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 불교에서 재가자의 깨달음에 대한 재고 -깨달음의 세 가지 특성들과 관련하여/김한상

실론섬 2018. 8. 20. 20:21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4호(2018.3) pp. 49∼74

초기 불교에서 재가자의

깨달음에 대한 재고

-깨달음의 세 가지 특성들과 관련하여

김한상/한국외국어대학교 HK연구교수

 

I. 들어가는 말

II. 깨달음의 보편성

III. 깨달음의 다면성

IV. 깨달음의 순차성

V. 나가는 말

 

[요약문]

이 논문은 초기 불교에서 재가자의 깨달음(bodhi)을 깨달음의 세 가지 특성들인 보편

성, 다면적 과정, 점진적 과정과 연관시켜서 재조명해보려는 시도이다. 일부 학자들은

재가자가 이번 생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며 그들의 종교적 이상은 선하게 살고 출가

자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함으로써 하늘에 재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지

만 이는 오해이다. 깨달음은 헌신이나 신의 은총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물들을 있는 그

대로 보는 바에 달려 있으므로 사중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깨달음은 열반이나 해탈

과 같이 수행의 결과를 뜻하는 용어들과 대개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관행이지만 의미적으로는 이들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깨달음은 7각지(七覺支, satta-

bojjhaṅga)로 이루어져 있으며,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sattatiṃsa bodhipakkhiyā-

dhammā)의 완성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간주된다. 이러한 사실은 7각지와 37조도품이 

수행도에서 한 순간의 통일된 최고점이라는 의미보다는 확장된 과정이라는 의미에서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이는 깨달음이 순간적인 직관이 아니라 

차적 공부(anupubba-sikkhā)의 마지막 단계로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 이러

한 이유에서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차제설법(次第說法, anupubbī-kathā)을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붓다의 차제설법은 재가자에게 하늘로 가는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

달음의 길로 이끌어주기 위한 유일한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재가자가 완전한 깨달음

인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다는 주장은 초기 불교의 텍스트들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다. 붓다는 재가자들도 이번 생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점에

서 출가자와 재가자로 구성된 사중의 사회적 구분은 정신적 구분이 아니며, 모든 사람

들이 동일한 종교적 목표를 공유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상정은 초기 불교에도 완전히

적용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I. 들어가는 말

 

불교 공동체인 사중(四衆, cattāro purisā)은 비구(bhikkhu)와 비구니(bhikkhunī)

의 출가자와 우바새(upāsaka)와 우바이(upāsikā)의 재가자로 구성되어 있다. 편

력 수행자 왓차곳따(Vacchagotta)가 붓다에게 밝힌 대로,1) 사중은 모두 깨달음

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 다만 출가자는 지름길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신

속하게 나아가며 재가자는 돌아가는 길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서서히 나아간

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의 「마하빠

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sutta)」에 따르면, 붓다는 자신이 확립한 사중

의 각 구성원들이 ‘입지가 굳고 수행이 되고 출중할(vyattā vinītā visāradā) 때까

지는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2) 이 구절은 출가자와 재가자로 구

성된 사중의 존재가 불교3)의 확장과 번영에서 필수적이며, 사중은 모두 깨달

음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

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깨달음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정작 깨달음이 무엇이고, 그것이 해탈(解脫, vimutti/

vimokkha)과 열반(涅槃, nibbāna)과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냐나포니카 테라(Nyanaponika Thera,

1901-1994)가 말한 대로, 개념들과 용어들의 정립은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사

고와 행동의 필수적 근간이다.4) 이는 학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

므로 우리는 먼저 깨달음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음은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의 개인적 체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고타마 싯

닷타(Gotama Siddhatta)는 아삿타 나무(assattha-rukkha) 밑에 앉아서 깨달은 사

람, 즉 ‘붓다(Buddha)’가 되었고 그 뒤로 그 나무는 ‘깨달음의 나무’인 보리수

(bodhi-rukkha)로 불리게 된다. 빨리 성전에서 깨달음은 다양한 용어들로 표현

된다.5) 그러한 용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용어가 보디(bodhi)6)이다. (앞으

로는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하여 ‘깨달음’과 ‘보디’라는 용어들을 함께 사용하

기로 한다.) 빨리 성전에서는 그 변형으로서 삼보디(sambodhi)라는 용어도 사

용되고,7) 빳쩨까 붓다(pacceka-Buddha)와 아라한(arahant)의 깨달음과 구별되

는 붓다의 깨달음을 가리키기 위해서 아비삼보디(abhi-sambodhi)8)와 삼마삼보

디(sammā-sambodhi)9)라는 용어들도 사용되고,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이란 뜻의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sammā-sambodhi)라는 용어도 사용된

다. 불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중이 깨달음을 최종 목표로 한다는 점은 분명하

지만 우바새와 우바이로 구성된 재가자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런데 그러한 견해들 대부분이 재가자가 깨달음을 얻을 수 없

다거나 재가자의 종교적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라 좋은 재생이라는 잘못된 상

정에 기반에 두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독일의 막스 웨버(Max Weber, 1864-

1920)는 재가자가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출가자를 후원하는 것

을 유일한 목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10) 벨기에의 라 발레 뿌생(La Vallée

Poussin, 1869-1938)은 재가자가 아무리 믿음이 깊고 보시를 잘하고 계를 잘 지

키고 격주마다 포살(布薩, upavāsa)의 금욕과 절제를 실천하더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11) 벨기에의 에띠엔 라모뜨(Étienne Lamotte,

1903-1983)도 재가자의 이상은 출가자의 이상보다 낮으며 재가자는 신들의 세

계나 인간의 세계에 좋은 조건으로 재생하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인

도하는 길은 깨달음에 이르는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maggo)가 아니

라 신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떠나 각자의 천상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

준 공덕(puñña)의 실천이라고 말한다.12) 마찬가지 관점에서 스리랑카의 프레

마시리(P.D. Premasiri)도 재가자가 팔정도를 완벽하게 계발할 수만 있다면 깨

달음을 얻을 수 있지만 재가자의 삶과 이에 따르는 책임감들은 더 높은 정신적

삶의 요구 조건들을 충족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말한다.13) 스리랑카의 위타나

츠치(C. Witanachchi)는 재가자의 이상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 죽고서 좋은

재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14) 영국의 리처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는 붓다는 재가자가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을 것이며, 이생에서

열반을 얻은 어떠한 재가자도 없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5)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종교적 목표

를 공유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상정이 불교에는 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고 말한다.16) 본연구는 이러한 종전의 시각에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면서 깨달

음의 세 가지 특성들인 보편성, 다면성, 순차성을 통해서 재가자의 깨달음의

문제를 재조명해보려는 시도이다.

1) MN.I, p.493, “Seyyathā pi bho Gotama Gaṅgā nadī samuddaninnā samuddapoṇā samuddapabbhārā
   samuddaṁ āhacca tiṭṭhati. evam-evāyaṁ bhoto Gotamassa parisā sagahaṭṭhapabbajitā nibbānaninnā
   nibbānapoṇā nibbānapabbhārā nibbānaṁ āhacca tiṭṭhati.” ; 雜阿含經卷34 (大正藏2, 247a15-18), “婆
   蹉白佛。如天大雨。水流隨下。瞿曇法.律亦復如是。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若男。若女。
   悉皆隨流。向於涅槃。浚輸涅槃。”
2) DN.II, p.104.
3)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본 논문에서의 불교는 ‘초기 불교(Early Buddhism)’를 말한다. 초기 불교는,
   문헌적으로 남전의 4부 니까야와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āya)의 일부, 「빠리와라(Parivāra)」
   를 제외한 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 전부, 그리고 북전의 한역 아함경(阿含經)과 광율(廣律)
   에 의거한 불교이다. 연대적으로 초기 불교는 붓다 당시부터 서력 초기까지의 불교로 정의할 수
   있다. 필자는 그 기준점인 붓다의 반열반(般涅槃, pari-nirvāṇa)이 기원전 400년에서 350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초기 불교라고 칭할 때 필자는 오늘날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존재하는
   테라와다 불교와 동일한 형태의 불교를 의미하지 않는다.
4) Nyanaponika Thera. Abhidhamma Studies: Buddhist Explorations of Consciousness & Time (Boston:
   Wisdom Publications, 2015), pp.4-5.; 냐나포니카 테라, 김한상 옮김, 아비담마 연구: 마음과 시간
   에 대한 불교적 탐구 (서울: 씨아이알, 2016), p.8.
5) 깨달음을 나타내는 다양한 용어들 각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임승택, 「초기불
   교 경전에 나타난 돈(頓)과 점(漸)」, 불교학연구 제32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12), pp.90-98.
6) 보디(bodhi)는 √budh(to awaken, to know)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중국에서는 菩提라고 음역되
   거나 覺이나 道 등으로 의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enlightenment와 awakening으로 번역된다. 
7) 예컨대, SN.I, p.181, MN.I, pp.17, 163, Sn.693,696게.
8) Ja.I, p.14.
9) DN.II, p.83.; SN.I, p.68., Vin.I, p.11.
10) Max Weber, Religion of India: The Sociology of Hinduism and Buddhism (Illinois: The Free Press, 
    1960), p.214.
11) La Vallée Poussin, Louis de. The Way to Nirvāṇa: Six Lectures on Ancient Buddhism as a Discipline      

      of Salvation (Delhi: Sri Satguru Publications, 1987), pp.150-151.
12) Lamotte, Étienne. History of Indian Buddhism: From the Origins to the Śaka era (tr. by Sara Webb-
    Boin) (Louvain-Paris: Peeters Press, 1988), p.67.
13) Premasiri, P.D. “Ethics” in Encyclopaedia of Buddhism V (Colombo: The Government of 
    Sri Lanka, 1990), p.162.
14) Witanachchi, C. “Upāsaka, Upāsikā” in Encyclopaedia of Buddhism VIII (Colombo: The 
    Government of Sri Lanka, 1990), p.432.
15) Gombrich, R.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6), p.75.
16) Ibid., p.76

 

II. 깨달음의 보편성

 

깨달음의 보편성은 붓다와 제자 간의 깨달음에는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이

도 없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붓다는 사르나트(Sarnath)의 사슴동산

(Migadāya)으로 가는 길에 만난 우빠까(Upaka)라는 아지와까(ājīvaka)에게 루

의 소멸(漏盡, āsavakkhaya)을 이룬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과 같은 승리자

(jina)라고 선언하였다.17) 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의 「마하왁가(Māha

vagga)」에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직후 사슴동산에서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의

설법을 통해서 다섯 비구들(Pañca-vaggiya)18)을 아라한의 경지로

인도한 뒤에 “이제 이 세상에는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선언하였다.19) 

는 이 세상에 붓다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존재하게 되었다

는 말로서 깨달음에 있어서 붓다와 아라한은 동격임을 나타낸다. 붓다도 모든

번뇌(煩惱, kilesa)와 루(漏, āsava)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아라한이라고 불린

다.20) 이와 같이 붓다와 제자 간의 깨달음에는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이도 없

다.21) 다만 붓다는 처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밟은 선구자이자 열반이라

는 도시로 가는 옛길(purānam añjasaṃ)을 발견한 사람이고 아라한은 붓다가 밟

은 동일한 길을 따라서 동일한 경지를 얻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22)

17) Vin.I, p.8; MN.I, p.171, “mādisā ve jinā honti ye pattā āsavakkhayaṃ, jitā me pāpakā dhammā 
    tasmāham Upaka jino ti.”
18) 이 용어는 불특정한 다섯 명의 비구를 뜻하는 명사가 아니라 붓다의 첫 출가 제자가 된 꼰단냐
    (Koṇḍañña)를 위시한 특정한 다섯 비구를 뜻하는 고유명사이다.
19) Vin.I, p.14, “tena kho pana samayena cha loke arahanto honti.”
20) 그래서 여래 10호 가운데 하나가 아라한이다.
21) 다만 후대 빨리 문헌인 우빠사까자나랑까라(Upāsakajanālaṅkāra)는 깨달음(bodhi)을 삼마삼보
    디(sammā-sambodhi), 빳쩨까보디(pacceka-bodhi), 사왁까보디(sāvaka-bodhi)의 세 가지로 구분하
    고 있다. (Upās. pp.202-203) 이러한 구분법의 기원은 상대적으로 후기의 빨리 성전인 쿳다까빠타
    (Khuddakapāṭha)의 「니딕깐다 숫따(Nidhikkaṇḍa-sutta)」에서 제자의 바라밀(sāvaka-pāramī), 빳쩨
    까의 깨달음(pacceka-bodhi), 붓다의 경지(buddha-bhūmi)라는 세 가지 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
    인다. (Khp. p.7) 그리고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에 대한 주석서에서는 지혜(ñāṇa)가 제자의
    바라밀의 지혜(sāvaka-pāramī-ñāṇa), 빳쩨까붓다의 지혜(pacceka-buddha-ñāṇa), 일체지자의 지혜
    (sabbaṇṇuta-ñāṇa)의 세 가지로 구분되기도 한다. (Sv.I, p.100) 그러나 이러한 분류법은 초기 불교의
    텍스트들에는 찾아볼 수 없다.
22) SN.II, p.105; SN.V, p.160 f; MN.III, p.8. 이 점은 테라가타(Therīgāthā)에서 아라한이 붓다를 따라
    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란 뜻인 ‘붓다누붓다(buddhānubuddhā)’로 묘사되는 것에서도 증명된
    다. (Th. p.111) 물론 처음부터 붓다는 이미 제자들과는 차별되는 특출한 존재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었다. 예컨대 붓다에게는 4무애해의 지혜(catu-paṭisambhidā-ñāṇa), 모든 것을 아는 지혜
    (sabbaññūtañāṇa), 10력(十力, dasa-balāni), 4무외(四無畏, cattāri-vesārajjāni/catu-vesārajja)와 
    같이 제자들에게는 없는 특출한 정신적 능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eg. SN.II, p.27) 그러나 
    이는 붓다만의 특출한 정신적 능력을 말함이지 붓다의 깨달음과 제자의 깨달음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깨달음의 보편성은 깨달음이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ñāṇa-dassana)

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Nikāya)

의 「담마짝까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avattana-sutta)」에서 붓다는 다섯

비구들(Pañca-vaggiyā)에게 사성제(四聖諦, cattāri-ariya-saccāni)에 대한 여실지

견이 12가지 양상으로 완벽하게 되었으므로 신들과 마라들과 범천들을 포함

한 세계에 자신의 깨달음을 자신 있게 선포하였다고 말했다.23) 붓다는 전에 들

어보지 못한 법들에서 눈이 생기고(cakkhum udapādi), 앎이 생기고(ñāṇam udapādi),

지혜가 생기고(paññā udapādi), 명지가 생기고(vijjā udapādi), 빛이 생겼다(āloko

udapādi)24)고 밝히면서 12가지 양상 각각에서 동일한 일련의 용어들로서 여실

지견을 묘사하고 있다.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마하삿짜까 숫

따(Mahāsaccaka-sutta)」에 따르면, 깨달음을 이루던 날 밤에 붓다는 루(漏, āsavā)

의 일어남과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고 말

한다.25)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쭐라삿짜까 숫따(Cūḷasaccakasutta)」에서

붓다는 악기웨사나(Aggivessana)에게 자신의 제자는 오온(五蘊,pañcakkhandha) 

각각을 무아(無我, anattā)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evaṃ 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취착 없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

한다.26)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의 「브라흐마잘라 숫따(Brahmajāla-sutta)」

는 붓다가 느낌들(vedanā)의 일어남, 사라짐, 위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

하게 앎으로써 궁극적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7) 니까야의 다른 경

들도 붓다가 다양한 영역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게 되었을 때(yathābhūtaṃ

abhaññāsiṃ)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선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28) 뿐

만 아니라 빨리 성전에서 깨달은 사람은 “올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는

(yathabhūtaṁ sammappaññāya passato)”29)이라고 표현된다. 이처럼 깨달음은 여

실지견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의해서 구구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다.30) 하지만 남방의

테라와다 불교는 그것이 사성제(四聖諦, cattāri-ariya-saccāni)와 관련된 지혜와

봄(ñāṇa-dassana)의 증득이라는 입장이다.31) 이는 붓다고사(Buddhaghosa)의 설

명32)에 입각한 것이지만 초기 불교의 텍스트들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설명

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Nikāya)의 「담마짝까

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avattana-sutta)」에 따르면, 보디는 사성제(四聖

諦, cattāri-ariya-saccāni)와 관련된 지혜의 증득을 뜻한다.33) 맛지마 니까야

(Majjhima-Nikāya)의 「바야베라와 숫따(Bhayabherava-sutta)」,34) 「드웨다위딱

까 숫따(Dvedhāvitakka-sutta)」,35) 「마하삿짜까 숫따(Mahāsaccaka-sutta)」,

36)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37)에서도 사성제의 통찰을 통해서

루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 āsavānaṃkhaya-ñāṇa)를 완성해서 깨닫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사물・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앎으로써 궁

극적 지혜(aññā)나 구원의 지혜(knowledge of salvation)38)를 성취한 상태를 가

리킨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다. 왜냐하면 그것은 깨달음이 헌신(bhakti)이나 신의 은총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물・현상들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ṃ) 보는 바에 달려 있기 때문에 사중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39) 사중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점은,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출가자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열려 있음을 뜻한다. 물론 깨달음에 이르는 길

이 지름길인지 돌아가는 길인지는 별개 문제이다. 요컨대 깨달음의 보편성은

붓다와 제자들 간의 깨달음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과 깨달음이 사

물・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앎으로써 궁극적 지혜나 구원의 지혜를 성취한 상태

라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밖에도 깨달음의 보편성을 뒷받침하는 문

구는 빨리 성전 곳곳에서 발견된다. 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의 「

기라나 숫따(Gilāna-sutta)」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3) SN.V, p.423,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 ath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paccaññāsiṃ. Ñāṇañca pana me dassan
    udapādi: akuppā me 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ti.”
24) Vin. I, p.11.; SN.V, pp.178-179, p.258, p.422, p.424, p.425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25) MN.I, p.249.
26) MN.I, pp.234-235, “Idh’ Aggivessana bhikkhu yaṃ kiñci rūpaṃ (yā kāci vedanā, yā kāci saññā, 
    ye keci saṅkhārā, yaṃ kiñci viññāṇ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l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rūpaṃ (pe 
    viññāṇaṃ):    n’ etaṃ mama, n’eso ‘ham asmi, na meso attā ti evaṃ 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anuppādā vimutto hoti.”
    雜阿含經 卷5 (大正藏2, 36c15-22), “佛告火種居士。我為諸弟子說諸所有色。若過去.若未來.若現
    在。若內.若外。若麁.若細。若好.若醜。若遠.若近。彼一切如實觀察非我.非異我.不相在。
    受.想.行.識亦復如是。彼學必見跡不斷壞。堪任成就。厭離知見。守甘露門。雖非一切悉得究竟。
    且向涅槃。如是弟子從我教法。得離疑惑。”
27) DN.I, p.17, “vedanānaṃ samudayañ ca atthagamañ ca assādañ ca ādinavañ ca nissaraṇañ ca 
    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 vimutto, bhikkhave, Tathāgato.”
28) 예컨대 SN.II, pp.170, 172.; SN.III, pp.28, 29.; SN.IV, pp.7,8,9,10,206.; SN.V, p.204.; AN.I, p.259. 
    여실지견에 대해서는 Anālayo (2007: 791-797) 참조.
29) SN.II, p.17; III, p.135.
30) 자칫하면 본 논문의 주제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 깨달음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학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임승택, 「초기경전에 나
    타나는 궁극 목표에 대한 고찰」, 불교학연구 제19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8), pp.49-80.
31) 예컨대 냐나틸로카는 깨달음을 ‘번뇌에 의한 잠이나 혼수상태로부터 깨어나는 것과 사성제를 이
    해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Nyanatiloka 2004: 41)
32) 붓다고사는 앗타살리니(Atthasālinī)에서 이렇게 말한다. “깨닫는다(bujjhatī)는 것은 번뇌의 상
    속(kilesa-santāna)이라는 잠으로부터 일어선다, 혹은 성스러운 진리들(ariya-saccāni)을 꿰뚫는다,
    혹은 열반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As. pp.217-218.) 이와 유사한 설명이 붓다고사의 다른 주석서
    에서도 보인다. “혹은 그는 마음챙김(sati) 등의 일곱 가지 법들의 조화 때문에 깨닫고 번뇌의 잠
    (kilesa-niddā)에서 깨어나거나 진리들(saccāni)을 통찰한다, 그러므로 그 법의 조화로움
    (dhammasāmaggī)이 깨달음이다.” (Ps.I, p.289.)
33) SN.V, p.423,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 ath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ti. paccaññāsiṃ,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ṃ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 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ti.”
34) MN.I, pp.22-23.
35) MN.I, p.117.
36) MN.I, pp.248-249.
37) AN.IV, pp.117-118.
38) Jayatilleke, K.N.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Ltd., 
    1963),p.432, 466.
39) Heinz Bechert & Richard Gombrich ed. The World of Buddhism: Buddhist Monks and Nuns in 
    Society and Culture (London: Thames & Hudson, 2007), p.11.

 

만일 그가 말하기를 ‘저는 범천의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여서

자기 존재의 소멸에 마음을 확고히 하였습니다.’라고 한다 치자. 마하나

마여, 그러면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한 우바새와 마음이 해탈한 지 백년

이 되는 비구 사이에는, 즉 이 해탈과 저 해탈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40)

40) SN.V, p.410, “So ce evam vadeyya Brahmalokā me cittaṃ vuṭṭhi-taṃ sakkāya nirodhe cittam
    upasaṃharāmīti. evaṃ vuttassa kho Mahānāma upāsakassa āsavā vimutta-cittena bhikkhunā 
    na ki ci nānākaraṇaṃ vadāmi yad idam vimuttiyā vimuttinti.”; 雜阿含經卷15 (大正藏2, 298b5-12), 
    “若言已捨顧念天欲。顧念有身勝欲。歎善隨喜。當復教言。如是。難提。彼聖弟子先後次第教誡.
    教授。令得不起.涅槃。猶如比丘百歲壽命。解脫涅槃。”雖處眾緣務 亦能獲得法 能具念力者 
    由能專定故 唯有明智人 逮證於涅槃。” 한역본에서는 마하나마(Mahānāma)가 ‘難提’로 나타난다.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수바 숫따(Subha-sutta)」에서 붓다는

수바 또데야뿟따(Subha Todeyyaputta)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브라만 학도여, 이것에 대해 나는 분석해서 말하지 한쪽으로 치우쳐서

말하지 않는다. 브라만 학도여, 나는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그들의 그

릇된 수행(micchā-paṭipatti)을 칭송하지 않는다. 브라만 학도여, 재가자이

건 출가자이건 그릇되게 수행하는 자는 그릇된 수행으로 인해 옳은 방법

인 선법을 성취하지 못한다. 브라만 학도여, 나는 재가자이건 출가자이

건 그들의 바른 수행(sammā-paṭipatti)을 칭송한다. 브라만 학도여, 재가

자이건 출가자이건 바르게 수행하는 자는 바른 수행으로 인해 옳은 방법

인 선법을 성취한다.41)

41) MN.II, p.197, “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ṇava; nāhamettha ekaṃsavādo. Gihissa vāhaṃ, 
    māṇava, pabbajitassa vā micchāpaṭipattiṃ na vaṇṇemi. Gihī vā hi, māṇava, pabbajito vā 
    micchāpaṭipanno micchāpaṭipattādhikaraṇahetu na ārādhako hoti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Gihissa vāhaṃ, ㅡāṇava, pabbajitassa vā sammāpaṭipattiṃ vaṇṇemi. Gihī vā hi, māṇava, 
    pabbajito vā sammāpaṭipanno sammāpaṭipattādhikaraṇahetu ārādhako hoti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中阿含經 卷38 (大正藏1, 667a24-b4), “佛言。摩納。若有在家及出家學道行邪行者。
    我不稱彼。所以者何。若有在家及出家學道行邪行者。不得善解。不知如法。是故。摩納。
    若有在家及出家學道行邪行者。我不稱彼。摩納。若有在家及出家學道行正行者。我稱說彼。所以者何。
    若有在家及出家學道行正行者。必得善解。則知如法。是故。摩納。若有在家及出家學道行正行者。
    我稱說彼。摩納。我如是說。說此二法。如是分別。如是顯示。”

 

상윳따 니까야의 「빠띠빠다 숫따(Paṭipadā-sutta)」에도 붓다는 무엇이 그

릇된 수행이고 무엇이 바른 수행인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나는 바르게 수행하는 자를 칭찬한

다. 비구들이여, 출가자이건 재가자이건 바르게 수행하면 바른 수행으로

인해 그는 올바르고 선한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수행(sammā-paṭipadā)인가? 그것은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중략) 바른

삼매(sammā-samādhi)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수행이라고 한

다. 비구들이여,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나는 이처럼 바르게 수행하는

자를 칭찬한다. 비구들이여,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이처럼 바르게 수행

하면 바른 수행으로 인해 그는 올바르고 선한 법을 얻는다.42)

42) SN.V, pp.18-19, “Gihino vāhaṃ, bhikkhave, pabbajitassa vā sammāpaṭipadaṃ vaṇṇemi. Gihi vā,
    bhikkhave, pabbajito vā sammāpaṭipanno sammāpaṭipattādhikaraṇahetu ārādhako hoti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Katamā ca, bhikkhave, sammāpaṭipadā? Seyyathidaṃ—sammādiṭṭhi … 
    pe … sammāsamādhi.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paṭipadā. Gihino vāhaṃ, bhikkhave, 
    pabbajitassa vā sammāpaṭipadaṃ vaṇṇemi. Gihi vā, bhikkhave, pabbajito vā sammāpaṭipanno 
    sammā-paṭipattādhika-raṇa-hetu ārādhako hoti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雜阿含經卷 33 
    (大正藏 2, 198c18-25), “若在家.出家而起正事。我所讚歎。所以者何。起正事者。則樂正法。
    善於正法。何等為正事。謂正見。乃至正定。爾時。世尊即說偈言。在家及出家 而起邪事者 彼則終不樂 
    無上之正法 在家及出家 而起正事者 彼則常心樂 無上之正法” 상응하는 한역경은 김준호 선생님이 
    알려준 것이다. 이에 감사드린다. 본 경의 이 구절은 밀린다빤하(Milindapañha)에서 ‘진퇴양난의 
    질문(meṇḍaka-pañha)’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즉,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Nāgasena)에게 
    이 경구를 인용하면서 만일 재가자로서 올바르고 선한 법을 성취한다면 재가자와 출가자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고행은 효과가 없고 출가는 이익이 없게 되므로 출가의 의의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고 
    있다. (Mil. pp.242-243)

 

이와 같이 붓다는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maggo)가 바른 수행이며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팔정도를 따른다면 올바르고 선한 법을 얻을 수 있다

고 말한다. 이 말은 재가자도 팔정도를 올바로 닦는다면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그러한 재가자는 치장을

하였더라도 브라만, 사문, 비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붓다는 말한다.43) 방금 언급

한 성전의 기술들은 모두 붓다가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에 깨달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재가자라도 법대로(dhammena) 수행한다면 출가자와 동등하게

최종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고 생각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는 초

기 불교의 텍스트에 드물게 나타나는 재가 아라한에 의해서도 증명된다.44) 그

래서 초기 불교에서 재가자의 정신적 성취를 아라한과 이하로 낮춰서 설정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붓다가 재가자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보았다거나, 재

가자의 종교적 목표가 출가자와는 다르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성전적 입

장, 즉 초기 불교적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

로 필자는 피터 매스필드(Peter Masefield)가 말한 대로, 출가자와 재가자로 구성

된 사중의 사회적 구분은 정신적 구분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45)

43) Dhp.142게, “Alaṅkaro ce pi samaṃ cateyya santo danto niyato brahmacārī sabbesu bhūtesu 
    nidhāya dāṇḍaṃ so brāhmaṇo so samaṇo sa bhikkhu.”; 法句經 卷上 (大正藏 4, 565b20-21), 
    “自嚴以修法,滅損受淨行, 杖不加群生, 是沙門道人” 참고로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에도 
    “반드시 다른 이를 따라 걸식한다고 비구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아니다. 비록 재가의 법을 갖추고 
    있어도, 범행에 대해서 바르게 닦고, 복과와 악보를 모두 끊고 상에 대해 집착함이 없으며, 모든 번뇌를 
    마르게 하면, 이것을 비구의 법이라고 이름한다.(不必從他乞 得名爲比丘 雖具在家法 正修於梵行 
    福果及惡報 俱斷無相著 乾竭諸有結 是名比丘法)”라는 내용이 나온다. [別譯雜阿含經 卷上 (大正藏 2, 
    466b13-16)] 이 경문도 재가자가 선악을 모두 끊고 모든 상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를 제거하면 
    정신적으로 비구와 다를 바 없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별역잡아함경의 정보는 
    이필원 선생님이 제공해주셨다. 이에 감사드린다. 
44) 필자는 선행 연구에서 빨리 성전과 주석서 문헌들을 통틀어서 모두 10명의 재가 아라한이 나타나
    고 있음을 밝힌 바가 있다. (김한상 2014: 191) 출가하기 위해 삭발식이 거행되는 동안 아라한과를
    얻은 마하 아릿타(Mahā-Ariṭṭha)라는 재상이 이끄는 55명의 형제들을 포함시킨다면 그 수치는 더
    욱 늘어난다. (Mhv. xvi. 10-11게)
45) Masefield, Peter. Divine Revelation in Pāli Buddhism (Colombo: The Sri Lanka Institute of Traditional
    Studies, 1986), p.12. 

 

III. 깨달음의 다면성

 

깨달음의 다면성은 깨달음이 7각지(七覺支, satta-bojjhaṅga)46)와 37조도품

(三十七助道品, sattatiṃsa bodhi-pakkhiyā-dhammā)47)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에서 잘 드러난다. 붓다는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Nikāya)에서 7각지가 순

서대로 발생하며,48)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요소들(bodhāya saṃvattanti bojjhangā)

이라고 정의한다.49) 그래서 7각지가 완전히 계발되고 무르익으면 출세간도의

지혜(lokuttara-magga-ñāṇa)를 얻고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50) 이러한 7각지

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바로 일곱 조들로 구성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sattatiṃsa bodhipakkhiyā-dhammā)이다. 비록 붓다가 일곱 조들을 37조도품이라

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법들을 최상의 지혜(abhiññā)로 알아서 그대

들에게 설했나니...”51)라고 말하였지만 부파 불교의 보다 체계적이고 학문적

인 전통에서는 이들을 37조도품이라고 부르게 된다. 37조도품의 원어인 보디

빡키야담마(bodhipakkhiyā-dhammā)에서 보디빡키야(bodhipakkhiya)는 bodhi

(覺, 깨달음)와 pakkhiya(편이나 날개를 뜻하는 pakkha의 형용사)로 분해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깨달음 쪽에 속하는 것’이란 뜻이다. 상윳따 니까야

(Saṃyutta-Nikāya)의 「아상카따 숫따(Asaṅkhata-sutta)」에서 37조도품은 무위

에 이르는 길(asaṅkhatagāmī maggo)로 간주되며, 무위(無爲, asaṅkhata)는 다시

탐욕의 멸진(rāgakkhayo), 성냄의 멸진(dosakkhayo), 어리석음의 멸진

(mohakkhayo)으로 정의되고 있다.52) 이와 같이 37조도품은 아직 깨달음을 이

루지 못한 제자들이 깨달음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법들이다.53)

46) 봇장가(bojjhaṅga)는 깨달음을 뜻하는 보디(bodhi)와 구성요소를 뜻하는 앙가(aṅga)의 
    복합어이므로 그것은 글자 그대로 ‘깨달음을 구성하는 성분’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각 요소들을 
    지칭할 때는 삼봇장가(sambojjhaṅga)라는 용어로 나타난다. 7각지(七覺支, satta-bojjhaṅga)는 
   ① 염각지(念覺支,sati-sambojjhaṅga), ② 택법각지(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ṅga), 
   ③ 정진각지(精進覺支,viriya-sambojjhaṅga), ④ 희각지(喜覺支, pīti-sambojjhaṅga), ⑤ 경안각지
   (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ṅga), ⑥ 정각지(定覺支, samādhi-sambojjhaṅga), ⑦ 사각지
   (捨覺支, upekkhā-sambojjhaṅga)의 일곱 가지이다.
47)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sattatiṃsa bodhipakkhiyā-dhammā)은 7각지(七覺支, satta-bojjhaṅga)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다. 37조도품은 전통적으로 4념처(四念處, cattāro-satipaṭṭhānā), 4정근(四正勤, 
    cattārosammappadhānā), 4신족(四神足, cattāro-iddhipādā), 5근(五根, pañca-indriyāni), 5력(五力, 
    pañca-balāni), 7각지(七覺支, satta-bojjhaṅgā),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maggo)와 같은 
    일곱 조들로 분류된다. 37조도품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하라. Gethin, Rupert. The 
    Buddhist Path to Awakening (Oxford: oneworld, 2001), pp.289-98.
48) SN.V, pp.67-70.
49) SN.V, p.72, “Bodhāya saṃvattantī ti kho bhikkhu tasmā bojjhangā ti vuccantī ti.”
50) Ledi Sayādaw, The Requisites of Enlightenment: Bodhipakkhiya Dīpanī (Kandy: BPS, 2007), p.47.
51) MN.II, pp.238, 245, “Tasmātiha, bhikkhave, ye vo maya dhammā abhiññā desitā.”
52) SN.IV, pp.362-368.

53)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2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17), p.134

 

깨달음의 다면성은 깨달음의 단계적 과정이 성자(ariya-puggala)가 10가지

족쇄(dasa-saṃyojanāni)를 얼마나 많이 풀어내었는가와 연결되어 설명되는 점

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사쌍팔배(四雙八輩,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 또는 사향사과(四向四果, cattāro paṭipannā cattāro phalā)이

다.54) 다소 후대의 텍스트인 쭐라 닛데사(Cūla-Niddesa)는 보디를 네 가지 도

에서의 지혜(catūsu maggesu ñāṇa)로 설명하고 있는 점55)도 깨달음이 종교적 삶

의 최종 결과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다면적 과정임을 말해준다.56)

54) 사쌍또는 사향은 수다원(須陀洹, sotāpatti), 사다함(斯多含, sakadāgāmin), 아나함(阿那含, anāgāmin),
    아라한(阿羅漢, arahant)을 말하고, 팔배는 이들을 각각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로 나눈 것이다. 
    초기 불교의 텍스트들에서는 사향사과를 더 세분화한 분류법이나 다른 용어들로 표현된 분류법
    들도 나타난다. 즉, 7가지, 10가지, 12가지 분류법이 그것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본 논의의 주제로
    부터 벗어날 염려가 있어서 더 이상의 상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55) Nidd. p.456, “Kathaṃ Bhagavā eko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ti eko? Bodhi 
    vuccati catūsu maggesu ñāṇaṃ paññā paññindriyaṃ paññābalaṃ dhammavicayasamboj-jhaṅgo 
    vīmaṃsā vipassanā sammādiṭṭhi.”
56) 빨리 주석서의 전통은 깨달음을 뜻하는 보디(bodhi)를 크게 ⓵ 나무(rukkha)로서의 보디, 
    ⓶ 도(magga)로서의 보디, ⓷ 모든 것을 아는 지혜(sabbaññuta-ñāṇa)로서의 보디, 
    ⓸ 열반(nibbāna)으로서의 보디의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Ps.I, p.54; Spk.II, pp.153-154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깨달음을 열반(涅槃, nibbanā)이나 해탈(解脫, vimutti/

vimokha)과 같이 수행의 결과를 뜻하는 용어들과 대개 혼용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관행이지만 의미적으로는 이들과 구분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

와 관련하여 미국의 로버트 기멜로(Robert Gimell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수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으로서 보디가 갖는 매우 다중적

이고 복합적인 특성은, 깨달음이란 그 수단과 단절된 목적이거나 수행과

분리된 실현이 명백히 아니며, 오히려 수행의 총합과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도록 한다. 이러한 사실은 종종 불교에서 실현과 수행을 통일하자

는 주장이나 수행은 실현에 필수적이라고 다양하게 정형화된 주장을 통

해서 명쾌하게 인정된다."57)

57) Gimello, Robert M. “Bodhi” in Encyclopedia of Buddhism, ed. R.E. Buswell, Jr., (New York:    
      Macmillan, 2004), p.51.

 

스리랑카의 조티야 디라세케라(Jatiya Dhirasekera, 1921-2010)58)도 이 점을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maggo)의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와 결부시켜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58) 그는 나중에 출가하여 담마위하리(Dhammavihārī)라는 법명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은 해탈을 생기게 하는 불교의 종교적 삶의 최

종 결과만은 아니다. 깨달음은 그러한 최종 결과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

서도 드러난다. (DN.II, p.217.) 불교의 중도(中道, majjhimā-paṭipadā), 즉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maggo)는 사실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

(parato shoso)과 지혜로운 주의(yoniso manasikāro)의 도움을 모두 받아

(MN.I, p.294) 계발되고 숙달되어야 하는 깨달음의 견해를 의미하는 바

른 견해로부터 출발한다.59)

59) Dhirasekera, Jatiya. “Enlightenment” in Encyclopaedia of Buddhism V (Colombo: The 
    Government of Sri Lanka, 1990), p.80.

 

이와 같이 보디는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표라는 점에서 해탈과 열반과 동의

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이르는 과정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수

행의 최종 결과만을 나타내는 해탈과 열반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렇게 깨달

음을 해석해야만 우리의 논의가 좀 더 넓은 반석 위에서 진행될 수 있다. 안타

깝게도 리처드 곰브리치는 이 점을 간과함으로써 재가자가 깨달음에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붓다는 재가자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까? 아마도 그렇

지 않았을 것이다. 붓다는 정신적 진보를 네 단계로 측정하였다. ‘수다

원’이라 불리는 첫 단계에서 사람은 많아봐야 일곱 생만 더 살고 인간보

다 더 낮은 세계에는 절대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먼저, 업에 대한 붓

다의 견해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계를 얻었다고 주장되었

다.) 두 번째 단계에서 ‘사다함’은 지구상에서 한 번만 더 삶을 마주하면

되었다. ‘아나함’은 이 세계에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높은 범천에 태어난

다. 여기서 그들은 열반의 성취가 보증되었다. 깨달음은 네 번째이자 마

지막 단계였다."60)

60) Gombrich, R. op. cit., p.75. 

 

IV. 깨달음의 순차성

 

앞서 보았듯이, 깨달음은 종교적 삶의 최종 목표일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기

도 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직관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차적

인 공부(anupubba-sikkhā)와 순차적인 실천(anupubba-kiriyā)과 순차적인 수행

(anupubba-paṭipadā)의 최종 단계로서만 얻어질 수밖에 없다. 주지하듯이, 붓다

는 가르침을 설할 때 상대방의 이해력에 맞추어 가면서 처음은 쉬운 가르침으

로부터 서서히 궁극적 가르침으로 이끌었다. 이것이 바로 ‘순차적인 공부

(anupubba-sikkhā)’이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순차성은 빨리 성전에서 되풀이

되는 주제이다.61)

61) MN.I, p.479, MN.III, pp.2-4, AN.I, p.162. 

 

깨달음의 순차성은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 실천 방법인 팔정도가 계온(戒

蘊, sīlakkhandha), 정온(定蘊, samādhikkhandha), 혜온(慧蘊, paññākkhandha), 또

는 증상계학(增上戒學, adhisīla-sikkhā), 증상심학(增上心學, adhicitta-sikkhā),

증상혜학(增上慧學, adhipaññā-sikkhā)의 삼학(三學, tisso sikkhā)으로 세분화되

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붓다는 삼학을 닦는 비구의 의

무를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의 의무에 비유하고 있다. 마치 농부가 곧바로 농작

물이 자라게 할 신통이나 위력이 없듯이 삼학을 닦는 비구도 곧바로 깨달음을

얻게 할 신통이나 위력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비구에게는 삼학을 완수하여 깨

달음을 얻는 바른 시기가 있다.62)

62) AN.I, p.239 f

 

이와 같이 필자가 깨달음이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고 순차적으로 얻어진다

는 점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이러한 원리가 재가자의 종교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위에 서술한 것은 전문적인 출가

자의 수행이다. 전문적인 출가자는 이와 같은 엄밀한 수행을 충분히 실천할 수

있지만, 생업에 종사하며 처자식을 돌보는 재가자에게는 그와 같은 수행이 고

대 인도에서는 실제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63) 전문적인 출가자도 

깨달음이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고 순차적인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면 가

정과 사회의 갖가지 의무들에 속박되어 있는 재가자의 깨달음도 그러할 것이

라는 점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그러한 상황을 감

안하여 주로 재가자에게는 차제설법(次第說法, anupubbī-kathā)을 베풀었다.

그 내용과 형식은 시론(施論, dāna-kathā), 계론(戒論, sīla-kathā), 생천론(生天

論, sagga-kathā)을 순차적으로 설함으로써듣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 다음

에 붓다들 최고의(buddhānaṃ sāmukkaṃsikā) 괴로움과 일어남과 소멸과 도라

는 사성제를 드러내어 법의 눈(dhamma-cakkhu)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설법을 들은 사람은 모두 불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다음은 맛지마

니까야의 「우빨리 숫따(Upāli-sutta)」에 나오는 차제설법의 정형구이다.

63) 리처드 곰브리치는 고대 인도에서 불교 승려들의 주요 구원론적 행위가 명상이었으며, 세상을 
    등지는 것은 명백히 실제적인 필요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명상은 평화와 사생활을 필요로 하지만,
    전통적 인도의 사회적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Gombrich 2006: 75)

 

그러자 세존은 우빨리 거사(Upālissa gahapati)에게 차제설법(anupubbīkathā)을

가르쳤다. 보시의 이야기(dāna-kathā), 계의 이야기(sīla-kathā),

천상의 이야기(sagga-kathā), 감각적 욕망들의 재난과 타락과 번뇌(kāmānaṃ

ādīnavaṃ okāraṃ saṅkilesaṃ), 출리에서의 공덕(nekkhamme ānisaṃsaṃ)

을 밝혔다. 세존은 우빨리 거사의 마음이 준비되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의 장애가 없어지고 마음이 고무되고 마음에 깨끗한 믿음이 생겼음

을 알았을 때 붓다들 특유의(buddhānaṃ sāmukkaṃsikā) 괴로움과 일어남

과 소멸과 도라는 법의 가르침을 드러내었다.64)

64) MN.I, p.379, “Atha kho Bhagavā Upālissa gahapatissa ānupubbikathaṃ kathesi, seyyathīdaṃ 
    dānakathaṃ sīlakathaṃ saggakathaṃ kāmānaṃ ādīnavaṃ okāraṃ saṅkilesaṃ, nekkhamme 
    ānisaṃsaṃ pakāsesi. Yadā bhagavā aññāsi upāliṃ gahapatiṃ kallacittaṃ muducittaṃ 
    vinīvaraṇacittaṃ udaggacittaṃ pasannacittaṃ, atha yā buddhānaṃ sāmukkaṃsikā dhammadesanā 
    taṃ pakāsesi – dukkhaṃ, samudayaṃ, nirodhaṃ, maggaṃ.”

 

차제설법은 정신적 성향과 물리적 환경이 출가자보다 못한 재가자들을 단

계적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주기 위한 붓다의 교화방법론이다. 그러한 의미

에서 그것은 순차적인 공부(anupubba-sikkhā)와 순차적인 실천(anupubba-kiriyā)

과 순차적인 수행(anupubba-paṭipadā)의 재가자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

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차제설법의 무게가 시론(施

論, dāna-kathā), 계론(戒論, sīla-kathā), 생천론(生天論, sagga-kath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나오는 감각적 욕망들의 재난과 타락과 번뇌, 출리에서의공

덕에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차제설법이 맨 마지막에 사성제를 드러내기 위

해서 설법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법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차

제설법의 목적은 재가자들로 하여금 단지 천상 세계에 태어나도록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학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서 재가자의 정신적

목표를 공덕을 쌓아서 내생에 천상이나 더 낳은 곳에 태어나는 것으로 한정하

고 말았다. 예컨대 벨기에의 에띠엔 라모뜨(Étienne Lamotte, 1903-1983)는 다음

과 같이 말한다.

 

"우바새(upāsaka)가 추구하는 이상은 비구(bhikṣu)의 이상보다 낮다. 비구

는 열반(nirvāṇa)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 주황색

가사를 입고, 도덕(śīla), 집중(samādhi), 지혜(prajñā)가 핵심을 이루는 팔

정도(ārya aṣṭāṅgikamārga)를 닦는다. 비구는 이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청정과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우바새는 천상

을 갈망하고 신들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에 좋은 조건으로 재생하기를 소

망한다.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은 열반에 이르는 팔정도가 아니라 신들

(devatā)로 하여금 이 세상을 떠나 각자의 천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

준 공덕의 실천이다."65)

65) Lamotte, Étienne. op. cit., p.67.

 

필자는 이렇게 출가자와 재가자의 이상을 둘로 구분하는 설명이 성전적 입

장, 즉 초기 불교의 입장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붓다

당시에 모든 재가자에게 차제설법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며 소수의 재가자

들은 사성제와 같은 고차원의 교리를 필요로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붓다 당시

의 모든 출가자들이 사성제와 같은 고차원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

며 소수의 출가자는 공덕을 쌓고 천상에 태어나기를 희구했다. 예컨대 교단의

가장 큰 후원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가 임종을

맞자 사리뿟따(Sāriputta)가 아난다(Ānanda)와 함께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6내

처(六內處, cha-ajjhattikāyatana)와 6외처(六外處, cha-bāhirāyatana)에 대하여 감

동적인 법문을 설했다. 설법이 끝나자 아나타삔디까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자

신은 이제까지 이와 같은 심오한 법문을 처음 들어보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

리뿟따는 이러한 법문은 재가자에게는 설해지지 않고 오직 출가자에게만 설

해진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나타삔디까는 법의 완전한 가르침이 재가자에게

도 베풀어지도록 요구했다. 왜냐하면 법을 듣지 못하면 타락할 재가자도 있을

것이고, 법을 듣고서 그 법을 이해할 재가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66) 맛

지마 니까야의 「다난자니 숫따(Dhānañjāni-sutta)」에 나오는 이야기도 마찬가

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때임종을 맞은 브라만 다난자니(Dhānañjāni)

를 사리뿟따가 방문했다. 브라만들은 범천의 세계(brahma-loka)을 동경하고 있

다고 생각한 사리뿟따는 그에게 깨달음의 길을 가르쳐주지 않고 범천의 세계

에 이르도록4범주(四梵住, cattāro brahmavihāra)만을 가르쳤다. 사리뿟따가 돌

아왔을 때 붓다는 사리뿟따가 브라만 다난자니를 낮은 범천의 세상에 머물게

한 뒤 그에 대해 아직 할 일이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고 힐책하였다.67) 이러한 두 사례들은 정신적으로 뛰어난 재가자에게는 단계

적 설법, 즉 차제설법이 아니라 곧바로 사성제와 같은 심오한 철학적 가르침이

설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66) MN.III, p.261, “Tena hi, bhante Sāriputta, gihīnaṃ odātavasanānaṃ evarūpī dhammī kathā 
    paṭibhātu. Santi hi, bhante Sāriputta, kulaputtā apparajakkhajātikā, assavantā dhammassa 
    parihāyanti, bhavissanti dhammassa aññātāro ti.”
67) MN.II, p.184 ff.

 

V. 나가는 말

 

불교인들의 궁극적 목적은 하늘에 태어나거나 세속적 복을 얻는 것이 아니

라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버린 출가자만이 깨달음

을 이룰 수 있고, 세상의 온갖 잡무와 유혹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재가자의 종

교적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라 공덕을 쌓아 좋은 재생을 얻는 것이라는 인식이

불교학계에 통용되어 왔다. 이러한 인식은 명백히 붓다의 가르침과 상충된다.

붓다는 마치 큰 바다가 한 가지 맛, 즉 짠맛(loṇa-rasa)만 가지고 있듯이, 자신의

가르침도 오직 한 가지 맛(eka-rasa), 즉 해탈의 맛(vimutti-rasa)만을 가지고 있

다고 말하였으며,68)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을 천명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

한다(Pubbe cāhaṃ bhikkhave etarahi ca dukkhañ c'e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ṃ).”69)라고도 말하였다. 이는 우리에게 붓다가 가르침을 펼친 동기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려준다. 그 동기란 바로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의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sutta)」에 나오듯이,70) 사중이 깨달

음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사중은 출가와 재가라는 사회적 구분에 의

해서 나누어지지만 모두 깨달음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한다. 그러한 점에

서 사중은 깨달음의 성취단계에 따라서 나눈 구분이 아니다! 물론 가정생활과

사회적 의무에 얽매인 재가자는 출가자만큼 불교를 완벽하기 이해하고 실천

할 수 없기 때문에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주로 차제설법을 가르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가자의 율(gihi-vinaya)71)이라 불리는 디가 니까야의

「시갈로와다 숫따(Sigālovāda-sutta)」와 같은 경들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

나 이 차제설법도 결국은 깨달음의 성취를 목표로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차제설법은 브라만교의 생천론과의 절충이나 타협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불교는 유사한 도덕을 설하는 세상의 다른 윤리적 가르침

들과 어떠한 차별성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재가자의 역할을 단지 출가자

에게 음식, 의복, 거처 등과 같은 물질을 후원하는 것에만 국한한다거나 재가

자의 이상이 단지 공덕을 지어 천상에 태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시

각은 잘못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출가자에 대한 물질적 후원과 공덕을 쌓는

행위들도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순차적 단계들 가운데 하나이다. 깨달음에 있

어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이는 출가자는 지름길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신속

하게 나아가며 재가자는 돌아가는 길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서서히 나아간다

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떠한 경우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팔정

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maggo)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열려 있다. 비록 가정과 사회의 의무에 억매여 있는 재가자라도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맞게 최대한의 노력을 다한다면 비록 이생은 아닐지라도 완전

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앞당겨질 것이다. 숫따니빠따(Suttanipāta)의 「마하

망갈라 숫따(Mahāmangala-sutta)」에서 붓다는 바른 서원(sammā-paṇidhi)을 지

니는 것이 인생의 더없는 축복(maṅgala-muttamaṃ)들 가운데 하나라고 설하고

있다.72) 이와 마찬가지로 재가자가 이번 생에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깨달음의

단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스스로 명확히 인식하는 것은 정신적 향상의 동기를

부여받아서 바른 서원을 세우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68) Ud. p.56, “Seyyathā pi bhikkhave mahāsamuddo ekaraso loṇaraso, evam eva kho bhikkhave 
    ayaṃ dhammo ekaraso vimuttiraso.”
69) MN.I, p.140.
70) DN.II, p.104.
71) DN.III, pp.180-193
72) Sn.260게, “Patirūpadesavāso ca pubbe ca katapuññatā Attasammāpaṇīdhi ca etaṃ 
    maṅgalamuttama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