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상윳따니까야(Samyutta nikaya) 경전의 구성및 설명

실론섬 2014. 4. 20. 03:42

한국빠알리성전협회
Korea Pali Text Society
전화 02-2631-1381 전송 2631-3707

 

[쌍윳따니까야]란 어떠한 경전인가?

빠알리어 성전은 원래 스리랑카의 테라바다(Theravāda:上座部)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다른 빠알리 성전들처럼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에서 각 나라 문자로 기록 보존되어 오고 있다. 최근의 교정본으로는 1881년에 시작된 [빠알리성전협회본(P.T.S.)]과 1959년 까시얍(Kasyap) 스님의 지도 아래 인도에서 교열하여 데바나가리로 표기한 [나란다판본(N.D.P.S.)]이 있고 가장 최근의 교열본으로는 1980년 우누(U Nu)에 의해 조직된 [미얀마삼장협회본(Burma Piṭaka Association)]이 있다.


이번에 이 [쌍윳따 니까야]의 번역에서는 다른 판본과 대조하지 않고 순전히 로마나이즈한 [빠알리성전협회본]에 의존했음을 밝혀둔다. 즉 빠알리성전협회 간행의 레온 페르(L. Feer)가 교열한 빠알]본 [쌍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 I:相應部經典)]와 우드워드(F. L. Woodward)가 교열한 붓다고싸(Buddha-ghosa)의 주석서인 [싸랏타빠까씨니(Sāratthapakāsinī I:顯示調御疏)]를 저본으로 했다. 그리고 리스 데이비드 부인(Mrs. Rhys Davi-ds)이 영역한 [유사한 말씀들의 책(The Book of Kindred Sayings)] 독일학자 가이거(W. Geiger)가 독역한 [쌍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 I, II, Die in Gruppen geordnete Sammlung aus dem Pāli Kanon der Buddhisten)] 일본의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 1-6:南傳大藏經 12-18)]을 참고해서 번역했다.

 

쌍윳따는 쌍쓰끄리뜨어의 sam-√yuj의 빠알리어형 과거분사로 ‘[주제에 따라] 함께 묶인 것, 연합된 것, 상응(相應)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한역 대응경에서는 ‘잡(雜)’이라고 번역했는데, 아이러니칼하게도 한역 [잡아함경]의 분류방식이 각 권의 주제와는 상응하지 않는 잡다한 편집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빠알리 성전을 번역한 일본의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에서 ‘상응(相應)’이란 한역술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유가(瑜伽, yoga)와 관계된 많은 전문술어의 번역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용어라서 착오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니까야는 산스크리트적인 어원 자체가 Nikāya로 ‘모임, 모음, 종류, 신체, 주거, 부집(部集)’의 의미를 지닌다. 이 용어에 해당하는 것이 북전에서는 아함(阿含)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아함은 산스크리트어로 아가마(āgama)를 음사한 것으로 ‘유래, 기원, 재산, 전통, 전승’의 뜻을 지닌다. 따라서 [쌍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는 ‘[주제에 따라] 함께 엮은 [가르침 또는 경전들의] 모음’이란 뜻을 지닌다.

 

[쌍윳따 니까야]는 빠알리 성전의 경(經), 율(律), 론(論)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의 원천인 경장(經藏)에 속해 있으면서 그 위치는 다른 두 니까야, 즉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長部經典)]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中部經典)]에 이어 세번째에 있으며, 그 다음에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曾支部經典)]가 뒤따른다. 한역대장경에서도 순서는 같으며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에서는 제2권에 실려 있다.

 

한역 [잡아함경]과 [쌍윳따 니까야]의 비교
한역 [잡아함경]은 북방 전승의 싸르바스띠바다(Sarvāstivāda:說一切有部) 계통과 남방 전승의 빠알리 계통이 뒤섞여 있는 50권으로 되어 있으며, 송(宋)나라 때에 [승만경(勝蔓經)] [화엄경(華嚴經)] 등을 번역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A.D. 435~483년 사이에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는 아함부에 속하는 수미구족(首尾具足)한 경들만 1,362경이 있다. 그런데 그 경들 가운데는 각 경들과 관련된 유사한 경들을 생략해서 각각의 경 끝에 언급한 것만도 엄청나서 제7권에만도 만3천 개의 경이 있다. 총계를 따지자면 [선견율비바사(Samantapāsādika:善見律毘婆沙)] 등에 언급된 [쌍윳따 니까야]의 숫자 7,762보다 훨씬 많은 만5천여 개에 이른다. 이외에도 북인도의 설일체유부의 전통에서 출발한 A.D. 2세기의 진대실역(秦代失譯)인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16권과 A.D. 5세기의 오위실역(五魏失譯)인 [잡아함경] 1권이 있다.

 

[쌍윳따 니까야]는 5vagga(卷), 56saṁyutta(編), 203vagga(品),  2,889sutta(經)로 이루어져 있다. 한역술어로 분류하자면 유게(有偈), 인연(因緣), 온(蘊), 육처(六處), 대취(大聚)의 순서로 편집되었으나 [유가사지론(兪伽師地論)] 85 「유부잡사(有部雜事)」 39에 의하면 한역 [잡아함경]은 온(蘊), 처(處), 계(界), 연기(緣起), 성문(聲聞), 불(佛), 성도(聖道)의 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두 내용은 절반을 훨씬 넘게 같은 경전이지만 편집순서가 뒤바뀌어 있으며 세부 내용에서도 부파에 따른 해석상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별역잡아함경]을 포함한 세 가지 한역본의 잡아함경 318경이 [쌍윳따 니까야]의 「시와 함께 모음」의 214경과 유사하며, 나머지 부분은 [장로게(長老偈:Theragāthā)] [장로니게(長老尼偈:Therīgāthā)] [숫타니빠다(經集 : Suttanipāta)] 등에 소속되는 경전들과 유사성을 지닌다.

불멸 후 400년경에 까니시까 왕 당시에 저술된 설일체유부의 근본성전인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Abhidharmamahā-vibhāṣaśāstra)]에 [아함경]의 내용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그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쌍윳따 니까야]의 경우도 그 성립시기는 기원전으로 훨씬 소급해 올라가며 이른바 제일결집(第一結集)에서 그 모태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쌍윳따 니까야]의 경우 [디가 니까야]나 [맛지마 니까야]에서 보이는 체계적인 법상조직(法相組織)이나 분별사변(分別思辨)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보다 초기불교적인 소박한 형태로 소급해 올라간다고 보아야 한다. 아까누마지젠(赤沼智善)은 이러한 [쌍윳따 니까야]의 소박한 내용을 대하면 마치 공자의 논어를 읽는 것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다. [쌍윳따 니까야]야말로 부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베다어로까지 소급하는 빠알리어의 게송언어로서 쓰여진 것으로, 부처님 당시로 소급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빤데(G. C. Pande)에 따르면 [쌍윳따 니까야]의 내부에서도 소박한 형태의 초기 경전군과 아비달마 풍의 비교적 체계적인 법상조직을 갖는 후기 경전군을 나누어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초기 경전군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 가운데 세 가지 존재의 다발(三蘊)만을, 불법승(佛法僧)의 삼보 가운데 부처님만을 귀의처로 언급하는 등 법수적(法數的)인 미완, 양냐발끼야(Yājñāvalkya)를 연상하게 하는 무아설과 모순되는 유아론(有我論), 유신견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용어의 미분화―예를 들어 hadayassānupattiṁ(마음의 성취), saviññāṇakāya(의식을 지닌 몸) 또는 samanakaḷebara(마음을 지닌 몸)―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고 빤데에 의하면 내용적으로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의 개념이 초기경전들 가운데 고층(古層)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말 [쌍윳따 니까야]의 구성
우리말 [쌍윳따 니까야] 전체는 다음과 같은 5모음집, 46쌍윳따,  2889경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북전의 해당경전인 잡아함경의 1362경보다 1537경이 더 많은 것이다.


제1권 [시와 함께 모음(Sagāthavagga:有偈聚)]:11쌍윳따, 28품, 271경
제2권, 제3권 [인연 모음(Nidānavagga:因緣聚)] :10쌍윳따, 27품, 286경
제4권, 제5권 [존재의 다발 모음(Khandhavagga:蘊聚)] :13쌍윳따, 24품, 733경
제6권, 제7권 [감역 모음(Saḷāyatanavagga:六處聚)]:10쌍윳따, 33품, 391경
제8권, 제9권, 제10권, 제11권: [대품 모음(Mahāvagga:大聚)] :12쌍윳따, 103품, 1208경


우리말 [쌍윳따니까야]의 특징

① 국내 최초의 빠알리대장경 쌍윳따 니까야의 우리말 완역

② 세계 최초로 빠알리대장경 쌍윳따니까야의 생략품(확장품)을 완전복원하여 번역. 남방에 보관되어 있는 빠알리원전 쌍윳따니까야의 생략품은 우리말 쌍윳다니까야를 통해 빠알리어로 완전복원할 수 있는 역사상의 새로운 결집이 가능해짐. → 국내에서 남방의 팔만대장경인 빠알리 대장경을 완전복원한다면 불교역사상 세계적인 업적을 한국에서 이룰 수 있음(뜻있는 인사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요망됨)

③ 일반불자와 비불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의 우리말 일상용어 사용. 일반인도 불교사전 없이 읽을 수 있도록 불교에만 고유한 전문용어를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용어를 우리말의 일상용어로 사용하여 번역한 최초의 대장경역경사업임

④ 모든 근대적인 번역본까지 완전 대조하여 주석을 달았음. PTS 원전을 번역하는데 어려운 점은 붓다고싸의 주석서 싸라타빠가씨니를 참고로 하여 번역하되 기존의 모든 근대적인 번역본을 대조하여 주석을 달았다. 근대적인 번역인 리스데이비드의 영역과 가이거의 독일어역 및 일본의 남전 번역등을 참고하였다.

⑤ 대부분 주석이 없는 기존의 한글대장경과는 달리 쌍윳따니까야 전11권, 46쌍윳따, 2889경에는 6184개의 주석을 달았다.

⑥ 기존의 팔만대장경 및 동국역경원 간행 한글대장경의 잡아함 및 별역잡아함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해당경전이 있는 경우에는 경전의 제목에 주를 붙여 표기하였음.


빠알리대장경(빠알리어 경전) 역경사업

남방불교권에 현존하는 빠알리 대장경(빠알리어 경전)은 구전되거나 전승되어 오다가 역사적으로 스리랑카의 바타가마니 왕 당시(기원전 1세기경)에 싱할리 문자로 기록되었다가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등지에서도 자국의 문자로 옮겨서 보존되오고 있다. 빠알리 대장경은 부처님이 직접 사용했으리라고 추측되는 인도의 보편어인 빠알리어로 전승되어 온 경전으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한 가르침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우리 한국은 1600여년의 불교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방대한 대승불교의 팔만대장경을 소유하고 있으나 그러한 대장경의 토대가되는 근본불교의 가르침을 소장하고 있는 빠알리 성전에 관해서는 무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양보다는 100여년 일본보다는 60여년 뒤졌지만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빠알리성전을 역경하는 사업은 중차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미 서양에서는 1881년에 영국 옥스포드에 본부를 둔 빠알리성전협회가 리스 데이비드에 의하여 조직된 이래 방대한 초기불교의 경전을 영어로 번역해 오고 있다. 이 번역에는 많은 영국, 독일계의 학자들이 참여해왔다. 서양의 불교 이해는 모두 이러한 빠알리 성전의 번역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에서는 1930년대 후반에 빠알리성전협회 간행의 빠알리성전 교열본을 토대로 10여년 만에 중요한 초기경전과 논서들을 번역하여 남전대장경이란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어, 독어, 일어 번역들은 구역인데다 간혹 당시에 문법적인 미숙함으로 인한 오역이 발견되므로 오늘날 부분적으로 현대어로 새롭게 번역되고 있다.

 

1. 역자소개
철학박사,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13년차 회장을 역임했다.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석․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독일 본 대학의 박사과정에서 인도학․티베트학을 연구했으며, 독일 본 대학과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 강사, 동국대 강사, 중앙승가대학 교수,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을 역임했다. 한국불교대학(스리랑카 빠알리불교대학 분교) 교수, 충남대 강사, 가산불교문화원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세계빠알리성전협회의 한국대표이자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역경불사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 뇌허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역서> [인도사회와 신불교(한길사)], [범본대조 서장금강경 신역(백련불교문화재단)], [붓다의 가르침(한국빠알리성전협회)], [힌두교의 그림언어(동문선)]
<저서> [빠알리어사전], [기초빠알리문법], [예불문], [불교교리문답서], [범어문법학], [천수다라니 공덕과 의미]
<주요논문> 「초기불교의 연기성 연구」, 「중론귀경게무외소연구」, 「학문범어의 연구」, 「범파장음성론」 등

 

2.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한국빠알리성전협회는 빠알리성전협회 한국대표인 전재성박사가 1997년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빠알리어를 보급하고, 빠알리성전, 즉 빠알리삼장을 우리말로 옮기기 위한 목적으로 옥스퍼드에 있는 세계빠알리성전협회의 회장인 리차드 곰브리지 박사의 승인을 맡아 설립한 협회로 세계빠알리성전협회의 자매단체이다.

 

3. 세계빠알리성전협회
1881년 리스 데이비드박사 창립, 회장 리챠드 곰브리지 박사
❚ 중앙임원 및 고문
곰브리지 교수(영국 옥스포드대학교):회장      월폴라 라훌라 박사(스리랑카 대통령궁):부회장(사망) 헤밀튼 박사:명예 사무총장                    발비르 교수:고문
휜위버 교수(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교):고문   칼스 박사:고문
노만 교수(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전회장 고문  세이포트 루엑 교수:고문

❚ 세계 각국 대표
뉴우질랜드 : 구나라뜨네 박사 Dr. R.S. Goonaratne     대한민국 : 전재성 박사 Prof. Dr. Cheon, Jae-Seong
말레이시아 : 담마로카 요기 Yogi Dhammaloka         미    국 : 조지 본드 교수 Prof. George Bond
미  얀  마 : 우 코 레이 교수 Prof. U Ko Lay         오스트랄리아 : 버게스 선생 Mr. T. Burgess
인      도 : 바루아 교수 Prof. Dipak Kumar Barua    일    본 : 쇼도 모리 교수 Prof. Sodo Mori
태      국 : 씨암 소싸이어티 The Siam Society


<참고자료>
[쌍윳따 니까야]의 구성과 내용


■제1권 (쌍윳따 니까야 제1권의 전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쌍윳따 하늘사람」:8품, 81경
「제2쌍윳따 하늘아들」:3품, 30경
「제3쌍윳따 꼬쌀라」:3품, 25경
「제4쌍윳따 악마」:3품, 25경
「제5쌍윳따 수행녀」:1품, 10경
「제6쌍윳따 범천」:2품, 12경
「제7쌍윳따 바라문」:2품, 22경
「제8쌍윳따 방기싸」:1품, 12경
「제9쌍윳따 숲」:1품, 14경
「제10쌍윳따 야차」:1품, 21경
「제11쌍윳따 제석천」:3품, 15경

 

이 [쌍윳따 니까야]를  이해하는 데는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오전 6시에서 12시까지는 하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뭇삶을 도와주고 탁발하고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그리고 12시에서 오후 6시까지는 대자비삼매(大慈非三昧:mahākaruṇā samā-patti)에 들어 수행승이나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피고 그들을 돕거나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오후의 수면에 들기도 하고 일반사람들을 제도하거나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초저녁인 오후 6시에서 밤  10시까지는 수행승들이 방문하면 친견을 허락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밤중인 밤 10시에서 새벽 2시까지는 하늘사람이나 악마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제도했다.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경행(經行)을 하였으며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는 마음새김을 하며 취침했다.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는 열반에 들어 아라한의 경지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에는 대자비삼매에 들어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펴보았다.

 

제1쌍윳따 「하늘사람 쌍윳따」는 나무나 샘의 님프, 숲과 밭과 들과 가축과 가옥의 수호신뿐만 아니라 도리천을 비롯한 천상계의 여러 신들과 부처님 또는 부처님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이 경들은 최고층의 경전 가운데 하나로 빤데가 이야기하듯이 이를테면 그 첫번째 경에서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넘어 열반에 도달한다’는 중도적인 교설을 하늘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잘 반영하고 있다.


제2쌍윳따 「하늘아들 쌍윳따」는 「하늘사람 쌍윳따」와 동일한 맥락에 있으나 대화자인 천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는 하늘사람이라고 표현했고 대화자의 이름이 알려지면 하늘아들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나중에 힌두교의 절대신으로 군림한 시바(Siva:sk. Śiva) 신도 하늘아들로 등장해서 대화를 나누고 태양신 쑤리야(Suriya:sk. Sūrya)도 부처님과 일식현상을 두고 신화적인 대화를 나눈다. 특히 여기서 하늘아들로 등장하는 아나타삔디까는 아함경에서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으나 부처님이 계신 라자가하에 있는 벨루바나의 깔란다까니바빠에 하늘아들로 찾아와 수행승 가운데 지혜와 계행으로 열반에 도달한 싸리뿟따를 찬양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타계했으나 선행으로 천상계에 태어난 이교도의 제자들이 부처님을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제3쌍윳따 「꼬쌀라 쌍윳따」는 꼬쌀라 국의 왕 빠쎄나디(Pasenadi)와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하늘사람 쌍윳따」과 「악마 쌍윳따」 사이에 끼여든 것은 편집상의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긴 하지만, 꼬쌀라 국과 마가다 국의 전쟁에 관한 내용을 담은 역사적인 중요한 기록들을 담고 있고 개인의 미적 가치관의 상대성이나 인과응보 사상 등이 담겨져 있다.


제4쌍윳따 「악마 쌍윳따」는 악마 빠삐만(Papiman)과 부처님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여기서 악마는 자주 추하거나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서 부처님을 유혹하며 대화를 나눈다. 악마는 모든 경우에 감각적 쾌락이나 황금, 심지어 권력을 미끼로 부처님을 유혹하는 반대편에 선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의 악마와는 달리 여기서의 악마들은 부처님과의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냄으로써 깨달음의 길을 분명히 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대화의 현장에서 사라지는 소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제5쌍윳따 「수행녀 쌍윳따」는 출가한 수많은 수행녀들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그린 것으로, 그 갈등은 악마 빠삐만과의 대화로써 등장한다. 예를 들어 여자로서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비구니를 조롱하는 악마 빠삐만에게 쏘마라는 수행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법을 보는 자에게 지혜가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리.’ 이런 대화를 읽다보면 어느 수녀와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대화를 상기시킨다. 에카르트는 자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었던 한 수녀를 극구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밖에 여성의 출가정신과 세속적인 아름다움, 모성애 등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제6쌍윳따「범천 쌍윳따」는 당시 인도의 최고신인 범천과 부처님의 대화를 다룬 것으로, 부처님이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유신론적인 영원주의를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경전이다. 특히 이 범천 쌍윳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부처님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설할까 말까 망설이는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념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때 범천 싸함빠띠가 등장해서 진리를 설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그러한 청원 이전에 여기에 등장하는 싸함삐띠의 독백이 중요하다. ‘참으로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머뭇거리며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을 기울이신다면 참으로 세계는 멸망한다. 참으로 세계는 파멸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하는 것이 다음 순간 세계를 파멸로부터 구원하는데 필수적인 것임을 자각하신 것을 드러낸다.


제7쌍윳따 「바라문 쌍윳따」는 「범천 쌍윳따」가 부처님 당시의 보다 지배적인 종교와의 관념적인 관계를 들어내는 데 비해 당시의 지배적인 종교의 사제였던 바라문들과 신흥종교인 불교와의 실제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특히 절대신과 사제로서의 우월성을 믿는 제사 중심주의를 숭배했던 바라문교의 사제들에 대한 부처님의 처방은 유명한 쑨다리까 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라.’ 특히 이 쌍윳따의 「재가신도의 품」에는 부처님의 위트 있는 유머로 가득한 경전들이 있다. 어떤 바라문 농부가 탁발하는 부처님을 비난한 ‘그대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드십시오’라는 모욕적인 언사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는다. 믿음이 씨앗이고 고행이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에 묶인 쟁기이다.’ 그밖에 자꾸만 한 집으로 탁발을 하러 가자 그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한 바라문의 난처한 질문을 부처님께서 얼마나 재치 있게 넘기는가가 우다야경에 나타나 있다.


제8쌍윳따 「방기싸 쌍윳따」이다. 방기싸 장로는 교단에서 유명한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행생활에서의 유혹을 스스로 경계하여 시를 짓기도 했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위대함을 경탄하여 시를 짓기도 했다. 그가 제자들을 거닐고 오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읊은 ‘구름이 걷힌 하늘의 달처럼/오염되지 않은 태양처럼 빛나네/그대, 위대한 성자 앙기라싸는/영광스럽게 온 세상을 비추네’라는 시는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다.

제9쌍윳따 「숲 쌍윳따」는 숲이나 총림에서 수행하던 부처님의 제자들이 명상하던 가운데 수행에 방해가 되는 나태한 생각이나 우울한 생각이나 나쁜 욕심이 일어나면 하늘사람들이 나타나서 깨우침을 준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부처님 당시에 벌써 어떤 하늘사람이 다음과 같이 게으른 수행승들을 비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수행승들은 마을에 있는 촌장처럼 스스로를 불만족하게 만들고 다른 집의 재산에 마음을 빼앗겨 자꾸만 먹고는 누워 버리네.’


제10쌍윳따 「야차 쌍윳따」는 부처님 당시의 민간신앙적인 하급 신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관계를 대화로써 엮은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싸누 경이다. 재가신도의 아들인 싸누의 몸 속에 귀신인 야차가 들어가서 싸누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야차는 여기서 저급한 악마적인 신이 아니라 민간신앙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수행을 돕고 수행을 잘하면 수행자를 칭찬하며 돌아다니는 무리를 말한다.


제11쌍윳따 「제석천 쌍윳따」는 항상 정의로운 제석천과 항상 불의를 일삼는 아쑤라가 함께 등장하여 부처님이나 수행자를 예경하고 고무하고 격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쌍윳따에 등장하는 경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경은 제3품의 ‘추악함’이라는 경이다. 여기에는 추악하고 왜소한 야차와 훌륭하고 단정한 제석천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묘사되고 있어 대단히 경이롭다. 야차는 비난받고 혐오를 당할수록 보다 아름답고 장대해져서 제석천처럼 빛나게 되고, 칭찬받고 찬양받을수록 점점 왜소하고 추악해져 볼품없이 꾀죄죄한 야차로 돌아간다는 변증법이 이 경 속에 숨어 있다.

 

■제2권 (쌍윳따 니까야 제2권 인연 모음(因緣聚))의 전반부에 소속되어 12연기만을 주로 다루고 있다. 제12쌍윳따 「인연 쌍윳따」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쌍윳따 니까야] 제2권은 다른 어떤 초기경전보다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과 중도사상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많은 경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3권 제21쌍윳따까지 다음과 같은 9개의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다.
「제13쌍윳따 현관(Abhisamaya-Saṁyutta)」
「제14쌍윳따 세계(Dhātu-Saṁyutta)」
「제15쌍윳따 무시(Anamatagga-Saṁyutta)」
「제16쌍윳따 깟싸빠(Kassapa-Saṁyutta)」
「제17쌍윳따 이득과 환대(Labhāsakkāra-Saṁyutta)」
「제18쌍윳따 라훌라(Rāhula-Saṁyutta)」
「제19쌍윳따 락카나(Lakkhaṇa-Saṁyutta)」
「제20쌍윳따 비유(Opamma-Saṁyutta)」
「제21쌍윳따 수행승(Bhikkhu-Saṁyutta)」


제13쌍윳따 「현관 쌍윳따」는 11개의 경전모음으로 되어 있다. 현관(現觀)이라는 말은 ‘분명한 이해’를 통해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올바른 세계관을 갖추는 것이 현관의 전제조건이 된다. 고립된 현재는 현관을 통해서 연기의 그물망 속으로 사라진다. 올바른 현관을 성취한 자에게는 대부분의 괴로움이 사라지고 남은 괴로움은 아주 적다. 경전은 다음과 같이 극단적인 비유를 들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큰 바다가 두세 방울의 물만을 남겨놓고 고갈되어 사라져버렸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갈되어 사라져버린 큰 바다의 물과 남아 있는 두세 방울의 물과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세존이시여, 고갈되어 사라져버린 큰 바다의 물이 훨씬 많고 남아 있는 두세 방울의 물은 아주 적습니다. 남아 있는 두세 방울의 물을 고갈되어 사라져버린 큰 바다의 물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올바른 세계관을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현관에 도달한 거룩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진리에 대한 현관은 매우 유익하다. 이와 같이 진리의 눈을 얻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제14쌍윳따 「세계 쌍윳따」는 39개의 경전의 모음으로 주로 연기된 것, 즉 연생(緣生)의 범주들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놓은 것이다. 한역에서는 세계(Dhātu)라는 말을 계(界)라고 번역하고 서양학자들은 요소(要素 : element)라고 한다. 그러나 요소는 사물을 고립적으로 다룬다는 데서 계보다는 적합한 번역이 아니다. 여기서는 다소 개념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계 대신에 세계라는 용어를 택해서 번역했다. 이 상윳따에서는 감각계와 중생계의 다양한 연기적 원리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세계 쌍윳따」에서는 인과법칙의 존재론적인 계기(조건의 선행성)가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여러 가지의 세계를 조건으로 여러 가지의 접촉이 생겨나며 여러 가지의 접촉을 조건으로 여러 가지의 감수가 생겨나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 감수를 조건으로 여러 가지 접촉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여러 가지 접촉을 조건으로 여러 가지 세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제15쌍윳따 「무시 쌍윳따」는 20개 경전의 모음이다. 우주의 시작이나 윤회의 시작은 알려질 수 없고 무시 이래로 윤회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최초의 시작을 설정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와 같은 절대자를 가정해야 하는 논리적인 허구이며, 무한소급(regressus ad infinitum)은 원인과 결과의 선형적 계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이유에서 존재론적으로 허구이며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므로 인식론적으로 효력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며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은 시설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또한 경전에서는 약생차즉생피(若生此卽生彼)의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인 무(無:nātthitā)는 성립하지 않고, 약무차즉무피(若無此卽無彼)의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인 유(有:atthitā)의 세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깟차야나여,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서의 무(無)는 없어진다.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서의 유(有)도 없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발생과 소멸이야말로 조건적 발생이라고 하는 연기의 본질이라고 할 때 연기소생의 연생의 특성은 유와 무로 관찰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유 또는 무라고 하는 개념은 관찰할 수 없는 것으로 극단적인 견해이며 형이상학적인 가정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토대에는 우빠니샤드적 범아일여의 영원주의와 사후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무(無)로 귀속시키는 유물론적인 허무주의가 있다.


제16쌍윳따「깟싸빠 쌍윳따」는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제자 마하깟싸빠(摩訶伽葉)의 수행과 선정 그리고 신통력과 의발의 전수, 두타행을 실천한 이유 등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13개 경전의 모음이다. 마하깟싸빠는 자신의 현세에서의 행복한 삶과 후세의 뭇삶들에 대한 자비 때문에 ‘숲에서 사는 자로서 숲의 생활을 찬탄하고, 또한 걸식하는 자로서 걸식의 생활을 찬탄하며, 또한 분소의를 걸친 자로서 분소의를 입는 것을 찬탄하고, 또한 세 가지 옷만을 소유한 자로서 세 가지 옷만을 소유하는 것을 찬탄하며, 또한 욕심이 적은 자로서 욕심이 적은 것을 찬탄하고, 또한 만족을 아는 자로서 만족을 아는 것을 찬탄한다’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쌍윳따가 인연모음집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선정의 연기적인 구현과정인 9차제정(九次第定)이 상세히 설해져 있어 해탈론적인 연기과정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쌍윳따에서 유명한 것은 여래의 사후문제 대한 싸리뿟따와 깟싸빠의 담론이다.
“존자 깟싸빠여, 여래께서는 사후에도 참으로 존재합니까?”
“벗이여,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벗이여, 그러면 여래께서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벗이여, 세존께서는 마찬가지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왜 그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벗이여, 그것은 유익함을 수반하지 않고 청정한 삶으로 이끌지 않으며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탐욕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며 소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적정을 위한 것이 아니며 초월적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올바로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열반을 위한 것이 아닌 까닭에 세존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다나(Udāna)]에서는 네 가지 명제에서 오는 쟁론은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결과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네 가지 명제는 붓다가 다양한 동시대적 견해를 분석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으로 후세에 사구분별(四句分別:catuṣkoti)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위의 동시대적 인과론도 사구분별로 형식화될 수 있다.
① 원인은 P이다.
② 원인은 ~P이다.
③ 원인은 P와 ~P이다.
④ 원인은 ~P와 ~(~P)이다.
이 사구분별은 하나가 진리이면 다른 것은 거짓인 배타적 진리관에 입각해 있으며 그 어느 것도 옳은 것이 아니다. 어떤 한 명제의 주어가 나타내는 실체성은 연기법적으로 부정되기 때문이다.    

 
제17쌍윳따 「이득과 환대 상윳따」는 43개 경전의 모음으로, 이 경전들의 전체 내용은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위없는 안온을 얻는데 장애가 된다는 내용이다.
“어떤 수행승이라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을 버리지 않고 바란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자는 악마의 낚시바늘을 삼킨 것으로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서 빠삐만이 원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
특히 데바닷따가 이득과 환대와 명성 때문에 부처님과 교단을 배반한 것을 비난하고 있다. 이 쌍윳따가 인연 모음집에 들어가 있는 특별한 이유를 찾는다면 이득을 취하고 환대를 받고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연기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제18쌍윳따 「라훌라 쌍윳따」는 부처님의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22개 경전의 모음이다. 주로 연기되고 있는 인식의 세계(十八界)의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 없음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해탈연기를 유도하고 있다.
“라훌라여, 이와 같이 관찰하여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시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청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후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미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촉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정신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탐욕을 내지 않고 탐욕을 떠나서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는 지견이 생긴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고 깨닫는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관찰하면 이 의식을 갖춘 몸과 밖에 있는 모든 형상에서 나라는 고집, 내 것이라는 고집의 교만스런 번뇌를 멀리 떠난 마음이 생겨나서 여러 가지 자만을 뛰어넘어 적정한 해탈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라훌라여,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혹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혹은 거칠든 미세하든 혹은 열등하든 수승하든 혹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간에 어떠한 물질이라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알아서 관찰하면 취착이 없는 해탈이 이루어진다.”


제19쌍윳따 「락카나 쌍윳따」는 존자 락카나와 신통제일의 마하목갈라나 사이에 있었던 의문의 미소에 관해 해명하는 21개 경전의 모음이다. 부처님은 현세의 존재의 비참함이 전세의 업의 과보인 것을 밝히고 있다.
목갈라나가 세존의 앞에서 존자 락카나에게 말했다.
“벗이여, 나는 깃자꾸따 산에서 내려오면서 머리끝까지 똥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벗이여,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야차가 있나, 인간이 이러한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놀라운 일이고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그러자 붓다는 그 똥 구덩이에 빠진 자가 전생에 간통자였음을 설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라자가하에 사는 간통자였다. 그는 업보가 성숙하여 오랜 세월, 오랜 백 년의 세월, 오랜 천 년의 세월, 오랜 십만 년의 세월을 지옥에 떨어져 그 업의 남은 과보에 의해서 이와 같이 스스로 초래한 자기 자신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락카나 쌍윳따」가 인연모음에 편집되어 있는 것은 개인의 인과업보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제20쌍윳따 「비유 쌍윳따」는 연기법의 각 요소는 누각의 기둥처럼 서로 의지해 있다는 등의 12개 경전의 모음으로 되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려움에 대한 비유, 자비스러운 마음을 닦은 것의 효능에 대한 비유, 인간의 수명의 무상함에 대한 비유 등이 나온다. 그리고 성적 충동에 대한 리얼한 비유가 등장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주의 깊음에 머물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 경전에서 부처님은 ‘거룩한 계율 속에서 그 배움을 버리고 타락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제21쌍윳따 「수행승 쌍윳따」는 부처님과 싸리뿟따 등 12명의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12개 경전의 모음이다. 특히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두 제자들이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싸리뿟따는 목갈라나에게 ‘벗이여, 예를 들어 산의 왕 히말라야에 작은 돌덩어리가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우리들은 존자 마하목갈라나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존자 마하목갈라나는 위대한 신통력과 위대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원한다면 무한한 시간을 이곳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칭찬하자 목갈라나는 ‘벗이여, 예를 들어 커다란 소금옹기에 작은 소금 덩어리가 의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우리는 존자 싸리뿟따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라고 칭찬한다. 그밖에 선정에 든 수행승에 대한 다른 수행승들의 비난을 부처님께서 무마하거나 못생기고 추악해 보이는 수행승에 대해 그가 성취한 위대한 신통력을 찬양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쌍윳따에서 부처님은 모든 것이 소멸된 열반의 경지에 이른 존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의 승리자, 현명하신 분/전지자, 모든 사물에 물들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하니/나는 그를 홀로 사는 이라 부르네.”

 

■제4권

원래 PTS본 3권의 전반부 경전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 전반부에는 제22상윳따부터 제24쌍윳따의 제일장까지의 다음과 같은 3개의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다.
「제22쌍윳따 존재의 다발(Khandha-Saṁyutta)」
「제23쌍윳따 라다(Rādha-Saṁyutta)」
「제24쌍윳따 견해(Diṭṭhi-Saṁyutta)」

 

제22쌍윳따, 「존재의 다발 쌍윳따」는 3개의 장 즉 제일장 근본오십경(Mūlapaññāsa)과 제이장 중오십경(Majjhimapaññāsa)과 제삼장 후오십경(Uparipaññāsa)으로 모두 158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다발(五蘊)은 단지 추상적인 어떤 개념이 아니라 늙고 노쇠하고 병드는 실존 속에서 사유되어야 할 구체적인 현실임을 부처님은 나꿀라삐따경(SN. III. 1)에서 보여주고 있다. 늙고 병든 나꿀라삐따가 세존께 가르침을 청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늙고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몸에 병이 들어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더구나 세존과 바른 마음을 깨우쳐주는 수행승들의 모습을 결코 친견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가르침을 베풀어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가르침을 준다
“장자여, 그대의 몸은 허약하고 낡아버렸다. 장자여, 그와 같은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하물며 건강하다고 자칭한다면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나의 몸은 병들었지만 나의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 된다’라고 배워야한다.”
여기서 질병을 치료하는데 신의 은총이나 가피와 같은 신비적인 사상은 찾아 볼 수 없다. 누구나 몸은 비록 병들었을지라도 마음을 건전하게 유지한다면 질병을 극복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 이 한마디에 장자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고 싸리뿟따를 찾은 장자는 마음이 병들지 않는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싸리뿟따는 참사람을 알고 또한 보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존재의 다발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 병들지 않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가르침을 전한다.

 

그 다음의 할릿디까니 경(SN. III. 9)은 내적인 정신적 측면에서의 출가의 삶과 재가의 삶의 차이를 보여주는 아주 보기 드문 경전가운데 하나이다.
“장자여, 재가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장자여, 형상이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소리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냄새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맛이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촉감이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사물이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재가의 삶이란 ‘존재의 다발이라는 집’에 집착하며 사는 것이고 출가의 삶은 존재의 다발에 대한 ‘모든 욕망, 탐욕, 환희, 갈애, 방편적인 집착, 정신적 편견, 독단, 선입견’을 뿌리 체 뽑아버리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짐이란 경(SN. III. 25)에서는 종종 후대의 불교에서 자아의 존재로서 오해되어 왔던 짐꾼(Bhārahāro)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거기서 짐꾼이 사람이라면 짐을 짊어지는 것은 갈애가 생겨나는 현상이고 짐을 내려놓는 것은 갈애가 소멸하여 해탈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붓다고싸는 ‘짐은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 그것을 짊어지면 그것이 생성의 진리(集諦)이고 그것을 내려 놓으면 그것이 소멸의 진리(滅諦)이고 그 짐을 내려놓는 방법이 길의 진리(道諦)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아라고 오해될 수 있는 짐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붓다고싸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토끼뿔처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라는 것이 모두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


그리고 중요한 경전으로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을 다섯가지 종자라는 생물학적인 연기에 적용시킨 종자라는 경(SN. III. 54)이 있고 유명한 존재의 다발의 무아성을 질병에 대한 비유로서 입증하고 있는 다섯이라는 경(SN. III. 66)이 있다. 이 경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존재의 다발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존재의 다발이 나라면 이 존재의 다발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존재의 다발에 대하여 ‘나의 존재의 다발은 이렇게 되라. 나의 존재의 다발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꽃이라는 경은 ‘물질도 불꽃이고 감수도 불꽃이고 지각도 불꽃이고 형성도 불꽃이고 의식도 불꽃이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모든 존재의 다발은 불꽃이다. 현명한 제자는 이 불꽃에 타죽지 말고 불꽃을 멀리하고 그곳에서 떠나야한다.


그리고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경전으로 언표의 길이라는 경(SN. III. 71)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의 이론은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언어사용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현명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혼동하지 않는, 과거에도 혼동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혼동하지 않고 미래에도 혼동하지 않게 될 결점 없는 세가지의 언표의 형식, 표명의 형식, 시설의 형식이 있다. 이 세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이미 소멸되고 변괴된 물질은 ‘있었다’라고 언표되고 ‘있었다’라고 표명되고 ‘있었다’라고 시설된다. 그것에 대하여 ‘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아직 생겨나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 물질은 ‘있을 것이다’라고 언표되고 ‘있을 것이다’라고 표명되고 ‘있을 것이다’라고 시설된다. 그것에 대하여 ‘있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수행승들이여, 이미 생겨나서 나타나있는 물질은 ‘있다’라고 언표되고 ‘있다’라고 표명되고 ‘있다’라고 시설된다. 그것에 대하여 ‘있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분명히 과거, 현재, 미래의 궁극적 실재를 주장하는 잘못을 경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라는 언어사용에 붙여진 명칭에 불과하다.

 

그리고 집착이라는 경전에 의하면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는 것은 악마에 묶이는 것이고 사자라는 경(SN. III. 84)에서는 존재의 다발들에 대한 상세한 정의가 내려진다. 희생물이라는 경(SN. III. 84)에서는 “이미 불을 끈 상태에서는 존재의 다발을 쌓지도 않고 줄이지도 않으며....,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는 존재의 다발을 포기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라는 포기의 철학이 전개된다. 그리고 걸식이라는 경전에서는 제자들을 꾸짖고 생각에 잠긴 부처님께서 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눈물 없이는 읽어내려갈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는 바루를 들고 유행한다’는 것은 저주이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강도가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타당하고 합목적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영위한다.”     


 아난다라는 경(SN. III. 105)에서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볼 때 집착하므로 보이고 집착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듯이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여 그 존재의 다발이 나이다라는 생각이 일어난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띳싸라는 경(SN. III. 106)에서는 우리가 인생을 여행하면서 지나는 무명을 총림(叢林)에 비유하고 탐욕을 늪지대에 비유하고 분노와 절망을 절벽에 비유하고 풍요로운 평원을 열반에 비유했는데 탐진치에 대한 이 보다 탁월한 비유는 동서고금을 두고 찾기가 힘든 내용이다.


야마까라는 경(SN. III. 109)은 모든 것이 소멸한 아라한의 경지는 허무주의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열반과 단멸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누라다경(SN. III. 137)은 여래가 사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등의 사구의 문제에 대하여 여래는 물질이나 감수나 지각이나 형성이나 의식등의 존재의 다발과 동치되거나 동치지 않거나 간에 모두 부정되므로 사구로 시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 논리는 연기법에서의 일이중도(一異中道)의 논리를 여래와 존재의 다발에 적용시킨 예에 해당한다.

 

강이라는 경(SN. III. 137)에는 인간이 삶 속에서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마치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강둑에 매달린 풀 한포기를 붙잡고 있는 것과 같다는 놀라운 비유가 있다. 결국 뜯겨지고 말 풀 한포기와 결국 파괴되고야 마는 존재의 다발은 모두 무상한 것이다. 우리는 이 무상한 것을 싫어하여 떠나서 해탈해야 한다. 그리고 포말이라고 하는 경전(SN. III. 137)은 금강경의 사구게를 연상하게 하는데 존재의 다발의 실체가 없음을 비유하여 물질은 포말과 같고 감수는 수포와 같고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가죽끈이라는 경전(SN. III. 99)은 존재의 다발을 따라 도는 인간의 운명은 가죽끈에 묶인 개의 신세에 불과하다는 부처님의 준엄한 질타가 숨어 있다.


그리고 도끼자루라는 경전(SN. III. 152)은 헤르만 gpt세의 데미안을 연상시키는 계란과 병아리의 부화에 관한 비유가 수행에 관련하여 등장한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수행승으로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자 하면 바로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할 수가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닦기 때문이다. 무엇을 닦기 때문인가? 네가지 마음새김의 토대를 닦고 네가지 올바른 노력을 닦고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를 닦고 다섯가지의 감각능력을 닦고 다섯가지의 힘을 닦고 일곱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닦고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닦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포옹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 닭은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출생시키고 싶다면 바로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출생시킬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포옹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함이라는 경전(SN. III. 155)은 존재의 다발이 무상하다고 지각하는 수행이야말로 어떠한 수행보다도 탁월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꽃향기 가운데 어떠한 것이든 재스민향을 그 최상으로 하듯이 모든 수행 가운데 무상함에 대한 지각을 태양이 떠오른 것만큼이나 장엄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모든 꽃향기가운데 어떠한 것이든 재스민향을 그 최상으로 한다. 


제23쌍윳따 라다 쌍윳따」는 네 개의 품 46개의 경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모두 수행승 라다와 부처님의 대화 또는 부처님의 훈계로 이루어져 있다. 악마라는 경(SN. III. 188)은 존재의 다발은 ‘악마요 살해자요 살해되는 자’이니 그 존재 다발을 싫어하여 떠나서 그것으로부터 해탈할 것을 권하고 있다. 중생이라는 경전(SN. III. 189)에는 존재의 다발을 욕망하고 환희하고 갈애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모래로 만든 집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는 통찰이 들어있다. 기타의 경전들은 대부분 존재의 다발의 무상함과 괴로움 그리고 실체없음의 삼법인을 관련시켜 서술하고 있다. 

  
「제24쌍윳따 견해 쌍윳따」의 제일장은 「흐름의 든 님의 품」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로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게 되면 이교적이고 외도적인 삿된 견해에 떨어진다는 사실에 관하여 주위를 환기시키고 있다.


■제5권

원래 PTS본 3권의 후반부 경전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 전반부에는 제24상윳따의 제이장부터 제34쌍윳따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11개의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다.
「제24쌍윳따 견해(Diṭṭhi-Saṁyutta), 제이장」
「제25쌍윳따 들어섬(Okkantika-Saṁyutta)」
「제26쌍윳따 생겨남(Uppāda-Saṁyutta)」
「제27쌍윳따 번뇌(Kilesa-Saṁyutta)」
「제28쌍윳따 싸리뿟따(Sāriputta-Saṁyutta)」
「제29쌍윳따 용(Nāga-Saṁyutta)」
「제30쌍윳따 건달바무리(Gandhabbakāya-Saṁyutta)」
「제31쌍윳따 금시조(Supaṇṇa-Saṁyutta)」
「제32쌍윳따 구름(Valāha-Saṁyutta)」
「제33쌍윳따 밧차곳따(Vacchagotta-Saṁyutta)」
「제34쌍윳따 선정(Jhāna-Saṁyutta)」


제 24쌍윳따 「견해 쌍윳따」는 네 개의 반복 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붓다 당시의 이교도나 외도의 세계관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바람’이라는 경전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고 강물이 흐르지 않고 임산부가 출산하지 못하고 해와 달이 뜨거나 지지 못하고 모든 것이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다’라는 견해가 외도적인 사견임을 부처님께서는 지적하고 있다. 붓다고싸는 주석에서 ‘태양과 달이 뜨고 질지라도 그것들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다. 태양과 달의 원자가 뜨고 지는 것이다. 실제로 태양과 달은 기둥이나 산봉우리처럼 고정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자론에 입각해 있는 견해인 것을 알 수 가 있다.

 

그 다음의 ‘없음’이라는 경은 이것은 윤리적 허무주의를 고취시키는 철학적인 유물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아지타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론자이다. 그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인간은 네 가지 원소로 만들어졌으며, 목숨이 다하고 죽으면 땅은 땅의 세계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세계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세계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세계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기관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유물론자들은 감각적으로 지각가능한 인상만을 인정하고 분리된 지각에 물질적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과성을 부정한다. 유물론자들은 시랑까가 언급한 자성론자(自性論者:svabhāvavādin)로서 물리적 개체를 구성하는 질료의 명령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내적 본성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결정론자이므로,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고 도덕적 정신적인 모든 영역에서 인과성을 부정하며 따라서 무인론(無因論:ahetuvāda)을 주장한다.
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차별이] 없다.
② 모두 물질로 구성되었으므로 선악업의 과보가 없다.
③ 선악업의 과보가 없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의무] 아버지[에 대한 의무]와 같은 윤리적인 책임감도 없다.
이들은 그래서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몸이 파괴되고 단멸하고 소실하여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을 물질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유물론자들은 감각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쾌락주의를 지지했다.
인도에서는 이같은 유물론자들을 로카야타(lokāyata)라고 불렀으며 한역불전에서는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불렀다. 또한 짜르와까(cārvaka)라고 하는데, 그것은 유물론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도덕적 인과성의 부정에 따라 인간의 사후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허무론은 단멸론(斷滅論:ucchedavāda)이라고 불리운다. 넓게는 우연론이나 숙명론도 이러한 허무론에 속하며 특징적으로 도덕적인 허무주의, 무정부주의를 표방한다.


그리고 ‘업을 짓거나’라는 경은 뿌라나 깟싸빠(Pūraṇa Kassapa)의 견해를 대변한다. 그의 비결정론은 일상적 의미의 우연론이 아니라 불교적인 연기사상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우연론으로서의 무인론이다. 모든 원인과 결과는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이고 완전히 우연적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무법칙적으로 변화하므로 인과관계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으며, 인과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단멸론(斷滅論:ucchedavāda)에 속한다. 따라서 인간 행위에 있어서도 도덕적 책임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이 말했다.
“참으로 업을 짓거나 업을 짓도록 시켜도, 도륙하고 도륙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슬퍼하고 슬프하게 하여도, 피곤해하고 피곤하게 하여도, 전율하고 전율하게 하여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면도칼처럼 예리한 바퀴로써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조각조각 고깃덩이로 잘라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남쪽을 다니면서 살육하고 또한 살육을 시키며, 절단하고 절단하도록 시키며,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북쪽을 다니면서 보시하고 또한 보시하도록 시키고, 제사지내고 제사지내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 없으며 또한 공덕의 과보도 없다. 보시에 의해서도 수행에 의해서도 계행을 지키더라도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란 없으며 또한 그 공덕의 과보도 없다.”
이러한 주장이 뿌라나 깟싸빠가 윤리적인 삶을 부정하는 무작설(無作說:akiriyavāda)이라고 불리우는 견해를 갖게 된 이유이다. 붓다는 그러한 깟싸빠를 무작론자(無作論者:akiriyavādin)라고 부르고, 자신은 작론자(作論者:kiriyavādin)라고 불렀다. 다음에 등장하는 고쌀라가 강한 의미의 결정론자라면 깟싸빠는 비결정론자이다. 붓다가 깟싸빠를 비난한 것은 도덕적 책임감에 입각한 윤리적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그의 비결정론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인’이라는 경에는 붓다 당시에 결정론을 주장한 사람은 막칼리 고쌀라(Makkhalī Gosāla)였다. 그는 모든 것은 자연의 불변의 법칙으로 생겨난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모든 체험에서 우연을 추방하였다. 그의 주장은 극단적인 자연적 결정론으로 붓다는 이러한 숙명론적 결정론이 모든 이교적인 이론 가운데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불교의 무자비한 입장은 고쌀라의 견해를 폄하하고 때로는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는 비록 극단적인 결정론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결정의 범주를 종(種)으로 규정한 과학적인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모든 동물, 모든 유정, 모든 존재, 모든 생명은.....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해서 서로 변이하여 여섯 가지 종류에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는다.

‘견해로’라는 경은 특히 절대적인 도덕부정론을 주장하는 빠꾸다 깟차야나(Pakudha Kaccāyana)의 세계관을 싣고 있다. 그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괴로움의 요소, 즐거움의 요소, 목숨의 요소이다. 이 일곱 가지는 만든 것이나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 창조된 것이거나 창조하게 한 것이 아니고 생겨나지 않았으나 견고해서 석녀와 같고 산봉우리와 같이 서있고 기둥처럼 단단하여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서로 핍박하지 않는다. 서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 조금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유물론적으로 7요소설(七要素說:地 paṭhavīkaya, 水 āpokāya, 火 tejokāya, 風 vāyokāya, 苦 sukha, 樂 dukkha, 靈魂 jīva)을 뜻하는데,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유물론자들과는 다른 이원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깟차야나가 인정하는 영혼은 물질적인 것으로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이들 7요소는 불생산(不生産)이며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토대 위에 ‘만약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잘라도 아무도 누구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아니며 단지 7요소 사이를 따라 칼이 통과한 것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진아(眞我)의 불괴성과 불변성을 주장하는 초기 베단따적인 우빠니샤드의 영원주의(常住論:sassatavāda)에 영향을 받은 허무주의이다.

제25쌍윳따 「들어섬-쌍윳따」의 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 바로 진리의 흐름에 들어서는 것임을 설하고 있는 10개의 경전이로 이루어져있다. 

 

제26쌍윳따 「생겨남-쌍윳따」 쌍윳따는 12처나 18계가 생겨나는 것이 곧 괴로움이 생겨나고 질병이 유지되고 늙고죽음이 나타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제27쌍윳따 「번뇌-쌍윳따」는 모든 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은 마음에 수반되는 번뇌임을 10개의 경전에서 설한다..

 

제28쌍윳따 「싸리뿟따-쌍윳따」는 열 개의 아난다와 싸리뿟따의 대화를 담고 있다. 아난다가 사리뿟다에게 물었다. “벗이여, 싸리붓따여 그대의 감관은 청정하고 안색은 맑다. 존자여 싸리뿟따여, 그대는 오늘 어떻게 지내며 보냈는가?” 싸리뿟다는 아난다에게 대답했다, “벗이여, 이 세상에서 나는 원하는 대로 완전히 무한의식의 세계를 뛰어넘어 아무 것도 없는 무소유의 세계에 든다. 벗이여, 나는 이때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든다’라든가 ‘나는 무소유의  세계를 성취했다’라든가 ‘나는 무소유의 세계에서 나온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전의 사유는 후대에 사리불(싸리뿟따)을 중심으로하는 금강경의 무주, 무소득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제29쌍윳따 「용-쌍윳따」, 제30쌍윳따 「금시조 쌍윳따」, 제31쌍윳따 「건달바무리 쌍윳따」, 제32쌍윳따 「구름 쌍윳따」은 보시를 통해서 공덕을 쌓으면 사후에 원하는 무리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설하는 경전들로 이루어져있다.  

 

제33쌍윳따 「밧차곳따 쌍윳따」는 다음과 같은 설명될 수 없는 명제(無記)들 ― ① 세계는 영원하다. ②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③ 세계는 유한하다. ④ 세계는 무한하다. ⑤ 영혼과 육신은 같다. ⑥ 영혼과 육신은 다르다. ⑦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⑩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 않지도 않다. ― 은 존재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임을 설하고 있다. 경전은 존재의 다발이 있을 때에 그 존재의 다발에 대하여 무지하고 올바로 분별하거나 통찰하지 못함으로서 이러한 견해를 일으킨다고 설하고 있다. 
 
제34쌍윳따 「선정 쌍윳따」은 삼매에 들었을 때의 수행자들의 능력의 차이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선정을 닦는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만 삼매에서 안정에 능숙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선정을 닦는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만 삼매에서 안정에 능숙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선정을 닦는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도 삼매에서 안정에 능숙하지도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선정을 닦는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할 뿐만 아니라 삼매에서 안정에 능숙하다.” 경전에서는 그밖에 깨어남(일어남), 인내, 공경, 이익, 성취, 결정, 행경, 대상 등에 관하여 삼매에 든 수행자들의 차이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제6권

원래 PTS본 4권의 전반부 경전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 전반부에는 제35상윳따만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제35쌍윳따는 많은 경전군을 내포한 관계로 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35쌍윳따 여섯감역(Saḷāyatana-Saṁyutta)」
이 「여섯감역 쌍윳따」의 여러 부류의 경전들은 모두 여섯가지 내적 또는 외적인 감각영역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맛지마니까야에서 짧은 경에 가깝다. 제1장에서 제3장까지는 실제로 각각 50여개의 경전을 포함하고 있으나 제4장은 PTS.판본의 계산방식과는 달리 모두 93개의 경전을 포함하여 「여섯감역 쌍윳따」는 총 248경으로 이루어졌다.
여섯 가지 감역(六入)이란 무엇인가. [인연 쌍윳따]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여섯 감역이란 무엇인가? 시각의 감역, 청각의 감역, 후각의 감역, 미각의 감역, 촉각의 감역, 정신의 감역이 있으니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여섯 감역이라고 부른다.”


여섯감역(saḷāyatana)이란 개념에 대한 아비달마적인 다른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주는 일체경(Sabbasutta)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어떠한 것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현상,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실로 일체라고 부른다.”

■제7권

원래 PTS본 4권의 후반부 경전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 후반부에는 제36상윳따부터 제44쌍윳따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9개의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다.
「제36쌍윳따 감수(Vedanā-Saṁyutta)」
「제37쌍윳따 여인(Mātugāma-Saṁyutta)」
「제38쌍윳따 잠부카다까(Jambukhādaka-Saṁyutta)」
「제39쌍윳따 싸만다까(Sāmaṇḍaka-Saṁyutta)」
「제40쌍윳따 목갈라나(Moggallāna-Saṁyutta)」
「제41쌍윳따 찟따(Citta-Saṁyutta)」
「제42쌍윳따 촌장(Gāmaṇi-Saṁyutta)」
「제43쌍윳따 무위(Asaṅkhata-Saṁyutta)」
「제44쌍윳따 시설되지 않은 것(Abyākata-Saṁyutta)」

 

제36쌍윳따의 「감수(느낌) 쌍윳따」는 31개의 느낌 즉 감수를 다루는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싱할리 본에는 느낌은 여섯감역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앞의 「여섯감역 쌍윳따」에 소속시켰으나 미얀마본을 위시해서 다른 판본들은 독립된 쌍윳따로 다루고 있다. 감수는 12연기의 한 고리일 뿐만 아니라 네가지 새김의 토대(念處:satipaṭṭhāna)의 한 부분으로 이다. 포기하여(Pahānena SN. IV. 205)의 경은 즐거운 감수는 탐욕을 야기시키는 원인이고 괴로운 감수는 분노를 야기시키는 원인이고 중성적인 감수는 무지를 야기시키는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즐거운 감수에서 유래하는 탐욕의 경향도 포기되어야 한다. 괴로운 감수에서 유래하는 혐오의 경향도 포기되어야 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에서 유래하는 무지의 경향도 포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감수야말로 우리의 범부적 삶을 지배하는 실존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장본인임을 심연(Pātāla:SN. IV. 206)이라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커다란 바다에는 심연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있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은 것을 두고 ‘커다란 바다에는 심연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심연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괴로움의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의 느낌을 경험하여 우울해하고 피로해하고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심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견고한 지반을 얻지 못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현대 실존철학의 정곡을 찌르는 진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괴로운 감수와 접촉해서 우울해하고 피로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진다면 두 번의 괴로움이라는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그러나 괴로운 감수와 접촉해서 우울해하고 피로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면 괴로움이라는 하나의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SN. IV. 207) 그는 감수의 심연에 빠지지 않는다. 특히 부처님은 이러한 괴로운 감수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설법을 괴로움이 심한 환자들을 방문하여 설한다.(SN. IV. 210-213) 그리고 감수를 바람에 비유한 경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허공에 여러 가지의 바람이 분다. 동풍도 불고 서풍도 불고 북풍도 불고 남풍도 불고 먼지 있는 바람도 불고 먼지 없는 바람도 불고 찬 바람도 불고 더운 바람도 불고 작은 바람도 불고 큰 바람도 분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몸에는 여러 가지의 감수가 일어난다. 즐거운 감수도 일어나고 괴로운 감수도 일어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일어난다.”라는 시설은 그것은 감수가 단순히 느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폭풍처럼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감정은 인간의 애증 뿐만 아니라 어리석음이나 지혜를 수반하는 거치른 감각적인 쾌락이나 고통에서부터 깊은 명상에서 오는 미묘한 즐거움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씨바까(Sīvaka:SN. IV. 230)라는 경은 불교에서의 업사상이나 연기사상이 결코 숙명론적인 업사상이 아닌 것임을 보여주는 데 입증자료로서 주어지는 유명한 경이다. 부처님은 이 경에서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논파하고 있다. 그 경에 따르면 어떠한 감수들은 담즙이나 점액이나 바람이나 체질이나 계절의 변화나 불운한 사건이나 우연한 피습에 의해서 생겨나므로 과거의 업보의 성숙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란 그러한 많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 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연기법에서의 인과의 동시성을 일상적으로 긍정하는 언표로서 놀라운 통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승(Bhikkhu:SN. IV. 232)이라는 경은 108 가지로 인간의 느낌을 분류했는데 그 때문에 이 경은 특히 아비달마 철학에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청정한 정신적인 것(Suddhikaṃ nirāmisam:SN. IV. 235)이라는 경은 기쁨, 행복, 평정, 해탈을 각각 감각적 쾌락에 기반을 두는 육체적인 것과 선정에 기반을 두는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37쌍윳따 「여인 쌍윳따」는 34개의 짧은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마음에 들고 들지 않음(Manāpā'manapā:SN. IV. 238)의 경에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회관행적인 여성관이나 남성관을 피력되고 있다. 남자에게 마음에 드는 여인의 조건이 다음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요소에 해당하는 여인을 남자들은 지극히 마음에 들어한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용모가 아름다운 것, 재산이 많은 것, 덕성이 풍부한 것, 부지런한 것, 남편을 위해 아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서술되고 있고, 여인에 마음에 드는 남자의 조건은 다음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요소에 해당하는 남자를 여인들은 지극히 마음에 들어한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용모가 준수한 것, 재산이 많은 것, 덕성이 풍부한 것, 부지런한 것, 아내를 위해 아이를 잉태시킬 수 있는 것이다.”라고 열거되고 있다. 그밖에 여인만이 겪어야하는 특수한 고통으로 ① 시집가서 친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 ② 월경, ③ 임신, ④ 분만, ⑤ 남자에게 시중드는 것을 들고 있다.(SN. IV. 289) 그밖에 여인이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으로 태어나는 이유로 인색함과 질투심 또는 “믿음이 없는 것, 부끄러움이 없는 것, 챙피함이 없는 것, 분노를 품는 것, 지혜가 열등한 것”을 들고 있다. 그밖에 범죄, 파계, 배움이 부족한 것, 나태, 부주의, 오계를 지키지 않는 것 등이 지옥으로 윤회하는 이유에 해당한다. 물론 몸이 부수어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이유는 지옥에 태어나는 조건과는 정반대의 조건을 갖춤으로서 가능하다고 경전은 설하고 있다.    


제38쌍윳따 「잠부카다까 쌍윳따」, 제39 쌍윳따 「싸만다까 쌍윳따」는 각각 16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졌는데 ‘1) 열반, 2) 거룩한 이의 경지, 3) 설법자, 4) 무엇이 있다면, 5) 안식, 6) 최상의 안식, 7) 감수, 8) 번뇌, 9) 무명, 10) 갈애, 11) 거센 물결, 12) 취착, 13) 존재, 14) 괴로움, 15) 존재무리, 16)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동일한 주제로 이루어져 있고, 질의 응답자가 다를 뿐, 모두 열덟가지의 성스러운 길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마음새김, 올바른 집중이 그들 주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져 있다.

 

제40쌍윳따 「목갈라나 쌍윳따」는 신통제일의 목갈라나가 어떻게 수행하고 노력하여 선정을 성취하고 또한 특징을 뛰어넘는 마음의 삼매를 이루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목갈라나는 명상 중에 아직 제거되지 않은 미세한 번뇌인 의식을 제거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 스승인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그에게 나타나서 도와줌으로서 목갈라나가 초월적인 지혜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 후에 목갈라나는 천상계에 올라가 하늘사람들에게 삼보에 귀의함으로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설한다.

 

제41쌍윳따 「찟따 쌍윳따」는 짓따와 주변 사람들과의 담론을 기록한 모음집인데 10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찟따는 부처님의 재가 신자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가르침을 이해하고 설법할 수 있는 법사였다. 그는 여러 번 수행승들에게 가르침을 설했으며 수행승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돌려주며 “그대의 지혜의 눈은 심오한 부처님의 말씀에 정통해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 쌍윳따의 도처에서 보인다. 찟따는 재가 신자이지만 세계와 시설될 수 없는 무기(無記)의 법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와 모든 선정의 단계를 이해하는 명상에서의 깊은 체험을 갖고 있었다. 또한 부처님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불교와 경합하던 자이나교의 우두머리와 부처님과 만남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찟따가 그와 만나 대화를 나눈 역사적인 기록이 이 쌍윳따 안에 존재한다. 먼저 니간타(Nigaṇṭha:SN. IV. 297)라는 경에서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바르다마나가 질문한다. “장자여, 그대는 실로 수행자 고따마의 가르침에는 ‘사유가 없고 숙고가 없는 삼매가 있고 사유와 숙고의 소멸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까?....사유와 숙고가 소멸될 수 있다면 그물로서 바람을 막으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유와 숙고가 소멸될 수 있다면 자신의 손바닥으로 갠지스강의 흐름을 막으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존자 찟따는 그가 사유와 숙고가 없는 두 번째의 선정 뿐만아니라 네가지 선정에 대해 직접 체험하고 알고 있음을 설명하여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아쩰라(AcelaSN. IV. 300)라는 경은 찟따의 오랜 친구인 아쩰라 깟싸빠의 “장자여, 나는 이 30년간의 출가생활을 통해 벌거벗고 삭발하고 가친 모래를 뿌리는 것 이외에 인간을 뛰어넘는 법, 고귀하고 탁월한 앎과 봄, 안락한 삶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담론이 시작된다. 그 경에는 유행자의 고행자적인 삶의 허무함과 올바른 가르침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해탈의 성취가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간병(Gilānadassana:SN. IV. 302)이라는 경은 그가 임종에 처해서도 많은 하늘사람과 인간들에게 무상(無常)의 진리를 설파해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장엄한 설법을 전개하고 있다.

 

제42쌍윳따 「촌장 쌍윳따」는 여러 마을의 촌장들과 부처님과의 담론을 기록한 것으로 모두 13개의 경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들 촌장들은 재가 신도들이 아니고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어느 정도 적대적인 사람들인데 부처님은 이들과의 대화에서 매우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을 통해 승리를 거둔다. 촌장 짠다는 이 세상에 포악한 무리들이 많은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부처님은 그 답변으로 단지 탐진치 때문이라고 추상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매우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촌장이여, 이 세상에서 어떤 이는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탐욕을 버리지 못해서 남을 화내게 하고 남이 화를 내면 자신도 화를 내게 되면 그는 포악한 자라고 불린다. 성냄...어리석음... 촌장이여, 이 세상에서 이러한 이는 포악한 자라고 불리는데 이러한 것이 원인이고 이러한 것이 조건이 된다.(SN. IV. 305)”             

 
그리고 뿌따(Puṭa:SN. IV. 306)라는 경은 매우 흥미있는 경으로 배우마을의 촌장 딸라뿟따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영상 매체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촌장이여, 과거에 중생들이 탐욕을 떠나지 못해 탐욕에 묶여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배우가 무대가운데 극장 가운데 더욱 탐욕스러운 것을 가져와서 더욱더 탐욕스럽게 만들었다. 촌장이여, 과거에 중생들이 성냄을 떠나지 못해 성냄에 묶여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배우가 무대가운데 극장 가운데 더욱 성내는 것을 가져와서 더욱더 성내게 만들었다. 촌장이여, 옛날에 중생들이 어리석음을 떠나지 못해 어리석음에 묶여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배우가 무대가운데 극장 가운데 더욱 어리석은 것을 가져와서 더욱더 어리석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사(Yodhājīva:SN. IV. 308)라는 경을 위시해서 세 개의 경은 전쟁이 종교적인 믿음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는 부처님의 담론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연기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유명한 경전으로 서방인(Paccahābhūmaka:SN. IV. 311)이라는 경전이 있다.
“촌장이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버터기름이여, 참기름이여, 잠겨라 물밑으로 가라앉아라. 버터기름이여, 참기름이여, 바닥으로 가라앉아라.’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버터기름이나 참기름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잠기거나 물밑으로 가라앉거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인가?”
이 경전에 따르면,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을 아무리 저주한들 지옥에 보낼 수가 없으며 그는 인과의 필연성에 따라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흥미있는 것은 소라(Saṅkha:SN. IV. 317)라는 경전에 의하면, 단순한 반복적인 습관에 의한 숙명적으로 지배되는 자이나교적인 인과이론을 부처님께서 명쾌하게 부정하는 연기법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라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면 모두 괴로운 곳 지옥에 떨어진다...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이 이끌려진다.’는 자이나교의 주장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이론으로 척파한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밤이나 낮이나 때때로나 살아있는 생명을 빼앗는다면, 생명을 빼앗던가 생명을 빼앗지 않던가 그 어느 시간이 더욱 많을 것인가?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밤이나 낮이나 때때로나 살아있는 생명을 빼앗는다면, 생명을 빼앗는 시간이 적고 생명을 빼앗지 않는 시간이 더욱 많을 것입니다. 촌장이여.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이 이끌려진다면, 그렇다면 아무도 니간타 나따뿟따의 말처럼 나쁜 곳 지옥으로 갈 수가 없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단순한 양적인 반복에 의해서만 인과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라 고동소리가 멀리 퍼져 나아가는 것처럼 질적인 것이 단순한 양적인 반복보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훌륭하고 잘 선택된 가르침에 따른 조그마한 노력이 능히 모든 악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가정(Kulaṃ:SN. IV. 322)이라는 경은 부처님이 기근이 든 지방을 여행하다가 자이나교를 믿는 적대적인 촌장을 만나 어려운 시기에 탁발을 구하는 것은 가정파괴 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이와 같이 “나는 어떠한 가정이라도 예전에 단지 요리된 음식을 보시한다고 해서 피해를 본 것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촌장이여, 가정이 패망하는 데는 8가지의 이유가 있다.”라고 설하며 8가지 이유를 답변한다.

 

제43쌍윳따 「무위 쌍윳따」는 열반에 관한 44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의 품은 열반에 이르는 다양한 수행방법에 관해 11개의 경을 통해 설명한다. 두 번째 품은 언어를 뛰어넘는 열반에 대한 다양한 부정적이나 긍정적인 33가지 묘사가 각각 하나의 경전을 이루어 내용적으로 동일한 33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가운데 부정적인 언표로 표현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무위(無爲:asaṅkhata):이것은 모든 조건지워진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② 무루(無漏:anāsavam):세 가지의 번뇌, 즉 감각적 쾌락의 번뇌(慾漏:kāmāsava), 존재의 번뇌(有漏:bhavāsava), 무명의 번뇌(無明漏:avijjāsava)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③ 불로(不老:ajaraṁ):열반은 늙음의 조건이 소멸된 상태이다. 그에게는 자아에 의해 집착되지 않은 존재의 다발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④ 무견(無見:anidassana):anidassana는 ‘볼 수 없는’의 뜻이 아니라 ‘지시하지 않은’의 뜻으로, 나의 소유(이것은 나의 것이다)는 조건적인 세계를 지시하므로 아라한은 그러한 세계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⑤ 무희론(無戱論:nippapañca):열반은 일체의 희론, 사견희론(邪見戱論)이나 정견희론(正見戱論)을 모두 떠나 있다. ⑥ 무재난(無災:anītika):열반 속에는 해침을 당할 만한 ‘자아’의 세계가 없다. ⑦ 무재난의 상태(無災法:anītikadhamma):열반의 무위법에는 조건지어지는 재앙이 존재할 만한 유위법적인 상태가 없다. ⑧ 무에(無恚:avyāpajjha):열반은 분노(vyāpāda)가 소멸한 상태이다. ⑨ 사라짐(離貪:virāga):열반은 탐욕(rāga)이 소멸한 상태다. ⑩ 불사(不死:amata):아라한의 일상적인 죽음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불사이며 다만 목숨이 다할 때에는 존재의 다발의 짐을 내려놓을 뿐이다. ⑪ 갈애의 소멸(愛盡:taṇhākkhaya):열반에는 모든 종류의 갈애, 즉 감각적 쾌락에의 갈애, 존재․비존재에의 갈애가 소멸되어 있다. ⑫ 무착(無着:anālayo):갈애나 집착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열반에 대한 긍정적인 언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끝(終極:antam):아라한에게 ‘해야 할 것은 모두 해 마쳤고(kataṁ karanīyaṁ) 더 이상 윤회의 상태(nāparam itthattāya)가 아닌 것’을 말한다. ② 진리(眞諦:saccam):아라한의 인격 속에 지혜에 의해서 파악되는 최상의 궁극적 진리를 의미한다. ③ 피안(彼岸:pāra):피안은 윤회의 고통스런 세상을 건너갔다는 의미를 지닌다. ④ 극묘(極妙:nipuṇa):nipuṇa는 ‘성취된, 세련된’의 의미로, 열반은 다듬어지지 않은 개념적 사유로 파악될 수 없고 오로지 현자의 지혜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다. ⑤ 지극히 보기 어려운 것(極難見:sududdasa):조건지워진 사유의 근본구조를 초월하여 무지와 갈애가 소멸된 열반은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⑥ 견고함(堅固:dhuva):열반을 체험한 아라한에게는 조건지워진 세계로의 환원은 있을 수 없다. ⑦ 비추어봄(照見:apalokita):열반을 체험한 아라한에게는 자아를 위한 세계는 있을 수 없으며 세계를 떠나서 조견한다. ⑧ 적정(寂淨:santa):조건지어진 것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세계’를 주장하므로 적정은 있을 수 없다. ⑨ 탁월함(勝妙:paṇīta):열반의 체험은 조건지워진 삶의 세계를 초월함으로서 성취되는 가장 탁월한 체험이다. ⑩ 지복(至福:siva):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는 최상의 지복을 체험한다. ⑪ 안온(安穩:khema):‘나의 세계’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상과 변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가 소멸된 열반은 안온한 세계이다. ⑫ 아주 놀라운 것(希有:acchariya):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체험은 윤회하는 존재들 사이에 매우 드문 일이다. ⑬ 예전에 없던 것(未曾有:abbhuta):열반은 생성과 소멸이 끝없는 윤회의 과정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증유의 체험이다. ⑭ 청정(淸淨:suddhi):모든 염오(kilesa)의 소멸을 의미한다. ⑮ 해탈(解脫:mutti):열반은 완전한 해탈을 의미한다. ⑯ 섬(島:dīpa):윤회의 바다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안전함을 뜻하는 열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너 자신을 섬으로 하라’는 부처님의 유교는 결국 열반을 성취하라는 말로 귀결된다. ⑰ 동굴(洞窟:leṇa):열반의 상태는 모든 유해한 번뇌의 숲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한 상태와 같다. ⑱ 피난처(避難處:tana):열반의 체험은 번뇌의 폭류나 마군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과 같다. ⑲ 귀의처(歸依處:saraṇa):열반은 곧 윤회의 고통 속에 헤매는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된다.  구경(究竟:Parāyaṇa):열반의 체험은 열반을 구경으로 하게끔, 아라한을 운명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44쌍윳따 「시설되지 않은 것의 쌍윳따」는 부처님께서 시설하지 않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든가 하는 네가지 형이상학적인 명제 무기(無記)의 문제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첫 번째의 경은 꼬쌀라의 국왕과  비구니 가운데 대지혜제일(大智慧第一:mahāpaññānaṃ aggā)였던 케마 사이의 여래의 사후의 존재를 두고 담론이 전개되는데 비구니 케마의 심오한 대답을 듣고 왕은 환희한다. 그밖의 경들은 모두 존재의 다발이나 여섯감역이 소멸한 여래를 시설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과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생겨나는 것은 우리의 집착을 통해 존재의 다발이나 여섯감역이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단지 목갈라나(Moggallāna:SN. IV. 391) 경과 밧차(Vaccha:SN. IV. 395) 경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명제­‘세상은 영원하다’라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라든가 ‘세상은 유한 하지않다’라든가 ‘영혼과 육체는 같다’라든가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를 합해서 8가지의 형이상학적인 명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회의장(Kutūhalasālā :SN. IV. 398)이라는 경은 범부의 사후의 문제에 관하여 갈애를 연료­빠알리어에서는 취착과 동일한 말이다­로 해서 사후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가르침을 설하고 있고, 아난다(Ānanda:SN. IV. 40) 경은 유행자 밧차곳따의 ‘자아는 있는가’ 또는 ‘자아는 없는가’라는 명제를 다루고 있는데 부처님은 그가 이미 자아의 존재에 대한 부동의 선입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대답에 침묵함으로서만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제8권
PTS본 5권 [대품 모음(Mahāvagga)] 가운데 첫 1/4에 해당하는 경전이다.
[대품 모음]은 [쌍윳따 니까야] 가운데 가장 방대한 12쌍윳따 111품 1208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생략된 부분을 복원하였으므로 역자는 불가피하게 8. 9. 10. 11의 4권으로 나누었다. [대품 모음]은 주로 다음과 같은 7종으로 나누어지는 서른 일곱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三十七助道品, 三十七菩提分法:sattatiṃsa bodhipakkhiyā dhammā)을 다루고 있다.

 

I.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cattāro satipaṭṭhānā):
  ① 몸에 대한 관찰(身隨觀:kāya-anupassanā)
  ② 감수에 대한 관찰(受隨觀:vedanānupassanā)
  ③ 마음에 대한 관찰(心隨觀:cittānupassanā)
  ④ 법에 대한 관찰(法隨觀:dhammānupassanā)


II. 네가지 바른 노력(四正勤:cattāro sammappadānā)
  ① 방지의 노력(律儀勤:saṁvarappadhāna)
  ② 버림의 노력(斷勤:pahānappadhāna)
  ③ 수행의 노력(修勤:bhāvanāppadhāna)
  ④ 수호의 노력(守護勤:anurakkhaṇāppadhāna)


III.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四神足:cattāro iddhipādā)
  ① 의욕의 신통력의 기초 (欲神足:chanda-iddhipāda)
  ② 노력의 신통력의 기초(勤神足:viriya-iddhipāda)
  ③ 마음의 신통력의 기초(心神足:citta-iddhipāda)
  ④ 관찰의 신통력의 기초(觀神足:vīmaṃsā-iddhipāda)


IV.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五根:pañc'indiyāni)
  ① 믿음의 정신적 능력(信根:saddhā-indriya)
  ② 정진의 정신적 능력(精進根:viriya-indriya)
  ③ 새김의 정신적 능력(念根:sati-indriya)
  ④ 집중의 정신적 능력(定根:samādhi-indriya)
  ⑤ 지혜의 정신적 능력(慧根:paññā-indriya)


V. 다섯가지 힘(五力:pañca balāni)
  ① 믿음의 힘(信力:saddhābala)
  ② 정진의 힘(精進力:viriyabala)
  ③ 새김의 힘(念力:satibala)
  ④ 집중의 힘(定力:samādhibala)
  ⑤ 지혜의 힘(慧力:paññābala)


VI. 일곱가지의 깨달음 고리(七覺支:satta bojjhaṅgā)
  ① 새김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satisambojjhaṅga)
  ② 탐구의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dhammavicayasam
    -bojjhaṅga)
  ③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viriyasambojjhaṅga)
  ④ 경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pītisambojjhaṅga)
  ⑤ 안온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passaddhisambojjhaṅga)
  ⑥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samādhisambojjhaṅga)
  ⑦ 평정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upekhāsambojjhaṅga)


VII.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八聖道:ariya aṭṭhaṅgika magga)
  ① 올바른 견해(正見:sammādiṭṭhi)
  ② 올바른 사유(正思惟:sammāsaṅkappo)
  ③ 올바른 언어(正語:sammāvācā)
  ④ 올바른 행위(正業:sammākammanto)
  ⑤ 올바른 생활(正命: sammāājīvo)
  ⑥ 올바른 정진(精精進:sammāvāyāmo)
  ⑦ 올바른 새김(正念:sammāsati)
  ⑧ 올바른 집중(正定:sammāsamādhi)

 

디가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이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에 대한 가르침의 중요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세상을 애민히 여겨 많은 사람의 이익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곧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청정한 삶이 세상에서 오래 지속되도록, 내가 너희들에게 초월적인 지혜로서 가르친 것들-예를 들어 네가지 새김의 토대, 네가지 노력,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 다섯가지 능력, 다섯가지 힘, 일곱가지의 깨달음 고리,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잘 배우고 공부하고 닦고 수행해야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쭌다에게 자주 만나서 그 가르침의 의미를 일치시키고 그 자구를 일치시켜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쭌다여, 세상을 애민히 여겨 많은 사람의 이익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곧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청정한 삶이 세상에서 오래 지속되도록, 내가 너희들에게 초월적인 지혜로서 가르친 것들을 모두가 자주 만나서 의미를 일치시키고 자구를 일치시켜 논쟁 없이 합송해야한다.”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과 관련해서 승가내부의 일치(MN. II. 245)를 강조하고 그러한 가르침을 닦는데 ‘모두가 일치하고 화합하여 논쟁하지 말고 배워야할 것(sabbeh’eva sammaggehi sammodamānehi avivadamānehi sikkhitabbaṃ; MN. II. 239)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많은 제자들이 그러한 초월적 지혜 속에서 성취와 완성에 도달하기(tatra ca pana me sāvakā bahū abhiññāvosānapāramippattā viharati; MN. II. 12)’ 때문이다. 


위의 경전상의 7종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의 나열순서는 7가지의 점진적인 수행단계를 표현하는 인상을 주지만 그렇지가 않다. 자세히 살펴보면 단지 4에서 8에 이르는 법수적인 나열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다른 팔정도나 사성제의 순서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한 종류의 요소들이 다른 종류의 요소들에 속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 종류가 다른 종류의 한 요소로서 간주되기도 한다. 이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에 맞도록 조정된 다양한 가르침을 내포한다.  각 가르침은 서로 겹치고 상호 교차하면서 법계의 전체구조인 연기법과 관련을 맺고 있으나, 무지나 무명에서 일어나는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속박의 연박연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밝은 지혜에 바탕을 두는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자유의 해탈연기를 지향한다는 점이 다르다.

 

빠알리 니까야에서 깨달음(覺:bodhi) 또는 완전한 깨달음(正覺: sambodhi)이라는 말은 아라한의 지위에서의 인식 즉 ‘번뇌를 소멸한 지혜(漏盡智:āsavakkhayañāṇa)’를 뜻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들이 충족되면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대품의 모음]에서 각 쌍윳따들은 칠종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과 관련해서 일반 빠알리 경전에서 나타나는 순서와는 다르게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부터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 내용의 구체성과 중요성의 순서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제시한 해탈의 방법론으로 가장 중요한 고전적형식이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이다. 그 다음에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가 다루어진다. 그 이유는 그것이 팔정도를 가장 잘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네가지 새김의 토대,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 네가지 올바른 노력, 다섯가지 힘,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의 순서로 법수적 순서와는 상관없이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 아누라다 쌍윳따는 네가지 생김의 토대와 관련되는 갓이고 그 이후의 선정 쌍윳따, 호흡 쌍윳따, 흐름에 든 이 쌍윳따, 진리 쌍윳따 네가지는 칠종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대품의 모음?에서 중요한 것은 판에 박은 듯 반복되는 어구가 각기 특수한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I. “수행승들이여, [여덟가지의 법]을 닦고 수행하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이끌어진다.”:이 문장은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 네가지 새김의 토대,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과 관련해서 서술된다.
II. “수행승들이여, 누구든지 [여덟가지 거룩한 길]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구든지 [여덟가지 거룩한 길]을 시도한다면, 그는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 네가지 새김의 토대,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과 관련해서 서술된다.
III. “수행승들이여,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를 닦고 수행하여 고귀한 출리를 이루면, 그 사람은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진다.”: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 네가지 새김의 토대,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에만 해당하고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IV. “수행승들이여,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를 닦고 수행하면 반드시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고요해져서 잘 알고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 역시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 네가지 새김의 토대,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에만 해당하고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V. “수행승들이여, 아직 생겨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여덟가지의 법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닦고 수행하면,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의 출현과 더불어 [또는 계율과 더불어] 생겨난다.” 이 문장은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 다섯가지의 정신적 능력에 해당한다.
VI. “수행승들이여, [해골에 대한 명상]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수행하면 현세에서 완전한 지혜를 얻거나, 취착이 남아 있다면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르거나 두 과보 가운데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 네가지 새김의 토대,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에 관계한다.
VI.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를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수행하면 이러한 일곱가지의 결과, 일곱가지 과보가 기대된다.”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와 호흡에 대한 새김에 관계한다.

위와 같이 판에 박은 듯 반복되는 어구가 어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들과는 관계를 맺고 어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의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비구 보디에 의하면 그 이유는 단지 모든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들에 적용될 수 있는 문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적용되지 않은 것은 단지 그렇게 적용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경전들의 결집에서의 누락에 기인한다. 

이 한글 쌍윳따 제8권에는 다음과 같은 제45쌍윳따와 제46쌍윳따의 두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는데 제46쌍윳따는 지면관계상 전반부 만이 여기에 실렸다.


「제45쌍윳따 길(Magga-Saṁyutta)」
「제46쌍윳따 깨달음의 고리(Bojjhaṅga-Saṁyutta)」

 

제45쌍윳따 「길 쌍윳따」은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인 팔정도를 다루고 있다. 이 「길」은 PTS본에는 8개의 품으로 나누어졌으나 역자는 미얀마본에 따라 16개의 품으로 나누었다. 이 쌍윳따에 소속된 팔정도에 관한 경전은 모두 180개나 된다. 그런데 이 팔정도의 각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정신현상의 연기로 구분된다.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은 도덕적 현상(戒蘊:sīlakkhandha)으로 올바른 정진, 올바른 마음새김, 올바른 집중은 고차적 정신현상으로서의 명상적 현상(定蘊:samādhikkhandha)으로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의도는 지혜적 현상(慧蘊:paññakk-handha)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팔정도를 계․정․혜(戒定慧)의 3학(三學)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견해에 관하여 이 책의 제45쌍윳따 8경 분별경(分別經)에서 자세히 정의하고 있으나 삼학과 관계해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성스러운 것 하나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초보적이고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출발이자 완성인 지혜의 속성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소업분별경(小業分別經)에 의하면, “모든 존재(衆生 : sattā)는 업(業)의 소유자들이며 업의 상속자들이며 업을 모태로 삼는 자들이며 업을 친지로 하는 자들이며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들이다.”라고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분별경은 완성된 지혜를 의미하는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 라고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올바른 집중의 과정에서 새롭게 동원되는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직관적 통찰(vipassāna)은 세속적인 길(世間道:lokiya magga)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세속적인 윤회에 대한 통찰을 통해 그것을 초월하여 해탈로 이끄는 길을 말한다. 이 길을 통해 세계의 무상, 고, 무아성이 충분히 깨달아졌을 때에 그 조건성은 파괴되고 무위의 열반이 성취된다. 이러한 무위 열반의 무조건적인 세계로의 관통은 출세간적인 도(出世間道:lokauttara magga)라고 불리운다. 이 때에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는 개념적인 이해를 뛰어넘어 궁극적으로는 한순간에 동시에 깨달아진다.

 

■제9권

PTS본 5권 [대품 모음(Mahāvagga)] 가운데 2/4에 해당하는 경전이다. [대품 모음]의 내용에 관해서는 이미 쌍윳따니까야 8권의 서문에서 개략적으로 소개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한글 쌍윳따 제9권에는 다음과 같은 제46쌍윳따의 후반부와 제47쌍윳따와 제48쌍윳따의 세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제목은 아래와 같다.


「제46쌍윳따 깨달음의 고리 II(Bojjhaṅga-Saṁyutta)」
「제47쌍윳따 새김의 토대(Satipaṭṭḥāna-Saṁyutta)」
「제48쌍윳따 능력(Indriya-Saṁyutta)」

 

제46쌍윳따 「깨달음 고리 쌍윳따」는 전반부는 쌍윳따니까야8권의 뒤에 실려있는데 모두 18개의 품 184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고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七覺支:satta bojjhaṅgā)는 다음과 같다.
① 새김의 깨달음 고리(念覺支:satisambojjhaṅga)
② 탐구의 깨달음 고리(擇法覺支:dhammavicayasambojjhaṅga)
③ 정진의 깨달음 고리(精進覺支:viriyasambojjhaṅga)
④ 희열의 깨달음 고리(喜覺支:pītisambojjhaṅga)
⑤ 안온의 깨달음 고리(輕安覺支:passaddhisambojjhaṅga)
⑥ 집중의 깨달음 고리(定覺支:samādhisambojjhaṅga)
⑦ 평정의 깨달음 고리(捨覺支:upekhāsambojjhaṅga)


역자는 칠각지(七覺支)를 깨달음의 고리라고 번역했으나 일반적으로는 ‘깨달음의 요소’라고 번역한다. Srp. III. 138에 따르면, ‘깨달음의 요소이거나 깨달은 자의 요소가 깨달음의 고리이다.(bodhiyā bodhissa vā aṅgā ti bojjhaṇgā)’ 깨달음의 요소란 새김(sati)등의 법의 집합을 의미하고 깨달은 자의 요소란 ‘사성제를 꿰뚫거나 열반을 실현하는 것(cattāri vā ariya-saccāni pativijjhati, nibbānaṃ eva vā sacchikaroti)’을 말한다. SN. V. 72에 의하면, 부처님 스스로는 각지(bojjhaṅgā)를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것(bodhāya saṃvattantīti)’이라고 정의했다. 이 가운데 역자가 번역에서 가장 고민한 단어는 희열(pīti)이라는 단어이다. PTS. 사전에는 ‘즐거움(joy), 환희(delight), 흥미(zest), 충만(exuberance), 황홀(rapture)’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 가운데 감수의 다발(受蘊:vedanākkhandha)이 아니라 형성의 다발(行蘊:saṅkhārakkhandha)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에 의해 창조된 관심이나 흥미를 뜻한다. 희열은 대상을 바람직한 것(아름답거나 착하거나 덕스러운 것)으로 파악하는 특징을 지녔다고 말해진다(ārammaṇaṃ kallato gahaṇalakkhaṇāti vuttam. Cdp. 243). 이 희열에는 다섯가지 종류의 희열(pañcavaṇṇā Pīti)가 있다. ㉠ 짧은 흥미(khuddakā pīti), ㉡ 순간적 기쁨(khaṇikā pīti), ㉢ 거듭 나타나는 기쁨(okkantikā pīti), ㉣ 황홀한  기쁨(ubbegā pīti), ㉤ 가득찬 기쁨(pharaṇā pīti). 한때에 필자는 이 단어를 경이(驚異)라고 번역하고는 만족했으나 아무래도 놀라움(wonder, miracle)을 뜻하는 경이와는 뜻이 현격히 차이가 나는 것 같아 희열로 바꾸었다. 그러나 탐구와 정진이후에 나오는 희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무엇인가에 의문을 가지고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란 뜻의 경이(thauma)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보기도 힘든 것 같다.

몸(kāya:SN. V. 63)이라는 경에는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의 자양분에 관하여 상세히 나온다. 초기불교에서 자양분이란 그것을 일으키는 조건들을 말한다. 각각의 그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① 새김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새김의 깨달음 고리의 토대가 되는 법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숙고하고 익히는 것으로 붓다고싸(Srp. III. 141)에 따르면, ‘마음새김의 대상이 되는 법은 삼십칠조도품(三十七 助道品)과 구출세간법(九出世間法)에 대한 것이다.
② 탐구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건전한 법과 건전하지 못한 법이 있고, 비난받아야 할 법과 비난 받을 것이 없는 법이 있고 열등한 법과 수승한 법이 있고 어둡고 밝은 법의 대조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고 익히는 것이다.
③ 정진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시도의 세계, 노력의 세계, 용맹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이다. 붓다고싸(Srp. III. 141)에 따르면 시도, 노력, 용맹은 정진의 세가지 점증적 단계이다.
④ 희열의 깨달음의 조건:희열의 깨달음 고리의 토대가 되는 법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 붓다고싸(Srp. III. 141)에서도 별다른 설명 없이 토대가 되는 법이란 ‘희열의 대상이 되는 것(pītiyā ārammaṇa-dhamm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⑤ 안온의 깨달음의 조건:몸의 안온과 마음의 안온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이다. SN. V. 67의 계행이라는 경은 ‘몸의 고요함과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붓다고싸(Srp. III. 141)에 따르면, ‘몸의 안온’은 ‘세가지의 정신적 다발(감수, 지각, 형성)의 스트레스를 고요히 하는 것(tiṇṇaṃ khandhassa daratha-passaddhi)’이고 ‘마음의 안온’은 ‘의식의 다발의 스트레스를 고요히 하는 것(viññāṇa-kkhandhassa daratha-ppassadhi)’이다.
⑥ 집중의 깨달음의 조건:멈춤의 특징(samatha-nimittaṃ)과 부동의 특징(avyagga-nimittaṃ)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이다. 그런데  붓다고싸(Srp. III. 141)에 따르면 두 단어는 동의어(同義語:vevacanaṃ)이다.
⑦ 평정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평정의 깨달음 고리의 토대가 되는 법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이다. 붓다고싸(Srp. III. 141)에서도 별다른 설명 없이 토대가 되는 법이란 ‘평정의 대상이 되는 것(upekhāya ārammaṇa-dhamm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Cdp. 66에 따르면, 그것은 선악이나 고락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의 균형(majjhattatā)에 의해서 성숙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계행(sīla)이라는 경은 ① 새김(念:sati)→ ② 탐구(擇法:dhammavicaya)→ ③ 정진(精進:viriya)→ ④ 희열(喜:pīti)→ ⑤ 안온(輕安:passaddhi)→ ⑥ 집중(定:samādhi)→ ⑦ 평정(捨:upekhā)의 인과적인 연쇄에 관하여 말한다. 경전은 또한 이곱가지 깨달음 고리를 닦고 익히면 일곱가지의 결과, 일곱가지의 과보가 기대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법수적인 일치는 부자연스러운 것인데 이는 쌍윳따니까야의 후반부가 전반부보다는 고층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긴 하다. 그 일곱가지란 다음과 같다.
①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실현한다(現法智證樂). 붓다고싸(Srp. III. 143)에 따르면 ‘죽음의 시간이 도달되기 전에(asampatte yeva maraṇakāle)’ 완전한 智慧에 이른다. 따라서 죽기전에 阿羅漢의 지위의 실현한다.
② 만약에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목숨을 다할 때에 깨달음을 성취한다(終命時 現法智證樂).
③ 만약에 목숨을 다할 때에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하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로 태어나는 도중에 열반에 드는 중반열반에 이른다. 중반열반자(中般涅槃者:antarā-parinibbāyī)는 다음에 등장하는 생반열반, 무행반열반, 유행반열반, 색구경천에서의 상류반열반자와 더불어 ‘돌아오지 않는 이(不還者)’에 대한 다섯가지 유형을 언급한 것이다. 중반열반은 글자 그대로 하면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로 태어나는 도중에 즉 중유(中有)의 세계에서 열반에 드는 자’를 의미한다. 앙굿따라니까야(AN. II. 134)에서는 중반열반자를 ‘존재의 속박(bhavasaṃyojana)’을 버리지 못했으나 ‘태어남의 속박(upapattisaṃyojana)’을 버린 자로 보는데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석서의 아비달마(阿毘達摩的)인 해석은 다르다. 붓다고싸(Srp. III. 143)에 따르면, ‘생애의 절반을 넘지 않아 열반에 드는 자로 세가지 종류가 있다. 천겁의 수명을 가진 무번천(無煩天)에 태어나서 그 태어난 날에 열반에 들거나 태어난 날에 들지 못한면 일백겁가량 지난 뒤에 얻는다. 이것이 첫 번째 중반열반자이다. 다른 자가 이와 같이 불가능하면 이백겁이 지난 뒤에 열반에 든다. 이것이 두 번째의 중반열반자이다. 다른 자가 이와 같이 불가능하면 사백겁이 지난 뒤에 열반에 든다. 이것이 세 번째의 중반열반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붓다고싸의 주석은 너무 아비달마적이고 계량화된 것이다.
④ 만약에 중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열반에 드는 생반열반에 이른다. 생반열반자(生般涅槃者:upahaccapa-rinibbāyī)는 글자 그대로 하면 ‘다시 태어나자마자 涅槃에 드는 자’를 뜻하지만, 붓다고싸(Srp. III. 143)에 따르면, ‘五百劫을 넘어서 阿羅漢에 도달한 자가 生般涅槃者이다.’ 이 붓다고싸의 주석도 너무 아비달마적이다.
⑤ 만약에 생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노력 없이 열반에 드는 무행반열반에 든다. 무행반열반자(無行般涅槃者:asaṅkhāra-parinibbāyi)에서 무행반(asaṅkhāra)은 ‘형성이 없는=업의 잔여가 없는, 조건이 없는’의 뜻이다. 앙굿따라니까야(AN. II. 155~156)에 따르면, 無行般涅槃은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四禪定을 통해서 涅槃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고싸(Srp. III. 144)에 의하면 ‘노력 없이(appayogena)’의 뜻이다. 따라서 다시 태어나 별다른 노력 없이도 열반에 드는 자를 의미한다. asaṅkh-āraparinibbāyi는 그 의미가 無餘涅槃(anupādhisesa-nibbāna)을 의미한다고 하면 asaṅkhāra는 언어학적으로는 無餘(anupādhisesa)의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⑥ 만약에 무행반열반에도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화생하여 오랜시간 수행하여 열반에 드는 유행반열반에 든다. 유행반열반자(有行般涅槃者:sasaṅkhāro parinibbāyī)는 다시태어나 많은 노력을 기우려 열반에 드는 자이다. 붓다고싸(Srp. III. 143)에 따르면, ‘고행적인 명상[加行]을 통해 阿羅漢의 地位에 到達하는 자(sappayogena arahattaṃ  patto)’의 뜻이다.
⑦ 만약에 유행반열반에도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상류의 색구경천에 이른다(uddhaṃ-soto akaniṭṭha-gāmī). 이를 한역에서는 상류반열반자(上流般涅槃者)라고 하는데, 그를 열반자로 번역하면 돌아오지 않는 이의 우위를 가려내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는 형상계의 최고천에 도달하는 자이지 거기서 열반에 든다는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전은 깨달음 고리가 모든 경우에 보편 타당한 수행방법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사람이 큰 불더미를 끄려고 한다고 하자. 그가 여기에다 마른 풀잎을 던지고 마른 쇠똥을 던지고 마른 나무를 던지고 입으로 바람을 불고 먼지를 뿌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큰 불더미를 끌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마찬가지로 마음이 들뜨면 그때에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닦으면 옳지 않고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닦으면 옳지 않고 희열의 깨달음 고리를 닦으면 옳지 않다. 그것은 어떠한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들뜨면 그것을 이러한 조건으로 고요하게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SN. V. 114)”

 제47쌍윳따는 「새김의 토대 쌍윳따」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에 관한 경전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10개의 품과 102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네가지 새김의 토대의 어원은 satipaṭṭhāna인데, 주석서들(Smv. III. 741~61; Pts. II. 244~266)에 의하면, satipaṭṭhāna란 말은 sati-upaṭṭhāna나 sati-paṭṭhāna의 두가지로 분석이 가능한데 전자일 경우는 ‘새김의 발생’으로 새김의 장치에 해당하고 후자일 경우는 ‘새김의 토대’로 새김의 대상에 해당한다. 역자는 후자인 새김의 토대를 취한다. 정확한 번역은 새김의 발취(發趣)일 것이나 오늘날 일상용어로 쓰이지 않으므로 제외한다. 이 새김의 토대는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여 바른 방도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다.  이 하나의 길이란 원어로 ekāyano maggo인데 ‘하나의 행선지로 통하는 길’을 말하는데 한역에서는 일승도(一乘道)라고 한다. 마지마니까야(MN. I. 55)의 ekāyano ayaṃ maggo도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영역할 때에 Soma는 ‘This is the only way’라고 했고 Nyanaponika는 ‘This is the sole way’라고 했다. 이 두 표현은 모두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독점적인 길이라는 인상을 준다. 주석서들(Smv. III. 743~744; Psm. I. 229~230)에 따르면, 그것은 오로지 다섯가지의 설명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Srp. III. 177도 그 첫 번째 설명방식만을 따르고 있다: ‘수행승이여, 하나의 길은 이 길은 갈림길이 아니다.(ekamaggo ayaṃ bhikkhave maggo na dvedhāpathabhūto)’ MN. I. 74에 나오는 ekāyano maggo란 곧바로 행선지로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을 말한다. 그러므로 大乘佛敎 특히 妙法蓮花經(Saddharmapuṇḍarikasūtra)에서 말하는 一乘(ekayāna)과는 다르다. 새김(SN. V. 142)이란 경은 네가지 새김의 토대인 ‘① 몸에 대한 몸의 관찰(身隨觀), ② 감수에 대한 감수의 관찰(受隨觀), ③ 마음에 대한 마음의 관찰(心隨觀), ④ 사물에 대한 사물의 관찰(法隨觀)’과 뿐만아니라 그 자매적인 수행법으로 올바른 앎의 실천도 중요하다고 언급을 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올바른 앎을 실천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나아가는 것과 물러서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고, 보는 것과 살피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고, 굽히는 것과 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고, 법복과 발우와 가사를 지니는 것을 올바로 알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고, 대변과 소변을 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고, 가고 서고 앉고 잠자고 깨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아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와 같이 올바른 앎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승(SN. V. 142)이란 경은 네가지 새김의 토대는 청정한 계행과 올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경전들이 있는데, 거기서 부처님은 매와 메추라기의 우화(SN. V. 146), 사냥꾼과 원숭이의 비유(SN. V. 148)를 인용하며 오욕락의 감각적 쾌락은 자신의 영역, 아버지의 경계가 아니고 이 네가지 새김의 토대야말로 자신의 영역, 아버지 경계임을 선언하고 자신의 영역, 아버지의 경계가 아닌 곳을 거닐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영역이 아니 곳, 다른 경계를 거니는 자는 이와 같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자신의 영역이 아니 곳, 다른 경계를 거닐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영역이 아닌 다른 경계를 거닐면 악마가 그 기회를 얻고 악마가 그 대상을 얻는다.
그러므로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남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고 법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유훈은 곧 자신의 영역, 아버지의 경계인 네가지 새김의 토대를 거닐며 수행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쭌다(SN. V. 161)라는 경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제48쌍윳따 「능력 쌍윳따은」는 17품 178경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경전들은 주로 다섯가지 능력(五根:pañca indriyāni)에 관하여 설하고 있는데 분별경(SN. V. 196)에 그 다섯가지 능력에 대한 정의는 아래와 같다.
① 믿음의 능력(信根:saddindriyam): ‘세존께서는 공양받을 만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추신 님, 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이해하는 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님,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이다’라고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 능력이다.
② 정진의 능력(精進根:viriyindriyaṃ):건전하지 못한 법을 버리고 건전한 법을 갖추어 확고히 용맹정진하여 건전한 법에 멍에를 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 또는 네가지의 노력(四精勤)을 실천하는 능력이다.
③ 새김의 능력(念根:satinriyaṃ):최상의 분별있는 사려를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실천하는 것 또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를 실천하는 능력이다.
④ 집중의 능력(定根:samādhindriyaṃ):마음의 대상을 보내버리고 집중을 얻어 마음의 통일을 성취하는 것 또는 네가지 선정(四禪)에 드는 능력이다.
⑤ 지혜의 능력(慧根:paññindriyaṃ):사물의 생성과 소멸에 관한 지혜를 갖추고 성스럽게 꿰뚫어 봄으로서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갖추는 것 또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여실히 아는 능력이다.


그밖에 이 제48쌍윳따 능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두종류의 세가지 능력(tīṇi indriyānai)이 있다. 먼저 ① 여성의 능력(itthindriyam), ②남성의 능력(purisindriyaṃ), ③ 생명의 능력(jīvitindriyaṃ)이 등장한다. 붓다고싸(Srp. III. 237)에 따르면, 여성의 능력이란 ‘여성의 본성을 지배하는 것(itthibhāve ind'aṭṭhaṃ kāreti)’을 뜻하고 남성의 능력은 ‘남성의 본성을 지배하는 것(purisabhāve ind'aṭṭhaṃ kāreti)’을 뜻한다. 수명의 능력(jīvitindriya)는 생명의 능력을 뜻한다. 그 다음으로는 인식론적인 것인데 ①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고자 하는 능력(未知當知根:anaññātaññassāmītindriyam), ② 알려진 것을 아는 능력(知根:aññindriyam), ③ 알려진 것을 완전히 아는 능력(具知根:aññātāvindriyaṃ)이다. 붓다고싸(Srp. III. 237)에 따르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고자 하는 능력이란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예전에 몰랐던 법을 알 것이다라고 실천할 때에 예류향의 순간에 일어나는 능력’을 말한다. 알려진 것을 아는 능력이란 ‘알려진 법을 아는 형태에 의해서 예류과등 여섯가지 상태에 생겨나는 능력’을 말한다. 알려진 것을 완전히 아는 능력이란 ‘알려진 것을 완전히 아는 아라한의 지위의 상태에서 생겨난 능력’을 말한다. 그 밖에 또한 여섯가지의 능력(cha indriyāni) 곧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 정신능력은 붓다고싸(Srp. III. 240)에 따르면, 시각능력이 ‘시각과 시각기관에 생겨난 현상에 대하여 지배하거나 조정하는 의미에서 능력’을 의미하듯이 나머지 능력도 그러한 관계의 의미를 지니다.


그밖에 일반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다섯가지 능력(五根:pa-ñca indriyāni)이 언급되고 있다.
① 안락의 능력(sukh'indriyam):몸이 안락한 것, 몸이 유쾌한 것,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안락함과 유쾌함을 느끼는 능력.
② 고통의 능력(dukkh'indriyam):몸이 고통스러운 것, 몸이 불쾌한 것,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움과 불쾌함을 느끼는 능력.
③ 만족의 능력(somanass'indriyam):마음으로 안락한 것, 마음으로 유쾌한 것,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안락함과 유쾌함을 느끼는 능력.
④ 불만의 능력(domanassa'indriyam):마음으로 고통스러운 것, 마음으로 불쾌한 것,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움과 불쾌함을 느끼는 능력.
⑤ 평정의 능력(upekkh'indriyaṃ):몸이나 마음으로 유쾌하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는 것을 느끼는 능력.


우리는 세존께서 말라의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 언덕의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아래서 처음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했을 때의 깨달음의 내용에 관하여 일반적으로는 12연기의 역관과 순관이라고 알고 있다. 그것은 율장의 대품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쌍윳따니까야 대품의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정각을 얻었을 때의 깨달은 내용은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 SN. V. 12)에 대한 체험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 SN. V. 167), 다섯가지 능력(五根,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 SN. V. 232)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쌍윳따니까야5권은 이 세가지의 수행체계야말로 모든 수행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제10권

PTS본 5권 ?대품 모음(Mahāvagga)? 가운데 3/4번째에 해당하는 경전의 모음집이다.
이 한글 쌍윳따 제10권에는 다음과 같은 제49쌍윳따에서 제53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제목은 아래와 같다.
「제49쌍윳따 올바른 노력(Sammappadhāna-Saṁyutta)」
「제50쌍윳따 힘(Bala-Saṁyutta)」
「제51쌍윳따 신통의 기초(Iddhipāda-Saṁyutta)」
「제52쌍윳따 아누룻다(Anuruddha-Saṁyutta)」
「제53쌍윳따 선정(Jhāna-Saṁyutta)」


제49쌍윳따는 5품 54개의 경으로, 제50쌍윳따는 10품 110개의 경으로 제51쌍윳따는 8품 86개의 경으로, 제52쌍윳따는 2품 24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제49쌍윳따 「올바른 노력(正勤: sammappadhāna)이란 여덟가지 길 가운데 한 요소인 올바른 정진(正精進:sammāvāyāma)을 말하며 그것과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다만 올바른 정진은 올바른 생활을 토대로 건전하고 선한 힘에 의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건전하고 선한 힘은 물론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를 수반하는 도덕적 요인으로부터 나온다. 일반적인 선한 상태의 힘의 경우에는 그것이 생사윤회의 범주 안에서의 공덕을 쌓는 데 국한된다. 그러나 8정도의 계열 속에서의 선행적인 것을 수반으로 하는 정진의 힘은 전체적인 성스러운 길에 방향을 정초시키는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적 현상의 계발의 단초가 된다. 정진의 힘에 의해서 오염된 마음이 해탈된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37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되는 길로서 8정도와는 독립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노력에는 네 가지의 노력(四精勤)이 있는데 불건전한 것을 버리고 건전한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말한다. 불건전한 상태(不善法:akusalā dhammā)는 행위를 유발하건 유발하지 않건 간에 오염된 사유, 감정, 의도 등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건전한 상태(善法:kursalā dhammā)는 해탈로 이끄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궁극적으로 불건전한 것은 해탈에 장애가 되는 속박의 연기에 소속되는 것으로 방지되고 버려져야 하는 것이며, 건전한 것은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지속시키고 계발하여야 하는 해탈의 연기에 소속되는 것이다.
1) 방지의 노력(律儀勤:saṁvarappadhāna):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상태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을 방지의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올바른 노력의 첫번째 측면은 오염된 마음의 불건전한 상태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데 두어져 있다. 이러한 불건전한 상태가 정신의 집중과 있는 그대로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만큼 장애라고 불리우며 이 장애에는 다섯가지 장애(五障:pañcanīvaraṇā)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장애가 있다. 어떠한 것이 다섯가지인가? 감각적 쾌락의 장애, 분노의 장애, 해태와 혼침의 장애, 흥분과 회한의 장애, 의심의 장애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것이 다섯가지 장애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다섯가지 장애를 잘 알고 완전히 알고 완전히 소멸하고 버리기 위해  네가지 올바른 노력을 닦아야 한다(SN. V. 248)


위의 다섯가지 장애를 좀더 상세히 분류하여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감각적 쾌락(愛貪:kāmacchanda)
② 분노(惡意:byāpāda)
③ 해태와 혼침(昏寢睡眠:thīnamiddha)
④ 흥분과 회환(悼擧惡作:uddhaccakukkucca)
⑤ 의심(疑:vicikicchā)


앞의 두 가지 장애, 감각적 쾌락과 분노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 선정이나 삼매의 수행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탐욕과 진에를 수반하고 있다. 다른 세 가지 장애는 비교적 덜하지만 장애적인 요소가 강한 것으로 우치를 수반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은 감각적 욕망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다섯 가지 감각의 장에서 일어나는 욕망(五欲樂)을 말하지만 때로는 넓은 의미로 감각적인 쾌락뿐 아니라 부, 권력, 지위, 명예 등에서 발생하는 욕망도 의미한다. 두번째의 장애인 분노는 첫번째 장애와 다른 극단적 형태의 진에를 수반하는 것으로 자타에 대한 증오, 화냄, 원한, 혐오 등을 속성으로 한다. 세번째 장애는 해태와 혼침이다. 해태는 정신적으로 아둔한 것을 의미하고 혼침은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아 졸리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세번째 장애와 다른 극단적인 형태가 네번째의 장애이다. 흥분은 마음의 들뜸, 불안정을 의미하고 회한은 걱정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하지 않았던 결과에 대한 근심을 뜻한다. 이것은 우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섯번째 장애는 의심이다. 의심은 우치를 수반하는 상습적인 미결정과 미해결, 신뢰의 결여 등을 뜻한다. 경전에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에 관해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감각적 쾌락은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에 비유되고, 분노는 부글부글 끓는 물에 비유되며, 해태와 혼침은 이끼가 낀 물, 흥분과 회한은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 의심은 흐린 흙탕물에 비유된다. 이러한 장애의 물을 버리고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이와 같은 장애를 막는 첫번째의 정진을 1)방지의 노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장애의 제거는 삼매의 수행에 지속적으로 수반된다. 마음의 장애는 정신적인 흐름 속에 지속되지만 감각적 체험의 유입을 통해서 활성화된다. 감각적인 체험은 감각자료, 즉 시각자료(色), 청각자료(聲), 후각자료(香), 미각자료(味), 접촉자료(觸)로 구성된다. 이러한 감각자료들은 의식에 의존하는 감각과 만나게 된다. 이때 의식이 함께 수반하면서 감각자료는 지속되고 평가되고 적절한 반응을 일으킨다. 의식이 그러한 자료적인 인상을 주의 깊고 현명하게 숙고(如理作意:yoniso manasikāra)하지 않으면 감각자료는 불건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오염되어 진행된다. 이러한 오염의 경향성은 감각대상에 따라서 규정된다. 매력적인 대상은 탐욕, 혐오적인 대상은 진에, 중성적인 대상은 우치를 수반하는 오염을 일으킨다. 그래서 붓다는 이러한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감관의 제어, 즉 근율의(根律儀:indriyasaṁvara)를 중심으로 방지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것이 방지의 노력(律儀勤)인가? 이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 눈으로 형상을 보되 그 현상(現相)을 취하지 않고 그 특징(隨相)을 취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눈의 기관을 제어하지 않으면 탐애(貪愛)와 근심과 악(惡)과 불건전한 상태(不善法)가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수행하고 눈의 기관을 보호하고 눈의 기관을 제어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다른 모든 감각기관에 대해 동일한 설명이 반복된다. 감각기관의 제어가 제어에 의한 정진, 즉 율의근의 중요한 실천적 덕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으로 형상을 보되 그 현상(現相)을 취하지 않고 그 특징(隨相)을 취하지 않는다(cakkhunā rūpaṁ disvā na nimitta-ggāhī hoti, nānuvyañjanaggāhī hoti)’는 말은 감관의 제어가 무엇인지를 해결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현상(現相:nimitta)이란 말은 대상의 겉모습이고 특징(隨相:anuvyañjana)은 사소한 특징을 의미한다. 정형화된 연기에 의하면 의식은 항상 감각영역에 수반하므로 감관이 잘 제어되지 못하면 의식은 무모하게 흐르면서 사물의 겉모습에 끄달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오염을 야기시키고 사소한 특징을 조작하여 희론에 의한 오염을 증폭시키며 불건전한 상태(不善法)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감관의 제어는 올바른 마음새김과 올바른 집중을 통한 성숙된 지혜의 수습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2) 버림의 노력(斷勤:pahānappadhāna):이미 일어난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는 것을 버림의 노력이라고 한다.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감관을 제어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장애들을 극복하였더라도 과거의 업으로부터 유래된 불건전한 사유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이 두번째의 정진이 필요한 것이다. 이 노력을 ‘버림의 노력’이라고 한다. 경전은 이것이 무엇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버림의 노력인가? 여기에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유들, 이미 생겨난 분노에 대한 사유들, 모든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수용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파괴하고 없애는 것이다.”
모든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상태에는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의 정신적 장애가 포함된다. 경전에 의하면 이러한 장애에 대처하는 방법은 응병여약(應病與藥) 식으로 각각의 경우에 맞게 주어진다. 다섯 가지 장애는 탐욕, 진에, 우치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그 조건을 소멸시킴으로써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중부니까야]에 따르면 불건전한 오염된 사유는 그와 대치되는 건전한 사유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그 [불건전한] 현상(現相)과는 다른 건전한 것을 수반하는 현상을 숙고하는 자에게는 탐욕을 수반하고 성냄를 수반하고 어리석음을 수반하는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소실된다. 그것들을 버림으로써 안으로 마음이 안립되고 고요해지고 하나로 되고 집중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없애는 것은 선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숙고를 통해 없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선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사유마저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善)으로 불선(不善)을 대치하는 것은 마치 능숙한 미장이나 그 도제가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하는 것(sukhumāya āṇiyā olārikaṁ āniṁ a-bhinihaneyya)과 같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그 선(善)도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 생겨난 다섯 가지의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대치법(對治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자비에 대한 명상을 통해 모든 탐욕과 진에, 또는 애탐과 악의 등은 사라지며 해태와 혼침의 제거를 위해서는 빛나는 광명체에 대한 시각화, 활발한 행선(行禪)의 수행, 죽음에 대한 명상(maraṇānussati), 또는 단지 정진을 지속할 확고한 결심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흥분과 회한은 마음을 전환해서 관심 있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멸될 수 있다. 의심에 대한 해결은 질문, 탐구, 학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상태는 그러한 장애를 몰아내는 일대일 대응의 대치법을 첫번째로 하는 이외에 두번째로 부끄러움(懺:hirī)과 창피스러움(愧:ottappa)이란 도덕적인 양심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사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세번째 방법은 불건전 생각이 일어날 때 관심의 방향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네번째 방법은 관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해서 상태의 속성과 그 원인을 조사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소멸한다. 다섯번째 방법은 의지의 힘으로써 억제함으로써 불건전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마음의 노예가 아니라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반적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무엇이든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불건전한 상태를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수행의 노력(修勤:bhāvanāppadhāna):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는 것을 수행의 노력이라고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불건전한 상태의 제거를 통해서 올바른 정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의 계발을 수반한다. 이것을 수행의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지만 경전에서 특히 일곱 가지의 깨달음의 요소(七覺支:satta bojjhaṅgā)를 들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수행의 노력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수행승이 멀리떠남에 의지하고 사라짐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보내버림으로 열반으로 끝나는 새김의 깨달음 고리, 탐구의 깨달음 고리, 정진의 깨달음 고리, 희열의 깨달음 고리, 안온의 깨달음 고리, 집중의 깨달음 고리, 평정의 깨달음 고리을 수행한다.”
이 깨달음의 고리들은 깨달음의 조건이 되면서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수반되어 그 속성이 되는 것들이다.


깨달음의 길은 새김(念:sati)을 출발로 해서 시작된다. 새김이란 탐욕, 진에, 우치를 수반하는 사유들이 제거되고 일체의 선입견이 소멸되어 현재의 시점에서의 사물에 대한 관찰을 의미하는 깨달음의 요소이다. 이 사물에 대한 관찰은 그 특징이나 조건이나 결과에 대한 조사를 의미하는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수반하게 된다. 이때 새김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며 탐구는 능동적인 인식의 측면을 갖고 상호 수반하는 관계에 있다. 새김과 탐구가 이루어지면 올바른 길을 알게 되고 힘(精進力:viriya)을 얻게 되는 정진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 정진에서 정진력이 진행되면 희열이 등장하며 희열은 점차로 형성되어 정점에 달하면 지복의 파도가 몸과 마음을 감싸면서 안정되어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평안한 안온의 깨달음 고리를 수반한다. 이러한 안온을 토대로 마음의 집중에 도달한다. 이러한 정신의 집중이 깊어지게 되면 결국 깨달음의 마지막 요소인 마음의 평정에 이른다. 이러한 깨달음에 수반되는 요소들이 곧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로서 수행되어야 할 것들이다.


4) 수호의 노력(守護勤:anurakkhaṇāppadhāna):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수호의 노력이라고 한다.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확대시키고 계발시키고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은 책려하며 노력한다.
이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생겨나도록 하는 수행의 노력(修勤)을 조건으로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을 말하며 이 수호의 노력은 정신의 집중을 통해 나타나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를 상기시키는 지각의 현상(現相:nimitta)을 수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수호에 의한 정진인가? 여기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이미 생겨난 선한 삼매(三昧)의 현상(現相), 즉 골상(骨想), 충담상(蟲啖想), 청어상(靑瘀想), 농란상(膿爛想), 천공상(穿孔想), 팽창상(膨脹想)을 수호하는 것이다.”
골상은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충담상은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청어상은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농란상은 고름이 가득 찬 시체에 대한 지각, 천공상은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평창상은 부푼 시체에 대한 지각을 말한다.
경전에서 이미 생겨난 깨달음의 요소를 수호하기 위한 정진으로 이러한 조건지어진 존재의 궁극적인 괴로움, 즉 죽음에 수반되는 현실의 처참함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으로부터 염리(厭離)를 도모하여 해탈을 수호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삼매에 의해 밝혀지는 괴로움의 현상(現相)을 수호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쌍윳따 힘은 다섯가지의 힘(五力:pañca balāni)에 관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힘이 있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① 믿음의 힘, ② 정진의 힘, ③ 새김의 힘, ④ 집중의 힘, ⑤ 지혜의 힘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힘이란 이와 같다....수행승이 다섯가지 힘을 닦고 다섯가지 힘을 익히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임한다.
위의 다섯가지 힘은 ?쌍윳따 니까야?(SN. V. 252)에 따르면, 계행에 의지하고 계행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다. 따라서 다섯가지 힘은 8정도처럼 완전한 독립된 수행체계로서 길이라고 볼 수 없지만 악하고 불건전한 법을 없애거나 장애를 척결하거나 열반에 이르게 하는 힘이다.


세번째 쌍윳따 「신통의 기초」이다. 신통의 기초(iddhipāda)란 ‘초자연적인 힘의 기초’ 또는 ‘영적인 힘의 기반(Basis for spiritual power)’, ‘정신력의 기반(Bases of psychic power)’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원래 신통(iddhi, sk. ṛddhi)라는 말은 ‘성공, 성장, 번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인도의 요가를 위시한 명상수행의 전통 속에서는 명상의 결과로 얻어지는 특별한 성취나 놀라운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인도에서 그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기보다는 정신의 집중을 통해 얻어지는 자연적인 인과적인 산물로 보고 있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마음의 집중을 통해 일상적인 감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정신과 물질에너지의 미묘한 고리를 파악하여 그 심오한 인과관계의 흐름 속에 들어가 기적으로 보이는 영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하였다.


초기불교는 순수한 윤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빠알리 니까야에서 부처님 스스로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영적인 성취를 발휘했을 뿐만아니라 그러한 기술에 능숙한 제자를 극구 칭찬하기도 했다. 부처님께서 부정한 것은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영적인 성취가 아니라 신통술을 사특한 목적으로 잘못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행승들에게 이러한 신통술을 보여 재가신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금하고 신통술이 있다고 해서 완전한 지혜를 성취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초기불교에서 진정한 기적은 악을 극복하고 선을 구현시키는 ‘가르침의 기적(anusāsanipaṭihāriya)’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에서는 ‘다양한 신통의 종류(anekavihitaṃ iddhividhaṃ)’를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한역에서는 이 협의의 신통을 신족통(神足通)이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신통의 종류는 여섯가지의 보다 광의의 범주인 초월적 또는 직관적 인식능력 즉 육신통(六神通: chaḷabhiññā)에 소속된다. 불교에 따르면 초월지는 초감각적 실재에 대한 신비적 직관이 아니고 단지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감각적 능력의 확장과 정제의 결과이다.’이러한 육신통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SN. V. 263)


1) 신족통 (神足通:iddhi):① 그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된다. ② 그는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③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해 간다. ④ 그는 물 속처럼 땅 속을 들어간다. ⑤ 그는 땅 위에서처럼 물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는다. ⑥ 그는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날아다닌다. ⑦ 그는 손으로 이처럼 큰 신비를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⑧ 그는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2) 천이통(天耳通:dibbasota):“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귀로서 멀거나 가까운 하늘사람과 인간의 두 소리를 듣는다.”
3) 타심통(他心通:parassa cetopariyañāṇa):“그는 나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다른 뭇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그는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화냄으로 가득 찬 마음을 화냄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화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화냄에서 벗어나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어리석음에 가득 찬 마음을 어리석음에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통일된 마음을 통일된 마음이라고 알고 흩어진 마음을 흩어진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최상으로 노력하는 마음을 최상으로 노력하는 마음이라고 알고 최상으로 노력하지 않는 마음을 최상으로 노력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마음을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마음이라고 알고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 마음을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알고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을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고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4) 숙명통(宿命通:pubbenivasānussati):“그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예를 들어 ‘1번 태어나고 2번 태어나고 3번 태어나고 4번 태어나고 5번 태어나고 10번 태어나고 20번 태어나고 30번 태어나고 40번 태어나고 50번 태어나고 백번 태어나고 천번 태어나고 십만번 태어나고 세계 파괴의 수많은 겁을 지나고 여러 세계 창조의 겁을 지나고 세계 파괴와 세계 창조의 수많은 겁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다. 내가 그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기억한다.”
5) 천안통(天眼通:dibbacakkhu):“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눈으로 뭇삶을 본다. 그는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뭇삶을 본다. 예를 들어 ‘이 뭇삶들은 몸으로 악행을 갖추고 말로 악행을 갖추고 뜻으로 악행을 갖추었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추고 잘못된 견해에 따른 행동을 갖추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가 파괴된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즐거움 없는 곳,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 뭇삶들은 몸으로 선행을 갖추고 말로 선행을 갖추고 뜻으로 선행을 갖추었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른 행동을 갖추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가 파괴된 뒤 죽어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눈으로 뭇삶을 살펴보고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안다.”
6) 누진통(漏盡通:āsavakkhaya):번뇌가 부수어지고 번뇌없는 마음의 해탈, 지혜의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잘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여기서 첫 번째 다섯은 수행자의 명상의 부산물과 같은 것으로 세간적인 것이며 해탈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마지막 누진통은 출세간적이고 궁극적인 것이다. 이러한 신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 바로 네가지 신통의 기초이다. 이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37조도품 가운데 소속되어 있지만 다른 조도품과 다른 것은 육신통의 성취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지 신통의 기초(四神足:cattāro iddhipādā)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① 의욕에 바탕을 둔 집중과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으며, ② 정진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으며, ③ 마음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으며, ④ 사유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SN. V. 254)
위의 네가지 신통의 기초에 관하여 한역에서는 각각 ① 욕삼마지근행성취신족(欲三摩地勤行成就神足:chand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ādaṃ), ② 근삼마지근행성취신족(勤三摩地勤行成就神足:viriy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ādaṃ), ③ 심삼마지근행성취신족(心三摩地勤行成就神足:citt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ādaṃ),  ④ 관삼마지근행성취신족(觀三摩地勤行成就神足:vīṃaṃs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ādaṃ)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도적인 노력(勤行:padhānasaṅkhāra)은 바로 올바른 노력을 뜻하므로 것이므로 앞에서 언급한 네가지 올바른 노력이나 정진과 관련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에 대하여 경전은 “누구든지 과거세, 미래세, 현세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로서 신통의 한 부분를 성취한 자는 그 모두가 네가지 신통의 기초의 한 부분을 닦고 익혔고 닦고 익히고 닦고 익힐 것이다.(SN. V. 257)”라고 기록하고 있고 누구든지 과거세, 미래세, 현세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로서 위대한 신통, 위대한 능력을 가진 자라면 그 모두가 네가지 신통의 기초의 한 부분을 닦고 익혔고 닦고 익히고 닦고 익힐 것이다.(SN. V. 273)”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아 부처님도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如來, 阿羅漢, 正等覺者)가 되었다.(SN. V. 257)  붓다고싸는 주석에서 의욕은 ‘하고자 원하는 것(kattukamyatā)’이고 사유는 ‘지혜’라고 설명할 뿐 정진과 마음에 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바른 집중 속에는 탁월한 삼매를 얻기 위한 의욕, 정진, 마음(의식), 사유가 선을 향한 올바른 노력과 더불러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쌍윳따 안에 탑묘(SN. V. 258)라는 흥미로운 경전이 있다. 이 경전은 고따마 붓다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여래로서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세상에 존경받는 님께서는 한 우주기 동안 머무르십시오,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한 우주기 동안 머무르십시오.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 행복, 안락을 위하여 선서께서는 한 우주기 남짓 머무십시오.”라고 간청했다면, 한 우주기 남짓 세상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는 담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한 우주기 남짓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은 바로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는 것이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쌓아나가고 잘 성취했다고 하자. 아난다여, 그가 원한다면 한 우주기나 한 우주기 남짓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네가지 신통을 성취한 자는 수명을 우주기 내에서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일겁(劫:kappaṃ)이란 우주기 곧 우주의 성주괴공에 걸리는 엄청난 기간을 암시하지만, 붓다고싸(Srp. III. 251)에 따르면, 단지 ‘목숨이 붙어있는 기간 곧 수명(āyu-kappaṃ)’을 말한다. 곧 ‘특정한 시대에 인간의 완전히 채운 정상적인 수명(tasmin tasmiṃ kāleyaṃ manussānam āyuppamāṇaṃ, taṃ paripuṇṇaṃ karonto)’을 말한다. 한 우주기 남짓’이란 한 우주기를 ‘수명’이라고 해석한다면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성취한 자는 ‘100세나 100세 남짓’ 이 세상에 머물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주석서(Srp. III. 251)에는 마하씨바(Mahāsiva) 장로가 ‘부처님은 현겁(賢劫; bhaddakappaṃ) 동안 머물 것이다’라고 했다는 주장이 동시에 실려 있다. 비구 보디(Cdb. 1940)에 따르면, 니까야에서 결코 우주기가 수명(āyu-kappaṃ)으로 쓰인 적이 없다. 역자는 문맥상 다음 문장의 ‘광대한 징조’라는 말과 일치시키기 위해 그대로 우주기라고 표현한다.


네번째 쌍윳따 「아누룻다」에서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에 관하여 아누룻다와 다른 수행승들과의 담론을 기술하고 있는데 [쌍윳따 니까야] 제9권의 쌍윳따 「새김의 토대」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제9권의 역자해제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쌍윳따에서 독특한 점은 아누룻다가 여섯가지의 초월적인 지혜 내지는 육신통을 얻은 것은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아서라기보다는 네가지 새김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SN. V. 303~304) 그리고 이 네가지 새김을 실천하여 아누룻다가 여래의 열가지 힘(如來十力:dasa tathāgatabala)를 성취했음을 기술하고 있다.(SN. V. 304~305):


① 나는 조건을 조건으로 조건이 아닌 것을 조건이 아닌 것으로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ṭhānañ ca ṭhānato aṭṭhānañ ca aṭṭhānato yathābhutaṃ pajānāmi.)
② 나는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을 받을 때에 조건과 원인별로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atītānāgatapaccuppannānaṃ kammasamādānānaṃ ṭhānaso hetuso vipāka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③ 나는 모든 곳으로 인도하는 길에 관해 분명히 안다. (sabbatthagāminīpaṭipada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④ 나는 수많은 요소, 다양한 세계의 세상을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anekādhātunānādhātulokam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⑤ 나는 뭇삶들이 여러 가지 경향에 관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sattānaṃ nānādhimuttikata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⑥ 나는 다른 뭇삶, 다른 사람들의 능력의 높고 낮음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parasattānaṃ parapuggalānaṃ indriyaparopariyatti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⑦ 나는 선정, 해탈, 삼매, 성취에서 잡염되거나 청정해지거나 출정(出定)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jhānavimokkhasamādhisamāpattīnaṃ saṅkilesaṃ vodānaṃ vuṭṭhāna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⑧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을 기억한다.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āmi)
⑨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뭇삶을 살펴보고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안다.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ām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yathākammupage satte pajānāmi)
 나는 번뇌가 부수어지고 번뇌없는 마음의 해탈, 지혜의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잘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āsavānaṃ khayā anāsavam cetovimuttim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āmi)

다섯번째 쌍윳따 「선정」은 첫번째 선정에서 네번째 선정에 이르기 까지의 네가지 선정(四禪定)에 관한 담론을 마치 37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조도품처럼 취급하여 확대한 것이다.
1) 첫번째 선정(初禪:pathamaṃ jhānaṃ):초선은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두 갖추어지면서 성립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착하지 못한 법(不善法)을 떠나서 사유(尋)과 숙고(伺)를 갖추고 멀리떠남(遠離)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번째 선정(初禪)에 든다.”


첫번째 선정에 의해 집중된 마음은 감각적 욕망이나 착하지 못한 법을 떠나서 사유(尋)과 숙고(伺) 그리고 정신적 장애의 원리(遠離)에 의한 희열과 행복을 수반한다. 그런데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초선에 도달한 자에게는 언어가 소멸하게 된다(pathamaṁ jhānaṁ samāpannassa vācā niruddhā hoti)’라고 또 다른 과정상의 속성이 부가되어 있으나 그것은 대상 지향적인 감각적 욕망을 떠나는 과정에 수반되는 지칭적 언어표현의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개념화된 언어로 대상을 이해하는 사유나 숙고는 아직 제거되지 않는다.


2) 두번째 선정(二禪:dutiyaṃ jhānaṃ):두번째 선정의 과정에서는 첫번째 선정이 갖추고 있던 선정의 요소 가운데 사유와 숙고가 다른 요소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로서 제거된다.
“사유(尋)과 숙고(伺)를 멈춘 뒤에 내적인 평온, 마음의 통일(心一境性), 무사유(無尋), 무숙고(無伺),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번째 선정(二禪)에 도달한다.”
이선에서는 언어에 기초한 개념적 사유(尋)과 숙고(伺)의 연생을 지멸하고 더욱 깊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속성으로 하는 삼매에서 생겨나는 더욱 커다란 희열과 행복을 수반한다.

3) 세번째 선정(三禪:tatiyaṃ jhānaṃ):이선에서 마음은 더욱 평정해지고 집중되었지만 희열은 삼선에 와서 집중상태가 깊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거칠게 지각되어 제거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희열이 사라진 뒤에 평정(捨)하고 주의깊고 사려깊고 육체적으로 행복을 느낀다. 바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주의깊어 행복하다’라고 한 세번째 선정(三禪)에 도달한다.”
따라서 세번째의 선정의 과정에서는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의 과정 가운데 더욱 심화된 행복과 심일경성만이 남는다. 이때에 평정함이 심화되고 마음새김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4) 네번째 선정(四禪:catutthaṃ jhānaṃ):세번째와 네번째의 선정으로 집중이 더욱 진행되면 중성적인 평정의 느낌보다 거칠게 지각되는 육체적인 행복이 제거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리고 이전의 희열과 우울이 사라진 뒤에 행복도 없고 고통도 없는 평정하고 주의깊고 청정한 네번째 선정(四禪)에 도달한다.”
여기 세번째와 네번째의 선정에서의 행복의 상태마저 제거되는 순수한 선정의 집중(心一境性) 상태만이 남아 있으며 거기에 마음새김이 수반된다. 그런데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네번째 선정(四禪)에 도달한 자에게는 입출식(入出息)이 소멸하게 된다(catuttham jhānaṁ samāpannassa assāsapassāsā  niruddhā honti)’라고 또 다른 과정상의 속성이 부가되어 있다. 이는 삼선과 사선을 통해 육체적인 행복과 입출식(入出息)이라고 하는 육체적 형성(行)이 소멸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첫번째와 두번째의 선정에서 언어적 형성이 세번째와 네번째의 선정에서 육체적 형성이 소멸된다.


이러한 선정들은 마치 허공에서 부는 바람과 같아 이 선정들을 닦으면 허공에서 부는 모든 깨달음에 이르는 청량한 바람을 몰고 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허공에는 여러 가지 바람이 분다. 동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서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북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남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먼지바람이 불고, 먼지 없는 바람이 불고, 찬 바람이 불고, 더운 바람이 불고, 미풍이 불고 태풍이 분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네가지 선정을 닦고 네가지 선정을 익히면 네가지 새김의 토대를 닦고 원만히 하며, 네가지 올바른 노력을 닦고 원만히 하며,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원만히 하며, 다섯가지 능력을 닦고 원만히 하며, 다섯가지 힘을 닦고 원만히 하며,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를 닦고 원만히 하며,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닦고 원만히 한다.(SN. V. 309)” 또한 네가지 선정은 한여름에 진흙과 먼지를 씻어 내리는 구름에 비유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한여름의 마지막 달에 먼지와 진흙이 흩날리면 커다란 구름이 순간적으로 일어나 그것들을 홀연히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네가지 선정을 닦고 네가지 선정을 익히면 이미 일어난 악하고 불건전한 법은 홀연히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SN. V. 309)”

 

■제11권

PTS본 5권 ?대품 모음(Mahāvagga)? 가운데 4/4번째에 해당하는 경전의 모음집이다. 이 11권으로서 한글 [쌍윳따 니까야]는 대단의 막을 내린다.
이 한글 쌍윳따 제11권에는 다음과 같은 제54쌍윳따에서 제56쌍윳따의 세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제목은 아래와 같다.
「제54쌍윳따 호흡(Ānāpāna-Saṁyutta)」
「제55쌍윳따 흐름에 든 님(Sotāpatti-Saṁyutta)」
「제56쌍윳따 진리(Sacca-Saṁyutta)」


제54쌍윳따는 2품 20개의 경으로, 제55쌍윳따는 7품 74개의 경으로 제56쌍윳따는 11품 131개의 경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책의 첫번째 쌍윳따의 호흡(呼吸, 按搬:ānāpāna)은 빠알리 경전에서 가장 중요한 명상을 다루고 있다. 호흡에 대한 명상을 초기불교에서는 호흡새김(安般念:ānāpānasati)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기 직전의 밤에 수행한 것이 바로 이 호흡새김이며, 부처님께서 종종 홀로 명상에 잠길 때마다 수행하신 것이 바로 이 호흡새김이다. 경전에 의하면 호흡새김이란 바로 청정한 여래의 삶을 말한다: “거룩한 삶,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여래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곧 호흡새김에 대하여 집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SN. V. 327)”


이 호흡쌍윳따에는 호흡새김의 단계는 16가지가 경전마다 주어져있다.(SN. V. 311)
1) 길게 숨을 들이 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숨을 내 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내 쉰다고 분명히 안다. 2) 짧게 숨을 들이 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숨을 내 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내 쉰다고 분명히 안다. 3)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4) 몸의 형성을 멈추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몸의 형성을 멈추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5)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6)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7)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8) 마음의 형성을 멈추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의 형성을 멈추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9)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0) 마음을 희열로 채우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을 희열로 채우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1)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2)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13)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4)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5) 소멸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6) 보내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보내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위의 열여섯 가지는 호흡의 순차적인 단계라기 보다는 호흡명상의 어떤 국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의 네가지는 「새김의 토대」 쌍윳따에서 몸에 대한 새김을 설명하면서 이미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는 16가지는 몸(身)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감수(受), 마음(心), 사물(法)의 원리와 관계된 것들이다.(SN. V. 323) 여기서 필자는 법을 ‘사물(事物)’이라고 했는데, 이 때에는 ‘조건(條件)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事件)’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사용한 사물이란 광의의 의미로 곧 유위법(有爲法) 전체를 지시한다. 비구 보디(Cdb. 1777)는 ‘현상(phenomena)’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불교를 단순히 현상론으로 해석할 소지가 많으므로 이 말은 피했다. 야후 국어사전에 보면 사물이란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체의 물체와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물의 개념은 현상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등불이라는 경(SN. V. 316)에 따르면, 아홉가지의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이 호흡새김에 대한 집중에 몰입해야한다고 기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호흡새김을 익히면 모든 감수에서의 해탈과 심지어 “수행승이 육신의 한계에 도달한 감수를 느끼면 육신의 한계에 도달한 감수를 느낀다고 분명히 알며, 그가 목숨의 한계에 도달한 감수를 느끼면 목숨의 한계에 도달한 감수를 느낀다고 분명히 알며, 육신이 파괴된 후에 목숨이 다해서 이 세상의 모든 감수가 향유를 잃고 냉정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베쌀리라는 경(SN. V. 83)은 흥미로운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몸의 더러움을 관찰하는 부정관(不淨觀)을 수행하던 많은 수행승들이 부처님이 보름동안 홀로 명상에 든 사이에 자신의 몸을 수치스럽고 혐오스럽게 생각하여 자결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나중에 알게된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부정관을 중지시키고 호흡새김에 대한 집중을 닦고 익힐 것을 권했다.

 

그리고 아난다(SN. V. 328)라는 경에서는 호흡새김에 집중하면 네가지 새김의 기초를 원만히 하게 되고 다시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완성시키고 명지와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두 번째의 「흐름에 든 님」 쌍윳따는 한역에서 예류자(豫流者:sotāpanna)라고 하는 ‘진리의 흐름에 든 이’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경전의 모음집이다. 흐름은 곧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말하고 흐름에 든 이란 이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갖추는 자를 말한다.
싸리뿟따여, 흐름, 흐름이라고 하는데 싸리뿟따여, 흐름이란 어떠한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입니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입니다. 싸리뿟따여, 흐름에 든 이, 흐름에 든 이라고 하는데 싸리뿟따여, 흐름에 든 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갖추면 그 사람을 흐름에 든 이라고 부릅니다.(SN. V. 347)”   

그리고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cattāri sotāpattiyaṅgāni)는 정확히 번역하자면 ‘네가지 흐름에 듬(豫流)의 요소’라는 듯이 되겠지만 표현을 보다 매끄럽게 하기 위해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이 경지에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와 청정한 계행의 준수라는 네가지 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이 재가신자의 삶의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길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벨루드와라의 사람들’ 이라는 경(SN. V. 352)에서 바라문 장자들의 세속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세존이신 고따마여, 저희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있고 이와 같은 의도가 있고 이와 같은 소망이 있으니 저희들은 어린아이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살고 싶고, 까씨의 전단향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화환과 향과 크림으로 치장하고 싶고, 금과 은을 향유하고 싶습니다.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여, 저희들은 이와 같은 욕망이 있고 이와 같은 의도가 있고 이와 같은 소망이 있으니 저희들은 어린아이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살고 싶고, 까씨의 전단향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화환과 향과 크림으로 치장하고 싶고, 금과 은을 향유하고 싶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싶은데 가르침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물었을 때에 부처님은 불살생 등의 일곱가지의 법과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을 실천할 것을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이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은 ‘법의 거울(法鏡:dhammādāso, SN. V. 357)’이라고 불린다. 또한 ‘성스러운 계율 속에서 싫어하여 떠남이나 사라짐이나 소멸이나 적멸이나 완전한 지혜나 올바른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상승의 길(昇道:udayagāminī paṭipadā, SN. V. 361)’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들을 성취하게 되면 “모든 나쁜 운명, 타락한 운명의 두려움을 뛰어넘어(SN. V. 364)”, “이 세상의 어떠한 뭇삶이라도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 하늘 나라에 태어난다.(SN. V. 18)” 그리고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들은 “공덕을 넘치게하고 선행을 넘치게 하고 지복의 자양분이 되게 하는 것(SN. V. 391)”이며 “청정하지 못한 뭇삶들을 청정하게 하고, 순결하지 못한 뭇삶들을 순결하게 한다.(SN. V. 392)”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경전이 있다면, ‘싸라까니’라는 경(SN. V. 375)이 있다. 그는 술을 좋아했음에도 부처님으로부터 흐름에 든 이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 싸라까니에게 수기를 주었다고 불평하자 마하나마 존자가 대신해서 부처님께 그 이유를 묻자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만약 오랜 세월 재가의 신자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했다고 올바로 말할 수 있다면 싹까족의 싸라까니를 두고 올바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하나마여, 오랜 세월 싹까족의 싸라까니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했는데 어떻게 타락한 곳으로 갈 수 있겠는가?”로 반문하고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이 커다란 쌀라 나무가 잘 설해진 것과 잘못 설해진 것을 알 수 있다면 나는 이 커다란 쌀라 나무도 진리의 흐름에 들어 타락하지 않고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수기를 줄 것이다.”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싸라까니는 죽는 순간에 공부를 해 마쳐 흐름에 든 이가 되었다.


그러나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 가운데 계행 대신에 다음과 같이 “또한 마음 속에 인색의 때를 제거하여 시여를 베풀고 손을 정화하여 보내버림을 기뻐하고 구걸에 응하여 보시하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며 집에서 산다.”라는 보시라는 덕목이 들어가 있는 두 개의 경전이 있다.(SN. V. 348, 396) 그리고 동일하게 위의 보시를 포함한 네가지가 곧 “공덕을 넘치게 하고 선행을 넘치게 하고 지복의 자양분이 되는 네가지”라고 규정한 두 개의 경전(SN. V. 392, 401)이 별도로 존재한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네 번째의 계행은 보시에 의해서도 때로는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네 번째의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은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SN. V. 392, 401)”가 대체되는 경우도 있다.


위의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은 물론 거룩한 제자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며 단지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시작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모든 번뇌를 부수는데 도움이 된다.(SN. V. 396)”라고 하고 그 법들을 닦으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임한다.(SN. V. 371)”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밖에 어떤 경전은 “네가지 법을 갖추면 신들이 기뻐하여 자신들과 동류가 되었다고 말한다.(SN. V. 394)”라고 쓰고 있고 때로는 “재가신자가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 그를 위로하는 네가지의 안정법(catuhi assāsaniyehi dhammehi; SN. V. 408)”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네가지 법들은 “여섯가지 종류의 명지의 법을 닦기 위한 전제조건(SN. V. 345)”에 불과하다. 이 때에 여섯가지의 궁극적인 지혜는 다음과 같다: “① 모든 형성된 것에 대하여 무상하다고 관찰하여야 하며, ② 무상한 것에 대하여 괴로움을 지각하고, ③ 괴로운 것에 대하여 실체가 없음을 지각하고, ④ 버림을 지각하고 ⑤ 사라짐을 지각하고 ⑥ 소멸을 지각하는 것”


특히 지금까지의 정의와는 완전히 다른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① 참사람과 사귀는 것, ② 올바른 법을 배우는 것, ③ 이치에 맞게 숙고하는 것, ④ 진리를 법답게 실천하는 것(SN. V. 347, SN. 410-413)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모든 네가지 경지(四果)와 13가지 지혜의 성취에 도움을 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마지막의 「진리」 쌍윳따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것 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법문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진리의 쌍윳따가 모든 [쌍윳따 니까야]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네가지 거룩한 진리는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에서 처음 설한 법문으로 전법륜경(Dhammacakkapavattana Sutta)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전은 많은 유사한 모음가운데 나타나는데 여래의 말씀이라는 경(SN. V. 420)에 그 원형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할 때에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범천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이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네가지 거룩한 진리가 공시적으로 전 우주에 걸쳐 보편적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경에서는 그것이 단지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 알려진 역사적인 진리가 아니라 통시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진리(SN. V. 415)임을 기술하고 있다. 궁국적으로 고따마 부처님이 부처님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까닭이다: ‘이러한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닫는 까닭에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바르고 원만히 깨달은 님(如來, 應供, 正等覺)이라고 불린다.(SN. V. 433)’

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는 여래의 말씀이라는 경(SN. V. 420)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dukkha-ariyasacca):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자면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이것과는 다른 정의도 있다. “그것은 여섯가지 내부적 감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시각감역, 청각감역, 후각감역, 미각감역, 촉각감역, 정신감역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말한다.


2)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苦集聖諦:dukkha-samudaya-ariyasacca):“그것은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 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인데 그것은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苦滅聖諦:dukkha-nirodha-ariyasacca):“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리면 집착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4)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苦滅道聖諦:dukkha-nirodha-gāminīpaṭipadā-ariyasacca):“그것은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네가지 거룩한 진리가 거룩한 이유는 ‘여실한 것이고 허망하지 않은 것이고 다르지 않은 것이다.(SN. V. 433)’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실한 것(tatthāni)은 진리의 객관성을 말하고 허망하지 않은 것(avitatthāni)은 진리의 필연성을 말하고 다르지 않은 것(anaññathāni)은 진리의 항상성을 말한다. 이러한 원리는 연기법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역자의 연구에 의하면 위의 원리는 괴로움(苦:dukkha)을 조건지워진 모든 것의 괴로움(行苦)으로 확대했을 때에 다음과 같은 진리가 될 수 있다: ① 연성제(緣聖諦:paccaya-ariyasacca):조건의 거룩한 진리 ② 연집성제(緣集聖諦:paccaya-samudaya-ariyasacca):조건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③ 연멸성제(緣滅聖諦:paccaya-nirodha-ariyasacca):조건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④ 연멸도성제(緣滅道聖諦:paccaya-nirodha-gāminīpaṭipadā-ariyasacca):조건의 소멸에 이르는 거룩한 진리.


이러한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누구나 오랜 세월을 유전 윤회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하면 나나 그대들이나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한다.(SN. V. 431)” 뿐만아니라 수행자나 성직자라고 인정할 수도 없다: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생성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들 수행자나 성직자들을 수행자 가운데 수행자나 성직자 가운데 성직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SN. V. 432)” 또한 진리를 보지 못하면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막대기를 공중에 던지면 한번은 밑 둥지로 떨어지고 한번은 가운데로 떨어지고 한번은 꼭대기로 떨어진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뒤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들은 한번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 한번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온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그들은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한 까닭이다.(SN. V. 439)” 왜냐하면, 결국 무명이란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무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수행승이여, 괴로움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무지가 있는데 수행승이여, 이러한 것을 무명이라고 하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명에 빠진다.(SN. V. 429)” 반대로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아는 것을 명지(明智)라고 한다: “수행승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아는 것,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는데 수행승이여, 이러한 것을 명지이라고 하고 이런 방식으로 명지에 도달한다.(SN. V. 429)” 그리고 이러한 명지는 오로지 부처님의 출현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출현하는 한, 커다란 빛, 커다란 광명이 세상에 나타나며 눈먼 어둠이나 칠흑같은 암흑은 사라지므로, 그만큼 사람들은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고, 명료하게 가르친다.(SN. V. 442)”


그리고 저 유명한 씽싸빠숲(Siṁsapavana)의 비유에 관한 경(SN. V. 437)이 있는데 그 비유는 바로 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과 저 위의 씽싸빠 숲에 있는 나뭇잎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욱 많겠는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보다 저위의 씽싸빠 숲에 있는 나뭇잎이 훨씬 많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알고 나서 그대들에게 설한 것은 매우 적고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부처님이 가르친 적은 양의 가르침은 모두 바로 네가지 거룩한 진리 안에 포함된다. 그 거룩한 진리는 “바른 이치에 맞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고,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고, 사라지기 위한 것이고, 소멸하기 위한 것이고, 그치기 위한 것이고, 잘 알기 위한 것이고, 올바로 깨닫기 위한 것이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SN. V. 438)”


그러나 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꿰뚫는 것은 “멀리서 활쏘기를 하는데 아주 작은 열쇄구멍으로 화살을 재빠르게 갈아 끼우면서 놓치지 않고 화살을 쏘는 것과 한 개의 터럭을 백개로 쪼개서 그 끝에서 끝을 꿰뚫는 것(SN. V. 453)”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수행승들은 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기 위해 “터어반이나 머리가 불붙었다면 터어반이나 머리의 불을 끄듯이(SN. V. 440)” 커다란 의욕과 노력을 기우려야한다.


위의 네가지 거룩한 진리는 세번 굴린 열두 갈래의 형태(三轉十二行相: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로서 우리에게 인식된다(SN. V. 422: ① 시전(示轉):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진리에 대한 네가지 지식(saccañāṇa)이라고 한다. ② 권전(勸轉):괴로움은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발생은 제거되야한다, 괴로움의 소멸은 깨달아져야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닦여져야한다라는 진리에 대한 수행을 권하는 것으로 해야할 일에 대한 지식(kiccañāṇa)이라고 한다. ③ 증전(證轉):괴로움은 스스로 알았다, 괴로움의 발생은 제거되었다, 괴로움의 소멸은 깨달아졌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닦여졌다라는 진리에 대한 증거하는 것으로 한 일에 대한 지식(katañāṇa)이라고 한다. 고따마 부처님 뿐만아니라 과거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러한 세번 굴린 열두가지 형태를 있는 그대로 알고 또한 보아서 아주 청정하여진 까닭으로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깨달았다.


그밖에 네가지 거룩한 진리와 관련하여 수많은 비유들이 등장한다:「절벽의 품」은 절벽의 공포(SN. V. 448)를 바라보면서 네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이 절벽의 두려움보다 무서운 것이라는 법문이 전개된다.

 

재미있는 경전은 “네가지 군대가 연꽃 뿌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SN. V. 446)”을 보고는 헛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여 미쳐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데 부처님은 그것이 헛것이 아니라 사실을 본 것임을 밝히고 세상사에 너무 골똘함을 경계하고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명상할 것을 권하고 있다.

 

 「현관의 품」은 네가지 진리를 현관(現觀)하는 것의 어려움과 지리를 현관한 자의 희소성에 대한 많은 비유(SN. V. 456)- 이를테면 구멍 뚫린 나무조각과 거북이의 비유 - 가 있다.

 

 「수레바퀴의 확대품」과 「몇몇 절제의 품」, 「날곡식의 확대품」에는 사제의 진리를 알아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의 ‘희소성에 대한 비유(SN. V. 467)등 주로 계행과 관련된 다양한 비유들이 전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종자와 초목에 관련한 환경친화적인 교훈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종자와 초목의 훼손을 삼가는 뭇삶은 매우 적고 종자와 초목의 훼손을 삼가지 않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쌍윳따니까야의 번역상의 문제점과 고쳐읽기

아마도 이 책은 역사적으로 현대의 일상어로 번역한 최초의 우리말 경전이다. 한문 용어에 익숙한 불자들에게는 다소간 생소할지 모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필자는 번역을 강행해나갔다. 그 결과 예상했던 대로 중생, 탐진치나 오온 등의 불교한문 용어에 익숙한 세대는 이 번역에 대하여 약간의 저항감을 표명한데 비해 현대적인 교육이나 철학적인 수업을 받고 이제 불교에 입문하려는 한글세대는 오히려 기존의 불경이나 입문서 보다도 읽기에 편하다고 이 번역을 선호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너무 일상용어로 번역하다보니 내용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많은 문제에 당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번역을 하면서 필자가 가장 곤혹스러워 했던 것은 법(法:Dhamma)이라는 용어였다. 가이거도 빠알리 불교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난관이 이 법이라는 단어라고 고백하고 있다. 법이라는 용어는 전혀 오늘날 법학에서 쓰는 법이나 법률이라는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쓰이므로 일상용어로서 법이라는 번역을 택할 경우 현대의 독자들에게 난해한 감을 주기가 십상이다. 불교에서 법은 철학적으로 그 핵심에 놓여있는 단어일 뿐만아니라 가장 광범위한 외연을 가지고 있고 이해하기 힘든 말 가운데 하나이다. 일찍이 붓다고싸는 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로 내린 바가 있다.
① guṇa:본질, 능력, 덕성
② desanā:가르침, 법문
③ hetu:원인
④ pariyatti:성전
⑤ nissatta(=nijjīva):사물, 사건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법이라는 말은 ‘견고하게 서있는 것, 법칙’을 뜻한다. 자연의 법칙이나 인과의 법칙, 나가서 국가에서 제정한 통치법률, 규율, 계율을 뜻한다. 또한 붓다가 설한 세계의 생성과 소멸의 법칙을 뜻하므로 가르침, 교리를 의미한다. 붓다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의미에서 진리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최고의 진리라는 뜻에서 열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자는 법을 일상어로 번역함에서 주로 문맥에 따라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원용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가 사물에까지 이르면 원래의 뜻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어떻게 보면 원래의 의미와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물 속에서 생성과 소멸의 인과적인 법칙이 개현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법을 사물로 해석하는 것은 그다지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정신(意:manas)의 대상이 되는 것(法)은 경험적인 사물이다. 역자는 이럴 경우에 현상이라는 말 대신에 사물이라는 단어를 번역에 사용했다. 그 이유는 단지 불교가 현상론만은 아니라는데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정신의 대상을 현상이라고 할 것인가 사물이라고 할 것인가를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사물이라고 결정을 해버렸으나 현상이라고 번역했더라면 법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지 않나 반성 해보기도 한다.


내적인 경험적 사물에는 성격이나 능력이나 상태와 같은 정신현상이 포함된다. 그러나 외적인 경험적 사물은 일상적인 사물을 의미한다. 야후 국어 사전에서는 사물을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체의 물체와 현상’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신의 대상이 가르침 또는 가르침이 실제로 구현된 정신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그것을 사물로 번역한다면 커다란 오해를 나을 수 있다. 그럴 때에는 독자들은 사물을 현상으로 고쳐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이라는 단어보다는 사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현상이라고 하면 세계를 순전히 주관적으로 환원시켜 인과법칙을 무시하게 되는 모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으로 역자가 번역하는 데 망설였던 것은 행(行:saṃkhārā)을 어떻게 일상어로 번역하느냐의 문제였다. 한문 용어인 행과 연관시킨다면 행위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신행(身行은 신체적인 행위, 구행(口行)은 언어적 행위, 의행(意行)은 정신적 행위라고 하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행을 의도라고 번역하는데 그 번역은 행의 하위개념으로 경전에서 사용되는 다른 용어(sañcetanā)와 충돌을 일으키고 신체적 행위를 신체적 의도라고 번역한다면 어딘가 어색한 감을 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원어인 쌍카라(saṃkhārā)라는 말은 법이라는 용어 다음으로 가장 외연이 넓은 의미를 지닌다는데 있다. 이 쌍카라는 ‘결합, 구성, 형성’이라는 뜻을 지녔다. 불교철학적으로는 제행무상(諸行無常:sabbe saṃkhārā aniccā)이라는 문맥에서 모든 조건지워진 것을 가르킬 때에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럴 때에 ‘모든 조건지워진 것’을 행위라고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자는 결합이나 구성보다는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라고 적용했을 때에 잘 어울리는 형성이라는 번역을 택했다.


그 다음으로 역자가 번역하면서 중간에 달리 번역한 단어는 오취온(五取蘊:pañca upādānakkhandhā)이라는 단어에 대한 것이다. 처음에는 ?쌍윳따 니까야? 1권~9권에 걸쳐서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했다가 10권, 11권에서는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이라고 바꾸어 번역했다. 한역에서 온(蘊:khandhā)이라고 하는 것은 ‘덩어리, 어깨, 줄기’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 대장경에서는 ‘쌓임’이라고 번역했으나 이것은 원어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원어인 칸다는 ‘어깨에 근육의 다발’이나 ‘나무 줄기와 가지가 서로 얽혀진 다발’을 뜻한다. 따라서 온을 역자는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하고 예를들어 행온(行蘊)은 ‘형성의 다발’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취(取蘊:upādāna)라는 말을 번역하는데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 취는 집착 또는 취착의 의미로 취착된 것(upādiṇṇa)을 의미한다. 특히 취착된 것이라는 것은 경전에 의하면 ‘이것은 나의 것이다. 내가 이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etaṁ mama, eso'ham asmi, m'e  so attā)’라는 자아의식이 개입된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역자는 처음에 오취온을 ‘다섯가지 취착된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다섯가지 취착하는 존재의 다발’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번 ‘취착된 존재의 다발’들은 다른 존재의 다발을 취착하기도 함으로 ‘취착하는 존재의 다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번역을 아예 오취온의 경우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이라고 바꾸기로 했다. 예를 들어 행온은 ‘형성의 취착다발’이라고 바꾸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연구실에서  전 재 성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