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41호(2014. 12) pp. 169~196
테라와다 불교의 재가 아라한 연구
-『까타왓투』와『밀린다빤하』에 기록된 논쟁들을 중심으로
(이 논문은 2014년 9월 20일 서울대학교 두산인문관에서 열린 <불교학연구회> 가을논문발표회
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당시 비평적인 논평을 해주신 이필원 선생님에게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한상/동국대학교 강사
I. 들어가는 말
II. 붓다의 입장
III.『까타왓투』의 견해
IV.『밀린다빤하』의 견해
V. 나가는 말
부록: 빨리 텍스트들에 나타나는 붓다 당시의 재가 아라한
[요약문]
본 논문은『까타왓투(Kathāvatthu)』와『밀린다빤하(Milindapañha)』에 기
록된 논쟁들을 중심으로 테라와다(Theravāda)의 보수적이고 출가 중심적인 재
가 아라한 이론(gihissa arahāti kathā)이 성문화된 과정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다. 불교 공동체를 이루는 사중(四衆, cattāro purisā)은 다 같이 열반(涅槃,
nibbāna)의 증득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현생에서
열반을 성취한 사람을 아라한(阿羅漢, arahant)이라 부른다. 빨리 성전(聖典)의
가장 이른 텍스트들에만 국한시킨다면, 붓다는 재가 아라한의 존재 가능성을 명
시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다. 하지만 부파 불교 시대에 재가 아라한의 문제는 격
렬한 논쟁거리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까타왓투』에서 테라와다는 재가 아라한
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나,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ṃghika)의 일파로
생각되는 웃따라빠타까(Uttarāpathaka)는 인정하고 있다.『밀린다빤하』에서
나가세나(Nāgasena)는『까타왓투』의 입장보다 조금 발전된 입장을 보이고 있
다. 나가세나는 재가 아라한의 존재 가능성을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재가 아
라한은 그날 바로 출가하거나 그날 바로 반열반에 든다.”는 유보조항을 달고 있
다. 사실상 이는 재가 아라한에 대한 테라와다의 정통 입장을 성문화한 것이다.
『까타왓투』와『밀린다빤하』에 기록된 논쟁들은 당시 점증하는 재가자의 요구와
출가자의 헤게모니 간에 있었을 알력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는 부파 불교 시대
에 아라한의 위엄과 특권을 침해하는 다섯 가지 사항들(五事, pañca-vastu)과
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까타왓투』와『밀린다빤하』
에 각각 등장하는 웃따라빠타까와 밀린다 왕은 정신적 성취에서 출가자와 동등
한 권리를 요구하던 당시의 재가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혁
신 운동은 출가자의 헤게모니와 아라한의 신성함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었기 때
문에 테라와다는 초기 불교보다도 더 보수적이고 출가 중심적인 재가 아라한 이
론을 공식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웃따라빠타까의 재가 아라한 이론은 아라한
의 이상을 폄하하는 시발점이 되고 후대 대승 불교에서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
게 개방된 보살의 이상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I. 들어가는 말
모든 종교에서는 성직자가 우선이다. 이 점은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열반
(涅槃, nibbāna)1) 이라는 궁극적 이상만큼은 비구(bhikkhu), 비구니(bhikkhunī),
우바새(upāsaka), 우바이(upāsikā)로 이루어진 사중(四衆, cattāro purisā) 모두
에게 활짝 열려있다. 왜냐하면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maggo)는 사
중에게 모두 적용되는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라는 삶의 방식이며,
이 중도의 궁극적 목표가 바로 열반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에 도달
하는 것은 처음부터 차별 없이 모든 불교인에게 이상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붓다 당시에는 가정생활을 영위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을 잘 실천
하여 사향사과(四向四果, cattāro paṭipannā cattāro phalā) 중 수다원과(須
陀洹果, sotāpatti-phala)와 사다함과(斯多含果, sakadāgāmi-phala)를 이
룬 재가자들이 아주 많았으며, 범행(梵行, brahma-cariya)을 닦은 재가자들
가운데는 아나함과(阿那含果, anāgāmi-phala)를 이룬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사향사과의 맨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tta-phala)를
얻은 재가자들은 매우 적었을 뿐만 아니라 아라한과를 얻은 직후에 모두 출가
하거나 반열반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오는 빨리 성전(聖典)2) 이
재가자가 아닌 테라와다(Theravāda)3) 의 장로(thera)들에 의해 전승되고 편
집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붓다가 입멸하고 나서 거행된 제 1차 결집 즉 근
본 결집(mūla-saṅgīti)과 그 이후의 결집4)들에서 재가자는 초청받거나 참석
하지 못했으며,『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도 출가 교단에만 관계되는
내용으로 재가자와는 거의 무관한 컬렉션이다. 그래서 빨리 성전에는 아라한의
경지만큼은 출가자가 독점권을 확보해두고자 덧붙이거나 누락시키거나 확대
해석한 내용들이 있을 수 있음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음을 감안해야 한다. 아무
튼 재가 아라한을 인정하는 문제는 불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출가의 수승
함과 아라한의 신성함을 고수하려는 전통 교단인 테라와다의 입장과, 정신적
성취에서 출가자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던 재가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진보
적 성향의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ṃghika) 계통 부파들5)의 입장이 상충하면
서 초미(焦眉)의 관심사가 되었다. 테라와다는 그 명칭이 암시하듯이, 기본적
으로 재가자와는 무관한 장로(thera)들만의 교의(vāda)로서 엄격한 ‘출가주의’
를 바탕으로 한다. 테라와다는 재가 아라한의 존재를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재가 아라한은 그날 바로 출가하거나 그날 바로 반열반에 든다.”라는 엄격한
유보조항을 달고 있다. 우리는 먼저 빨리 성전의 가장 이른 텍스트들에 나타난
재가 아라한에 대한 붓다의 근본입장을 살펴보고,『까타왓투(Kathāvatthu)』
와『밀린다빤하(Milindapañha)』와 같은 후대의 빨리 텍스트들에 기록된 논쟁
들을 통해서 테라와다가 어떻게 보수적이고 출가 중심적인 재가 아라한 이론을
성문화했는지를 살펴본다.
1) ‘열반(涅槃)’의 원어는 빨리어(pāli-bhāsā)로 닙바나(nibbāna)이고 산스끄리뜨(Sanskrit)로는
니르와나(nirvāṇa)이다. 한역으로는 涅槃, 泥洹, 寂滅, 滅, 滅度, 寂靜이라고 한다. 열반은 초기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용어들 가운데 하나로 해탈(解脫, vumutti)과 동의어이다. 어원적으로 열반
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nis(부정의 접두사)와 √vā(불다)에서 파생된 중성 명사로 보면
‘불어서 꺼진’이란 뜻이다. 즉 탐욕(貪, rāga), 성냄(瞋, dosa), 어리석음(癡, moha)의 세 가지 불
(三火, tayo aggī)이 완전히 꺼진 것이 열반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을 열반이라고 한다(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idaṃ vuccati nibbānanti).”(SN.IV, p.251) 그리고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Bhavanirodho
nibbānanti).”(SN.II, p.117) 둘째, nis(부정의 접두사)와 vāna(숲, 밀림 = 번뇌의 숲)로 보는
견해이다. 즉 번뇌(煩惱, kilesa)의 얽힘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나무는 말고 숲을 베어라. (욕망의)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니
(욕망의) 숲과 (갈애의) 덤불을 자르면 열반에 이르리라(Vanaṃ chindatha, mā rukkhaṃ, vanato
jāyati bhayaṃ. chetvā vanañ ca vanathañ ca. nibbanā hotha bhikkhave).”(Dhp. 283
게) 테라와다의 전통은 후자의 해석을 선호한다.『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에는 열반
을 형용하는 다음의 33가지 용어들이 나타난다: ① 무위(無爲, asaṅkhata), ② 종극(終極, anta),
③ 루 없음(無漏, anāsava), ④ 진실(眞實, saca), ⑤ 피안(彼岸, pāra), ⑥ 미묘함(nipuṇa),
⑦ 아주 보기 어려움(極難見, sududdasa), ⑧ 늙지 않음(不老, ajajjara), ⑨ 견고함(dhuva),
⑩ 관조(觀照, apalokita), ⑪ 볼 수 없음(不可見, anidassana), ⑫ 망상 없음(無戱論, nippapañ ca),
⑬ 적정(寂靜, santa), ⑭ 불사(不死, amata), ⑮ 지극히 묘함(極妙, paṇīta), ⑯ 길상(吉祥, siva),
⑰ 안온(安穩, khema), ⑱ 갈애의 소멸(愛盡, taṇhakkhaya), ⑲ 희유(稀有, acchariya), ⑳ 미증유
(未曾有,abbhuta), ㉑ 재난 없음(無災, anītika), ㉒ 재난 없음의 법(無災法, anītika-dhamma),
㉓ 열반(涅槃,nibbāna), ㉔ 해악 없음(無惱害, avyāpajjha), ㉕ 탐욕의 빛바램(離貪, virāga),
㉖ 청정(淸淨, suddhi), ㉗ 해탈(解脫, mutti), ㉘ 집착 없음(無着, anālaya), ㉙ 섬(島, dīpa),
㉚ 피난소(避難所, leṇa), ㉛ 구난소(救難所, tāṇa), ㉜ 귀의(歸依, saraṇa), ㉝ 도피안(到彼岸,
parāyaṇa).(SN.IV, pp.362-73) 열반은 출세간(出世間, lokuttara)이며 형성된 것(有爲, saṅkhata)을
완전히 벗어난 형성되지 않은 것(無爲,asaṅkhata)이며 고요함(寂靜, upasama)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 비록 열반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지만 남음(upādi)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측면에서 유여열반(有餘涅槃,saupādisesa-nibbāna)과 무여열반(無餘涅槃, anupādisesa-nibbāna)
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받은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경우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과거 집착의 산물인 오온(五蘊, pañcakkhandhā)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후자는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수명이 다하고
입멸을 하게 되면 이러한 오온마저도 완전히 없어지기 때문에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이란 뜻의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부른다.
2)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성전(聖典) 즉 캐논(canon)은 기본적으로『숫따 삐따까(Sutta-piṭaka)』,『위
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아비담마 삐따까(Abhidhamma-piṭaka)』의 삼장(三藏, ti-piṭaka)
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K.R. Norman(1997, pp.131-148) 참조.
3) 테라와다(Theravāda)는 어원적으로 장로(thera)의 가르침(vāda)이란 뜻으로서 A.D. 5세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Mahāvihāra)에 주석하면서 성문화한 부파이다.
붓다고사는『디가 니까야(Dīgha-Nikāya)』,『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상윳따 니까야
(Saṃyutta-Nikāya)』,『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 대한 주석서들의 도입부에서
자신이『시할라앗타까타(Sīhalāṭṭhakathā)』에 의거하여 번역하고 새롭게 작업한 주석서들이
마하위하라의 생각을 대표하는 것이며, 장로들의 계통과 유산을 밝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전통적인 교학 체계를 거스르지 않나니 장로들의 계보를 밝혀주고 아주 현명하고 뛰어난 판별력을
가진 마하위하라에 머무는 장로들을 통해 거듭해서 전승되어온 의미를 모아서 이제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니 이는 여러 착한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법이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Samayaṃ avilomento therānaṃ theravaṃsappadīpānaṃ sunipuṇavinicchayānaṃ
Mahāvihārādhivāsīnaṃ Hitvā punappunāgataṃ atthaṃ atthaṃ pakāsayissāmi sujanassa
ca tuṭṭhatthaṃ ciraṭṭhitatthañ ca dhammassa).”(Sv.I, p.1; Ps.I, p.1; Spk.I, pp.1-2; Mp.I, p.2).
4) ‘결집(結集)’으로 옮긴 빨리어 상기띠(saṅgīti)는 saṁ(함께)과 √gai(노래하다)에서 파생된 여성
명사이다. 글자 그대로 함께 모여서 암송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어원적인 의미로부터 경의 내용을
함께 암송하여 공인하고 교리상의 논란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집된 불교도 대회(saṅgāyana)를
뜻하게 되었다.
5) 각 부파(Nikāya)들은 관례에 따라 산스끄리뜨로 표기한다. 하지만『까타왓투 주석서(Kathāvatthu-
aṭṭhakathā)에 나오는 부파들은 빨리어로 표기한다.
II. 붓다의 입장
재가자(在家者)는 글자 그대로 출가하지 않고 집에 머물러 사는 사람을 가리
키며, 빨리어(pāli-bhāsā)6)로 기힌(gihin), 가하빠띠(gaha-pati), 아가리까
(agārika)라고 한다.7) 그러나 삼보(三寶, ti-ratana)에 귀의한 재가자를 특별
히 가리킬 때에는 우빠사까(upāsaka)와 우빠시까(upāsikā)라고 한다.8) 붓다는
출가자(pabbajita)만을 상대로 설법하였던 것은 아니며 재가자를 상대로도 설법
하였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차제설법(次第說法, anupubbi-kathā)9)을 설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붓다가 재가자에게 차제설법을 설한 것은 재가자로
하여금 단지 다음 생에 좋은 곳(善趣, sugati)에 태어나 호강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들을 열반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번뇌(煩惱, kilesa)와 루(漏, āsava)를 완전히 제거하여 열반을 성취
하는 한 가지 맛(一味, eka-rasa) 즉 해탈의 맛(vimutti-rasa)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10) 차제설법의 궁극적 목표도 열반의 실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단
지 출가자는 지름길을 통하여 열반으로 신속하게 나아가며 재가자는 돌아가는
길을 통하여 열반으로 서서히 나아간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점은
편력 수행자 왓차곳따(Vacchagotta)가 붓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바로부터 확
인된다.
6)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빨리어(pāli-bhāsā)는 붓다가 사용한 삼장(三藏, ti-piṭaka)의 언어로서 마
가디(Māgadhī), 마가다니룻디(Māgadha-nirutti), 마가다바사(Māgadha-bhāsā), 물라바사
(mūla-bhāsā)라고 한다. 빨리는 원래 산스끄리뜨(Sanskrit)와 같은 언어학적 명칭이 아니었지만
후대 주석서들과 연대기들에서 종종 주석서(aṭṭhakathā)에 대비되어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학자
들이 이를 ‘성전(聖典)’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빨리는 성전어로서 ‘딴띠바사(tantibhāsā)’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빨리는 단순한 ‘텍스트’나 ‘구절’이란 뜻인 ‘빠타(pāṭha)’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빨리와 성전을 완전히 동일하게 보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Wilhelm
Geiger(1956, p.1)와 水野弘元(1985, p.1) 참조.
7) 이외에도 빨리 성전에는 우빳타까(upaṭṭhāka), 가하빠띠(gaha-pati), 빠리사(parisā), 다나빠띠
(dāna-pati) 등과 같은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재가자를 가리키는 다양한 용어들에 대
해서는, 히라카와 아끼라(2003, pp.421-425) 참조.
8) 앞으로는 논술의 편의를 위해서 비불교인도 포함하는 재가자와, 불교신자만을 가리키는 재가신자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재가자로 통일하여 기술한다.
9) 빨리 성전에 나타나는 차제설법(次第說法, ānupubbi-kathā)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그러자 세
존은 우빨리 거사에게 차제설법을 가르쳤다. 보시의 가르침, 계의 가르침, 천상의 가르침, 감각적 욕망
들의 재난과 타락과 번뇌, 출리의 공덕을 밝히었다(Atha kho Bhagavā Upālissa gahapatissa
ānupubbikathaṃ kathesi, seyyathīdaṃ dānakathaṃ sīlakathaṃ saggakathaṃ
kāmānaṃ ādīnavaṃ okāraṃ saṅkilesaṃ, nekkhamme ānisaṃsaṃ pakāsesi).” (MN.I,
p.379) 붓다고사(Buddhaghosa)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차제설법이라는 것은 보시에 대해
설한 직후에 계에 대해, 계에 대해 설한 직후에 천상에 대해서, 천상에 대해 설한 직후에 도에 대해 이
렇게 순차적으로 의미를 해설하는 것을 말한다(Ānupubbikathan ti anupaṭipāṭi-kathaṃ. Anupubbikathā
nāma dānānantaraṃ sīlaṃ sīlānantaro saggo saggānantaro maggo ti
etesaṃ atthānaṃ dīpana-kathā)." (Sv.I, p.277 등)
10) Ud.56게, “마치 큰 바다가 한 가지 맛 즉 짠맛만을 가지고 있듯이, 나의 가르침도 오직 한 가지 맛
즉 해탈의 맛만을 가지고 있다(Seyyathā pi bhikkhave mahāsamuddo ekaraso loṇaraso, evam eva
kho bhikkhave ayaṃ dhammo ekaraso vimuttiraso).”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갠지스 강이 바다를 향하고 바다로 기울고 바다를
기대고 바다에 도달하여 머물 듯이, 이 고따마 존자의 대중도 재가와 출
가를 다 포함하여 열반을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을 기대고 열반에
도달하여 머뭅니다.11)
11) MN.I, p,493, “Seyyathā pi bho Gotama Gaṅgā nadī samuddaninnā samuddapoṇā
samuddapabbhārā samuddaṁ āhacca tiṭṭhati. evam-evāyaṁ bhoto Gotamassa
parisā sagahaṭṭhapabbajitā nibbānaninnā nibbānapoṇā nibbānapabbhārā nibbānaṁ
āhacca tiṭṭhati.” ; 雜阿含經卷34 (大正藏2, 247a15-18), “婆蹉白佛。如天大雨。水流隨
下。瞿曇法.律亦復如是。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若男。若女。悉皆隨流。向於涅槃。
浚輸涅槃。”
상기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붓다 당시부터 열반은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
에게도 활짝 열려있던 이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왓차곳따는 붓다에게 가
정생활을 영위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재가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왓차여, 나의 제자로서 흰옷을 입고 범행을 닦으면서 다섯 가지 낮은 단
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반열반에 들어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은 우바새들은 백 명뿐만이 아니
라, 이백 명, 삼백 명, 사백 명, 아니 오백 명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도 훨
씬 더 많다.12)
12) MN.I, pp.490-491, “Na kho Vaccha ekaṁ yeva sataṁ... na pañ ca satāni, atha kho bhiyyo
va ye upāsakā mama sāvakā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 pañ 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opapātikā tatthaparinibbāyino anāvattidhammā tasmā lokā ti.” ;
『雜阿含經』卷34 (『大正藏』2, 246c22-25), “佛告婆蹉。不但一二三優婆夷。乃至五百。
乃有眾多優婆夷於此法.律斷五下分結。於彼化生。得阿那含。不復還生此。”
『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에서 붓다는 마하나마(Mahānāma)에
게 이렇게 말하였다.
마하나마여,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한 우바새와 마음이 해탈한 지 백년이 되
는 비구 사이에는, 즉 이 해탈과 저 해탈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13)
13) SN.V, p.410, “evaṃ vuttassa kho Mahānāma upāsakassa āsavā vimutta-cittena
bhikkhunā na kiñ ci nānākaraṇaṃ vadāmi yad idam vimuttiyā vimuttinti.”
이러한 기술들을 볼 때, 붓다는 원론적으로 재가 아라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재가자도 출가자와 동등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이다. 그러면 테라와다의 논서인『까타왓투』에서도 인용될 만큼 대표적이고 희
유한 재가 아라한인 야사(Yasa)의 이야기를『위나야 삐따까』에 근거하여 살펴
보자. 야사는 삼시전(三時殿, tayo-pāsādā)에 살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
고 있었지만 어느 날 잠에 빠진 무희들의 추한 모습을 보고는 세상의 무상(無常,
anicca)을 느꼈다. 그 때 야사는 이시빠따나(lsipatana)의 사슴 동산(migadāya)
에서 붓다를 만나서 네 가지 진리(四諦, cattāri-saccāni)를 듣고 법안(法眼,
dhamma-cakkhu)을 얻는다. 야사가 보이지 않자 그의 아버지는 야사를 찾으
러 사슴 동산으로 오지만 붓다의 신통력에 의해 야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야
사의 아버지도 붓다의 네 가지 진리를 듣고 법안을 얻는다. 그 때 옆에서 붓다
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설한 법문을 듣던 야사는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러자 붓
다는 야사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사여, 양가의 아들 야사는 유학의 지견으로 이미 법을 보았으니, 마치
그대의 경지와 같다. 그는 보이는 대로 아는 대로 자신의 경지를 반조해
보자 집착으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고 루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거사여, 양가의 아들 야사가 환속하여 예전의 재가자처럼 비루한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14)
14) Vin.I, p.17, “Yasassa kho gahapati kulaputtassa sekhena ñāṇena sekhena dassanena
dhammo diṭṭho seyyathāpi tayā. tassa yathādiṭṭhaṃ yathāviditaṃ bhūmiṃ
paccavekkhantassa anupādāya āsavehi cittaṃ vimuttaṃ. abhabbo kho gahapati
Yaso kulaputto hīnāyāvattitvā kāme paribhuñjituṃ seyyathāpi pubbe agārikabhūto.”
상기 기술은『사분율(四分律)』과『오분율(五分律)』과 같은 한역『율장(律藏)』의
내용과도 거의 일치한다.15) 그래서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이 공유하는 초기 불
전16)에 국한해 볼 때 재가자로 아라한과를 얻은 유일한 인물이 바로 야사이다. 여기
서 “양가의 아들 야사가 환속하여 예전의 재가자처럼 비루한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abhabbo kho gahapati Yaso kulaputto hīnāyāvattitvā
kāme paribhuñjituṃ seyyathāpi pubbe agārikabhūto).”라는 기술과 내용적
으로 유사한 기술이『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도 나온다. 붓다는
루가 소멸된 아라한 비구(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가 범할 수 없는 아홉 가
지 일(abhabbo so nava ṭhānāni)을 들고 있다.17) 그 중 다섯 번째가 “루가 소
멸된 비구는 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축적해 두고 감각적 욕망을 누릴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nnidhikārakaṃ kāme paribhuñjituṃ
seyyathā pi pubbe agāriyabhūto)”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재가자의 표상
(gihī-liṅga)은 감각적 욕망의 향유이고 아라한의 성질(arahatta)은 감각적
욕망의 단절이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 물과 기름처럼 양립하지 못한다고 본 것
같다. 상응하는 한역『아함(阿含)』에는 다섯 가지나 아홉 가지가 보이지 않지
만, 빨리『위나야 삐따까』와 한역『율장』에서 붓다가 야사의 아버지에게 한 이
야기는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붓다가 재가 아라한이 더 이상 예전대로 가
정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단정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15)『四分律』卷32 (『大正藏』22, 790a9-13), “彼作如是觀已。有漏心得解脫。云何長者。汝已捨欲
還復能習欲不耶。對曰不也。如是耶輸伽族姓子。已學智學道。諸塵垢盡得法眼淨。彼作如是觀
已有漏心得解脫。終不復習欲如本在俗時也。” ;『五分律』15 (『大正藏』22, 105c2-3), “佛語
其父言。若人解脫於漏。寧能還受欲不。答言。不能。”
16) 본 논문에서 말하는 ‘초기 불전’은 초기 불교의 문헌에 대한 약칭이다. 일반적으로 테라와다
(Theravāda) 소속의 빨리 니까야(Pāli Nikāya)와『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 그리고
여러 부파 소속의 한역 아함(阿含)과『율장(律藏)』이 이에 해당된다.
17)『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의 다른 곳(AN.IV, pp.369-370)에서는 다섯 가지 일
로 나타나며, 또 다른 곳(AN.IV, p.371)에서는 아홉 가지로 나타난다. 이외에 다섯 가지로 나타
나는 텍스트들은『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산다까 숫따(Sandaka-sutta)」,『디
가 니까야(Dīgha-Nikāya)』의 「상기띠 숫따(Saṅgīti-sutta)」이다. (MN.I, p.523; DN.III,
p.235) 아홉 가지로 나타나는 텍스트는『디가 니까야』의 「빠사디까 숫따(Pāsādika-sutta)」이
다. (DN.III, p.133) 하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루가 소멸된 비구는 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축적
해 두고 감각적 욕망을 누릴 수 없다(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nnidhikārakaṃ kāme
paribhuñjituṃ seyyathā pi pubbe agāriyabhūto).”라는 다섯 번째 항목은 포함된다. 그러나
한역『아함(阿含)』에서는 다섯 가지나 아홉 가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붓다는『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제 71번째 경인 「떼윗자
왓차곳따 숫따(Tevijjavacchagotta-sutta)」에서 “재가와 재가자의 족쇄를
버리지 않고도 몸이 무너진 뒤에 괴로움을 끝낸 재가자는 아무도 없다(Na-tthi
kho Vaccha koci gihī gihisaṁyojanaṁ appahāya kāyassa bhedā dukkhass’
antaṁkaro ti).”18)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괴로움을 끝낸다.’는 말은 윤회(輪
廻, saṃsāra)의 완벽한 종식으로서 열반의 실현을 가리킨다. 다만 여기서 붓
다는 오직 ‘재가와 재가자의 족쇄(gihī gihisaṁyojana)’만을 문제 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붓다고사(Buddhaghosa)는 이를 “재가 아라한은 그날 바로 출
가하거나 그날 바로 반열반에 든다.”라고 하는 테라와다의 유보조항에 대한 성
전의 근거로 삼고 있다.
18) MN.I, p.483.
그런데 산따띠 대신, 장자의 아들 욱가세나, 위따소까 소년은 재가자의
표상으로 머물면서 아라한의 성질을 증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의 과
정에서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말려버린 뒤에 증득하였다. 그러
나 아라한과를 증득한 뒤에는 그 재가자의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가
자의 형태란 저열한 것이기 때문에 최상의 공덕을 지닐 수가 없다. 그래
서 비록 거기에 서서 아라한의 성질을 증득하더라도 그날 바로 출가하거
나 그날 바로 반열반에 든다.19)
19) Ps.III, p.196, “So pi hi santatimahā-matto uggaseno seṭṭhiputto vītasokadārako ti
gihiliṅge ṭhitā va arahattaṃ pattā te pi maggena sabbasaṅkhāresu nikantiṃ
sukkhāpetvā va pattā, patvā pana na tena liṅgena aṭṭhaṃsu. Gihaliṅgaṃ nām’
etaṃ hīnaṃ uttamaguṇaṃ dhāretuṃ na sakkoti, tasmā n’atthi ṭhito arahattaṃ
patvā taṃ divasam eva pabbajati vā parinibbāti va.”
그런데 「떼윗자왓차곳따 숫따」에는 상응하는 한역 경이 없다. 이는 두 가지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는 테라와다가 자파의 재가 아라한 이론에 성전의
권위를 부여하려고 의도적으로 이 경을 개작했을 가능성이다.20) 또 하나는『중
아함경(中阿含經)』을 전지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21)가 그
경을 일부러 누락했을 가능성이다. 만약 두 번째 추정이 성립하려면, 설일체유
부는 재가 아라한에 대해서 긍정하는 입장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가 아라한
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공식 입장은 분명하지 않다.22) 그래서 어느 쪽의 개작인
지는 지금으로는 속단하기 어렵다.
20) 藤田宏達, 「在家阿羅漢論」,「結城教授頌壽紀念佛教思想史論集」, 東京: 大藏出版, 1964, p.69.
21) A.K.Warder(2000, pp.6-7)는『장아함경(長阿含經)』이 법장부(法藏部, Dharmaguptaka) 소
속이고,『중아함경(中阿含經)』과『잡아함경(雜阿含經)』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
소속이고,『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은 음광부(陰光部, Kāśyapīya) 소속이고,『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은 법장부 소속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히라카와 아키라(1991, pp.92-93)는『장아
함경』이 법장부 소속이고,『중아함』과『잡아함경』은 설일체유부 소속이며,『증일아함경』은 어느
부파에 속하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본다. 다만『증일아함경』의 대승 불교적 색채는 널리 인정되고
있다.
22) 설일체유부는「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46 (『大正藏』27, 241a27-29)과
그 이역본(異譯本)인「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卷25 (『大正藏』28, 186b26-29)에서
익명의 예를 들어 재가 아라한 이론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본 논문의 목적은 설일체유부
의 재가 아라한 이론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III.『까타왓투』의 견해
부파 불교 시대에 재가 아라한을 인정하는 문제가 치열한 논쟁과 관심의 대
상이 되었음은『까타왓투』23)를 통해 확인된다.『디빠왐사(Dīpavaṃsa)』와『마
하왐사(Mahāvaṃsa)』와 같은 스리랑카 고대 연대기들에 따르면,『까타왓투』
는 목갈리뿟따띳사(Moggalliputtatissa)가 편찬하고 제 3차 결집에서 합송한
것이다.24) 테라와다의 전통에 따르면,『까타왓투』는 붓다가 입멸하고 난 뒤인
218년에 성립되었다고 하지만,25) 부파 분열 이후의 여러 부파의 교리를 비판하
고 있기 때문에 그 성립은 부파 성립 이후인 B.C. 2세기 후반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26)
23)『까타왓투(Kathāvatthu)』는『까타왓투빡까라나(Kathāvatthu-ppakaraṇa)』라고도 하며, 붓
다의 말씀(buddha-vacana)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는 이단설들을 테라와다 이론가들이 비판적
으로 조사하는 논쟁서이다.『까타왓투』는 테라와다의 일곱 논서들 가운데 유일하게 붓다가 직접 설하
지 않은 논서로 알려져 있다. 테라와다의 전승에 따르면, B.C. 247년 경 테라와다는 아쇼까(Aśoka)
왕의 후원을 받아 수도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에서 목갈리뿟타띳사(Moggalliputtatissa)를
수장으로 삼아 제 3차 결집을 개최하였다. 이 결집에서 테라와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분별설(分別
說, Vibhajjavāda)이라고 규정하고 승가를 정화하였으며 그 결과물을『까타왓투』로 편찬하였다.
그래서『까타왓투』는 테라와다의 일곱 논서들 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되었고, 그 성립연대가 전승에
의해 밝혀진 유일한 논서라고 할 수 있다. 모두 219가지 토론(kathā)이 23개의 품(vagga)에 나뉘
어 실려 있는데, 테라와다의 정통설을 내세워 논리적인 방식으로 여러 부파들의 이단설들을 논박하
고 있는 점에서 부파 불교와 불교 논리학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텍스트이다.『까타
왓투 주석서(Kathāvatthu-aṭṭhakathā)』의 서문에는 붓다가 도리천(忉利天, Tāvatiṃsa)에서『담마
상가니(Dhammasaṅgaṇī)』,『위방가(Vibhaṅga)』,『다투까타(Dhātukathā)』,『뿍갈라빤
냣띠(Puggalapaññātti)』를 해설하고 나서, 장래에 목갈리뿟타띳사가 제 3차 결집에 수장으로 참
석하여 5백가지 가르침은 자론사(自論師, saka-vādin)에, 나머지 5백가지 가르침은 타론사(他
論師, para-vādin)에 할당하여 모두 천 가지 가르침들(suttāni)로 까타왓투를 나누어 해설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내용이 나온다.(Kv-a. p.1ff) 그래서 테라와다는 까타왓투도 붓다의 말씀이
라고 보며 성전(聖典)의 권위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있다.
24) Dīp.VII, 41게; Mhv.V, 278게.
25) As. p.4, “Kathāvatthuṃ kasmā gahitaṃ? nanu sammāsambuddhassa parinibbānato
aṭṭhārasavassādhikāni dve vassasatāni atikkamitvā Moggaliputtatissattheren’
etaṃ ṭhapitaṃ? tasmā sāvakabhāsitā chaḍḍetha nan ti.”
26) 비록『까타왓투(Kathāvatthu)』의 원형은 B.C.3세기로 거슬러 올라갈지 모르나, 우리에게 지금
전해오는『까타왓투』는 분명히 그보다 후대에 편집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B.C.Law(2007,
pp.52-53)가 지적한대로,『까타왓투』에서 논의되는 논점들은 아쇼까(Aśoka) 왕 당시에는 존재
하지 않았던 부파들이 지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대에 새로운 이단설들이 생겨남에
따라『까타왓투』의 원형에 추가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테라와다와 격론을 벌이는 부파의 이름은『까타왓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붓다고사가 편찬한『까타왓투 주석서』에는 웃따라빠타까
(Uttarāpathaka)라는 부파로 나타난다. 이 부파는 베일에 싸인 초기 부파들
가운데 하나이다. 웃따라빠타까의 어원적 의미는 ‘북쪽 길의 거주자’라는 뜻이
다.27) 인순(印順)은 이 부파를 북전의『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이나『부집이
론(部執異論)』에 나오는 북산주부(北山住部, Uttaraśaila)로 추정하였다.28) 북
전에 따르면 북산주부는 대중부의 하위 부파로 나온다.29) 실제로『까타왓투』에
나오는 웃따라빠타까의 재가 아라한 이론이나 진여(真如, tathatā)30) 등과 같
은 혁신적 사상들은 대승 불교의 사상과 유사한 면이 적지 않다. 그러한 면에서
웃따라빠타까는 후대 대승 불교의 흥기31)에 사상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
던 대중부 계통의 한 부파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27) B.C.Law(1978, pp.48-49)에 따르면, 웃따라빠타까(Uttarāpathaka)는 원래 사왓티(Sāvatthī)
에서 딱까실라(Takkasilā)에 이르는 북인도의 큰 교역로의 지명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G.P. Malalasekera(1974, p.363)는 웃따라빠타까가 동쪽의 앙가(Aṅga)로부터 북서쪽의 간다
라(Gandhāra), 그리고 북쪽의 히말라야(Himālaya)에서 남쪽의 윈다야(Vindhayā)에 이르는
북인도 전체를 포함한다고 본다.
28) 印順,「初期大乘佛教之起源與開展」, 台北 : 正聞出版社,1981, pp.355-356.
29)「異部宗輪論」卷1 (『大正藏』49, 15b1-4) ;「十八部論」卷1 (『大正藏』49, 18a17-20) ;
「部執異論」卷1 (『大正藏』49, 20b2-4).
30) Kv-a. p.179. ‘진여(眞如, tathatā)’는 대승 불교의 독특한 용어로, 특히『반야경(般若經, Prajñā-
pāramitā-sūtra)』계통에서 반야(般若, prajñā)의 전일적 인식에 의해 얻어진 진리를
가리킨다. 이 말의 원어인 따타따(tathatā)는 ‘이와 같은’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형용사의 타따
(thatā)에 추상 명사를 나타내는 어미 따(tā)가 부가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
이라는 의미가 된다.
31) 대승 불교의 기원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일반화하여 서술하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
구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대승 불교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고자 시도한 것으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 서방의 헬레니즘(Hellenism)이나 조로아
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 등이 있다. 두 번째는 대승 불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시
도한 것으로 대중부로부터 기원했다는 학설, 대중부뿐만 아니라 설일체유부, 경량부, 법장부 등과
같은 다른 북방 부파들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학설, 불탑을 숭배하던 재가 신자 집단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학설, 종전까지 합송되던 경이 문자로 기록되면서 시작되었다는 학설 등이 있다. 아무튼
대승 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에서 뜨거운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다섯 가지 사항들(五事, pañca-vastu)’이
다. 다섯 가지 사항들은 공통적으로『숫따 삐따까(Sutta-piṭaka)』에서 완전
무결하여 더 이상 하락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는32) 아라한의 권위와 신성함
을 격하하는 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북전과 남전이 모두 전하는 다섯 가지 사항
들은 텍스트들에 따라서 세부적인 내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라한도 마라(Māra) 등의 유혹에 빠지면 몽정(夢精)을 할
수 있다. 둘째, 아라한도 무지(aññāṇa)가 아직 남아 있다. 셋째, 아라한도 의
혹(kaṅkhā)이 아직 남아 있다. 넷째, 아라한도 남에 의해 구제될 수 있다. 다
섯째, 도(道, magga)는 소리에 의해서 생겨난다. 즉 “아아! 고통스럽다.”라고
하는 말의 반복을 통해 성스러운 진리를 자각할 수 있다.「이부종륜론」과「아
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등과 같은 북전의 텍스트들에서는 근
본 분열(mūla-saṃghabheda)의 원인을 다섯 가지 사항들에 대한 쟁론으로
돌리고 있다.33) 이에 따르면 붓다가 입멸하고 나서 100여 년 뒤에 아쇼까
(Aśoka) 왕 치하의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에서 다섯 가지 사항들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교단은 이를 부정하는 상좌부(上座部, Sthaviravāda)와 이를
인정하는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ṃghika)의 두 파로 분열하였다고 한다. 남
전의「까타왓투」에서도 다섯 가지 사항들이 언급되고 있지만,34) 거기에서는 지
말 분열의 마지막 단계에서 남인도 불교 여러 부파들의 이단설로 설해지고 있
을 뿐이다. 전반적으로 다섯 가지 사항들은 전통 교단이 생각하던 것 보다 아라
한의 경지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임이 분명하다.35) 대중부
계통 부파들의 지지를 받던 다섯 가지 사항들은 아라한의 경지를 비하하는 것
이기 때문에 “재가자도 출가자와 함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라는 사상적 흐
름에 있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으며,36) 이것이 같은 대중부 계통의 부파로 추
정되는 웃따라빠타까의 재가 아라한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32) 예를 들면, Sn, 715게; AN.III, p.378; Th, 642-644게 등
33)「十八部論」卷1(『大正藏』49, 18a9-14);「部執異論」卷1(『大正藏』49, 20a15-25);
「異部宗輪論」卷1 (『大正藏』49, 15a15-23);「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99 (『大正藏』
27, 510b10-512a19).
34) Kv. pp.69-93.
35) Warder, A.K. Indian Buddhism, Delhi: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2000, p.210.
36) 森 章司, 「在家阿羅漢について」,「東洋学論叢」권 26, 東京 : 東洋大学文学部, 2001, p.147.
이제 본격적으로『까타왓투』에서 테라와다와 웃따라빠타까가 ‘재가 아라한
이론(gihissa arahāti kathā)’이라는 주제를 놓고 벌인 격론을 살펴보자. 테라
와다가 먼저 “재가자는 아라한이 되는가(Gihī’ssa Arahā ti)?”라고 묻자, 웃따
라빠타까는 “그렇다(āmantā).”37)라고 답변한다. 그러자 테라와다는 전술한 「떼
윗자왓차곳따 숫따」에 나오는 붓다의 말씀(buddha-vacana)38)을 인용함으로
써 웃따라빠타까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자 웃따라빠타까는 그렇다면 어떻게
양가의 아들 야사(Yasa), 가장 웃띠야(Uttiya)39), 바라문 학도 세뚜(Setu)40)
가 재가자의 환경 속에 둘러싸여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었느냐고 반박한다.41)
여기서 붓다고사는 이렇게 주석을 달고 있다.
37) 아만따(āmantā)라는 빨리어는 주로「까타왓투(Kathāvatthu)」와「야마까(Yamaka)」에서 긍정
을 표시하는 데 쓰인다.
38) 빨리 삼장(三藏, ti-piṭaka)과 그 주석서들(aṭṭhakathā)에서 ‘붓다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로는 붓다
와짜나(buddha-vacana)(Vin.IV, p.54; Th. 403게; Mil. p.17) 외에도 붓다사사나(buddha-sāsana)
(Dhp. 368, 381게), 붓다담마(buddha-dhamma), 붓다데사나(buddha-desanā), 삿투사사사
(satthu-sāsana)(Vin.I, p.12 ; DN.I, p.110), 붓다 바시따(buddha bhāsita), 따타가따 바
시따(tathāgata bhāsita)(SN.II, p.267 ; AN.I,p.72), 따타가테나 웃따(tathāgatena vutta),
바가와또 와짜나(bhagavato vacana) 등이 있다. 붓다담마(buddha-dhamma)는 붓다(buddha)
와 담마(dhamma)의 합성어로, 담마(dhamma) 또는 다르마(dharma)는 그것이 가진 다양한 뜻
들 가운데 붓다의 가르침(desanā)을 가리킨다. 그래서 붓다담마는 ‘붓다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는 붓다(buddha)와 사사나(sāsana)의 합성어이다. 사사나는 붓
다가 평생 설한 교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붓다의 가르침 또는 종교적 체
계로서의 불교를 뜻한다. 삿투사사사(satthu-sāsana)는 삿투(satthu)와 사사나(sāsana)의 합
성어로서, 삿투는 스승을 뜻하는 삿타르(satthar)의 단수, 대격, 속격이다. 그래서 ‘스승의 가르
침’이란 뜻이다. 여기서의 스승은 ‘붓다’를 가리킨다. 붓다 바시따(buddha bhāsita)와 따타가따
바시따(tathāgata bhāsita)에서 바시따(bhāsita)는 bhāsati(말하다)의 과거수동분사 형태로
‘말해진 것’의 뜻으로서, 각각 붓다의 말씀과 여래의 말씀을 가리킨다. 따타가테나 웃따
(tathāgatena vutta)에서 따타가케나(tathāgatena)는 따타가타(tathāgata)의 구격으로서
‘여래에 의해’라는 뜻이며, 웃따(vutta)는 vuccati(말하다)의 과거수동분사 형태이다. 그래서 직
역하면 ‘여래에 의해 말해진 것’이란 뜻으로 곧 ‘붓다의 말씀’을 가리킨다. 바가와또 와짜나
(bhagavato vacana)에서 바가와또(bhagavato)는 세존(世尊, bhagavant)의 소유격이고, 와
짜나(vacana)는 말씀으로서 ‘세존의 말씀’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은 빨리 삼장과 그
주석서들에서 모두 ‘붓다의 가르침’이나 ‘붓다의 말씀’을 뜻하는 동의어들이다.
39) 웃띠야(Uttiya) 또는 웃티까(Utthika)는 사왓티(Sāvatthi)에 사는 바라문의 아들이었다. 성년이
되자 불사(不死, amata)를 구하고자 세상을 떠나 편력 수행자(paribbājaka)가 되었다. 하루는
여행 도중에 붓다가 법문을 하고 있던 곳으로 와서 출가하였지만 청정하지 못한 계행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비구들이 목적을 이룬 것을 보고는 붓다에게 간략한 교시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붓다가 준 짧은 교시를 주제로 삼아 수행하였다. 수행하는 동안 병이 들었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Th.30게; Th-a.I, p.89f) 웃띠야는『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에서 언급되는 동일한 이름의 비구임에 분명하다.(SN.V, pp.22,166)
그는『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 붓다에게 세계의 지속 등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하고, 아난다(Ānanda)로부터 붓다가 한 답변의 함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은 편력 수행자
웃띠야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 (AN.V, p.193ff) 이러한 빨리 텍스트들의 기술들을 종합해 보건
데, 웃띠야는 비구로서 아라한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웃따라빠타까(Uttarāpathaka)는
그를 재가 아라한의 사례로 잘못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0) 바라문 청년 세뚜(Setu Māṇava)는 오직「까타왓투(Kathāvatthu)」에서만 언급될 뿐,「까타왓
투 주석서(Kathāvatthu-aṭṭhakathā)」는 물론이고 다른 빨리 텍스트들에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41) Kv. p.268.
"이것은 재가자가 아라한이 되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것은 재가자의 성질
로 머무는 동안에 아라한과를 얻은 양가의 아들인 야사와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재가자도 아라한의 성질을 증득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웃따라빠타
까와 같은 이들의 주장이다. 여기서 ‘재가자는 아라한이 되는가?’라는 자
론사의 질문은 ‘재가의 족쇄에 묶인 재가자가 아라한이 될 수 있는가?’를
뜻한다. 하지만 타론사는 재가자의 성질만을 보기 때문에 자론사의 질문
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재가자
는 재가자의 성질에 묶인 것이 아니라 재가자의 족쇄에 묶여 있다."42)
42) Kv-a. p.73, “Idāni gihī’ssa arahā ti kathā nāma hoti. Tattha yesaṃ Yasakulaputtādīnaṃ
gihivyañjane ṭhitānaṃ arahattappattiṃ disvā gihī assa arahā ti laddhi, seyyathāpi
Uttarāpathakānaṃ, te sandhāya pucchā sakavādissa. Tattha gihī’ssā ti yo
gihisaṃyojanasaṃyuttatāya gihī, so arahaṁ assā ti attho. Paravādī pana
adhippāyaṁ asallakkhetvā gihivyñjanamattam eva passanto paṭijānāti. Idāni’ssa, gihi nāma
gihisaṁyojanena hoti, na vyañjanamattena.”
테라와다의 주장은 ‘재가자의 족쇄(gihi-saṃyojana)’가 있는 한 재가자는
성관계(methuna-dhamma)를 해야 하고 상업에 종사해야 하고 재산을 관리
해야하기 때문에 그가 얻은 아라한의 성질(arahatta)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43) 이러한 의미에서 테라와다는 재가 아라한의 존재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고 있는 것이며, 웃따라빠타까는 그러한 유보조항이 없는 재가 아
라한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43) 森 章司, 앞의 논문, p.66 ; Kv. p.268.
부파 불교 시기에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었다고 하면 대략적으로 테라와다 계
통은 재가 아라한을 부정하는 입장이며, 대중부 계통은 재가 아라한을 긍정하
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4) 부파 불교시대에 이러한 주장이 쟁점이 된
것은 정신적 성취에서 출가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던 당시 재가자들의 열
망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대중부 계통은 다섯 가지 사항들에서 보듯
이 출가자에게만 독점되던 아라한의 이상을 점차 추락시키게 된다. 이렇게 아
라한의 경지를 추락시킴으로써 대중부 계통은 재가자들도 아라한의 경지에 더
쉽게 오를 수 있다고 보았던 사조로 나아간 듯하다. 그래서 대중부 계통은 아무
런 유보사항이 없는 재가 아라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
아라한 이상의 종말을 뜻함과 동시에 대승 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차별 없이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보살 이상의 서막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45)
44) 森 章司(2001, p.147)는 남전과 북전의 아비다르마 텍스트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아라한의 성질
(arahatta)과 재가자의 표상(gihī-liṅga)은 상반되는 것이며 설령 재가자로 아라한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날 바로 출가하거나 그날 바로 반열반에 든다는 추세에 따른 부파로 테라와다
(Theravāda), 법장부(法藏部, Dharmaguptaka), 안다까(Andhaka)를 들고 있으며, 재가 아라한
도 존재할 수 있다는 부파로는 웃따라빠타까(Uttarāpathak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ṃghika)
를 들고 있다.
45) 일반적으로 초기 불교에 비해서 대승 불교에서 재가자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대표
적인 것이 바로 보살의 이상이다. 대승 불교에서 특히『반야경(般若經, Prajñā-pāramitā-sūtra)』에
의해 확립된 공의 이론(śūnyatā-vāda)은 이상과 현실, 윤회와 열반에 대한 차별적 집착을 부
정한다. 윤회 속에 열반이 있으므로 윤회하는 현실 속에서 수행을 중시하는 재가주의가 대승 불교 내에
형성되게 된다. 그러한 재가주의를 담은 대표적인 경이『유마경(維摩經, Vimalakīrti-nirdeśa-sūtra)』
이나『승만경(勝鬘經, Śrīmālādevī-siṃhanāda-sūtra)』이라고 할 수 있다. Étienne Lamotte(1988,
p.54)는 출가자와 재가 신자가 둘 다 붓다의 제자이긴 하지만, 서로 다른 경향을 나타내었고, 재가 신
자 계통이 대승 불교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출가자 계통은 욕망의 포기와 개인적 깨달음이 이상
이었고, 재가 신자 계통은 남을 이롭게 하는 행동이 주된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 불교
의 흥기는 출가 교단의 엄격한 승원주의에 대해 재가 신자의 인간애가 승리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승 불교가 재가주의로부터 나왔다는 학설은 에띠엔 라모뜨(Étienne
Lamotte)와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와 같은 학자들이 지지하였으나, 사사키 시즈카(佐々木閑),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 폴 해리슨(Paul Harrison), 폴 윌리엄스(Paul Williams)
와 같은 학자들은 출가자 기원설 입장에서 이를 반박하기도 하는 등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뜨거운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IV.『밀린다빤하』의 견해
테라와다의 재가 아라한 이론을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텍스트가 바로『밀린
다빤하(Milindapañha)』이다. 이 텍스트는 그리스인으로서 B.C. 150년 무렵 46)
서북 인도를 통치했던 밀린다(Milinda) 왕이 나가세나(Nāgasena)라는 비구와
불교 교리에 관해 토론한 기록을 토대로 성립된 것이다.47) 즉『밀린다빤하』는 밀
린다 왕이 죽고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48) 서북 인도49)에서 산스끄리
뜨(Sanskrit)나 쁘라끄리뜨(Prakrit)로 처음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50)
그렇다면 그 성립 시기는, 테라와다의 3차 결집(B.C. 247년) 이후인 B.C. 100
년에서 A.D. 100년 사이일 것이며,51) 그 때는 A.D. 415~450년 무렵 붓다고사
가 스리랑카로 오기 300~400년 전이다. 즉『까타왓투』보다도 후대의 텍스트이
며, 대승 불교의 흥기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비록 미얀마의 불교 전통에서『밀
린다빤하』는『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āya)』에 포함되긴 하지만,52) 전통
적으로 장외전적(藏外典籍, post-canonical texts)로 분류되는 텍스트이다.
46) 밀린다 왕의 재위시기에 대해서 Rhys Davids(1890, pp.xxii-xxiii)은 B.C.140-110경으로, Winternitz
(1933, p.174)는 B.C.1세기로, Étienne Lamotte(1988, p.419)는 B.C.163-150경
으로, A.K. Warder(2000, p.315)는 B.C.155-130경으로 각각 추산한다. 다른 학자들도 대략 그
정도로 추산한다.
47) Étienne Lamotte(1988, p.424)에 따르면,『밀린다빤하』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까타왓투」
에서 즐겨 다루고 있는 내용과 전체적으로 동일하다고 한다.
48) Winternitz, Maurice, A History of Indian Literature, Vol. I, Calcutta: University of Calcutta,
1933, p,175.
49) 水野弘元(1959, pp. 47-48)은 한역본과 빨리본에 모두 나오는 다섯 강의 이름을 비교해서『밀린
다빤하』의 모본(母本)이 성립된 장소를 서북 인도로 보고 있다
50) Mendis, N.K.G. ed. The Questions of King Milinda :An Abridgement of the
Milindapañha, Kandy :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3, p.2.
51) Hinüber, Oskar von. A Handbook of Pāli literature,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vt. Ltd.1997, p.85.
52) 미얀마의 불교 전통에서『뻬따꼬빠데사(Peṭakopadesa)』,『넷띱빠까라나(Nettippakaraṇa)』,
『숫따상가하(Suttasaṅgha)』,『밀린다빤하(Milindapañha)』는 19세기 민돈(Mindon) 왕이 주
최한 제 5차 결집에서『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āya)』에 편입되었으며, 20세기 제 6차
결집에서도 그렇게 실리게 된다.
먼저『밀린다빤하』의 「제 3품(Tatiyo vagga)」에서 재가 아라한 이론이 일
부 다루어지고 있다. 밀린다 왕은 “와셋타여, 지금 여기에서도 내세에서도 법
이 이 세상에서 최상이라고 알아야 한다(Dhammo hi, vāseṭṭha, seṭṭho jane
tasmiṃ diṭṭhe c’eva dhamme abhisamparāyañ ca).”53)라는 붓다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왜 수다원(須陀洹, sotāpanna)을 얻은 재가자는 갓 출가한 비구나
사미를 경배해야 하는 지를 묻는다. 나가세나는 그 이유로 20가지 사문의 사문
됨을 만드는 법들(vīsati samaṇassa samaṇakaraṇā dhammā)과 두 가지 외
부적 특징(dve ca lingāni)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그리고 답변의 말미
에서 이렇게 말한다.
53) DN.III, p.83.
대왕이여, 만일 재가자로서 수다원이 된 사람이 아라한을 실현한다면 그
는 그 날로 반열반에 들든가, 아니면 비구의 성질에 이르든가 그 어느 쪽
입니다. 그에게는 이 두 가지 길만이 있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대왕이여, 왜냐하면 실로 움직일 수 없는 출가는 숭고하고 수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구의 경지입니다.54)
54) Mil. p.164, “Yadi mahārāja upāsako sotāpanno arahattaṁ sacchikaroti, dve va tassa
gatiyo bhavanti, anaññā : tasmiṁ yeva divase parinibbāyeyya vā bhikkhubhāvaṁ vā
upagaccheyya ; acalā hi sā mahārāja pabbajjā mahatī accuggatā, yad-idaṁ
bhikkhubhūmīti.”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에게 만일 재가 아라한이 그 날 바로 아사리(阿闍梨,
ācariya)나 화상(和尙, upajjhāya)이나 발우(patta)나 가사(cīvara)를 얻지
못한다면, 그는 혼자 출가하는지, 아니면 그 날을 넘어서 사는지, 아니면 신통
력이 있는 아라한이 와서 그를 출가시키는지, 아니면 반열반에 드는지를 질문
한다. 이에 나가세나는 재가 아라한은 혼자 출가하지 못하며 그날을 넘어서 살
지도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밀린다 왕은 만약 재가 아라한이 생명을
잃게 된다면 그 아라한이라는 지위의 적정성은 버려진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다시 이렇게 답변한다.
대왕이여, 재가자의 표상 가운데 아라한에게 어울리는 것은 없습니다. 특
징이 어울리지 않을 때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한 재가자는 그날 출가하든
가 또는 반열반에 들게 됩니다. 대왕이여, 그러나 그 잘못은 아라한의 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의 표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특징
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55)
55) Mil. p.265, “Visamaṁ mahārāja gihilingaṁ, visame linge lingadubbalatāya arahattaṁ
patto gihī tasmiṃ yeva divase pabbajati vā parinibbāyati vā ; n’ eso mahārāja doso
arahattassa, gihilingass’eso doso, yad-idaṁ linga-dubbalatā.
그리고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위장의 비유, 작은 풀잎에 놓인 무거운 돌
의 비유, 힘없고 무능하고 비천한 신분의 태생이고 지혜가 낮은 사람이 큰 왕국
을 다스리는 비유 등을 통해서 재가자의 표상(gihī-liṅga)이 아라한에게 어울
리지 않고 또 특징의 미약한 힘 때문에 재가 아라한은 그날 바로 출가하거나 그
날 바로 반열반에 든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밀린다빤하』에서 나가세나는
재가 아라한의 존재 가능성을 마지못해 인정함으로써 재가 아라한의 존재 자체
를 부정하는「까타왓투」의 테라와다 입장보다 조금 진보된 입장을 보이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재가 아라한은 그날 바로 출가하거나 그날 바로 반열반에 든
다.”는 테라와다의 유보조항을 성문화하고 있다.
학계는 일반적으로 한역본『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과 공통되는 빨리본『밀
린다빤하』의 처음 세 부분 즉 영국 PTS본『밀린다빤하』의 1페이지부터 89페
이지56) 까지가 모본(母本)이라고 본다.57) 그런데 이『밀린다빤하』의 모본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 속에서는 테라와다의 재가 아라한 이론이 발견되지 않는다.
K.R.노만(Norman)은 문체가 다르고 분명히 전반부보다 늦게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후반부(Mil. pp. 90-420)부터 붓다고사가 인용58)하고 있는 점을 들
어 후반부는 틀림없이 A.D. 5세기 전에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본다.59)『밀린다빤
하』의 모본이 어느 부파에 속하는 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들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밀린다빤하』의 모본은 설일체유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견
해60)이다. 또 하나는『밀린다빤하』의 모본은 어느 부파에도 속하지 않거나 초
기 불교61)에 아주 가까운 텍스트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62)이다. 만약 첫 번
째 견해를 따른다면, 설일체유부가 재가 아라한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인정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공식 입
장은 분명하지 않고 본 논문의 목적과도 관련이 없으므로 논의에서 제외한다.
만약 두 번째 견해를 따른다면, 초기 불교에는 테라와다의 정설이 없었다는 증
거가 된다. 그래서 “재가 아라한은 그날 바로 출가하거나 그날 바로 반열반에
든다.”라는 테라와다의 유보조항은『밀린다빤하』가 스리랑카에서 마하위하라
(Mahāvihāra)에 의해 개작되면서 삽입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63) 실제
로 빨리본『밀린다빤하』에 나타나는 재가 아라한에 대한 테라와다의 유보조항
은『맛지마 니까야』의 제 71번째 경인 「떼윗자왓차곳따 숫따」에 대한 주석,
64)「담마빠다 앗타까타(Dhammapada-atthakathā)」,65) 그리고 제 264번째「자
따까(Jātaka)」인 「마하빠나다 자따까(Mahāpanāda-Jātaka)」의 산문66) 에 나
타나는 내용들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주석서들은 A.D. 415~450년 무렵
붓다고사가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에 와서 고대 싱할리어 주석서들인「마하앗타
까타(Mahāṭṭhakathā)」즉「시할라앗타까타(Sīhalāṭṭhakathā)」를 바탕으로 편
찬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고대 주석서들을 직접 판독할 수만 있다면, 붓다
고사의 저작들로 최종적으로 성문화된 해석체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고대 주석서들은 세월의
풍파에 휩쓸려 보존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붓다고사가 주석서들을
쓸 때 의지한 원본들인 고대 주석서들에 테라와다의 재가 아라한 이론이 존재
했었는지를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56) 빨리본은 V. Trenckner가 1880년에 로마자로 바꾸어 교정․ 출판했다. 그것에 의하면 한역본에 해
당되는 처음의 세 권은 89페이지까지고 네 권에서 일곱 권은 90페이지에서 420페이지까지다.
57) 한역본『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은 제 2장으로 끝나지만, 빨리본『밀린다빤하(Milindapañha)』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가세나에 대한 밀린다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이 끝났다(Milindapañhānaṃ
pucchāvissajjanā samattā).”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후반부가 시작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
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빨리본과 한역본이 거의 같다 해도 오히려 한역본의 서술 형식이 간단한데,
이것이 보다 오랜 형태라고 생각된다. 또 서화(序話)를 비교해보면 틀리는 점들이 매우 많으며, 빨
리본 서화 속에는 역사적 사실과 반대되는 점도 있어서, 이것은 후세의 추가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Étienne Lamotte(1988, p.423)는 빨리본 7권들 가운데 단지 제 2권과 제 3권, 그리고 제 1권
의 일부만이 모본이라고 보고 있다. 한역본『나선비구경』과 빨리본『밀린다빤하』에 대한 비교는
Bhikṣu Thich Minh Chau(1964)와 Bhikkhu Pesala(1992, pp.xiii-xv) 참조.
58) I.B.Horner(1969, p. xx)는『밀린다빤하』가 인용되거나 언급되고 있는 붓다고사 저작들의 구절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59) Norman, K,R. Pāli Literature: Including the Canonical Literature in
Prakrit and Sanskrit of All the Hīnayāna Schools of Buddhism, Otto Harrassowitz, 1983, p.112.
60) Étienne Lamotte(1988, p.423)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Nalinaksha Dutt(1998, p.135)도
「아비다르마꼬샤 위야캬(Abhidharmakośa-vyakhya)」가 나가세나(Nāgasena)를 대덕(大
德, pūrvaka-sthavira)이라고 가리키는 점을 들어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AKBh. p.938ff;
「阿毘達磨俱舍論」卷30 (『大正藏』29, 155c17ff)]
61) 초기 불교(Early Buddhism)는 인도 불교의 시대 구분에서 볼 때 붓다의 성도(成道)에서 시작하여
붓다의 입멸 후 상좌부(上座部, Sthaviravād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 두 부파로
분열하기 전까지의 단일했던 교단으로 이루어진 원초 불교(Primitive Buddhism)를 가리킨다. 초기
불교에 관한 연구 자료로는 테라와다(Theravāda) 소속의 빨리 니까야(Pāli Nikāya)와『위
냐야 삐따까(Vinaya-piṭaka)』, 그리고 여러 부파 소속으로 나중에 중국에서 한역된 북전의 아가
마(Āgama)와『율장(律藏)』, 그리고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단편으로 발견되어 학계에 소개된 이들
의 산스끄리뜨 판본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 불교의 문헌 즉 초기 불전은 모두 부파들이 전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초기 불교의 특징만을 추출해내는 것은 무리이다.
62) Bhikṣu Thich Minh Chau(1964, p. 23)는 이렇게 말한다. “전술한 모든 증거들을 볼 때 한역 원
본은 아비다르마(Abhidharma)의 발전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고 붓다 다르마(Buddha-dharma)
를 아함(阿含)이나 니까야(Nikāya)로 분류하는 것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을 어느 시기에 편집되
었음을 보여준다.”
63) Étienne Lamotte(1988, p.423)는 빨리본『밀린다빤하』가 스리랑카에서 개작된 것으로 보고 있
다. Guang Xing(2008, p.324)도 같은 견해이다. 그러나 그것이 붓다고사 한사람에 의해서 개
작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간결한 문체의 전반부(제 1편)는 발전된 문학 수법을 보이고 있
는 후반부(제 2편과 제 3편)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I.B.Horner(1969,
p.xxi)는 그것이 적어도 한명 이상의 저자에 의해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64) Ps.III, p.196.
65) Dhp-a.IV, p.59, “대왕이여, 케마는 출가하거나 반열반에 들어야 합니다(mahārāja Khemāya
pabbajituṃ vā parinibbāyituṃ vā vaṭṭatī ti).” 66) Ja.II, p.332, “대상이여, 그대 아들은 아름답게
장식하고 법문을 듣다가 지금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러므로 오늘 출가하거나 반열반에 들어야
한다(mahāseṭṭhi, putto te alaṁkatapaṭiyatto va dhammakathaṁ suṇanto arahatte patiṭṭhito,
ten’assa ajj’eva pabbajituṁ vā vaṭṭati parinibbāyituṁ vā ti āha).”
66) Ja.II, p.332, “대상이여, 그대 아들은 아름답게 장식하고 법문을 듣다가 지금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러므로 오늘 출가하거나 반열반에 들어야 한다(mahāseṭṭhi, putto te alaṁkatapaṭiyatto va
dhammakathaṁ suṇanto arahatte patiṭṭhito, ten’assa ajj’eva pabbajituṁ vā vaṭṭati
parinibbāyituṁ vā ti āha).
V. 나가는 말
우리는 이제까지 빨리 성전의 가장 이른 텍스트들에 나타난 재가 아라한에
대한 붓다의 근본입장을 살펴보고,『까타왓투』와『밀린다빤하』와 같은 후대의
빨리 텍스트들에 기록된 논쟁들을 통해서 테라와다가 자파의 보수적이고 출가
중심적인 ‘재가 아라한 이론’을 어떻게 성문화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붓다는
재가자가 얻지 못하는 사향사과가 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며, 오히
려 열반 또는 아라한의 이상을 원론적으로 사중 모두에게 열어놓았었다. 이렇게
붓다는 열반을 얻는데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을 두지 않았지만, 야사의 사례에
서 보듯이 감각적 욕망의 향유를 본질로 하는 ‘재가자의 표상(gihī-liṅga)’과
감각적 욕망의 단절을 본질로 하는 ‘아라한의 성질(arahatta)’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까타왓투』에서 테라와다는 이 문제를 두고 웃따라빠타까와
대론을 벌이면서 재가 아라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 3차
결집 당시 인도 대륙에 있던 테라와다의 견해를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빨리본
『밀린다빤하』를 개작했던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는 나가세나의 입을 빌려 재
가 아라한의 존재를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재가 아라한은 그날 바로 출가하
거나 그날 바로 반열반에 든다.”는 유보조항을 붙임으로써 최종적으로 보수적
이고 출가 중심적인 재가 아라한 이론을 성문화한다. 이것은 스리랑카에 있던
테라와다 즉 마하위하라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까타왓투』와『밀린다
빤하』에 기록된 재가 아라한에 대한 논쟁들은 부파 불교 시대부터 불교계의 주
도권을 쥐고 있던 출가자의 전통 교단인 테라와다와, 정신적 성취에 있어 출가
자와 동등한 권리를 바라던 재가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던 대중부 계통 부파들과
의 긴장과 충돌을 반영한다. 크게 보면, 다섯 가지 사항들을 주장함으로써 아
라한의 권위와 신성함을 격하시키려는 사조와 재가 아라한을 아무런 유보조항
없이 인정하려는 사조는 모두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서, 출가자의 헤게모니를
고수하려는 테라와다에게는 심대한 위협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부파 불교의 시대에 테라와다는 초기 불교보다도 더 보수적이고 출가 중심적인
재가 아라한 이론을 성문화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테라와다에 의해 이단설로
내몰린 대중부 계통의 양대 사조는 급기야 대승 불교에서 한데 만나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한 사중 모두가 동등하게 보살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사상으로 승
화되었다고 생각된다.
부록: 빨리 텍스트들에 나타나는 붓다 당시의 재가 아라한
붓다는『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여래(如來, tathāgata)에 대해 확고함을 가
졌고 불사를 보았고 불사를 실현하여 지내는 21명의 재가자를 열거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따뿟사 장자는 여래에 대해 확고함을
가졌고 불사를 보았고 불사를 실현하여 지낸다. 무엇이 여섯인가? 붓다
에 대한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 법에 대한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
성스러운 계, 성스러운 지혜, 성스러운 해탈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
섯 가지 법을 갖춘 따뿟사 장자는 여래에 대해 확고함을 가졌고 불사를
보았고 불사를 실현하여 지낸다.67)
67) AN.III, pp.450-451, “cha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tapusso gahapati
tathāgate niṭṭhaṃ gato amataddaso amataṃ sacchikatvā iriyati. katamehi chahi?
buddhe aveccappasādena, dhamme aveccappasādena, saṅghe aveccappasādena,
ariyena sīlena, ariyena ñāṇena, ariyāya vimuttiyā. imehi kho bhikkhave chahi
dhammehi samannāgato tapusso gahapati tathāgāte niṭṭhaṃ gato amataddaso
amataṃ sacchikatvā iriyatī ti.”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은 이 말씀에 나오는 성스러운 해탈(ariyāya vimuttiyā)
과 불사(不死, amata)라는 용어들을 근거로 이 21명의 재가자들이 재가 아라
한을 뜻한다고 보아왔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빠라나(Parana) 또는 뿌라나(Purāṇa), 이시닷따(Isidatta)는 모두 도솔천(兜
率天, Tusitā)에 재생하였고,68) 웨살리(Vesāli)의 욱가(Ugga)는 마음으로 이루
어진 몸(mano-maya)을 받아 정거천(淨居天, Suddhāvāsa)에 재생하였으
며,69) 핫타까(Hatthaka)는 정거천의 무번천(無煩天, Avihā)에 재생하였다.
70) 붓다고사에 따르면, 성스러운 해탈은 유학의 과를 통한 해탈(sekhaphala-vimuttiyā)
을 뜻한다고 한다.71) 그러므로 이들은 재가 아라한이 아니라 수다원부터 아나
함까지의 유학의 성자(sekha-puggala)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을 제
외하면 빨리 텍스트들에 나타나는 붓다 당시의 재가 아라한은 모두 열 명이다.
<도표> 빨리 텍스트들에 나타나는 붓다 당시의 재가 아라한
인원수 이름 아라한과를 얻을 아라한과를 출전
당시의 신분 얻은 뒤
1 바히야 다루찌리야 무역상(seṭṭhi) 반열반 Ud-a.p.77ff : Mp.I,
(Bāhiya Dārucīriya) 또는 편력 수행자 p.156ff;
(paribbājaka) Dhp-a.II.p.209ff;
Ap.II, p.475ff.
2 산따띠(Santati) 대신(Mahā-matta) 반열반 Dhp-a.III, p.78ff.
3,4 사께따 바라문 노부부 반열반 Dhp-a.III, p.317ff;
(Sāketa-brāhmaṇa) Ja.I, p.308f; Pj II,
p.532f도 참조.
5 숫도다나 대왕(Mahā-rāja) 반열반 Thī-a. p.141; Ja.I,
(Suddhodana) p.90.
6 욱가세나(Uggasena) 곡예사(nāṭaka) 출가 Dhp-a.IV, p.59ff.
7 케마(Khema) 왕비(devī) 출가 Dhp-a.IV, p.57ff;
Thī-a. p.126f.
8 수자따(Sujātā) 무역상의 딸 출가 Thī-a, p.136f.
9 야사(Yasa) 양가의 아들(kula-putta) 출가 Vin.I, pp.15-20;
Dhp-a.I, p.87.
10 밧다지(Bhaddaji) 무역상의 아들 또는 출가 Ja.II, p.331.
소년(kumā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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