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12상윳따 - 제2장 자양(분) 품(Ahara vagga. SN12:11-SN12:20)

실론섬 2014. 4. 28. 22:04

제2장 자양(분) 품
Āhāra-vagga (SN 12.11-20)

 

āhārasuttaṃ (SN 12.11-자양분 경)
11.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자양분이 첫 번째이다. 감각접촉[觸食]에 의한 자양분이 두 번째이다. 마음의 의도(마음의 생각)에 의한 자양분이 세 번째이다. 의식에 의한 자양분이 네 번째이다.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네 가지 자양분(음식)이 있다.

*네가지 자양분(음식) : cattara ahara. 음식(자양)이라고 번역한 원어의 뜻은 '나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자양분의 의미가 취착을 뜻하는 upadana 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upadana 는 땔감을 의미하는데 ahara도 역시 불이나 등불의 자양분으로 땔감을 의미한다. '기름이 소모된다면 등불은 자양분이 없어 꺼질 것이다.' 이 경구에서 ahara가 갈애를 통해서 조건지어진다는 사실은 연기의 요소에서, 취착 즉 upadana가 갈애를 통해서 조건지어진다는 사실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덩어리진 자양분(kabalimkaro aharo), 감촉에 의한 자양분(phasso aharo), 마음의 생각에 의한 자양분(manosancetana aharo), 의식에 의한 자양분(vinnanam aharo)   
*이 경에서 '자양(ahara)'이 갈애를 통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사실은 연기의 고리에서 집착이 갈애를 통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Srp.ii.25-26에 의하면 자양은 조건들이다. 조건들은 자신의 효과를 자양하기 때문에 자양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존재를 위한 다른 조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가지 자양은 개인적인 생명의 지속성의 특별한 조건이 되기 때문에 자양이라고 한다.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은 거칠거나 비세한 물질의 자양으로 유지되는 신체적인 몸의 특별한 조건이 된다.
정신적인 몸에서는 접촉은 느낌의 특수한 조건이 되고, 의도는 의식의 특수한 조건이 되고, 의식은 명색의 특수한 조건이 된다.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은 음식을 삼키면 신체의 요소들을 산출하고, 접촉의 자양은 세 가지 느낌을 산출하고, 의도의 자양은 세 가지 존재를 산출하고, 의식의 자양은 다시 태어날 때의 명색을 산출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자양분은 무엇이 인연이고(원인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은 갈애가 인연이고, 갈애 때문에 자라나며, 갈애에서 생기고, 갈애가 기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이 갈애는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갈애는 느낌이 인연이고, 느낌 때문에 자라나며, 느낌에서 생기고, 느낌이 기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느낌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느낌은 감각접촉이 인연이고, 감각접촉 때문에 자라나며, 감각접촉에서 생기고, 감각접촉이 기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감각접촉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감각접촉은 여섯 감각장소가 인연이고, 여섯 감각장소 때문에 자라나며, 여섯 감각장소에서 생기고, 여섯 감각장소가 기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여섯 감각장소는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여섯 감각장소는 정신∙물질(명색)이 인연이고, 정신∙물질 때문에 자라나며, 정신∙물질에서 생기고, 정신·물질이 기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정신∙물질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정신∙물질은 의식이 인연이고, 의식 때문에 자라나며, 의식에서 생기고, 의식이 기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의식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의식은 행(의도적 행위)이 인연이고, 행 때문에 자라나며, 행에서 생기고, 행이 기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행들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행들은 무명이 인연이고, 무명 때문에 자라나며, 무명에서 생기고, 무명이 기원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들이, 행들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 태어남을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발생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로부터 행들의 소멸이, 행들의 소멸로부터 의식이 ··· 태어남의 소멸로부터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moḷiyaphaggunasuttaṃ (SN 12.12-몰리야팍구나 경)
12.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자양분이 첫 번째이다. 감각접촉[觸食]에 의한 자양분이 두 번째이다. 마음의 의도(마음의 생각)에 의한 자양분이 세 번째이다. 의식에 의한 자양분이 네 번째이다.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네 가지 자양분(음식)이 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몰리야팍구나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이 의식의 자양분을 먹습니까?”
“그것은 적절한(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먹는다.’고 말한다면, 그때 ‘그러면 세존이시여, 먹습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나에게 누가 ‘그러면 세존이시여, 이 의식의 자양분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적절한 설명을 할 것이다.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을 위한 조건이다. 그 존재(명색)가 있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팍구나는 음식이 있다면 그 음식을 먹는 자도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고 이렇게 질문을 드린 것이다. 만일 의식도 음식이라 부른다면 이러한 음식을 먹는 어떤 상주불변하는 자아가 의식의 배후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인 무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가정이다.
*팍구나(moliya phagguna). moliya는 moli(cula)의 형용사로 길게 자란 머리를 머리 위까지 따올려 보석으로 장식한 것을 말한다. 팍구나는 수행승이었다. 그는 언제나 비구니들에게 친절했고 비구들과의 토론에서 비구니편을 들었다고 한다. 후에 환속했다고 전한다.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감각접촉을 합니까(닿습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감각접촉을 한다(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감각접촉을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감각접촉을 합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에게 누가 ‘그러면 세존이시여, 어떤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적절한 설명을 할 것이다. 

‘여섯 감각장소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고, 감각접촉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다.’라고.”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경험합니까(느낍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느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느낀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누낍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나에게 누가 ‘그러면 세존이시여, 어떤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적절한 설명을 할 것이다. 

‘감각접촉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고,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다.’라고.”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갈애합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갈애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갈애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갈애합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나에게 누가 ‘그러면 세존이시여, 어떤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적절한 설명을 할 것이다.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고,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라고.”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집착합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집착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집착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집착합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나에게 누가 ‘그러면 세존이시여, 어떤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적절한 설명을 할 것이다.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고,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다.'라고."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존재한다고 .’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존재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나에게 누가 ‘그러면 세존이시여, 어떤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적절한 설명을 할 것이다.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고,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다."라고."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태어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태어난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그러면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나에게 누가 ‘그러면 세존이시여, 어떤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적절한 설명을 할 것이다.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고,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겨난다.'라고."

 

“그러나 팍구나여, 오직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없이 사라진 소멸로부터 감각접촉의 소멸이 있고, 감각접촉의 소멸로부터 느낌이 소멸이 있고, 느낌의 소멸로부터 갈애의 소멸이 있고, 갈애의 소멸로부터 집착의 소멸이 있고, 집착의 소멸로부터 존재의 소멸이 있고, 존재의 소멸로부터 태어남의 소멸이 있고, 태어남의 소멸로부터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苦蘊]의 소멸이 있다.”

 

pathanasamaṇabrāhmaṇasuttam (SN 12.13-사문∙바라문 경1)

13.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일어남(발생)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하며, ···  태어남을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물질을 ··· 의식을 ··· 형성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하면, 그러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문 중에서 사문답지 못하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지 못하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도 아니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며, ··· 태어남을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물질(명색)를 ··· 의식을 ··· 형성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면, 그러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문 중에서 사문답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이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이다.”

 

dutiyasamaṇabrāhmaṇasuttam (SN 12.14-사문∙바라문 경2)

14.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러한 법들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그들은 어떠한 법들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어떠한 법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어떠한 법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어떠한 법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하는가?”

그들은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하며, ··· 태어남을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물질(명색)을 ··· 의식을 ··· 형성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소멸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러한 법들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그들은 사문 중에서 사문답지 못하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지 못하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도 아니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도 아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러한 법들을 철저히 알고, 이러한 법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들은 어떠한 법들을 철저히 알고, 어떠한 법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어떠한 법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어떠한 법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아는가?

그들은 늙음∙죽음을 철저히 알고, ··· 태어남을 ··· 존재를 ··· 집착을 ··· 갈애를 ··· 느낌을 ··· 감각접촉을 ··· 여섯 감각장소를 ··· 정신.물질(명색) ···  의식을 ··· 형성(행)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형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안다. 그들은 이러한 법들을 철저히 알고, 이러한 법들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이러한 법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그들은 사문 중에서 사문답고 바라문 중에서 바라문답다. 또한 그들은 존경할만한 이들이며 사문됨과 바라문됨을 현재의 법 안에서 스스로 철저히 알았거나 겪어 알아 갖추어 머무는 것이다.”

 

kaccānagottasuttaṃ (SN 12.15-깟짜나곳따 경)

15.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깟짜나곳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깟짜나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正見.sammaditthi], 바른 견해’라고 불립니다. 어떤 점에서 바른 견해입니까?”

“깟짜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다. 그것은 '있다(有.유.atthi)'거나 '없다(無.무.natthi)'는 것이다. 그러나 깟짜나여, 세상에서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서 없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나여, 세상에서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서 있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삿된 견해로 인해] 천착과 집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집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을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나여, 이런 점에서 바른 견해이다.

 

깟짜나여, ‘모든 것은 있다.’라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나여, 이러한 양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이, 행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긴다(발생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할 때 행들이 소멸하고, 행들이 소멸할 때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할 때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할 때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할 때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할 때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할 때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할 때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할 때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할 때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라고.

 

dhammakathikasuttaṃ (SN 12.16-법을 설하는 자 경)

16.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는 자, 법을 설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법을 설하는 자가 됩니까(얼마만큼 법을 설하는 자입니까)?”라고. 

 

“만약 비구가 늙음∙죽음을 싫어하여 떠나고 탐욕을 사라지게 하고 소멸을 위하여 법을 설하면 ‘법을 설하는 비구’라고 말하기에(부르기에) 적절하다. 만약 비구가 늙음∙죽음을 싫어하여 떠나고 탐욕을 사라지게 하고 소멸을 위하여 실천하면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 비구'라고 말하기에 적절하다. 만약 비구가 늙음∙죽음을 싫어하여 떠나고 탐욕을 사라지게 하고 소멸로부터 집착 없이 해탈하면 ‘지금∙여기[現法]의 열반을 성취한 비구’라고 말하기에 적절하다.

 

만약 비구가 태어남을 ··· 만약 비구가 존재를 ··· 만약 비구가 집착을 ··· 만약 비구가 갈애를 ··· 만약 비구가 느낌을 ··· 만약 비구가 감각접촉을 ··· 만약 비구가 여섯 감각장소를 ··· 만약 비구가 정신.물질(명색)을 ··· 만약 비구가의식을 ··· 만약 비구가 행들을(형성들을) ··· 만약 비구가 무명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면 ‘법을 설하는 비구’라 말하기에 적절하다. 만약 비구가 무명을 싫어하여 떠나고 탐욕을 사라지게 하고 소멸을 위하여 실천하면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는 비구'라고 말하기에 적절하다. 만약 비구가 무명을 싫어하여 떠나고 탐욕을 사라지게 하고 소멸로부터 집착 없이 해탈하면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 비구’라고 말하기에 적절하다."

 

acelakassapasuttaṃ (SN 12.17-나체수행자 깟사빠 경)

1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기르는 곳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탁발을 위해서 라자가하로 들어가셨다. 나체수행자 깟사빠가 멀리서 오고 있는 세존을 보았다. 보고서 세존께 다가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쪽에 섰다. 한 쪽에 서서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만약 고따마 존자께서 우리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해주실 기회를 내어주신다면, 우리는 고따마 존자께 어떤 문제를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깟사빠여, 지금은 질문할 적당한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마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도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만약 고따마 존자께서 저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해주실 기회를 내어주신다면 저는 고따마 존자께 어떤 문제를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깟사빠여, 지금은 질문할 적당한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마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세 번째도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만약 고따마 존자께서 저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해주실 기회를 내어주신다면 저는 고따마 존자께 어떤 문제를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깟사빠여, 지금은 질문할 적당한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마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우리는 고따마 존자께 많은 것을 질문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깟사빠여, 원한는 것을 질문하십시오.”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깟사빠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깟사빠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깟사빠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원인없이 만들어집니까(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깟사빠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이란 없습니까?”

“깟사빠여,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깟사빠여, 괴로움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

“깟사빠여, 나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깟사빠여, 나는 괴로움을 압니다. 깟사빠여, 나는 괴로움을 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깟사빠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깟사빠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깟사빠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원인없이 만들어집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깟사빠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괴로움이란 것은 없습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깟사빠여,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깟사빠여, 괴로움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깟사빠여, 나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깟사빠여, 나는 괴로움을 압니다. 깟사빠여,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그가 짓고 그가 경험한다)'라고, 깟사빠여, 처음 시작하는 자에게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라는 이런 상견(vadam sassata)의 주장이 생깁니다.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다른 이가 짓고 다른 이가 경험한다)'라고, 깟사빠여, 느낌에 압도된 자에게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이런 단견(vadam cchedam)의 주장이 생깁니다깟사빠여, 이러한 양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해서 법을 설합니다. '무명의 조건으로부터 행들이 있다. 행들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생겨남이 있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함으로부터 행들의 소멸이 있다. 행들의 소멸로부터 의식의 소멸이 있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소멸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랄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법)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깟사빠여, 이전에 외도였던 자가 이 법과 율에 출가하여 구족계 받기를 원하면 그는 넉 달의 견습기간(심사기간)을 거쳐야 한다. 넉 달이 지나면 확고한 마음을 가진 비구들이 출가하게 하여(비구들이 동의하면)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한다. 물론 여기에 개인마다 차이가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전에 외도였던 자가 이 법과 율에 출가하여 구족계 받기를 원하면 그는 넉 달의 견습기간을 거쳐야 하고 넉 달이 지나 확고한 마음을 가진 비구들이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여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한다면, 저는 4년의 견습기간을 거치겠습니다. 4년이 지나고 확고한 마음을 가진 비구들이 출가하게 하여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해주십시오.”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의 앞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새로이 구족계를 받고 홀로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깟사빠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깟사빠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timbarukasuttaṃ (SN 12.18-띰바루까 경)

18.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띰바루까 유행승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띰바루까 유행승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자신이) 만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원인없이 만들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없습니까?”

“띰바루까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띰바루까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

“띰바루까여,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띰바루까여, 나는 참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압니다. 띰바루까여,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없습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띰바루까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띰바루까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띰바루까여, 나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띰바루까여,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압니다. 띰바루까여, 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시오.”

 

“‘그 느낌이 있고, 그가 경험한다(느낌과 느끼는 자가 동일하다)'라고, 띰바루까여,  처음부터 주장하는 자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느낌이 있고 , 다른 자가 경험한다(느낌과 느끼는 자가 자가 다르다)라고, 띰바루까여, 느낌에 압도된 자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띰바루까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해서 법을 설합니다. '무명의 조건을부터 행[行]들이 있다. 행들의 조건으로부터 의식[識]이 있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생겨남이 있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진 소멸로부터 행들의 소멸이 있다. 행들의 소멸로부터 의식의 소멸이 있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소멸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띰바루까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자 고따마여, 경이롭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놀랄만 합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혹은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법)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bālapaṇḍitasuttaṃ (SN 12.19-우현(愚賢) 경)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어리석은 자에게 이렇게 이 몸은 생겨난다. 이처럼 이 몸과 밖의 명색(名色)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한 쌍이 존재하게 된다.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 즉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육촉처.六觸處)가 있다.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에 닿거나 이들 가운데 하나에 닿아진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현명한 자에게 이렇게 이 몸은 생겨난다. 이처럼 이 몸과 밖의 명색(名色)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한 쌍이 존재하게 된다.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 즉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다.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에 닿거나 이들 가운데 하나에 닿아진 현명한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에 비해 현명한 자에게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방금 말씀하신 이 뜻을 직접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고 비구들은 그것을 잘 받아 지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세존을 받들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 이 몸이 생겨난다. 그 어리석은 자에게 무명이 제거되지 않고 갈애가 부서지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괴로움의 부서짐을 위해 바르게 청정범행을 닦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다른 몸을 받게 된다. 다른 몸을 받은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현명한 자에게 이 몸이 생겨난다. 그 현명한 자에게 무명이 제거되고 갈애는 부서진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자는 괴로움의 부서짐을 위해 바르게 청정범행을 닦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다른 몸을 받지 않는다. 다른 몸을 받지 않은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에서 벗어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청정범행의 실천(닦음), 어리석은 자에 비해 현명한 자에게 이것이 차이이고, 이것이 특별함이고, 이것이 다른 점이다.”

 

paccayasuttaṃ (SN 12.20-조건 경)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緣起)와 연기된 법들에 대해서 설하겠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연기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는 이 요소는 여래들의 출현이나 출현하지 않음을 원인으로(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는 안정되고 확실한 원리(사실)이며, 여기에서의 조건성이다(구체적으로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실현하였다(관통하였다). 완전하게 깨닫고 실현한 뒤 ‘보라!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공표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다.   

 

비구들이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는 ···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다.'라는 이 요소는 여래들의 출현이나 출현하지 않음을 원인으로(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는 안정되고 확실한 원리(사실)이며, 여기에서의 조건성이다(구체적으로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실현하였다(관통하였다). 완전하게 깨닫고 실현한 뒤 ‘보라!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공표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여기서 사실임, 사실을 벗어나지 않음, 다른 방법으로 생겨나지 않음, 여기에서의 조건성(이것의 조건 짓는 성질), 비구들이여, 이것이 연기라고 불린다.

 

*네 가지 연기에 대한 정의는 붓다고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①'그 법이 정해진 것(움직이지 않는)'이란 그 고전의 속성이 정해져 있으며 조건 없는 태어남과 늙고 죽음은 결코 없다는 뜻이다.
②'법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안정되고)'이란 조건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 존속한다는 뜻이다. 
③'법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확실한 원리)'이란 조건이 법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④'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여기에서의 조건성)'이란 이와 같이 늙고 죽음등의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연기된 법인가? 
비구들이여, 늙음∙죽음은 무상하고, 형성되었고(유위.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연기(緣起)되었고 ,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무너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비구들이여, 태어남은 무상하고, 형성되었고(유위.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연기(緣起)되었고 ,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무너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비구들이여, 존재는 무상하고, 형성되었고(유위.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연기(緣起)되었고 ,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무너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비구들이여, 집착은 ··· 비구들이여, 갈애는 ··· 비구들이여, 느낌은 ···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은 ··· 비구들이여, 여섯 감각장소는 ··· 비구들이여, 명색(名色)은 ··· 비구들이여, 의식은 ··· 비구들이여, 행은 ··· 비구들이여, 무명은 무상하고, 형성되었고(유위.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연기(緣起)되었고 ,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무너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연기된 법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것이 연기이다, 이것들이 연기된 법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기 때문에 그가 ‘참으로 나는 과거에 존재했을까? 존재하지 않았을까? 무엇으로 존재했을까? 어떻게 존재했을까? 무엇으로 존재한 뒤에 무엇이 되었을까?’라고 과거로 달려가거나, ‘참으로 나는 미래에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무엇으로 존재할까? 어떻게 존재할까 무엇으로 존재한 뒤에 다시 무엇이 될까?’라고 미래로 달려가거나, ‘참으로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중생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는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안으로 지금 현재를 의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그런 경우는 없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방법으로 성스러운 제자가 '이것이 연기이다. 이것이 연기된 법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기 때문이다.”

 

 

제2장 자양(분)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