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12상윳따 - 제4장 깔라라캇띠야 품(Kalarkhattiya vagga. SN12:31-SN12:40)

실론섬 2014. 5. 2. 17:42

제4장 깔라라캇띠야 품
Kaḷarakhattiya-vagga (SN 12.31-40)

bhūtasuttaṃ (SN 12.31-되어있는 것(생겨난 것) 경1)

31.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젯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숫따니빠따』「도피안 품(parayane)」의「아지따의 질문」에서 이것을 말했다.

 

‘이 세상에는 법(진리)을 헤아려 아는 자들과 여기 여러 단계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존자시여, 질문받은 슬기로운 분께서는 그들의 삶의 자세(행위)에 대해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사리뿟따여, 이렇게 간략하게 말해진 이것의 상세한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했다.

 

두 번째도 세존께서 사리뿟따존자에게 말씀하셨다. ··· 두 번째도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했다. 세 번째도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숫따니빠따』「도피안 품」의「아지따의 질문」에서 이것을 말했다.

‘이 세상에는 법(진리)을 헤아려 아는 자들과 여기 여러 단계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존자시여, 질문받은 슬기로운 분께서는 그들의 삶의 자세(행위)에 대해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사리뿟따여, 이렇게 간략하게 말해진 이것의 상세한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세 번째도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했다.

 

*빠라야나에 있는 아지따의 질문(parayane ajitapanhe)이란 숫따니빠따 제5장 1. 학인(수행자) 아지타의 질문경을 말한다. 빠라야나는 도피안품, 피안으로 가는 품이라고 번역된다.
위의 게송은 숫타니빠따 1038번 게송이다. 법을 헤아려 아는 자(sankhatadhammase)는 해탈한 아라한을 말하고, 여러 단계의 수행자들(sekkha)은 유학, 학인을 말한다. 즉 아라한과 배우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아지따의 질문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1039번 게송으로 붓다께서 설하신 것은 다음과 같다.
(1039) '비구는 여러 가지 욕망에 빠져서는 안된다. 마음이 혼탁해서는 안된다
모든 법에 숙달하여 마음집중하며 비구는 유행하여라.'

*사리뿟따 존자는 왜 세 번째까지 침묵하고 있었는가? 그는 질문 때문에 당혹한 것이 아니라 세존의 의향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리뿟따는 숙고하기를 스승께서는 내가 배우거나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단계에 관해 이야기 하길 바란다. 이 질문에는 온[蘊]나 계[界]나 감각장소[處]나 조건[緣]의 형태를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스승의 의향을 파악하여 말씀드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다음 문장에서 ‘사리뿟따여, 그대는 ’이것은 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이것은 되어있는 것(오온.누적된 것)’이라고 보는가?" 

“세존이시여,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봅니다.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되어있는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기 위해서 닦습니다(실천합니다). 그것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바른 지혜로 봅니다. 그것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기 위해서 닦습니다. 그 자양분이 소멸할 때 되어 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봅니다. 그 자양분이 소멸할 때 되어 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소멸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기 위해 닦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유학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법을 헤아려 아는 자입니까?

세존이시여,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봅니다. ‘이것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되어있는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여 집착없이 해탈합니다. 그것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바른 지혜로 봅니다. 그것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여 집착 없이 해탈합니다. 그 자양분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봅니다. 그 자양분이 소멸할 때 되어 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소멸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여 집착 없이 해탈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법을 헤아려 아는 자(아라한)가 됩니다.

 

이렇게, 세존이시여,『숫따니빠따』「도피안 품」의「아지따의 질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법을 헤아려 아는 자들과 여기 여러 단계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존자여, 질문받은 슬기로운 분께서는 그들의 삶의 자세에 대해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세존이시여, 간략하게 말씀하신 이것의 상세한 의미를 저는 이렇게 압니다.”

 

“훌륭하고도 훌륭하구나, 사리뿟따여. 사리뿟따여,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다.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기 위해 닦는다. 그것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것은 음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기 위해서 닦는다. 그 자양분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다. 그 자양분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소멸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기 위해서 닦는다.

사리뿟따여, 이렇게 유학이 있다.

 

사리뿟따여, 어떻게 법을 헤아려 아는 자인가?

사리뿟따여,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다.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되어있는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여 취착 없이 해탈한다. 그것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것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여 집착 없이 해탈한다. 그 자양분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다. 그 자양분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본 뒤에 소멸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사라지고 소멸하여 해탈한다. 사리뿟따여, 이렇게 법을 헤아려 아는 자(아라한)가 된다.

 

이렇게, 사리뿟따여, 『숫따니빠따』「도피안 품」의「아지따의 질문」에서 말했다.

“이 세상에는 법을 헤아려 아는 자들과 여기 유학들이 있습니다.

존자여, 질문받은 슬기로운 분께서는 그들의 삶의 자세에 대해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사리뿟따여, 간략하게 말한 이것의 상세한 의미를 이렇게 보아야 한다.”

 

kaḷārasuttaṃ (SN 12.32-깔라라 경)

32.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깔라라캇띠야 비구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깔라라캇띠야 비구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몰리야팍구나 비구가 출가수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그 존자는 이 법과 율에서 안식(安息)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이 법과 율에서 안식을 얻습니까?”

“도반이여, 나는 여기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그러면 미래에도 그렇습니까, 도반이여?”

“도반이여, 나는 여기에 대해서 의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깔라라캇띠야 비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깔라라캇띠야 비구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가 궁극의 앎을 선언하였습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그러자 세존께서는 어떤 비구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내 이름으로 ‘도반 사리뿟따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릅니다.’라고 사리뿟따를 불러오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는 세존께 대답한 뒤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그 비구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참으로 그대가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궁극의 앎을 선언한 것이 사실인가?”

“세존이시여, 저는 그러한 단어와 그러한 문장으로 그런 뜻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리뿟따여,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 좋은 집안의 아들이 궁극의 앎을 선언했다면 그것에 선언된 것을 선언됨으로부터 보아야 한다.(궁극의 앎을 성취하여 그 설명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시키려면 늘 어떠한 법문으로 설명되어야 하는가?)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러한 단어와 그러한 문장으로 그런 뜻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스스로 궁극적인 앎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내가 질문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사리뿟따 존자가 스스로 궁극적인 앎을 선언하도록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사리뿟따여, 그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그대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볼 때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궁극의 앎을 선언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사리뿟따여, 이런 질문을 받은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그대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볼 때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궁극의 앎을 선언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도반이여, 태어남을 있게 하는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고 그 원인의 소멸에 대해 나는 원인이 소멸해했다고 압니다. 나는 원인이 소멸했다고 안 뒤에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분명히 압니다.’라고 이와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이와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사리뿟따의 대답은 해석하기가 난해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어떤 조건으로 있는 태어남은 그 조건이 소멸되면 소멸된 태어남의 조건에 따라 태어남에 의해 형성된 결과도 소멸한다.'라고 재차 해석할 수 있다.

 

“사리뿟따여, 그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태어남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사리뿟따여, 이런 질문을 받은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태어남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도반이여, 태어남은 존재[有]를 조건으로 하고, 존재를 원인으로 하고, 존재를 발생으로 하고, 존재를 바탕으로 합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리뿟따여, 그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존재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사리뿟따여, 이런 질문을 받은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존재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도반이여, 존재는 집착을 조건으로 하고, 집착을 원인으로 하고, 집착을 발생으로 하고, 집착을 바탕으로 합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리뿟따여, 그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집착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사리뿟따여, 이런 질문을 받은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집착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도반이여,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하고,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발생으로 하고, 갈애를 바탕으로 합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리뿟따여, 그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갈애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사리뿟따여, 이런 질문을 받은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집착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도반이여,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하고, 느낌을 원인으로 하고, 느낌을 발생으로 하고, 느낌을 바탕으로 합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리뿟따여, 그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볼 때 느낌 가운데 기쁨(환락)이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습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사리뿟따여, 이런 질문을 받은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볼 때 느낌 가운데 기쁨이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습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도반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어떤 셋입니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알면 느낌 가운데 기쁨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사리뿟따여. 사리뿟따여, 또한 이 방법은 요약해서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면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포함된다.’이다.   

 

“사리뿟따여, 그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해탈로부터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궁극의 앎을 선언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사리뿟따여, 이런 질문을 받은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그대는 어떤 해탈로부터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궁극의 앎을 선언합니까?’라고 이렇게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도반이여, 내적인 해탈로부터 모든 집착을 소멸하였습니다. 올바르게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머무는 자에게 번뇌들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그런 올바른 마음챙김으로 머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게을리 관찰하지 않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적인 해탈이란 '자신의 업으로부터의 해탈'을 의미한다. 
*'자신을 게을리 관찰하지 않는다(attanam ca navajanami).'라는 것은 사리뿟따는 자신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언제 마음챙김을 갖추고 머문다는 뜻이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사리뿟따여. 사리뿟따여, 또한, 이 방법은 요약해서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면  ‘사문에 의해 말해진 번뇌들에 대해 나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나에게서 버려졌다.'라고 나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이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을 말씀하신 뒤에 선서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서 나가신 지 오래되지 않아서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 첫 번째 질문을 하셨을 때 나는 먼저 그분의 의향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뒤늦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기뻐하셨을 때 나에게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세존께서 낮이 다가도록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나에게 이러한 뜻에 대해서 질문을 하시면 나는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낮이 다가도록 세존께 그 뜻을 설명해 드릴 것이다. ··· 밤새도록 ··· 하루 동안 ··· 이틀 동안 ··· 사흘 동안 ··· 나흘 동안 ··· 닷새 동안 ··· 엿새 동안 ··· 이레 동안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나에게 이러한 뜻에 대해서 질문을 하시면 나는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이레 동안 세존께 그 뜻을 설명해 드릴 것이다.‘라고.”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들은 깔라라캇띠야 비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깔라라캇띠야 비구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 첫 번째 질문을 하셨을 때 나는 먼저 그분의 의향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뒤늦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기뻐하셨을 때 나에게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세존께서 낮이 다가도록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나에게 이러한 뜻에 대해서 질문을 하시면 나는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낮이 다가도록 세존께 그 뜻을 설명해 드릴 것이다. ··· 밤새도록 ··· 하루 동안 ··· 이틀 동안 ··· 사흘 동안 ··· 나흘 동안 ··· 닷새 동안 ··· 엿새 동안 ··· 이레 동안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나에게 이러한 뜻에 대해서 질문을 하시면 나는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이레 동안 세존께 그 뜻을 설명해 드릴 것이다.‘라고.”

 

“비구여, 사리뿟따는 법의 요소[法界]를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법의 요소를 철저히 알았기 때문에, 만일 내가 낮이 다가도록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사리뿟따에게 이러한 뜻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사리뿟따는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낮이 다가도록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할 것이다. ··· 밤새도록 ··· 하루 동안 ···  이틀 동안 ··· 사흘 동안 ··· 나흘 동안 ··· 닷새 동안 ··· 엿새 동안 ··· 만일 내가 이레 동안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사리뿟따에게 이러한 뜻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사리뿟따는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이레 동안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할 것이다.”

 

ñāṇavatthusuttaṃ (SN 12.33-앎의 영역(토대) 경1)

33.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44가지 앎의 영역(토대)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설하겠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44가지 앎의 영역인가? 

늙음∙죽음에 대한 앎, 늙음∙죽음의 일어남에 대한 앎, 늙음∙죽음의 소멸에 대한 앎,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태어남에 대한 앎, 태어남의 일어남에 대한 앎, 태어남의 소멸에 대한 앎, 태어남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존재에 대한 앎, 존재의 일어남에 대한 앎, 존재의 소멸에 대한 앎, 존재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집착에 대한 앎, 집착의 일어남에 대한 앎, 집착의 소멸에 대한 앎, 집착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갈애에 대한 앎, 갈애의 일어남에 대한 앎, 갈애의 소멸에 대한 앎, 갈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느낌에 대한 앎, 느낌의 일어남에 대한 앎, 느낌의 소멸에 대한 앎,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감각접촉에 대한 앎, 감각접촉의 일어남에 대한 앎, 감각접촉의 소멸에 대한 앎, 감각접촉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여섯 감각장소에 대한 앎, 여섯 감각장소의 일어남에 대한 앎, 여섯 감각장소의 소멸에 대한 앎, 여섯 감각장소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명색에 대한 앎, 명색의 일어남에 대한 앎, 명색의 소멸에 대한 앎, 명색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의식에 대한 앎, 의식의 일어남에 대한 앎, 의식의 소멸에 대한 앎, 의식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행(형성)에 대한 앎, 행의 일어남에 앎 지혜, 행의 소멸에 대한 앎, 행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44가지 앎의 영역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늙음인가? 그렇고 그런 뭇삶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뭇삶의 늙음, 노쇠함, 치아 빠짐, 주름진 피부, 나이의 다함, 기능[根]의 쇠퇴 , 비구들이여,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죽음인가? 그렇고 그런 뭇삶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뭇삶의 사라짐, 이동, 파괴, 소멸, 죽음, 끝남, 오온의 파괴, 신체의 소진, 생명기능[命根]의 끊어짐, 비구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늙음∙죽음이라고 한다. 

태어남의 일어남으로부터 늙음∙죽음의 일어남이 있고, 태어남의 소멸로부터 늙음∙죽음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가지 성스러운 바른 길[八支聖道=팔정도]이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늙음∙죽음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늙음∙죽음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 때, 이것이 법에 대한 앎이다. 그는 보고 알고 시간이 걸리지 않게 얻고 성취하고 통찰한 이러한 법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누구든지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았던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같이 철저히 알았다누구든지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같이 철저히 알 것이다. 이것이 뒤따르는 앎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법에 대한 앎과 뒤따르는(수반하는) 앎이라는 청정하고 깨끗한 두 가지 앎이 있을 때, 비구들이여,  이것이 성스러운 제자는 견해를 갖춘 자라고도, 봄[見]을 갖춘 자라고도, 이런 정법에 도달한 자라고도, 이런 정법을 본다고도, 유학의 앎을 갖춘 자라고도, 유학의 명지를 갖춘 자라고도, 법의 흐름에 든 자라고도, 꿰뚫는 지혜를 가진 성자라고도, 불사(不死)의 문에 들어가서 머문다고도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태어남인가? 그렇고 그런 뭇삶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뭇삶의 태어남, 시작됨, 나타남, 자라남, 오온의 드러남, 감각장소[入處]를 얻음(획득),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존재의 일어남으로부터 태어남의 일어남이 있고, 존재의 소멸로부터 태어남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존재인가? 비구들이여, 세 가지 존재가 있다. 욕계의 존재(감각적 쾌락의 존재), 색계의 존재 (형상의 존재), 무색계의 존재(무형상의 존재)이다. 이것을 존재라 고 한다. 

집착의 일어남으로부터 존재의 일어남이 있고, 집착의 소멸로부터 존재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집착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집착이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삿된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 

갈애의 일어남으로부터 집착의 일어남이 있고, 갈애의 소멸로부터 집착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갈애인가?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六受身]가 있다. 형색에 대한 갈애(시각 접촉에서 생기는), 리에 대한 갈애(청각의 접촉), 냄새에 대한 갈애(후각의 접촉), 맛에 대한 갈애(미각의 접촉), 감촉에 대한 갈애(감촉의 갈애), 법에 대한 갈애(마음의 접촉)이다. 이것을 갈애라고 한다.

느낌의 일어남으로부터 갈애의 일어남이 있고, 느낌의 소멸로부터 갈애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인가?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가 있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코의 감각접촉에 생긴 느낌,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마음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이다. 이것을 느낌이라고 한다.

감각접촉의 일어남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고, 감각접촉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감각접촉(닿음)인가?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무리가 있다. 형색에 대한 감각접촉, 소리에 대한 감각접촉, 냄새에 대한 감각접촉, 맛에 대한 감각접촉, 감촉에 대한 감각접촉, 법(마음현상)에 대한 감각접촉이다. 이것을 감각접촉이라고 한다.

여섯 감각장소가 일어남으로부터 감각접촉의 일어남이 있고, 여섯 감각장소의 소멸로부터 감각접촉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여섯 감각장소(處. 터전)인가?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코의 감각장소, 혀의 감각장소, 몸의 감각장소, 마음의 감각장소이다. 이것을 여섯 감각장소라고 한다.

명색의 일어남으로부터 여섯 감각장소의 일어남이 있고, 명색의 소멸로부터 여섯 감각장소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명색인가? 느낌(受), 인식(想), 행(行), 마음의 식별(識)이 있으니 이것을 명(名)이라고 한다. 그리고 네 가지 근본물질과 네 가지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色)이라고 한다. 이것을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의식의 일어남으로부터 명색의 일어남이 있고, 의식의 소멸로부터 명색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의식인가?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의식의 무리가 있다.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몸의 의식, 마노(마음)의 의식이다. 이것을 의식이라고 한다.

행(형성작용)의 일어남으로부터 의식의 일어남이 있고, 행의 소멸로부터 의식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 

 

비구들이여, 무엇이 행(형성작용.의도적 행위)인가? 세 가지 형성작용이 있다. 몸의 형성작용(신행.身行), 말의 형성작용(구행.口行), 마음의 형성작용(심행.心行)이다. 이것을 행들이라고 한다. 

무명의 일어남으로부터 행의 일어남이 있고, 무명의 소멸로부터 행의 소멸이 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가지 성스러운 바른 길[八支聖道=팔정도]이 행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행들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행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행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이렇게 행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 때, 이것이 법에 대한 앎이다. 그는 보고 알고 시간이 걸리지 않게 얻고 성취하고 통찰한 이러한 법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누구든지 행들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았던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같이 철저히 알았다. 누구든지 행들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행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같이 철저히 알 것이다. 이것이 뒤따르는 앎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법에 대한 앎과 뒤따르는(수반하는) 앎이라는 청정하고 깨끗한 두 가지 앎이 있을 때, 비구들이여,  이것이 성스러운 제자는 견해를 갖춘 자라고도, 봄[見]을 갖춘 자라고도, 이런 정법에 도달한 자라고도, 이런 정법을 본다고도, 유학의 앎을 갖춘 자라고도, 유학의 명지를 갖춘 자라고도, 법의 흐름에 든 자라고도, 꿰뚫는 지혜를 가진 성자라고도, 불사(不死)의 문에 들어가서 머문다고도 불린다."

 

dutiyañāṇavatthusuttaṃ (SN 12.34-앎의 영역 경2)

34.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77가지 앎의 영역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잘 사고하라. 나는 설하겠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77가지 앎의 영역인가?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다는 앎, 태어남이 없을 때 늙음·죽음이 없다는 앎, 과거에도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었다는 앎, 태어남이 없을 때 늙음·죽음이 없었다는 앎, 이래에도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앎, 태어남이 없을 때 늙음·죽음이 없을 것이라는 앎, 또한 '그것이 법의 골격이다.'라는 앎도 부서짐의 법이고(부서지고야 마는 것) 무너짐의 법이고 사라짐의 법이고 소멸의 법이라는 앎이다.   

 

*'법의 골격'이라고 옮긴 원어는 dhammaṭṭhitiñāṇaṃ 이다. 한역에서는 이것을 법주지(法住智)라고 했다. Srp.ii.68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조건의 양상에 관한 앎(paccayakare nanam)이다. 조건의 양상은 법의 전개 내지 상태이기 때문에 법의 양상이라고 한다. 

*이 파괴에 종속되는 삶에 대한 앎은 Srp.ii.68에 따르면, '통찰에 대한 통찰(vipassanapativioassana)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즉 앞선 대상의 소멸을 인식하는 통찰지의 작용의 소멸에 대한 통찰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다는 앎 ···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다는 앎 ···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는 앎 ···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다는 앎 ··· 감각접촉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다는 앎 ··· 여섯 감각장소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다는 앎 ··· 명색의 조건으로부터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는 앎 ··· 의식의 조건으로부터 명색이 있다는 앎 ··· 행들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다는 앎 ···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들이 있다는 앎, 무명이 없을 때 행들이 없다는 앎, 과거에도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行)들이 있었다는 앎, 무명이 없었을 때 행들이 없었다는 앎, 미래에도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들이 있을 것이라는 앎, 무명이 없을 때 행들이 없을 것이라는 앎, 또한 '그것이 법의 골격이다.'라는 앎도 부서짐의 법이고(부서지고야 마는 것) 무너짐의 법이고 사라짐의 법이고 소멸의 법이라는 앎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77가지 앎의 영역이라고 불린다.”

 

avijjāpaccayasuttaṃ (SN 12.35-무명(無明)의 조건 경)
35.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비구들이여,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형성)들이 있고, 행들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고, 의식의 조건으로부터 명색이 있고, 묭색의 조건으로부터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고, 감각접촉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고,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고,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고,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고,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함께 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일어남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늙음∙죽음이며, 누구에게 이 늙음∙죽음이 있습니까(늙음.죽음은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여, 어떤 사람은 ‘무엇이 늙음∙죽음이며, 누구에게 이 늙음∙죽음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고, 비구여, 어떤 사람은 ‘늙고 죽는다는 것과 늙고 죽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뜻에서는 하나이고 단지 표현만 다른 것이다. 비구여,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청정범행의 삶은 없다). 또는, 비구여,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한 법을 설한다.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세존이시여, 무엇이 태어남이고, 누구에게 이 태어남이 있습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여, 어떤 사람은 '무엇이 태어남이고, 누구에게 이 태어남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고, 비구여, 어떤 사람은 '태어난다는 것과 태어나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고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뜻에서는 하나이고 단지 표현만 다른 것이다. 비구여,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청정범행의 삶은 없다). 또는, 비구여,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한 법을 설한다.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존재이고, 누구에게 이 존재가 있습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어떤 사람은 '무엇이 존재이고 , 누구에게 이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고, 비구여, 어떤 사람은 ‘존재한다는 것과 존재하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뜻에서는 하나이고 단지 표현만 다른 것이다. 비구여,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또는, 비구여,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한 법을 설한다.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다.'라고. ···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라고. ···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다.'라고. ··· '감각접촉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다.'라고. ··· '여섯 감각기관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 '명색의 조건으로부터 여섯 감각기관이 있다.'라고. ··· '의식의 조건으로부터 명색이 있다.'라고. ··· '행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다.'라고.

 

“세존이시여, 무엇이 행들이고, 누구에게 행들이 있습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어떤 사람은 '무엇이 행들이고, 누구에게 이 행들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고, 비구여, 어떤 사람은 ‘행들이라는 것과 행하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뜻에서는 하나이고 단지 표현만 다른 것이다. 비구여,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또는, 비구여,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한 법을 설한다.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들이 있다.'라고.

 

그러나 비구여,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진 소멸로부터 ‘무엇이 늙음∙죽음이고, 누구에게 이 늙음∙죽음이 있습니까(늙고 죽음은 누구의 것입니까)?’라거나, ‘늙고 죽는다는 것과 늙고 죽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거나, ‘생명은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거나 어떤 것이든 (그에게 있던) 왜곡됨(의혹), 동요함, 혼란스러움은 모두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비구여, 무명의 남김없이 사라진 소멸로부터 ‘무엇이 태어남이고, 누구에게 이 태어남이 있습니까?’라거나, ‘태어난다는 것과 태어나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거나,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거나 어떤 것이든 왜곡됨(의혹), 동요함, 혼란스러움은 모두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비구여, 무명의 남김없이 사라진 소멸로부터 ‘무엇이 존재이고, ··· 무엇이 집착이고, ··· 무엇이 갈애이고, ··· 무엇이 느낌이고, ··· 무엇이 감각접촉이고, ··· 무엇이 여섯 감각장소이고, ··· 무엇이 명색이고, ··· 무엇이 의식이고, ···

  

그리고 비구여, 무명의 남김없이 사라진 소멸로부터 ‘무엇이 행들이고, 누구에게 이 행들이 있습니까?’라거나, ‘행들이라는 것과 행들을 행하는 자와는 서로 다른다.’라거나,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거나 어떤 것이든 왜곡됨(의혹), 동요함, 혼란스러움은 모두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dutiyāvijjāpaccayasuttaṃ (SN 12.36-무명(無明)의 조건 경2)

36.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들이 있고, 행들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고,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일어남이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무엇이 늙음∙죽음이고, 누구에게 이 늙음∙죽음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고,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늙고 죽는다는 것과 늙고 죽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뜻에서는 하나고 단지 표현만 다른 것이다. 은 같고 단지 문장이 다를 뿐이다. 비구들이여, ‘생명이 몸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한 법을 설한다.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무엇이 태어남이고 ··· 무엇이 집착이고 ··· 무엇이 갈애이고 ··· 무엇이 느낌이고 ··· 무엇이 감각접촉이고 ··· 무엇이 여섯 감각장소이고 ··· 무엇이 명색이고 ··· 무엇이 의식이고 ···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무엇이 행들이고, 누구에게 이 행들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고, '행들이라는 것과 행들을 행하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뜻에서는 하나이고 단지 표현만 다른 것이다. 비구들이여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또는 비구들이여,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한 법을 설한다.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들이 있다.'라고.

 

그러나 비구들이여,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진 소멸로부터 ‘무엇이 늙음∙죽음이고, 누구에게 늙음∙죽음이 있습니까?’라거나, ‘늙고 죽는다는 것과 늙고 죽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거나, ‘생명은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거나 어떤 것이든 왜곡됨, 동요함, 혼란스러움은 모두 버려지고 뿌리가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무명의 남김없이 사라진 소멸로부터 ‘무엇이 태어남이고, ··· 어떤 것이든 왜곡됨, 동요함, 혼란스러움은 ··· 무엇이 존재이고 ···  무엇이 집착이고 ···  무엇이 느낌이고 ···  무엇이 감각접촉이고 ···  무엇이 여섯 감각장소이고 ··· 무엇이 명색이고 ···  무엇이 의식이고 ··· '무엇이 행들이고, 누구에게 이 행들이 있습니까?’라거나, ‘행들이라는 것과 행들을 행하는 자와는 서로 다르다.’라거나,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거나 어떤 것이든 왜곡됨, 동요함, 혼란스러움은 모두 버려지고 뿌리가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natumhasuttaṃ (SN 12.37-그대들의 것이 아님 경)

37.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이 몸은 그대들의 것도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이전의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며(형성된 것), 느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현재 몸은 언제나 자기 동일적인 본질이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본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몸은 과거의 삶의 연속적인 활동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다.
*'(몸은) 이전의 행위로 만들어진 것, 의도로 만들어진 것, 느낌으로 만들어진 것'에 대한 원문은 abhisankhatam abhisancetayitam vedayitam 이다. 붓다고싸는 이의 설명에서 abhisankhatam 은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 abhisancetayitam 은 의도를 기반으로 하는 것, vedayitam 은 느낌을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세가지 개념은 신체적 행위(신업)과 관계된 것으로 kamma(업)을 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다음과 같이 연기를 이치에 맞게 사고하여야 한다.

'이렇게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하면 이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행(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생겨나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소멸한다.”

 

cetanāsuttaṃ (SN 12.38-의도 경)

38.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사유하고, 잠재하기 때문에(잠재시킨다면) 그것은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조건)이 된다. 바탕이 있을 때 의식의  머묾이 있다(지속되게 된다). 의식이 머물고 증장하면 미래에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에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발생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발생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인가를) 의도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지만, (무엇인가를) 잠재시킨다면 그것은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바탕이 있을 때 의식의 머묾이 있다. 의식이 머물고 증장하면 미래에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에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발생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발생이 있다. 

 

비구들이여, 의도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고, 잠재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의식의 머묾을 위한 기반이 되지 못한다. 기반이 없을 때 의식은 머물지 않는다. 의식이 머물지 않고 증장하지 않을 때 미래에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을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소멸이 있다.”

 

dutiyacetanāsuttaṃ (SN 12.39-의도 경2)

39.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의도하고, 사유하고, 잠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의식의 머묾을 위한 기반이 된다. 기반이 있을 때 의식의 머묾이 있다. 의식이 머물고 증장할 때 명색이 출현한다(전개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 갈애 ··· 집착 ··· 존재 ··· 태어남 ···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발생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만약에 의도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지만, 잠재하면 그것은 의식의 머묾을 위한 기반이 된다. 기반이 있을 때 의식의 머묾이 있다. 의식이 머물고 증장할 때 명색이 출현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tatiyacetanāsuttaṃ (SN 12.40-의도 경3) 갈애 ··· 집착 ··· 존재 ··· 태어남 ···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발생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의도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고, 잠재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의식의 머묾을 위한 기반이 되지 못한다. 기반이 없을 때 의식은 머물지 않는다. 의식이 머물지 않고 증장하지 않을 때 명색은 출현하지 않는다. 명색의 소멸하면 소멸하면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tatiyacetanāsuttaṃ (SN 12.40-의도 경3) 

40.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의도하고, 사유하고, 잠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의식의 머묾을 위한 기반이 된다. 기반이 있을 때 의식의 머묾이 있다. 의식이 머물고 증장할 때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다. 마음의 기울어짐(성향)이 있을 때 오고 감이 있다. 오고 감이 있을 때 죽고 태어남이 있다.  죽고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발생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마음이 기울어짐'으로 번역한 원어는 nati 이다. Srp.ii.72 에 의하면, '좋아하는 형상과 그밖의 감각적 대상에 대한 지향의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고 감'의 원어는 agatigati 이다. Srp.ii.72에 의하면 '죽음으로 오는 것을 향해 다시 태어남의 의식이 가는 것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에 의도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지만, 잠재하면 그것은 의식의 머묾을 위한 기반이 된다. 기반이 있을 때 의식의 머묾이 있다. 의식이 머물고 증장할 때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다.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을 때 오고 감이 있다. 오고 감이 있을 때 죽고 태어남이 있다. 죽고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발생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의도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고, 잠재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의식의 머묾을 위한 기반이 되지 못한다. 기반이 없을 때 의식은 머물지 않는다. 의식이 머물지 않고 증장하지 않을 때 마음의 기울어짐이 없다. 마음의 기울어짐이 없을 때 오고 감이 없다. 오고 감이 없을 때 죽고 태어남이 없다.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미래에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제4장 깔라라캇띠야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