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불교에 나타난 대승공관의 기초/담마끼띠

실론섬 2017. 11. 10. 16:01

[인도철학 41집

초기불교에 나타난 대승공관의 기초

맛지마 니까야의소공경대공경을 중심으로__

담마끼띠/Bhikkhu Dhammakithi.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Ⅰ 서언. 

Ⅱ 공의 意義. 

Ⅲ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의 我空․法空의 이해와 수행관. 

Ⅳ 결론

 

요약문

空은 붓다가 설한 다양한 주제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초기

경전에서는 空의 단어가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그 중에서도 맛지마 니

까야(Majjhima Nikāya)의『소공경과『대공경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무아를 중심으로 공성을 설명하고 있다.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의거해서 공을 관찰하는 것은 초기불

교에서 말하는 최초의 공성이다.

 

공성은 맛지마 니까야에서 이미 언급된 것으로, 반야나 중관 등 여러

대승불교사상에서 다루어지는 주요한 주제이다. 이 때, 공성에 대한 초

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초기불교의 경우 주로 我

空을 말하고 있는 반면, 대승불교의 경우는 法空을 위주로 교설이 전개

된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法空의 개념은 초기경인소공경에 주

로 등장한다. 이 경을 살펴보면 수행자는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는 일체

를 현현(viññapti)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이를 통해 차례대로 일체에 대

한 집착을 마음에서 제거함으로써 無相三昧를 얻게 된다. 일찍이 많은

학자들은 주석에서 무상삼매가 我空을 뜻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에 대

한 논란이 불거지며 我空이 아니라 法空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논자는 붓다가 我空만을 공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소공경,대공경등의 경전에 나타나는 일체공, 즉 法空의 

미도 공성에 포함시켰다고 본다.니까야에서의 공성은 오직 我空뿐

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석서에 法空이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

은 전통에 따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

고 我空과 法空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부파불교가 여러 학파로 나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Ⅰ. 서언

 

붓다는 기원전 6세기부터 공(śūna)의 의미를 사상적으로 사용

하였다. 이는 쌍윳따 니까야의공세계의 경에서 아난의 질문에

대해 붓다가 답한 대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세상은 공이다. 세상은 공이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세상이 공

이라고 말합니까?

아난다여, 나와 나에게 속하는 것이 공이기 때문에 세상이 공이라

고 한다.1)

1) suñño loko suñño lokoti bhante vuccati, kittāvatā nukho bhante suñño
   lokoti vuccatīti? Yasmā ca kho ānanda, suññaṃ attena vā attaniyena
   vā, tasmā suñño lokoti vuccati. SN Ⅳ, p. 54.

 

위에 언급한 대화에서 붓다는 일체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각자의 불변적 속성과 독립된 실체나 자아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

고 설한다. 나와 나에게 속하는 것 가운데, 아소는 我空과 더불어

法空의 단서가 된다. 또한『모가라자경』(Mogharāja-sutta)2)에서

는 공을 ‘自我에게 집착하는 견해를 제거해서(attānudhiṭṭhim ūhac

ca)’ 해탈하고 초월하는 것이라고 설한다.

2) Sn Vs. 1124, p. 217.

 

‘세간을 공으로서 관찰하라(suññato lokam avekkhassu)’라는

말은 공으로써 心解脫을 이루어야만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 견해로부터

공을 관찰하는 것이 法空보다 먼저 설해지고 있다.

 

더 나아가 我空을 중심으로 설해진 니까야(nikāya)에서의 공은

중생상(satta), 인상(puggala), 아상(ātma)이 상좌부에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확대된다. 반면 온(skandha),

계(dhātu), 처(āyatana)는 상좌부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상좌부의 문헌인무애도(Paṭismbhidā-magga)와 주석서인

삿담마빠까시니(Sadhammppakāsīni )에서는 我空뿐만 아니라 一

切空과 法空까지도 설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法空

의 전개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3) 一切空은무애도주석서

외에소공경에서도 언급된다.

3) Sdhk(CSCD, 2000).

 

초기불교의 我空과 法空의 논의에 대한 니까야와 상좌부 주석서

의 논점이 다르다고 본다. 논자는 시기적으로 法空이 나중에 설해

진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맛지마 니까야의소공경

대공경을 중심으로 무아로 설해지기 시작한 공성이 대승공

관으로 전개된 역사적 과정을 다루려 한다.

 

Ⅱ. ‘공’의 意義

 

1. 니까야에 나타난 공성(suññatā)의 意義

불교에서 말하는 공(śūna)은 중성명사이며 ‘공허’, ‘결여’, ‘부족

한 것’ 이라는 의미로 베다문헌에서부터 사용되어져 왔다. 이를

바탕으로 śūnya라는 형용사가 파생되었다. 또한 브라흐마나 문헌

이래로 ‘공허한’, ‘텅 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4)

4) ‘집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부족하다’라는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śūnya는 인도에서 ‘영(0)’을 의미하기도 한다. 中村元(1981) pp. 1-2.

 

공성(suññatā, śūnyatā)의 경우 그 원어는 śūnya인데, 그 어근

인 √śvi, śvayate라는 동사는 ‘증대하다’, ‘부풀어 오른’, ‘허한’ 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외견적으로는 사물이 형성되어 떠오르는 것

을, 내면적으로는 空虛하여 내실을 동반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

다.5) 순야타(śūnyatā)의 과거분사는 수나(śūna)이다. 여기에서 śū

-na라고 하는 말은 부풀어 오른 모습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특히

인도의 의학서에서는 병적으로 부풀어 오른 것을 가리킨다.6) 毒

蛇經(Āsivisopama-sutta)에서는 ‘공7)’(suñña or suññaka)을 ‘공

결’(ritta or rittaka), ‘공허의 것’(tucca or tucchaka)과 동의어로

쓰기도 한다.8)

5) 나가오 가진(2005) p. 328.
6) 中村元(1981) p. 9.
7) So passeyya suññaṃ gāmaṃ: yaññadeva gharaṃ paviseyya rittakaññe
   va paviseyya, tucchakaññeva paviseyya, suññakaññeva paviseyya,
   yaññadeva bhājanaṃ parimaseyya, rittakaññeva parimaseyya,
   tucchakaññeva parimaseyya, suññaka-ññeva parimaseyya. SN Ⅳ, p.
   172.
8) 藤田宏達(1982) p. 421.

 

초기경전에 따르면, 디가 니까야의 경우 수냐(suñña)는 我空을
설하는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없는(비어 있는)곳으로부터 브라흐마 위마나(궁

전;brahma vimāna)가 생긴다(suññam brahmavimānam pātubhav

ati)”9)

9) “비어 있는 브라흐마 위마나(궁전)가 생긴다.” DN Ⅰ, p. 18.

 

우주가 부서지고 다시 생길 때 我空으로부터 공간이 발생한다.

여기서 순냠(suññam)은 我空을 말하는 것이다. suñña는 다른 단

어의 형용사가 되면서 다른 뜻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빈집(suññāgāra)10)은 ‘마을에서 벗어나 빈

집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혀 수행하는 경우;를 뜻한다.

10) Suññāgāraṃ paviṭṭhassa santacittassa bhikkhuno, Dhp. Vs. 373.

 

니까야에서는 suñña에서 파생된 여러 단어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공성(suññatā), 공심해탈(suññatācetovimutti), 공성의 원인

이 되는 길(suññata mūlapatipadā), 공성주(suññatāvihāra), 공성

이야기(suññatakathā), 공해탈(suññatāvimokkha), 공관찰(suññatā

nupassanā) 등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단어들이 공통적으로 포함

하고 있는 개념은 공성이다.숫타니파타에 의하면 모가라자(Mo

gharāja) 왕과 붓다의 대화에서도 공성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경

우를 볼 수 있다. “죽음의 왕(maccurājā)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는 세계를 어떻게 관찰해야 합니까?”라고 한 왕의 질문에 붓다는

공성이라고 답한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가라자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실체를 고집하는 편견을 제거하

고, 세상을 공함으로 관찰하라.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가 있을 것이

다. 이와 같이 세계를 보는 사람은 죽음의 왕이 보지 못할 것이다.11)

11) Suññato lokaṃ avekkhassu mogharāja sadā sato, Attānudiṭṭhiṃ
    ūhacca evaṃ maccutaro sāyā;Evaṃ lokaṃ avekkha’ntaṃ maccurājā na
    passatiti, Sn Vs. 1124, p. 217.

 

여기서 붓다는 모가라자에게 세상을 관찰하는 하나의 방법을

설명한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견해(Attānudiṭṭhiṃ)를 확립하는

것 즉 자아의 실체를 고집하는 것인 有身見(sakkāyaditthi)을 제거

한 뒤(ūhacca),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 의하면 十結

(dasa samyojana)12)를 제거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열반에

이르는 가운데 預流道(sotāpanna)의 길에서 첫 번째로 제거해야

하는 것이 자아에 대한 견해나 유신견이다. 여기서‘sakkāya’란 신

체와 연결되는 것으로 五取蘊(upadana-skandha)를 뜻한다. 그 예

는 맛지마 니까야에서 ‘담마딘나’ 비구니 존귀한 여인 ‘비싸카’에

게 설명하고 있는 대화를 통해 잘 나타난다.

12) MN I, p. 298.

 

존귀한 여인이시여, ‘존재의 무리, 존재의 무리’라고 말한다, 세존께

서는 어떠한 것을 두고 존재의 무리라고 합니까?

벗이 비싸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다발을 두고 존재의 무

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

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입니다. 벗이 비싸카

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두고 존재의 무

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

13) Sakkāyo sakkāyoti ayye vuccati. Katamo nu kho ayye sakkāyo vutto
    bhagavatāti? Pañca kho ime āvuso visākha 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 Seyyathīdaṃ: rūpūpādānakkhandho
    vedanūpādānakkhandho saññūpādānakkhandho
    saṅkhārūpādānakkhandho viññāṇūpādānakkhandho. Ime kho āvuso
    visākha pañc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ti. MN I, p.
    299.

 

이와 같이 자기에 대한 견해는 곧 오취온을 가리킨다. 이 오취

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의 我空을 완성시키는 수행이라

고 말할 수 있다.

 

2. 공성의 개념과 유사한 어휘들

니까야에서 공성과 유사한 단어로 볼 수 있는 것은 無相(animit

ta), 無願(appanihita), 非實(nissatta), 非命(nijjīva) 등이다. 相(nimit

ta)은 탐욕(lobha)이나 성냄(dosa)을 가지게 되는 마음의 원인 또

는 대상을 뜻한다. 이 대상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무상

(animitta)을 가지는 것이다. 無相은 공을 이해할 때 핵심이 되는

용어이다.

 

한편 쌍윳따 니까야에 나타난 無相이란 다음과 같다.

 

무상심삼매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만약 여기

서 비구가 모든 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무상심삼매를 성취하

고 있다면 그것을 무상심삼매라고 말한다. 벗이여 그때 나는 모든 相

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무상심삼매를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상태에 머무른 相을 수반하는 의식(nimittānusārī viññāṇaṃ)이라고 한

다.14)

14) Animitto cetosamādhi animitto cetosamādhīti vuccati katamonu kho
    animitto cetosamādhīti. Tassa mayhaṃ āvuso etadahosi.‘Idha bhikkhu
    sabbanimittānaṃ amanasikārā animittaṃ cetosamādhi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vuccati animitto cetosamādhī’ti. So khvāhaṃ āvuso
    sabbanimittānaṃ amanasikārā animittaṃ cetosamādhiṃ upasampajja
    viharāmi. Tassa mayhaṃ āvuso iminā vihārena viharato nimittānusārī
    Viññāṇaṃ hoti. SN Ⅳ, p. 269.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무상심삼매는 모든 상을 기억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한 속성이나 구별의 표지가 없는 마음

의 삼매를 일컫는다. 그 상태를 혹자는 무상심삼매(animittoceto s

amādhi)라고 설하기도 한다.

 

無願15)이라는 단어는 ‘바라는 바가 없는’, ‘목적이 없는’ 등의 뜻

을 가진다. 이는 ‘어떤 것에 대해 걸림 없이 열린 마음으로 보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마음의 본래 상태는 분별심이고, 그것

에서 벗어난 마음이 무원심이 되는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하나와 여럿, 선행과 악행, 나타남과 사라짐, 오는 것과 가는

것, 선명한 것과 선명하지 못한 것, 늘어남과 줄어듦은 지각과 分

別心에서 생겨난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가

무원삼매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법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법을 버리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5) “無願은 삼매와 해탈이랑 연결되며, 모든 욕망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 같다. 참고: Vin Ⅲ.93 = Ⅳ.25 ; S Ⅳ.295, 309. 360 ; Ps Ⅱ.43 sq., 100
    ; Miln 337.”(appaṇihita in connection with samādhi & vimokkha
    .seems to mean ‘free from all longings,’ see Vin Ⅲ.93 = Ⅳ.25 ; S
    Ⅳ.295, 309. 360 ; Ps Ⅱ.43 sq., 100 ; Miln 337.) PED, p. 26 left.

 

한편 열반은 無相라고 말한 것에서 공성의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탐, 진, 치의 표상이 없으며 형성된 것의 표상이 없기 때

문이다. 또한 열반은 원함, 바라는 것, 그리고 목적이 존재하지 않

는다. 그것을 無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탐, 진, 치에 대

한 동경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갈애로 염원(panidhi)한다고 해서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소

공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非實’(nissatta), ‘非命’(nijjīva)이라는 단어 역시 공성과 상

응하게 사용된다. 이 두 단어는 주석서(attakathā)에서 언급된 것

이다. ‘非實’이란 존재하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중생상’은 ‘비중생

상’(asatta)과 ‘비아상’(apuggala)이라는 반대 뜻을 가진다. 반면,

모든 것을 중생상(satta)이나 아상(puggala)으로 해석하는 것은

세계를 파악하는 일반개념(paññatti)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깨달음은 공성의 체험에서 일어

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공성이다”라는 뜻의 ‘ni

ssattena sunnato’ 라는 말은 맛지마 니까야 의 주석서16)에 나온

다. 이는 존재하다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성으로 이해한

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導論(Netti-pakarana)17)에 의하면

일체의 사물은 세속제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세속제로 존

재하는 일체의 사물도 승의제에 의거하면 요소(dhātu)의 집합으로

이해된다. 

16) Pps, Malunkkaya sutta vannanā.(CSCD, 2000).
17) Netti.P, patiniddesa vannanā.(CSCD, 2000).

 

수타니파타에 따르면 想(Saññā)18)을 제거하는 것이 열반이

다. 즉 “여러 지각에서 떠나면 속박이 없다.”19) 불교에서는 산냐

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다. 붓다는 버림의 산냐(Pahānasaññā),

무아의 산냐(Anattasaññā), 사라짐의 산냐(Virāgasaññā), 소멸의

산냐(Nirodhasaññā) 그리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산냐(Kāmasaññ

ā),분노에 대한 산냐(Vyāpādasaññā), 폭력에 대한 산냐(Vihims

asaññā), 견해에 대한 산냐(Ditthisaññā)에 대해 그 수행을 알고

번뇌의 요소를 제거한다면 그것이 곧 열반에 해당한다고 설한다.

18) 기본적인 뜻인 saṃ(함께, 같게)+jñā(인식하다)의 의미가 잘 인식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19) Saññā cirattassa na santi gatthā. Sn, Vs. 851.

 

非命도 위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20) 실체가 없는 육근, 육경이

만나 생긴 육식 또한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물질적인

것에서도 주의적인 것에서도 변함 없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공성을 의미하는 여러 단어를 살펴볼 때, 크게 我空과 法

空의 두 가지 의미다. 我空과 法空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0) Niriha nijjiva dhammamatta' ti passanto. Vism, pp. 484, 594.

 

Ⅲ.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의 我空․法空의 이해와 수행관

 

1.『소공경』(Cūlasuññatā-sutta)의 고찰

초기불교에서 공성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루어 二空의 실체가

명확해지는 과정은 특히 맛지마 니까야 중소공경(Cūlasuññatā

-sutta)과대공경(Mahāsññatā-sutta)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두 경을 살펴보면 공성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는 공성의 여러 가지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초기불교의 핵

심수행인 위빠사나 명상 수행에 비춰 공성을 이해하고 공성을 해

석해야 된다고 본다. 이 두 경에 의하면 공성과 위빠사나21) 수행

이 밀접한 연관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21) 위빠사나는 위(vi)와 빠사나(passanā)의 합성어이다. 위(vi)는 ‘분리’라는
    뜻이다. 이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인 객체를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빠사나(passanā)는 ‘관찰한다’, ‘응시한다’, 혹은 ‘隨觀’을
    의미하여 대상을 놓치지 않고 계속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대상을 주체와 객체로 분리해서 알아차리되 지속적으로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맛지마 니까야의 주석서에서유명대경(Mahāvedalla-sutta)22)

을 주석한 것을 보면 위빠사나가 오직 공성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적인 행법은 念(sati)과 正知(sampajañña)이다.23) 다른

말로 하면 무상, 고, 무아를 깨달은 것이다.상윳따나까야의 주

석서인顯揚真義(Sāratthappakāsinī)에서는 공성은 무아라고 설

명한다.24) 「무애도」에서도 공성의 관찰(suññatānu passanā)은 무

아의 관찰(anattānupassanā)이라고 밝히고 있다.25) 동시에 이러한

별개의 두 단어가 하나의 의미라고 말한다.무애도의 주석서인 

삿담마빠까시니(Saddhammappakāsini )에서는 담마팔라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苦의 관찰 이후에 나오는 무아에 대한 관

찰이 공성의 관찰’이라고 설한다. 이와 같이 주석서에 나타난 공

성은 我空이라고 할 수 있다. 我空은 바로 무아를 의미한다.

23) MN I, p. 25
24) Dutiyena sññatālakkhanantī dvhī pabbehi anattalakkhanam. Spk(CSCD,
    2000).
25) yā va anattānupassanā yā va suññatānupassanā. Patim, pp. 36, 44,158.

 

냐나모리에 따르면 공성의 과에 도달하는 것은 곧 아라한과에

도달함을 의미하며 열반의 공의 측면에 집중함으로써 그러한 과

를 얻게 된다.26)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공에 관하여 사상사적으로

주목한 교설은 ‘공성에 머무르는 것’이다.소공경에 의하면 붓다

는 비구가 여러 가지 지각에서 벗어나 머무르는 것이 공에 머무

르는 것이라 설한다. 다음은 아난다와 붓다의 대화이다.

26) Ñāṇamoli & Bodhi(1995) p. 125.

 

아난다여, 그렇다. 그대는 그것을 올바로 듣고 올바로 파악하고 올

바로 주의를 기울여 잘 기억한 것이다. 아난다여, 이전에도 지금도 나

는 자주 공에 든다. 아난다여, 이 미가라마뚜 강당에는 코끼리들, 소들,

말들, 암말들이 공하고 금이나 은도 공하고 여자나 남자들의 모임도

공하다. 그러나 단지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수행승들의 참모임을

조건으로 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난다여, 어떤 수

행승은 마을에 대한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람들에 대한 지

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숲에 대한 지각 하나만을 조건으로 주의

를 기울인다. 그의 마음은 숲에 대한 지각에 뛰어들어 그것을 신뢰하

고 정립하고 결정한다. 만족하고 청정해지고 안온해지고 해탈한다. 혹

은 들어가고, 안착 되고, 자리 잡고, 정립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마을

에 대한 지각을 조건으로 하는 어떠한 고뇌도 여기에는 없다. 사람들

에 대한 지각을 조건으로 하는 어떠한 고뇌도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단지 이러한 고뇌가 있다. 즉, 숲에 대한 지각을 조건으로 하는 유일

한 것이 있다고 분명히 안다. 그는 ‘이 지각의 세계는 마을에 대한 지

각에 관하여 공하다.’고 분명히 알며, ‘이 지각의 세계는 사람들에 대

한 지각에 관하여 공하다.’고 분명히 안다. 그러나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숲에 대한 지각을 조건으로 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라고 분

명히 안다.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을 공이라고 여기지만 거기에 남아 있

는 것은 있으므로 ‘이것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아난다

여, 이것은 그에게 진실 되여, 전도되지 않은, 청정한 공이 현현된 것

이다.27)

27) Taggha te etaṃ ānanda, sussutaṃ suggahītaṃ Sumanasi kataṃ
    sūpadhāritaṃ. Pubbepāhaṃ ānanda, etarahi pi suññatāvihārena
    bahulaṃ viharāmi. Seyyathāpi ānanda, ayaṃ migaramātupāsādo suñño
    hatthigavāssavaḷavena, suñño tarūparajatena, suñño itthi
    purisasannipātena,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bhikkhusaṅghaṃ
    paṭicca ekattaṃ. Evameva kho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gāmasaññaṃ,amanasikaritvā manussasaññaṃ,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manasikaroti ekattaṃ. Tassa arañña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So evaṃ pajānāti:‘ye assu darathā
    gām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manuss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gāma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manussa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Iti yaṃ 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MN Ⅲ, p. 106.

 

경전에 나타난 예와 같이 청정한 공이 현현한 이후에도 수행자

가 공성에 계속 들어간다. 이때는 마을, 사람, 숲을 지각하는데 주

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과정 중에 四大의 상을 결택하는 과정

이 개입된다. 즉, 지대에 대한 상(pathavīsañña:수·화·풍)의 지각에

뛰어들어 그것을 신뢰하고 정리하며 결정하는 것이다. 경전에 언

급된 것은 지대로서 마을, 사람들의 관계, 숲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굳은 지각에서 부드러운 지각에 들어가는 것이’ 지, 수,

화, 풍에 四大이다. 남자, 여자라는 상으로부터 벗어나 남자, 여자

를 사대로 보게 되면 번뇌에서 벗어나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이것

이 굳은 번뇌의 지각으로부터 부드러운 번뇌지각을 갖게 되는 것

이다. 지상의 지각에 뛰어들어 그것을 신뢰하고 정리하고 결정하

는 비구가 더 부드러운 지각을 갖게 된다.

 

즉 ‘공무변처의 상(ākāsānañcāyatanasañña)’은 땅에 대한 지각

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한공간의 세계에 대한 지각 하나만을

조건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무한공간의 세계에 대한 지각을 조건

으로 하는 유일한 것이 있음을 분명히 안다. 거기에 없는 것을 공

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 있으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것은 수행자에게 진실하고, 전도되지

않은, 청정한 공이 현현된 것이다. 부드러운 지각은 주의를 기울

이게 한다. 즉, 땅에 대한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한공간

의 세계에 대한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한의식(viññāṇañ

cāyatanasañña)의 세계에 대한 지각 하나만을 조건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수행자에게 진실하고, 전도되지 않은, 청정한 공

이 현현된 것이다.

 

다음에 부드러운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비상비비상처(n

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의 산냐(sañña)이다. 이것은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으로 세계에 대한 지각

하나만을 조건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의 마

음은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에 대

한 지각에 뛰어들어 그것을 신뢰하고 정립하고 결정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수행자는 무상심삼매(animitta-cetosa

mādhi)에 들어가게 된다. 인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 대한 지각 하

나만을 조건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서 수행자는 조건 지어진

것으로써의 사유된 것은 무상하고 괴멸하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

렇게 번뇌, 무명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게 된다.

 

경전을 요약하면 지각을 기울이지 않고 무상삼매에 들어가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 붓다가 강조하는 점은 ‘공에 머

무는 것은 차례대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凡夫(puthujjana)가

가지고 있는 것이 굳은 번뇌 상이기 때문에 자아, 영혼 등의 문제

점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을 가질수록 진리에

대한 지혜가 멀어진다. 붓다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곧바로 상이

없어지는 것보다 순차적으로 굳은 번뇌 상으로부터 부드러운 상

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결국 모든 상으로부터 벗

어나 무상삼매를 얻게 된다. 많은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상을

절제해야만 한다.28) 그것은 최고의 절제함이다.29) 경전에 나타나

있듯이 상을 절제하는 것은 공에 머무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각각 하나의 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수행자는 결국 무상심삼매(ani

mitta-cetosamādhi)에 들어간다. 이처럼『소공경』에서 공성에 들

어간다고 말하는 것은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무상심삼매에서는

특히 “최고·최상의 공성에 들어간다.”(paramānuttarā suññatāvakk

anti)라고 부른다.

28) saññā virattassa na santi gatthā. Sn, Vs. 851, p. 166.
29) Saññā vimokkha parame vimutto. Sn, Vs. 1075, p. 206.

 

나카무라 하지메의 空性의 意義논문에 의하면 소공경에서

공성에 머무는 것이란 선정의 깊이에 따라 想念의 영역에 남는 번

뇌를 하나하나 부정해나가는 단계를 실현하는 것이다. 궁극에는

‘최고·최상의 공성’에 들어가서 머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30) 이

경에서는 공(suññā), 불공(asuññatā), 공성(suññatā)의 언어적 쓰

임이 설명된다. 즉 어떤 선정상태에서 알아차림을 할 때, 그 선정

에 없는 것은 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불공으로 분명히 안다면 이

를 “최고· 최상의 공성에 들어간다.”(paramānuttarā suññatāvakka

nti)라고 한다. 공과 불공을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공성에 들어가

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붓다는 과거·미래·현재의 어떠한 수행

자들이 구경의 위없이 청정한 공을 성취하였다고 한다면, 그들은

모두 이와 같은 구경의 위없이 청정한 공을 성취한 것이라 한다.

이에 “그대들도 나처럼 구경의 위없이 청정한 공을 성취하는것”

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31)

30) 中村元(1981) p. 6.
31) parisuddham paramānuttaram suññatam upasampajja viharissāmā.
    MN Ⅲ, p. 110.

 

니까야의 주석서에서는 ‘我空=무아’라는 개념이 공을 설하는 핵

심이다.「청청도론」에서 공을 관찰하는 것은 오직 무아를 관찰하

는 것이다.32) 하지만 논자는 ‘공의 관찰=무아의 관찰’의 개념이『

소공경』에서는 좀 다르게 해석되어 있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이것

을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소공경』에 의하면 공

을 관찰하는 것은 굳은 번뇌 상으로부터 부드러운 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결국 모든 상에서 벗어나 무상삼매를 얻는다. 이 경전에

는 공에 대한 관찰이 무아에 대한 관찰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되

어 있지는 않다. 이에 전통적으로 중요한 개념이 여기서 다뤄자지

않는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32) suññatānupassanāhi anatānupassanā. Vism, p. 594.

 

수행자는 마을, 사람, 숲에 대한 산냐(지각) 등 하나씩 상을 제

거하면서 결국 내·외공으로 “아무 것도 없다.”(natthi kiñci)라는

지각을 가진 공의 지혜(비상비비상처)를 발전시킨다. 수행자가 계

속해서 주의를 기울여 무상심삼매(animitta-cetosamādhi)에 들어

간다. 무상심삼매는 주의적으로 모든 상을 제거하면서 비움 상태

또는 공성을 체득함이다. 체득된 공은 我空이 아니라 일체공 즉

法空이다. 무색계를 체득한 수행자는 세계의 존재감에 대한 이해

를 하게 된다. 주석서에서는 허공, 식의 두 상이 무색계의 상이라

고 설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natthi kiñci)는 상에 대한 주석

은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주석서에 일체공에 대한 설명을 하고 싶

지 않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다. 일체공에 대한 개념을 주장하게

되면 法空을 강조하는 종파에 동조한다고 논자는 생각한다. 또한

이것은 전통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주석서가 쓰여 진 당시

에는 아직 초기불교의 法空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도 추정되기도 한다. 소공경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상심삼매에 머무르는 것이 일체공을 체득한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체공, 즉 法空을 나타내는 또 다른 경으로는『세계의 공경』(S

uññalokasuttaṃ)33)을 들 수 있다.

33) SN Ⅳ, p. 54.

 

‘세상은 공이다’라는 것은 전통적 가르침에 의하면 我空을 설하

는 것이다. 이 전통적인 것에서 벗어나면 法空의 개념을 볼 수 있

다. 세계를 空이라고 관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

계를 요소로 분석하여 그 각각의 요소를 空이라고 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계를 환상으로 보아 세계가 본질적으로는 空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두 개는 공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고 말하는 바로 그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이 我空이고,

우리의 경험세계인 世間그 자체를 공으로 보는 것이 法空이다.

 

세계의 공경의 내용을 주석하는무애도에 의하면 공은 25

가지로 나뉜다.34)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대부분은 我空이다. 마지

막 25번째로 언급한 勝義空은 ‘최상의 의미를 지닌 공’이다. 모든

번뇌를 소멸한 열반(anupādisesa parinibbāna)에 들어가는 자가

몸이 소멸이 되고 다시 몸에 합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승의

공은 몸과 세계를 떠난 비어 있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法空이다.

34) 공에 의한 공(空空), 형성력에서의 공(行空), 달라짐에 의한 공(變易空),
    최상의 공(最上空), 모습에서의 공(相空), 제거에 의한 공(消除空), 결정에
    의한 공(定空), 단절에 의한 공(斷空), 그침에 의한 공(止滅空), 벗어남에
    의한 공(出離空), 내부의 공(內空), 외부의 공(外空), 양쪽의 공(俱空), 같은
    부류로서의 공(同分空), 다른 부류로서의 공(異分空), 구함에 의한
    공(尋求空), 받아들임에 의한 공(攝受空), 획득에 의한 공(獲得空),
    꿰뚫음에 의한 공(通達空), 하나됨에 의한 공(一性空)·분산됨의
    공(異性空), 감내에 의한 공(忍空), 마음굳힘에 의한 공(攝持空), 몰입에
    의한 공(深解空), [모든 공성 중에] 최상의 의미를 지닌 공(勝義空).
    Patim, p. 260.

 

붓다는 세계의 모든 경험이 꿈과 같다고 한다.35) 꿈에서 깨어나

면 거짓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꿈을 꾸는 상태에서는 모든 대상

을 진실로 여긴다. 꿈에서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꿈에

서 만들어지는 주의적 형상이 온, 처, 계라고 할 수 있다. 잠이 깬

이후에는 주의적 형상이 거짓으로 밝혀진다. 정리해 보면 이 세계

와 몸은 주의적 형상이다. 결론적으로 我空, 法空으로 이 세계를

이해해야 된다.

35) MN I, p. 372.

 

연기법은 이런 모든 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초기불교의 전통

적인 사상으로 볼 때, 연기법을 아는 것이 곧 열반이다. 그러나『

고귀한 구함의 경』(Ariyapariyesana-sutta)36)에 의하면 붓다께서

열반과 연기는 별개의 것이라고 설한다. ‘이것이 생겼으므로 저것

이 생겼다’는 연기법도 알기 어려운 심오한 것이고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제거함, 사라짐,소멸의 열반도

얻기 어려운 심오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이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설하는 연기법은 我空을

해석하고 있다. 온, 처, 계는 ‘나’ 와 ‘나의 속하는 것’이 없는 무아

를 가르친다. 두 번째 알기 어려운 것으로 가르치는 열반을 여섯

단어로 해석하고 있다. 즉 1.모든 형성(samkhāra)의 그침 2.집착

의 버림 3.갈애의 제거함 4.사라짐 5.소멸 6.열반이 그것이다. 이

여섯 단어로 해석하고 있는 열반은 번뇌(탐, 친, 지)없음을 의미한

다. 여기서 설하는 것은 我空이 아니라 바로 法空이다.

36) MN I, p. 160. 주석서에서는 새끼줄더미(Pāsarāsi-sutta)라는
    이름으로 말한다.

 

다시 정리해보면 연기법은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

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지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식을 바탕으로 제법의 인연에 따

른 화합을 가리킨다. 세간의 제법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멸하는

것처럼 경험된다. 그 경험하는 세계는 공이다. 法空이라는 입장에

서 보면 세간의 제법은 생겨날 때에는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에는 가는 곳이 없다. 즉 경험세계인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이

공인 것이다. 결국 제법은 세간의 입장에서는 있지 않는 것이 아

니지만[非不有], 공의 입장에서는 있는 것이 아니다[非有]. 그러므

로 나와 나의 것도 세간의 제법으로는 있는 듯하지만, 그 경험세

계는 공이고 그것은 바로 法空을 뜻한다.

 

2.대공경(Mahāsññatā-sutta)의 고찰

대공경에서는 공에 머무르는 것과 공을 어떻게 성취하는 가

에 대해서 설한다. 이 경에 의하면 붓다가 오실 때, 아난다와 많은

비구들이 함께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그 때 붓다께서 다음과 같

이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비구가 모임을 즐기고 모임의 즐거움에 빠지고 모임의

즐거움에 탐닉하고, 무리를 즐기고 무리의 즐거움에 빠지고 무리의 즐

거움에 탐닉한다면, 빛나지 않는다.37)

37) Na kho ānanda, bhikkhu sobhani saṅgaṇikārāmo saṅgaṇikārato
    saṅgaṇikārāmataṃ anuyutto gaṇārāmo gaṇarato gaṇasammudito. So
    vatānanda, bhikkhu saṅgaṇikārāmo saṅgaṇikārato saṅgaṇikārāmataṃ
    anuyutto gaṇārāmo gaṇarato gaṇasammudito. MN I, p. 110.

 

이와 같이 모임을 즐기는 비구는 네 가지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아난다여, 비구가 홀로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 지낸다면, 뜻한 바대

로 곤란이나 어려움 없이, 벗어남의 즐거움, 멀리 여읨의 즐거움, 적정

의 즐거움, 올바른 깨달음의 즐거움을 성취하겠다는 것은 타당하다.38)

38) Yaṃ taṃ nekkhammasukhaṃ pavivekasukhaṃ upasamasukhaṃ
    sambodhasukhaṃ tassa sukhassa nikāmalābhī bhavissati akicchalābhī
    akasiralābh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MN I, p. 110.

 

여기서 언급되는 것과 같이 모임을 즐기는 비구는 벗어남의 즐

거움(nekkhammasukhaṃ), 멀리 여읨의 즐거움(pavivekasukhaṃ),

적정의 즐거움(upasamasukhaṃ), 올바른 깨달음의 즐거움(sambo

dhasukhaṃ)을 얻을 수 없다. 이 때, 이 네 가지를 무슨 이유로 벗

어날 수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벗어남(nekhamma)이란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39)

욕망을 벗어나면 어디에나 걸림 없는 행복을 얻는다. 멀리 여읨(p

aviveka)은 모임에서 벗어나는 것,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 바쁜 일

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행복해진다.

적정(upasama)이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뇌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깨달음(sambodha)이란 도과(magga

-phala)에 이르는 행복을 말한다. 따라서 모임을 즐기고 모임의 즐

거움에 빠지고 모임의 즐거움에 탐닉하고 있는 것은 위에 언급된

네 가지 행복을 얻을 수 없다.

39) nekkhammanti kāmānametaṃ nissaraṇaṃ yadidaṃ nekkhammaṃ.
     Patim, p. 245.

 

여기서 붓다는 네 가지 행복에 이르는 길로 공에 머무는 것을

설한다. 붓다가 공에 머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하는 것은

맛지마 니까야의교리문답의 큰 경(mahāvedallla-sutta)에 나타

나 있다. 이 경은 ‘사리뿟따’와 ‘꼬띠까’의 대화로 이어진다.

 

벗이여, 비어있는 空心解脫(suññatā cetovimutti)이란 무엇입니까?

벗이여,이 승단에서 비구가 숲 속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 집으로 가서 이렇게 성찰합니다. 나와 나에게 속하는 것에 의해서

이것이 비어 있다고. 벗이여, 이것을 비어있는 공심해탈이라고 합니다.40)

40) Katamā cāvuso suññatā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iti paṭisañcikkhati: suññamidaṃ
     attena vā attaniyenavāti. Ayaṃ vuccatāvuso suññatā cetovimutti. MN
     I, p. 298.

 

이와 같이 해탈은 모든 것을 나와 나에게 속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며 갖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머무르는 것이 곧 공에

머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맛지마 니까야의탁발 음식의 전화에 대한 경(Piṇdapārisudd

hi-sutta)에 의하면 空에 머물기 위해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 번뇌의 비워짐을 위해 닦아야 할 것으로 사념처, 사

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와 사마타, 위빠사나까

지 언급된다. 이 경에 언급된 영지와 해탈에 대한 설법은소공경

에서 말하는 번뇌의 완전한 비워짐과 같다. 그 뿐만 아니라 ‘비

어있음(suññatā)에 머무름’은 ‘대인의 머무름’(mahāpurusa vihāra)

이다.

 

‘싸리뿟따여’, 그대의 감각은 청정하며 피부는 깨끗하고 밝다. ‘싸리

뿟따여’, 그대는 많은 시간 동안 어떤 머무름에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비어있음’(suññatā)에 많은 시간 동안 머물러 있습니다.

‘좋구나!’ ‘좋구나!’ ‘싸리뿟따여’, 그대는 ‘대인의 머무름’에 많이 머

물러라. ‘싸리뿟따여’, ‘대인의 머무름’이란 ‘비어있음’(空, suññatā)에

머무름을 말한다.41)

41) Vippasannāni kho te sāriputta, indriyāni parisuddho chavivaṇṇo
    pariyodāto. Katamena kho tvaṃ sāriputta, vihārena etarahi bahulaṃ
    viharasīti: ‘Suññatā vihārena kho ahaṃ bhante, etarahi bahulaṃ
    viharāmī’ti. Sādhu sādhu sāriputta, mahāpurisavihārena kira tvaṃ
    sāriputta, ekarahi bahulaṃ viharasi.‘Mahāpurisavihāro hesa sāriputta,
    yadidaṃ suññatā. MN Ⅲ, p. 294.

이 경에서 붓다가 설파한 공의 머무름이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걸식하러 갈 때, 돌아올 때 열망,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는가?42)

42) yena cāhaṃ maggena gāmaṃ piṇḍāya pāvisiṃ. Yasmiñca padese
    piṇḍāya acariṃ, yena ca maggena gāmato piṇḍāya paṭikkamiṃ. Atthi
    me tattha cakkhuviññeyyesu rūpesu chando vā rāgo vā doso vā moho
    vā paṭighaṃ vāpi cetaso’ti. MN Ⅲ, p. 294.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 사라졌는가?43)

43) Puna ca paraṃ sāriputta, bhikkhunā iti paṭisañcikkhitabbaṃ: ‘pahīnā
    nu kho me pañca kāmaguṇā’ti. MN Ⅲ, p. 295.

 

다섯 가지 장애가 사라졌는가?44)
44) Puna ca paraṃ sāriputta, bhikkhunā iti paṭisañcikkhitabbaṃ: ‘pahīnā
    nu kho me pañca nīvaraṇā’ti.

 

다섯 가지 취착된 무더기들(오취온)을 철저하게 알았는가?45)

45) Puna ca paraṃ sāriputta, bhikkhunā iti paṭisañcikkhitabbaṃ: ‘pariññātā
    nu kho me pañcupādānakkhandhā’ti.

 

사념처, 사정근,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가 개발되었는가?46)

46) Puna ca paraṃ sāriputta, bhikkhunā iti paṭisañcikkhitabbaṃ: ‘bhāvitā
    nu kho 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ti … cattāro sammappadhānā’ti …
    cattāro ddhipādā’ti … pañcindriyānī’ti … pañcabalānī’ti …
    sattabojjhaṅgā’ti … ariyo aṭṭhaṅgiko maggo’ti.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개발되었는가?47)

47) Puna ca paraṃ sāriputta, bhikkhunā iti paṭisañcikkhitabbaṃ: ‘bhāvitā
    nu kho me samatho ca vipassanā cā’ti. MN Ⅲ, p. 297.

 

영지와 해탈이 깨달아졌는가?48)

48) Puna ca paraṃ sāriputta, bhikkhunā iti paṭisañcikkhitabbaṃ:
    ‘sacchikatā nu kho me vijjā ca vimutti1 cā’ti.

 

이것들은 두 가지 단계의 머무름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육경에서 열망,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마음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것에서 벗어난 사람이 그것에

기뻐하고 다섯 가지 장애, 다섯 가지 취착된 무더기들(오취온)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기 위한 머무름이다. 둘째는 사념처, 사정근,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사마타와 위빠사나, 지혜와 해탈을 개

발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머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악행(akusal

a)에서 벗어나고 선행(kusala)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법구경』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

다.49) 경의 마지막에서 붓다는 공에 머무르는 것을 강조한다.

49) Sabbapāpassa akaraṇaṃ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
    pariyodapanaṃ etaṃ buddhāna sāsanaṃ. Dhp. Vs. 183, p. 28.

 

비구들이여, 과거, 현재, 미래를 이렇게 반조하여 ‘비어있음(空, suññ

atā)’에 머무른다.50)

50) Evaṃ hi vo sāriputta. Sikkhitabbanti, MN Ⅲ, p. 298.

空性의 意義에 의하면『탁발 음식의 정화에 대한 경』에서는『
소공경』과 달리 공성의 머무름이라고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
하지 않고 있다. 여래가 ‘현등각의 머무름이’ ‘무상심삼매’에 의해
서 ‘공성을 성취해 머무른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소공경』에서 공성의 머무름과 같은 경계를 문제 삼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공성의 머무름’은
현실적으로는 원리, 독주가 어려운 수행 생활 속에서 처음 실현되
는 것이다. 즉 실천적, 체험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진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51)
51) 藤田宏達(1982) p. 454.

 

탁발 음식의 정화에 대한 경뿐만 아니라 율장에서도 공에 머

무르는 것을 ‘대인의 머무름’이라고 칭한다. 그 내용은 거기에서

‘삿바까미’(Sabbakāmi)비구가 방문한 ‘레바타’(Revata)와의 대화에

서 찾아 볼 수 있다.

 

당신은 어떤 머무름에 오래 머물고 있습니까?

저는 자비주에 오래 머물고 있다. 벗이여, 당신은 지금 가정적인 머

무름에 오래 머물고 있다. 벗이여, 이 가정적인 머무름이라는 것은 자

비인 것이다. 벗이여, 저는 이전에 집에 있었을 때도 자비를 실천했다.

저는 아라한이 되어서 온 적이 오래 있었지만 지금도 자비주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이다.

존자여, 그럼 ‘삿바까미’는 지금 어떤 머무름에 머물고 있습니까?

벗이여, 저는 지금 공성의 머무름에 오래 머물고 있다. 존자여 ‘삿바

까미’ 지금 대인의 머무름에 머물고 있다. 이 대인의 머무름이란 곧 공

성인 것이다. 벗이여, 이전에 재가자였을 때도 공성을 실행했었다. 그

러므로 나는 아라한이 되어서 은근히 오래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공성

의 머무름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이다.52)

51) 藤田宏達(1982) p. 454.

 

탁발 음식의 정화에 대한 경소공경과 직접적으로 연관

된 설법이다.소공경은 번뇌의 비워짐 부분을 강조하여 설법하

였다. 한편,탁발 음식의 전화에 대한 경에서는 그러한 번뇌의

비워짐을 위해 닦아야 할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와 사마타, 위빠사나의 개발까지 언급하였다. 이 경

에서 영지와 해탈에 대한 설법은소공경에서 말하는 번뇌의 완

전한 비워짐에 대한 말씀과 같은 것이다.

 

붓다에 의하면, 공성이란 [특별히] 보는 것으로(suññatānu pass

anā), 관찰한다(samanupassati)라고 표현한 경우도 있다. 다른 말

로 하면 나와 나에게 속하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란 의

미를 가진다.말룽끼야뿟따에 대한 큰 경(Mahāmālunkya-sutta)

에 의하면 공성을 관찰하는 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떠나 五下分

結(orambhāgiyaṃ saṃyojana)53) 상태를 버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53) ①유신견(有身見), ②의(疑), ③계금(戒禁), ④탐(貪), ⑤진(瞋)이다.

 

그는 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수로 이루어진 것이, 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 법이(오온) 무

상하고 괴롭고 질병이고 암이고 화살이고 고통이고 병환이고 소외된

것이고 붕괴된 것이고 텅 빈 것이고 ‘내가 아닌 것’으로 관찰한다.54)

54)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MN I, p. 436.

 

붓다는 위의 가르침을디가나카의 경Dīghanakha-sutta)에서

‘디가나카’에게도 설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위와 같이

관찰하는 자가 몸에 있어서 몸에 대한 욕망, 몸에 대한 애착과 몸

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난다고 한다.55) 이 뿐만 아니라 마하꼿티떠

가 “벗이여 사리뿟따여, 잘 배운자인 비구들이 어떤 가르침, 지혜

로운 如理作意을 가져야 합니까?”(sutavatāvuso sāriputta, bhikkh

unā katame dhammā yoniso manasikātabbāti?)56)라는 질문에 사

리뿟따가 대답하며 오온을 위와 같이 11가지로 관찰해야 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이 관찰 방법이 여러 경에서 언급된다.

56) MN Ⅲ, p. 169.

 

특히『대공경』에서는 공을 두 가지로 구별한다. 마음에서 일어

나는 번뇌를 두 가지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첫째는 내적공이다.

내적공은 我空의 개념을 말한다. 둘째는 외적공이다. 이는 만남,

모임 같은 외적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공한 마음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 공한 마음이 法空의 마음이다.

 

붓다는 이 공성을 매우 심오한 가르침으로 보았다. 이 심오한

가르침을 모르면 수행자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공성을 체득

하지 않고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아니경(Ā

ṇi-sutta)57)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공성에 대해 잘 듣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슬기로운 마음을 내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공

성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고 배우지 않는 것은 위대한 가르침인

공성이 사라짐을 초래한다고 한다.58) 또한 심오한 공과 상응하는

법문을 소홀히 하면 불법이 타락하게 된다고 예견한다. 그렇다면

我空만이 붓다가 강조하는 것인가? 붓다가 무아라는 단어를 사용

했다면 알기 쉬웠을 것이다. 따라서 논자는 붓다가 我空만 공성으

로 본 것이 아니라대공경,소공경등의 경전에서 나타나는 일

체공, 즉 法空의 의미도 이에 포함시켰다고 본다. 니까야에서 我空

만이 오직 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法空이 언급되어 있

지 않은 것은 주석서가 그 전통에 따르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57) SN I, p. 267.
58) tathāgatabhāsitānaṃ gambhīrānaṃ gambhīratthānaṃ lokuttarānaṃ
    suñña
    말씀하신 심오하고 심오한 의미와 출세간의 의미가 포함된 공성이
    경전에서 사라지게 된다.) SN I, p. 267.

 

초기불교에서 공성은 열반에 이르는 하나의 길, 번뇌가 소멸되

어 비워 있음, 꼭 배우고 연구해야 되는 주제 등의 개념들로 나타

나고 있다. 특히 我空과 法空은 잘 정리되어 있는 핵심적인 가르

침이라고 할 수 있다.

 

Ⅳ. 결론

 

붓다는 ‘공성을 아는 자는 주의 깊은 사람’이며 ‘연기가 바로 공’

이라고 주장했다. 용수의 중관사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원인과 결

과, 운동과 변화, 사물과 그 속성, 我와 我所, 전체와 부분 등 온갖

대립적 관계에 공성의 논리를 적용하여 논파한다. 아비달마적인

五蘊과 그 밖의 교설뿐 아니라 여래나 열반과 같은 최고 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공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용수의 중관사

상은 아비달마 철학의 다원론적 실재론 비판에만 그치지 않고 불

교철학 일반까지도 포함한다.

 

후대에는 중관파에 대한 비판이 다시 제기된다. 공성을 주장하

는 중관학파 논사에게는 자기주장으로서의 定言이 있을 수가 없

다. 공성에 대한 자기주장은 空見일 수는 있어도 空觀은 아니다.

공의 변증론은 ‘공이 있음을 주장한 것’[空見]이 아니라, 그런 정언

을 내세우기 이전에 이미 본래 공성임을 세간의 논리로 알릴뿐이

다. 공관의 입장은 ‘무입장의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도 써서의 공은 유와 무를 초월

하기 때문에 유는 곧 무이다. 마찬가지로 生死는 자성으로서의 생

사가 아니고, 열반 역시 자성으로서의 열반이 아니기 때문에 생사

는 그대로 生死卽涅槃이자 공성이다.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사상이 초기불교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

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공’으로 표현되는

사상을 탐구한 결과, 붓다의 교설 가운데 ‘공’은 중요한 용어로 적

지 않게 사용된다.

 

맛지마 니까야의대공경소공경』은 초기불교에서 전개된

공관의 논리를 보여준다. 동일한 니까야에서 설파되는 我空과 法

空의 전개와 일체공의 교설은 대승불교에 전해져 二空과 一切空등

대부분의 중요한 대승공관을 형성한다. 초기불교로부터 대승불교

의 공관의 전개는 무수한 논리의 단계적 발전을 보여주지만, 이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