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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상윳따 - 깟사빠 상윳따 (Kassapa samyutta. SN16:1-SN16:13)

실론섬 2014. 5. 6. 18:07

제16주제(S16) 깟사빠 상윳따

Kassapa-saṁyutta (SN 16.1-13)

santuṭṭhasuttaṃ (SN 16.1-만족 경)

144.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깟사빠는 어떤 의복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의복으로도 만족하는 것에 대해 칭찬한다. 그는 의복을 원인으로 삿되고 부적절한 방법을 저지르지 않는다(의존하지 않는다). 의복을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의복을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마음 빼앗기지 않고, 묶이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 벗어남의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용한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는 어떤 탁발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탁발음식으로도 만족하는 것에 대해 칭찬한다. 그는 탁발음식을 원인으로 삿되고 부적절한 방법을 저지르지 않는다. 탁발음식을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탁발음식을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마음 빼앗기지 않고, 묶이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 벗어남의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용한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는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고,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는 것에 대해 칭찬한다. 그는 거처를 원인으로 삿되고 부적절한 방법을 저지르지 않는다. 거처를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거처를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마음 빼앗기지 않고, 묶이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 벗어남의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용한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는 어떤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으로도 만족하는 것에 대해 칭찬한다. 그는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원인으로 삿되고 부적절한 방법을 저지르지 않는다.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마음 빼앗기지 않고, 묶이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 벗어남의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용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렇게 닦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의복으로도 만족할 것이고, 어떤 의복으로도 만족하는 것에 대해 칭찬할 것이다. 우리는 의복을 원인으로 삿되고 부적절한 방법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의복을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의복을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마음 빼앗기지 않고, 묶이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 벗어남의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탁발음식으로도 만족할 것이고 ··· 우리는 어떤 거처로도 만족할 것이고 … 우리는 어떤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으로도 만족할 것이고, 어떤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으로도 만족하는 것에 대해 칭찬할 것이다. 우리는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을 원인으로 삿되고 부적절한 방법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을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을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마음 빼앗기지 않고, 묶이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 벗어남의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용할 것이다.’라고.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나는 깟사빠나 깟사빠와 같은 자에 의해서[본보기로 하여] 그대들을 가르칠 것이다. 가르침을 받은 그대들은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anottappīsuttaṃ (SN 16.2-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는 자 경)
14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마하깟사빠 존자와 사리뿟따 존자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는 저녁 무렵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사빠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이와같이 말했다.

 

"도반 깟사빠여, 노력하지 않고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는 자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할 수 없고 열반을 실현할 수 없고 위없는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성취할 수 없으며, 노력하고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는 자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고 위없는 유가안온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도반 사리뿟따여, 어떻게 해서 노력하지 않고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는 자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할 수 없고 열반을 실현할 수 없고 위없는 유가안온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리고 도반이여, 어떻게 해서 노력하고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는 자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고 위없는 유가안온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여기, 도반 깟사빠여, 비구는 ‘아직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노력하지 않고, ‘이미 나에게 일어난 악한 불선법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노력하지 않고, ‘아직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선법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노력하고, ‘이미 나에게 일어난 선한 법들이 소멸하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 도반이여, 노력하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어떻게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는 자입니까?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미 나에게 일어난 악한 불선법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직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선법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미 나에게 일어난 선법들이 소멸하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고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도반이여, 부끄러월 할 줄 아는 힘이 없는 자입니다. 도반이여, 노력하지 않고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는 자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할 수 없고 열반을 실현할 수 없고 위없는 유가안온을 성위할 수 없습니다.  

 

또한 도반이여, 어떻게 노력합니까?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아직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노력하고, ‘이미 나에게 일어난 악한 불선법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노력하고, ‘아직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선법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노력하고, ‘이미 나에게 일어난 선법들이 소멸하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노력합니다. 이렇게, 도반이여, 노력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어떻게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습니까?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아직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부끄러워하고, ‘이미 일어난 악한 불선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부끄러워하고, ‘아직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선법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그것은 나에게 손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부끄러워하고, ‘이미 나에게 일어난 선법들이 소멸하게 되면 그것은 손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여 부끄러워 합니다. 이렇게, 도반이여,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는 자입니다. 도반이여, 노력하고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는 자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고 위없는 유가안온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candūpamasuttaṃ (SN 16.3-달의 비유 경)
146.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달의 비유처럼, 그대들은 몸을 단속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재가자의 집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신중하게 재가자의 집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사람이 몸을 단속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허물어져 가는 우물이나 산의 절벽이나  건너기 힘든 강을 볼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달의 비유처럼, 그대들은 몸을 단속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재가자의 집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신중하게 재가자의 집을 찾아야 한다. 

 

*달의 비유 : “달은 하늘을 가로질러 가면서 그 누구와도 친교를 맺지 않고, 애정이나 애착을 가지지 않고, 좋아함이나 바람을 가지지도 않고, 그 누구도 사로잡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달을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도 그 누구와도 친교를 맺지 않고, 애정이나 애착을 가지지 않고, 좋아함이나 바람을 가지지도 그 누구도 사로잡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마치 많은 사람들이 달을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듯이 그대들도 이와 같이 신도 집을 방문해야 한다. 나아가서 달이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을 받하듯이, 그대들도 오염원의 어둠을 몰아내고 지혜의 광명을 발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 뜻을 봐야 한다.(SA. ii.165) 

 

비구들이여, 깟사빠는 달의 비유처럼, 몸을 단속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재가자의 집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신중하게 재가자의 집을 찾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비구가 재가자의 집을 방문하기에 적합한가?”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요.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허공에 손을 흔드셨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이 손은 허공에 걸리지 않고 붙잡히지 않고 묶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이든지 재가자의 집을 방문하는 비구라면 재가자의 집에 대해 ‘이득을 바라는 사람은 이득을 얻게 되기를! 공덕을 바라는 사람은 공덕을 짓게 되기를!’이라면서 마음이 걸리지 않고 붙잡히지 않고 묶이지 않아야 한다. 남들의 이득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이득인것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이런 비구가 재가자의 집을 방문하기에 적합하다. 

 

비구들이여, 재가자의 집을 찾는 깟사빠는 재가자의 집에 대해 ‘이득을 바라는 사람은 이득을 얻게 되기를! 공덕을 바라는 사람은 공덕을 짓게 되기를!’이라면서 마음이 마음이 걸리지 않고 붙잡히지 않고 묶이지 않는다. 남들의 이득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이득인것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것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의 설법이 청정하지 못하며, 어떤 비구의 설법이 청정한가?”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요.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저들이 내가 설하는 법을 듣기를. 그리고 들은 뒤에 법에 대해 청정한 믿음을 내기를. 그리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면 나에게 청정한 믿음의 표시를 드러내기를!'이라는 마음으로 남에게 법을 설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의 설법은 청정하지 못하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것이며, 지혜있는 자는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내가 설하는 법을 듣기를. 그리고 들은 뒤에 법을 알기를. 그리고 안 뒤에 그대로 실천하기를!’이라는 마음으로 남에게 법을 설한다. 이렇게 법의 바른 성품(법이 본래부터 수승함)을 연(緣)하여 남들에게 법을 설한다. 연민하는 마음을 내고, 동정하는 마음을 내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 남들에게 법을 설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의 설법은 청정하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는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있는 자는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내가 설하는 법을 듣기를. 그리고 들은 뒤에법을 알기를. 법을 안 뒤에 그대로 실천하기를!’이라는 마음으로 남에게 법을 설한다. 이렇게 법의 바른 성품을 연(緣)하여 남들에게 법을 설한다. 연민하는 마음을 내고, 동정하는 마음을 내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 남들에게 법을 설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깟사빠나 깟사빠와 같은 비구를 본보기로 하여 그대들을 가르칠 것이다. 가르침을 받은 그대들은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kulūpakasuttam (SN 16.4-재가자 집 방문 경)
147.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비구가 재가자 집을 방문하기에 적합하며, 어떤 비구가 재가자 집을 방문하기에 적당하지 않은가?”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요.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재가자(신도) 집을 방문하기'는 kulupaka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는 '재가자 집을 방문하는 자(kula-gharanam upaganta)'(SA.ii.170)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로 앞의 「달의 비유 경」에 나타난 재가자의 집을 찾는다(방문하다)(kulani upasankamati)를 옮긴 것인데 재가자들에게 다가가다로 직역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다.

‘신도들은 나에게 보시를 하지 다시 가져가 버리지 않기를, 나에게 많이 보시를 하지 적게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좋은 것을 보시하지 버릴만한 것을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즉시 보시를 하지 머뭇거리며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성심으로 보시를 하지 마지못해서 보시하지 않기를.’라고.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비구에게 만일 그들이 보시를 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낙담하게 된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다.

‘신도들은 나에게 보시를 하지 다시 가져가 버리지 않기를, 나에게 많이 보시를 하지 적게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좋은 것을 보시하지 버릴만한 것을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즉시 보시를 하지 머뭇거리며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성심으로 보시를 하지 마지못해서 보시하지 않기를.’라고.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방문한 비구에게 만일 그들이 적게 보시하고 많이 보시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낙담하게 된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다.

‘신도들은 나에게 보시를 하지 다시 가져가 버리지 않기를, 나에게 많이 보시를 하지 적게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좋은 것을 보시하지 버릴만한 것을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즉시 보시를 하지 머뭇거리며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성심으로 보시를 하지 마지못해서 보시하지 않기를.’라고.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비구에게 만일 그들이 버릴만한 것을 보시하고 좋은 것을 보시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낙담하게 된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다.

‘신도들은 나에게 보시를 하지 다시 가져가 버리지 않기를, 나에게 많이 보시를 하지 적게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좋은 것을 보시하지 버릴만한 것을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즉시 보시를 하지 머뭇거리며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성심으로 보시를 하지 마지못해서 보시하지 않기를.’라고.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비구에게 만일 그들이 머뭇거리고 즉시 보시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낙담하게 된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는 재가자 집을 방문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다.

‘내가 어떻게 재가자의 집에 가서 ‘신도들은 나에게 보시를 하지 다시 가져가 버리지 않기를, 나에게 많이 보시를 하지 적게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좋은 것을 보시하지 버릴만한 것을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즉시 보시를 하지 머뭇거리며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성심으로 보시를 하지 마지못해서 보시하지 않기를.’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시를 받는단 말인가?’라고.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비구에게 만일 그들이 보시를 하지 않더라도 그 비구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비구에게 만일 그들이 적게 보시하고 많이 보시하지 않더라도
그 비구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비구에게 만일 그들이 조잡한 것을 보시하고 좋은 것을 보시하지 않더라도 그 비구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비구에게 만일 그들이 머뭇거리고 즉시 보시하지 않더라도 그 비구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가 재가자 집을 방문하기에 적합하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는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다.

‘내가 어떻게 재가자의 집에 가서 ‘신도들은 나에게 보시를 하지 다시 가져가 버리지 않기를. 나에게 많이 보시를 하지 적게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좋은 것을 보시하지 버릴만한 것을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즉시 보시를 하지 머뭇거리며 보시하지 않기를. 나에게 성심으로 보시를 하지 마지못해서 보시하지 않기를.’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시를 받는단 말인가?’라고.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깟사빠에게 만일 그들이 보시를 하지 않더라도 깟사빠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깟사빠에게  만일 그들이 적게 보시하고 많이 보시하지 않더라도
깟사빠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깟사빠에게 만일 그들이 버릴만한 것을 보시하고 좋은 것을 보시하지 않더라도 깟사빠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재가자 집을 방문한 깟사빠에게 만일 그들이 머뭇거리고 즉시 보시하지 않더라도 깟사빠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깟사빠 비구를 본보기로 하거나 깟사빠와 같은 비구를 모범으로 하여 그대들에게 설법 할 것이다. 그대들은 가르침을 받아서 이와 같이 되기 위해서 닦고 익혀야 한다.”

 

jiṇṇasuttaṃ (SN 16.5-늙은이 경)
14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웰루와나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하깟사빠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깟사빠여, 그대는 이제 늙었다. 그리고 그대가 입고 있는 거친 삼베로 만든 낡은 분소의들은 무겁다. 그러므로, 깟사빠여, 그대는 장자들이 보시하는 가사를 수용하고, 공양 초대에 응하여 공양을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라.”라고.

 

*'너무 무겹다(nibbasanani)'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전에 세존께서 입고 버리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SA.ii.170) 즉 분소의 자체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세존께서 수행의 상징으로 주신 것이기에 아주 귀중한 것이라고 주석서는 해석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숲에 머무는 자였고 숲에 머무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자였고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분소의를 입는 자였고 분소의를 입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삼의(三衣)만 수용하는 자였고 삼의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원하는 것이 적었고 원하는 것이 적은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만족하였고[知足] 만족하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았고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았고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열심히 정진하였고 열심히 정진하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깟사빠여, 그대는 어떤 이익을 보기에 오랜 세월 동안 숲에 머무는 자였고 숲에 머무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자였고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분소의를 입는 자였고 분소의를 입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삼의(三衣)만 수용하는 자였고, 삼의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원하는 것이 적었고 원하는 것이 적은 삶을 칭송하였으며, 만족하였고 만족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았으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았고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열심히 정진하였고 열심히 정진하는 삶을 칭송하였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두 가지 이익을 보아서 오랜 세월 동안 숲에 머무는 자였고 숲에 머무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자였고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분소의를 입는 자였고 분소의를 입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삼의(三衣)만 수용하는 자였고 삼의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원하는 것이 적었고 원하는 것이 적은 삶을 칭송하였으며, 만족하였고 만족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았고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았고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열심히 정진하였고 열심히 정진하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보기 때문이고, 둘째는 '후대 사람들이 견해를 뒤따르기를'이라는 후대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 때문입니다. ‘참으로 세존을 따라서 깨달은 제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숲에 머무는 사람들이었고 숲에 머무는 삶을 칭송하였다.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다. 분소의를 입는 사람들이었고 분소의를 입는 삶을 칭송하였다. 삼의만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삼의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다. 원하는 것이 적었고 원하는 것이 적은 삶을 칭송하였다. 만족하였고 만족하는 삶을 칭송하였다.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았고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삶을 칭송하였다.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았고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삶을 칭송하였다. 열심히 정진하였고 열심히 정진하는 삶을 칭송하였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그대로를 위해 실천할 것이고, 그들에게 그것은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두 가지 이익을 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숲에 머무는 자였고 숲에 머무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자였고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분소의를 입는 자였고 분소의를 입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삼의만 수용하는 자였고 삼의만 수용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원하는 것이 적었고 원하는 것이 적은 삶을 칭송하였으며, 만족하였고 만족하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았고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았고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삶을 칭송하였으며, 열심히 정진하였고 열심히 정진하는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깟사빠여. 깟사빠여, 참으로 그대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고 많은 사람에게 행복이 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실천한다. 그렇다면, 깟사빠여, 그대는 거친 삼베로 만든 이 낡은 분소의를 입고, 탁발행을 하여라. 그리고 숲에서 머물러라.”

 

ovādasuttaṃ (SN 16.6-가르침 경)

149. 라자가하의 웰루와나에서(웰루와나에서 설해짐). 그 무렵 마하깟사빠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깟사빠여, 비구들을 가르쳐라.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라. 깟사빠여, 나 또는 그대가 비구들을 가르쳐야 하고, 나 또는 그대가 비구들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라고.

“세존이시여, 지금의 비구들은 훈계하기 어려운 성품들을 지니고 있고, 인욕하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임에 능숙하지 않습니다.세존이시여, 저는 아난다에게 믿음을 가지고 머무는 반다 비구와 아누룻다에게 믿음을 가지고 머무는 아비지까 비구가 서로간의 배움의 뛰어남을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시오, 비구여. 우리 중에 누가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잘 말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그러자 세존께서는 어떤 비구에게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나의 이름으로 아난다에게 믿음을 가지고 머무는 반다 비구와 아누룻다에게 믿음을 가지고 머무는 아비지까 비구에게 ‘비구들이여,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르십니다.’라고 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께 대답한 뒤 그 비구들에게 갔다. 가서는 그 비구들에게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르십니다.”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들은 그 비구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서로서로 경쟁하여 말하기를 ‘오시오, 비구여. 우리 중에 누가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잘 말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서로 간에 뛰어남을 말한 것이 사실인가?”라고.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오시오, 비구여, 누가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잘 말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서로 간에 배움의 뛰어남을 말하라'라고 설한 법을 알고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그러한 법을 설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은 자들이여,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기 때문에 이처럼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한 그대들이 이제 ‘오시오, 비구여, 누가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잘 말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서로 간에 배움의 뛰어남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러자 그 비구들은 세존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한 뒤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가 어리석고 미혹하고 신중하지 못해서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이처럼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한 저희가 ‘오시오, 비구여, 누가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잘 말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서로 간에 배움의 뛰어남을 말한 저희에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희가 미래에 다시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저희들 자신을 단속할 수 있도록 저희의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미래의 단속을 위해서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주십시오).”라고.

 

“참으로,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미혹하고 신중하지 못해서 이처럼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한 그대들이 ‘오시오, 비구여, 누가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잘 말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서로 간에 배움의 뛰어남을 말한 그대들은 잘못을 범했다(저질렀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본 뒤에 법답게 바로잡았기 때문에 그대들을 우리는 받아들인다. 비구들이여, 이 성스러운 율에서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본 뒤에 법답게 바로잡고, 미래에 단속하는자는 향상한다.”

 

dutiyaovādasuttaṃ (SN 16.7-가르침 경2)
150. 라자가하의 웰루와나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하깟사빠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깟사빠여, 비구들을 가르쳐라.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라. 깟사빠여, 나 또는 그대가 비구들을 가르쳐야 하고, 나 또는 그대가 비구들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라고.
“세존이시여, 지금의 비구들은 훈계하기 어려운 성품들을 지니고 있고, 인욕하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임에 능숙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누구든지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노력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지혜가 없는 자에게,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 있어서 퇴보가 기대되고 향상이 기대되지 않습니다(늘어남이 아니라 줄어듦이 예상됩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그믐으로 가는 보름 동안에 (하현)달은,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색은 퇴색되고, 원둘레는 줄어들고, 빛은 약해지고, 높이와 둘레는 줄어 듭니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노력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지혜가 없는 자에게,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퇴보가 기대되고 향상이 기대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쇠퇴)이고, 세존이시여,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세존이시여,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세존이시여, '게으른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세존이시여,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세존이시여, '화내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바로 퇴보이고, 세존이시여, '원한을 품은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세존이시여, '가르치는 비구들이 없다'라는 것이 퇴보입니다.

 

세존이시여, 누구든지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노력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지혜가 있는 자에게,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향상이 기대되고 퇴보가 기대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보름으로 가는 보름 동안에 (상현)달은,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색깔이 선명해지고, 원둘레는 늘어나고, 빛은 강해지고, 높이와 둘레는 늘어납니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누구든지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노력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지혜가 있는 자에게,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향상이 기대되고 퇴보가 기대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세존이시여,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세존이시여,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세존이시여,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세존이시여,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세존이시여, '화내지 않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세존이시여, '원한을 품지 않은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세존이시여, '가르치는 비구들이 있다'라는 것이 향상입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깟사빠여. 누구든지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노력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지혜가 없는 자에게,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퇴보가 기대되고 향상이 기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그믐으로 가는 보름 동안에 달은, 밤이 오건 낮이 오건,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색은 퇴색되고, 원둘레는 줄어들고, 빛은 약해지고, 높이와 둘레는 줄어든다. 이처럼, 깟사빠여,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노력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지혜가 없는 자에게,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퇴보가 기대되고 향상이 기대되지 않는다.

 

깟사빠여,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쇠퇴)이고, 깟사빠여,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깟사빠여,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깟사빠여, '게으른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깟사빠여,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깟사빠여, '화내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바로 퇴보이고, 깟사빠여, '원한을 품은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퇴보이고, 깟사빠여, '가르치는 비구들이 없다'라는 것이 퇴보이다. 

 

깟사빠여, 누구든지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노력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지혜가 있는 자에게,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향상이 기대되고 퇴보가 기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보름으로 가는 보름 동안에 (상현)달은,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색깔이 선명해지고, 원둘레는 늘어나고, 빛은 강해지고, 높이와 둘레는 늘어난다. 이처럼, 깟사빠여, 누구든지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노력이 있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지혜가 있는 자에게,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향상이 기대되고 퇴보가 기대되지 않는다.  

깟사빠여,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깟사빠여,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깟사빠여,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깟사빠여,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깟사빠여,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깟사빠여, '화내지 않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깟사빠여, '원한을 품지 않은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향상이고, 깟사빠여, '가르치는 비구들이 있다'라는 것이 향상이다."

 

tatiyaovādasuttaṃ (SN 16.8-가르침 경3)
151. 라자가하의 웰루와나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하깟사빠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깟사빠여, 비구들을 가르쳐라.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라. 깟사빠여, 나 또는 그대가 비구들을 가르쳐야 하고, 나 또는 그대가 비구들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라고.
“세존이시여, 지금의 비구들은 훈계하기 어려운 성품들을 지니고 있고, 인욕하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임에 능숙하지 않습니다."

“그러하다, 깟사빠여, 예전에 장로 비구들은 숲에 머물면서 숲에 머무는 것을 칭송하였고, 탁발하면서 탁발하는 것을 칭송하였고, 분소의를 입으면서 분소의를 입는 것을 칭송하였고, 세 벌의 가사로 살면서 세 벌의 가사로 사는 것을 칭송하였고, 원하는 것이 적으면서 원하는 것이 적다는 것을  칭송하였고, 만족하면서 만족하는 것을 칭송하였고,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으면서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것을 칭송하였고,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으면서 교제하지 않는 것을 칭송하였고, 열심히 정진하면서 열심히 정진하는 것을 칭송하였다.

 

그 당시, 숲에 머물면서 숲에 머무는 것을 칭송하였고, 탁발하면서 탁발하는 것을 칭송하였고, 분소의를 입으면서 분소의를 입는 것을 칭송하였고, 세 벌의 가사로 살면서 세 벌의 가사로 사는 것을 칭송하였고, 원하는 것이 적으면서 원하는 것이 적다는 것을  칭송하였고, 만족하면서 만족하는 것을 칭송하였고,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으면서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것을 칭송하였고,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으면서 교제하지 않는 것을 칭송하였고, 열심히 정진하면서 열심히 정진하는 것을 칭송하는 비구를 장로 비구들은 자리를 준비하고 '오시오, 비구여. 이 비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비구는 훌륭합니다. 이 비구는 정진을 합니다. 오시오, 비구여. 자리에 앉으십시오.’라며 초대했다. 

 

그때, 깟사빠여, 신참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참으로 숲에 머물면서 숲에 머무는 것을 칭송하였고, 탁발하면서 탁발하는 것을 칭송하였고, 분소의를 입으면서 분소의를 입는 것을 칭송하였고, 세 벌의 가사로 살면서 세 벌의 가사로 사는 것을 칭송하였고, 원하는 것이 적으면서 원하는 것이 적다는 것을  칭송하였고, 만족하면서 만족하는 것을 칭송하였고,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으면서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것을 칭송하였고,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으면서 교제하지 않는 것을 칭송하였고, 열심히 정진하면서 열심히 정진하는 것을 칭송하는 비구를 장로 비구들이 자리를 준비하고 ‘오시오, 비구여, 자리에 앉으십시오.’라며 초대한다. 그들은 그런 것을 뒤따른다. 그것은 그들을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으로 이끈다.

 

깟사빠여, 그러나 지금의 장로 비구들은 숲에 머물지 않으면서 숲에 머무는 것을 칭송하지 않고, 탁발하지 않으면서 탁발하는 것을 칭송하지 않고, 분소의를 입지 않으면서 분소의를 입는 것을 칭송하지 않고, 세 벌의 가사로 살지 않으면서 세 벌의 가사로 사는 것을 칭송하지 않고, 원하는 것이 적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이 적다는 것을 칭송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으면서 만족하는 것을 칭송하지 않고,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지 않으면서 홀로 머물며 삼매를 닦는 것을 칭송하지 않고, 교제하면서 교제하지 않는 것을 칭송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정진하는 것을 칭송하지 않는다.

 

그때,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는 명성이 있고 잘 알려진 비구를 장로 비구들은 자리를 준비하고 ‘오시오, 비구여. 이 비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비구는 훌륭합니다. 이 비구는 동료수행자를 좋아합니다. 오시오, 비구여.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라며 초대한다. 

 

그때, 깟사빠여, 신참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참으로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는 명성이 있고 잘 알려진 비구를 장로 비구들은 자리를 준비하고 ‘오시오, 비구여, 이 비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비구는 훌륭합니다. 이 비구는 동료수행자를 좋아합니다. 오시오, 비구여. 자리에 앉으십시오.’라며 초대한다.'라고. 그들은 그런 것을 뒤따른다. 그것은 그들을 오랜 세월 불이익과 괴로움으로 이끈다. 깟사빠여, 참으로 바르게 말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정범행을 닦는 자가 청정범행을 망가뜨려서 망가졌다. 청정범행을 닦는 자가 청정범행에 패배해서 패퇴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청정범행을 망가뜨려서(brahmancar-upaddavena)'라는 것은 네 가지 필수품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탐욕 때문에 망가졌다는 말이다. 청정범행에 패배해서(brahmacar-abhibhavanena)'라는 것은 청정범행을 닦는 자들이 네 가지 필수품을 지나치게 바라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패퇴'란 지나치게 바라는 것이다.(SA.ii.174)  

 

 jhānābhiññasuttaṃ (SN 16.9-선(禪)과 완전한 지혜 경)
152.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치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즐거움
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한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된다. 여럿이 된 후 하나가 된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달린) 새와 같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 듬는다. 브라흐마(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친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한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된다. 여럿이 된 후 하나가 된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달린) 새와 같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 듬는다. 브라흐마(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친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탐냄을 지닌 마음을 탐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탐냄을 떠난 마음을 탐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어리석음을 떠난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산란한 마음(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산란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으로알아차린다.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삼매을 얻은 마음으로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탐냄을 지닌 마음을 탐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탐냄을 떠난 마음을 탐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어리석음을 떠난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산란한 마음(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산란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으로알아차린다.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삼매을 얻은 마음으로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숨낳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숨낳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영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영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세계에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upassayasuttaṃ (SN 16.10-처소 경)
15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사왓티의 제따와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오십시오, 깟사빠 존자시여. 우리는 같이 비구니 처소로 갑시다.”

“도반 아난다여, 그대가 가십시오. 그대는 일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두 번째로 아난다 존자는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오십시오, 깟사빠 존자시여. 우리는 같이 비구니 처소로 갑시다.”

“도반 아난다여, 그대가 가십시오. 그대는 일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세 번째로 아난다 존자는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오십시오, 깟사빠 존자시여. 우리는 같이 비구니 처소로 갑시다.”

 

*'깟사빠 존자이시여'는 bhante Kassapa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아난다 존자가 마하깟사빠 존자를 bhante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세존 재세시에 세존의 제자들은 서로를 avuso(도반이여)라는 칭호를 불렀다. 본경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는 자 경.SN16.2」에서 사리뿟따 존자가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 마하고싱가살라 경,M32」에서는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도반 깟사빠여(avuso Kassapa)라고 부르고 있다.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 경.D16」에서 세존께서는 자신이 입멸한 뒤에는 신참 비구는 장로 비구를 존자(bhante, ayasma)라 불러야 한다고 유훈을 하셨다. 그래서 여기서 아난다 존자도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bhente 라는 호칭을 써서 부르는 것이다. 이런 호칭을 볼 때 본경은 세존께서 입멸하신 뒤에 있었던 일화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자 마하깟사빠 존자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아난다 존자를 뒤따르는 사문으로 삼아서 어떤 비구니 처소로 갔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많은 비구니들이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니들에게 마하깟사빠 존자는 법다운 이야기로 설명하고 격려하고 명료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다. 그리고 마하깟사빠 존자는 비구니들에게 법다운 이야기로 가르치고 격려하고 명료하게 하고 기쁘게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갔다.

 

그때, 설법을 듣고 있던 툴라띳사 비구니가 마음이 언짢아서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마하깟사빠 존자는 어떻게 위데하(Videha)의 성자인 아난다 존자의 면전에서 법을 설할 생각을 했을까? 예를 들면 바늘 장수가 바늘 만드는 사람에게 바늘을 팔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하깟사빠 존자는 위데하의 성자인 아난다 존자의 면전에서 법을 설할 생각을 했다.'라고. 

 

*'툴라띳사(Thullatissa)는 몸이 뚱뚱한 띳사라는 뜻이다.(SA.ii.175)
*'위데하의 성자'는 위데하무니(vedeha-muni)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이 단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위데하무니'란 현명한 성자(pandita-muni)라는 말이다. 현자는 지혜라 불리는 배움으로 노력한다 즉, 모든 해야 할 바를 행한다고 해서 위데하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데하이고 성자이기 때문에 위데하무니라 한다.(SA.ii.175)  
주석서는 이 설명에 따르면 vedeha-mini는 현명한 성자라고 옮기는 것이 좋다. 그런데 아빠다나 주석서에 의하면 아난다 존자의 어머니는 위데하 지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위데하라 불리었으며 그의 아들이고 성자이기 때문에 아난다 존자는 위데하무니라 불린다고 설명하고 있다.(ApA.128)    

마하깟사빠 존자는 툴라띳사 비구니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마하깟사빠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내가 바늘을 파는 상인이고 그대가 바늘 만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가 바늘을 만드는 사람이고 그대가 바늘을 파는 상인입니까?”

“깟사빠 존자시여, 용서하십시오. 어리석은 (것이) 여인입니다.”
“오시오, 도반 아난다여, 승가가 그대를 더 검증하게 하지 마십시오."

 

*승가가 그대를 더 관찰(검증)하게 하지 마시오.: 이 뜻은 다음과 같다. 승가가 생각하기를, ‘아난다 존자는 세존의 대행자인 제자는 제지하면서도 비구니는 제지하지 않았다. 이 둘 사이에는 무슨 친분이나 애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할 것이다. 
마하깟사빠 존자가 여기서부터 구차제멸의 증득과 육신통의 구족을 설하는 이유는 그가 세존의 대행자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원하는 만큼),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기만 하면(원하는 만큼),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기만 하면,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기만 하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기만 하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행복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기만 하면,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ㄴ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기만 하면,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사념청정]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기만 하면,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기만 하면, 즐거움
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에 들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기만 하면,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에 들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한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된다. 여럿이 된 후 하나가 된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달린) 새와 같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영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 듬는다. 브라흐마(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친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원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한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된다 ··· 위력을 미친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한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된다 ···  위력을 미친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한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된다 ··· 위력을 미친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天耳界]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탐냄을 지닌 마음을 탐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탐냄을 떠난 마음을 탐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어리석음을 떠난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산란한 마음(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산란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으로알아차린다.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린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숨낳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세 생 ···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이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세 생 ···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세 생 ···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 중생들을 알아차린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 중생들을 알아차린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존께서 직접 비구 승가에게 그대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까?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문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도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문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나 세존께서는 직접 비구 승가에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증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문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문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러한 나의 (육)신통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곱이나 일곱 반 라따나(길이 단위)의 큰 코끼리를 작은 야자수 잎으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툴라띳사 비구니는 범행(梵行)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cavittha)'라는 것은 죽었다거나 망가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마하깟사빠 존자를 비방한 뒤 존자가 신통에 대한 사자후를 토하는 도중에 그녀의 가사는 가시나무줄기나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나무줄기처럼 그녀의 몸을 찌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 가사를 벗어버리고 [재가자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는 순간에 그녀의 마음은 편안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SA.ii.176)

 

cīvarasuttaṃ (SN 16.11-의복 경)
154. 한 때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라자가하의 웰루와나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닥키나기리에서 고귀한 비구 승가와 함께 유행을 하고 있었다. 

 

*'고귀한 비구 승가와 함께'는 mahata bhikkhusanghena saddhim을 옮긴 것인데 mahata는 고귀함이나 위대함을 뜻한다. 
*닥키나기라는 라자가하를 에워싸고 있는 남쪽지역에 있는 산들을 말한다. 

 

그때 아난다 존자에게 믿음을 가졌던 30명의 비구들이 청정범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 갔는데 그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아난다 존자는 닥키나기리에서 원하는 만큼 유행을 한 뒤 라자가하에 있는 웰루와나의 다람쥐 기르는 곳에 머물고 있는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에게 마하깟사빠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몇 가지 이유를 연(緣)하여 세존께서는 재가자의 집에서 세 사람으로 구성된 식사의 조항을 제정하셨습니까?"

“깟사빠 존자시여, 세 가지 이유를 연(緣)하여 세존께서는 재가자의 집에서 세 사람으로 구성된 식사의 조항을 제정하셧습니다. 첫째는 침묵시키기 어려운 사람들을 제어하고, 행실이 바른 비구들이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악한 바람을 가진 앞장선 자에 기대어 승가를 분열시키지 않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셋째는 재가자 집에 대한 연민 때문입니다. 깟사빠 존자시여, 이러한 세 가지 이유를 연하여 세존께서는 재가자의 집에서 세 사람으로 구성된 식사의 조항을 제정하셨습니다.”

 

*'재가자의 집에서 세 사람으로 구성된 식사의 조항'이라는 것은 kulesu tika-bhojanam pannattam을 옮긴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재가자 집에서 세 명 이상이 무리지어 음식을 받은면 안된다는 계목이다. 이것은 비구계목의 33번째 빠찟띠야(단타죄)에 해당된다.(Vin.iv.71-75)
*'「율장」(Vin.ji.196)에 의하면 원래 이 계목은 데와닷따가 자신을 지지하는 재가자 집들을 의지하여 파벌을 만들어 승가의 분열을 조장하려 하였기 때문에 제정된 것이다.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 주석서는 "비구 승가가 화합하고 포살과 자자를 잘 행하면 이런 승가에 음식을 베푼 재가자들은 천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SA.ii.178)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재가자 집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 세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도반 아난다여, 그런데도 그대는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음식에 적당한 양을 알지 못하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지 못하는 이런 신참 비구들을 데리고 유행을 하였단 말입니까? 사람들은 그대가 곡식을 짓밝으며 유행하였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대는 재가자 집을 해치면서 유행하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도반 아난다여, 그대의 무리는 부서졌고, 그대의 많은 신참 비구들은 떨어져 나갔습니다(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어린 아이)는 이런 상황도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깟사빠 존자시여, 제 머리는 하얗게 색깔이 변하였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까지도 마하깟사빠 존자로부터 ‘젊은이(아이)’라는 말을 듣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입니까?”
“도반 아난다여, 그래서 참으로 그대는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음식에 적당한 양을 알지 못하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지 못하는 이런 신참 비구들을 데리고 유행을 하였습니까? 사람들은 그대가 곡식을 짓밝으며 유행하였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대는 재가자 집을 해치면서 유행하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도반 아난다여, 그대의 무리는 부서졌고, 그대의 많은 신참 비구들은 떨어져 나갔습니다(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어린 아이)는 이런 상황도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아이'는 kumaraka(아이, 동자, 청년)을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아난다 존자는 이때의 나이가 80살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깟사빠 존자는 아난다 존자를 책망하면서 이처럼 아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석서는 마하깟사빠 존자가 아난다 존자를 젊은이라 부른 것에 대해서 "그대는 감각기능의 단속을 놓아버린 신참 비구들과 함께 돌아 다녔다. 이처럼 젊은이들과 함께 돌아다녔으니 젊은이라 부를 만하다.(SA.ii.179)라고 설명하고 있다.  

 

툴라난다 비구니는 '참으로 마하깟사빠 존자가 위데하의 성자인 아난다 존자를 젊은이라는 말로 폄하하였다.'라고 들었다. 그때 툴라난다 비구니는 마음이 언짢아서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전에 외도였던 마하깟사빠 존자가 위데하의 성자인 아난다 존자를 젊은이라는 말로 폄하해야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에 외도였던(annatitthiyapubbo samano)이라는 것은 마하깟사빠 존자는 이 교법에서 스승(acariya)도 은사(upajjhaya)도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물들인 옷을 입고 출가하였다. 그래서 이 비구니는 화가나서 그를 전에 되도였던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SA.ii.179)  


그러자 마하깟사빠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툴라난다 비구니는 참으로 경솔하고 경망스럽게 말을 하였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이후로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 외에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생각한 적이 없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기억합니다). 도반이여, 전에 내가 재가자였을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재가의 삶이란 번잡하고 오염이 많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완전무결하고 청정무구한 잘 닦여진 자개껍질과 같은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야겠다.’라고.

도반이여, 그런 나는 나중에 낡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가사를 준비하고, 세상에 계신 아라한들을 본보기로 삼아서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습니다.

 

이렇게 출가하여 먼 길을 걷던 나는 라자가하와 날란다 사이에 있는 바후뿟따 탑묘에 앉아 계신 세존을 보았습니다. 보면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내가 스승을 보게 된다면, 오직 세존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선서를 보게 된다면, 오직 세존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정등각을 보게 된다면, 오직 세존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도반이여, 그런 나는 거기서 세존의 발에 머리를 이마를 대고 존경을 표하고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라고.

도반이여, 이와 같이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여, 이처럼 마음으로 모든 것을 구족한 그대와 같은 제자에게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안다.’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나는 본다.’고 말하는 자는 그의 머리가 떨어질 것이다. 깟사빠여, 그러나 나는 알면서 ‘나는 안다.’고 말하고, 보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한다.'라고.

 

*'내가 세존을 보게 된다면(뵙게 된다면) 나는 세존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sattharam ca vataham passeyyam bhagavantam eva passeyyam 을 옮긴 것이다. 주석서의 해석을 참조하면  ‘참으로 내가 스승을 보게 된다면 그분은 바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바로 이분 세존일 것이다. 내가 선서를 보게 된다면 그분은 바로 지금 내가 보는 바로 이분 세존일 것이다. 내가 정등각을 보게 된다면 그분은 바로 지금 내가 보는 바로 이분 세존일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의 머리가 떨어질 것이다(muddha pi tassa vipateyya)'라는 것은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공언하는 외도의 스승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하여 청정하게 믿는 마음을 가진 제자가 이러한 최상의 존경을 드러내면, 그의 머리는 마치 줄기에서 떨어지는 야자 열매처럼 목에서 떨어져버릴 것이고 일곱 조각이 아버릴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존의 황금색 발 아래 이러한 최상의 존경을 드러내더라도 스승의 몸의 털조차도 동요하지 못한다. 이처럼 스승은 큰 위신력을 가지셨다.(SA.ii.197-198)

 

"깟사빠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노력해야 한다). 

‘나는 장로 비구들과 신참 비구들과 중진 비구들에 대해서 확고한 뉘우칠 줄 아는 힘과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을 확립하리라.’라고. 깟사빠여, 참으로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깟사빠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내가 유익함과 관련된 법을 들으면 그 모두를 깊이 새기고(뼈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며 온 마음을 다하여 귀를 기울여 그 법을 들으리라.’라고. 깟사빠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깟사빠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나는 편안함이 함께 한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놓아버리지 않으리라.’라고.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라고.
그리고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셨습니다.
도반이여, 단지 일 동안은 나는 빚진(의지처를 가진) 자로서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공양을) 먹었습니다. 팔 일째에 구경의 지혜가 생겼습니다.

 

 

*여기서 세존께서는 깟사빠 장로에게 세 가지 가르침을 하고 계신다. 장로에게는 이것이 세존에게로 출가한 것도 되었고 구족계를 받은 것도 되었다.(SA.ii.198)  
*'편안함이 함께한 몸에 대한 마음챙김(satasahagata kayagatasati)'이란 부정관(不淨觀.asubha)과 들숨날숨(anapana)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증득한 초선을 통해서 얻은 행복과 함께한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말한다.(SA.ii.198) 
*'빚진 사람(sana)'이란 오염원이라는 빚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백성들이 주는 공양을 먹었다(ratthapindam bhunji)'는 것은 믿음으로 베푸는 공양을 먹었다는 말이다. 네 가지 수용이 있다. ①훔친 것의 수용(파계한 자들이 공양을 수용하는 것) ②빛낸 것의 수용(계를 구족하였지만 되돌아 관찰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 ③상속자의 수용(7가지 유학들이 수용하는 것) ④주인의 수용(아라한이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만이 빚지지 않고 수용한다. 깟사빠 존자는 범부였을 때는 자신이 빚낸 것의 수용으로 공양을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는 팔 일 째에 구경의 지혜가 생겼다. 즉 아라한과가 생겼다는 뜻이다.(SA.ii.199)       

 

그때,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길을 벗어나서 어떤 나무 아래로 가셔서 머물렀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낡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자리를 만든 뒤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여기에 앉으십시오. 그것은 저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자리에 앉으신 뒤에 나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여, 그대의 낡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가사는 부드럽구나.’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하는 마음을 내시어 저의 이 낡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가사를 받아주십시오.’

‘깟사빠여, 그러면 그대는 나의 이 버려진 삼베 조각으로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받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버려진 삼베 조각으로 만든 분소의를 받겠습니다.’
도반이여, 그런 나는 낡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가사를 세존께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세존의 버려진 삼베로 만든 분소의를 받았습니다.

 

도반이여, 바르게 말하는 자가 누군가에게 ‘세존의 정통한 아들이요, 입에서 태어났고, 법에 의해 생겨났고, 법에 의해 창조되었고, 법의 상속자이고, 버려진 삼베 조각으로 만든 분소의를 받아 지닌 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말하는 자가 나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존의 정통한 아들이요, 입에서 태어났고, 법에 의해 창조되었고, 법의 상속자이고, 버려진 삼베로 만든 분소의를 받아 지닌 자’라고.

 

*이런 말을 통해서 깟사빠 장로는 툴라난다 비구니가 비방한 출가에 대한 것을 깨끗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스승이나 계사가 없던 자가 나처럼 목욕하고 머리를 깎고 스스로 물둘인 옷을 입고 외도교단을 떠났는데, 3가우따(1가우따는 대략 2km 정도임)까지 세존께서 마중을 나오셨고, 세 가지 가르침을 통해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으며, 세존과 가사를 바꾸어 입은 자가 또 어디 있는가? 그러니 툴라난다 비구니가 얼마나 잘못된 말을 하였는가 알것이다."(SA.ii.200-201)  

 

도반 아난다여, 나는 원하는 만큼,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뭅니다 ··· ··· ··· (구차제정의 증득과 다섯 가지 신통은 위의 「처소 경」을 참조할 것) ”

 

도반이여, 나는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나의 육신통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곱이나 일곱 반 라따나(길이 단위)의 큰 코끼리를 작은 야자수 잎으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툴라띳사 비구니는 청정범행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paraṃmaraṇasuttaṃ (SN 16.12-죽은 뒤 경)
155. 한 때에 마하깟사빠 존자와 사리뿟따 존자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는 저녁 무렵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서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사빠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마하깟사빠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깟사빠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합니까?”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까?”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여래께서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반이여, 참으로 이것은 이익을 주지 못하고, 청정범행의 시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탐냄의 떠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철저한 앎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명하셨습니까?”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셨습니까?”

“도반이여, 참으로 이것은 이익을 주고, 이것은 청정범행의 시작이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인도하고, 탐냄의 떠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철저한 앎으로 인도하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것을 설명하셨습니다.”

 

saddhammappatirūpakasuttaṃ (SN 16.13-유사정법(類似正法) 경)
15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하깟사빠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마하깟사빠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세존이시여, 이전에는 학습계율(학습계목)은 더 적었지만 구경의 앎(지혜)을 얻은 비구는 더 많았습니까? 그러나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세존이시여, 지금은 학습계율은 더 많아졌지만 구경의 앎을 얻은 비구는 더 적습니까?”라고.

“깟사빠여, 그것은 이와 같다. 중생들이 저열하고 정법이 사라질 때 학습계율은 더 많지만 구경의 앎을 얻은 비구는 더 적다. 깟사빠여, 정법과 유사한 것(유사정법.類似正法)이 세상에 생기지 않는 한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깟사빠여, 정법과 유사한 것이 생길 때 정법은 사라지게 된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지 않는 한 황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길 때 황금은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깟사빠여, 정법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지 않는 한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깟사빠여, 정법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길 때 정법은 사라지게 된다.

 

깟사빠여, 땅의 요소가 정법을 사라지게 하지 않고, 물의 요소가 정법을 사라지게 하지 않고, 불의 요소가 정법을 사라지게 하지 않고, 바람의 요소가 정법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여기, 오직  쓸모없는 인간들이 나타나서 이 정법을 사라지게 만든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배는 많이 실으면 침몰하지만, 깟사빠여, 정법은 이렇게 사라지지 않는다.

 

*주석서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배는 물품을 많이 받아들여서 실으면 가라앉지만 정법은 그렇지 않다. 정법은 교학등을 많이 싣는다 해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학이 쇠퇴하면 수행이 쇠퇴하고 수행이 쇠퇴하면 증득도 쇠퇴한다. 그러나 교학을 가득 채우는 사람은 수행을 가득 채우고 수행을 가득 채우는 사람은 증득을 가득 채운다. 그러므로 교학등이 증가하면 불법은 증장한다. 마치 상현 달과도 같다."(SA.ii.204) 

 

깟싸바여, 이런 다섯 가지 유해한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여기, 깟사빠여,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들이 스승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물고, 법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물고, 승가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물고, 닦음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물고, 삼매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깟사빠여, 이러한 다섯 가지 유해한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깟사빠여, 이런 다섯 가지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확고하게 하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여기, 깟사빠여,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들이 스승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물고, 법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물고, 승가를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물고, 닦음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물고, 삼매를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깟사빠여, 이러한 다섯 가지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확고하게 하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

 


깟사빠 상윳따(S16)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