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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상윳따 - 바라문 상윳따(Brahman samyutta. SN7:1-SN7:22)

실론섬 2014. 4. 26. 12:54

                                  

제7주제(S7) 바라문(브라흐민) 상윳따

Brāhmaṇa-saṁyutta (SN 7.1-22)

제1장 아라한 품
Arahanta-vagga

dhanañjānīsuttaṃ (SN 7.1-다난자니 경)
18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어떤 바라문의 아내인 다난자니라는 바라문 여인이 있었는데 세존과 법과 승가에 청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다란자니 바라문 여인은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그녀의 남편 바라문에게 음식을 차려서 가져 가다가 넘어졌다. 넘어져서는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 라고 세 번 감흥어를 읊었다.


*다난자니는 다난자니라는 족성이다. 그들은 바라문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족성이라고 한다. 다른 바라문들은 범천의 입에서 태어났지만 

다난자니 족성은 범천의 머리를 열고 출현하였다고 한다. 이 바라문녀는 붓다의 제자로 수다원과를 얻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붓다의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였으며 그녀가 삼보를 칭송하면 귀를 막았다고 한다.

*주석서는 이 일화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바라문은 500명의 바라문 동료들을 연회에 초청하였다. 그 전날에 그는 아내에게 그의 동료들 앞에서 세존을 칭송하여 자신을 욕돠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본경에서처럼 음식을 나르다가 장작에 걸려 넘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세존께 귀의하는 이 감흥어를 읊었다. 그러자 바라문들은 남편을 비난하면서 식사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SA.i.226-227)

 

이렇게 말하자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은 다난자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비천한 여자는 시도 때도 없이(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도) 저 삭발한 사문을 칭송하는 말만 하는구나. 비천한 여자야, 이제 내가 가서 그대의 그 스승을 논파할 것이다.”
“바라문이여, 저는 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를 논파할 수 있는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더라도 가십시오. 가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비천한 여자'는 vasali를 옮긴 것이다. 바라문들이 불가촉천민들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상대를 아주 경멸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자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은 분노하고 마음이 언짢아 하면서도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은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은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바라문]
“무엇을 끊은 뒤에 편히 잠들고, 무엇을 끊은 뒤에 슬퍼하지 않습니까?
 고따마여, 어떤 하나의 법에게 그대는 죽임을 허락합니까?”   

[세존]
“성냄을 끊은 뒤에 편히 잠들고, 성냄을 끊은 뒤에 슬퍼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성냄은 꼭대기에 꿀이 있고,  그 뿌리에는 독이 있습니다.
 이런 성냄을 죽이는 것을 성자들은 칭송합니다. 참으로 이것을 끊은 뒤에 슬퍼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akkosasuttam (SN 7.2-욕설(거친 말) 경) 
18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거친 말을 일삼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이 집에서 나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다고 들었다. 그는 분노하고 마음이 언짢아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불쾌하고 거친 말로 세존을 비난하였다.


*주석서에 의하면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Akkosakabharadvaja brahmana)은 앞 경에 언급된 바라드와자 바라문의 동생이었다. 주석서는 왜 그를 '욕쟁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500개의 게송으로 여래께 욕을 퍼붓기 위해서 왔다고 해서 '욕쟁이 바라드와자'라고 경을 합송한 분들(송출자)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는 사문 고따마가 우리 큰형을 출가시켜서 손해를 끼쳤고 집안을 분열시켰다고 하면서 분노하고 마음이 불편하여 세존을 욕하고 비난한 것이다.(SA.i.229)

 

그러자 세존께서는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라문이여. 그대의 친구와 동료나 가족과 친척들이 그대를 방문하러 오는가?”
“고따마 존자여, 때때로 나의 친구와 동료나 가족과 친척들이 나를 방문하러 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라문이여. 그러면 그대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음식들을 내놓고 대접하는가?”
“고따마 존자여, 때때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음식들을 내놓고 대접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런데 만일 그들이 받지 않으면 그 음식은 누구 것이 되는가?”
“고따마 존자여, 만일 그들이 받지 않으면 그것은 나의 것이 됩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우리가 아무 거친 말을 하지 않는데도 거친 말을 하고, 불쾌감을 주지 않는데도 불쾌감을 주고, 시비를 걸지 않는데도 시비를 건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의 것을 받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된다. 바라문이여, 거친 말을 하는 사람에게 맞서서 거친 말을 하고, 불쾌감을 주는 사람에게 맞서서 불쾌감을 주고, 시비를 거는 사람에게 맞서서 시비를 걸면 이것은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바라문이여,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대와 함께 음식을 먹지 않고 서로 교환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된다."  

“고따마 존자여, 왕과 왕의 대신들은 고따마 존자에 대해서 ‘사문 고따마는 아라한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따마 존자는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다.”

 

[세존] 
“온화하고 유순하고 바르게 생계를 유지하고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하였고
 지극히 평화롭고 모든 것에 고요하고
 분노가 없는 자가 어떻게 분노하겠는가?

 분노에 맞서서 분노하는 그런 자는
 더욱 더 사악한 자가 되나니(더욱 스스로를 나쁘게 만들 뿐)
 분노에 맞서서 분노하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과 상대방 둘 모두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니
 상대가 크게 성이 난 것을 알면
 마음 챙기고 고요하게 자신의 평화를 지키며 처신한다.

 그런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 둘 모두를 구제한다.
 이런 그를 어리석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진리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요쟁이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asurindakasuttam (SN 7.3-아수라 왕 같은 자 경) 
18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수린다카(아수랑 왕 같은)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이 집에서 나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다고 들었다. 그는 분노하고 마음이 언짢아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불쾌하고 거친 말로 세존을 비난하였다.


*아수린다카(아수라 왕 같은)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앞의 두 바라문의 동생이었다고 한다. 그도 같은 이유로 왔다.(SA.i.230)

 

그러나 세존께서는 침묵하고 계셨다. 그러자 아수라 왕 같은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사문이여, 그대가 패배했다. 사문이여, 그대가 패배했다.”

[세존]
“어리석은 자 거친 말을 내뱉으면서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승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감내하는 그런 자의 것이다.

 분노(성냄)에 맞서서 분노하는 그런 자는
 더욱 더 사악한 자가 되나니
 분노에 맞서서 분노하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과 상대방  둘 모두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니
 상대가 크게 화가 난 것을 알면
 마음 챙기고 고요하게 처신한다.

 그런 그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 둘 모두를  구제한다.
 이런 그를 어리석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진리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f렇게 말씀하시자 아수라 왕 같은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아수라 왕 같은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아수라 왕 같은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아수라 왕 같은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bilaṅgikasuttam (SN 7.4-쌀겨를 섞은 죽 장수 경)  
18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쌀겨를 섞은 죽 장수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이 집에서 나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다고 들었다. 그는 분노하고 마음이 언짢아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곁에 섰다.


*쌀겨를 섞은 죽 장수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바라드와자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쌀겨를 섞은 죽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경을 합송한 분들이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SA.i.230)

*그는 나의 세 형들이 이 사람 때문에 출가하였다고 아주 분노하여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침묵하고 서 있었던 것이다.(SA.i.230)

 

그러자 세존께서는 쌀겨를 섞은 죽 장수 바라드와자 바라문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 뒤에 쌀겨를 섞은 죽 장수 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청정하고 흠이 없고 타락하지 않은 분
 그런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면
 그 어리석은 자에게 죄악(과보)은 되돌아 옵니다.
 마치 바람을 거슬러 던진 먼지더미처럼.”


이렇게 말씀하시자 쌀겨를 섞은 죽 장수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한 일입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듯,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듯이,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쌀겨를 섞은 죽 장수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쌀겨를 섞은 죽 장수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쌀겨를 섞은 죽 장수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ahiṁsakasuttam (SN 7.5-해코지 않음 경)  
191.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해코지 않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아항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해코지 않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저는 해코지 않는 자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저는 해코지 않는 자입니다.”

 

*해코지 않는 바라드와자 바라문(Ahimsakabharadvaja brahmana)이라 부르는 이유는 주석서는 두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는 본경에서 그는 세존께 해코지 않음에 대해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경을 합송한 분들이 붙인 이름이다. 둘째는 원래부터 그의 이름이 아힘사까(ahimsaka.해코지 않는 자)였고 족성은 바라드와자였을 것이라고 소개한다.(SA.i.230) 본경에서 바라문은 스스로를 아힘사까라고 세존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 두 번째 설명이 더 타당한 듯 하다.



[세존]
“만일 그대 이름처럼 그렇다면
 그런 그대 진정으로 해코지 않는(해를 끼치지 않는) 자이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해코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해코지 않는 자이니
 남을 해코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해코지 않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해코지 않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해코지 않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해코지 않는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jaṭāsuttaṃ (SN 7.6-엉킴 경)
182.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엉킴 머리의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결발을 한 자따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바라문]
“안의 엉킴과 밖의 엉킴, 사람들은 엉킴에 의해 엉켜 있습니다.
 고따마여, 거듭 그것을 묻습니다. 누가 이 엉킴을 풉니까?”

[세존]
“계에 확고히 서서 마음과 지혜를 닦는 지혜로운 사람
 노력하는 자, 신중한 비구가 그 엉킴을 풉니다.

 탐욕과 성냄과 무명이 소멸하여 번뇌 다한 비구들.
 그들에게 엉킴은 풀렸습니다.


 정신과 물질, 그리고 부딪힘(접촉)과 물질의 인식이 완전히 멈추는 곳
 여기서 그 엉킴은 잘려집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엉킨 머리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엉킨 머리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엉킨 머리의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자따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suddhikasuttam (SN 7.7-청정 경)

183.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청정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청정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바라문]
“비록 계를 구족하고 고행을 하더라도
 세상 어떤 바라문도 결코 청정해지지 않습니다.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자[명행족.明行足] 그가 청정하니
 그 외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존]
“비록 많은 만트라(바라문 진언)를 외우더라도
 안이 청정하지 못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삶을 연명한다면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지 않는다.


  끄샤뜨리야든 바라문이든 와이샤든
  수드라든 불가촉천민이든 
  부지런히 정진하고 스스로 분발하는 자가
  최상의 청정 얻으니,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청정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청정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청정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청정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aggikasuttm (SN 7.8-불에 헌공하는 자 경)  
19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나는 불에 헌공을 할 것이다. 나는 아그니호뜨라(불을 공경하는 제사) 제사를 거행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버터를 넣은 
우유죽(우유를 넣은 쌀죽)을 마련하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탁발을 위해서 라자가하로 들어가셨다. 라자가하에서 차례대로 탁발하면서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의 거처로 다가 가셨다. 가서는 한 곁에 섰다.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서 탁발을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바라문]
“삼명을 구족하고 좋은 집안 태생을 갖추고 많이 배웠으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사람만이
 나의 우유죽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세존]
“비록 많은 만트라를 외우더라도(암송한다고 할지라도)
 안이 청정하지 못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삶을 연명한다면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지 않는다.


 전생의 삶을 기억하고 천상과 지옥을 보며
 태어남 다 했고 해야 할 일 다 한 자가 성자이다.    
 이 세 가지 명지에 의해 삼명 갖춘 바라문이 된다.
 명지와 실천 구족한 자만이 이 우유죽을 먹을 수 있다.”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말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음식을 드십시오. 존자가 바로 존경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바라문이십니다.”

[세존]ㅣ
““게송 읊어서 얻어진 것은 내가 먹기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바라문이여, 바르게 보는 자에게 그런 법은 없다.
 게송 읊어서 얻어진 것을 깨달은 자들은 거부한다.
 법이 있을 때, 바라문이여, 그분들은 행한다.

 

*내가 시간을 탁발을 하면서(bhikkhacara-vatta) 서 있을 때 그대는 단 한 숟가락(katacchu-matta)의 음식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내가 모든 붓다의 공덕(buddha-guna)을 마치 돗자리 위에다 참깨를 펴듯이 드러내자 [그대는 주고자 한다.] 그러나 이 음식은 말하자면 [바라문들이 찬미가(만뜨라)를 읊어서 삶을 연명하듯이] 게송을 읊어서 얻은 것과 같다. 이것이 '게송을 읊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내가 먹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러한 법이 있어서' 모든 깨달은 자들은 이러한 법을 따르고 법에 확고하여 그들의 삶을 영위한다. 이것이 그들의 삶의 방법이다. 그들은 그런 음식은 제쳐두고 법답게 얻은 음식을 먹는다.(SA.i.232)  


 궁극의 지혜로 완성한 자, 대성인(大聖人)
 번뇌 다하고, 후회가 가라앉은 분에게
 다른 음식과 마실 것으로 공양해야 한다.
 그는 공덕을 바라는 사람의 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불에 헌공하는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sundarikasuttam (SN 7.9-순다리까 경)  
19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꼬살라의 순다리까 강 언덕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순다리까 강 언덕에서 불에 헌공을 하고 아그니호뜨라 제사를 거행하고 있었다.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불에 헌공을 하고 아그니호뜨라 제사를 거행한 뒤 ‘누가 이 남은 제사음식을 먹는 것이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온 사방을 둘러보았다.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Sundarikabharadvaja brahmana)은 순다리까 강의 언덕에서 불에 헌공을 하는(aggi-juhana) 자였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SA.i.232) 문자적으로 순다리까는 '잘생긴 자'라는 뜻이다.
*그는 불에 헌공하고 남은 우유죽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불에 헌공한 우유죽은 대범천이 먹었을 것이다. 이제 여기 남은 것은 범천의 입에서 태어난 바라문에게 주어야겠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도 아들도 기뻐할 것이고 내가 범천의 세상으로 가는 길도 아주 청정해질 것이다.'라고. 그는 바라문을 찾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누가 이 남은 제사음식을 먹는 것이 좋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사방을 둘러본 것이다.(SA.i.233)

 

그때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서 머리를 덮은 채 어떤 나무 아래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왼손으로 남은 제사 음식을 들고 오른 손에는 물병을 들고 세존께 다가갔다. 세존께서는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머리에 쓴 것을 벗어셨다. 그러자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이 존자는 머리 깎은 자로구나. 이 존자는 머리 깎은 자로구나.”라고 하면서 거기서 돌아서려 하였다. 그러나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어떤 바라문들도 머리를 깎고 있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태생을 물어보리라.’라고.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의 태생은 무엇입니까(어떤 가문 출신입니까)?”

[세존]
“태생을 묻지 말고 행실을 물어라.
 어떤 장작으로든 불은 지필 수 있다.
 낮은 가문에서도 의지가 굳은 성자는 나오는 법
 양심(부끄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자가 혈통 좋은 사람이다.

 진리로 길들여지고 감각기능의 길들여짐(자제)이 완벽한 분
 지혜의 끝에(지혜의 궁극) 도달했고 청정범행을 완성한 분
 제사를 바르게 지내는 자는 그런 분을 빌어야 한다(소청).
 올바른 때에 공양 받아 마땅한 그에게 헌공하라.”


[바라문]
“이러한 지혜에 통달한 분을 뵙다니
 참으로 나는 제사를 잘 지냈고 헌공을 잘하였습니다.
 존자와 같은 분들을 뵙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남은 저의 제사음식을 먹었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이것을 드십시오. 존자가 바로 바라문이십니다.”

 [세존]
“게송 읊어서 얻어진 것은 내가 먹기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바라문이여, 바르게 보는 자에게 그런 법은 없다.
 게송 읊어서 얻어진 것을 깨달은 자들은 거부한다.
 법이 있을 때, 바라문이여, 그분들은 행한다.

 궁극의 지혜로 완성한 자, 대성인(大聖人)
 번뇌 다하고, 후회가 가라앉은 분에게
 다른 음식과 마실 것으로 공양해야 한다.
 그는 공덕을 바라는 사람의 밭이기 때문이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제가 누구에게 이 남은 제사음식을 주면 됩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신이 사는 세계에서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이 남은 제사음식을 먹고 바르게 소화시킬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라문이여, 그러니 그대는 이 남은 제사음식을 풀이 없는 곳에 버리거나 생명체가 살지 않는 물에 버려라.”
그러자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그 남은 제사음식을 생명체가 살지 않는 물에 버렸다. 그가 남은 제사음식을 물에 넣자 그것은 부글부글 끓고 쉭 소리를 내고 증기를 뿜고 연기를 뿜었다. 예를 들면 한낮에 달아오른 쟁기의 보습을 물에 넣으면 부글부글 끓고 쉭 소리를 내며 증기를 뿜고 연기를 뿜는 것처럼 그가 남은 제사음식을 물에 넣자 그것은 부글부글 끓고 쉭 소리를 내며 증기를 뿜고 연기를 뿜었다. 그러자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깜짝 놀라고 털이 곤두서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바라문이 제사음식을 세존께 드리자 사방의 세상으로부터 온 신들 등이 '스승께서 이 음식을 드실 것이다.'라고 인식하고는 마치 벌집을 압착하여 꿀만 뽑아내듯이 꽃과 과일과 정제된 버터, 생 버터, 기름, 꿀, 당밀(sappi-navanita-tela-madhu-phanita) 등에서 자신들의 천상의 위력으로 영양분만을 뽑아서 그 음식에 가득 넣었다. 그러므로 그 제사음식은 극도로 섬세하여 거친 소화기관을 가진 인간은 이러한 음식을 바르게 소하시킬 수 없다. 또한 그 음식은 소 오줌에 참깨를 넣어서 요리한 것이기 때문에 거칠어서 섬세한 신들의 소화기관으로는 그 음식을 바르게 소화시킬 수 없다. 마른 위빳사나를 통해서 번뇌 다한 자(sukkha vipassaka-khinasava)도 소화킬 수 없다. 여덟 가지 증득(초선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본삼매)를 얻은 번뇌 다한 자(attha-samapatti-labhi-khinasava)라야 그 증득의 힘으로 소화시킬 수 있다. 물론 세존께서는 천성적인 소화력으로 소화시킬 수 있다.(SA.i.235-236)   


[세존] 
“나무에 불을 지펴, 바라문이여,
 겉으로 드러난 이 행위가 청정을 가져 온다고 생각하지 말라.
 밖으로 청정 구하는 자는 청정 얻지 못한다고
 현자들은 말한다.

 바라문이여, 나무에 불 지피는 것 버리고
 내적인 광명으로 나는 항상 타오르나니
 내게는 항상 불이 있고 마음은 항상 선정 삼매에 드나니
 그런 나는 아라한이요, 청정범행으로 살아간다.

  바라문이여, 그대의 자만은 어깨에 울러 멘 무거운 짐이고
  분노는 연기요, 거짓말은 재,
  혀는 주걱, 심장은 불 지피는 제단
  잘 길들여진 자신은 인간의 광명이다.

 

*'어깨에 울러 멘 짐'은 khari-bhara를 직역한 것이다. 열대지방에서 막대기의 양 끝에 양철 접시를 매달고 거기에 짐을 싣고 어깨에 울러 메고 가는 것을 말한다. 어깨에 짐을 올려 메고 갈 때 걸음마다 짐의 무게 때문에 접시가 땅에 부딪힌다. 그와 같이 태생이나 족성이나 가문 등 때문에 자만이 위로 올라가면 그때마다 자만은 질투를 생기게 하여 [다른 접시가 땅에 닿는 것처럼] 4악도에 닿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SA.i.236)
*'분노는 연기(kodho dhumo)'라는 것은 지혜라는 불(nana-ggi)의 오염원이라는 뜻에서 분노는 연기와 같다. 그래서 [오염원이라는] 연기가 자욱하면 지혜의 불은 타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말은 재(bhasmani mosavajjam)'라는 것은 마치 재(charika)에 덮인 불은 타오르지 못하는 것처럼 거짓말에 덮인 지혜도 그러함을 뜻한다. '혀는 주걱(jivha suja)'이라는 것은 제사에서 주걱으로 공물을 헌공하듯이 세존의 혀는 법이라는 헌공을 올리는 주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심장은 불 지피는 재단(hadayam jotitthanam)'이라는 것은 중생들의 심장은 법이라는 헌공을 바치는 불 지피는 재단과 같다는 뜻이다. '자신(atta)'이란 마음(citta)을 뜻한다.(SA.i.237) 


  바라문이여, 진리 법은 계행이라는 여울을 가진 호수
  선한 사람(참된)이 선한 사람에게 칭송을 해주는 맑고 맑은 곳이니
  지혜의 성취자는 거기서 목욕하여
  물들지 않은 몸으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진리와 법, 제어(자제)와 청정범행(거룩한 삶)
  이것이 중도에 바탕을 두고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실천하는 곧바로 선 사람들에게
  바라문이여, 그대는 성심으로 예배하라.
  이런 사람 일컬어 법을 따르는 사람이라고(진리 법을 따라 사는 사람) 나는 말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bahudhitisuttam (SN 7.10-많은 딸 경)  
19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꼬살라에서 어떤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어떤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이 열네 마리의 황소를 잃어버렸다. 그러자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은 그 황소들을 찾아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그 슢에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확립하여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의 곁에서 이 게송들을 읊었다.   
[바라문]
“지난 엿새 동안 찾아도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열 네 마리의 황소가
 이 사문에게는 없구나.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한 잎이나 두 잎이 달려있는
 병든 참깨 밭이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텅 빈 헛간 안에서
 신나게 돌아 다니며 춤춰 대는 쥐들이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일곱 달이나 되어
 해충들이 우글거리는 담요가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어떤 딸은 아들 하나, 어떤 딸은 아들 둘을 가진채
 과부가 된 일곱 딸들이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다.

 

*바라문이 영향력이 있으면 딸이 과부가 되도 시부모집에서 머물도록 하지만, 바라문이 가난하면 시부모들은 과부가 된 며느리를 친정집으로 보내버린다. 그래서 그 바라문이 식사하려 하면 딸은 할아버지와 함께 먹으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그에게로 보낸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그의 밥그릇에 손대어 그의 밥을 먹어버리고 그래서 그는 충분하게 식사를 하지도 못한다. 그는 이 사실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SA.i.239)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잠자리에서 발로 깨우는
 뚱뚱하고 게으른 마누라가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새벽같이 찾아와 ‘내 돈 갚으시오, 내 돈 갚으시오,’라고
 윽박지르는 빚쟁이들이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다.”

[세존]
“브라만이여, 지난 엿새 동안 보이지 않는 
 그대가 잃어 버린 황소 열네 마리
 내게는 없으니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참으로 나에게는
 한 잎이나 두 잎이 달려있는
 병든 참깨 밭이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다.

 참으로 나에게는
 텅 빈 헛간 안에서
 신나게 돌아 다니며 춤춰 대는 쥐들이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다.

 참으로 나에게는
 일곱 달이나 되어
 해충들이 바글거리는 담요가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다.

 참으로 나에게는
 한 아들이나 두 아들을 가진
 과부가 된 일곱 딸들이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다.


 참으로 나에게는
 잠자리에서 발로 깨우는
 뚱뚱하고 게으른 마누라가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다.

 참으로 나에게는
 새벽같이 찾아와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라고
 윽박지르는 빚쟁이들이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듯,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시듯,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시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제2장 청신사 품
Upāsaka-vagga

kasibhāradvājasuttaṃ (SN 7.11-까시바라드와자 경)
19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마가다국의 닥키나기리의 에까날라라는 바라문 마을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까시바라드와자 바라문은 파종을 하는 시기가 되어서 오백의 쟁기를 준비했다. 그때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까시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가셨다.   

 

*까시바라드와자 바라문(Kasibharadvaja brahmana)은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 것이다.(SA.i.242) 여기서 까시(kasi)는 쟁기질, 밭갈이를 뜻한다.
*주석서는 이 광경은 보통의 농사짓는 장면이 아니고 부드러운 흙에다 씨를 뿌리는 [농경제의] 의식을 거행하는 특별한 행사라고 설명하고 있다.(SA.i.242-243)

 

그때 까시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음식을 배분하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음식을 배분하는 곳으로 가셔서 한 곁에 서 계셨다. 까시바라드와자 바라문은 탁발을 위해 서 계신 세존을 보았다. 보고서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사문이여, 그대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어야 합니다."라고.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우리는 고따마 존자의 멍에도 쟁기도 쟁기날도 몰이막대도 황소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고따마 존자는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까시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바라문]
“밭을 가는 자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질문받은 그대, 밭을 가는 자는 말해 주십시오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세존]
“믿음은 씨앗, 고행은 비, 나의 지혜는 멍에와 쟁기
 양심(부끄러움)은 쟁기자루, 마음은 쟁기와 젱기자루를 묶는 끈
 나의 마음 챙김은 쟁기날과 몰이 막대

 

*여기에 대한 주석서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왜 세존께서는 '믿음은 씨앗(saddha bijam)'이라고 믿음부터 말씀하셨는가? 이 바라문은 지혜롭기는 하지만 삿된 견해를 가진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믿음은 씨앗이 되는가? 이것은 모든 유익한 법들{선법}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땅에 씨앗을 심으면 뿌리가 나고 싹이 튼다. 뿌리로는 땅의 영양분과 물을 빨아들여 줄기로 자라게 된다. 자라고 증장하여 마침내 꼭대기에 많은 곡식을 맺게 된다. 그와 같이 믿음이라는 씨앗을 땅에 심으면 계(sala)라는 뿌리로부터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영양분을 빨아들여 성스러운 도라는 줄기를 통해서 성스러운 과라는 곡식을 맺게 된다. 이렇게 해서 여섯 단계의 청정을 통해서 자라서 마지막으로 지와 견의 청정이라는 수액을 생산하게 되고, 이것은 아라한과라는 열매가 되어서 여러 가지 무애해와 신통지를 산출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은 씨앗이라고 하신 것이다.(SA.i.249-250)
여섯 단계의 청정은 일곱가지 청정 가운데 처음의 여섯을 말한다. 일곱 가지 청정은 계 청정 마음 청정 의심을 제거함에 의한 청정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도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지와 견에 의한 청정이다.
*해로운 법과 몸을 태운다고 해서 고행이라 한다. 여기서는 감각기능의 단속의 뜻으로 쓰였다.(SA.i.251)
*'지혜(panna)'는 여기서는 위빳사나와 함께 도의 지혜(saha vipassaniya magga-panna)를 뜻한다. 마치 바라문이 멍에와 쟁기를 가지고 있듯이 세존께서도 위빳사나의 지혜를 가지고 계신다.(SA.i.251)


 몸을 단속하고, 말을 단속하고, 먹는 음식량을 단속하고
 진리는 자르는 일을 하고, 온화함(부드러움)은 나의 해방

 

*온화함이란 여기서는 아라한과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열반을 기뻐하기 때문에 온화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나의 해방'이라는 것은 '내가 보리수 아래서 아라한과를 얻었을 때 나는 해탈하였다. 그때 나의 멍에는 풀렸기 때문에 다시는 멍에에 메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다.(SA.i.254)

 

 나에게 정진은 유가안온을 가져오는 짐을 실어 나르는 가축
 슬퍼하지 않는 곳에 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밭을 갈고, 밭을 간 그는 불사(不死)의 결실(열매)을 얻습니다.
 이렇게 밭을 갈고, 밭을 간 뒤에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음식을 드십시오. 불사(不死)의 결실을 위해 밭을 가는 고따마 존자께서는 참으로 밭을 가는 분입니다.”

[세존]
“게송 읊어서 얻어진 것은 내가 먹기에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적절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바르게 보는 자에게 그런 법은 없습니다.
 게송 읊어서 얻어진 것을 깨달은 자들은 거부합니다.
 법이 있을 때, 바라문이여, 그분들은 행합니다.

 

 궁극의 지혜로 완성한 자, 대성인(大聖人)
 번뇌 다하고, 후회가 가라앉은 분에게
 다른 음식과 마실 것으로 공양해야 합니다.
 그는 공덕을 바라는 사람의 밭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까시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udayasuttam (SN 7.12-우다야 경)  
198.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우다야 바라문의 집으로 가셨다. 우다야 바라문은 세존의 발우에 밥을 가득 담아드렸다. 두 번째로(두 번째 날) ··· 세 번째로(세 번째 날)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우다야 바라문의 집으로 가셨다. 세 번째로 우다야 바라문은 세존의 발우에 밥을 가득 담아드린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사문 고따마께서 계속해서 오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맛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바라문은 3일 동안 발우를 채워서 공양 올릴 때에도 신심으로 보시한 것이 아니라 '이 바라문은 집 앞에 와서 서 있는 출가자에게 탁발음식도 보시하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다.'라는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보시했다고 한다. 보시할 때에도 그는 이틀 동안은 보시하고 나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세존께서도 아무런 말씀 없이 떠나셨다. 셋째 날에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 바라문은 '맛에 대한 탐욕이 대단하다.'는 말을 했고, 세존께서도 바라문이 이 말을 쏟아내게 하시기 위해 사흘 째 되던 날에도 그곳에 가셨다고 적고 있다.(SA.i.257)

 

[세존]
“계속해서 사람들은 씨앗을 뿌리고
 계속해서 하늘의 신들은 비를 내리고
 계속해서 밭을 가는 자 들판을 갈고
 계속해서 곡식은 영토에서 자랍니다.


 계속해서 탁발자는 탁발을 하고
 계속해서 보시의 주인은 보시를 하고
 계속해서 보시의 주인은 보시를 한 뒤에
 계속해서 천상으로 올라갑니다.

 계속해서 소치기는 젖을 짜고
 계속해서 송아지는 어미를 찾고
 계속해서 사람들은 두려워 떨고
 계속해서 우둔한 자는 모태에 들고
 계속해서 태어나고 또 죽고
 계속해서 사람들은 시체를 공동묘지로 나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곳에 이르는 길을 얻으면
 다시 태어남이란 없습니다.
 광활한 지혜를 가진 자에게
 계속해서 태어남이란 없습니다.”

 

*'계속해서(punappunam) 사람들은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세존께서 '맛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라는 바라문의 말을 듣고 '바라문이여, 그대는 겨우 3일 동안 탁발음식을 공양 올리고는 마음을 거두어버렸다. 계속해서 해야 하는 것이란 세상에 열여섯 가지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한 것들을 보이기 위해 이 가르침을 시작하신 것이다. 여기서 '계속해서 사람들은 씨앗을 뿌린다.'라는 것은 사람들이 한번 씨앗을 심었다고 해서 '이제 그만'하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도 다음에도 반드시 계속해서 씨앗을 심는다. 마찬가지로 하루 비가 내리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다음 해에도 반드시 비가 내린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부유해진다. 모든 경우에 이런 방법이 적용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우다야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devahitasuttam (SN 7.13-데와히따 경)
199.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세존께서는 바람에 기인한 병(풍병)에 걸리셨는데 우빠와나 존자가 세존의 시자로 있었다. 세존께서는 우빠와나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우빠와나여, 나에게 더운 물을 좀 가져다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우빠와나 존자는 세존께 대답한 뒤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데와히따 바라문의 집으로 갔다. 가서는 침묵하면서 한 곁에 서 있었다. 데와히따 바라문은 우빠와나 존자가 침묵하면서 한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우빠와나 존자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바라문]
“머리 깎고 가사 입은 존자께서
 침묵하며 한 곁에 서 계십니다.
 무엇을 구하러 무엇을 찾으러
 무엇을 요청하러 오셨습니까?”

[우빠와나 존자]
“아라한, 세상에서 잘 가신 분[善逝], 성자께서
 바람에 기인한 병에 걸리셨습니다.
 바라문이여, 만일 뜨거운 물이 있으면
 성자를 위해 주십시오.

 예배를 받아야 할 분들의 예배를 받고
 공경을 받아야 할 분들의 공경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할 분들의 존경을 받는
 그분께 가져다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자 데와히따 바라문은 사람을 시켜서 물 나르는 통에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한 뒤 당밀 봉지와 함께 우빠와나 존자에게 주었다. 그러자 우빠와나 존자는 세존께 가서 세존께서 뜨거운 물로 목욕시켜드리고 당밀을 뜨거운 물에 타서 세존께 드렸다. 세존께서는 증상이 가라앉으셨다.

그때 데와히따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데와히따 바라문은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데와히따 바라문은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바라문]
“어디에 보시할 것을 보시해야 하며
 어디에 한 보시가 큰 결실을 가져옵니까?
 공양하는 자 어떻게 해야 그 보시물은
 성취를 가져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존]
“전생의 삶을 기억하고 천상과 지옥을 보며
 태어남 다 했고, 해야 할 일 다 해 마친 자가 성자이다.
 여기에 보시할 것을 보시해야 하며
 여기에 한 보시가 큰 결실을 가져 온다.

 공양하는 자 이렇게 해야 그 보시물은
 성취를 가져온다.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데와히따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mahāsālasuttam (SN 7.14-부자 경)
200.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어떤 바라문 장자가 초라한 모습을 하고 남루한 옷을 입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왜 그대는 초라하고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제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 자식들이 아내의 꼬임에 빠져 저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이 게송을 배워서 집회소(모임장소)에서 많은 군중들이 모이고 아들들도 함께 하였을 때 읋도록 하여라.”

“나는 그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그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원했건만
 아내들의 꼬임에 빠져버린 그들은
 개가 돼지 쫓아내듯 나를 몰아냈습니다.

 선량하지 못한 그들, 너무나 비열하여
 나를 두고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더니
 아들의 형색으로 태어난 그 악귀들
 마침내 늙은 나를 내다버렸습니다.

 늙어서 쓸모가 없는 말이
 말 마굿간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놈들의 늙은 아버지는
 남의 집에서 구걸을 합니다.

 불효한 저 자식들보다 
 내게는 지팡이가 더 나으니
 지팡이는 사나운 황소도 몰아내고
 사나운 개마저도 몰아냅니다.

 

 어둠 속에서는 지팡이가 내 앞에 가서 위험한 곳을 알려주고
 깊은 물 속에서는 나를 지탱하여 주네
 지팡이의 자비한 도움(힘)으로 나는
 비틀거리더라도 바로 설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바라문 장자는 세존의 곁에서 이 게송들을 외운 뒤 집회소에서 많은 군중들이 모이고 아들들도 함께 하였을 때 낭송을 하였다.

“나는 그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그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원했건만
 아내들의 꼬임에 빠져버린 그들은
 개가 돼지 쫓아내듯 나를 몰아냈습니다.

 선량하지 못한 그들, 너무나 비열하여
 나를 두고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더니
 아들의 형색으로 태어난 그 악귀들
 마침내 늙은 나를 내다버렸습니다.

 늙어서 쓸모가 없는 말이
 말 마굿같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놈들의 늙은 아버지는
 남의 집에서 구걸을 합니다.

 불효한 저 자식들보다 
 내게는 지팡이가 더 나으니
 지팡이는 사나운 황소도 몰아내고
 사나운 개마저도 몰아냅니다.

 어둠 속에서는 지팡이가 내 앞에 가서 위험한 곳을 알려주고
 깊은 물 속에서는 나를 지탱하여 주네
 지팡이의 자비한 도움(힘)으로 나는
 비틀거리더라도 바로 설수 있습니다.”   

아들들은 한때 부유했던 그 바라문을 집으로 모셔가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각각 옷 한 벌씩을 드렸다. 그러자 그 바라문 장자는 옷 한 벌을 가지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바라문 장자는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 장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희 바라문들은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을 위해서 스승에게 바치는 보시물을 구해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이것을 제가 스승에게 바치는 보시물로 받아주십시오.”라고.
세존께서는 연민하는 마음을 내시어 그것을 받으셨다.

 

그러자 바라문 장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mānatthaddasuttam (SN 7.15-마낫탓다 경)
201.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마낫탓다라는 바라문이 사왓티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고 스승에게도 공경하지 않고 나이 많은 형에게도 공경하지 않았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많은 대중에게 둘러싸여 법을 설하고 계셨다. 그때 마낫탓다 바라문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사문 고따마는 많은 대중에게 둘러싸여 법을 설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사문 고따마에게 다가가야겠다. 만일 사문 고따마가 나에게 말을 걸면 나도 그에게 말을 걸 것이다. 만일 사문 고따마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나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낫탓다 바라문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침묵한 채로 한 곁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으셨다. 그러자 마낫탓다
바라문은 ‘이 사문 고따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고 여기고 거기서 다시 되돌아 나오려고 하였다. 그때 세존께서는 마낫탓다 바라문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 뒤에 마낫탓다 바라문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문자적으로 마나탓다(mana-tthadda)는 자만(nana)과 완고함(thadda)으로 된 합성어이다. 「장로게 주석서」(ThagA.ii.179-180)에는 본경과 똑 같은 이야기가 젠따 장로(Jenta thera, Thag 428)의 일화로 나타나고 있다. 젠따 장로는 꼬살라 왕의 궁중제관의 아들이었다. 이 장로도 자만과 완고함에 휩싸여 지냈는데 본경에 나타나는 세존의 게송을 듣고 예류과를 얻어서 출가하여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자만(교만)을 키우는 것은, 바라문이여
 이로움(행복)을 원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대가 어떤 목적 가지고 왔는지
 그것을 참으로 드러내어 말해보라.”

그러자 마낫탓다 바라문은 ‘사문 고따마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세존의 발에 입맞추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마낫탓다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마낫탓다입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드렸다. 그 말을 들은 대중은 놀라는 마음이 생겨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마낫탓다 바라문은 어머니나 아버지에게도 공경하지 않고 스승에게도 공경하지 않고 나이 많은 형에게도 공경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문 고따마께는 이처럼 최상의 존경을 표합니다.”
세존께서는 마낫탓다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그것으로 그대의 마음은 나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일어나서 대중들이 있는 곳에 가서 앉으라.”
마낫탓다 바라문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바라문]
"누구에게 자만을 보여서는 안 됩니까?
 누구에게 존중을 나타내야 합니까?
 누구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누구에게 깊은 경배 올려야 합니까?”

[세존]
 “어머니와 아버지, 형과 스승
  이들에게 자만을 보여서는 안 되고
  바로 이들에게 존중을 나타내야 하고
  바로 이들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고
  바로 이들에게 깊은 경배 올려야 한다.

  자만을 죽여 없애어 겸손해진 사람은 
  할 바를 다했고 번뇌 없고 마음이 평온해 진 분들
  위없는 아라한들에게 예배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낫탓다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paccanīkasuttam (SN 7.16-빳짜니까 경)
202.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빳짜니까사따라는 바라문이 사왓티에 살고 있었다. 빳짜니까사따 바라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문 고따마에게 찾아가야겠다. 가서는 사문 고따마가 무어라 말하든지 나는 그것을 다 반대하고 반박할 것이다.’라고.

 

*문자적으로 빳짜니까사따(paccanika-sata)는 반대하는 것(paccanika)을 즐기는(sata) 자라는 뜻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노지에서 포행을 하고 계셨다. 빳짜니까사따 바라문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포행을 하시는 세존을 따라서 포행을 하면서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사문이여 법을 설해 주십시오.”

[세존]
“마음은 잔뜩 오염되어 있으면서
 남을 공격하기를 거듭해서 시도하고
 오히려 반대하는 것 즐기는 자는
 좋은 말씀[金言.잘 설해진 말씀)] 이해하기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분노(성냄)를 길들이고
 마음의 불신을 없애버렸다면
 반감마저 저 멀리 내던져버린 그런 자가
 좋은 말씀을 참으로 잘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빳짜니까사따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navakammikasuttam (SN 7.17-나와깜미까 경)  
20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꼬살라의 어떤 숲에 머무셨다. 그 무렵 나와깜미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그 숲 속에 일을 하러 왔다. 그리고 나와깜미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서 그 숲의 살라 나무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확립하여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그때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밀림에서 일을 하면서 기뻐한다. 그런데 이 사문 고따마는 무엇이 되어가는 것을 기뻐할까?’ 이런 생각을 한 후 나와깜미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문자적으로 나와깜미까(nava-kammika)는 새(nava) 일꾼(kammika)이라는 뜻이다. 그의 직업이 밀림의 나무를 베어서 목재로 만들어 파는 것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SA.i.264)

[바라문]
“비구여, 이 살라 숲에서 그대 어떤 일을 하십니까?
 고따마여, 이 숲에서 홀로 머물며
 어떤 일에서 기쁨 얻습니까?”

[세존]
“숲에서 해야 할 일 나에게는 없으며
 뿌리 잘린 나의 숲은 메말라버렸다.
 숲(번뇌)이 없어지고 쇠살(고통.괴로움)이 없어진
 그러한 나는 숲에서 홀로 기뻐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나와깜미까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kaṭṭhahārasuttam (SN 7.18-땔감나무 모으기 경)  
20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꼬살라의 어떤 숲에 머무셨다. 그 무렵 어떤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에게는 많은 바라문 수행자들이 제자로 있었는데 그들은 땔감나무를 모으기 위해서 숲으로 갔다. 그리고 세존께서 그 숲에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확립하여 앉아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에게 갔다. 가서는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은 아셔야 합니다. 지금 어떤 숲에서 사문이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확립하여 앉아 있습니다.”라고.
이 말을 들은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은 그 바라문 수행승들과 함께 그 숲으로 가서 세존께서 그 숲에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확립하여 앉아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자 세존께 다가가서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바라문]
“깊숙하고 많은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숲
 텅 비고 쓸쓸한 숲에 들어와서는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의지는 굳건하고 
 비구여, 단아한 모습으로 명상을 합니다.

 노래도 없고 음악도 없는 곳에서
 성자가 홀로 밀림에서 숲을 의지해
 희열에 찬 마음(즐거운 마음)으로 숲에 홀로 머무는
 경이로운 그대 모습이 제게 감동을 줍니다.

 세상의 주인인 [범천]의 동무가 되고
 위없는 범천의 세상을 그대는 원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 쓸쓸한 밀림에 의지하여(살면서)
 범천이 되기 위해 여기서 고행합니다.”

[세존]
“어떤 소원 가졌든 어떤 기쁨 가졌든
 여러 가지 요소들에 범부 항상 집착하네.
 무지를 뿌리로 갈망이 생기나니
 나는 그 모두를 끝장내고 뿌리를 뽑았다.
  
 그런 나는 소망 없고 집착 없고 속박 없어
 제법(諸法.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봄[見]은 청정하게 되었다.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바라문이여, 두려움없이 확신에 차 나는 홀로 명상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mātuposakasuttaṃ (SN 7.19-어머니 봉양 경)
205.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어머니를 봉양하는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어머니를 봉양하는 바라문은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저는 법답게(정당한 방법으로) 음식을 구합니다. 법답게 음식을 구한 뒤 부모를 봉양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이렇게 행하는 저는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바라문이여. 이렇게 행하는 그대는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입니다. 법답게 음식을 구하고, 법답게 음식을 구한 뒤 부모를 봉양하는 그는 많은 공덕을 쌓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법답게 봉양하는 사람을
 여기서는 현자들이 그를 칭송하고, 죽은 뒤에 그는 천상에서 기뻐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머니를 봉양하는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bhikkhakasuttam (SN 7.20-걸식자 경)
206.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탁발하는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탁발하는 바라문은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탁발하는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저도 탁발자이고 당신도 탁발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차이점입니까?”

 “남한테 탁발을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비구가 되는 것이 아니니
  악취 나는 저 법(세간생활)을 받들어 행하는 한
  그는 결코 비구라 불릴 수가 없다.

  공덕과 죄악을 모두 버리고
  청정범행(거룩한 삶)을 한결같이 행하고 닦으며
  지혜롭게 세상에서 유행하는 [그런 사문]
  그를 일러 참으로 비구라 부른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탁발하는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saṅgāravasuttaṃ (SN 7.21-상가라와 경)
207.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상가라와라는 물로 정화하는 바라문이 사왓티에 살았는데, 물로 정화하고, 저녁과 새벽에 물에 들어가는 실천을 하며 살았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다. 사왓티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여기 세존이시여, 상가라와라는 물로 정화하는 바라문이 사왓티에 사는데, 물로 정화하고, 저녁과 새벽에 물에 들어가는 실천을 하며 삽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연민하는 마음을 내시어 상가라와 바라문의 집으로 가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상가라와 바라문의 집으로 가셨다. 가셔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그러자 상가라와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상가라와 바라문은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바라문 상가라와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바라문이여, 그대는 물로 정화하는 사람이어서 물로 정화하고, 저녁과 새벽에 물에 들어가는 실천을 하며 삽니까?”라고.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이여, 그대는 무슨 이유를 보기에(기대하기에) 물로 정화하는 사람이어서 물로 정화하고, 저녁과 새벽에 물에 들어가는 실천을 하며 삽니까?”  
“여기, 존자시여, 낮에 제가 지은 악업을 저녁의 목욕을 통해 흘려보냅니다. 밤에 지은 악업을 새벽의 목욕을 통해 흘려보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이런 이유를 보기에 물로 정화하는 저는 물로 정화하고, 저녁과 새벽에 물에 들어가는 실천을 하며 삽니다.”

 

[세존]
 “바라문이여, 법은 계행이라는 여울을 가진 깨끗한 호수
  고결한 사람이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칭송하는 것
  높은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목욕하는 곳
  그들은 젖지 않은 몸으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khomadussasuttam (SN 7.22-코마둣사 경)  
20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의 코마둣사라는 삭까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탁발을 위해서 코마둣사 성읍으로 들어가셨다. 그때 코마둣사에 사는 바라문 장자들은 어떤 일 때문에 집회소에 모여 있었고 비가 가끔 부슬부슬 내리기도 하였다.

 

*문자적으로 코마사(khomadussa)는 아마포(khoma)로 만든 옷(dussa)이란 뜻이다. 그래서 주석서는 이곳에 아마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266)

 

세존께서는 그 집회소로 가셨다. 코마둣사에 사는 바라문 장자들은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았다.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 머리 깎은 사문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들은 집회소의 법(마을의 규칙)을 알기나 하는가?”
그러자 세존께서는 코마둣사에 사는 바라문 장자들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집회소의 법(sabha-dhamma)'이란 늦게 온 사람은 곁문으로 들어가고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이미 와서 편히 앉아있는 대중들을 동요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정문으로 들어가셨다. 그래서 그들은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SA.i.266-267)

 

 “참된 사람들 없는 곳은 집회소가 아니고
  법을 말하지 않는 자들은 참된 사람 아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법을 말하는 자들이 진정 참된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코마둣사의 바라문 장자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불가사의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경탄할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바라문 상윳따(S7)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