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까타왓투(Kathāvatthu)와 붓다와짜나(Buddhavacana)/황순일

실론섬 2017. 6. 2. 23:42

까타왓투(Kathāvatthu)와 붓다와짜나(Buddhavacana)

황 순 일 / 동국대학교

 

목 차

Ⅰ. 서언

Ⅱ. 스리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Ⅲ. 상까샤(Sāṃkaśya) 기적

Ⅳ. 붓다고사(Buddhaghosa)의 위상

Ⅴ. 결어

 

[국문 요약]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 즉 붓다와짜나(Buddhavacana)란 

개념을 통해 자신들의 빨리 삼장(tipiṭaka)에 절대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아비담마(abhidhamma) 문헌들이 빨리 삼장에 편입되는 과정과 특히 저자가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로 알려져 있는 까타왓투(Kathāvatthu)에 경전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 교단은 

붓다와짜나(Buddhavacana)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붓다고사가 

스리랑카를 방문했던 기원후 5세기경에 있어났으며 사실상 그 이전까지 빨리 아비

담마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상까샤(Sāṅkāśya) 기적을 

통해서 아비담마를 붓다와짜나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교단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던 스리랑카 

아루라다푸라 마하위하라 보수적인 태도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I. 서언

 

남방불교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빨리 삼장(tipiṭaka)의 위치는 

가히 절대적이다. 아비담마(abhidhamma)를 포함한 빨리 삼장 전체는 

다양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말씀 즉 붓다와짜나(buddhavacana)

로 간주되고 있다. 이점은 아비담마가 율장 및 경장에 비해 상당히 

후대에 성립됐다고 보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앎과도 동떨어져 있다. 

사실상 아비담마는 제1결집과 제2결집에 관한 율장(Vinaya)의 언급

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1) 근본분열을 통해 새롭게 생겨난 대중부

(Mahāsāṅghikas)에 의해서도 거부되고 있다. 기원후 5세기경에 성립된 

스리랑카 역사서인 마하왐사(Mahāvaṃsa) 2)에 와서 제2결집을 행한 

아라한들이 삼장(tipiṭaka)을 수지하고 있다 3)고 나타날 뿐이다. 또한 

대중부에 의해서 아비담마가 거부되었다는 점4) 은 근본분열 당시 

아비담마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경전적인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

되지 않았다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5)

1) Lamotte (1988) p.180.
2) 마하왐사(Mahāvaṃsa)는 일반적으로 붓다고사(Buddhaghosa)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본다(Hinüber 1996 p.91). 
3) 이때 삼장(tipiṭaka)에 아비담마(abhidhamma)가 포함됨으로 전체가 제1결집에 성립된 
   것이 된다.  
4) Lamotte (1988) p.182.
5) Norman (1983) p.96.

 

남방불교 테라와다 전통에서 아비담마를 불설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은 

상당히 후대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스리랑카에서 

성립된 세 부파인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아바야기리(Abhayagiri), 

제타와나(Jetavana) 모두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아마도 아바야

기리와 제타와나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가장 보수적이었던 마하위하라가 

교리와 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아비담마(abhidhamma)에 

권위를 부여하는 수단으로서 자신들이 보존하고 있는 빨리 문헌들 전체를 

삼장(tipiṭaka)으로 묶어 불설로 간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도에서 붓다고샤(Buddhaghosa)를 초청하여 자신들의 삼장(tipiṭaka)을 

확립하면서 최종적인 사상적 토대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상까샤(Sāṃkāśya) 

전설을 동원하고 있으며 저자가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로

나타나 있는 까타왓투(Kathāvatthu)에 대해서 이보다 더한 극단적인 

방법까지 사용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스리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의 보수성과 상카샤

(Sāṃkāśya) 전설 그리고 붓다고사(Buddhaghosa)의 위상을 중심으로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교단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빨리 삼장(tipiṭaka) 중심적 태도의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한다.

 

Ⅱ. 스리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와수반두(Vasubandhu)는 성업론(Karmasiddhiprakaraṇa)에서 자신의 석궤론
(Vyākhyāyukti)을 언급하며 근본결집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mūlasaṃgītib-
hraṃśa)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6) 이 점은 인도의 북방불교 전통에서 와수반두 
시대에 이미 경·율·론의 형성에 책임이 있는 근본결집(mūlasaṃgīti)의 내용이 
더 이상 고스란히 남아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스리
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에서 빨리 삼장(tipiṭaka)에 속하지 않지만 
아주 중요한 문헌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는 넷띳빠까라나(Nettippakaraṇa)는 
이와는 정반대 태도가 보인다는 점이다. 
6) Skilling (2010) p.19; Lamotte (1936) p.200.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존자가 설하고 존귀하신 분(bhagavant)께서 인가
하시고 근본결집(mulāsaṃgīti)에서 합송된 넷띠[빠까라나]는 이정도로 완전하다.7)"    
7) Np p.193: ettavatā samattā Nettiyā āyasmatā Mahākaccānena bhāsitā Bhagavatā 
   anumoditā mūlasaṃgītiyaṃ saṃgītā ti.

피터 스킬링(Peter Skilling)은 넷띠빠까라가 이 간기(刊記)를 통해서 이 논서가 
붓다 당시에 마하깟짜나에 의해 설해졌고 제1결집에서 합송되었다는 점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한다고 본다.8) 즉 넷띠빠까라는 비록 불설은 아니지만 불설
에 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이 논서가 제1결집에서 합송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권위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기원후 4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스라랑카 역사서인 디빠왐사(Dīpavaṃsa)9) 는 스스로를 테라와다(Theravāda)로 
칭하면서 자신들은 거대한 니그로다 나무(nigrodha mahārukkha)와 같고 나머지 
부파들은 나무에 생겨난 가시(kaṇṭaka)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가장 뛰어난 승리자인 붓다의 가르침’10)을 자신들이 보존하고 있
다고 자랑한다. 따라서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에 있어서 제1결집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빨리 삼장(tipiṭaka)이 바로 제1결집(mūlasaṃgīti)이고 
제1결집이 바로 빨리 삼장이 된다.11) 
8) Skilling (2010) p.19 note 58.
9) 디빠왐사(Dīpavaṃsa)는 일반적으로 붓다고사(Buddhaghosa)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본다(Hinüber 1996 p.89). 
10) Kva p.5: anūnaṃ andhikañ ca kevalaṃ jinasāsanaṃ. 붓다고샤는 디빠왐샤(Dīpavaṃsa)의 
    이 부분을 자신의 까타왓투 주석서 (Kathāvatthu aṭṭhakathā)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다. 
11) Skilling (2010) p.22.

빨리 아비담마의 첫 논서인 담마상가니(Dhammasangaṇī)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Atthasālinī)의 도입부에서 붓다고샤(Buddhaghosa)는 빨리 
아비담마의 위상에 관해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니야나포니까
(Nyanaponika)는 앗타살리니가 아비담마를 불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에 대한 처벌 규정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자신의 아비담마 연구
(Abhidhamma Studies)에서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12) 
12) Nyanaponika (2007) p.14 (As p.29).

"아비담마를 [불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승리자의 가르침
(jinacakka)에 해악을 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서 따타가따
(Tathāgata)의 전지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승(Sattha)의 지혜
의 완벽함(vesārajja)을 약화시키며, 열심히 배우려는 사람들을 
속이고, 성인으로 가는 길을 막으며, 18가지 분쟁의 원인을 한 
번에 다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그는 일시적 승적 정지(ukkhepaniya) 
또는 승려들에게 직책 받는(tajjaniya) 처벌을 받아야 한다."       

스리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아비담마에 대한 이러한 보수성은 
인도불교 전반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북방불교 설일체유부
(Sarvāstivāda) 전통은 아비다르마(abhidharma)를 경전(sūtra) 보다 
뛰어난 최고의 가르침으로 간주하지만, 아비다르마 문헌들이 붓다가 
아니라 붓다 이후의 뛰어난 논사들에 의해 만들어 졌음을 각각의 저자를 
명시하여13)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13) Lamotte (1988) p.185.

그렇다면 왜 마하위하라는 자신들의 아비담마 논서를 불설에 편입시키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처벌 규정까지 만들어야 했을까? 
인도와 분리된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은 이들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주요한 요인들 중에 하나로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 
불교 교단 내부의 복잡한 분열상이 이들을 더욱더 보수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고대인도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아쇼카왕 시기에 불교가 
스리랑카로 국가대 국가의 외교관계를 통해서 전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4) 아쇼카왕에 의해 스리랑카로 파견된 마힌다(Mahinda)는 스리랑카의 
고대수도인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의 데와남삐야 띳사(Devānaṃpiyatissa)
왕을 불교에 귀의시키고 계속해서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을 불교에 귀의
시킨다. 마힌다의 수계전통을 계승하면서 상가밋따(Sanghamitta)에 의해 
전해진 보리수나무와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ī)왕에 의해 건설된 
루완왈리사야(Ruvanvalisaya) 불탑15) 을 중심으로 마하위하라(Mahāvihāra)는 
아누라다푸라에서 크게 발전했다. 이들은 대부분의 스리랑카 왕가의 후원을 
받았고 가장 강력한 종파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숲에 거주하면서 
계행과 학식으로 명성을 쌓은 아란니까(Āraññikas)란 이름으로 작은 독립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16)
14) Combrich (2006) p.136.
15) 또는 마하뚜빠(Mahāthūpa)라고도 한다(Berkwitz 2010 p.143). 
16) Berkwitz (2010) p.143. 10세기경 빠라끄라마바후(Parākramabāhu)왕 때 아란니까
    (Āraññikas)의 마하깟사빠(Mahākassapa)가 초빙되어 스리랑카 교단이 통합이 이루
    어진다. 사실상 이 시기를 정점으로 스리랑카 불교교단은 마하위하라(Mahāvihāra)로 
    급속하게 통합된 것이 된다(Berkwitz 2010 p.147).  

하지만 마하위하라(Mahāvihāra)에는 2개의 경쟁 부파가 있었는데 이들이 
아와야기기(Abhayagiri)와 제타와나(Jetavana)였다. 전자는 교단의 창시자의 
이름에 따라 담마루찌(Dhammarucis)로도 불렸고 기원전후 성립되어 기원후 
4세기 경부터 거대한 부파로 성장했다. 인도로부터 새로운 불교 이론, 범어
(Sanskrit) 경전 및 논서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수용했으며, 보수적인 
마하비하라(Mahāvihāra)로부터 전통적인 교리라 아니라 확장된 교리라는 
의미에서 광설(vaitulya)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7) 후자는 교단의 창시자의 
이름에 따라 사갈리까(Sāgalikas)로도 불렸으며 4세기경에 아와야기리
(Abhayagiri)에서 갈라져 나와 독립한 부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독립적인 
경전과 율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리적 사상적으로 마하비하라(Mahāvihāra)에 
가까웠고 스리랑카 왕가의 후원을 받기 위해서 마하비하라와 경쟁했으며 
이 때문에 양 교단 사이에 깊은 불신이 초래되었다고 한다.18) 
17) Berkwitz (2010) p.143.
18) Berkwitz (2010) p.143.

마하위하라가 붓다고샤(Buddhaghosa)를 초청한 5세기는 이 3부파의 경쟁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마하위하라는 이들과의 경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자신들의 빨리 경전과 교리체계를 재정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사실상 이 시기까지도 스리랑카의 부파들은 아비담마(abhidhamma)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몰랐었던 것으로 보인다.19) 아마도 자신들의 아비담마 논서
들을 불설에 포함시켜 아와야기리(Abhayagiri)의 범어(Sanskrit) 논서들에 비해 
우위를 점하려는 움직임이 마하위하라(Mahāvihāra)가 붓다고사(Buddhaghosa)
를 초청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19) Lamotte (1988) p.182.

 

Ⅲ. 상까샤(Sāṃkāśya) 기적

라못은 붓다고샤가 스리랑카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승려들이 자신들 아비담마의 정통성과 유구함을 확립하려는 유일한 목적으로 
붓다의 일생 이야기에 한 사건을 각색했다고 한다.20)
20)Lamotte (1988) p.183.

이 이야기는 초기경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21) 인도불교 전반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사건으로 상까샤(Sāṃkāśya) 기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비록 범어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한역본 불소행찬(Buddhacarita)에 남아있는 아슈와고사
(Aśvaghoṣa)의 짧은 언급22) 이 상카샤 기적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적 기록
으로 판단된다.23) 상까샤 기적은 초기불교 유적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인도중부 바르후트(Bārhut)24) 와 산치(Sāñcī)25) 에서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100년경에 조성된 부조들은 무불상(aniconism) 양식으로 사다리를 통해 상카샤 
기적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21) Skilling (2008) p.6.
22) K.980 p.274: 부처님께서 어머니께 설법하기 위하여 곧 도리천으로 올라가시어 석 달 동안 
    천궁(天宮)에 계시면서 모든 하늘 사람을 두루 교화하셨다. 어머니를 제도하여 은혜 갚은 뒤 
    안거(安居)할 때가지나 돌아올 때 모든 하늘 대중들 깃[羽]처럼 따르고 일곱 가지 보배 
    계단을 타고 염부제(閻浮提)로 내려왔나니 모든 부처 언제나 내려오던 곳이었네. 한량없는 
    모든 하늘 사람들 궁전을 타고 따르며 전송했고 염부제 임금과 백성들 모두 합장하고 
    우러러보았다(TD4 p.38).
23) Skilling (2008) p.6.
24) Huntington (1999) p.65.
25) Huntington (1999) p.91.
      

 

이 이야기에 의하면 붓다는 천상에 환생한 어머니를 위하여 3개월의 안거기간 

동안 33천(Trayastriṃśas)으로 올라가 불법을 설한 뒤 보석으로 만든 사다리를 

33천에서 상카샤로 연결하고 인드라와 브라마의 호위를 받으며 인간세계로 

내려온다. 5세기와 7세기경 인도를 방문한 법현26) 과 현장27) 은 상까샤

(Sāṃkāśya)를 순례하였으며 전설적인 이야기와 함께 그때까지 남아있는 
사다리의 흔적들, 아쇼까왕의 석주, 불탑 및 사원들에 관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붓다가 환생한 어머니를 위해 불법을 설했다고 나타날 
뿐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설했는지는 전혀 이야기되지 않는다. 
26) Legge (1986) pp.47-53. 법현은 상까샤에서 33천과 상까샤를 연결했던 사다리의 
    흔적을 보았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붓다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땅의 밟자 위의 
    7칸만 남기고 모두 땅속을 들어갔다고 한다. 아쇼까왕이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딸을 
    파보게 했지만 사다리의 끝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27) Beal (1884) pp.202-205. 현장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사다리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이웃나라 왕자가 그 자리에 벽돌로 만든 약 21m높이의 사다
    리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피터 스킬링(Peter Skilling)에 의하면 다양한 불교문헌들이 붓다가 33천
(Trayastriṃśas)에서 설한 것으로 여러 종류의 경전들을 언급하고 있다. 
티벳 계통의 문헌들에서는 주로 33천에서 다라니(dhāraṇī)를 설한 것28) 
으로 나타나고, 대승(Mahāyāna) 계통의 문헌들에서는 주로 대승경전
(Mahāyānasūtra)을 설한 것29) 으로 나타난다.30) 흥미로운 점은 붓다가 
33천에서 아비담마(abhidhamma)를 설했다고 마하위하라(Mahāvihāra)가 
주장하고 있지만, 빨리 삼장(tipiṭaka)에 속하는 마지마니까야
(majjhimanikāya)의 한 경전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31)
28) Skilling (2008) pp.12-14.
29) Skilling (2008) pp.10-12.
30) 아주 짧은 티벳계통의 아와다나(avadāna)와 태국북부 란나(Lanna)와 라오 지역의 
    Paññāpāramī문헌에서 33천에서 붓다의 설법이 언급되기도 한다(Skilling 2006
     pp.9-10, p.17). 
31) Skilling (2008) pp.8-9.

Lomasakaṅgiyabhaddekarattasutta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 있는 
니그로다라마(Nigrodhārāma)에서 찬다나(Candana)라는 천신이 로마사깐기야
(Lomasakaṅgiya)라는 비구를  찾아와서 밧데까랏따(Bhaddekaratta)란 
게송을 설명하고(uddesa) 분석하는(vibhaṅga) 것에 관해 문답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32) 천신들이 어떻게 이 게송에 관해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33)
32) MN III pp.199-202.
33) ekam idaṃ bhikkhu samayaṃ bhagavā devesu tāvatiṃsesu ciharati 
    pāricchattakamūle paṇḍukambalasilāyaṃ. tatra bhagavā devānaṃ tāvatiṃsānaṃ 
    bhaddekarattassa uddesañ ca vibhaṅgañca abhāsi.

"비구여, 한때 존귀하신 분께서는 빠릿탓따가 산호나무 아래 빤두깜발라 
석좌에서 33천의 신들과 함께 머무르셨다. 그곳에서 존귀하신 분께서는 
33천의 천신들에게 밧데까랏따 [게송]을 설명하고 분석하여 말씀하셨다."  

비록 단정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붓다가 
33천에서 아비담마를 설했다고 주장하는 배후에 이 경전의 언급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붓다가 33천에서 한 것으로 나타나는 
게송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일이야말로 아비담마의 논사들이 일생동안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상까사(Sāṃkāśya) 기적에 대한 스리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가장 
대표적인 설명은 담마빠다 주석서(Dhammapada-aṭṭhakathā)에 나타난다.34)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7번째 우기35) 가 다가올 무렵 붓다는 신통력(iddhi)을 
써서 상품을 타려했던 삔돌라(Piṇḍola) 사건을 계기로 모든 승려들에게 일체의 
신통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에 붓다를 시기했던 육사외도는 빔비사라
(Bimbisāra)왕에게 신통력 대결을 주선하게 하고 붓다는 제자들에게만 신통력이 
금지되었을 뿐이라며 도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전의 모든 과거 붓다들이 
신통력을 행했었던 스라와스띠(Śrāvastī)의 망고나무 아래에서 신통력을 
행하겠다고 선언한다. 신통력 대결에서 지게 될 것을 우려한 외도들은 
스라와스띠 주변의 모든 망고나무를 배어 없애 버린다. 스라와스띠에 도착한 
붓다는 왕실의 정원사 간다(Gaṇḍa)로부터 망고공양을 받는다. 간다가 남겨진 
씨앗을 성문 앞에 심자마자 이 씨앗은 곧바로 엄청나게 거대한 망고나무로 
성장한다.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붓다는 자신의 몸을 두 개로 만드는 
쌍신변(雙神變, yamakapāṭihāriya)으로 알려진 스라와스띠(Śrāvastī) 
기적을 행한다.36) 
35)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주석전통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7번째 되는 우기를 
    33천(Trāyastriṃśa)에서 보낸 것으로 이야기한다(Strong 2009 p.133).
36) Strong (2009) pp.140-142; Burlingame (1921) pp.38-47.

 

스라와스띠(Śrāvastī) 기적을 통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한 
붓다는 ‘실로 과거의 붓다들이 이 기적을 행한 후 어디에서 우기를 보냈을까?’ 
라는 의문을 통해 ‘그 [과거의 붓다]들이 33천에서 우기를 보내면서 논장
(Abhidhamma piṭaka)을 어머니에게 설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37) 
스리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에 의하면 붓다는 아비담마를 33천에서 
처음 설했지만, 그 내용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제 4주차에 신들이 만든 보석
으로 장식된 파빌리언(ratanaghara)에서 아비담마(abhidhamma)를 이미 
알아차리고 숙고하고 했었다고 주장한다.38) 붓다는 마치 힌두교의 위쉬누
(Viṣṇu)신처럼39) 단 3걸음에 유간다라(Yugandhara)산과 메루(Meru)산의 
꼭대기를 차래로 밝고 신중의 신 인드라(Indra)신의 거처인 33천
(Trayastriṃśas)에 오르게 된다. 이곳에서 붓다는 우측에 브라마(Brahmā) 신 
좌측에 어머니 마하마야(Mahāmāyā)와 인드라(Indra) 신을 증인으로 수없이 
많은 신들에게 둘러싸여서 7권의 논장(Abhidhamma piṭaka)을 우기 3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설한다.40)     
37) Dhpa p.216: kattha nu kho atīte buddhā imaṃ pāṭihīraṃ katvā vassaṃ upentī 
     ti...Tāvatiṃsa bhavane vassam upagantvā mātu Abhidhammapiṭakaṃ desentī ti. 
38) As pp.14-16; Skilling (2008) p.15. 
39) Strong (2009) p.147.
40) Strong (2009) pp.147-148; Burlingame (1921) pp.47-51.

 

한편 사리뿟따(Sāriputta)는 매일 점심시간에 천상으로 붓다를 방문했고, 
붓다는 사리뿟따에게 자신이 신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설명했다. 사리뿟따는 
스라와스띠로 내려와서 자신이 들은 내용을 승려들에게 가르쳤고 이렇게 
해서 아비담마(abhidhamma)가 33천만이 아니라 인간세계에도 설해지게 
된다.41) 우기가 끝날 즈음 목갈라나(Moggallāna)가 천상으로 붓다를 방문
하여 언제 어떻게 인간세계로 내려올지 물어보자 붓다는 사리뿟다가 
머무르고 있는 상까샤(Sāṃkāśya)로 내려가겠다고 한다. 사실상 상까샤는 
겐지즈강 상류에 있는 의외의 지역으로서 대부분의 불교 순례지와도 멀리 
떨어져 있고 쌀보다는 밀농사를 짓는 곳이며 불교가 아니라 힌두 브라만의 
중심지이다.42) 이때 천상의 33천과 상까샤는 3개의 사다리로 연결되는데 
보석으로 만들어진 중앙 사다리로 붓다가 내려오고 우측에서는 인드라
(Indra) 신이 황금 사다리로 좌측에서는 브라마(Brahmā) 신이 은 사다리로 
직접 일산을 받쳐 들고 내려 내려온다. 
41) Strong (2009) p.149; Burlingame (1921) pp.51-52.
42) Strong (2009) p.151.

붓다는 하강하면서 메루(Meru) 산의 꼭대기에 서서 위로는 9개의 범천
(Brahmaloka)과 아래로는 아위찌(Avīci) 지옥까지 명확하게 볼 수 있었고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상까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천상 세계와 천신들을 볼 수 
있었고 천신들도 또한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즉 붓다는 상까샤 하강을 
통해서 자신이 인간세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천상세계의 신들의 스승
이기도 하다는 天人師(Satthā devamanussānaṃ)임을 만천하에 알리게 
된다.43) 인간세계에 내려오자 사리뿟따(Sāriputta)가 가장 먼저 붓다를 
맞이하게 되고44) 계속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불교 
승단에 합류한다.
43) Strong (2009) p.152; Burlingame (1921) p.53.
44) 누가 가장먼저 붓다를 맞이했는가에 있어서는 법현과 현장은 웃빨라와르나
    (Utpalavarṇā) 비구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에 의하면 웃빨라와르나 비구니는 
    인간세계에서 붓다를 최초로 알현하기 위해 전륜성왕(cakravartin) 변장하여 제일 
    앞에서 붓다를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한다(Strong 2009 p.152).  

이상의 담마빠다 주석서(Dhammapada-aṭṭhakathā)에 나타난 이야기는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권에서 일종의 표준으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동남아시아의 수없이 많은 벽화들은 이 순서에 따라 붓다의 스라와스띠 기적과 
33천 아비담마 설법 그리고 상까샤 하강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안거가 끝날 무렵에 행해지는 결제(pravārāṇā) 및 까티나(kaṭhina) 
축제와 연결되어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성대하게 기념되고 있다. 19세기 이후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서 빨리 아비담마가 연구되기 전까지 남방 테라와다
(Theravāda) 불교권에서 붓다가 33천에서 아비담마를 설했다는 것은 아마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의심되지 않았을 것이다.

 

Ⅳ. 붓다고사(Buddhaghosa)의 위상

붓다고사(Buddhaghosa)가 스리랑카에 도착한 5세기는 마하위하라
(Mahāvihāra)가 강력하게 성장한 아바야기리(Abhayagiri)와 제타와나
(Jetavana) 교단과 한창 경쟁하던 시기였다.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출라왐사(Cūḷavaṃsa)는 붓다고사를 북인도 보드가야 주위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45) 최근의 연구는 청정도론
(Visuddhimagga)의 刊記에 붓다고사의 집으로 나타난 모란다케나
(Moraṇḍakheta)를 남인도 안드라(Andhra)주의 꼬따넴빨리뿌라(Kotanempalipura) 
또는 간달라빨리(Gandalapali)로 보고 있다.46) 출라왐사(Cūḷavaṃsa)에 
의하면 붓다고샤는 레와따(Revata)를 스승으로 출가했고, 삼장(tipiṭka)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승의 추천으로 
스리랑카로 향하게 된다.47) 붓다고샤는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
에 도달하기 전에 타밀(Tamil)어를 사용하는 남인도 촐라(Coḷa) 왕국의 
깐찌뿌람(Kañcipuram)과 같은 불교 중심지에 머무르면서 적어도 2권의 
저술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48) 마하위하라(Mahāvihāra)에서 붓다고사는 
장로 상가빨라(Saṅghapāla)의 요청으로 청정도론(Visuddhimagga)을 
먼저 작성한다. 49)
45) Panabokke (1993) p.108.
46) Panabokke (1993) p.112; Berkwitz (2010) p.113.
47) Panabokke (1993) pp.108-109; Berkwitz (2010) p.113.
48) Berkwitz (2010) p.113.
49) Panabokke (1993) p.109.

전설에 의하면 붓다고사가 마하위하라 사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곧바로 
사원의 서고에 있는 고문헌들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빨리 경전 상윳따니까야
(Saṃyuttanikāya)의 2게송을 정확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받았다고 한다.50) 
사실상 붓다고사는 그의 대부분의 저술에서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붓다고사는 옛 스승들
(porāṇas)이란 용어를 통해 고대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어(Sinhalese)로 
주석서를 썼던 논사들의 견해를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51) 붓다고사는 
기원전후 알루위하라(Aḷuvihāra)에서 있었던 경전의 문자화 이후 문헌들을 
축적하기 시작한 마하위하라이 문헌전통을 신뢰하고 있었으며, 기원후 
5세기경에 적어도 28개 이상의 싱할라 주석서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52)
50) Berkwitz (2010) p.114.
51) Berkwitz (2010) p.115.
52) Panabokke (1993) p.107. 

붓다고사는 자신이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에서 싱할라 주석서를 배웠음을 숨지기 않았다. 율장(Vinaya)의 주서서인 
사만따빠사디까(Samantapāsādikā) 刊記에서 붓다시리(Buddhasiri) 장로의 
요청으로 주석서를 만들었고 마하위하라 동쪽에 있는 건물에서 붓다밋따
(Buddhamitta) 장로로부터 싱할라 주석서를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53) 붓다고사는 
마하위하라의 여러 장로들의 요청으로 니까야(nikāya)의 주석서를 만들었을 
때 각각의 간기에서 싱할라어로 써여진 문헌을 빨리어로 번역했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54) 즉 붓다고사는 아주 보수적인 환경에서 철저하게 마하위하라 
전통을 따랐고 결코 마하위하라 전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55)    
53) Panabokke (1993) p.109.
54) Panabokke (1993) p.109.
55) Panabokke (1993) p.110; Berkwitz (2010) p.115.
 
붓다고사는 빨리 삼장의 주석 작업을 시작하기 전 청정도론(Visuddhimagga)
에서 신통력을 설명할 때 붓다가 33천에서 어머니에게 아비담마를 설했다는 
것을 이미 받아들이며 아비담마가 붓다와짜나(Buddhavacana)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56) 후에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권에서 표준이된 담마빠다 
주석서(Dhammapada-aṭṭhakathā)의 이야기는 좀 더 세밀하고 좀 더 발전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비담마(abhidhamma)의 주석은 
마하위하라에서 붓다고사가 행한 마지막 작업이다.57) 붓다고사는 까타왓투 
주석서(Kathāvatthu -aṭṭhakathā) 서문에서 이 부분을 깔끔하게 요약하여 
설명한다:58)
56) Ñyāṇamoli (1976) pp.428-429.
57) Berkwitz (2010) p.117.
58) Kva pp.1-2: yamakapāṭihīrāvasānasmiñ hi bhagavā Tidasapure pāricchattakamūle 
    paṇḍukambalasilāyaṃ vassaṃ upagantvā mātaraṃ kāyasakkhiṃ katvā 
    devaparisāya abhidhammakathaṃ kathento Dhammasaṅgaṇi-Vibhaṇga -
    Dhātukathā-Puggalapaññatti ppakaraṇāni desayitvā ... athāvasesaṃ 
    abhidhammakathaṃ vitthāranayen' eva kathetvā vutthavasso suvaṇṇarajataso
    pānānaṃ majjhe maṇimayena sopānena devalokato Saṅkassanagare oruyha 
    sattahitaṃ sampādento yāvatāyukaṃ ṭhatvā anupādisesāya nibbānadhātuyā 
    parinibhāyi.

"실로 존귀하신 분께서는 쌍신변(雙神變)을 끝내시고 [천상의] 삼십천 도시에 
있는 산호나무 아래의 빤두깜발라 석좌에서 우기를 보내면서, 어머니를 증인
으로 하여 모여 있는 여러 신들에게 아비담마의 사상을 이야기하면서 담마상가니, 
위방가, 다투까타, 뿟갈라빤낫띠와 같은 논서를 설하셨다... 그리고 남아있는 
[야마까와 빳타나의] 아비담마 가르침 을 아주 자세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나서 우기를 다 보내신 후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사다리의 가운데 있는 
보석으로 만든 사다리를 통해서 신들의 세계에서 산깟사 마을로 내려오시고 
나서 모든 생류 들을 행복을 이루려고 노력하시면서 살 수 있는 만큼 머무르고 
나서, 無餘涅槃界로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

하지만 붓다고사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다른 아비담마(abhidhamma) 
문헌들과 달리 까타왓투(Kathāvatthu) 저자가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의 
종조인 마힌다(Mahinda)의 스승이자 자신들이 따르는 분별설(vibhajyavāda)을 
가르친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가 제3결집에서 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에서 전해진 이야기인지 붓다고사
(buddhaghosa)가 직접 만든 이야기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까타왓투(Kathāvatthu) 주석서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붓다의 
신통력에 의존 한다:59) 
59) Kva p.1: Kathāvatthudesanāya vāre sampatte anāgate mama sāvako mahāpañño 
    Moggaliputtatissatthero nāma uppannaṃ sāsanamalaṃ sodhetvā tatiyasaṅgītiṃ 
    karonto bhikkhusaṅghassa majjhe nisinno sakavāde pañca suttasatāni paravāde 
    pañcā ti suttasahassaṃ samodhānetvā imaṃ pakaraṇaṃ bhājessatī ti...

"'미래에 까타왓투의 가르침이 시작될 때, 나의 성문 제자이자 뛰어난 
현자인 목갈리뿟따띳사라는 이름의 장로가 가르침에 생겨난 불순함을 
정화한 후에, 비구승단의 중앙에 앉아서 제3결집을 행하면서 500 
항목의 자신의 교리와 500 항목의 다른 사람들의 교리로 구성된 1,000 
가지 항목을 편찬하고 나서, 이 논서를 분석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시고..." 

즉 붓다가 미래에 제3결집 때 일어난 복잡한 교리적 혼란이 올 것을 미리 
예측하고 33천에서 까타왓투(Kathāvatthu)를 설했으며, 목갈리뿟따띳사
(Moggaliputtatissa)는 붓다가 만들어놓은 순서와 틀에 따라서 설명했을 
뿐임으로 까타왓투(Kathāvatthu)도 또한 붓다와짜나(Buddhavacana)라는 
것이다. 붓다고사는 이점을 아름다운 게송으로 설명하고 있다:60)
60) Kva p.1: nisinno devalokasmiṃ devasaṅghapurakkhato, sadevakassa lokassa 
    satthā appaṭipuggalo, sabbapaññattikusalo paññattiparidīpanaṃ, vatvā 
    Puggalapaññattiṃ loke uttamapuggalo, yaṃ puggalakathādīnaṃ kathānaṃ 
    vatthubhāvato Kathāvatthuppakaraṇaṃ saṅkhepena adesayī. mātikāṭhapanen’ 
    eva ṭhapitassa surālaye, tassa Moggaliputtena vibhattassa mahītale, īdāni 
    yasmā sampatto atthasaṃvaṇṇanākkamo, tasmā naṃ vaṇṇayissāmi taṃ 
    suṇātha saṃhitā ti.

"신들의 세계에 앉으시고, 신들의 무리에 둘러싸였으며,  
신들을 포함한 [모든] 세계의 스승으로 더 이상의 적수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간으로서 모든 개념에 정통하신 분께서는 
여러 개념들에 대한 해설서로서 뿟갈라빤낫띠를 설하고 나서, 인간에
대한 설명 등을 이야기할 때 부족한 요점들에 관해서 마치 까타왓투라는 
논서처럼 가르쳤다. 
천상에서 형성된 바로 이 [까타왓투] 목록의 확립을 기원으로 목갈리뿟따는 
이 땅에서 그 [목록]의 분석을 [이루었다.]
지금 나는 이 [목록의] 의미가 설명된 순서가 전해진 것에 따라서, 이를 
설명하겠다. 너희들은 그것을 주의 깊게 들어라!"

Ⅴ. 결어

빨리 아비담마 문헌들이 기원후 5세기까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가 

부처님의 말씀 즉 붓다와짜나(Buddhavacana)로 간주되면서 최종적으로 

근본결집(mūlasaṅgīti)에서 합송된 것으로 경전적 위상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아주 흥미롭다. 사실상 이러한 과정은 시간을 거스르는 것으로서 

어제의 위경이 오늘은 경전으로 둔갑한 것이라고 피터 스킬링(Peter Skilling)은 

지적하고 있다.61) 붓다고사 시기에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마하비하라

(Mahāvihāra)는 자신들의 본존해온 빨리 삼장(tipiṭka) 전체를 붓다와짜나

(Buddhavacana)에 포함시키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마하위하라는 까타왓투(Kathāvatthu)를 삼장에 포함시키기 

위해 사실상 불설 또는 붓다와짜나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 붓다가 

확립한 목록과 틀에 따라서 후대에 뛰어난 논사 목록을 훌륭하게 분석

하고 해석해 내면 이것도 또한 붓다와짜나로 간주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남방불교에서 까타왓투(Kathāvatthu)를 이러한 방식으로 

붓다와짜나로 보는 것은 동아시아불교에서 대승불교 경전이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설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불설로 인정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61) Skilling (2008)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