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35상윳따 - 제7장 미가잘라 품(Migajāla-vagga. SN35:63-SN35:73)

실론섬 2014. 6. 8. 12:19

제7장 미가잘라 품
Migajāla-vagga (SN 35.63-73)

paṭhamamigajālasuttaṃ (SN 35.63-미가잘라 경1)

63.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미가잘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앉았다. 한 쪽에 앉은 미가잘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혼자 머무는 자, 혼자 머무는 자’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왜 혼자 머무는 자입니까? 왜 동반자와(짝과) 함께 머무는 자입니까?”   

 

“미가잘라여,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머물면(움켜쥐면) 그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머무는 비구에게 소망(즐김, 환락)이 일어난다. 소망이 있을 때 집착(애착)이 있다. 집착이 있을 때 속박이 있다. 미가잘라여, 소망의 족쇄에 묶인 비구가 동반자와 함께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머물면(움켜쥐면) 그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머무는 비구에게 소망(즐김, 환락)이 일어난다. 소망이 있을 때 집착(애착)이 있다. 집착이 있을 때 속박이 있다. 미가잘라여, 소망의 족쇄에 묶인 비구가 동반자와 함께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 비구여, 이렇게 머무는 비구는 조용하고 소리가 없고 한적하고 사람들로부터 멀고 혼자 머묾에 적합한 외딴 거처, 숲이나 밀림의 깊은 곳에 머문다하더라도 동반자와 함께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동반자인 갈애가 버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동반자와 함께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미가잘라여,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 비구에게 소망이 소멸한다(일어나지 않는다). 소망이 없을 때 집착이 없다. 집착이 없을 때 속박이 없다. 미가잘라여, 소망의 족쇄로부터 벗어난 비구가 혼자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 비구에게 소망이 소멸한다. 소망이 없을 때 집착이 없다(일어나지 않는다). 집착이 없을 때 속박이 없다. 미가잘라여, 소망의 족쇄로부터 벗어난 비구가 혼자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비구여, 이렇게 머무는 비구는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 왕, 왕의 대신들, 외도, 외도의 제자들로 붐비는 마을의 안에 머문다하더라도 혼자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동반자인 갈애가 버려졌다. 그래서 혼자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미가잘라 존자(ayasma Migajala)는 녹자모 강당을 지은 위사카(Visakha) 청신녀의 아들이었다. 그는 세존의 설법을 많이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TagA.177) 장로게(417-422)은 그의 게송이다.    

 

dutiyamigajālasuttaṃ (SN 35.64-미가잘라 경2)
64. 그 무렵 미가잘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한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앉았다. 한 쪽에 앉은 미가잘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으로 부터 법을 들은 뒤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물 것입니다."
“미가잘라여,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머물면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머무는 비구에게 소망이 일어난다.
미가잘라여, 소망의 일어남으로부터 괴로움의 일어남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머물면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머무는 비구에게 소망이 일어난다. 미가잘라여, 소망의 일어남으로부터 괴로움의 일어남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미가잘라여,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 비구에게 소망이 소멸한다(일어나지 않는다). 미가잘라여, 소망의 소멸로부터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즐기기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 비구에게 소망이 소멸한다. 미가잘라여, 소망의 소멸로부터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미가잘라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마간디야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없다.’라고 알았다. 미가잘라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paṭhamasamiddhimārapañhāsuttaṃ (SN 35.65-사밋디 마라 질문 경1)
65.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사밋디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사밋디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마라, 마라’라고 불립니다. 얼마만큼의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있습니까?”

 

“사밋디여, 눈이 있는 곳, 형색들이 있는 곳, 눈의 의식이 있는 곳, 눈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있다. 귀가 있는 곳, 소리들이 있는 곳, 귀의 의식이 있는 곳, 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있다. 코가 있는 곳, 냄새들이 있는 곳, 코의 의식이 있는 곳, 코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있다. 혀가 있는 곳, 맛들이 있는 곳, 혀의 의식이 있는 곳, 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있다. 몸이 있는 곳, 감촉들이 있는 곳, 몸의 의식이 있는 곳, 몸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 법들이 있는 곳, 마음의 의식이 있는 곳, 마음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있다.

 

사밋디여, 눈이 없는 곳, 형색들이 없는 곳, 눈의 의식이 없는 곳, 눈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없다. 귀가 없는 곳 ··· 코가 없는 곳 ··· 혀가 없는 곳, 맛들이 없는 곳, 혀의 의식이 없는 곳, 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없다. 몸이 없는 곳 ··· 마음이 없는 곳, 법들이 없는 곳, 마음의 의식이 없는 곳, 마음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는 마라 또는 마라라는 개념이 없다.”

 

samiddhisattapañhāsuttaṃ (SN 35.66-사밋디 중생 질문 경)
66. “세존이시여, ‘중생, 중생’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습니까?”


“사밋디여, 눈이 있는 곳, 형색들이 있는 곳, 눈의 의식이 있는 곳, 눈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귀가 있는 곳, 소리들이 있는 곳, 귀의 의식이 있는 곳, 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코가 있는 곳, 냄새들이 있는 곳, 코의 의식이 있는 곳, 코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혀가 있는 곳, 맛들이 있는 곳, 혀의 의식이 있는 곳, 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몸이 있는 곳, 감촉들이 있는 곳, 몸의 의식이 있는 곳, 몸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 법들이 있는 곳, 마음의 의식이 있는 곳, 마음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밋디여, 눈이 없는 곳, 형색들이 없는 곳, 눈의 의식이 없는 곳, 눈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없다. 귀가 없는 곳 ··· 코가 없는 곳 ··· 혀가 없는 곳, 맛들이 없는 곳, 혀의 의식이 없는 곳, 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없다. 몸이 없는 곳 ··· 마음이 없는 곳, 법들이 없는 곳, 마음의 의식이 없는 곳, 마음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는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없다.”

 

samiddhidukkhapañhāsuttaṃ (SN 35.67-사밋디 괴로움(苦) 질문 경)
67. “세존이시여,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있습니까?”

 

“사밋디여, 눈이 있는 곳, 형색들이 있는 곳, 눈의 의식이 있는 곳, 눈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중생 또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귀가 있는 곳, 소리들이 있는 곳, 귀의 의식이 있는 곳, 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있다. 코가 있는 곳, 냄새들이 있는 곳, 코의 의식이 있는 곳, 코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있다. 혀가 있는 곳, 맛들이 있는 곳, 혀의 의식이 있는 곳, 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있다. 몸이 있는 곳, 감촉들이 있는 곳, 몸의 의식이 있는 곳, 몸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 법들이 있는 곳, 마음의 의식이 있는 곳, 마음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밋디여, 눈이 없는 곳, 형색들이 없는 곳, 눈의 의식이 없는 곳, 눈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없다. 귀가 없는 곳 ··· 코가 없는 곳 ··· 혀가 없는 곳, 맛들이 없는 곳, 혀의 의식이 없는 곳, 혀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없다. 몸이 없는 곳 ··· 마음이 없는 곳, 법들이 없는 곳, 마음의 의식이 없는 곳, 마음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는 괴로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개념이 없다.”  

 

samiddhilokapañhāsuttaṃ (SN 35.51-사밋디 세상 질문 경)
68. “세존이시여, ‘세상, 세상’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세상 또는 세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까?”


“사밋디여, 눈이 있는 곳, 형색들이 있는 곳, 눈의 의식이 있는 곳, 눈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세상 또는 세상이라는 개념이 있다. ··· 혀가 있는 곳 ··· 마음이 있는 곳, 법들이 있는 곳, 마음의 의식이 있는 곳, 마음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있는 곳, 거기에 세상 또는 세상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밋디여, 눈이 없는 곳, 형색들이 없는 곳, 눈의 의식이 없는 곳, 눈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 세상 또는 세상이라는 개념이 없다. ··· 혀가 없는 곳 ··· 마음이 없는 곳, 법들이 없는 곳, 마음의 의식이 없는 곳, 마음의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이 없는 곳, 거기에는 세상 또는 세상이라는 개념이 없다.”   

 

upasenāasīvisasuttaṃ (SN 35.52-우빠세나 뱀 경)
69. 한 때에 사리뿟따 존자와 우빠세나 존자는 라자가하의 차가운 숲에 있는 삽빠손디까(뱀 머리) 석굴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우빠세나 존자의 몸에 독사가 떨어졌다. 그러자 우빠세나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오십시오. 이 몸을 침상 위로 올려주고 이 몸이 마치 한 줌의 왕겨처럼 흩어지기 전에 밖으로 옮겨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자 사리뿟따 존자가 우빠세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빠세나 존자의 몸의 변화나 감각의 근들이 변하는(쇠퇴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빠세나 존자는 ‘도반들이여, 오십시오. 이 몸을 침상 위로 올려주고 이 몸이 마치 한 줌의 왕겨처럼 흩어지기 전에 밖으로 옮겨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라고.
“도반 사리뿟따여, '나는 눈이다. 눈은 나의 것이다. ··· 나는 혀이다.  혀는 나의 것이다. ··· 나는 마음이다. 마음은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몸의 변화(달라짐)나 감각의 근이 변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반 사리뿟따여, 나에게는 '나는 눈이다. 눈은 나의 것이다.  ··· 나는 혀이다. 혀는 나의 것이다. ··· 나는 마음이다. 마음은 나의 것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나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어떻게 몸의 변화와 감각의 근의 변화가 있겠습니까?”

 

*'몸이 변화거나 감각기능들이 변하는 것'은 kayassa va annathattam indriyanam va viparinamam을 옮긴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 「사랑에서 생긴 것 경」(M87)에는 '감각기능들이 변하는 것'은 자식이 죽은 것 등을 보고 생긴 심한 괴로움을 표현하는 말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사리뿟따 존자는 독사의 맹독이 퍼져도 우빠세나 존자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나’라는 생각과 ‘나의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들은 우빠세나 존자에게 그렇게 잘 뿌리 뽑혔습니다. 그래서 우빠세나 존자에게는 '난는 눈이다. 눈의 나의 것이다. ··· 나는 혀이다. 혀는 나의 것이다. ··· 나는 마음이다. 마음은 나의 것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 비구들은 우빠세나 존자의 몸을 침상 위로 올린 뒤 밖으로 옮겼다. 그때 우빠세나 존자의 몸은 한 줌의 왕겨처럼 흩어졌다.

 

*삽빠손디까(뱀 머리) 동굴은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 우빠세나 존자는 싸리뿟다의 동생이었다. 공양을 끝낸 후에 그는 동굴의 그늘에 앉아서 부드러운 바람을 쐬며 가사를 손질하고 있었다. 두 마라의 어린 독사들이 동굴에 걸려 있는 덩쿨에 있다가 한 마리가 우빠세나 장로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는 뱀에게 물렸고 독은 빠른 속도로 그의 몸에 퍼졌다. 장로는 독이 이처럼 퍼지는 것을 알고 독사가 떨어질 때 '이 몸이 동굴 안에서 죽지 않기를'이라고 신통의 힘으로 결심을 하고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SA.ii.388)

*우빠세나 존자(ayasma Upasena)는 사리뿟따 존자의 동생이었다. 여러 곳에서는 그를 왕간따의 아들 우빠세나(Upasena Vangantaputta)라 부르고 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왕간따였기 때문이다. 그는 날라까(Nalaka)에서 루빠사리(Rupasari)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처럼 사리뿟따 존자는 어머니 사리의 아들로 불리고 있고, 우빠세나 존자는 아버지 왕간따의 아들로 불리고 있다. 장로게(577-586)은 그의 게송이다. 그는 베다에 통달했지만 출가하여 세존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출가한 지 1년 만에 출가자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 상좌를 두어서 그를 데리고 세존께 갔다. 세존께서는 그의 성급함을 나무라셨고 그는 세존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신뢰받는 제자가 되려고 결심하고 정진에 물두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존자는 여러 가지 두타행을 닦았으며 많은 대중을 거느렸다고 한다.(AA.i.271-272)
그는 설법을 잘하기로 유명하였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존의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에서 "모든 면에서 청정한 믿음 내게 하는 자(samanta-pasadika)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셨다.   
사리뿟따 존자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 즉, 쭌다(Cunda), 우빠세나(Upasena), 레와따(Revata)와 세 명의 여 동생 즉, 짤라(Cala), 우빠짤라(Uppacala), 시수빠짤라(Sisupacala)가 있었고 모두 출가하였다고 한다.(DhpA.ii.188) 

이중 남동생인 쭌다는 형인 싸리뿟타를 존경하여 비구계를 받지 않고 싸리뿟다의 시자로 지냈다. 그리고 싸리뿟다가 열반하였을 때 그의 열반소식과 사리를 붓다와 아난다존자에게 전달했다. 우빠세나 존자는 위 경처럼 싸리뿟다와 함께 동굴에서 지내다가 독사에 물려 열반을 했다. 막내동인 레와따 존자는 7살때 10살짜리 신부와 결혼을 하려 했는데 신부를 데리고 나온 100살짜리 할머니를 보고 무상함을 알아 출가했다고 한다.  
「비구니 상윳따」에 그분들의 이야기와 게송이 실려있다.    

 

upavāṇasandiṭṭhikasuttaṃ (SN 35.70-우빠와나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경)
70. 그 무렵 우빠와나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우빠와나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현재에서 증명 되는 법, 현재에서 증명되는 법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 입니까?”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형색을 느끼고 형색에 대한 탐욕을 느낀다.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있을 때 '내 안에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우빠와나여, '비구가 안으로 형색을 보면서 형색을 느끼고 형색에 대한 탐욕을 느낀다.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있을 때 '내 안에 형식들에 대한 탐욕이 있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 우빠와나여, 이렇게도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시,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혀로 맛을 맛보면서 맛을 느끼고 맛에 대한 탐욕을 느낀다. 맛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있을 때 ‘내 안에 맛들에 대한 탐(貪)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우빠와나여, ‘비구가 혀로 맛을 맛보면서 맛을 느끼고 맛에 대한 탐욕을 느낀다. 맛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있을 때 ‘내 안에 맛들에 대한 탐욕이 있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 우빠와나여, 이렇게도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시,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마음(意)으로 법(法)을 인식하면서 법(法)을 느끼고 법에 대한 탐욕을 느낀다. 법(法)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있을 때 ‘내 안에 법들에 대한 탐욕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우빠와나여, ‘비구가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법을 느끼고 법에 대한 탐욕을 느낀다. 법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있을 때 ‘내 안에 법들에 대한 탐욕이 있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 우빠와나여, 이렇게도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형색은 느끼지만, 형색에 대한 탐욕은 느끼지 않는다.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없을 때 ‘내 안에는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우빠와나여, '비구가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형색은 느끼지만 형색에 대한 탐욕은 느끼지 않는다.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없을 때 '내 안에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없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 우빠와나여, 이렇게도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시,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혀로 맛을 맛보면서 맛은 느끼지만 맛에 대한 탐욕은 느끼지 않는다. 맛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없을 때 ‘내 안에 맛들에 대한 탐욕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 

 

다시,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법은 느끼고 법에 대한 탐욕은 느끼지 않는다. 법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없을 때 ‘내 안에 법들에 대한 탐욕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우빠와나여, ‘비구가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법은 느기고 법에 대한 탐욕은 느끼지 않는다. 법들에 대한 탐욕이 안에 없을 때 ‘내 안에 법들에 대한 탐욕이 없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 우빠와나여, 이렇게도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빠와나 존자(ayasma Upavana)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우빠와나 경(S12.26)의 주해를 참조할 것. 우빠와나 존자는 세존의 시자이기도 했다. 
세존의 시자 소임을 본 분은 모두 여덟 분인데, 그분들은 나가사말라(Nagasamala), 나기따(Nagita), 우빠와나(Upavana), 수낙캇따(Sunakkhatta), 사미라고 불린 쭌다(Cunda samanuddesa), 사가따(Sagata), 메기야(Meghiya)와 (AAT.247-248) 성도 후 21년째 되던 해 부터 반열반하시기까지 대략 25년간 시자 소임을 밭은 아난다 존자였다.  

 

paṭhamachaphassāyatanasuttaṃ(SN 35.71-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육촉처.六觸處) 경1)
71.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터전)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비구는 그로 인해 청정범행을 완성하지 못했고, 이 법과 율에서 멀리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에 대해서 저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비구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눈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여기서 그대가 눈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 ··· 혀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간주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여기서 그대가 혀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 … 그대는 마음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여기서 그대가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

 

dutiyachaphassāyatanasuttaṃ (SN 35.72-여섯 감각접촉의 장소 경2)

72.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터전)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비구는 그로 인해 청정범행을 완성하지 못했고, 이 법과 율에서 멀리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에 대해서 저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라지 못합니다.”


“비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눈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간주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여기 그대에게 눈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대에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한 이 첫 번째 감각접촉의 장소의 버림이 있을 것이다. ··· 

 

"혀를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간주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여기 그대에게 혀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대에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한 이 네 번째 감각접촉의 장소의 버림이 있을 것이다. ··· 

 

"마음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간주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여기서 그대에게 마음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대에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한 이 여섯 번째 감각접촉의 장소의 버림이 있을 것이다.”  

 

tatiyachaphassāyatanasuttaṃ (SN 35.73-영섯 감각접촉의 장소 경3)
73.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터전)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비구는 그로 인해 청정범행을 완성하지 못했고, 이 법과 율에서 멀리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에 대해서 저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라지 못합니다.”  


“비구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음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코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몸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음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는 자는 탐욕이 떠난다. 탐욕의 떠남으로부터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
 
*터전.장소.처 : ayatana 를 한역으로는 처(處)로 번역하는데 이 경우 단순한 의미의 '장소(place)'로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터전'이라는 번역이 더 옳다고 본다. 
ayatana 란 '기르다. 양육하다. 연장하다. 확장하다.의 의미를 지닌 'ayati'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자라나는 곳'이라는 원어적 의미에서부터 비롯되어, 경전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이, 눈.귀.코.혀.몸.마음이라고 하는 여섯의 감각요인(根.indriya)과 그에 대응하는 시각대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현상등의 대상적 요인 (境.visaya)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ayatana 는 일반적으로, 마음(citta.心)과 마음작용(心所.cetasika)이 일어나기 위한 의지처(所緣. arammana)로 정의되는데, 이는 곧 그들 여섯의 감관과 그에 대응되는 감각대상들이 이러한 마음과 마음작용이 발생하는 터전(foundation or base)이 된다는 의미이다.

 

 

제7장 미가잘라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