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8상윳따 - 왕기사 상윳따(Vangisathera samyutta. SN8:1-SN8:12)

실론섬 2014. 4. 26. 18:50

제8주제(S8) 왕기사 (장로) 상윳따
Vaṅgīsathera-saṁyutta (SN 8.1-12)

 

nikkhantasuttaṃ (SN 8.1-출가한 자 경)
20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왕기사 존자는 알라위에서 스승인 니그로다깝빠와 함께 악가라와 탑묘에 머물렀다.
그 무렵 왕기사 존자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뒤에 남아 승원을 지키는 신참 비구였다. 어느 때 승원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여인들이 치장을 하고 악갈라와의 승원에 왔다.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그 여인들을 본 뒤에 [출가생활에 대한] 싫증(기쁘지 않음)이 생겼고 애욕이 마음을 물들였다. 그때 왕기사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참으로 나에게 손실이고, 참으로 나에게 이득이 아니다. 참으로 나에게 잘못 얻어졌고, 참으로 나에게 잘 얻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싫증이 생겼고, 애욕이 마음을 물들였다. 다른 사람이 나의 싫증을 씻어버리고 기쁨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스스로 자신의 싫증을 씻어버리고 기쁨을 일으켜야겠다.’라고.
왕기사 존자는 스스로 자신의 싫증을 씻어버리고 기쁨을 일으킨 뒤, 그때 이 게송을 말했다.

 

*왕기사 존자는 바라문 가문에 태어나서 베다에 능통한 자였다. 그는 방랑하는 바라문이었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죽은 사람의 해골을 손가락으로 두드려서 그가 임종하여 어디에 태어났는가를 말해 주는 것으로 생계를 연명하였다고 한다. 그가 붓다를 만났을 때 붓다께서는 아라한의 해골을 포함한 여러 해골들을 그에게 주시면서 알아 맞혀보라고 하셨다. 그는 다른 해골을 통해서는 그들이 재생한 곳을 잘 알아 맞혔지만 아라한의 해골을 두드려보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당황하였다. 그는 아라한이 재생하는 곳을 알기 위해서 출가하였다. 그는 영감과 시작(詩作)에 능통했다. 앙굿따라니까야 하나의 모음에서 세존께서는 그를 ‘영감을 가진 자들가운데 으뜸’이라고 하셨다. 한편 왕기사 존자가 지은 게송은 「장로게」에 모아져서 전승되어 온다.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인 나에게
 무분별함과 악함으로부터 생겨난 이런 생각들이 나를 엄습한다.

 확고한 법을 가지고 잘 훈련된, 높은 가문 출신의 뛰어난 궁수 
 두려움 없는 천 명의 궁수가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다고 해도

 만약 이것을 넘어선 아름다운 여인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법에 확고히 서있는 나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다.   

 

*주석서는 이 게송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비록 천 명의 궁수가 사방에서 화살을 쏘더라도 잘 훈련된 사람은 지팡이를 가지고 날아오는 화살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모두 다 쳐내어서 그의 발아래 떨어뜨릴 수 있다. 한 사람의 궁수는 한 번에 화살 한 개씩 밖에 쏠 수 없지만 이러한 여인들은 한 번에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다섯 개의 화살을 쏜다. 이렇게 수천 개의 화살을 쏘더라도 이것이 나를 흔들수는 없다는 뜻이다."(SA.i.269)

  태양의 후예이신 세존에게서 나는 열반으로 가는 길을 직접 들었다.
  나의 마음은 거기서 즐거워한다.

  만약 이렇게 머무는 나에게 빠삐만 그대가 다가온다면,
  죽음의 신이여, 그렇게 나의 길을 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aratisuttaṃ (SN 8.2-불쾌 경)
210. 한 때에 왕기사 존자는 알라위에서 은사인 니그로다깝빠와 함께 악갈라와 탑묘에 머물렀다. 그 무렵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온 니그로다깝빠 존자는 오후에 승원으로 들어가서, 저녁때나 다음날에 나왔다. 그때 왕기사 존자에게는 싫증이 생겼고 애욕이 마음을 물들였다. 그러자 왕기사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참으로 나에게 손실이고, 참으로 나에게 이득이 아니다. 참으로 나에게 잘못 얻어졌고, 참으로 나에게 잘 얻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싫증이 생겼고, 애욕이 마음을 물들였다. 다른 사람이 나의 싫증을 씻어버리고 기쁨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스스로 자신의 싫증을 씻어버리고 기쁨을 일으켜야겠다.’라고.
왕기사 존자는 스스로 자신의 싫증을 씻어버리고 기쁨을 일으킨 뒤, 그때 이 게송을 말했다.   

 

“불쾌함과 유쾌함 그리고 세속에 의지한 생각도 모두 버린 뒤에
 어디에서도 갈망을 일으키지 않으면, 갈망에서 벗어나고

 불쾌함을 가진(유쾌함이 없는) 그가 참으로 비구이다.


 이 세상에서 땅에 있거나 허공에 있거나, 그리고 형색(몸)이 있고

 세상에 속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무상하고, 사라지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이것을 알고서 행한다.

 

 사람들은 본 것, 들은 것, 부딪힌 것, 인식한 것에서 새명에 대한 갈망에 묶여 있다.
 여기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여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
 거기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성자라고 부른다.

 60가지에 의존한 생각들이 떠오르고, 범부들은 법 아닌 것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어디서도 무리에 가담하지 않고,
 부도덕한 말을 하지 않는 그가 비구이다.

 

 현명하고, 밤 동안 오래도록 삼매를 닦고, 속이지 않고, 신중하고, 집착이 없는 성자는
 평화로운 경지를 증득하였다.
 이처럼 완전한 평화를 얻어 [열반의] 시간을 기다린다.”

 

pesalasuttam (SN 8.3-온후함 경)  
2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왕기사 존자는 알라위에서 스승인 니그로다깝빠 존자와 함께 악갈라와 탑묘에 머물렀다. 그 무렵 왕기사 존자는 자신의 재능 때문에(잘났다는 생각 때문에) 바르게 행동하는 다른 비구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나타내었다. 그러자 왕기사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자신의 재능 때문에 다른 온후한 비구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나타내었으니 참 나쁜 일이다. 내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제 나에게 크게 나쁜 일이 생겼다. 내게 아무 득이 되지 못하게 생겼다.’라고. 
왕기사 존자는 자기 스스로 자책감을 일으킨 뒤, 그때 이 게송을 말했다.


“고따마여, 자만을 버려라.
 자만의 길도 남김없이 버려라.
 자만의 길에서 방황하면서(유혹되어)
 그대 오랜 세월 자책하여 왔다. (후회해 왔다)


*그는 고따마 부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Gotama-buddha-savakatta) 자신을 '고따마여'라고 부른 것이다.(SA.i.271)
그는 아래 아난다 경(SN8.4)에서 아난다 존자를 '고따마여'라 부르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의 사촌으로 고따마 종족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구가 자신이 고따마 부처님의 제자라고 해서 자신을 고따마라 지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경우이다.

*'자만의 길(mana-patha)'이란 자만의 대상과 자만과 함께 일어난 법들을 말한다.(SA.i.271)

 경멸(위선)로 얼룩진 사람들과
 자만에 빠진 자들은 지옥에 떨어진다.
 자만에 빠져 지옥에 떨어져서는
 오랜 세월 슬퍼하게 된다.

 올바른 길을 알고 바르게 닦는 비구
 어디서도 결코 슬퍼하지 않으니 
 명성과 행복을 누리는 그들
 사람들이 참으로 그를 일컬어 법(진리)을 보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여기서 마음의 방만함을 여윈

 굳세게 노력하는 수행자들은
 장애들을 제거하여 청정하니
 자만을 남김없이 제거하여서
 명지로 오염원의 끝을 만들고
 마침내 고요함을 얻게 된다.”

 

*'방만함을 여읜'은 다섯 가지 마음의 방만함을 여읜 것이다.(ThagA.iii.191)
다섯 가지 마음의 방만함은 불.법.승.계를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과 동료 수행자에게 화내고 기뻐하지 않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ānandasuttaṃ (SN 8.4-아난다 경)
212. 한 때에 아난다 존자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렀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왕기사
존자를 뒤따르게 하면서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다. 그때 왕기사 존자에게 싫증이 생겼고 애욕이 그의 마음을 물들였다.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왕기사 존자]
“욕탐에 의해 나는 불타고, 나의 마음은 불붙어 있습니다.
 고따마여, 연민하는 마음을 내어 꺼짐을 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난다 존자]
“인식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불붙었습니다.
 표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애욕은 탐욕을 수반합니다. 

 

 형성된 것들을 모두 자기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괴로움이라고 보아야 하고, 자아라고 보지 않아야 합니다.
 큰 탐욕의 불을 꺼야 합니다. 다시는 거듭 불타게 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통일하고 한끝으로 잘 집중(삼매)되어
 더러움(부정관)을 통해 마음을 닦으십시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염오(厭惡)에 많이 몰입하십시오. 

 

 표상 없음을 닦아야 합니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버리십시오.
 그래서 자만을 관통하면 평화롭게 되어 행동할 것입니다.” 


subhāsitāsuttam (SN 8.5-금언 경)   

213. 사왓티에서 설해짐.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요소를 갖춘 말은 잘 설해졌고 잘못 설해진 것이 아니고 비판받을 일이 없고 지자들에게 비난(질책)받지 않는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좋은 말을(잘 설해진) 말하고 나쁜 말은 하지 않는다. 
법을 말하고 비법은 말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기분좋게 하는말만 하고 불쾌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진실만 말하고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요소를 갖춘 말은 잘 설해졌고 잘못 설해진 것이 아니고 비판받을 일이 없고 지자들에게 비난(질책)받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선서이신 스승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참된 자들은 말한다. 좋은 말이야말로 첫 번째요
 법을 말하고 비법을 말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며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 없이 말하지 않는 것이 세 번째요
 진실을 말하고 거짓은 말하지 않는 것이 네 번째이다.”

그때 왕기사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 옷을 입고 땅에 오른쪽 무릎을 꿇은 뒤 세존을 향하여 합장하고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제게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게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선서시여.”
“왕기사여, 그 영감을 드러내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게송들로 칭송을 하였다.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그런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 말이 진실로 잘 설해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기쁨이 생기고
 사악함을 가져오지 않으며
 남들에게 말하면 사랑스러운
 그런 기분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진실이란 참으로 불사(不死)의 말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오래된 법
 진실 안에 이로움과 법이 확립되어 있다고
 참된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존께서 하신 평안한 말씀
 그것이야말로 말씀들 가운데서 으뜸이니
 열반을 증득하고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서
 그분 그것을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sāriputtasuttaṃ (SN 8.6-사리뿟따 경)
214. 한 때에 사리뿟따 존자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는 정중하고 명확하고 분명하며 논리가 정연하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기호.언어.어법)을 구족하여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여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다. 그리고 비구들은 그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온 마음을 다하여 몰두하여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었다.
그때 왕기사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리뿟따 존자는 정중하고 명확하고 분명하며 논리가 정연하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구족하여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여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한다. 그리고 비구들은 그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온 마음을 다하여 몰두하여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 나는 사리뿟따 존자의 면전에서 여기에 어울리는 게송으로 찬탄해야겠다.’라고.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사리뿟따 존자를 향해 합장한 뒤,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도반 왕기사여, 그것을 말해보십시오.”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면전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게송으로 찬탄했다.

 

“심오한 지혜를 가진 현명한 분, 도(道)와 도(道)아닌 것에 능숙한 분
 큰 지혜를 가진 사리뿟따가 비구들에게 법을 설합니다.

 간략함에 의해서도 법을 설하고, 상세함에 의해서도 말합니다.
 살리까 새처럼 잡음 없이 떠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리뿟따 장로가 법을 설하는 감미로운 목소리는 마치 구관조(salika)가 잘 익은 달콤함 망고를 맛보고 양 날개를 퍼덕이며 바람을 일으키고 감미로운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SA.i.276)

 좋아할만하고, 듣기에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음성으로 그것을 설하는
 그분의 달콤한 말을 비구들은 듣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는 비구들은 귀를 기울입니다." 


pavāraṇāsuttam (SN 8.7-자자(自恣) 경)
215. 한 때에 세존께서는 모두가 아라한인 500명의 고귀한 비구 승가와 함께 사왓티의 동쪽 원림[東園林]에 있는 미가라마따(녹자모) 강당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보름 포살일 밤에 비구 승가에 둘러싸여서 바깥 뜰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침묵하고 있던 비구 승가들을 둘러보신 뒤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자자(自恣)를 청한다. 몸에 속한 것이든 말에 속한 것이든 어떤 것이든 그대들이 질책할 것이 나에게 없는가?”라고.

 

이렇게 말씀하시자 사리뿟따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몸에 속한 것이든 말에 속한 것이든 세존의 어떤 것이든 질책할 것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길을 일어나게 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길을 낳았으며, 알려지지 않은 길을 전한 분이며, 길을 아는 분이요, 길을 본 분이요, 길을 숙지한 분입니다. 세존이시여, 지금의 제자들은 그 길을 쫓아서 머물고 나중에 그것을 구족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이제 저도 세존에게 자자를 청합니다. 몸에 속한 것이든 말에 속한 것이든 어떤 것이든 세존께서 질책하실 것이 저에게 없습니까?”라고.


“사리뿟따여, 나는 몸에 속한 것이든 말에 속한 것이든 그대의 어떤 것이든 질책할 것이 없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현명하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넓은 지혜를 가졌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풍부한 지혜를 가졌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위대한 지혜를 가졌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민첩한 지혜를 가졌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예리한 지혜를 가졌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깊은 지혜를 가졌다. 예를 들면, 사리뿟따여, 전륜성왕의 큰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구르는 바퀴를 바르게 이어서 굴릴 것이다. 이처럼, 사리뿟따여, 그대는 나에 의해서 구르는 위 없는 법의 바퀴[法輪]를 바르게 이어서 굴릴 것이다.”라고.

 

“세존이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몸에 속한 것이든 말에 속한 것이든 저의 어떤 것이든 질책할 것이 없으시다면, 세존이시여, 몸에 속한 것이든 말에 속한 것이든 어떤 것이든 세존께서 질책하실 것이 이들 오백 명의 비구들에게 없습니까?”
“사리뿟따여, 나는 몸에 속한 것이든 말에 속한 것이든 이들 오백 명의 비구들의 어떤 것이든 질책할 것이 없다. 사리뿟따여, 이들 오백 명의 비구들 가운데 60명의 비구들은 삼명(세가지 지혜)을 갖춘 자이고, 60명의 비구들은 여섯 가지 신통을 갖춘 자이고, 60명의
비구들은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이고, 나머지는 지혜에 의한 해탈(혜해탈.慧解脫)자이다.”

 

그때 왕기사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왕기사여, 그것을 말해보라.”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게송으로 찬탄했다.

 

“오늘은 보름날, 청정을 위해 모인 오백 명의 비구들
 족쇄와 속박 끊고 괴로움 없고 재생(再生)을 잘라버린 선인들

 전륜성왕이 신하들에 둘러싸여 

 바다에서 끝나는 이 땅을 구석구석 돌아보듯이

 

 이렇게 전쟁의 승리자요 대상(隊商)의 우두머리인 분에게 
 삼명 구족하고 죽음을 극복한 제자들이 존경을 표합니다.

 

*'전쟁의 승리자(vijita-sangama)'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란 말이다. 마라의 군대에게 승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상의 우두머리(sattha-vaha)'란 팔정도의 마차에 올라서서 대상을 인도하여 윤회의 황무지를 건너게 하기 때문에 세존이 바로 대상의 우두머리이시다.(SA.i.278)


 모두가 세존의 아들들인 여기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갈애의 화살을 부수어버린  태양의 후예에게 예배합니다.”

 

*포살일 혹은 줄여서 포살은 uposatha의 음역이며 불교의 계율 준수 일을 말한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날에 준수한다(upavasati)고 해서 포살이라 한다. 준수한다는 것은 계나 금식을 지키면서 머문다는 뜻이다. 이 
포살일(uposatha-devasa)은 8일, 14일, 15일의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두 가지를 제외한다는 뜻으로 '보름 포살일'이라고 하였다."(SA.i.276)
일반적으로 포살은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거행되며 이날에 비구들은 함께 모여서 비구빠띠목카를 암송한다. 이러한 포살 가운데서 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보름밤에 모여서 행하는 의식을 자자(自恣,pavarana)라고 한다. 그래서 주석서도  '안거를 마친 자자(vassam-vuttha-pavarana)'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자는 연장자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하고, 본경에서처럼 혹시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지은 잘못이 있는가를 대중들에게 묻고 대중들의 책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식이다. 
한편 우뽀사타는 제사의례를 기록한 베다 문헌에서도 제사를 지내기 전에 지키는 금식일로 나타나고 있으며, 자이나교 등의 다른 사문.바라문 전통에서도 이미 준수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일찍부터 불교교단에 채용되었다.

 

parosahassasuttam (SN 8.8-천 명이 넘음 경)   
21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천이백오십 명의 고귀한 비구 승가와 함께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의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열반에 관계된 법을 설하시어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셨다. 그리고 비구들은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온 마음을 다하여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었다. 

 

*'천이백오십 명의 고귀한 비구 승가화 함께'는 mahata bhikkhusanghena saddhim addhatelasehi bhikkhusatehi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1250 명의 비구'는 addhatelasehi satehi를 옮긴 것인데 직역하면 반(addha)이 [모자라는(una)] 13(telasa) 비구(bhikkhu) 백 명(sata)이다. 다시 말하면 13-0.5=12.5에다 1--을 곱하여 1250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범어 일반에서 널리 쓰이는 셈법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 1250명의 비구들 가운데 범부나 예류자나 일래자나 불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모두 육신통을 구족한 아라한들이었다고 한다.(MA.iii.209) 그래서 이들을 고귀한(maha) 비구 승가'라 부르는 것이다.


그때 왕기사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열반에 관계된 법을 설하시어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신다. 그리고 비구들은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온 마음을 다하여 몰두하여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다. 그러니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어울리는 게송들로 찬탄을 해야겠다.’라고.
왕기사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왕기사여, 그것을 말해보라.”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게송으로 찬탄했다.

 “어디서도 두려움이 없는 열반과 욕망을 여윈 법을 가르치는 선서를
  천 명 넘는 비구들은 성심으로 섬깁니다.

  정등각자께서 설하신  때(번뇌)가 없는 법을 그들은 귀 기울여 듣습니다.
  비구 승가의 존경을 받는  완전하게 깨달은 분은 정말 환하게 빛이 납니다.

  용이라 불리시는 그분 세존은 선인(仙人)들 중의 으뜸가는 선인이시오니
  큰 구름 모여들어 단비를 내리듯이 제자들에게 [법의] 비를 내려 주십니다.

  낮 동안의 머묾에서 나와  스승을 친견하고픈 마음에
  대영웅이시여, 제자 왕기사는 당신의 두 발에 예배드리옵니다.”

“왕기사여, 그런데 이 게송들은 그대가 전에 생각해둔 것인가, 아니면 즉각적으로 영감이 떠오른 것인가?”
“세존이시여, 이 게송들은 제가 전에 생각해둔 것이 아니라 즉각적(저절로)으로 영감이 떠오른 것입니다.”
“왕기사여, 그렇다면 그대가 전에 생각해두지 않은 게송들을 좀 더 떠올려보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왕기사 존자는 세존께 대답한 뒤 사전에 생각해 두지 않은 게송들을 좀 더 떠올려서 세존을 찬탄하였다.

 “마라의 비정상적인 길을 정복하고 마음의 방만함을 부수고 유행하시니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집착이 없고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비구들이 거센 물살 건너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방편으로  바른 길 가르치셨습니다.
  세존께서 가르치신 불사의 세계에서진리 법을 보는 이들(아라한)이 흔들림없이 서 있습니다.


  대광명 만드신 분은 철저하게 알았고 모든 경지 넘어섬을 바르게 보셨습니다.
  그것 알고 그것을 실현하신 뒤에는 다섯 분(오비구) 그분들께 으뜸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의 법 잘 설해졌으니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어찌 방일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존의 가르침을 열심히 행하고 항상 공손하게 그것을 익히고 닦아야 합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승가 가운데서 ‘왕기사 장로는 아주 느슨하게 산다. 영감이 떠올라서 즉시에 게송을 읊는 것이 아니고 익힘과 닦음을 게을리 하면서 이리저리 다른 게송들을 묶어서 인용이나 하면서 다닌다.’라는 비판이 일어나는 것을 아시고 ‘비구들이 왕기사의 영감을 알지 못하니 나는 그들이 왕기사의 시적 재능을 알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셔서 이렇게 물으신 것이라고 한다.(SA.i.278-279))

 

koṇḍaññasuttam (SN 8.9-꼰단냐 경)  
21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안냐 꼰단냐 존자가 아주 오래만에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서 세존의 발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세존이시여, 저는 꼰단냐입니다. 선서시여, 저는 꼰단냐입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드렸다.

 

*‘안냐(Anna. 구경의 지혜)’는 꼰단냐 존자(ayasma Kondanna)의 이름이다. 그는 세존의 첫 번째 제자들인 다섯 비구 가운데 한 분이며 가장 먼저 세존의 가르침을 이해한 분이다. 그래서 구경의 지혜를 뜻하는 안냐(Aññā)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전체 비구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구족계를 받은 분이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하나의 모음’에서 장로 비구 제자들 가운데서 으뜸으로 불리고 있다.

안냐 꼰단냐 존자는 까삘라왓투 근처에 있는 도나왓투(Donavatthu)라는 곳의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다. 그는 고따마 싯닷타 태자가 태어났을 때 관상을 보기 위해서 온 8명의 바라문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한다. 관상학의 대가였던 그는 태자가 깨달은 분이 될 것을 예견하고 출가하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네 명과 함께 출가하였으며 그래서 이들은 다섯 비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들 가운데서는 제일 먼저 법에 눈을 뜬 사람이며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 기쁨을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다(annasi vata bho Kondanno)"라고 두번이나 외치셨다. 그래서 그는 안냐꼰단냐(완전하게 안 꼰단냐)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본서 제3권 무아의 특징 경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Vin.i.13-14)
그는 "ehi, bhikhu(오라, 비구여)" 정형구로 구족계를 받은 첫 번째 비구이며 전체 비구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구족계를 받은 분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존자는 12년만에 세존을 뵌 것이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히말라야의 찻단따 숲(Chaddanta-bhavana)에 있는 만다끼니 호수(Mandakini-pokkharani) 언덕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은 예전부터 벽지불(paccekabuddha)들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며, 꼰단냐 존자는 혼자 머물기를 좋아하여 승가 공동체에는 아주 드물게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때 왕기사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안냐 꼰단냐 존자는 아주 오랜만에 세존께 다가가서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서 세존의 발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세존이시여, 저는 꼰단냐입니다. 선서시여, 
저는 꼰단냐입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드리는구나. 그러니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여기에 어울리는 게송들로 안냐 꼰단냐 존자를 찬탄을 해야겠다.’라고.
왕기사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왕기사여, 그것을 말해보라.”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게송으로 안냐 꼰단냐 존자를 찬탄했다.

“세존을 따라 깨달은 그분 장로 꼰단냐는 굳세게 정진하여
 행복하게 머묾과
 한결같이 멀리 여윔을 얻었습니다.


 스승의 교법(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가 방일 않고 닦아
 얻어야 하는 그 모두를 바로 그분 꼰단냐가 증득했습니다.

 큰 위력과 삼명을 두루 갖췄으며  [남의] 마음 아는 데도 능숙한 그분은
 꼰단냐라 불리는 세존의 제자이니 스승의 두 발에 그가 이제 예배합니다.”

 

*본 게송에서는 네 가지 신통력만 언급 되었지만 그는 여섯 가지 신통(육신통)을 모두 다 갖추었다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 계속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꼰단냐 존자는 그의 열반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고 세존께 하직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는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히말라야로 돌아가서 그의 숲속 거처에서 열반을 하였다. 코끼리들이 그의 열반을 슬퍼하였으며 그의 유체를 에워싸고 히말라야에서 행진을 하였다. 그러자 신들이 관을 만들어서 여러 천상에 다니면서 신들과 범천들이 예배하게 하였으며 그 뒤에 지상에서 화장을 하였다. 그의 유골은 죽림정사(Veluvana-vihara)의 세존게 보내졌으며 세존께서는 탑을 조성하였다. 지금도 그 탑은 존재한다고 한다.(SA.i.283-284)

 

moggallanasuttam (SN 8.10-목갈라나 경)   
21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모두가 아라한인 500명의 고귀한 비구 승가와 함께 라자가하의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그들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리고 그들의 마음을 찾아보았는데 모두 해탈하였으며 재생의 근거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왕기사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세존께서는 모두가 아라한인 500명의 고귀한 비구 승가와 함께 라자가하에서 이시길리의 검은 바위산에 머물고 계신다. 그런데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그들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리고 그들의 마음을 찾아보았는데 모두 해탈하였으며 재생의 근거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여기에 어울리는 게송들로 목갈라나 존자를 칭송해야겠다.’라고.
왕기사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왕기사여, 그것을 말해보라.”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게송으로 안냐 마하목갈라나 존자를 찬탄했다.


“산허리에 앉아 계신 세존께서는 성자이시니 괴로움을 넘어서 저 언덕에 도달하신 분입니다.
 삼명을 구족하고 죽음마저 제거한 제자들이 이런 그분 섬기고 있습니다.


 큰 신통력 구족한 목갈라나가 있어 마음으로 그들을 그때에 에워싸서
 그들의 마음을 철저히 살펴보니 그들은 해탈하여 재생의 근거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모든 요소 갖추었으며 괴로움의 저 언덕에 도달한 성자요
 여러 가지를 구족한 고따마님을 섬깁니다.”

 

gaggarāsuttam (SN 8.11-각가라 경)  
21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모두가 아라한인 오백 명의 고귀한 승가와 칠백 명의 청신사들과 칠백 명의 청신녀들과 수천 명의 신들과 함께 짬빠의 각가라 호수의 언덕에 머물고 계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 멋진 모습과 영광으로 빛을 발하고 계셨다.

그때 왕기사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세존께서는 모두가 아라한인 오백 명의 고귀한 비구 승가와 칠백 명의 청신사들과 칠백 명이 청신녀들과 수천 명의 신들과 함께 짬빠에서 각가라 호수의 언덕에 머물고 계신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 멋진 모습과 영광으로 빛을 발하고 계신다. 그러니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여기에 어울리는 게송들로 세존을 찬탄해야겠다.’라고.
왕기사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왕기사여, 그것을 말해보라.”
그러자 왕기사 존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게송으로 세존을 찬탄했다.

“구름 없는 하늘에서 저 달이 빛나듯이 얼룩 없는 저 태양도 그곳에서 빛나듯이
 앙기라사여, 대성인이여, 당신도 그와 같아서 명성으로 모든 세상 밝게 비추십니다.”

 

*앙기라사(angirasa)는 베다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종족의 이름인데 세존도 이 앙기라사 종족에 속한다고 한다. DPPN은 이런 의미에서 본 게송에서 이 단어가 쓰인 것에 주목하고 있으며, 세존 부계(父系)의 족성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vaṅgīsasuttaṃ (SN 8.12-왕기사 경)
220. 한 때에 왕기사 존자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왕기사 존자는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해탈의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머물렀다. 그는 이때 이 게송들을 읊었다.

“예전에는 시상(詩想)에 몰두하여 유행하였다.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그러다 깨달은 분을 만났다. '그대들은 믿음을 일으켜라.'


 그분은 그런 내게 법을 설하셨으니 [5]온과 [12]처와 [18]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분 설한 이러한 법을 듣고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정해진 행로를 체득한
  비구들과 비구니들을 위하여 그분 성자께선 깨달음을 실현하셨다.

 

*'정해진 행로를 체득했다.(ye niyama-gata-ddasa)'라는 것은 정해진 행로에 도달한 자들과 정해진 행로를 본 자들을 뜻한다.(SA.i.287)
"세존의 성스러운 제자인 비구와 비구니들이 과에 머물 때 정해진 행로에 도달한 것이고, 도에 머물 때 정해진 행로를 본 것이다. '정해진 행로(niyama)'란 올바른 정해진 행로를 말한다."(SAT.i.259)

  내가 출가하여 세존 곁에 머문 것, 그것은 참으로 잘 걸어 온 것이니
  세존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삼명[三明]를 증득하였다.

  전생의 삶을 알게 되었고, 청정한 하늘 눈이 있고
  삼명과 신통의 얻음이 있고, 남의 마음 아는 데도 능숙하게 되었다.”

 



왕기사 장로 상윳따(S8)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