침이 담긴 것이다. 이
런 뗄마의 발견자를 뗄뙨(gTer sTon)27)이라고 부르는데 이들 세 가지 종류의
뗄마를 모두 발견하는 사람을 대(大)뗄뙨, 한두 가지만 발견하는 사람을 소(小)
뗄뙨이라고 부른다.28) 새로운 뗄마가 출현했다고 해서 즉각 이를 대중에게 공
개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뗄마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뗄마의 발견자는 공개를 미루고 수년에 걸쳐
서 스스로 그 가르침대로 수행해 보기도 한다.29)
26) ‘위대한 완성(Great perfection)’이라고 번역된다. 청정한 근본지(根本智)의 자각을 목표로 삼는 
    수행법으로 제자를 접화하는 파격적 방식이 동아시아의 선불교와 흡사하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Stephan Schuhmacher and Gert Woerner Ed., The Encyclopedia of Eastern Philosophy 
    and Religion(Boston:Shambhala Publications, 1989), pp.97-98.
27) ‘gTer(뗄)’은 ‘보물(treasure)’, ‘sTon(뙨)’은 ‘목격자, 증언자(spectator, one who can demonstrate)’를
    의미한다.
28) Tulku Thondup Rinpoche, Ibid, p.71.
29) Francesca Fremantle, Luminous Emptiness: Understanding the Tibetan Book of the Dead(Boston:
    Shambhala Publications, 2001), p.19.

뗄마는 그 발견 방식에 따라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심(心)-뗄마
(dGongs gTer)로 빠드마삼바바가 제자의 마음속에 뗄마를 심어 놓은 의도 그
대로 뗄뙨의 마음속에서 소리나 문자의 형태로 나타나는 뗄마다.30) 둘째는 ‘지
(地)-뗄마(Sa gTer)’로 호수나 바위, 허공이나 사찰 등의 물리적 대상을 통해 발
견되는 뗄마다. 지-뗄마는 구체적인 경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물리적 대상에서 보이는 한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뗄뙨의 마음속에 경전 전체가 떠오르면 이를 그대로 적어서 새로운 경전
에 편입시킨다.31) 대표적인 뗄마로는 널리 알려진 것은 사자(死者)의 서(書)32)
이외에 롱첸빠의 종자심(種子心)33), 귀한 뗄마의 보고(寶庫)34) 등이 있다.
30) Ibid, p.17.
31) Ibid, p.17.
32) Bar Do Thos gRol(바르도퇴돌): 원명을 그대로 번역하면 ‘[죽음과 탄생의] 둘 사이(Bar Do)에서 
    청문한(Thos) 해탈(gRol)’이다. 이를 발견한 뗄뙨은 닝마파의 까르마 링빠(Karma gLing Pa, 1326-1386)
    다. W.Y. Evans-Wentz ed. The Tibetan Book of the Dead(Oxford: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I.
33) kLong Chen sNying Thig(롱첸링틱): 닝마파의 뗄뙨인 직메링빠('Jigs Med gLing Pa, 1730-1798)가
    발견함. 족첸(rDzog Chen)의 가장 심오한 비밀 가르침을 담고 있다. Tulku Thondup & Harold
    Talbott ed., Masters of Meditation and Miracles: Lives of the Great Buddhist Masters of India and
    Tibet(Boston:Shambhala, 1996). p.xiii.
34) Rin Chen gTer mDzod(린첸뗄죄): 잠괸꽁튈('Jam mGon Kong sPrul, 1813-1899)이 닝마파 전통에서
    내려오는 뗄마들을 모아서 책으로 묶은 것. John Powers and David Templeman, Historical
    Dictionary of Tibet(Lanham:Scarecrow Press, 2012), p.337.

그런데 이렇게 뗄마와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불전이 나타나는 것은 비단 티
벳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을 보면 중국의 양
무제(梁武帝, 464-549) 때 뗄마와 유사한 방식으로 송출한 불전에 대한 얘기가
실려 있는데 졸가리만 모아쓰면 다음과 같다.

"제나라 말에 태학박사(太學博士) 강필(江泌)이라는 사람의 딸이 8, 9세쯤
되었을 때 가끔가다가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서 경전을 암송해내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천상에 올라간 것이라거나 신에게서 받는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뜻이 통하여 예전에 익힌 것과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이를 받아쓰게 하다가 갑자기 멈추곤 했는데, 열흘 정도가 지나
면 이어서 다시 예전처럼 경전을 암송했다. …… 부모가 결혼을 시키려하
자 완강하게 거부하였고 나중에 출가하여 승법(僧法)이라는 비구니가 되
어 청원사(靑園寺)에 머물렀다. 천감 4년(505년) 3월에 사망한 후 이 경전
들을 모아보니 총20여 권에 달했다. 그 외숙인 손질(孫質)이 이를 참된 경
전으로 삼아서 풀이를 하고 교화에 사용하였으며 모두 필사하였다. 이미
책으로 만들었으니 반드시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과거의 예를
보면 이런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뜻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
지 않고 스님의 번역이 아니기에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함께 ‘의심스러운 경전[疑經]’ 목록에 포함시킨다."35)
35) 出三藏記集 卷5(大正藏55, pp.40上-中).

강필의 딸이 8, 9세가 되었을 때, 가끔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서 경전을 암송
했는데 그 분량이 20여 권에 달했고 이를 모두 ‘의심스러운 경전’ 목록에 기록
했다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 뗄마가 출현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승법 비구니
가 아홉 살에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송출한 불전은 총 21종, 35권인데 그 경
명이 모두 출삼장기집에 실려 있다.36)
36) 송출 연대와 나이 그리고 경명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499년(9세)『보정경(寶頂經)』,『정토경(淨
    土經)』,『정정경(正頂經)』,『법화경(法華經)』,『승만경(勝鬘經)』; 500년(10세)『약초경(藥草經)』,
    『태자경(太子經)』,『가야바경(伽耶波經)』; 501년(12세) -『바라내경(波羅幄經)』,『우루빈경(優婁
    頻經)』; 502년(13세) -『익의경(益意經)』,『반야득경(般若得經)』,『화엄영락경(華嚴瓔珞經)』; 
    504년(15세) -『출승사자후경(出乘師子吼經)』; 505년(16세) -『유타위경(踰陀衛經)』,『아나함경
    (阿那含經)』,『묘음사자후경(妙音師子吼經)』; 이 이외에『우담경(優曇經)』,『묘장엄경(妙莊嚴經)』,       

    『유마경(維摩經)』,『서칠세경(序七歲經)』을 열거한다.

현대 우리나라에서도 뗄마와 같은 방식으로 출현하여 유포되고 있는 경전
이 있다. 금타(金陀, 1898-1948) 화상이 삼매 중에 얻었다는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년경)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37)이다. 금타 화상은 전남 곡성의 태
안사에 주석하셨던 청화(靑華, 1924-2003) 스님의 은사였다. 청화 스님은 보리
방편문과 관련한 법문에서 보리방편문의 출현 과정에 대해 “보리방편문
의 연원은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이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보는 깊은 선정삼매
가운데, 제2의 석가라 하는 용수보살로부터 현대 지성적인 시대에 알맞은 가
장 고도한 수행법으로 전수 받으신 것입니다.”38)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 역시
티벳의 뗄마와 같이 삼매 속에서 얻어진 경전이다.
37) 청화,「보리방편문 해설」(곡성:성륜사, 2001).
38) ‘기도발’ 홈페이지. http://www.kidobal.com(검색일자:2016.9.25.).

 

티벳불교계에서는 닝마파의 시조 빠드마삼바바에 의해 시작되어 천여 년

에 걸쳐 출현해 온 뗄마들뿐만 아니라, 시륜(時輪)딴뜨라(Kālacakra Tantra)

와 같은 밀교경전들은 물론이고 모든 대승불전들을 뗄마로 간주한다. 즉 밀교

경전, 반야계 경전, 유식계 경전들 모두 천상이나 용궁에 비장되어 있다가 시

절인연이 도래하여 뗄뙨들에 의해 발견된 뗄마들이라는 것이다.39)

39) Stephan Schuhmacher and Gert Woerner Ed., op.cit., pp.59-60.

 

현대의 문헌학적 시각으로 볼 때 뗄마들은 모두 위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

다면 대승불교 2,000년의 역사는 위경 위에 건립된 허구의 역사인가?마하반

야바라밀경,화엄경,법화경,능가경,대반열반경,유마경,능엄

,원각경등의 대승불전은 모두 폐기해야 할 무가치한 불전들인가? 대승

불교의 역사를 모두 허물고, 초기불전에 근거하여 불교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

인가? 사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현대의 일부 불교 학자와 불자들 중에

이런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 대승불전들과 대승불교에 대해

서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까?

 

3. 불설과 비불설, 어떻게 판정할 것인가?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에 대한 반론 가운데 하나는 “그러면 현존하는 초기

삼장은 불설 그대로인가?”라는 반문이다. 아쇼까왕 비문을 보면 불전에서 선

별한 일곱 가지 법문40)을 불교 신행의 지침으로 추천하고 있기에 이들 불전들

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설로 추정되는데, 현존하는 빠알리(Pāli) 니까야

(Nikāya)에서 해당 경전을 정확히 지목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경율론 삼장이

나 5부 니까야와 같이 현존하는 초기삼장의 분류방식이 아쇼까 왕 당시에 존

재했을 것 같지 않다고 한다.41) 또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권에서 아함경과 율이

정리된 형태로 한역된 것은 서력기원 후 5세기 이후의 일이며 남방 상좌부에

서 5부 니까야와 율이 정비된 시기 역시 5세기가 지난 다음일 뿐만 아니라 한

역 아함경과 빠알리 니까야를 비교해 보면 전자가 더 고층에 속한 것으로 보인

다.42) 따라서 대승도 부처의 직설이 아니지만, 현존하는 빠알리 니까야나 한역

아함경 역시 부처님의 교설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

게 불교의 근본을 추구해 들어가는 과정을 양파 까기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알맹이를 찾을 수 없는 양파.

40) ①Extracts from the Discipline, ②the Noble Way of Life, ③the Fears to Come, ④the Poem on the 
    Silent Sage, ⑤the Discourse on the Pure Life, ⑥Upatisa’s Questions, ⑦Advice to Rahula. ‘S. 
    Dhammika, THE EDICTS OF KING ASHOKA(KANDY SRI LANKA: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3)’ 가운데 MINOR ROCK EDICTS 참조.
41) 渡辺照宏, 經典成立論, 金無得 譯(서울:경서원, 1983), pp.28-29.
42) 위의 책, p.31 ; 서성원,「초기・부파불교연구」(서울:법경스님논문집발간모임, 2004).

 

불교가 이렇게 양파와 같아서 그 알맹이를 찾을 수 없다면, 석가모니 부처님

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할 때 무엇에 의지해야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초기불

전들이 대승불전에 비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근접해 있다는 점이

다. 따라서 대승불전의 교리가 불교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근거를 초

기불전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특징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에 있

다고 하며 이를 불설, 비불설의 판정 기준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필자는 ‘삼법

인’이 아니라 ‘사성제’를 그런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 집, 멸,

도’의 사성제에는 불교적인 현상론[苦]과 번뇌론[集], 해탈론[滅]과 수행론[道]

등 불교 전반이 요약되어 있는데, 삼법인에는 이 가운데 현상론인 고성제[제

행무상, 제법무아]와 해탈론인 멸성제[열반적정]만 담겨 있기 때문이다. ‘탐,

진, 치 삼독의 번뇌’를 의미하는 집성제와 ‘팔정도 혹은 계정혜 삼학의 수행’을

의미하는 도성제에도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불교 고유의 특징이 있다. 이

두 가지 성제(聖諦)를 누락시킬 경우 불교의 핵심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초기불전에 실린 가르침이든 대승불전의 가르침이든 그 내용이 사성

제의 취지에 부합한다면 불자들의 신행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고(四

苦) 팔고(八苦)의 고성제를 이해[解]하고, 집성제인 탐진치의 번뇌를 끊고[斷],

멸성제인 열반을 체득하고[證], 도성제인 팔정도 혹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修] 

내용이 실린 가르침이라면 불교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어떤 대승불전이든 그 가르침이 불교이기 위해

서는 ‘초기 불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어야’하며, 아울러 ‘그 내용이 사성

제의 취지에 부합해야’할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의 용어를 빌리면43) 전자

는 교증(敎證, āgamatas) 후자는 이증(理證, yuktitas)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교리 가운데 ‘육바라밀의 보살도’, ‘타방 불국토

의 우주론’, ‘반야계 경전의 법공 사상’의 세 가지를 소재로 삼아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지 검토해 보자.

43) 阿毘達磨俱舍論(大正藏29, p.104中).

 

II. 초기불전과 아비달마교학에서 찾아본 대승불교 교리

 

1. 본생담의 보살과 대승 보살들의 육바라밀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이야기 모음집인본생담(Jātaka)은 남방상좌부의

빠알리 경장(Sutta Piṭaka) 가운데잡부니까야(Kuddaka Nikāya)에 속한 정전

(正典)으로 부처의 전생과 관련하여 500여 편의 예화가 실려 있다.본생담

주인공인 ‘보살(Bodhisattva)’은 석가모니 부처 1인의 전생만을 가리키는 단어

였다.본생담을 비롯한 경전과 율전의 내용을 취합한 불전문학류의 경전인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서두에서는 보살로서 살았던 석가모니의

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세생생 힘들고 괴로워도 수고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마음을 비우고

고요함을 좋아하여 조작도 짓지 않고 욕심도 내지 않았다. 나의 것을 덜

어내어 남에게 베풀고[보시], 지극한 정성으로 계를 지켰으며[지계], 나

를 낮추어 천대받는 것을 참았고[인욕], 용맹스럽게 정진하였으며[정

진], 마음을 한 곳에 모아서 생각하고[선정], 성스러운 지혜를 정밀하게

공부하였다[반야]. 자애의 마음은 천하를 살려내고, 대비의 마음으로 상

처와 재앙을 없앴으며, 근심 있는 자를 위로하고, 중생을 길렀으며, 괴로

운 사람을 구제하고, 부처님들을 따르고 받들었으며, 진인(眞人)을 특별

하게 생각하였으니 그 동안 쌓은 공덕은 글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

도다.44)

44)『佛說太子瑞應本起經』卷上(『大正藏』3, p.472下).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 보살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육바라밀을 행하고 자비를 실천하였으며, 이타행을 하고 부처님

들을 따르고 받드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불전문학류의 경전들은 물론이고

『본생담』도처에서 전생 보살의 육바라밀을 말한다.

 

그런데 아비달마문헌에 의하면 육바라밀은 비단 석가모니 부처뿐만 아니

라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된 수행 덕목이기도 하다.아비달마대비바사론

서는 “한 분의 부처님이 3아승기겁 동안 육바라밀을 닦아서 거의 모두 원만하

게 성취했기에 무상(無上)의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과 같이 ‘다

른 부처님들[餘佛]’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다.”45)라고 쓰고 있으

며 이는아비달마구사론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46) 여기서 말하는 ‘다른

부처님들’은 초기불전에도 등장하는 연등불(練燈佛)이나 비바시불(毘婆尸佛),

가섭불(迦葉佛)과 같은 과거불을 의미할 것이다.47) 따라서 아비달마교학에서

말하는 육바라밀은 아직 일반 불자들의 보편적 실천덕목은 아니었다.

45)「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17(『大正藏』27, p.85上), “如一佛於三無數劫 修六波羅蜜多得圓滿故 
    證得無上正等菩提 餘佛亦爾故名平等.”
46)「阿毘達磨俱舍論」卷12(大正藏29, p.352下).
47)「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178(大正藏27, p.893上)에 “도솔천에 있는 법을 좋아하는 무량한 보살들
    [菩薩衆]을 교화한다.”거나 “법을 좋아하는 보살들[菩薩]이 언제나 그곳에 가득하여 보처보살이
    밤낮에 걸쳐 쉬지 않고 이들을 위하여 항상 설법한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보살들’은,
    대정신수대장경에서 아함부(阿含部)의 경전[증일아함경 제외]과 비담부(毘曇部)의 경전 가운
    데, ‘보통명사’로서의 보살을 의미하는 유일한 예로[CBETA검색] 대승불교적인 보살사상의 단초
    일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전에서 육바라밀은 모든 보살들이 성불을 지향하며 배워야

할 보편적인 실천 덕목으로 그 외연이 확장된다.소품반야바라밀경의 경문

을 인용해 보자.

 

아난이여! 만일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육

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왜 그런가? 아난이여! 바라밀들은 보살들(諸菩薩)

의 어머니여서 능히 부처님들(諸佛)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보살

이 육바라밀을 배우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따라

서 나는 육바라밀로 그대에게 거듭 부촉하느니라. 왜 그런가? 바로 이 육

바라밀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의 한량없는 가르침의 보고(寶庫)이기 때

문이니라.48)

48)『小品般若波羅蜜經』卷9(『大正藏』8, p.578上). 

 

여기서 보듯이 아난(阿難, Ānanda)을 포함하여 성불을 지향하는 모든 ‘보살

들’에게 ‘육바라밀’의 실천이 권유된다. 즉본생담에서 고유명사였던‘보살’

이 대승불전에서는 보통명사로 전의(轉意)하며, 초기불전과 아비달마문헌에

서 ‘석가모니의 전생 보살’의 실천덕목이었던 ‘육바라밀’이 반야계 경전을 비

롯한 대승불전에서는 ‘발심한 모든 보살들’의 실천덕목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즉, 대승불전의 보살도는 그 연원을 초기불전인본생담에 둔다.

 

초기불전에서 말하는 석가모니 부처의 삶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

반왕의 아들로 태어나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성도한 후 80세에 열반에 드신

‘현생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본생담에서 보듯이 보살로 살아간 ‘전생의

삶’이다. 불교를 소승과 대승으로 구분할 때 출가하여 구도자의 길을 간 싯다

르타 태자의 현생을 닮고자 하면 소승이고, 보살로 살아간 전생의 삶을 닮고자

하면 대승인 것이다. 즉, 대승불전의 보살도는 초기불전인본생담의 논리적

귀결이며 발전적 계승이다.

 

2. 삼천대천세계설(三千大千世界說)과 타방불국토

과거칠불의 예에서 보듯이 다불사상은 초기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타방의 불국토가 아니라 삼천대천세계 내에서 시간을 달리하여 존재하는 부

처들이었다. 이와 달리 대승불전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우주 바깥에 다른 불국

토가 있고, 그곳을 주관하는 타방의 부처들이 있다고 설한다. 예를 들어 동방

묘희국에는 아촉불이 있고, 남방의 환희국에는 보상(寶相)여래가 있으며, 서

방의 극락정토에는 아미타불이 있고, 북방의 연화장엄세계에는 미묘성불(微

妙性佛)이 있다.49) 그러면 이런 타방 불국토의 근거를 초기불전과 아비달마교

학에서 찾아보자.

49)『佛說觀佛三昧海經』卷9(『大正藏』15, p.689上) ;『金光明經』卷2(『大正藏』16, p.345中).

 

초기불전인 아함부에 속하는장아함경세기경(世記經) 「염부제주품

(閻浮提州品)」50)이나대루탄경(大樓炭經)51),기세경(起世經)52),기세인본

경(起世因本經)53)에 실린 불교의 우주론을 종합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50)『長阿含經』卷18(『大正藏』1, pp.114中-下).
51)『大樓炭經 卷1(『大正藏』1, p.277上).
52)『起世經』卷1(『大正藏』1, pp.310中-下).
53)『起世因本經』卷1(『大正藏』1, pp.365中-下).

 

“하나의 태양과 달이 4천하를 비추는데 그와 같은 태양과 달이 1,000개

모이면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가 된다. 이런 1,000개의 세계에는

1,000개 달, 1,000개의 해, 1,000명의 수미산왕, 4,000곳의 작은 섬, 4,000

곳의 큰섬… 1,000곳의 사천왕천, 1,000곳의 도리천 … 1,000곳의 타화자

재천, 1,000곳의 마라천, 1,000곳의 범천이 있다. … 이런 소천세계는 마치

주라(周羅)54)와 같다. 그렇게 주라와 같은 소천세계가 1,000개 있으면 하

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며, 중천세계가 1,000개 있으면 이를 삼천

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고 부른다. 이런 삼천대천세계는 동시에 성립

했다가 동시에 파괴된다. …… 이것이 ‘하나의 부처님 나라(一佛刹)’로 중

생이 사는 곳이다.

54) ‘주라(周羅)’는 상투를 의미하는 산스끄리뜨어 ‘cūḍā’의 음사어다. 起世因本經(大正藏1, p.365
    下)에서는 주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라(周羅)라는 것은 수나라 말로 상투(髻)다. 외
    인들이 정수리 위에서 [머리칼을] 묶은 것으로, 어릴 때 긴 머리를 상투로 만드는 것이 허락된다
    (周羅者 隋言髻也 外國人頂上結 少許長髮為髻).”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나선은하(螺線銀河)’의 모
    습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태양과 달이 비추는 4천하’가 ‘태양계의 지구’를 의미한다

고 볼 때, 태양과 달이 1,000개 모인 소천세계란 ‘1,000개의 별’이 모인 곳이라

고 풀이할 수 있다. 또 이런 소천세계가 다시 1,000개 모이면 중천세계이고, 중

천세계가 다시 1,000개 모이면 삼천대천세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

천대천세계란 별이 10억 개 모인 곳으로 온갖 중생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부처

님 나라[一佛國土]’다.

 

그런데 이런 삼천대천세계 역시 무상(無常)하기에 성립과 파괴를 되풀이 한

다. 즉 성(成), 주(住), 괴(壞), 공(空) 네 단계의 과정을 계속 되풀이 하는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에 의하면 이런 네 단계는 각각 20겁(劫)이 걸리며, 삼천대

천세계의 성, 주, 괴, 공은 총 80겁에 걸쳐 일어난다.55) 삼천대천세계가 파괴되

기 시작하는 괴겁(壞劫)의 시기가 되면 욕계의 최하부인 지옥부터 텅 비기 시

작하여 마지막에는 색계의 초선천인 범천의 세계까지 텅 비어 중생이 없는 기

세간(器世間)만 남게 되는데 이렇게 유정세간이 모두 사라지기까지 19겁이 걸

린다.56) 그 후 마지막1겁 동안에 화염이 일어나 범천 이하의 기세간 전체가 재

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57) 이 때 죄가 없는 자들은 대개 그 곳의 범천 이상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55)「阿毘達磨俱舍論」(『大正藏』29, pp.62中-下).
56)「阿毘達磨俱舍論」(『大正藏』29, pp.62下-63上).
57)「阿毘達磨俱舍論」(『大正藏』29, p.63上).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욕계의 ‘지옥, 아귀, 축생계, 인간계, 육욕천’

과 색계의 ‘범천’까지 기세간이 모두 파괴될 때 죄의 과보를 아직 다 받지 않은

자들은 어디에 태어날까?대루탄경이나아비달마구사론, 그리고 대승의

영향이 깊게 밴 한역증일아함경58) 등에서는 이에 대해 ‘다른 곳의 부처님

나라[他方佛國]’에 있는 악도에 태어난다고 설명한다.59) 일반적인 초기삼장에

서는 ‘타방 불국토’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없지만, “삼천대천세계가 파괴되는 괴

겁의 시기에 아직 죄의 과보를 더 받아야 할 중생은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에

대한 자연스러운 귀결로, 일부 초기불전과 아비달마문헌에서 타방불국토와

타방불 이론이 출현했던 것이다.60)

58) 한역 삼장 중 증일아함경의 경우 아함부의 초기불전에 속하지만, 타방 불국토도 거론하고(『大
    正藏』2, p.736下) 대승이라는 용어도 사용하며(『大正藏』2, p.550上) 육바라밀에 대한 가르침도 실려
    있는 점(『大正藏』2, p.645中)에서 보듯이 대승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전이다.
59)『大樓炭經』卷1(『大正藏』1, p.309下), “是時 有罪者未竟者 復生他方佛國天下惡道中.” ;
   『增壹阿含經』 卷30(『大正藏』2, p.736下), “設彼地獄眾生罪未畢者 復移至他方剎土.” ; 阿毘達磨俱
    舍論卷12(『大正藏』29, p.62下), “諸有地獄定受業者 業力引置他方獄中.”
60)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더남는다.『무량수경』에서 보듯이 타방불토 사상은 발보리심과 염불에 의
    해 타방불토에 태어난다는 타력신앙이다. 이는 초기불전에서 말하는 자업자득의 업 이론과 어긋
    나지 않을까? 그러나 아비달마교학의 육인오과설(六因五果說) 가운데 ‘변행인(遍行因)→등류과(等
    流果)’, ‘동류인(同類因)→등류과’의 인과론으로 이에 대해 해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을 기약한다.

 

3. 뗏목의 비유와 반야경의 법공

반야심경에서는 외견상 초기불전의 가르침 전체를 부정하는 듯이 보인

다. “색, 수, 상, 행, 식의 일체가 공성(空性)이고 공성이 바로 일체인데, 공성에

는[空中] 오온도 없고[無色 無受想行識], 십이처도 없으며[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

香味觸法], 십팔계도 없고[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십이연기의 유전문도 없고 환

멸문도 없으며[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사성제도 없고[無苦

集滅道], 지식도 없으며 도달도 없다[無智亦無得]”고 한다. 그야말로 초기불전

과 아비달마교학 전체를 파기하는 듯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반야계 경전들의 교화 대상은 불교 초심자들이 아니었다.

하반야바라밀경에서 영취산에 모여 설법을 듣는 대중들은 아라한이 된 5,000

명의 비구들61)과 사성제를 체득한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500명과62) 다라니

와 온갖 삼매를 체득하고 5신통이 열린 보살들63)이었다고 쓰고 있다. 교화 대

상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대반야경이나소품반야바라밀등 반야계 경전

어디에서도 대동소이하다. 즉 반야계 경전의 가르침은 불교 초심자가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성인(聖人)의 지위에 오른 대중들을 위해

설시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반야계 경전에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의 교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여 최소한 수다원 이상의 지위에 오

른 성인(聖人)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반야심경에서 “공성에

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이런

법들에 의해서 불교 수행의 목표점에 도달한 성인들에게, 불교적 지혜인 공성

의 궁극에서는 그런 법들조차 버려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법들은 수행의 목표가 아니라 단지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61) 그 가운데 아난 존자만이 수다원의 지위에 있었다.『摩訶般若波羅蜜經』(『大正藏』8, p.217上), 
    “共摩訶比丘僧大數五千分 皆是阿羅漢 … 唯阿難在學地得須陀洹.”
62)『摩訶般若波羅蜜經』(『大正藏』8, p.217上), “復有五百比丘尼 優婆塞 優婆夷等 皆得聖諦.”
63)『摩訶般若波羅蜜經』(『大正藏』8, p.217上), “復有菩薩摩訶薩——皆得陀羅尼及諸三昧行 …”

 

그런데 법에 대한 이런 태도는 반야계 경전에 처음 등장하는 혁명적 가르침

이 아니었다. 초기불전에 실린‘뗏목의 비유’와 그 취지를 같이 한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인 ‘법(Dharma)’을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는 뗏목에 비유한다.

이를 축약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큰물을 만났는데 이쪽 물가는 수상쩍고 위험

하지만 저쪽 물가는 안전하고 위험이 없다고 하자. 그래서 그 사람은 …

뗏목을 만들었다. 저쪽 물가로 건너간 다음에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이 뗏목이 나에게 참으로 유용했다. 왜냐하면 … 나는 이 뗏목

에 의지해서 … 건너왔기 때문이다.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서 그 어디든 내가 가려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비구들이여 그대

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그렇게 하면, 뗏목에 합당한 일을 하

는 것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 사람은 뗏목에 합

당한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은 …” ‘이 뗏목은 나에

게 참으로 유용했다. … 이 뗏목을 마른 땅으로 끌고 가든지, 물에 그대로

두어 가라앉게 하든지 하고서 내가 가려는 곳으로 가야 하겠다.’라고 생

각한다. “이렇게 할 경우 그는 뗏목에 대해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이리라.

비구들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법(Dahrma)’이 강을 건너기 위한

…… 뗏목에 비교된다고 가르쳤다. 법이 뗏목에 비교된다는 가르침대로

이해한다면, 그대는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은 어

떠하겠는가?64)

64)『中阿含經』卷54(『大正藏』1, p.764下) ; Alagaddupama Sutta, MN.Ⅰ,p.130(PTS本).

 

위험한 이쪽 물가를 벗어나기 위해서 뗏목을 이용했는데 저쪽 물가에 도달

한 후에, 뗏목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이를 머리에 이고 가든지, 등에 지고 간다

면 이는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 즉 법에 의

지하여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했는데, 계속 그런 법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

다. 뗏목을 타고서 강을 건너서 피안에 도달한 사람이 뗏목에서 내려서 피안에

올라야 하듯이,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한 사람은 그 수단이었던 법에 대한 집착

을 버려야 할 것이다.반야심경에서 오온 등의 법들을 부정하는 경문은 바로

이 점을 역설하고 있다. 반야계 경전 가운데 하나인금강반야바라밀경에는

이런 교훈이 “그대들 비구들은 내가 법을 뗏목과 같다고 비유한 것을 알 것이

다. 법도 오히려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랴?”라고 축약되어 있다.65)

65) 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藏8, p.749中).

 

초기불전에서는 분명히 궁극에는 법에 대한 집착조차 버릴 것을 가르쳤는

데,66) 부처님 열반 후 500여 년이 흐르면서 다양한 부파들이 난립하여 제각각

자파에서 구성한 법의 체계에 대한 집착으로 시시비비 논쟁을 벌였다. 용수의

중론에서는 그 당시 불교의 타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66) 아비달마 문헌에서도 “강을 건넌 후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비유를 거론한다.「阿毘達磨大毘婆沙
    論」卷97(『大正藏』27, p.503中)에서는 이 비유가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 무루도(無漏道)조차 버리
    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며,「阿毘達磨俱舍論」卷28(『大正藏』29, p.149下)에서는 ‘더 이상 희구
    하지 않는 삼매[無願三昧]’에서 “4성제의 16행상 가운데 열반의 상(相)과 유사한 ‘공(空)과 비아(非
    我)’를 제외한 12행상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아비달마불교의 이런 해석들
    은 ‘색(色) 등의 오온(五蘊)이 그대로 공성(空性)이고, 공성이 그대로 오온임’을 역설하고[般若心經],
    ‘공도 없고 공 아닌 것도 없으며[非空非不空], 자아도 옳지 않고 무아도 옳지 않음’[非我非無我]을 역
    설하는[摩訶般若波羅蜜經 卷6(『大正藏』8, p.263上)] 반야계 경전의 공(空)사상만큼 철저하지는 못
    하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500년이 지난 상법(像法)의 시대에 사람의 근기

가 아둔해져서 갖가지 법들에 대해 깊이 집착하였다. 십이연기, 오온, 십

이처, 십팔계 등에서 확고한 특징을 추구하니 부처님의 뜻은 모르고 오

직 문자에만 집착하였다."67)

67)「中論」卷1(『大正藏』30, p.1下).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Dharma]’을 ‘깨달음의 피안에 이르기 위한 뗏

목’과 같은 수단, 또는 방편으로 간주했던 초기불전의 취지에서 멀리 벗어난

일이었다. 반야심경을 포함한 반야계 경전에서, “공성에는 오온, 십이처, 십

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의 법들이 없다.”고 선언한 것은 법에 대한 소승불교

도들의 잘못된 태도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원

래의 취지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법’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그

것이 궁극일 수는 없으며 뗏목과 같은 수단이고 방편일 뿐이다. 궁극적인 깨달

음, 공성의 피안에 도달했으면 가르침의 뗏목, 즉 법의 뗏목에서 내려서 공성

의 언덕에 올라야 한다. 오온의 뗏목에서도 내리고, 십이처의 뗏목에서도 내리

고, 십팔계의 뗏목에서도 내리고, 사성제의 뗏목에서도 내리고, 십이연기 등

등 모든 법들의 뗏목에서도 내려서 공성의 피안에 올라야 한다. 그것이 법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고 부처님의 참뜻이다. “뗏목에서 내려라! 뗏목에서 내

려라! 피안에 도달하면 법의 뗏목에서 내려라!” “공성에는 오온도 없고, 십이

처도 없으며, 십팔계도 없고, 십이연기의 유전문도 없고 환멸문도 없으며, 사

성제도 없고, 지식도 없으며 도달도 없다”는 반야심경의 선언은 초기불전의

취지를 도외시한 채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법에 집착하는 부파불교도들의

잘못된 태도를 바로 잡기 위해서 외친 불교 회복의 구호였다.

 

III. 대승불교는 양파의 껍질과 같은 불교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간략히 검토해 보았듯이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교리인 보살사상,

타방불토사상, 반야경의 법공사상 모두 초기불전에 그 연원을 둔다. 보살사상

은『본생담』의 보살이 대승불자들의 보편적 신행 방식으로 확장된 것이며, 타

방불토사상은 삼천대천세계의 공간론과 성주괴공(成住壞空) 시간론의 논리적

귀결이며, 반야경의 법공사상은 법[Dharma]의 방편성을 가르친 뗏목의 비유

와 그 취지를 같이 한다. 또 초기불전의 핵심교리인 고, 집, 멸, 도의 사성제에 

대응시키면 보살사상은 수행의 길인 도성제를 대승적으로 확장한 것이고, 타

방불토사상은 불교의 세계관인 제행무상의 고성제에 대한 전 우주적 표현이

며, 반야경의 법공사상은 수행의 목표인 멸성제를 심화시킨 것에 다름 아니었

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교리 세 가지 모두 그 근거나 취지가 초기불전의 가

르침에서 벗어나거나 어긋나지 않는다. 초기불전에서 경전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는 말이다.

 

이런 분석의 토대 위에서 본고 제I장, 제3절에서 들었던 양파의 비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귤이나 포도와 같은 과일은 알맹이를 먹기 위해서 껍질을 깐

다. 그러나 양파는 알맹이를 먹는 채소가 아니다. 전체가 껍질로만 이루어져 있

기에 어떤 껍질이든 내 손에 닿는 부분을 먹으면 된다. 일반적으로 “껍질을 벗기

고 벗겨도 본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어떤 일을 양파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불교는 양파와 같다.”고 비유할 때 그 의미는 이와 다르다. 양파의 경우

벗겨지는 껍질들이 모두 양파의 육질(肉質)이다. 껍질이 본질(本質)인 것이다.

2,500여 년에 걸쳐 전승되고, 편집되고, 재해석되고, 재창출된 대소승의 불전들

은 바로 이런 양파와 같다. 따라서 어떤 대승불전이라고 하더라도 그 세계관이

초기불전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나의 인지(認知)와 정서(情緖)

를 불교적으로 정화시키고 향상시킨다면 불설로서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방편시설(方便施設), 대기설법(對機說法), 응병여약(應病與藥)의 방식으로 설
시된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역시 양파의 심부를 구성하는 하나의 껍
질이었다. 그 외피를 다시 아비달마교학의 껍질이 감쌌고 이어서 반야중관, 유
가행유식, 밀교의 외피가 계속뒤를 이으면서 대승의 기치를 건 수많은 불전들
이 편집되고 창출되었다. 그 내용이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이론이나 경전들
은 자연도태 하듯이 솎아지고 폐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반야경』,『화엄경』,
『법화경』,『대반열반경』,『무량수경』,『해심밀경』,『능가경』,『원각경』,
『능엄경』,『범망경』,『천수경』등 현재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신봉하는 대승
불전들 모두는 각 시대와 지역과 문화에 부응한 법신불(法身佛)의 대기설법이었다.
양파의 껍질과 같이 불교의 본질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