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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상윳따 - 제3장 십력품(Dasabala vagga. SN12:21-SN12:30)

실론섬 2014. 4. 29. 02:26

제3장 십력 품
Dasabala-vagga (SN 12.21-30)


dasabalasuttaṃ (SN 12.21-십력(十力.열 가지 힘) 경)

21.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열 가지 힘[如來十力]을 구족하고 네 가지 확신[두려움 없음.四無所畏]을 구족한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하고, 무리(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사자후를 토하고, 법의 바퀴[法輪]를 굴린다.

'이것이 물질적 요소[色.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적 요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감수작용[受.느낌]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지각작용[想.인식]이다. 이것이 지각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지각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작용[行]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식별작용[識.의식]이다. 이것이 식별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식별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이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이 있다. 행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갈애를 조건이 집착이 있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있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일어남이 있다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할 때 행들이 소멸한다. 행들이 소멸할 때 의식이 소멸한다. 의식이 소멸할 때 명색이 소멸한다. 명색이 소멸할 때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할 때 감각접촉이 소멸한다. 감각접촉이 소멸할 때 느낌이 소멸한다. 느낌이 소멸할 때 갈애가 소멸한다. 갈애가 소멸할 때 집착이 소멸한다. 집착이 소멸할 때 존재가 소멸한다. 존재가 소멸할 때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소멸이 있다.'라고.”

 

*네 가지 두려움 없음(catan vesarajjani)
①'올바로 깨달은 자라고 당신이 스스로 인정하더라도 그 법들은 올바로 깨달아진 것이 아니다'라고 나에 대해 사문이나 바라문 신 악마 범천이나 이 세상의 어떤 자라도 법에 따라 비난하려 해도, 나는 그것을 근거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을 근거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안온에 도달하고 두려움 없음을 성취한다.
②'번뇌를 부순자라고 당신이 스스로 인정하더라도 그 번뇌들은 부수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나에 대해 사문이나 바라문 신 악마 범천이나 이 세상의 어떤 자라도 법에 따라 비난하려 해도, 나는 그것을 근거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을 근거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안온에 도달하고 두려움 없음을 성취한다.
③'장애가 된 법이라고 정의된 것들이라도 탐닉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고 나에 대해 사문이나 바라문 신 악마 범천이나 이 세상의 어떤 자라도 법에 따라 비난하려 해도, 나는 그것을 근거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을 근거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안온에 도달하고 두려움 없음을 성취한다.
④'그 목적을 위해서 법이 설해져도 그것은 그 법을 실천한 자를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지 못한다'라고 나에 대해 사문이나 바라문 신 악마 범천이나 이 세상의 어떤 자라도 법에 따라 비난하려 해도, 나는 그것을 근거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을 근거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안온에 도달하고 두려움 없음을 성취한다.

*이후부터 본경에서 대부분을 색 = 물질적 요소, 수 = 감수작용, 상 = 지각작용, 행 = 형성작용, 식 = 식별작용으로 용어를 통일하여 번역하고자 함. 

 

dutiyadasabalasuttaṃ (SN 12.22-십력 경2)

22.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열 가지 힘[十力]을 구족하고 네 가지 확신을 구족한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하고, 무리에게 사자후를 토하고, 법의 바퀴[梵輪]를 굴린다. 

'이것이 물질적 요소이다. 이것이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다. 이것의 물질적 요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지각작용이다. 이것이 지각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지각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식별작용이다. 이것이 식별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식별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이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이 있다. 행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생겨남이 있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할 때 행들의 소멸이 있다. 행들이 소멸할 때 의식이 소멸한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소멸이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분명하고 열려있고 설명되었고 구속을 자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분명하고 열려있고 설명되었고 구속을 자른 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에서 믿음으로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이 ‘참으로 피부와 힘줄과 뼈만 남고, 몸에서 살과 피가 마르더라도 남자다운 힘과 남자다운 노력과 남자다운 정진으로 얻어야 하는 것을 얻지 않는 한 정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열심히 익히고 닦는 것은 적절하다.  

 

비구들이여, 삿된 불선법들에 둘러싸인 게으른 자는 괴롭게 머물고, 위대한 자신의 이상을 버려 버린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삿된 불선법들을 멀리 떠난 열심히 정진하는 자는 행복하게 머물고, 위대한 자신의 이상을 성취한다. 비구들이여, 저열한 것으로는 으뜸가는 것을 얻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으뜸가는 것으로 으뜸가는 것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이 청정범행은 최상의 음료이고, 또한 스승은 그대들의 곁에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열심히 익히고 닦도록 하여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익히고 닦아야 한다. 

'우리의 이 출가는 헛되지 않아서 결실이 있고 이익이 있을 것이다(수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마련해준(보시해준) 그들에게 많은 결실과 많은 이익이 있을 것이다.’라고. 참으로, 비구들이여,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보면서 방일하지 않을 때 성취할 수 있고, 남에게 이로운 것을 보면서 방일하지 않을 때 성취할 수 있고, 둘 모두에게 이로운 것을 보면서 방일하지 얺을 때 성취할 수 있다.”

 

upanisasuttaṃ (SN 12.23-기반 경)

23.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알고 보는 자에게 번뇌들의 부서짐을 나는 말한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에게가 아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 자에게 번뇌들의 부서짐이 있는가?
‘이것이 물질적 요소이다. 이것이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적 요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지각작용이다. 이것이 지각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지각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식별작용이다. 이것이 식별작용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식별작용의 사라짐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보는 자에게 번뇌들이 부서진다.

 

비구들이여, 부서짐에서 부서짐에 대한 지혜는 기반이(연유가)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부서짐에 대한 지혜의 기반은 무엇인가? 해탈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해탈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해탈의 기반은 무엇인가? 탐욕의 떠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탐욕의 떠남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탐욕의 떠남의 기반은 무엇인가? 염오(厭惡.싫어하여 떠남)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염오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염오의 기반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알고 봄[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있는 그대로 알고 봄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의 기반은 무엇인가? 삼매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삼매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삼매의 기반은 무엇인가? 행복(락.樂).즐거움)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행복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행복의 기반은 무엇인가? 편안함(경안.輕安)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편안함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편안함의 기반은 무엇인가? 기쁨(희열.喜悅)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기쁨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기쁨의 기반은 무엇인가? 환희(歡喜)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환희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환희의 기반은 무엇인가? 믿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믿음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믿음의 기반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괴로움도 기반이 있다고 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괴로움의 기반은 무엇인가? 태어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태어남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태어남의 기반은 무엇인가?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존재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존재의 기반은 무엇인가? 집착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집착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집착의 기반은 무엇인가? 갈애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갈애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갈애의 기반은 무엇인가? 느낌이라고 말해야 한다. ··· 감각접촉(촉.觸)이라고 말해야 한다. ··· 여섯 감각장소라고 말해야 한다. ··· 명색(名色)이라고 말해야 한다. ··· 의식이라고 말해야 한다. ··· 행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행도 기반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행의 기반은 무엇인가? 무명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무명을 기반으로 행들이, 행들을 기반으로 의식이, 의식을 기반으로 명색이, 명색을 기반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기반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기반으로 느낌이, 느낌을 기반으로 갈애가, 갈애를 기반으로 집착이, 집착을 기반으로 존재가, 존재를 기반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기반으로 괴로움이, 괴로움을 기반으로 믿음이, 믿음을 기반으로 환희가, 환희를 기반으로 희열이, 희열을 기반으로 편안함이, 편안함을 기반으로 즐거움이, 즐거움을 기반으로 삼매가, 삼매를 기반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기반으로 염오가, 염오를 기반으로 탐욕의 떠남이탐욕의 떠남을 기반으로 해탈이, 해탈을 기반으로 부서짐에 대한 지혜가 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산 위에 큰 비가 내리면 경사진 곳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려서 산의 협곡과 계곡과 지류를 채운다. 협곡과 계곡과 지류들을 채우면 다시 작은 연못을 채운다. 작은 연못을 채우면 다시 큰 연못을 채운다. 큰 연못을 채우면 다시 작은 강을 채운다. 작은 강을 채우면 다시 큰 강을 채운다. 큰 강을 채우면 다시 큰 바다를 채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무명을 기반으로 행들이, 행들을 기반으로 의식이, 의식을 기반으로 명색이, 명색을 기반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기반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기반으로 느낌이, 느낌을 기반으로 갈애가, 갈애를 기반으로 집착이, 집착을 기반으로 존재가, 존재를 기반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기반으로 괴로움이, 괴로움을 기반으로 믿음이, 믿음을 기반으로 환희가, 환희를 기반으로 희열이, 희열을 기반으로 편안함이, 편안함을 기반으로 즐거움이, 즐거움을 기반으로 삼매가, 삼매를 기반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기반으로 염오가, 염오를 기반으로 탐욕의 떠남이, 탐욕의 떠남을 기반으로 해탈이, 해탈을 기반으로 부서짐에 대한 지혜가 있다."

 

*기반(upanisa): 이에 대한 번역은 다양한다. 이유나 원인을 의미하는 위 번역 이외에도 연유, 전제, 인과관계로 번역하기도 한다.

 

aññatitthiyasuttaṃ (SN 12.24-외도 경)

24. 라자가하의 웰루와나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서 사리뿟따 존자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라자가하로 들어갔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은 탁발을 위해 라자가하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나는 이제 외도 유행승들의 숲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외도 유행승들의 숲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그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지도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에 대해 사문 고따마는 어떻게 설하며 어떻게 가르칩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하면 사문 고따마가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문 고따마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사문 고따마가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라고.

 

“도반들이여, '괴로움은 연기된 것(연기(緣起)된 괴로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연(緣)하여 괴로움이 있습니까?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겨납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도반들이여,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촉.觸)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여기서, 도반들이여,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을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도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가 외도 유행승들과 나눈 대화에 대해서 들었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는 라자가하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 외도

유행승들과 나눈 이 대화를 들은 대로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바르게 설명하였듯이, 아난다여, 나는 '괴로움은 연기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무엇을 연(緣)하여 괴로움이 있는가?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겨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는다.  

 

여기서, 아난다여,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긴다.    

 

여기서, 아난다여,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을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도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한때, 아난다여, 나는 여기 라자가하에서 웰루라나의 다람쥐 기르는 곳에 머물렀다. 그때 아난다여, 나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라자가하로 들어갔다. 아난다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탁발을 위해서 라자가하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나는 이제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그래서, 아난다여, 나는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나에게, 아난다여, 그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반 고따마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고따마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고따마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고따마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지도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고따마여, 여기에 대해 고따마 존자께서는 어떻게 설하며 어떻게 가르칩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하면 고따마 존자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고따마 존자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하였을 때, 아난다여, 나는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괴로움은 연기된 것'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연(緣)하여 괴로움이 있습니까?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겨납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설한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며, 법에 맞게 질책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습니다.

 

여기서, 도반들이여,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여기서, 도반들이여,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고 남도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라고.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이렇게 하나의 문장으로 모든 뜻을 설하여 말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뜻을 상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심오하게 하고 또한 심오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난다여, 그것을 말해 보아라.”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늙음∙죽음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이 일어남이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질받은 저는, 세존이시여, ‘도반이여, 늙음∙죽음은 태어남이 인연이고, 태어남이 일어남이고, 태어남에서 생기고, 태어남이 근원입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세존이시여,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태어남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이 일어남이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세존이시여, ‘도반이여, 태어남은 존재가 인연이고, 존재가 일어남이고, 존재에서 생기고, 존재가 근원입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세존이시여,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이여 아난다여, 존재는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이 일어남이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세존이시여, '도반이여, 존재는 집착이 인연이고, 집착이 일어남이고, 집착에서 생기고, 집착이 근원입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세존이시여,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집착은 ··· 도반 아난다여, 갈애는 ···  도반 아난다여, 느낌은 ···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감각접촉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질문을 받은 저는, 세존이시여, ‘도반들이여, 감각접촉은 여섯 감각장소가 인연이고, 여섯 감각장소가 자라남이고, 여섯 감각장소에서 생기고, 여섯 감각장소가 근원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할 때, 도반이여,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할 때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할 때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할 때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할 때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할 때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합니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소멸합니다.’라고,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세존이시여,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bhūmijasuttaṃ (SN 12.25-부미자 경)

25.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부미자 존자가 해거름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부미자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 스스로도 짓고 남도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에 대해 세존께서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세존을 거짓으로 세존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라고.

 

“도반 부미자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연기(緣起)된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연(緣)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습니까? 감각접촉(촉.觸)을 연(緣)하여 생겨납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세존을 거짓으로 세존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도반이여,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 스스로도 짓고 남도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깁니다. 

 

거기서 도반이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고 남도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와 부미자 존자기 함께 나눈 이 법담을 아난다 존자가 들었다. 그리고 라자가하에서 탁발을 한 뒤에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 온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 부미자 존자가 함께 나눈 이 법담을 들은 그대로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난다여, 사리뿟따가 바르게 말하였듯이, 아난다여,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연기된 것'을 말했다. 그러면 무엇을 연(緣)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는가? 감각접촉을 연하여 생겨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는다.

 

거기서, 아난다여,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고 남도 짓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하여 생긴다.    

 

거기서, 아난다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고 남도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몸이 있을 때, 아난다여, 몸의 의도적 행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몸이 있을 때, 몸을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말이 있을 때, 아난다여, 말의 의도적 행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마음이 있을 때, 아난다여,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스스로가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남들이 그에게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알아차리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스스로가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남들이 그에게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알아차리면서)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스스로가 마음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남들이 그에게 마음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알아차리면서) 마음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마음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이 법들에 대해 무명이 따라간다. 그러나 아난다여,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할 때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몸(몸의 형성작용)이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말이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마음이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터전이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기반이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장소가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과정이(이유가) 없게 된다."

 

upavāṇasuttaṃ (SN 12.26-우빠와나 경)

26.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우빠와나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우빠와나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고 남도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에 대해 세존께서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세존을 거짓으로 세존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라고. 

 

“우빠와나여,  '괴로움은 연기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 무엇을 연(緣)하여 괴로움이 있는가?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겨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빠와나여,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긴다. 업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도 감각접촉을 연(緣)하여 생긴다.

 

여기서, 우빠와나여,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하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을 선언하는 업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감각접촉이 없이 그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paccayasuttaṃ (SN 12.27-조건 경)
27. 사왓티에서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들이 있다. 행들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다. 의식의 조건으로부터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의 조건으로부터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감각장소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다. 감각접촉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다.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다.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다.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다.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함께 있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일어남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늙음과 죽음인가?

그렇고 그런 뭇삶의 무리 속에 그렇게 그런 뭇삶의 늙음, 노쇠함, 치아빠짐, 주름진 피부, 수명의 감소(나이의 다함), 감각기능[根]의 쇠퇴,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그렇고 그런 뭇삶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뭇삶의 사라짐, 이동, 파괴, 소멸, 죽음, 끝남, 온의 파괴, 신체의 소진, 목숨의 근의 단절(생명기능.命根),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늙음과 죽음이라고 한다. 태어남이 생겨나면 늙음∙죽음이 생겨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죽음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支聖道=팔정도]이 늙음∙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닦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태어남인가? 

이런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 저런 중생들의 유형에 따라 각각의 삶들이 태어남, 시작됨, 나타남, 자라남, 온의 드러남, 감각기관을 얻는 것 (육입처의 획득) - 이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존재가 생겨남으로써 태어남이 생겨나고, 존재가 소멸함으로써 태어남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태어남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존재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세가지 존재 즉 감각적 쾌락의 존재(욕계), 형상의 존재(색계), 무형상의 존재(무색계)가 있으니 이것을 존재라 부른다. 집착이

생겨남으로써 존재가 생겨나고 집착이 소멸함으로써 존재가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존재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집착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네 가지 집착,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삿된 계에 대한 집착, 자아이론(견해)에 대한 집착이 있으니, 이것을 집착이라고 부른다. 갈애가 생겨남으로써 집착이 생겨나고 갈애가 소멸함으로써 집착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집착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갈애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 즉 형상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법(마음현상)에 대한 갈애가 있으니 이것을 갈애라고 부른다. 느낌(감수)이 생겨남으로써 갈애가 생겨나고 느낌이 소멸함으로써 갈애가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갈애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느낌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 즉 시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청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후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미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촉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마음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이 있으니 이를 느낌이라고 한다. 접촉이 생겨남으로써 느낌이 생겨나고 접촉이 소멸함으로써 느낌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느낌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감각접촉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여섯 가지 접촉의 무리 즉 시각의 접촉, 청각의 접촉, 후각의 접촉, 미각의 접촉, 촉각의 접촉, 마음의 접촉이 있으니 이것을 접촉이라고 부른다. 여섯 감각장소가 생겨남으로써 감각접촉이 생겨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함으로써 감각접촉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감각접촉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여섯 감각장소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여섯 가지 감각 장소의 무리 즉 시각의 감각장소, 후각의 감각장소, 미각의 감각장소, 촉각의 감각장소, 마음의 감각장소가 있으니 이것을 여섯 감각장소라고 부른다. 명색이 생겨남으로써 여섯 감각장소가 생겨나고 명색이 소멸함으로써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여섯 감각장소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명색(明色.정신∙물질)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사유, 접촉, 숙고가 있으니 이것을 명(정신)이라고 하고 네 가지 물질의 요소 또는 네 가지 물질요소로 이루어진 형태를 물질(색)이라고 부른다. 의식이 생겨남으로써 명색이 생겨나고 의식이 소멸함으로써 명색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명색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의식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여섯 가지 의식 즉 시각의 의식, 청각의 의식, 후각의 의식, 미각의 의식, 촉각의 의식, 정신의 의식이 있으니 이를 의식이라고

부른다. 형성이 생겨남으로써 의식이 생겨나고 형성이 소멸함으로써 의식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의식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행(형성)들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세 가지 형성 즉 신체의 형성(신행.身行), 언어의 형성(구행.口行), 마음의 형성(심행.心行)이 있으니 이것을 행(형성)이라고 부른다. 무명이 생겨남으로써 형성이 생겨나고 무명이 소멸함으로써 형성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조건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조건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조건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조건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 때, 비구들이여, 이 성스러운 제자는 견해를 갖춘자라고도, 봄[見]을 갖춘자라고도, 이런 정법에 온 자라고도, '이런 정법을 본다.'라고도, 유학의 지혜를 갖춘자라고도, 유학의 명지를 갖춘자라고도, 법의 흐름을 얻은 자라고도, 꿰뚫음의 지혜를 가진 성자라고도, '불사(不死)의 문에 도달하여 머문다.'라고도 한다.”

 

bhikkhusuttaṃ (SN 12.28-비구 경)

28.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거기서 ···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안다. 태어남을 철저히 알고 ··· 존재를 철저히 알고 ··· 집착을 철저히 알고 ··· 갈애를 철저히 알고 ··· 느낌을 철저히 알고 ··· 감각접촉을 철저히 알고 ··· 여섯 감각장소를 철저히 알고 ··· 명색을 철저히 알고 ··· 의식을 철저히 알고··· 형성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늙음과 죽음인가?
그렇고 그런 뭇삶의 무리 속에 그렇게 그런 뭇삶의 늙음, 노쇠함, 치아빠짐, 주름진 피부, 수명의 감소(나이의 다함), 감각기능[根]의 쇠퇴,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그렇고 그런 뭇삶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뭇삶의 사라짐, 이동, 파괴, 소멸, 죽음, 끝남, 온의 파괴, 신체의 소진, 목숨의 근의 단절(생명기능.命根),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늙음과 죽음이라고 한다. 태어남이 생겨나면 늙음∙죽음이 생겨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죽음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支聖道=팔정도]이 늙음∙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닦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태어남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존재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집착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갈애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느낌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감각접촉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여섯 감각장소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명색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의식인가?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행(형성)들인가? 
그것들 가운데는 세 가지 형성 즉 신체의 형성(신행.身行), 언어의 형성(구행.口行), 마음의 형성(심행.心行)이 있으니 이것을 행(형성)이라고 부른다. 무명이 생겨남으로써 형성이 생겨나고 무명이 소멸함으로써 형성이 소멸한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태어남을 철저히 알고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물질을 ··· 의식을 ··· 행들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 때,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견해를 갖춘자라고도, 봄[見]을 갖춘자라고도, 이런 정법에 온 자라고도, '이런 정법을 본다.'라고도, 유학의 지혜를 갖춘자라고도, 유학의 명지를 갖춘자라고도, 법의 흐름을 얻은 자라고도, 꿰뚫음의 지혜를 가진 성자라고도, '불사(不死)의 문에 도달하여 머문다.'라고도 한다.”


samaṇabrāhmaṇasuttam (SN 12.29-사문∙바라문 경1)
29.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늙음∙죽음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사문 중에서 사문답지 못하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지 못하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도 아니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도 아니다. ··· 태어남을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명색을 ··· 의식을 ··· 형성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형성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형성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사문 중에서 사문답지 못하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지 못하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도 아니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도 아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늙음∙죽음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아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사문 중에서 사문답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이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이다. ···
태어남을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물질을 ··· 형성을 철저하게 알고, 형성의 일어남을 철저하게 알고, 형성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알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아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사문 중에서 사문답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이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이다.”


dutiyasamaṇabrāhmaṇasuttam (SN 12.30-사문∙바라문 경2)
30.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늙음∙죽음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면서도 늙음∙죽음을 완전히 건너서 머물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태어남을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물질을 ··· 의식을 ··· 형성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면서도 형성을 완전히 건너서 머물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늙음∙죽음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면 늙음∙죽음을 완전히 건너서 머물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다. ··· 태어남을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물질을 ··· 의식을 ··· 형성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형성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형성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면 형성을 완전히 건너서 머물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제3장 십력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