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외도들의 허망한 불교 인식론

실론섬 2014. 5. 17. 12:07

1) 업의 개념 정리를 위해서 

새삼스럽지만 여기서 불교에서 말하는 업에 대해서 개념정립을 다시 해보고자 한다.


업(業)이라고 번역되는 깜마(kamma, karmma)는 "...하다" 라는 말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래서 깜마라는 단어적 의미는 모든 행위 일반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슨 행위든 다 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행위중에서도 '의도된 행위(cetana)가 개입된 행이를 업이라고 한정지어 말한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뜻(생각)으로 의도하고 업을 짓는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의도된 행위는 선한것과 악한것 이 두가지 행이 밖에 없다. 악한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닌 행위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불교는 몸과 말과 뜻으로 의도된 행위를 열가지로 구분하여 선한 것(kusala)을 십선업이라고 하고 악한 것을 불선업(akusala)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불선의 판단 기준은 불교의 철학적(심리학적) 부분과 또다른 면을 이루고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 측면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행위가 해탈과 열반에 유익한가 해로운가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씨앗을 심으면 그 종자에 따라 각각의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 의도적 행위는 선한 행이와 불선의 행위에 따라서 그 고유한 업의 특성을 띄게 된다.이것을 업의 법칙(kamma niyama)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나는 고유한 성질(특성)에 따른 결과를 깜마위빠카(,kamma vipak)라고 한다. 


붓다나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중생들의 의도적인 행위는 업이 된다. 붓다와 아라한의 경우에는 업의 근원이 되는 무명과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업을 쌓지 않는다. 이를 자유자재라고 하며 새가 하늘을 날아도 발자욱을 남기지 않고, 바람이 그물을 통과하는 것으로 여러번 설명을 했다. 


그 이외에 업의 기능에 따른 종류, 과보를 생산하는 순서에 따른 종류,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 과보를 생산할 장소에 따라 구분한다. 또한 업력(kamma vega), 업을 짓는 마음(abhisankhara vinnana), 업의 존재(kamma bhava)등등 다양하고 심층적으로 업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예외없이 업은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은 업의 주인이며 자기가 업의 상속자가 된다. 그들 각자는 자기 업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자기 업에 매여 있꼬 자기 업으로 지탱한다. 선한 업을 짓든 악한 업을 짓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자업자득의 업의 개념은 후대에 오면서 다양하게 발전을 하며 특히 일부 부파에서는 공업(共業)이라는 개념으로까지 확대해석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업의 개념은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면 받아 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제 글방의 193번"업의 길 품(kammapatha vagga)에 보면 붓다는 유유상종이라고 하였다. 육도윤회와 삼계라는 세계에서 본다면 비슷한 업을 지은 사람끼리 모이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차후 기회가 닿으면 한번 설명을 하고자 한다.


2) 세월호 사건을 불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할까?

순수한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국가/사회적인 문제를 극히 개인적인 행위에 국한한 업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붓다는 중생들이 가져야 할 직업과 국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법과 그리고 공동체 사회가 화합하고 모여사는 방법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업의 논리와는 또다른 것이다. 붓다는 왕이 다스려야 하는 법과 국민들이 행하여야 하는 사회일반적인 상식의 논리를 충분히 펼쳐 놓았다.


그런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면 쉬울 것 같다. 즉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잘못, 공무원들의 국가공복으로써의 근무자세, 사회조직원들 개개인의 사고방식등이 총체적으로 부실화한데서 온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보면 나라의 운영, 사회공동체로써의 개개인의 마음가짐, 공직자들이나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자세등등이 어느 것 하나가 붓다께서 일러주신 것과 합치되는 것이 없다. 나라와 정부조직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 낸 부실의 결과이지 결코 업의 논리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3) 불교의 논리가 모두에게 통할 수 없다

중국의 불교는 전래된 이후에 세번째 걸쳐서 법난을 겪는다. 그 법난의 이유가 여러가지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당시 중국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던 "유교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즉 불교의 윤회사상으로 부터 "시작도 알 수 없는 윤회로부터 목이 잘려 흘린 피는갠지스강보다 많고... 지금의 아내가 과거에는 내 어머니일 수도 있고 내 아버지가 다음생에는 내 자식일 수도 있고..." 이런 교리적 설명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유교사상에서는 하늘 두쪽나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뭐라고? 내 아버지가 내 자식이 되고 내 마누라가 내 어머니가 되고..." 불교가 멸문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윗 글에서도 밝혔지만 세월호 사건을 업의 논리나 윤회의 논리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에 붓다께서 일러주신 국가경영 사회구성원의 자세등등의 가르침으로 접근하고 싶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각자의 업이 그 무엇이었든 간에 현생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였으니 지금쯤은 모두다 좋은 곳에 태어났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뒤에 남은 우리들은 두번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위해서라도 붓다의 가르침대로 나라가 운영되고 사회조직원들의 마음자세가 바뀌었으면 한다.


3)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불교는 인식론도 존재론도 아니라고 앞전 글에서 충분하게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 작자는 계속하여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한다. 얻어 터질 것을 의식해서인지 연기론을 주워다 가타 붙였지만 결과적으로 불교는 인식론이라는 것이다. 즉 존재론과 인식론의 양극단중의 하나인 인식론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단멸론이나 상주론과 다름없는 양극단의 논리를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하고 인식되어 진다는 문제에서 본다면, 만약에 내가 인식한다면 그 인식하는 주체를 전제해야 한다. 사물이 나를 인식한다면 인식하는 사물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불교는 인식하는 자도 인식되어지는 대상도 모두다 고정되고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게 연기일 뿐이다. 인식을 하는 존재도 연기의 산물이며 인식되어 지는 대상도 연기의 산물이다. 따라서  연기에 의한 인식이나 존재가 인식론이나 존재론의 주체나 전제로 선정되어 질 수는 없다. 


따라서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해도 틀렸고 존재론이라고 해도 틀린말이 되는 것이다. 다만 불교는 인식한다 존재한다는 말을 쓰지만 그것을 두개의 양극단인 인식론이냐 존재론이냐의 철학적 궤변에 끼워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어느 누구도 불교를 인식론이다 존재론이다라고 양 극단의 하나를 단정지어 말하지 않는다. 불교는 연기법이다. 인식도 존재도 모두다 연기이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지 인식론이다 존재론이다라는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불교인들에게 너희들은 존재론이냐 또는 인식론이냐라고 묻는다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불교는 존재론도 아니요 인식론도 아니다. 불교는 연기법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