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경전의 한계와 의의/정준영

실론섬 2019. 2. 15. 13:29

동아시아불교문화」 35집, 2018. 9, 49~74

초기경전의 한계와 의의

정 준 영/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명상학전공 교수

 

1. 들어가는 말

2. 초기경전의 결집과 한계

3. 초기불교의 실천과 의의

4. 마치는 말 

 

<국문초록>

본고는 불교의 근본가르침과 정체성의 문제를 재고하는 차원에서 초기불

교가 무엇인지를 다룬다. 특히, 경전을 통한 가르침을 파악하기 위해 초기경

전의 역사적 위치와 실천적 입장을 논의한다. 먼저 역사적 위치를 조망하기

위해 초기경전의 결집과 한계 다룬다. 붓다의 입멸 후 진행된 결집의 한계에

서는 1차 결집의 구성과 내용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에 집중한다. 에띠엔 라

모뜨(Etienne Lamotte), 프레비시(Charles S. Prebish), 올덴베르그(Oldenberg),

빈테르니츠(Winternitz), 미나예프(Minayeff), 듀트(Dutt), 푸생(Poussin), 드용

(J.W. de Jong)의 의견들을 통해 1차 결집의 진위에 대한 문제가 지속되었음

을 소개한다. 이 과정을 통해 1차 결집의 진위가 불분명하지만, 그 내용과 구

성을 허구로 보는 것도 추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두 번째인 초기불교의 실

천과 의의에서는 여러 경전을 통해 붓다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가르

침에 대한 실천과 체험을 강조했다는 점을 부각한다. 초기불교의 붓다는 시

대의 문제를 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괴로움과 그 소멸에 대해 논했다. 따라

서 초기불교 안에서는 결집의 진위여부보다 현재하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체험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더욱 중요하

다. 초기불교는 가르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초기불교는 부파불교 이전의 불교를 말한다. 초기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는 근본분열 이전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에 진행된 불교사건의 진위여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정밀

한 문헌적, 역사적 검토를 진행한다할지라도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붓

다시대의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재 가능한 접근방법은 1

차 결집에 대한 빠알리 율장(Vinaya piṭaka, 律藏)과 경장(Sutta piṭaka, 經藏)의

내용일부를 비교하며 차이점을 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할지라

도, 저본은 상좌부(Theravāda, 上座部)불교1) 전통에서 인정하는 4차 결집에

의해 남은 자료이고,2) 2100여 년간이라는 시간의 풍파 속에서 온전히 남아있

다는 것을 전제하기에는 불교전체의 공통된 신뢰를 얻기 어렵다. 또한 경전

의 성립이전 불교를 찾기 위해, 후대에 편집된 경전을 활용한다는 것 역시 모

순이 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을 안고 시작한다. 따라서

본고는 상좌부전통에서 유지한 빠알리 문헌을 기반으로 진행하는 한계를 지

닌다.

1) 1950년, WBF(World Fellowship of Buddhism)에서는 현존하는 불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히나야나 
   혹은 소승불교라는 [폄하]용어사용을 금하기로 했다.
2) 정준영(2009), 테라와다불교의 발생과 흐름 ?한국불교학? 제55집, 한국불교학회. 

 

초기경전을 통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입멸

후, 결집과 경전의 내용파악이 필요하다. 본고는 초기불교가 무엇을 의미하

고 강조하는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불교의 근본가르침과 정체성

의 문제를 재고하는 차원에서 본 연구가 시작되었다.3) 그 과정에서 첫 번째 

결집[1차 결집]의 과정과 내용에 집중하여 초기라는 시대적 입장을 살필 것이

다. 이 과정에서 초기경전이 지니는 구조적 한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차 결집을 통한 초기경전의 구성과 신뢰문제는 오래전부터 유럽과 인도학자

들을 통해 논의되었다. 특히, 판데(Pande)의 연구는 1800년대 후반부터 진행

된 기존의 논의들을 살피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4) 국내에서는 이자랑의 사

만따빠사디까의 서문과 빨리 연대기에서의 제1결집 이 상좌부전통의 1차 결

집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5) 붓다의 입멸 후 진행된 1차 결집은 붓다

의 가르침이 구조화되는 불교역사의 시발점이자 초기불교 시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아마도 남방과 북방의 구분을 떠나 1차 결집의 의

미를 부정하는 불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차 결집의 진위에 대해서는 파

악이 불분명한 상태다. 이와 관련하여 불멸 후 초기상가의 태동과 같은 중요

사건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필 것이다.

3) 본고는 제4회 반야불교문화연구원 학술대회에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한국불교의 정체성’
   이라는 대주제 아래 초기불교 분야로 발표.
4) Govinda Chandra Pande(2015), Studies in the Origins of Buddhism, Delhi: Motilal Banarsidass,
   p.9ff ; Przyluski, J.(1926), Le Concile de Rājagṛha, Introduction à l?Histoire des Canons et des
   Sectes Bouddhiques, Paris : Librairie Orientaliste Paul Geuthner.
5) 이자랑 사만따빠사디까의 서문과 빨리 연대기에서의 제1결집「불교원전연구」2,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1. p.119~164 : 이 결집을 전하는 문헌은 20여종에 이르는데, 이들은 
   문헌의 성격에 따라 4종류의 문헌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열반경류에 속하는 것으로
  「佛般泥洹經」,「般泥洹經」이 있다. 두 번째는 제 부파의 율장 犍度部(Khandhaka)의 五百犍
   度가 있으며, 세 번째는「阿育王經」등 설일체유부가 전하는 제 문헌이 있다. 네 번째는 빨리
   상좌부에 속하는 문헌으로, 율장에 대한 주석서인 사만따빠사디까(Samantapāsādikā, 善見律
   毘婆沙)의 서문, 즉 바히라니다나(Bāhiranidāna, 外序)와 초기의 빨리 연대기인 디빠밤사
   (Dīpavaṃsa, 島史)․마하밤사(Mahāvaṃsa, 大史)가 있다. 참고) 塚本啓祥(1980),「增補改訂 初
   期佛敎敎團史の硏究」, 東京: 山喜房佛書林. 18

 

다른 하나는 붓다의 입멸 후 전해진 가르침의 내용이다. 초기불교가 무엇

을 의미하고 강조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파악이 필

요하다. 붓다는 여러 경전을 통해서 제자들이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

기보다 먼저 관찰하고 확인할 것을 강조한다. 스승에 대한 확인 작업을 마친

후, 수행자는 스스로 실천을 통해 지혜를 쌓아야한다. 불교란 붓다의 가르침

을 따라 실천하고 경험하는 종교이다. 불교는 깨달음을 통하여 존재의 실제

를 발견함으로써 정신의 해탈을 성취하는 길이다. 불교가 철학이냐 종교이

냐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 체험하고 성장해가는 과정

을 포함한다. 정통성에 대한 역사적 진위를 논의하는 마당에 개인의 수행경

험을 논하는 것은 추상적 발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불교가 종교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한 실천과 체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의

정체성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어쩌면 초기경전의 역사적 진위여부를 논하

기에 앞서 경전의 내용을 지금 이 순간 실천하고 경험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야 할지도 모른다.

 

본문에 해당하는 ‘2.초기경전의 결집과 한계’는 주로 마하빠리닙바나숫따

(Mahāparinibbāna sutta) 와「쭐라왁가(Cullavagga)」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학

자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본 연구가 1차 결집에 한정되어

결집의 다양성에 대해 세심히 살피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 그리고 ‘3. 초기불

교의 실천과 의의’는 주로 경장(經藏, Sutta Piṭaka)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피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붓다의 가르침이 이해와 실천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만,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생략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2. 초기경전의 결집과 한계

 

불교전통은 1차 결집을 통해 붓다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

음을 전한다. 붓다의 입멸 후6) 마하까싸파(Mahākassapa, 摩訶迦葉)는 붓다의

죽음을 기뻐하며 자유를 선언하는 비구 수밧다(Subhadda)의 말을 듣고 붓다

의 가르침을 방치하면 조속히 인멸할 것이라는 우려에 교법의 결집을 서두

른다. 마하까사파는 500명의 제자들과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에서 붓다

의 설법을 모은다. 이것을 ‘제1차 결집’이라고 한다.7) 결집을 나타내는 ‘상기

띠(saṅgīti)’는 함께 노래한다는 의미로 ‘합송(合誦)’이라고 번역되며 제자들이

서로 기억하고 있는 붓다의 교법을 함께 암송하고 수정하는 작업이다. 1차

결집을 통해 경장(Sutta Piṭaka)과 율장(Vinaya Piṭaka)이 수집되었다. 1차 결집

에 대한 내용은「쭐라왁가(Cullavagga)」의 11장을 통해 구체화 된다.

6) 1956년 스리랑카, 인도, 미얀마, 태국 그리고 많은 남아시아 국가들에서 붓다의 대반열반
   2500주년 기념행사를 정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행하였다. 따라서 테라와다 전통에 따
   르면 붓다는 오늘(2018년)기준으로 2562년[기원전 544년] 전에 입멸했다고 볼 수 있다. [2500
   년-1956년=544년, 2018년+544년=2562년] 하지만 여기에는 다양한 이견들이 있다. 참고)
   Hajime Nakamura(1996), Indian Buddhism, Delhi: Motilal Banarsidass, 12 ; Richard F.
   Gombrich(1988), Theravāda Buddhism ,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 Kegan Pau, 11 ;
   Surendranath Dasgupta(1922),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 I. Delhi:Motilal 
   Banarsidass.81.
7) 마성은 테라와다불교의 기원에 대해 불멸 직후에 개최되었던 제1결집 시기라고 설명한다. 
   그는「Dīpavaṁsa(島史, 4세기)」와「Mahāvaṁsa(大史, 5세기)」 및「사만따빠사디까
   (Samantapāsādikā, 一切善見律註, 율장의 주석서)」를 통하여 ‘Theravāda’, ‘Theriya’, ‘Therika’
   라는 용어가 1차 결집에서부터 사용되었다고 설명하는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의 주장
   을 수용하고 있다. 참고) 마성(2007),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 ?불교평론? 33호. ;
   Walpola Rahula(1982), “One Vehicle for Peace” Vesak annual, Vol.Ⅴ, Colombo: Baudha 
   Marga Organ of the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Sri Lanka Regional Centre. 41-44. 

 

“[마하까싸파]벗들이여, 우리는 가르침(dhamma)과 계율(vinaya)을 결집

합시다.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가르침이었던 것은 쇠퇴

하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계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가르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지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

고, 계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집니다. ... [비구들] ‘그러면 존자여,

장로께서 비구들을 선정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하까싸파는 하나가 모자라

는 오백명의 아라한을 뽑았다. ... 그리고 존자 마하까싸파는 존자 아난다

를 뽑았다. ‘우리는 어디서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할 것인가?’ 그리고 장로들

은 이와 같이 생각했다. ‘라자가하 시는 우리의 활동영역이고 머물 곳도 많

다. 우리가 라자가하 시에서 우기를 보내면서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하면

어떨까?’”8)

8) Vin ii, p.285 ; 전재성(2014),「쭐라왁가-율장 소품」,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062.

 

1차 결집은 붓다의 가르침과 계율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여러 그룹으

로 나누어 진행했다. 대중들은 마하까싸파의 의견에 동의하며 결집을 준비

했고 라자가하의 칠엽굴(七葉窟)로 장소를 구체화 한다. 칠엽굴은 오랫동안 

결집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웨바라(Vebhāra)산 정상의 두 개의 동굴이

다.「수망가라위라시니(Sumaṅgala Vilāsinī)」에 따르면 우빨리(Upāli)

와 그의 제자들은『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 律藏)』를 암송했고, 아난다

(Ānanda)는『디가니까야(Dīgha Nikāya)』를, 사리뿟따(Sāriputta)는『맛

지마니까야(Majjhima Nikāya)』를, 마하까사파는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aya)?를, 아누룻다(Anuruddha)는『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를 암송했고 암송자 외에 다른 499명의 아라한들이 이를 확인하고 붓다의 설법

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9) 이처럼 1차 결집은 바나까(bhāṇaka),10) 즉 구전 전

승하는 자에 의해 함께 합송되었음을 알 수 있다.11) 1차 결집이 끝난 후에는

몇 가지 부수적인 작업들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아난다의 청정을 위한 소소

한 과실에 대한 문책,12) 마부 출신의 찬나(Channa)에 대한 벌(Brahma daṇḍa)

13) 등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떠나 붓다와 가까웠던 사람들을 벌

하면서 붓다의 입멸 후에 상가의 권력이동이나 기강확립을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14) 또한 결집이 끝났을 때 뿌라나(Purāṇa) 존자가 500명의

비구들과 함께 닥키나기리(Dakkhiṇāgiri)로부터 라자가하에 도착한다. 마하

까싸파는 결집이 끝났으니 결집의 내용을 수용할 것을 제안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붓다의 가르침이 있다며 결집의 수용을 거부하는 듯 발언한

다.15) 이러한 내용은 마하까싸파 주도의 결집이 결코 대표성을 갖는다고 보

지 않으려는 집단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9) SV i, p.13, 15.
10) PED p.557 : bhāṇaka, a reciter, repeater, preacher (of sections of the Scriptures)
11) K.R. Norman, A Philological Approach to Buddhism : The Bukkyo Dendo Kyokai Lectures 1994.
    London :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1997. p.47 참고) CV.
    p.479f ; Dip I, p.24f : 상좌부불교 전통에 따르는 불교의 결집은 불멸후 약95일, 아잣따사뚜왕
    의 치세시절, 마하까싸파의 지휘로 500명의 아라한이 7개월간 구전되던 가르침을 수집한 것이다.
12) Vin ii, p.288.
13) Vin ii, p.292.
14) 참고) 조준호,(2011), 인도불전의 성립과 체제 ,「역경학개론-불전의 성립과 전승」, 운주사.41.
15) Vin ii, p.290.

 

1차 결집의 역사적 사실성은 학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지속되는 주제이

다. 에띠엔 라모뜨(Etienne Lamotte)는 ?인도불교사?를 통해 결집전승에 대한

비판을 소개한다.

 

“제1결집 연대는 일반적으로 붓다가 열반에 든 해로 정해졌지만, 집회장

소와 참가자 수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마가다국의 옛 수도였던 라

자그라하 외에 역시 다른 장소들이 있다. ... 결집에 참여한 장로들의 숫자

가 500명이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역시 1000명[大

智度論]과 3000명[佛般泥洹經]이라고 말하는 곳도 있다. 그 집회에서 결집

된 성전과 그 모임을 위해 까샤파가 내세운 구실은 붓다의 죽음을 상가의

해방이라고 본 수바드라(Subhadra)비구의 잘못된 생각 때문이었다. 수바드

라[Subhadda]가 한 말은 마하빠리닙바나숫따(Mahāparinibbāna sutta)의 여러

본에 분명히 나오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 말이 일으켰던 반응에 대해

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16) [괄호는 논자]

16) 호진 옮김(2006),「인도불교사」 1, 서울: 시공사. 256

 

라모뜨는 1차 결집의 진행은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 구성과 진위여부에 대

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음을 소개한다. 먼저 결집의 장소나 인원에 대해 의

문을 품는다. 그리고 결집의 배경이 되었던 수밧다(Subhadda) 비구의 반응에

대해서도 마하빠리닙바나숫따(Mahāparinibbāna sutta) [이하 DN16]를 통해

서는 문제시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결집의 사유가 문헌적으로 불

확실하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보존되는 경전들이 1차 결집을 통해 구성되었

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한다.17) 프레비시(Charles S. Prebish) 역시 1차 결집이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다. 그는 불멸후의 모임에 대해

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경전을 구성하는 대규모의 작업의 진행에 대해서는

허구로 보고 있다. 특히, DN16과의 불일치를 그 원인으로 설명한다.18) 이러

한 주장을 살펴보면 1차 결집에서 구성된 경과 율의 내용과 진위여부는 불확

실하며 후에 상좌부 전통 안에서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듯하다.

올덴베르그(Oldenberg)도 1차 결집의 진위에 의문을 갖는다. 그는 1차 결집

이 주로 DN16을 토대로 하고 있으나 결집의 시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 결집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주장한다.19) 이러한 설

명은 그가 편집한 Vinaya Pitākaṃ의 서문을 통해서도 설명된다. 그는 DN16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본 경의 편집자가 1차 결집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1차 결집에 비해 2차 결집의 역사적

진정성은 매우 확실하다며, 1차 결집은 2차 결집을 통해 불교의 정통성을 유

지하기 위한 합의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20) 빈테르니츠(Winternitz)

는「쭐라왁가」의 11장과 12장은 원래 율장에 속하지 않는 부록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특히, 11장은 다른 장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시작되며, 내용과 방식

면에서 DN16과 상당히 유사하다. 심지어 본래 DN16의 일부였다는 주장도 전

개한다. 또한「쭐라왁가」는 제목 그대로 소품(小品)으로「마하왁가(大品)」와

다르게 짜깁기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21) 이러한 주장을 배경으로 붓

다의 입멸부터 근본분열 이전 시기의 초기불교를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

가능해 보인다. 1차 결집을 완전한 허구로 보는 것 역시 추론에 불과하지만,

1차 결집의 실제와 작업이 불분명한 상태라는 점 역시 사실이다.

17) 몇몇 후대의 부파들이「까타밧투(Kathāvatthu, 論事)」와 같은 논서들을 1차 결집에서 편찬된
    것이라 주장하는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18) Charles S. Prebish(1974), “A Review of Scholarship on the Buddhist Council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33, No. 2 Feb. 239 참고) 이필원(2010), 최초 경전의 성립과 기록 , 
   「불교 경전은 어떻게 전해졌을까」불광출판사. 46.
19) Hermann, Oldenberg(1898), “Buddhistische Studien”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ändischen Gesellschaft. 613-32. 참고) 프랑케(Franke)도 1차 결집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쭐라왁가(Cullavagga)」의 11장, 12장의 구성에 대해 앞의 내용과 달리 독립적인 자료    

    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DN16을 토대로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20) Hermann,

    Oldenberg(1969), Vinaya Pitākaṃ Vol. I The Mahāvagga, PTS. xxii~21) Maurice Winternitz(1933),

    A History Of Indian Literature Vol.2, Kolkata: University of Calcutta. 25, 각주 2번

 

미나예프(Minayeff)는 1차 결집에서 편집된 경과 율이 확실한지에 대한 평

가 자료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1차 결집은 명확하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전의 편집본이 더 후대의 것으로, 사실상 부파

발생 이후의 것이라는 설명이다.22) 듀트(Dutt)는 푸생(Poussin)이 주장하는

포살을 위한 빠띠목카(Pātimokkha, 戒目) 회합이 1차 결집이라고 확대된 것이

라는 설명에 동의한다.23) 1차 결집의 동기는 붓다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소

소한 계율의 실천을 폐지해도 좋다고(Khuddakānukhuddakāni sikkhāpadāni)

동의했던 것을 결정하는 자리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24) 그리고 아난다가

경들을 암송했다는 설명은, 후대에 아난다의 속죄와 빠리숫디(Pārisuddhi, 淸

淨)에 추가된 내용으로 보고 있다.25) 이러한 논쟁은 1800년대 후반에서 1900

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드용(J.W. de Jong)은 1차 결집에 대한 올덴베르

그와 푸생의 이견을 설명하며 결국 이러한 논쟁은 결론을 내지 못했으며 서

로 상반된 입장을 가진 불교의 여러 전통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26)

22) I. P. Minayeff(1894), Recherches sur le bouddhisme. Traduit du russe par R. H. Assier 
    de Pompignan Paris: Leroux. 29, 35~36 
23) La Vallée Poussin(1991), “Councils (Buddhist)”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 4, 
    Louis de. 179~185
24) DN ii, 154 ; SV, 592
25) Nalinaksha Dutt(1941), Early Monastic Buddhism Vol.Ⅰ, Kolkata:Calcutta Oriental Press. 339.
26) 강종원 편역, J.W. 드용(2004),「현대불교학 연구사」, 동국대학교출판부. 69.

 

기존의 연구들은 대부분 유럽학자의 서구적 발상에서 기인하는 접근방법

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1차 결집의 진위여부에 객관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다. 다만, 이들 대부분의 연구가 DN16과「쭐라왁가」의 11,

12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두 문헌의 차이를 논하여 1차 결집의 진위를

파악한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는 초기의 것으로 신뢰해야한다는 조건이 성

립될 수 있다. 하지만 DN16 역시 후대에 편집된 경전으로 주장되고 있

다.27) 만약 비교의 대상 모두가 초기의 것이 아니라면 비교 자체는 그 의미

를 잃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섬세한 논의를 한다고 할지라도 현존

하는 문헌을 가지고 문헌의 성립 이전의 시대를 논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27) Govinda Chandra Pande(2015), Studies in the Origins of Buddhism, Delhi: Motilal Banarsidass.
    98 : 빈테르니츠에 의하면, 최초기에는 “완전한 열반(Nirvāṇa)의 경”이 있었음에 틀림없으나,
    머지않아 내용이 추가되었고, 오늘날 전해지는 “빠리닙바나(parinibbāna)의 큰 경”이 되었다
    고 한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붓다를 나타내는 구역, 말하자면 벨루와가마(Beluvagāma)에서
    붓다에게 생긴 질병 이야기라든가 다섯 번째 구역에서 아난다(Ānanda)의 깊은 슬픔 등은 초
    기 원본 부분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또한, 경전에서 뿔뿔이 흩어진 게송들은 “가장 오래된
    흔적”이며, 붓다가 마법사나 신격화된 사람인 양 기적을 행하는 부분, 붓다의 유물이나 탑
    (stūpa)을 건립한 이야기 등이 언급된 결론부분은 후대의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리스 데이빗
    (Rhys Davids)은 이 경전 중에서 다른 경전에도 나타나는 구절의 목록을 철저히 작성하였고,
    1/3이 반복된다고 결론 내렸다. 참고) Maurice Winternitz, A History Of Indian Literature, Vol.2,
    University of Calcutta, 1933. 

 

결국 1차 결집의 역사적 진위여부는 현재까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현

재 상좌부불교 전통에서 유지하고 있는 빠알리 경장과 율장이 1차 결집을 통

해서 합송되고 고스란히 전승되었다고 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1차 결집의

규모나 작업이 상좌부불교전통에서 설명하는 맥락과 얼마나 유사할지는 모

르겠으나, 붓다의 입멸 후에 첫 번째 모임이 있었고, 적어도 붓다의 중요한

말씀(sutta)들과 율장의 일부는 이 시기에 모아졌음이 분명하다.28) 붓다의 입

멸 후에도 법과 율에 대한 상가(Saṅgha, 僧伽)의 존중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유지하는 상가는 대규모 성장과 더불어 복잡한 구성원들과

각자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을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포용

이라는 특징으로 말미암아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방향으로 신속하게 성장했

을 수 있다. 결국, 불멸 후 100년, 바이샬리(Vaiśālī)에서 계율에 대한 열 가지

관점[十事] 또는 마하데와(Mahādeva, 大天)의 아라한에 대한 다섯 가지 관점

[五事]에 의해 상가는 분열한다.29) 이것을 ‘제2차 결집’이라고 부른다. 상좌부

불교를 기준으로 두 번째 결집은 전통을 고수하는 상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행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왓지(Vajji)의 상가는 지지세

력을 구축하여 새로운 결집을 열었으며 문제가 되었던 ‘열 가지 대상’을 합법

화 시킨다. 이때 열 가지 대상을 인정하기 위해 일만여 명이라는 많은 사람들

이 참여했기에 이를 ‘큰 합송(Mahāsaṅgīti)’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율장의 해석

에 대한 문제로 단일했던 승단은 최초로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고 근본분열

이라고 부른다. 초기불교가 쪼개진 것이다. 이와 같은 분열에 의해 불교승단

은 전통적 계율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의 장로들이 모인 상좌부와 대중부

(Mahāsaṃghika, 大衆部)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러한 분열의 배경에는 경과

율에 대한 해석이 있다. 즉, 1차 결집 이후에 100여 년간 해석에 차이는 있지

만 경과 율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의 역시 매우 섬세하게 진

행되는 것으로 봐서는 경과 율을 통한 초기불교의 융성을 확인할 수 있다.

28) Ananda W.P. Guruge(1984). Buddhism the Religion and Its Culture, Colombo: The World
    Fellowship of Buddhism. 50.
29) Vin ii, 294 ; 한편 북방전승에 따르면 붓다가 입멸하고 116년(또는 160년)이 지나고 파
    탈리푸트라의 대천(Mahādeva, 大天)은 5가지 이유 (①餘所誘 ②無知 ③猶豫, ④他令入,
    ⑤道因聲故起)로 불교의 이상인 아라한을 부정했다. [이러한 내용은 Kathāvatthu(173ff,
    187ff, 194, 197.)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장로들이 대천의 무리
    에게 배척받아 서북인도로 쫓겨 감으로서 상좌부와 대중부의 근본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 설명한다. 이렇게 근본분열한 불교교단은 그 후에 교법 상의 해석을 놓고 분열의 분열
    을 거듭한 끝에 불멸 4백년 무렵 마침내 근본 2부를 포함하여 20여파로 지말(支末)분열
    하기에 이르렀다. 참고) 권오민(2004),「인도철학과 불교」, 민족사. 213. 

 

적어도 빠알리 니까야(Pāli Nikāya)는 각각의 다양성과 불일치에도 불구하

고,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니까야에는 간혹 해석에 대한 논쟁이 기록되어 있

으며, 부파 간에 다른 해석의 진행에도 서로에 대한 존중이 나타난다.30) 뿐만

아니라, 중요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부파 간 논쟁에서 나타난 사상들이 니까야의 내용이 아닌 아비담마처럼 후

대의 것임은 이미 알려져 있다. 결국 경과 율이 초기불교의 근원에 위치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따라서 니까야는 불교역사의 최초기, 적어도 상가가

교리적으로 하나였던 초기불교의 시대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31)

30)「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와「아비다르마코샤(Abhidharmakośa, 阿毘達磨倶舍論)」를 
    보면 그들문헌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해석에 대해서도 다루는 부파가 다른 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31) Govinda Chandra Pande, 앞의 책. 12.

 

3. 초기경전의 실천과 의의

 

앞 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초기경전의 성립 중, 결집에 대한 진위여부는

결론내리기가 쉽지 않다. 붓다의 설법이 경과 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수세기에 걸쳐 복합적으로 전승되어 왔기에 현존하는 경전이 정확한

붓다의 설법이라고 하기 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 유지되는

경장과 율장의 온전한 구성을 1차 결집이라는 사건에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과 율에 대한 합송과 해석에 대한 논의

(論)가 시작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본장은 초기경전의 성립과 구성의

문제가 아닌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초기불교가 지니는 특징과 의의에 집중

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면 초기경전의 역사적 진위나 법수(法數)로 정의하는

교리의 틀을 벗어나 초기불교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국내에 초기불교가

뿌리내리고 활성화된 것은 교리나 전통성의 논의 이전에 수행이라는 실천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실천을 강조하는 니까야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설

법에 해당한다. 니까야의 가르침은 수행자 스스로가 이해하고 경험적으로

실천하는 합리적인 믿음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32)

32) 본 장의 내용은 정준영(2012), 감성을 벗어나 이성으로 ,「믿음,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운주사를 참고하여 재논의하고 있다. 

 

붓다는 깨달음 이후에 설법을 시작했다. 율장「마하왁가(Mahāvagga)」의

마하칸다까(Mahākkhandhaka) 와 경장의 아리야빠리예사나숫따

(Ariyapariyesanāsutta) 등에 따르면 붓다는 깨달음 이후에 범천 사함빠띠

(Sahaṃpati)의 권청에 설법을 결심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 이 미묘하고

숭고한 가르침을 설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한다. 먼저 선택한 대상은 알라라

까라마(Āḷāra Kālāma)와 웃다까라마뿟따(Uddaka Rāmaputta)였다. 하지만 그

들의 임종으로 인해 다섯 명의 수행자들을 차선으로 선택한다. 당시 그들은

[붓다가야(buddhagayā)로부터 현재도로 기준 250km거리] 바라나시(Bārāṇasi)

의 미가다야(Migadaya, 鹿野園)에 머무르고 있었다. 붓다는 홀로 그들을 향해

가던 중에 사명외도 우빠까(Upaka)를 만난다. 붓다는 자신이 번뇌를 부순 삼

마삼붓다(sammā sambuddha)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우빠까는 신뢰하지 않는

듯이 인사를 하며 떠난다.33) 붓다는 먼 거리를 유행하여 미가다야에 도착하

고 다섯 명의 수행자를 만난다. 하지만 그들은 붓다를 외면하고 설법할 기회

를 주지 않는다. 붓다는 그들을 향한 3번의 설득을 통해 설법할 기회를 얻는

다. 그리고 비로소 담마짝까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sutta, 初

轉法輪) 라는 첫 번째 가르침을 펼친다.34) 이러한 정황은 깨달은 자의 첫 번

째 설법이라고 하기에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깨달은 스승이 스승의 대접

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붓다는 이 자리에서 중도(中道)와 중도의 실천인 팔

정도(八正道) 그리고 사성제(四聖諦)를 설한다. 이들은 상주론과 단멸론을

벗어나는, 인간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가르

침이다. 이 과정을 통해 불교의 시작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붓다는

기존의 전통에서 벗어나 스승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수행자 스스로

확인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33) Vin i, p.7 ; MN i, p.169 ; DN ii, p.39 ; SN I, p.138 참고) upako ājīvako huveyyapāvuso’ti 
    사명외도 우빠까는 ‘벗이요 그럴지도 모르겠지요’ 혹은 ‘도반이여,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특히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을 했기에 머리를 흔든다는 의미에 대해 긍정이냐 
    부정이냐의 해석이 따르고 있다. 참고) 전재성(2014),「마하박가-율장대품」,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01 ; 전재성(2009),「맛지마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347 ; 전재성(2011),「디가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623 ; 각묵(2006),「디가니까야」2권, 초기불전연구원. 89 ; 대림(2012),
   「맛지마니까야」1권, 초기불전연구원. 639 ; Bhikkhu Ñāṇamoli and Bhikkhu Bodhi(1995), The
    Middle Length Discourses of the Buddha.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262 
34) Vin i, p.9 ; SN v, 420.

 

『앙굿따라니까야』의 까라마숫따(Kālāmasutta) 는 수행자가 실천을 도모

하기 위해서 스승에 대한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한다. 까라마

인들은 께싸뿟따(Kesaputta)를 방문한 붓다를 찾아가 수행자들과 성직자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의심되고 믿기 어렵다고

말한다. 붓다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다음과 같이 설한다.

 

“까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

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

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

아들이지 말라. 까라마인들이여, 그대는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유익한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법들은 지자

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이

익과 행복이 있게 된다’고 알게 되면, 까라마인들이여, 그때에 그것들을 받

아들이십시오.”35)

35) AN i, 188f ; 참고) 대림(2006),「앙굿따라니까야」1권, 초기불전연구원. 466 ; 전재성, 
   「앙굿따라니까야」3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7, p.198.

 

붓다는 아무리 뛰어난 자의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소문이나 주변의 평판

등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

다. 초기불교 안에서 제자가 스승의 언행이나 가르침에 의혹을 제기하고 확

인하는 과정은 적합한 절차인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유

익하고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붓다는 주변의 평판에 의존하여 무

작정 믿고 따라서는 안 되며, 주변의 흔적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도 안 된

다고 강조한다. 붓다의 지혜로운 제자는 붓다에 대해 알고 신뢰하며, 가르침

을 배우며, 실제로 수행을 경험한 후에 비로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라고 설명한다.36)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이 진리 안에서 진행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불교를 개방적인 종교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진

리는 시대를 초월하기에 시간적 선후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벗어난다. 초기

불교는 가르침에 대해 맹목적 추종이 아닌 합리적 믿음과 실천을 강조한다.

만약 경전의 진위여부가 증명된다고 할지라도, 그 가르침을 신뢰하고 실천할

수 없다면 경전의 의미는 사라진다. 초기불교가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까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붓다의 가르침에 있다.『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āya)』의 위망사까 숫따(Vīmaṃsaka sutta) 는 수행자[제자]가 어떻게 붓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붓다

는 제자들이 여래 자신을 두 가지 측면에서 조사해야 한다고 설한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올바로 완전히 깨달았는지 아닌지를 식별하기 위

해 여래를 관찰해야 한다. … 여래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즉 눈과 귀

를 통해 인식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오염

된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37)

37) MN i, p.318 ; MN ii, 140 ; 비고) 전재성 앞의 책, 561. 1025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관찰하고 조사하라고 지도한다. 제자는 눈을

통해 스승[여래]의 육체적인 행위가 올바른지 확인하고, 귀를 통해 스승의 언

어적인 행위와 생각이 올바른지 확인해야한다. 물론 오늘날 입멸한 여래를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초기불교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현대인도 자신의 스승을 조사하고 그 가르침이 지금 현재 실천가능한지를

살피면 된다. 초기경전의 붓다는 그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판단하고 확인할

수 있도록 권유했고, 그의 가르침이 언제나 확인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

었다.38)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믿음은 견고해진다.

38) It(Itivuttaka). 122 : “[여래는] 말한 것 그와 같이 행위하고, 행위 한 것 그와 같이 말한다.” 
    iti yathāvādi tathākāri yathākāri tathāvādi. 

 

“비구들이여, 어떠한 자에게라도 이러한 이유, 이러한 용어, 이러한 어구

를 통해서 믿음이 여래에 대하여 심어지고, 뿌리내리고, 정립된다. 비구들

이여, 이것은 이유를 갖추고 뿌리를 보여주는 견고한 합리적인 믿음

(ākāravati saddhā)이라고 불리는데, 수행자(samana)나 바라문(brāhmana)이

나 신(deva)이나 악마(mara)나 범천(Brahma)이나 세상의 어떠한 자도 이겨

낼 수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관찰

한 것이고 여래가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관찰된 것이다.”39)

39) MN ii, 320 ; 비고) 전재성, 앞의 책, 564.

 

위망사까 숫따 는 초기불교가 지니는 특성이 무엇인지 강조하고 있다.

합리적인 믿음을 통해 강화된 신뢰는 개인의 체험을 통해 실천되어야 한다.

만약 수행자가 이러한 절차 없이 주변의 평가와 사회적 기준만을 잣대삼아

가르침을 평가하려한다면 마치 장님들이 줄을 서 서로 보지 못하는 것과 마

찬가지라는 것이다.『맛지마니까야』의 짱끼숫따(Caṅkī sutta) 는 합리적이

지 못한 어리석은 믿음[amūlikā saddhā]에 대하여 설명한다.

 

“바라드와자여, 마치 장님들이 줄을 섰는데, 앞에 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

이 바라드와자여, 그 바라문들이 설한 것은 장님들이 줄을 선 것과 같이 앞

에 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

하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렇다면 그 바라문들은 맹목적인 믿음(amūlikā saddhā)이 아닙니까?”40)

40) MN ii,. 170 ; 비고) 전재성, 앞의 책, 1074.

 

붓다는 이유나 근거 없는 추종은 마치 장님의 믿음처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맹목적 신앙과 같다고 설명한다. 초기불교 안에서 스승을 확인하지

않고, 스스로 경험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가르침을 신뢰하는 것은 근거 없는

(amūlakā) 혹은 쓸모없는(amūlikā) 믿음에 해당한다. 붓다는 이러한 형태를

장님에 비유하며 맹목적인 믿음을 지닌 자들이라 표현했다.41) 붓다는 성스

러운 존재에 대한 신뢰와 무조건 복종을 원하지 않았다. 무조건적 헌신이나

사랑보다는 합리적인 지혜를 추구했다. 초기불교의 지혜는 지적(知的)인 근

거에 의존하여 생각하거나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합리적 실천이

라는 경험을 통해 현재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 작업이 필요하다.

종교 안에서 중요한 헌신과 사랑도 지혜를 바탕으로 했을 때 온전한 발현이

가능해진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의 해석이 있고 역사적 진위여부가 증명된

다고 할지라도 실천을 통한 지혜가 수반되지 않으면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

는 것이 아니다.『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 Nikāya)』의 니와라나왁가

(Nīvaraṇavagga, 장애의 품) 는 수행자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 노력(精勤)의 

리(Padhāniyaṅga, 五精勤支)에 대해서 부연한다.42) 수행자가 실천을 위한 

력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붓다의 깨달음이 있으며 그것이

사실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매번 실천하고 확인해 가면서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41) V. Trenckner. A Critical Pāli Dictionary(CPD). I The Royal Danish Academy, 1924. 398 :
    a-mūlaka > without root : worthless, useless.
42) AN iii, 65.

 

초기불교는 수행이라는 실천과정을 강조한다. 첫 번째 설법인 담마짝까

빠왓따나숫따 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anatta]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팔정도

를 제안한다.『숫따니빠따(Sutta Nipāta)』의 아라와까숫따(Āḷavaka sutta) 는

체험과 실천을 통한 가르침의 확인을 강조한다.43) 수행자는 수행의 길로 약

입(躍入, pakkhandana)하여 체험과 지혜를 통해 믿음을 키워나가게 된다.『상

윳따니까야』의 우빠니사숫따(Upanisasutta) 는 연기의 과정을 설명함과 동

시에 믿음으로 인한 해탈과 갈애의 제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44) 이러한 과

정에서의 믿음은 단순히 붓다나 스승에 대한 역사적 진위의 논의가 아닌 이

해와 실천을 통한 지혜를 필요로 한다.45) 초기불교는 현상이나 가르침에 대

한 의문과 질문을 통해 성장한다.

43) Sn. 182, 184 ; 참고) 전재성(2004),「숫타니파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51f.
44) SN ii, 32 : 참고) 전재성(2006),「쌍윳다니까야」2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62. 
45) MN i, 320.

 

붓다는 가르침을 설하고, 가르침을 이해한 자들이 실천하기를 바랐다. 초

기불교의 핵심은 사성제(四聖諦, ariya sacca, 고귀한 진리)에 있다. 붓다는 첫

번째[苦聖蹄]와 두 번째 진리[集聖蹄]를 통해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해 인정하

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진리를 통해 괴로움의

해결과 해결방법에 대해서 제안했다. 붓다가 분석한 인간의 괴로움은 ‘목마

름(taṇhā, 갈애)’때문이었고, 그 괴로움을 지속적으로 반복[輪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현명한 사람(viññū purisā)들이 이해하

기 시작했고,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경험하여 지혜를 통해 확인

하였다. 체험을 통해 합리적으로 확인된 지혜는 궁극적인 목표[nibbāna, 滅聖

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붓다는 열반이라는 도시를 만들어낸 것이 아

니라 찾아낸 것이다.46) 열반은 붓다의 존재 여부에 상관없는 것이다. 초기불

교는 붓다를 믿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에

서 시작한다. 붓다는 열반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고, 그 길은 팔정도[道聖諦]

이다. 결국 우리가 고대의 도시를 찾아가든, 열반을 향해 수행하든 양쪽의 경

우 모두, 그가 말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수행자는 도성

제(道聖諦, magga)가 열반으로 이끌어준다는 것에 대해 한 발 한 발 경험하면

서 확신한다.『맛지마니까야』의 삼마딧띠숫따(Sammādiṭṭhisutta) 는 사성제

를 지혜로 분명히 아는 것이 올바른 견해(正見)를 갖고, 가르침(法)에 흔들리

지 않는 믿음이 생기고, 가르침을 성취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47) 진리

(sacca)는 현재 경험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가 가르치고 누가 따르느냐의 문

제가 아니다. 붓다가 설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그 가르침

은 쓸모없게 된다. 붓다는 시대의 문제를 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괴로움과

그 소멸에 대해 논했다. 이러한 붓다의 명제는 역사적 문제가 아니다.

46) SN ii, 104.
47) MN i, 48 ; 참고) 전재성(2009),「맛지마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59

 

『상윳따니까야』의 뿝바꼿타까숫따(Pubbakoṭṭhaka sutta) 는 붓다와 사리

뿟따 간의 대화를 통해 초기불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리뿟따

는 붓다의 질문에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소개한다. 그는 붓다를 믿기

때문에 불사[涅槃]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 스스로가 오근을 닦아 나

아가며 이해하고, 보고, 알고, 실현하고, 지혜로 얻어 불사를 성취하는 것이

라고 설명한다. 붓다는 자신을 믿기보다 스스로 믿음과 함께 실천하여 지혜

를 얻는다는 사리뿟다의 답변에 “훌륭하다, 훌륭하다, 사리뿟다여!(Sādhu

sādhu Sāriputta)” 하며 극찬한다.48) 누군가 붓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면 그것은 지혜를 얻기 위한 선행 과정에 불과하다. 사성제라는 진리와 열반

이라는 깨달음은 붓다가 창조한 세상이 아니라 붓다가 발견한 것이다. 초기

불교는 붓다가 아닌 붓다의 가르침을 의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초기불교

에 대한 신뢰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평가와 실천이 선행된 바탕 위에서 만

들어진다. 초기불교의 실천은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경험했을 때, 그 결

과로 확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가 붓다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것이

라는 생각은 불교의 기원과 붓다의 가르침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1차 결집의 역사적 사실성에 논거가 되었던

DN16을 통하여 붓다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설한다. 붓다는

입멸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스스로 실천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48) SN v, 221 : bhante ñātaṃ diṭṭhaṃ viditaṃ sacchikataṃ phusitaṃ paññāya nikkaṅkhāham.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 비구들도 자기의 섬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

[自歸依]하라(atta-dīpa atta-saranā).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anañña-saranā).

법의 섬에 머물고 법에 귀의[法歸依]하라(dhamma-dīpa dhamma-saranā). 다

른 것(añña)에 귀의하지 말라.”49)

49) DN ii, 100; “atta-dīpa(bhikkhave) viharatha atta-saranā anañña-saranā, dhamma-dīpa 
    dhammasaranā anañña-saranā. 참고) 이수창(2003),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 ,
   「불교학연구」제6호 불교학연구회. 157~184 : 위 인용문에서 앞의 것은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자귀의 법귀의’ 내용이 곧 사념처관
    (四念處觀)임을 설한 대목이다. 마성의 논문에 따르면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은 ‘자주
    (自洲,자기의 섬) 법주(法洲, 법의 섬)’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자등명 법등명의 atta dīpa는
   『대반열반경』외에도 Sn 501, DN iii, p.58-7, SN iii, p.42-8, SN v, p.154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dīpa는 ‘섬’ 혹은 ‘등불’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해석에 따라 두 가지의 의미 
    모두가 사용되고 있다.

 

4. 마치는 말

 

지금까지 두 장의 본문을 통해 초기경전의 한계와 의의를 살펴보았다. 기

존의 서구에서 진행된 연구를 통해 초기불교의 시기를 찾아가는 작업은 요

원해 보인다. 1차 결집의 실제작업이 불분명한 상태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1

차 결집의 내용과 구성을 완전한 허구로 보는 것도 추론에 불과하다. 현재 상

좌부불교 전통에서 유지하고 있는 빠알리 경장과 율장이 1차 결집이후부터

고스란히 전승되었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 현존하는 문헌을 가지고 문헌의

성립 이전의 시대를 논한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1차 결집의 역사적 진

위여부는 의문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결집 이후에 100여 년간, 경과 율이 유지되고 있었

다는 점은 사실이다. 1차 결집의 내용에 대한 진위여부로 초기불교의 신뢰를

담보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50) 초기라는 시대적 상황만으로 초기불교가 

지니는 의의를 포괄하기는 어렵다. 결집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불교의 역사

성을 다루는 작업이지 붓다의 가르침을 다루는 작업이 아니다. 초기불교의

초기는 단순히 시대적 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500여년의 역사 안에

서 실존했던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영역이다. 붓다는 모든 현

상의 변화(anicca, 無常)와 변화하는 현상의 불만족성(dukkha, 苦)을 강조했

다. 그리고 고정된 실체(atta)를 찾기 위해 고행이 만연하던 시절에 무아

(anatta, 無我)임을 알아냈다. 또한 붓다는 계급적인 사회관을 탈피하고, 신비

적이고 초월적 신앙관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그가 지적한 문제점은 현

재도 경험되고 있으며, 붓다의 가르침에 따른 이해가 실천되고 있다. 붓다는

자신의 입멸 후에 수밧다가 자유를 선언하며 망언을 할는지, 마하까싸파가

결집을 시도할는지, 뿌라나가 그 결집을 부정할는지, DN16과 ?쭐라왁가?의

비교작업이 자신의 가르침을 호도할는지, 주석서가 자신의 설명을 왜곡할는

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초기불교의 핵심은 수밧다의 망언에 대한 비구

들의 반응 여부를 찾는 것에 있지 않다. 붓다는 시대의 문제를 논한 것이 아

니라 인간의 괴로움과 그 소멸에 대해 논했다. 따라서 초기불교 안에서는 결

집의 진위여부보다 현재하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체험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 초기불교는 가르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