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어느 외도의 허망한 출가론 해탈론

실론섬 2014. 5. 22. 15:31

재가자의 허망한 출가론

 세상에는 원칙과 법도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무너지면 국가이든 사회이든 단체이든 혼란이 생기고 존속하기가 어려워진다. 연꽃은 최근 글에서 장황하게 다시 출가론을 나열했다. 그것에 대해서 과거에 두어번 비난을 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 또다시 출가론을 들먹인 것이다. 


그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재가자 주제에 '출가의 이유'니 '출가 목적'이니 '출가는 이러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출가론을 들먹이며 출가 수행승을 가르칠려는 모습이 과연 이치나 법도에 맞는 일일까? 만약에 내가 글을 쓰는 입장이라면 출가를 하지 못하는 세간사 인연의 얽힘과 그럼에도 재가자로써 불교를 열심히 믿고 따를려고 한다는 자기고백과 그리고 경전에 나와 있는 여러 출가와 관련된 귀절에서 자기를 되돌아 보는 성찰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자는 재가자 주제에 출가를 한 수행자들을 가르칠려고 하고 있다. 마치 출가승도 아닌 주제에 출가승보다 더 출가에 대해서 잘 알고 더 높은 경지에 있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경전의 '걸식 경''수행승들의 경''랏타빨라 경' 을 나열하고 있다. 여러번 강조한 사항이지만 경전은 경전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교과서나 일반 소설이나 서적을 볼 때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나 주제 파악이 중요한 것과 똑같다. 내용이나 주제 파악이 안되면 책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헛소리를 하거나 주제와 다른 망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걸식경과 수행승들의 경은 출가하여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독려하고 격려하고 마음을 다잡으라고 붓다께서 수행승들에게 일러주신 경전이다. 랏타빨라 경은 그가 왜 출가를 했는지에 대해서 왕에게 말하는 내용일 뿐이다. 출가를 하게 된 동기를 서술해 놓은 경전은 이것이외에도 여럿 있다. 각자 상황과 처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꽃이 언급한 경전은 재가자가 함부로 왈가불가할 내용도 아니지만 이는 수행승들을 위한 가르침일 뿐이다. 붓다가 언제 재가자들 보고 걸식하라고 했나? 


출가 수행승은 재가자들의 스승이다. 이것은 붓다께서 정해 놓으신 원칙과 법도이다. 일부 출가승

들의 모습이 흐트러졌다고 해서 사부대중이라는 조직의 법도가 흐트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치와 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조직속에 있는 일부 사람들의 잘못이지 사부대중이라는 법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도 지켜야 할 예의범절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  


외도의 허망한 출가론 해탈론

예전에 연꽃은 출가를 해야만 해탈을 할 수 있고 모두다 출가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을 여러번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하는 작자가 먼저 모범을 보여서 출가를 하라고 반박한 적이 있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출가승을 위한 것이지 재가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어처구니 없는 망발을 여러번 한적도 있다. 불교는 사부대중이 모여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이 오직 출가승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작자가 출가도 하지 않은채 출가승을 가르칠려고 온갖 경전귀절을 가져와 주절주절되는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초기불교를 신봉한다는 작자가 하늘사람이니 땅이 흔들렸느니 비구름신이 딸을 낳았으니등등 온갖 초월적인 이야기를 가져와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이고 불교인냥 허황된 망상에 빠져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것인가? 불교 경전이 무슨 슈퍼네츄럴 소설책인가?  


왜 출가를 하는가? - 라훌라 스님의 가르침

 불교는 우리 각박한 세상의 선남선녀가  실천할 수 없는 아주 지고하고 숭고한 체계라서, 진정한 불제자가 되고 싶다면 절간이나 좀 한적한 곳에 은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슬픈 오해이며, 분명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데 기인한 것이다. 사람들은  소문을 듣거나 어쩌다가 읽어본  것을 가지고 그런 경솔하고 그릇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불교라는 주제를 전반적으로 이해치 못하여서 단지 부분적이고 편향된  시각만을 제공하는 사람이 쓴 것을 읽어 본데 따른 결과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절간의 승려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거룩한 여덟 길"은 불제자가  사는 방법이며,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승려가 되거나, 동굴이나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는 없다. 아무리 불교가 거룩하고  순수하다 하여도 요즘 세상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따를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 대중들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불교의 정신을 정확히 이해한다면(문자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 일반인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따르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회에서 단절되어 외딴 곳에서 산다면 불교를 받아들이기가 더 수월하고 편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식의 은둔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을 무디고 침체하게 만들어서 정신적, 지적 생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참된 출가란 육체적으로 속세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처의 수제자 사리뿟따는 어떤 사람이 금욕적인 수행에 헌신하면서 숲 속에 살더라도 불순한 생각과 '더러움'이 가득할 수도 있으며, 다른 어떤 사람은 금욕적인 수행을 하지 않으면서 고을이나 도회지에 살더라도 순수하고 '더러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리뿟따는 이들 둘 중에 고을이나 도회지에서 순수하게 사는 사람이  숲 속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더 위대하다고 말했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생활을 떠나야 한다는 상식적인 믿음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그것은 실천하지  않는 데 대해 생각없이 변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불교 문헌에는 평범한 보통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열반을  깨달은 남녀들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한번은 "방랑수행자"  밧차곳따(우리는 이미 "나없음"의 가름에서 그를 만났었다)가 부처에게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남녀 평신도(優婆塞와 優婆夷)가 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처는 한 둘이 아니고 일이백이나 오백도 아닌  훨씬 많은 수의 평신도들이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자기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분명히 말한다.


어떤 이는 소음과 혼잡에서 멀리  떠나 조용한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기분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료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도우며, 봉사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불교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더 칭찬할 만하고 용기 있는 일이다.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훈련을 미리 하여 충분히 성숙된 다음에는 남을 도울 양으로, 자기 마음과 성품을 향상시키려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유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동료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행복과 '구원'만을 생각하며  고독하게 온 생애를 산다면 이는 분명히,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며 봉사하는데 근거를 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물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보통 평신도로 살아가면서 불교를 따를 수 있는데 왜 부처가 설립한 "승려들의 모임"인 승가가 있는가? 승가는 자신의 정신적, 지적 발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 하는데 생애를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이 있는 보통 평신도가 승려같이 자기 전 생애를 남에게 봉사하는데 바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부양 의무가 있는 가족이나 다른 어떤 속세의 구속이 없는 승려는 부처가 지도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전 생애를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해, 많은 이의 행복을  위해' 바쳐야될 위치에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사원이 정신적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