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임승택

실론섬 2018. 9. 6. 18:29

[인도철학]제51집(2017.12), 101~138쪽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

니까야(Nikāya)에 나타나는 ‘실천적 무아’와 비교를 위한 시론

(이 논문은 2015학년도 경북대학교 복현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임승택/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Ⅰ 시작하는 말. 

Ⅱ 형이상학적 무아의 단초. 

Ⅲ 윤회 부정의 무아. 

Ⅳ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 

Ⅴ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 Ⅵ 마치는 말.

 

<요약문>

필자는 무아 해석의 시대적 단층이 ‘형이상학적 무아’와 ‘실천적 무아’로

대별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본고는 전자의 ‘형이상학적 무아’를 규명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거기에

는 다시 3가지 유형의 세부적 해석 양상이 존재한다. 단멸론의 방식으로 윤

회의 교리를 배척하는 ‘윤회 부정의 무아’, 초월적 자아를 드러내기 위해

경험적 요인들을 부정하는 방식의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 무아의 논리

로써 윤회를 규명해 들어가는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 등이다. 이들은 보편

적인 무아 이론의 구축을 의도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와 같은 ‘형이

상학적 무아’ 해석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 것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필자의 검토에 따르

면 이들 모두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윤회 부정의 무아’는 죽음 이후의 자아를 부정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도 긍정도 원칙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특히 

‘윤회 부정의 무아’는 삼매에 의한 초월적 지혜를 통해 제시되는 윤회설과

정면으로 부딪힌다. 

 

한편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는 직접적인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

한다. 또한 구사론의 비판을 통해 드러나듯이, 초월적인 것일 수도 유의미

한 것일 수도 없는 자기 모순적 자아를 내밀하게 전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는 무아인 상태로 윤회한다는 입장

을 펼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윤회를 설명하는 논리일 뿐, 무아 자체에 

대한 해명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형이상학적 무아’가 니까야에 일관된 방식으로 등

장하는 ‘실천적 무아’와 대조를 이룬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분량 관계상 서

로를 대조하는 작업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붓다가 가르친 원형적 무아를 생각해 보게 하고, 무아설의 의의에 대해 더

욱 고양된 의식을 갖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Ⅰ. 시작하는 말

 

무아(無我, anattan)란 자아(我, attan)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이것을 내용으로 하는 무아설은 붓다의 가르침을 특징짓는 독특

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무아의 입장에

설 때 윤회(輪廻, saṁsāra)의 주체인 자아란 논외의 대상이 된다. 

무아에 대한 깨달음은 윤회 자체가 사라진 해탈의 경지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해탈(解脫, vimutti)을 이룬 이에

게 더 이상 윤회의 괴로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1) 무

아의 취지가 해탈의 성취와 윤회의 종식이라는 수행(修行, bhāvanā)의 

측면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필자는 이와 같은 치유적․

수행적 성격의 무아에 대해 ‘실천적 무아’로 부른다.

1) SN. Ⅲ. p. 59. “잘 해탈한 그들은 완전한 존재들이다. 완전한 그들에게는
   내세울 윤회가 없다. (ye suvimuttā te kevalino, ye kevalino, vaṭṭaṃ tesaṃ
   natthi paññāpanāya.)”

 

그런데 무아를 해탈이나 수행이 아닌 윤회의 과정에 결부시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인격의 구성요소인 오온(五蘊)의 상속(相

續, saṃtāna)에 의해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재생

(再生, rebirth)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소위 ‘무아 윤회’ 

가 전형적 사례이다.2) ‘무아 윤회’의 논리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

이는 무아와 윤회의 교설을 공존하는 관계로 설명해 냈으며, 특히

바라문교의 아뜨만(我, ātman) 관념이라든가 ‘유아(有我) 윤회’에

비견되는 불교 고유의 입장을 구체화한 것으로 그 의의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무아 윤

회’는 결국 윤회의 양상에 대한 해명에 머물 뿐이며, 붓다가 가르

친 무아의 취지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노출하였다.3) 정

작 무아를 성취한 아라한(阿羅漢)은 윤회를 하지 않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무아 윤회’라는 말 자체가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임승택(2015) pp. 1-31;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무아 윤회’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학자는 上野順瑛(1958)이다. 국내에서는 고익진(1971), 윤호진(1992),
   정승석(1999) 등에 의해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3) 임승택(2015) pp. 7-16.

 

‘무아 윤회’의 입장은 무아와 윤회라는 두 개념의 상반된 성격

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도 자

체가 정당한지의 여부에서부터 시빗거리가 될 수 있다. 붓다는 일

체의 형이상학적 의문에 대해 무기(無記, avyākata)라는 침묵의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그럼에도 ‘무아 윤회’를 표방하는 연구자들

은 윤회가 지속되는 원리에 대해 경험적 차원을 벗어나는 논리로

써 규명해 들어간다. 전생(前生)과 후생(後生) 사이에 자기 동일성

을 유지하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과적

관계 속에서 전생과 후생으로 이어지는 삶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문제점은 윤회에 대해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명하

더라도 결국은 그것이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으며, 그와 같은

설명 자체가 형이상학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 

윤회와 결부된 무아 해석은 붓다의 교설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탈바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무아와 윤회를 공존적 관계

로 해명하려는 시도는 무기에 위배되는 형이상학적 일탈로 간주

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형이상학적 무아’로 갈래지을 수 있는 대

부분의 경향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파악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무아 윤회’를 비롯한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

또한 나름의 의의와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

는다. 앞서 언급했던 ‘실천적 무아’는 자아 관념을 극복한 아라한

의 경우에 부합하는 것으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범부의 상태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해명을 하지 못한다는 취약점이 지적될 수 있

다. 이러한 문제점은 아라한이든 범부이든 모든 존재에게 공통적

으로 적용될 수 있는 무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이끈다. 과연 무

아는 보편적 진리 이론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문제의

식과 더불어 필자는 시대별로 무아에 대한 해석과 접근방식이 달

라져 왔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페터

(Tilmann Vetter)는 B.C. 300년 무렵 밧시뿌뜨라(Vātsīputra)라는

논사의 인격(個我, puggala, pudgala) 이론에 대한 반동으로 형이

상학적 무아 해석의 경향이 본격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4)

4) Tilmann Vetter(1988) p. 42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난 무아 해석은 붓다의 본의를 꿰뚫

는 체계적인 무아 이론의 구축을 위한 여망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붓다가 제시했던 원형의 가르침을 그

냥 내버려 두기란 오히려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

와 같은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의 양상이 단일하지 않았다는 사

실에 주목하면서, 그들을 유형별로 구분․검토해야 할 필요를 느끼

게 되었다. 각각의 해석에서 드러나는 차별성에 대한 규명은 붓다

자신이 가르쳤던 무아를 생각해 보게 하고, 또한 그것에 대한 변

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본고는 ‘무아 윤회’의 논리를 

비판했던 선행 연구에 대해 보완적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추후

계획 중인 ‘실천적 무아’에 대한 규명의 근거자료로 활용될 것이

다. 필자의 최종 목표는 ‘형이상학적 무아’와 ‘실천적 무아’를 비

교․대조함으로써 니까야(Nikāya)에 나타나는 붓다의 무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Ⅱ. 형이상학적 무아의 단초

 

주지하듯이 무아(無我)에 해당하는 빨리어(Pāli) anattan은 부정

형 접두어 an과 일반명사 attan의 합성어이다. 이것에 대해 브롱

코스트(Bronkhorst)는 ‘자아를 결여한다(without self, 無我)’는 것

이 아니라 ‘자아가 아니다(not the self, 非我)’라는 의미로 이해한

다.5) 그에 따르면 자아의 존재 여부 자체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자아 관념을 둘러싼 편견과 집착의 제거야말로 무아

설의 목적이었다.6) 이 점에서 무아란 불완전한 경험적 요소인 오

온(五蘊)에 대해 자아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맥락일 뿐이다. 이것

을 뒷받침하듯이 한역에서는 무아 못지않게 잦은 빈도로 비아(非

我)라는 표현이 나타난다.7) 비아란 자아가 아닌 것에 대한 부정을

의미할 뿐 자아 자체의 존재 유무를 명시적으로 나타내지는 않는

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또한 무아란 실제로 비아(非我)의 의

미이며, 아뜨만(ātman, attan)과 같은 진실한 자아를 완전히 부정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기(我)를 인정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8)

5) Bronkhorst(2009) p. 23; 황순일(2010) p. 103. 
6) Bronkhorst(2009) p. 27. 
7) 정승석(1999) p. 18.
8) 中村元(1967) pp. 151-153; 정승석(1999) pp. 28-32.

 

그러나 비아(非我)란 부정되는 ‘나’ 혹은 ‘자아’의 이면에 부정할

수 없는 ‘나’ 혹은 ‘자아’의 가능성을 허락한다. 반면에 무아란 ‘나’

혹은 ‘자아’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서 ‘나’ 혹은 ‘자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따라서 정승석이 지적하듯이 “‘아(我)가 아

니므로(非我) 아(我)가 없다(無我)’라고 말하는 것은 ‘아(我)가 없으

므로(無我) 아(我)가 아니다(非我)’라고 말하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부적절하다.”라는 언명이 성립한다.9) 요컨대 무아는 비아의 전제

가 될 수 있어도 비아는 무아의 전제가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무

아라는 표현은 의미 왜곡의 여지가 없는 반면에 비아는 상황에 따

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된다. 비아를 주장하는 것은 궁극적 자아

인 아뜨만의 존재를 내세우는 바라문교의 주장과 유사한 논리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상적으로 드러난 ‘나’ 혹은 ‘자아’ 

의 배후에 초월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나’ 혹은 ‘자아’를 인정할

경우 불교와 바라문교의 차별성은 상실되고 만다.

9) 정승석(1999), p. 33.

이러한 사실은 반드시 무아이어야만 하고 비아라는 표현은 배

제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을 불러올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

이 이와 같은 이유에서 무아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무아에 대한 해석이 분화되어 나갈수록 경험세

계에 대한 언명의 차원을 벗어나게 된다는 새로운 문제점이 발생

한다. 이것은 참된 자아를 염두에 둔 비아이든 혹은 그러한 비아

를 배제하는 무아이든 마찬가지이다. 비아 너머의 자아를 경험적

언어로써 해명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그 대척

점에 위치하는 무아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비아가 경험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면 그것의 의도적 배제를 표방하는 무아 역시 경험

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될 가능성에 노출된다. 요컨대 경험을 벗어

난 ‘어떤 것’에 대해서는 ‘있다’고 말하더라도 혹은 ‘없다’고 말하

더라도 매한가지이다. 붓다 사후 구체화된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

의 경향이 이러한 문제점을 공통적으로 안고 있다.

 

‘형이상학적 무아’로의 전환을 살피기에 앞서 오온(五蘊)에 대한

설명방식의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페터에 따르면 무아의

초기적 형태는 오온이라는 경험적 인격의 구성요소들에 관련된

다.10) 즉 ‘나’의 인격을 이루는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에 대해 ‘나’ 

라는 고정된 관념을 덧씌울 수 없다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논법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망각되었고,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오온은 ‘자기 자신(one’s own)’이 아닌 ‘세계의 구성요

소(a kind of the elements of the world)’로 바뀌고 말았다. 그 결

과 오온에 대한 수식은 “과거, 미래, 현재,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

칠든 미세하든, 열등하든 우수하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모

든 [오온은] … ”이라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실

재에 관한 것으로 정형화되기에 이른다.11) 오온에 대한 설명방식

의 변화는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의 경향

과 궤도를 같이하는 듯하다. 경험과 시간의 제약을 넘어선 보편적

인 이론의 구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0) Vetter(1988) pp. 36-37.
11) SN. Ⅲ. p. 47 등. “yaṃ kiñci rūp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

 

물론 ‘형이상학적 무아’에 대해 무턱대고 거부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붓다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방식으로 근

기에 따라 유연한 가르침을 펼쳤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교리 해석

이 요구되는 상황이라면 마땅히 거기에 부응할 필요가 있다. 특히

윤회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아뜨만 관념이 만연한 

분위기에서 불교적인 방식으로 윤회를 설명하고 무아와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은 외면할 수 없는 과제였을 것이다. 근본상좌부(根

本上座部, Sthaviravāda)의 유분식(有分識, bhavaṅga), 유부(有部, 

Sarvāstivāda)의 오온상속(五蘊相續) 내지 중유(中有), 독자부(犢子

部, Vātsīputrīya)의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경량부(經量部, 

Sautrātika)의 일미온(一味蘊), 화지부(化地部, Mahīśāsaka)의 궁생

사온(窮生死蘊),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ṅghika)의 근본식(根本識)

등이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12) 이들

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무아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윤회의 문제를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12) 增田英男(1965) p. 110. 

 

페터는 무아설이 자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논리로 변하게

된 구체적 계기를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나는 대다수 불교전통이 자아의 비존재 이론을 선택한 사실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 내게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은 이 문

제에 관한 사변이 고통스럽지 않은 자아의 비존재를 주창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길을 감으로써

해탈을 성취하는 실체로서 이른바 개아(個我, pudgala) 이론을 거부하

는 데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밧시뿌뜨라(Vātsīputra)라는 한 인물(B.C.

300년경에 활약한)이 이 이론을 설했다고 전해진다. 개체적 자아라는

의미로 개아라는 용어를 바라볼 때 이것을 혁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

다. 많은 경전 구절들에서 개아 혹은 (자신의) 자아를 언급하면서 그것

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거나, 발전되어야 한다거나, 정화되어야 한

다거나, 보호되어야 한다는 따위를 묘사한다. 이것은 비록 실존적이지

만 명백하게 일상적 용법(대부분의 사례는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거부

자들이 단언했듯이 관습의 의식적인 사용을 나타내지도 않고, 일부 현

대 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영혼을 지시하지도 않는)이었음에도 밧시뿌

뜨라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13)

13) Vetter(1988) p. 42; 김성철(2009) p. 123.

 

인용문은 자아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개아 즉 보특가라(補特伽

羅)에 대한 논리적 반응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상적 용법의 개아

를 형이상학적 실체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취지에서 그러한

논리가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완전한 부정은 욕망

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적 상태를 설명하는 데 용이한 측면이 있

다.14) 자아에 대한 믿음이 잔존하는 한 존재의 지속을 바라는 미

세한 욕망의 뿌리는 근절되지 않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최종적인

목적의 성취는 보장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부정은 무아에 대한 논의를 새로운 유형

의 형이상학적 틀 안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자

아에 대한 완전하고도 전면적인 부정이란 경험의 영역 안에서만

이루질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14) Vetter(1988) p. 43. 

 

마스다 히데오(增田英男)는 무아의 해석을 둘러 싼 현대 학계의

동향을 5가지로 분류한다.15) 필자가 이해한 방식으로 정리하면 다

음과 같다. (1) 무아에 대해 자아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고서 자아

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윤회설을 불교 외부의 사상으로 간주한다. 

(2) 무아란 주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자아

가 아닌 것에 대한 부정을 의미할 뿐이다. (3) 무아의 입장과 주체

성의 입장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고서 각자의 입장에서 쌍방의 입

장을 인정한다. (4) 붓다의 침묵 즉 중도(中道)의 입장에서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확정된 견해를 형성하지 않는 무한정을 내세운다. 

(5) 무분별지 즉 반야의 체험적 실증을 통해 무아설과 주체설의 양

자를 초월 지양한다. 이들 중 (1)과 (2)는 앞서 언급했던 비아의 주

장과 그러한 비아를 엄격히 배제하는 입장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

다. 나머지 셋은 무아와 윤회를 모순적인 관계로 인식하고서 나름

의 방식으로 그것을 해소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15) 增田英男(1965) pp. 110-113; 정승석(1999) p. 217.

 

불교 내부의 부파로서 윤회를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란 없

다. 따라서 (1)의 동향에 연결시킬 수 있는 부파의 사례는 찾기 힘

들다. 그러나 무아의 문제를 다루는 현대 학자들의 견해를 고려할

때 이러한 동향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것에 대해서

는 ‘윤회 부정의 무아’를 다루는 대목에서 살피기로 한다. (2)의 동

향은 독자부의 보특가라(pudgala) 즉 ‘개아’ 이론에 연결시킬 수

있다. 보특가라는 초기불교의 니까야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으며

오온을 짊어진 짐꾼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독자부에서 내세운

이것에 대해 다른 부파에서는 아뜨만이나 지와(命我, jīva)와 같은

실체적 자아로 간주하고서 비판하였다.16) 이와 관련해서는 ‘비아

와 교체 가능한 무아’를 다루는 대목에서 살피기로 한다. (3)은 나

머지 대부분의 부파에서 내세우는 입장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유분식이라든가 오온상속 등은 결국 무아를 훼손하지 않

고서 윤회를 해명하려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동향은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를 다루는 대목에서 살피기로 한다.

16) 독자부의 보특가라에 대해서는 본고의 4장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한편 (4)와 (5)는 부파불교의 무아 해석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먼저 (4)의 입장은 교법의 체계화를 의도했던 아비달마의 색채 자

체와 부합하지 않는다. 무기와 중도에 대해 특정한 견해를 확정하

지 않고 무한정으로 보는 것에도 동의하기 힘들다. 무기와 중도를

통해 드러나는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

기 때문이다. (5)는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얼마간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아설과 주체설의 양자를 ‘초월 지양’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다. 이것은 자칫 실천적 측

면에 기댄 무아 해석의 포기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필자는 이상의

5가지 동향들 중에서 부파적 논의와 연계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찾

을 수 있는 현대 학계의 무아 해석을 처음 3가지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이들 셋은 ‘형이상학적 무아’의 전형

적인 양상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Ⅲ. 윤회 부정의 무아

 

마스다 히데오가 분류한 (1)의 동향은 자아에 대한 엄격한 부정

과 함께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물론적 사고와 친화

적이다. 초기불교 이래로 윤회를 부정하는 입장을 불교 내부의 부

파에서 찾기란 힘들다. 그렇지만 비슷한 견해가 전혀 언급되지 않

는 것은 아니다. 단멸론(斷滅論)의 방식으로 자아의 완전한 소멸과

부재를 주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17) 이 주장은 자아의 영속성을

부정하는 까닭에 붓다의 무아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

다. 그런데 자아의 소멸만을 강조하는 단멸론적 사고는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를 비롯하여 살아 있을 때 즐기고 보자는 따

위의 쾌락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 실제로 사문과경(Sāmañ-

ñaphalasutta)의 푸라나 카사파(Pūraṇa Kassapa)라든가 아지타

케사캄바린(Ajita Kesakambalin)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듯이 이러

한 사고는 도덕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문제점을 유발하였다.18) 그

러나 붓다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완전한 소멸의 논리를 펼쳤던 것

은 아니다. 그는 삼매에 의한 초월적 지혜(宿住隨念智, pubbe- 

nivāsānussatiñāṇa)를 통해 죽음을 관통하여 이어지는 삶의 가능

성을 언급했다. 자나와사바경(Janavasabha-Suttanta)에 나타나듯

이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轉生)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19)

17) Brahmajāla-Sutta(DN. Ⅰ. 34-36)에는 다음과 같은 7가지 단멸론이
    소개된다. ①물질적인 육체를 자아로 간주하고 이 육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경우, ②욕계(欲界)에 속한 천상(天上)의 자아를 상정하고서
    거기에서 목숨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경우, ③색계(色界)에 속한
    천상의 자아를 상정하고서 거기에서 목숨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경우, ④공무변처(空無邊處)에 속한 자아를 상정하고서 거기에서
    목숨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경우, ⑤식무변처(識無邊處)에 속한
    자아를 상정하고서 거기에서 목숨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경우, 
    ⑥무소유처(無所有處)에 속한 자아를 상정하고서 거기에서 목숨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경우, ⑦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속한 자아를
    상정하고서 거기에서 목숨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경우 등이다. 
18) DN. Ⅰ. pp. 47-86. 
19) DN. Ⅱ. pp. 201 이하.

 

그런데 놀랍게도 윤회를 부정하는 무아 해석의 사례를 현대 학

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정세근에 따르면 붓다의 무아설은

브라만교 윤회설의 무근거성을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으로 설파

하는 것이다.20) 그는 자아가 없다면 윤회의 근거는 무너진다고 말

하면서 힌두교는 윤회하는 자아가 있어야 하지만 불교는 연기(緣

起)를 내세우기 때문에 자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21)

이러한 논리의 귀결로서 정세근은 힌두교의 윤회에 대비되는 불

교의 반윤회(反輪廻)를 언명한다.22) 그는 반윤회에 대해 윤회의 대

척점에 세운 대안 개념(counter concept)이라고 밝히면서 “고정적

실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하는 윤회는 무아론과 모순된다.”라는 명

제로 풀어낸다. 반윤회는 윤회가 벗어버릴 것임을 분명히 해주는

까닭에 탈(脫) 윤회야말로 불교가 제시하는 궁극의 목표임을 일깨

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자면 붓다는 탈윤회를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으며, 우리는 윤회를 잊음으로써 윤회

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다.23)

20) 정세근(2009) p. 49. 
21) 정세근(2009) p. 55. 
22) 정세근(2009) p. 60.
23) 정세근(2009) p. 61.

 

윤회를 부정하는 정세근의 무아 해석에 공감할 만한 여지가 없

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아직까지 인도사회에 악영향을 미

치고 있는 태생에 의한 신분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현대 인도사회에서 불교도 개종 운동을 펼친 암베드카르

(Ambedkar)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업(業) 관념을

재생이나 윤회에 연계시켜 해석하는 것에 대해 사기(jugglery)라고

혹평하였다.24)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이 붓다의 의도에 실제로 부

합하는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고는 죽

음 이후의 절대적 소멸이라는 관념을 부추길 수 있다. 이것은 “모

든 것이 영원하다.”는 상주론(常住論)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경험적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 또한 자이나교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윤회를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지배이데올로기로 악용되었

던 것만은 아니다. 나아가 바라문교를 비롯한 인도종교 일반에서

도 윤회는 그 자체로서 궁극의 목적이 아니었으며 해탈의 성취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로 인식되고 있었다. 

24) 이명권(2003) p. 188.

 

윤회를 부정하는 무아는 무아와 윤회라는 두 개념의 상충적 성

격에 대해 당혹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냥 무아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내세우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서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무아 이론의 구축에

다가서는 셈이다. 그러나 정세근은 윤회를 부정하면서도 무아와

윤회라는 두 개념의 층차(層差)가 존재한다는 것을 언급을 하고

있다.25)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윤회는 범부를 위해 시설된

개념이고, 범부는 그릇된 인식으로서 존재하는 자아에 매달릴 뿐

이다. 이때의 자아는 가상(假想)으로서의 아상(我想) 또는 가아(假

我)인데 그것은 단지 물질적 집합체인 오온의 산물일 뿐이다. 윤

회하는 것은 다만 오온일 뿐이며, 그러한 윤회가 범부들을 위해

마련된 개념들이라면 그 윤회조차 가명(假名)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세근의 언급은 윤회를 엄격히 부정했던 스스로

의 논리와 충돌을 일으키는 듯하다. 깨닫지 못한 범부 중생에게

가상의 세계 혹은 가명의 상태는 결코 허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계란 범부 중생들이 괴로움에 속박된 채 살아가는 현실

의 세계이다.

25) 정세근(2009) p. 342.

 

‘윤회 부정의 무아’와는 양립하기 힘든 초기불교의 교리로서 사

쌍팔배(四雙八輩) 즉 ‘네 쌍의 여덟 무리’라는 것이 있다. 예류도

(預流道, sotāpattimagga)에서부터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tta- 

phala)에 이르는 일련의 성위(聖位)가 그것이다. 이것은 초기불교

에서 지향하는 궁극의 인격을 여덟의 위계로 분류한 것으로 불교

라는 종교가 존재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가치에 해당한다. 그런

데 아라한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부류의 존재는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예컨대 예류과(預流果)를 성취했을

경우 최소한 일곱 번 더 태어나고, 일래과(一來果)는 한 번 더 인

간으로 태어나야 한다. 불환과(不還果)는 특정한 천상세계에 태어

나 거기에서 열반을 성취하고 윤회를 종식시키는 것으로 이야기

된다. 만약 윤회를 부정하게 되면 사쌍팔배의 체계를 거스르는 부

담을 떠안게 된다. 결론적으로 초기불교의 교리에 근거하는 한 내

세와 윤회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굳이 윤회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불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스스로를 몰아내는 셈이다.

 

Ⅳ.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

 

무아에 대해 ‘진실한 자아가 아닌 것’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하

는 (2)의 동향으로 넘어간다. 이 입장에 따르면 붓다는 집착의 대

상이 되는 거짓된 자아를 거부했을 뿐이며 참된 영혼 혹은 진실한

자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무아란 자아가 ‘없다(無)’는 것

이 아니라 다만 자아가 ‘아니다(非)’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

으로 무아는 비아와 교체 가능한 것이 되고, 오히려 비아라는 표

현이야말로 붓다의 취지에 더 부합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

은 무아 해석은 경험적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하는 동시에

경험을 넘어선 절대적․이상적 자아의 존재 가능성을 생각하게 해

준다. 나까무라 하지메를 비롯하여 라다크리슈난(Radhakrishan),

리즈 데이비즈(Rhys Davids) 등이 이러한 동향을 대표하는 현대의

학자들이다. 

 

초기불교 경전에는 이 입장을 뒷받침하는 듯한 구절들이 등장

한다. “실로 자아야말로 자신의 의지처이다. 어찌 다른 이가 의지

처일 수 있겠는가.”라는 게송을 비롯하여,26) “현재의 법에서 원하

는 것이 없는 이로서, 고요해진 이로서, 가라앉은 존재로서, 즐거

움을 누리는 이로서, 브라흐만이 된 자아로서 머문다.”라는 구절

이 그것이다.27) 이들은 자아야말로 종교적 실천의 구심점이 되며, 

초경험적 존재인 우빠니샤드의 브라흐만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부

추긴다.28) 또한 니까야에 빈번하게 되풀이되는 무아 관련 언급들

역시 온(蘊)․처(處)․계(界) 따위의 경험적 요소들에 대해 “그것은 ‘나

의 것(mama)’이 아니고, 그러한 ‘나(aham)’는 있지 않으며, 그것

은 ‘나의 자아(me attā)’가 아니다.”라는 소극적․부정적 방식으로

나타나곤 한다.29) 이러한 묘사는 경험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

정되는 아뜨만이라든가 브라흐만과 같은 궁극적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될 여지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라다크리슈난

(Radhakrish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6) Dhp p. 24. “Attā hi attano nātho kohi nātho paro siyā”
27) MN. Ⅰ. p. 341, p. 342, p. 344, p. 349, p. 412; DN. Ⅲ. p. 233 등. “diṭṭheva
    dhamme nicchāto nibbuto sītibhūto sukhapaṭisaṃvedī brahmabhūtena
    attanā viharati.”
28) 그러나 라훌라는 자아를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경구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해명한다. 그에 따르면 ‘의지처로서의 자신’ 혹은 ‘만족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란 형이상학적 영혼이나 자아와는 무관하며, 일상의
    자기를 나타내는 재귀대명사 혹은 부정대명사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Rahula 1978:59-60) 필자는 이와 같은 해명이 “브라흐만이 된 자아로써
    머문다.”라는 구절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브라흐만이 된
    자아(brahmabhūtena attanā)’란 도구격(Instrumental Case)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경험영역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경험에 종속된 일상의 자아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9) SN. Ⅲ. p. 22 “yad anattā taṃ netaṃ mama, neso' ham asmi, na me so attā ti.”     

 

이러한 표현은 정형구로 나타나며 니까야에 전체에서 94회 가량 
반복된다. 

 

"붓다는 우리가 현상의 배후에 놓인 영원한 자아에 대해 언명할 때

경험을 넘어서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붓다는 우빠니샤드에서

선언된 아뜨만에 대해 침묵했고, 그것의 존재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냉철한 논리에 매달리는 한 아뜨만과

같은 영혼의 실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 밑바닥에

놓여 있다고 말해지는 아뜨만은 불가해한 미스터리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붓다는 우리에게 철학의 한계를 인지할 만큼 철학

적이 되길 권했다."30)

30) Radhakrishan(1977) p. 387.

 

라다크리슈난은 아뜨만이라는 존재가 논리적 접근으로는 규명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한계를

인정할 만큼의 철학적인 안목을 지니게 될 때 비로소 붓다의 의도

와 함께 아뜨만의 실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붓다는 경험적 자

아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경계하고자 했던 것이며, 현상적으로 드

러난 자아의 실재를 반박하고자 하였을 뿐이다.31)

31) Radhakrishan(1977) p. 152.

 

그러나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를 내세우는 학자들 사이에는

뚜렷한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 예컨대 리스 데이비즈(Rhys

Davids)는 자아의 존재에 반대하는 불교의 논의가 주로 영혼(soul)

개념에 집중되어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러한 영혼이란 영속하고

변화하지 않는 축복스러운 ‘초자연적 존재(superphenomenal 

being)’로서 윤회를 하며, 그 속에는 지고의 아뜨만 혹은 세계의 영

혼(world soul)이 내재해 있다고 기술한다.32) 또한 그녀는 우리가

그것(아뜨만 혹은 영혼)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해 명령(fiat)을 내린

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비아적 자

아란 초자연적 존재 혹은 명령권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리스 데

이비즈의 입장은 자아라는 것이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까닭

에 비아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한

걸음 진척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2) Rhys Davids(2014) p. 31. 

 

라다크리슈난은 리즈 데이비즈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는

찬도기야 우빠니샤드(Chāndogya-Upaniṣad)의 쁘라자빠띠(Prajā-

pati)를 인용하면서 인간의 자아란 대상(object)이 될 수 없으며 다

만 주관적 것(subjective)이라고 주장한다.33) 예컨대 “일반적으로

자아에 속한 것으로 알려지는 내용들 중 많은 것이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쟁점은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자아가 아니라

는 것(not-self)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우빠니샤드가 자아를

육신이나 일련의 정신상태, 표상들의 연속, 의식의 흐름과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해 부정할 뿐이라고 덧붙인다.34) 또한 상까라(Śaṅkara)

를 인용하면서 “지켜보는 자아는 의식을 비추지만 그 자체는 결

코 의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한다.35) 이러한 자아란

모든 경험에서 부정할 수 없는 전제에 해당하며 그 자체는 결코

경험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을 일컫는 아뜨만은 자아라든가 비아

혹은 그 모두의 기반이 되는 근본 주체(fundamental identity)이

다.36)

33) Radhakrishan(1977) p. 152.
34) Radhakrishan(1977) p. 159.
35) Radhakrishan(1977) p. 158.
36) Radhakrishan(1977) p. 159.

 

이러한 주장의 귀결로서 라다크리슈난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은 윤회하는 자아가 아니다.”라고 언명한다.37) 또한 아뜨만은 경

험세계를 벗어난 초월적 관조자이며, 바로 그것이 진실한 자아임

을 깨닫게 될 때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덧붙인다. 아뜨만이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이와 같은 언명은 다소 충격적이다. 불교의

‘무아 윤회’에 비견되는 바라문교의 ‘유아(有我) 윤회’가 실상은

‘비아(非我) 비윤회(非輪廻)’인 셈이기 때문이다. 흔히 바라문교의

아뜨만은 윤회 성립의 필수 조건으로 거론되곤 한다. 바로 그것이

낡은 육신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육신으로 들어감으로써 죽음과

삶이 반복된다는 논리가 곧 ‘유아 윤회’이다.38) 그러나 그와 같은

‘유아 윤회’는 바라문교 자체의 논리와 배치되는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붓다의 무아가 그러하듯이 바라문교의 아뜨만 또한 윤회가

사라진 경지를 지향하며, 그러한 이유에서 두 개념 사이의 경계선

은 선명하지 않다. 

37) Radhakrishan(1977) p. 384. 
38) 정승석(1999) pp. 284-287.

 

한편 슐만(Shulman)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개념을 전제해야만

무아의 의미가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39) 그는

Cūlarahulovāda-sutta 등에 나타나는 무아의 서술 방식에 주목한

다. 경험적 요소들에 대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라는 언명과

함께, 무상하고 괴로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묘사하는 대목이 그것이다.40) 슐만은 이

경구가 아무런 논리적 필연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왜냐

하면 고통스러운 ‘치통(toothache)’의 무상함은 얼마든지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슐만은 이와 같은 구절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영원하고 환희로운 존재인 아뜨만 개념이 논리

적 전제로서 요청된다고 말한다. 아뜨만은 영원한 것이고 즐거운

것인 반면에 경험의 구성요소인 오온(五蘊) 따위는 변화와 괴로움

에 종속된다. 그러한 이유에서 아뜨만과 반대되는 오온 등에 대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나’가 아니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

이다.

39) Shulman(2008) p. 312.
40) MN. Ⅲ. p. 278 “라훌라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눈(眼)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존자시여, 무상합니다. 무상한 그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존자시여,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간주할 수 있는가?
    존자시여, 그렇지 않습니다.(Taṃ kiṃ maññasi rāhula, cakkhu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Anicc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이상의 내용은 붓다의 무아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에 연결되어

있으며, 실제로는 비아의 의미일 가능성을 내비춘다. 그러나 불교

와 바라문교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에 강력

히 반대한다. 대표적 인물로 라훌라(Walpola Rahula)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라다크리슈난과 리스 데이비즈를 지목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에 자아 개념을 끼워 넣으려는 헛된 시도를 한다고 비판한

다.41) 특히 그는 ‘오온 바깥에서 자아를 찾을 수 없다는 언급이 등

장하지 않는다.’라는 방식으로 비아의 논리를 펼치는 것에 대해

두 가지 불가 이유를 밝힌다.42) 첫째,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존

재는 오로지 오온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없

다. 둘째, 붓다는 무조건적이고 전면적으로 아뜨만(Ātman), 영혼

(Soul), 자아(Self), 에고(Ego)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또한 라훌라는

“모든 법은 무아이다(sabbe dhammā anattā).”라는 법구경 구절

을 지목하면서 무아는 ‘일체의 법’으로까지 확대된다고 덧붙인

다.43) 오온 안에서뿐만 아니라 설령 오온 바깥에서 오온과 유리되

는 한이 있더라도 무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라훌

라는 이러한 주장의 귀결로서 설령 붓다의 무아설이 완전히 틀렸

다고 하더라도 초기불교 문헌들에 근거하는 한 아뜨만을 내세우

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변한다.44)

41) Rahula(1978) p. 55.
42) Rahula(1978) p. 57.
43) Rahula(1978) pp. 57-58.
44) Rahula, 1978, p. 56

 

비아의 입장에 친화적인 부파불교의 무아 해석 사례로는 독자

부의 보특가라(puggala, pudgala) 즉 ‘개아(個我)’ 이론을 꼽을 수

있다. 이 이론은 니까야의 Bhārasutta에 나타나는 ‘짐을 나르는

이(Bhārahāra puggala)’에 대한 언급에 근거해 있는 것으로 논의

된다.45) 즉 오취온(五取蘊)을 ‘짐’에, 개아를 ‘짐을 나르는 이’에 비

유한 내용이 그것이다.46) 독자부에서는 바로 이 존재를 ‘오온과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닌(非卽非離蘊)’ 윤회의 주체로 간주하였

다. 보특가라는 독자부 이후 후대 인도불교에서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존재를 인정했던 학파만도 일

곱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진다.47) 이러한 사실은 무아에 대한 비

아적 해석의 시도가 비단 독자부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며, 오

랜 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관심사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45) 이수창(2015) p. 54.
46) SN. Ⅲ. 25. 
    “색취온(色取蘊)․수취온(受取蘊)․상취온(想取蘊)․행취온(行取蘊)․식취온(識取蘊)
    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짐’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짐을 나르는 이’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개아(puggala)라고 말하는데, 그
    존자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족성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짐을 
    나르는 이’이라고 부른다.(rūpūpādānakkhandho vedanūpādānakkhandho
    saññūpādānakkhandho saṃkhārūpādānakkhandho viññāṇūpādānakkhandho. 
    Ayaṃ vuccati bhikkhave bhāro. Katamo ca bhikkhave bhārahāro: 
    puggalotissa vacanīyaṃ, yo 'yaṃ āyasmā evannāmo evaṃgotto, ayaṃ 
    vuccati bhikkhave, bhārahāro.)”
47) 정상보(2016) pp. 47-76.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서는 보특가라의 특성에 관해 “만일

모든 법이 보특가라를 여의면 전생(前世)으로부터 바뀌어 후생(後

世)에 이르는 것이 없으며, 보특가라에 의지하여 옮겨 바뀜이 있

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기술한다.48) 따라서 보특가라란 일단 윤

회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윤회의 주체’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독자부에서는 이것에 대해 ‘승의의 자아(勝義我)’라고

부르면서 바로 이것이 성불(成佛)에 이를 때까지 소멸하지 않고

존속한다는 견해를 펼쳤던 것으로 전해진다.49) ‘승의의 자아’란

번뇌로부터 벗어난 궁극적 존재에 해당하며, 이 점에서 윤회를 초

월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보특가라는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상이한 관점을 아우르는

듯하다. 리즈 데이비즈(Rhys Davids)가 주장한 윤회의 주체로서의

측면과 라다크리슈난(Radhakrishan)이 말했던 윤회를 벗어난 존

재로서의 측면이 그것이다.

48)「異部宗輪論」(『대정장』49, p. 16c) “諸法若離 補特伽羅 無從前世 轉至後世
    依補特伽羅 可說有移轉”; 이수창(2015) p. 109.
49) 이수창(2015) pp. 110-111.

 

독자부 이외에 보특가라를 인정했던 후대의 학파들에 대한 연

구는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러나 다수의 학파가 거론되는 만큼 그

러한 존재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이 줄곧 인정되어 왔다는 것은 분

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보특가라의 논리가 불교와 바라문교의 차

별성을 강조하는 입장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았다는 사

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을 저술한 바수반두(世親. Vasubandhu)는 보특

가라를 논파할 목적으로 「파집아품」(破執我品)을 추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50) 특히 바수반두는 보특가라를 실유(實有)로 상정하는

경우와 가유(假有)로 바라보는 경우로 구분하고서, 그들 각각에 대

해 개별적으로 그 난점을 지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바로 이것은

비아에 관해 각기 다른 입장을 표명했던 앞서의 두 현대 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50) 이수창(2015) p. 111

 

먼저 보특가라가 실유라면 그것은 오온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경험에 종속된 것으로

원인과 결과를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러한 존재란 경험

과 더불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상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와

같은 보특가라란 결코 영원한 실체일 수 없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굳이 오온과 별개로 그것의 실유를 내세울 필요도 없게 된다. 구

사론의 해당 문구는 다음과 같다. 

 

"만약 [보특가라] 자체가 바로 실유라고 한다면 마땅히 [오]온과는 다

른 [별개의 존재일] 것이니, 각각의 개별적인 [온처럼] 그 자성이 [온과

는]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필시

마땅히 원인을 가져야 할 것이다."51)

51)「아비달마구사론」(『대정장』29 p. 152c); 권오민(2002) pp. 1341-1342 번역
    참조. “體若是實應與蘊異. 有別性故. 如別別蘊. 又有實體必應有因.”;
    Pradhan(1967, ed) p. 461 “rūpādivat bhāvāntaraṃ cet dravyataḥ.
    saṃbhinnasvabhāvatvāt skandhebhyo 'nyo vaktavya itaretaraskandhavat. 
    kāraṇaṃ cāsya vaktavyam.”

 

한편 보특가라가 가유(假有)라면 그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

는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않는 그것은 무제약적인 것

으로 ‘허공의 꽃’이나 ‘토끼의 뿔’과 같이 원인 없이 생겨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그렇다면 그것은 원인 없는 존재인 까닭에

어떠한 작용이나 영향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

고 만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굳이 보특가라를 내세울 필요가 없

게 된다. 권오민이 해설하듯이 그러한 존재란 외도(外道)에서 내세

우는 윤회를 초월한 아뜨만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52) 구사

론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52) 권오민(2002) p. 1342, 각주 67).

 

"혹은 마땅히 [보특가라는] 무위(無爲)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외도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다. 또한 마땅히 그것의 작용은 없어

야 것이니, 그럴 경우 [무슨 이익이 있어] 실유[의 보특가라]를 주장할

것인가?."53)

53)「아비달마구사론」(『대정장』29 p. 152c); 권오민(2002) p. 1342 번역 참조. 
    “或應是無爲. 便同外道見. 又應無用. 徒執實有.”; Pradhan, ed(1967) p. 461
    “asaṃskṛto vā. atas tīrthikadṛṣṭiprasaṅgo niṣprayojanatvaṃ ca.”

 

이상과 같이 ‘오온과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닌’ 보특가라는 오

온과 다른 것도 같은 것도 아닌 바로 그 이유로 자체적인 문제점

에 봉착한다. 필자는 바수반두의 이 비판이 리즈 데이비즈와 라다

크리슈난이 생각했던 비아에 관한 두 가지 관점 모두에 그대로 적

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선 인용문의 비판은 리즈 데이비즈가

언급한 윤회하는 자아의 부당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윤회하

는 자아란 원인과 결과에 얽매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러

한 존재란 결코 초월적이지 못하다. 한편 뒤쪽 인용문에 나타나는

비판은 라다크리슈난이 언급했던 윤회하지 않는 아뜨만의 무용성 

혹은 무의미함을 지적한다고 할 수 있다. 윤회를 초월해 있는 그

것은 어떠한 작용이나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까닭에 굳이 그것을

내세울 이유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바수반두의 비판은 오

랜 세월을 건너 등장한 현대 학자들의 상이한 관점을 미리 예상하

고 있었던 듯하다.

 

Ⅴ.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의 세 번째 동향은 무아와 윤회가 공존한

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이상적인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한 무아의 교설과 괴로움의 현실을 드러내는 윤회의 교설은 동

일한 지평위에 아무런 충돌 없이 나란히 서게 된다. 이러한 논리

의 귀결은 무아인 그대로 윤회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윤회하는 자

체가 이미 무아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와 윤회의 상충된 성격은

이미 해소되어 있으며, 오히려 두 교설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표명

했던 많은 현대의 학자들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필

자는 선행 연구를 통해 이러한 무아 해석의 문제점을 이미 언급하

였다. 본고에서는 가급적 중복을 피하면서 이 입장에 내포된 문제

점을 추가적으로 지적하고자 한다.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업과 과보는 있

지만 짓는 이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라는「第一義空經」의 경구

가 지목되곤 한다.54)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과보는 존재하지만 그

러한 행위를 짓거나 과보를 받는 별도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므

로 무아라는 것이다. 윤호진은 이 구절에 대해 한마디로 불교윤회

의 특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며, 새로운 생존(punarbhava)의 발생

에 대해서는 이전의 행위와 그 과보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55)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불교의 윤

회란 이주(移住, transmigration)나 재현(再現, reincarnation)보다

는 재생(再生, renaissance)이나 전달(傳達, transmission)에 가깝

다는 견해에 찬성한다. 뿔리간들라(Puligandla) 또한 동일한 관점

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영속적인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생존이 인과적 사슬로 묶여 있는 부단

한 흐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56) 그는 영속하는 실체 개념을 연

상시키는 화현(化現, reincarnation)이라는 말을 피하고 대신 재생

(再生, rebirth)라는 말을 쓸 것을 권한다.

54)『대정장』2 p. 92c; 임승택(2015) pp. 16ff; 윤호진(1992), pp. 96-97 등.
55) 윤호진(1992) pp. 96-97. 
56) 이지수(1993) 역 p. 72. 

 

사실 윤회의 주체를 배제하더라도 전생(轉生)에 대한 설명은 충

분히 가능해 보인다. 예컨대 한자경은 위의 경구에 대해 “인간의

업(業)에 대해 그 업과 독립적으로 업을 짓는 작자(作者)로서 상정

된 자아란 그야말로 우리 자신의 설정이고 개념일 뿐”이라고 지적

한다.57) 자아라는 개념이 있을 뿐 실제로는 무아이며, 업과 과보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인과응보의 법칙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58)

이 입장에 따르면 인과응보와 윤회는 연기(緣起)의 원리에 의해

뒷받침되며, 연기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

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연기설은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 자체 안에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

는 핵심․본질․자성․실체를 결여한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러

한 한자경의 논리는 무자성(無自性)․공(空)을 내세우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으로까지 확장될 여지를 보인다. 무아와 윤회는 서로 공존

할 뿐만 아니라 연기․무자성․공 등의 개념과도 소통 가능하다는 것

이다.

57) 한자경(2010) p. 59. 
58) 한자경(2010) pp. 63-64.

 

정승석 또한 “윤회의 주체가 없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

는 의문에 대해 ‘업에 의해’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59) 그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허용하지 않으

면서도 생존이 유지되는 사례로서 붓다와 팍구나(Phagguna) 존자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지목한다.60) ‘누가(ko)’ 의식(識)이라는 음식

을 먹고 접촉하고 감수하고 열망하고 집착하느냐고 묻는 팍구나

존자에게 붓다는 그것은 좋은 질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은

‘누가’ 무엇을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대신 붓다는

‘무엇에 의해’ 혹은 ‘무엇을 조건으로’ 무엇을 하게 되느냐의 방식

으로 묻는 것이 좋은 질문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여섯의 감각영역

(六處)을 조건으로 접촉(觸)이, 접촉을 조건을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집착을 조건으

로 있음(有)이, 있음을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老死)가 있다고 덧붙인다. 이 답변은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생존이 가능한 이유를 해명한다고 할 수 있다.

59) 정승석(1999) p. 117.
60) 정승석(1999) p. 116; SN. Ⅱ. pp. 13-14 “몰리야팍구나 존자가 세존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누가(ko) 의식(識)이라는 음식을 먹습니까?’ 세존께서
    답하셨다.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 나는 ‘[누가 음식을] 먹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 음식을] 먹는다.’라고 말한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이라는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나에게 ‘세존이시여, 의식이라는
    음식은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다. 
    거기에는 타당한 답변이 있다. ‘의식이라는 음식은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을 위한 [정신․ 물질현상(名色)]의 조건이다. 그러한 [정신․물질현상이라는
    조건이] 있을 때 여섯 장소(六入)가 있고, 여섯 장소를 조건으로 접촉(觸)이
    있다.’라고 … (āyasmā moḷiyaphagguno bhagavantaṃ etadavoca: ko nu 
    kho bhante viññāṇahāraṃ āhāre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āhāretī'ti ahaṃ na vadāmi. Āhāretī'ti cāhaṃ vadeyya, tatrassa kallo
    pañho 'ko nu kho bhante, āhāretī'ti. Evañ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kissa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o'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

 

정승석에 따르면 업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오온의 활동이 남기

는 잠세력(潛勢力)이다.61) 잠세력은 오온이 파괴될 때 새로운 존재

를 위한 연기적 조건을 만들고 그 결과 가아(假我)인 오온이 새롭

게 형성되도록 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것을 ‘오온의 상속(相

續, saṃtāna)’이라고 부른다. 윤회란 업 혹은 오온의 상속에 의해

이루어지는 까닭에 주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윤회

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무아론과 업론은 내면적 연

관성을 지니게 되며, 바로 그것은 불교의 업설 또는 윤회의 특수

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와 같이 불변불멸의 주체 혹은 자아가 없

이 윤회가 진행되는 것을 일컬어 다름 아닌 ‘무아 윤회’라고 부른

다.62) 이러한 설명은 무아와 윤회가 공존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규명하는 듯하며,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61) 정승석(1999) p. 117. 
62) 정승석(1999) p. 285.

 

그런데 정승석은 사색의 범위를 현대의 생명체 복제 문제로까

지 확장시킨다. 불교의 ‘무아 윤회’는 자아가 아닌 업에 의한 생존

의 상속 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63) 체세포에 의한 동물복제는

‘무아 윤회’의 실험에 속하며,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복제의 성공은

현대의 과학이 불교의 ‘무아 윤회’를 실증했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64)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무아 윤회’에 내포된

치명적인 약점을 들추는 것이기도 하다.65) 정승석 스스로 밝히듯

이 “생명의 복제는 벗어나야 할 윤회의 양산이다.”66) 또한 “만약

인간 복제가 이면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식으로든 상속되는

삶이라면 그러한 상속은 이미 윤회하는 이 세계에 이루어져 있

다.”67) 안타깝게도 이러한 언급은 ‘무아 윤회’라는 것이 결과적으

로 윤회 자체에 대한 언명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노출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무아 윤회’의 논

리가 대승불교에서 가르치는 연기․무자성․공 따위의 개념에 연결

될 만한 여지는 다분하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무아에 대한 해석으

로는 타당한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68)

63) 정승석(1999) p. 288. 
64) 정승석(1999) p. 290.
65) 임승택(2015) pp. 10-14.
66) 정승석(1999) p. 297.
67) 정승석(1999) p. 297.
68) 임승택(2015) pp. 16-25.

 

조성택은 “업과 과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라는 문제의 경

구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69) 그는 이 경구가 깨달음

의 경험으로서의 무아를 언급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행위의 주체

가 궁극적으로 없다는 것으로 무아설 자체에만 초점을 모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경구를 윤회에 결부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다루었듯이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阿羅漢)

에게도 이전에 지은 업보는 남는다.70) 그러나 아라한은 그러한 업

보에 반응하여 스스로 업을 ‘짓는 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해

서 업에 의한 지음과 받음이 종식된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며

결국 오온의 상속 또한 멈추게 된다. 조성택에 따르면 붓다는 이

러한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세계 이

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다름 아닌 무아가

자리해 있다.

69) 조성택(2003) p. 181. 
70) 임승택(2015) pp. 17-18

 

이제부터글자색는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에 관련하여 고려해 볼 수

있는 부파불교 문헌들의 해설을 살펴보고자 한다. “업과 과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라는 제일의공경의 구절에 대해 구사론에

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온(蘊)은 찰나이므로 그것의 옮겨감(輪轉)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번

뇌와 널리 익힌 업으로 인한 [오]온만은 중유(中有, antarābhava)라는

지각(想)의 상속을 통해 모태에 들어간다. 비유하자면 등불의 불꽃은

비록 찰나이지만 상속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물이 아니다. 따라서 비록 자아가 없지만 번뇌와 업에 의해 생겨난

온의 상속이 [새로운]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성립한다."71)

71) Pradhan(1967, ed) p. 129; 서성원(1993) p. 24 번역 참조 “kṣaṇikā hi
    skandhās teṣāṃ saṃcarituṃ nāsti śaktiḥ. kleśais tu paribhāvitaṃ
    karmabhiś ca skandha'mātram antarābhavasaṃjñikayā saṃtatyā mātuḥ
    kukṣim āyāti. tadyathā pradīpaḥ kṣaṇiko 'pi saṃtatyā deśāntaram iti
    nāsty eṣa doṣaḥ. tasmāt siddham etad asaty apy ātmani
    kleśakarmābhisaṃskṛtaḥ skandhānāṃ saṃtāno mātuḥ kukṣim āpadyata
    iti.”; 대정장 29, p. 47c “蘊刹那滅於輪轉無能. 數習煩惱業所爲故. 
    令中有蘊相續入胎. 譬如燈焰雖刹那滅. 而能相續轉至餘方. 諸蘊亦然. 名轉無失. 
    故雖無我而由惑業諸蘊相續入胎義成” 

 

인용문은 영속하는 자아를 부정하면서도 오온의 상속에 의한

옮겨감(saṃcarituṃ) 즉 윤회(saṁsāra, vaṭṭa, vṛtta)를 언급한다. 

따라서 이 대목은 ‘무아와 공존하는 윤회’의 사례로 간주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입장을 표방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바로 이

문구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는 도입부에 묘사되

고 있는 “옮겨감은 불가능하다(saṃcarituṃ nāsti śaktiḥ).”라는 구

절에 주목한다. 저자인 바수반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상속에

의한 옮겨감’이 아니라 그러한 옮겨감 혹은 윤회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인용문 전체에 대해 오온이 찰라마다 소멸한다는

진리와 유리된 범부 중생들에 한해 중유(中有)의 상속을 통한 윤

회가 있게 된다는 의미로 파악한다. 

 

한편 남방상좌부(Theravāda)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

agga)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타난다. 다음의 구절은 앞서 언급했던

구사론에 대한 필자의 이해를 더욱 공고하게 뒷받침해준다. 

 

"그때 그에게 그 [오]온의 상속은 네 가지 도(magga)의 독약과 접촉

함으로써 윤회의 뿌리인 번뇌들이 모두 근절된다. [그렇게 될 때] 단지

작용만 하는 상태로 경험된 몸의 업 등 모든 종류의 업은 분쇄되기에

이르고, 미래의 재생을 생산하지 못하는 법성(法性, dhammataṁ)에

도달하여 다음 생의 상속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다만 최후의

의식(識)의 소멸과 함께 마치 연료가 다한 불처럼 집착 없이 완전한 열

반에 들어간다."72)

72) Vism. pp. 688-689 “ath' assa so khandhasantāno tena
    catumaggavisasamphassena sabbaso vaṭṭamūlakakilesānaṁ
    pariyādiṇṇattā kiriyabhāvamattaṁ
    upagatakāyakammādi-sabbakammappabhedo hutvā āyatiṁ
    punabbhavānibhinibbattanadhammataṁ āgamma bhavantarasantānaṁ
    nibbattetuṁ na sakkoti. kevalaṁ carimaviññāṇanirodhena, nirindhano
    viya jātavedo, anupādāno parinibbāyati.”

 

인용문은 오온의 상속을 묘사하면서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종식

되는 순간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즉 번뇌가 근절되면 업이란 단

지 작용으로만 남게 되어 윤회가 사라진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오온의 상속에 의한

윤회는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며 설령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궁극의 목적에 해당하는 열반이란 바로

그러한 상속이 멈춘 경지에 다름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

가 있다. 

 

살펴본 부파불교의 논서들은 앞서 다루었던 조성택의 관점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오온이란 찰

라마다 소멸한다. 그러한 사실을 체득하게 되면 주체로서의 ‘인간’

이란 해체되고 더 이상 윤회란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 점에서 윤

회와 공존하는 무아란 와해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번뇌를

지닌 존재들은 새로운 모태에 들어간다. 즉 무아임에도 무아를 수

용하지 못하는 까닭에 윤회에 떨어지게 된다. 무아를 체득하지 못

한 그들에게 윤회란 엄연한 현실의 세계가 된다. 구사론의 관련

구절은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 그러한 사실을 환기시키는 가르침

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중유라는 개념을 고안하

여 윤회의 매개로 설명한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한편 청정도론의

해당 구절은 번뇌의 소멸을 통해 윤회가 종식된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을 선명하게 밝힌다. 오온의 상속에 의한 윤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연료가 다한 불처럼 집착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는 것

을 묘사하고 있다. 

 

Ⅵ. 마치는 말

 

붓다는 스스로의 가르침에 대해 괴로움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다고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난 사변적 견해

(diṭṭhi)는 열반의 성취에 보탬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언쟁과 갈등

으로 얼룩진 괴로움의 현실을 조장할 뿐이다.73) 이 점에서 붓다의

무아는 사변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는 ‘자아에 대한 주장(自我論, 

attavāda)’을 거부하는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집착의 제거

라는 실천적 관심에 소용이 되는 한에서 무아의 교리를 펼쳤던 것

이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서 굳이 그의 침묵을 깨뜨리고 정형

화된 무아 이론의 구축을 시도하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제까지의 사례를 통해 볼 때 그러한 시도는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73) 임승택(2015) p. 7; 임승택(2012) pp. 252ff.

 

본고는 무아의 교설이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을 가능성을 전제

하였다. 필자가 파악하는 무아의 시대별 단층은 ‘형이상학적 무아’ 

와 ‘실천적 무아’라는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본고는 전자의 ‘형

이상학적 무아’에 초점을 맞추었고, 다시 거기에 배속될 수 있는 3

가지 해석에 대해 살펴보았다. 단멸론의 방식으로 윤회의 교리를

배척하는 ‘윤회 부정의 무아’, 초월적 자아를 드러내기 위해 경험

적 요인들을 부정하는 방식의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 무아의

논리로써 윤회를 규명해 들어가는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무아 이론의

구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그러

한 시도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려

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형이상학적 무아’란 경험 너머의 영역을 경험적

언어로써 구성해 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

고 보았다. 먼저 ‘윤회 부정의 무아’는 죽음 이후 자아를 부정한

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도 긍정도 원칙적으

로 가능하지 않다. 특히 ‘윤회 부정의 무아’는 삼매에 의한 초월적

지혜를 통해 제시되는 윤회의 교설과 정면으로 부딪힌다. 바로 이

것은 사쌍팔배(四雙八輩)라는 교리체계를 거스르게 된다. 한편 ‘비

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는 직접적인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다. 또한 구사론의 비판에서처럼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진실한 자

아가 결코 초월적인 것일 수도 유의미한 것일 수도 없다는 논리적

난점을 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아 윤회’의 논리를 펼치는 ‘윤회

와 공존하는 무아’는 윤회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는 타당성을 지

닐 수 있지만 무아 자체를 설명하는 것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무아 윤회’는 극복해야 할 윤회의 상태와 윤회가 멈춘 이상적 경

지를 동일한 차원으로 오해하도록 만드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이상과 같은 ‘형이상학적 무아’는 붓다가 제시한 원형적 가르침

으로서 ‘실천적 무아’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본고의 분량

관계상 ‘실천적 무아’를 규명하는 작업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필

자는 양쪽 모두를 순차적으로 검토하고서 서로를 비교․대조할 예

정이며, 그것을 통해 붓다 자신이 가르쳤던 무아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실

천적 무아’의 양상은 오온(五蘊)에 대해 자아가 아니라고 진술하고

서 멈추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소극적 진술은 논리적 완결

성이 떨어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바로 이것이 형이상학

으로의 도약을 의도적으로 멈춘 무기(無記, avyākata)의 정신과

통해 있다고 생각한다. 붓다는 특정한 견해나 생각으로부터 자유

로운 고양된 인격의 실현을 위해 무아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무아

자체를 내세우는 주장이나 견해마저도 그것에 집착할 경우 붓다

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필자의 일

관된 의도는 ‘형이상학적 무아’에 얽매이지 말고 원래의 가르침인

‘실천적 무아’에 각성하자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