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35상윳따 - 제10장 여섯 품(Saḷa-vagga. SN35:94-SN35:103)

실론섬 2014. 6. 9. 18:59

제10장 여섯 품

Saḷa-vagga (SN 35.94-103)

 

adantāguttasuttaṃ (SN 35.94-길들지 않고 보호하지 않음 경)

94.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육촉처.六觸處)들을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어떤 여섯인가? 

비구들이여, 눈은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귀는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코는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혀는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몸은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마음은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장소들을 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즐거움(행복)을 가져온다(행복을 실어 나른다). 어떤 여섯인가?   

비구들이여, 눈은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즐거움(행복)을 가져온다. 귀는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즐거움(행복)을 가져온다. 코는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즐거움(행복)을 가져온다. 혀는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즐거움(행복)을 가져온다. 몸은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즐거움(행복)을 가져온다. 마음은 감각접촉의 장소이다. 이를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즐거움(행복)을 가져온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길들이고 보호하고 제어하고 단속하면 즐거움(행복)을 가져온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서이신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을

단속하지 못하면 괴로움을 만난다.

그러나 믿음을 가져서 그들의 단속을 잘 아는 사람들은

갈망하지 않고 머문다.

 

마음에 드는 형색들을 본 뒤에 

또는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색들을 본 뒤에

마음에 드는 것들에서 탐욕의 영역을 제거하고

‘나에게 사랑스럽지 않다.'라고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다.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양쪽의 소리를 들은 뒤에

사랑스러운 소리에 대해 마음을 내지 않고

또한,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서 증오에 속한 것을 제거하고

‘나에게 사랑스럽지 않다.’라고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다.

 

향기롭고 마음에 드는 냄새을 맡거나

또는 불결하고 악취 나는 냄새을 맡은 뒤에

악취 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을 제거하고

향기로운 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지 않는다.

 

달콤하고 감미로운 맛을 즐기거나

또는 맛없는 음식을 먹더라도

감미로운 맛에 묶이지 않고 먹어야 하며

맛없는 음식들을 혐오해서는 안된다.

 

즐거운 감촉에 닿더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괴로운 것에 닿더라도 동요하지 않는다.

즐겁고 괴로운 두 가지 감촉에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은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한 평정심을 갖고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희론(戱論)에 식별을 가진 이런저런 사람들은

희론을 식별하면서 분별하는데 빠져 머문다.

세속에 의지한 모든 정신적 상태를 몰아내고 

출리에 속한 것들을 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여섯 가지를 잘 닦으면

어디에  닿더라도 마음은 동요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탐욕과 성냄을 극복해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을 건넌 자가 되어야 한다.'

 

mālukyaputtasuttaṃ (SN 35.95-말루꺄뿟따 경)
95. 그 무렵 말루꺄뿟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말루꺄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들은 뒤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물겠습니다.”라고. 

 

*말룽꺄뿟따(ayasma Malunkyaputta) 또는 6차 미얀마 결집본에는 말루캬뿟따(Malukyaputta) 존자로 나타난다. 그는 꼬살라 왕의 보좌관의 아들이었으며 말루캬는 어머니의 이름이다. 그래서 거의 이름은 말루캬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나이가 들어서 외도 유행승이 되었다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했다고 한다.(ThagA.ii.170) 그는 세존께서 열 가지 문제(십무기)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고 환속하려고 했었다. 「맛지마 니까야」 「짧은 말루캬뿟따 경」(M63)과 「긴 말루캬뿟따 경」(M64)는 세존께서 그를 두고 설하신 경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말루캬뿟따 경」(A4.254)도 세존께서 그에게 설하신 경이다. 「장로게」(794-817)은 그의 게송이다.    

“말루꺄뿟따여, 이미 늙어서 나이 들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난 노년에 이른 그대가 간략한 가르침을 요청한다면, 참으로 내가 젋은 비구들에게는 무엇을 설하겠는가?”

 

*세존께서는 장로를 꾸짖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젊었을 때 방일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숲속에 거주하기를 원하여 명상주제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SA.ii.382) 계속해서 주석서는 그가 나이가 들 때까지 사문의 법을 행하지 않은 것을 꾸짖으셨고 젊은 비구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그를 격려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SA.ii.382-383)   

 

“선서시여, 저는 늙어서 나이 들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르렀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십시오. 선서께서는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십시오. 참으로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참으로 저는 세존께의 말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말루꺄뿟따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에게 보이지 않고, 예전에 보이지 않았고, 그대가 보지 않고 그대에게 보일 가능성이 없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에 대해 그대에게 관심과 탐욕과 애정이 있는가(형색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관심이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대에게 들리지 않고, 예전에 들리지 않았고, 그대가 듣지 않고 그대에게 들릴 가능성이 없는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에 대해 그대에게 관심(욕구)과 탐욕과 애정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대에게 맡아지지 않고, 예전에 맡아지지 않았고, 그대가 맡지 않고 그대에게 맡아질 가능성이 없는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에 대해 그대에게 관심과 탐욕과 애정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대에게 맛보이지 않고, 예전에 맛보이지 않았고 그대가 맛보지 않고 그대에게 맛보일 가능성이 없는 혀로 인식되는 맛들에 대해 그대에게 관심과 탐욕과 애정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대에게 닿지 않고, 예전에 닿지 않았고, 그대가 닿지 않고 그대에게 닿을 가능성이 없는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에 대해 그대에게 관심과 탐욕과  애정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대에게 인식되지 않고, 예전에 인식되지 않았고, 그대가 인식하지 않고 그대에게 인식될 가능성이 없는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에 대해 그대에게 관심과 탐욕과 사랑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닿아 알고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에서 보일 때는 단지 보임만이 있을 것이고, 들릴 때는 단지 들림만이 있을 것이고, 닿아 알 때는 단지 닿아 앎만이 있을 것이고, 인식될 때는 단지 인식됨만이 있을 것이다.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닿아 알고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에서 보일 때는 단지 보임만이 있고, 들릴 때는 단지 들림만이 있고, 닿아 알 때는 단지 닿아 앎만이 있고, 인식될 때는 단지 인식됨만이 있을 때,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그것에 의해’가 없을 것이다.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그것에 의해’가 없을 때,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없다. 말루까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없을 때, 말루꺄뿟따여, 그대는 이 세상에 의해서도 없고, 저 세상에 의해서도 없고, 둘의 중간에 의해서도 없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이렇게 자세하게 압니다.

 

사랑스러운 표상에 마음을 내는 자는 형색을 보면서 마음챙김을 놓아 버립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뭅니다.
그에게 형색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이 증장합니다.
간탐(慳貪)과 불쾌함이 마음을 해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멉니다.

 

사랑스러운 표상에 마음을 내는 자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챙김을 놓아 버립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뭅니다.
그에게 소리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이 증장합니다.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해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멉니다.

사랑스러운 표상에 마음을 내는 자는 냄새를 맡으면서 마음챙김을 놓아 버립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뭅니다.
그에게 냄새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이 증장합니다.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해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멉니다.


사랑스러운 표상에 마음을 내는 자는 맛을 맛보면서 마음챙김을 놓아 버립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뭅니다.
그에게 맛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이 증장합니다.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해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멉니다.

사랑스러운 표상에 마음을 내는 자는 감촉을 닿으면서 마음챙김을 놓아버립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뭅니다.
그에게 감촉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이 증장합니다.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해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멉니다.

사랑스러운 표상에 마음을 내는 자는 법을 인식하면서 마음챙김을 놓아버립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뭅니다.
그에게 법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이 증장합니다.
간탐(慳貪)과 불쾌함이 마음을 해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멉니다.

형색을 보면서 마음챙김을 놓지 않는 자는 형색들에 물들지 않습니다(좋아하지 않습니다).

탐욕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물지 않습니다.
그처럼 형색을 보는 자 그리고 느낌을 경험하는 자는
[괴로움을] 허물고, 쌓지 않습니다. 마음챙기는 그는 이렇게 실천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허무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가깝습니다.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챙김을 놓지 않는 자는 소리들에 물들지 않습니다. 
탐욕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물지 않습니다.
그처럼 소리를 듣는 자 그리고 느낌을 경험하는 자는
허물고, 쌓지 않습니다. 마음챙기는 그는 이렇게 실천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허무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가깝습니다.  

냄새를 맡으면서 마음챙김을 놓지 않는 자는 냄새들에 물들지 않습니다.
탐욕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물지 않습니다.
그처럼 냄새를 맡는 자 그리고 느낌을 경험하는 자는
허물고, 쌓지 않습니다. 마음챙기는 그는 이렇게 실천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허무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가깝습니다.   

맛을 보면서 마음챙김을 놓지 않는 자는 맛들에 물들지 않습니다.
탐욕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물지 않습니다.
그처럼 맛을 보는 자 그리고 느낌을 경험하는 자는
허물고, 쌓지 않습니다. 마음챙기는 그는 이렇게 실천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허무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가깝습니다.   

감촉에 닿으면서 마음챙김을 놓지 않는 자는 감촉들에 물들지 않습니다.
탐욕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물지 않습니다.
그처럼 감촉을 닿는 자 그리고 느낌을 경험하는 자는
허물고, 쌓지 않습니다. 마음챙기는 그는 이렇게 실천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허무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가깝습니다.  

법을 인식하면서 마음챙김을 놓지 않는 자는 법들에 물들지 않습니다.  
탐욕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물지 않습니다.
그처럼 법을 인식하는 자 그리고 느낌을 경험하는 자는
허물고, 쌓지 않습니다. 마음챙기는 그는 이렇게 실천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허무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가깝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에 의해 간략하게 설해진 이 말씀의 상세한 뜻을 이렇게 압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말루꺄뿟따여! 그대는 내가 간략하게 설한 이 말의 상세한 뜻을 잘 알았다.

 

사랑스러운 표상에 마음을 내는 자는 형색을 보면서 마음챙김을 놓아 버린다.
탐욕에 물든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문다.
그에게 형색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느낌들이 증장한다.
간탐(慳貪)과 불쾌함이 마음을 해친다.
이렇게 괴로움을 쌓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멀다. ··· 

 

법을 인식하면서 마음챙김을 놓지 않는 자는 법들에 물들지 않는다.  
탐욕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는 경험하고, 그것에게 묶여 머물지 않는다.
그처럼 법을 인식하는 자 그리고 느낌을 경험하는 자는
허물고, 쌓지 않는다. 마음챙기는 그는 이렇게 실천한다.
이렇게 괴로움을 허무는 자에게 열반으로 해탈됨은 가깝다.

 

말루꺄뿟따여, 내가 간략하게 설한 이 말의 상세한 뜻은 이렇게 보아야 한다.”

 

그러자 말루꺄뿟따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에게 경의를 표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물러갔다. 그리고 홀로 외딴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로써 머문 말루꺄뿟다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알았다. 말루꺄뿟따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parihānadhammasuttaṃ (SN 35.96-퇴보하는 법 경)
96.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퇴보하는 법과 퇴보하지 않는 법과 여섯 가지 지배의 경지를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들어라. 그러면 어떻게, 비구들이여, 퇴보하는 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끊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나는 선법들로부터 퇴보한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퇴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 한다. ···

 

*여기서 '기억'은 sara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는 이것을 dhavati(달리다)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SA.ii.384) 그래서 복주석서는 대상(visaya)에 안주하지 못하는 상태로 설명하고 있다.(SAT.iii.2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혀로 맛을 맛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끊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나는 선법들로부터 퇴보한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퇴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퇴보하는 법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비구들이여, 퇴보하지 않는 법이 있는가? 여기, 구들이여, 비구에게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나는 선법들로부터 퇴보하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퇴보하지 않음이라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 한다. ···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혀로 맛을 맛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나는 선법들로부터 퇴보하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퇴보하지 않음이라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퇴보하지 않는 법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의 감각접촉의 장소의 지배는 무엇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여섯 가지 감각접촉 장소의 지배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 한다. ···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족쇄에 묶이기 마련인 기억과 사유의 악한 불선법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에 대해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여섯 가지 감각접촉 장소의 지배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 한다.

 

pamādavihārīsuttaṃ (SN 35.97-방일에 머무는 자 경)

97.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방일(放逸)에 머무는 자와 불방일(不放逸)에 머무는 자에 대하여 설하겠다. 그것을 들어라.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방일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의 마음은 물든다. 눈으로 인식해야 하는 형색들에 대해 물든 마음을 가진 자에게 환희가 없다. 환희가 없을 때 희열이 없고, 희열이 없을 때 평온이 없고, 평온이 없을 때 괴로움이 있다. 괴로운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들지 않는다. 마음이 삼매를 닦지 않을 때 법들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 방일에 머무는 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 혀의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의 마음은 물든다. 혀로 인식해야 하는 맛들에 대해 물든 마음을 가진 자에게 ··· 마음의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의 마음은 물든다. 마음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에 대해 물든 마음을 가진 자에게 환희가 없다. 환희가 없을 때 희열이 없고, 희열이 없을 때 평온이 없고, 평온이 없을 때 괴로움이 있다. 괴로운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들지 않는다. 마음이 삼매를 닦지 않을 때 법들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 방일에 머무는 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방일에 머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불방일에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하며 머무는 자의 마음은 물들지 않는다. 눈으로 인식해야 하는 형색들에 대해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 환희가 일어난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일어난다. 마음이 희열하면 몸이 편안하다.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에게 머문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들어진다.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법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불방일에 머무는 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 혀의 감각기능을 단속하며 머무는 자의 마음은 물들지 않는다. 혀로 인식해야 하는 맛들에 대해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 ··· 불방일에 머무는 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마음의 감각기능을 단속하며 머누는 자의 마음은 물들지 않는다. 마음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에 대해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 횐희가 일어난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일어난다. 마음이 희열하면 몸이 편안하다.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들어진다.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법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불방일에 머무는 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불방일에 머문다.”

 

saṃvarasuttaṃ (SN 35.98-단속 경)
98.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단속과 단속 아님(단속하지 못함)을 설하겠다. 그것을 들어라. 비구들이여, 무엇이 단속 아님(단속하지 못함)인가? 비구들이여,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며 환락을 야기하기 마련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동의하고 환영하고 묶여 머물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이것이 쇠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한다. ···
비구들이여,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 비구들이여,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며 환락을 야기하기 마련인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동의하고 환영하고 묶여 머물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이것이 쇠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단속 아님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단속인가? 비구들이여,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며 환락을 야기하기 마련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동의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으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는다. 이것이 쇠퇴 아님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다.’라고 알아야 한다. ··· 비구들이여,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 비구들이여,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며 환락을 야기하기 마련인 법들이 있다. 만약 비구가 그것을 동의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으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는다. 이것이 쇠퇴 아님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라고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단속이 있다.”

 

samādhisuttam (SN 35.99-삼매 경)
99.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리는가?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형색은 무상하다고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눈의 의식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눈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귀는 ··· 소리는 ··· 귀의 의식은 ··· 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코는 ··· 냄새는 ··· 코의 의식은 ··· 코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혀는 ··· 맛은 ··· 혀의 의식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몸은 ··· 감촉은 ··· 몸의 의식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마음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법(마음현상)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마음의 의식는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마음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마음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paṭisallāṇasuttam (SN 35.100-홀로 머묾 경)

100.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홀로 머묾에 전념하는 길을 닦아라. 비구들이여, 홀로 머묾에 전념하는 길을 닦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리는가?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형색은 무상하다고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눈의 의식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눈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귀는 ··· 소리는 ··· 귀의 의식은 ··· 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코는 ··· 냄새는 ··· 코의 의식은 ··· 코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혀는 ··· 맛은 ··· 혀의 의식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몸은 ··· 감촉은 ··· 몸의 의식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마음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법(마음현상)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마음의 의식는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마음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마음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홀로 머묾에 전념하는 길을 닦아라. 비구들이여, 홀로 머묾에 전념하는 길을 닦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pathamanatumhākasuttam (SN 35.101-그대들의 것이 아님 경1)
101. 
“비구들이여,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은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그대들의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형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의식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감각접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귀는 ··· 소리는 ··· 귀의 의식은 ··· 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코는 ··· 냄새는 ··· 코의 의식은 ··· 코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혀는 ··· 맛은 ··· 혀의 의식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몸은 ··· 감촉은 ··· 몸의 의식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마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법(마음현상)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음의 의식(마음에 의한 식별)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음의 감각접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음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사람들이 이 제따 숲에서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가져가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들에게 ‘사람들이 우리를 가져간다거나 태운다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세존이시여, 그것은 자아가 아니고 자아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 마음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dutiyanatumhākasuttam (SN 35.102-그대들의 것이 아님 경2)
102. “비구들이여,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은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그대들의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형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의식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감각접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귀는 ··· 소리는 ··· 귀의 의식은 ··· 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코는 ··· 냄새는 ··· 코의 의식은 ··· 코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혀는 ··· 맛은 ··· 혀의 의식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몸은 ··· 감촉은 ··· 몸의 의식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마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법(마음현상)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음의 의식(마음에 의한 식별)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음의 감각접촉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음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udakasuttaṃ (SN 35.103-웃다까 경)
103. “비구들이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이렇게 공언한다.
‘참으로 이것이 높은 앎을 이룩한 자, 참으로 이것이 일체의 승리자, 참으로 이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를 그는 파내었다.’라고.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 웃다까 라마뿟따는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아니면서 ‘나는 높은 앎을 이룩한 자다.’라고 말한다. 일체의 승리자가 아니면서 ‘나는 일체의 승리자다.’라고 말한다.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 ‘나에게 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바르게 말하는 비구는말해야 한다.
‘참으로 이것이 높은 앎을 이룩한 자, 참으로 이것이 일체의 승리자, 참으로 이것이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파내버렸다.’라고.

 

*'높은 앎'으로 옮긴 vedagu는 "베다라 불리는 지혜를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을 증득했다, 나는 현자이다'라는 뜻이다.*SA.ii.386) 그러나 vedagu는 불교에서는 아라한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일체의 승리자(sabba-ji)'라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윤회를 이기고 승리하여 나는 확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SA.ii.386)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apalikhata ganda-mula)'란 아직 파내지 못한 괴로움의 뿌리라는 말이다.(SA.ii.386)

 

비구들이여, 어떻게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되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일체의 승리자가 되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일체의 승리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에게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가 파내지는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고,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인 이 몸을 지시하여 종기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갈애를 지시하여 종기의 뿌리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갈애는 제거되었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짤려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에게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가 파내진다.

 

비구들이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이렇게 공언한다.
‘참으로 이것이 높은 앎을 이룩한 자, 참으로 이것이 일체의 승리자, 참으로 이 파내지 못한 이 종기의 뿌리를 그는 파내었다.’라고.
그러나, 비구들이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아니면서 ‘나는 높은 앎을 이룩한 자다.’라고 말한다. 일체의 승리자가 아니면서 ‘나는 일체승자다.’라고 말한다.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 ‘나에게 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바르게 말하는 비구가 말해야 한다.

 ‘참으로 이것이 높은 앎을 이룩한 자, 참으로 이것이 일체의 승리자, 참으로 이것이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를 그는 파내었다.’라고.”

 


제10장 여섯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