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바라문 품 Brāhmaṇa-vagga(AN3.52-61)
paṭhamadvebrāhmaṇasuttaṃ (AN 3.52-두 바라문 경1)
52.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르렀고 태어난 지 120년이 된 두 명의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들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우리는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르렀고 태어난지 12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유익(有益)을 만들지 못했고, 선(善)을 만들지 못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고따마 존자는 우리는 지도해 주십시오. 고따마 존자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위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참으로, 바라문들이여, 그대들은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고 태어난지 12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유익(有益)을 만들지 못했고, 선(善)을 만들지 못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은 늙음과 병과 죽음으로 이끌립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이 늙음과 병과 죽음으로 이끌릴 때, 여기서 몸으로 제어하고, 말로 제어하고, 마음으로 제어하는 것은 죽은 자에게 피난처가 되고, 동굴이 되고, 섬이 되고, 의지처가 되고, 버팀목이 됩니다."
수명은 짧고, 삶은 이끌린다.
늙음에 이끌린 자에게 피난처는 없다.
죽음에 대한 이런 두려움을 보는 자는
행복을 가져올 공덕을 지어야 한다.
여기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제어한 것
사는 동안 공덕을 지은 것
그것은 죽은 자에게 행복이 된다.
dutiyadvebrāhmaṇasuttaṃ (AN 3.53-두 바라문 경2)
53.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르렀고 태어난 지 120년이 된 두 명의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들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우리는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르렀고 태어난지 12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유익(有益)을 만들지 못했고, 선(善)을 만들지 못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고따마 존자는 우리는 지도해 주십시오. 고따마 존자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위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참으로, 바라문들이여, 그대들은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고 태어난지 12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유익(有益)을 만들지 못했고, 선(善)을 만들지 못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은 늙음과 병과 죽음으로 이끌립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이 늙음과 병과 죽음으로 이끌릴 때, 여기서 몸으로 제어하고, 말로 제어하고, 마음으로 제어하는 것은 죽은 자에게 피난처가 되고, 동굴이 되고, 섬이 되고, 의지처가 되고, 버팀목이 됩니다."
집이 불탈 때 가지고 나온 가재도구들, 거기서 불타지 않은 것들
그것은 그에게 도움이 된다.
이렇게 세상은 늙음과 죽음으로 불타고 있다.
보시에 의해서 꺼내야 하고, 보시한 것은 잘 꺼낸 것이다.
여기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제어한 것
사는 동안 공덕을 지은 것
그것은 죽은 자에게 행복이 된다.
aññatarabrāhmaṇasuttaṃ (AN 3.54-어떤 바라문 경)
54. 그 무렵 어떤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라고 불립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유쾌해 하고 탐욕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합니다. 탐욕이 버려질 때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도, 바라문이여,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
바라문이여, 불쾌해 하고 성냄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한다. 성냄이 버려질 때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하지 않는다. 이렇게도, 바라문이여,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
바라문이여, 열중하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합니다. 성냄이 버려질 때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도, 바라문이여,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 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paribbājakasuttaṃ (AN 3.55-유행승 경)
55. 그 무렵 어떤 바라문 유행승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 유행승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라고 불립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유쾌해 하고 탐욕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합니다. 탐욕이 버려질 때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유쾌해 하고 탐욕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합니다. 탐욕이 버려질 때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유쾌해하고 탐욕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탐욕이 버려질 때 자신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렇게도, 바라문이여,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불쾌해하고 성냄에 사로잡히고 ··· 바라문이여, 열중하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합니다. 어리석음이 버려질 때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열중하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합니다. 어리석음이 버려질 때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열중하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음이 버려질 때 자신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렇게도, 바라문이여,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 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nibbutasuttaṃ (AN 3.56-꺼진 것[열반(涅槃)] 경)
56. 그 무렵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열반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열반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라고 불립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점에서 열반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유쾌해하고 탐욕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합니다. 탐욕을 버려질 때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도, 바라문이여, 열반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불쾌해하고 성냄에 사로잡히고 ··· 바라문이여, 열중하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합니다. 탐욕을 버려질 때 자신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의도도 하지 않고, 마음에 속한 고통과 고뇌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도, 바라문이여, 열반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그가 완전한 탐욕의 부서짐을 경험하고, 완전한 성냄의 부서짐을 경험하고, 완전한 어리석음의 부서짐을 경험할 때, 이렇게, 바라문이여, 열반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 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palokasuttaṃ (AN 3.57-부서짐 경)
57. 그 무렵 어떤 부유한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부유한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늙고 나이든 스승의 스승들이었던 예전의 바라문들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전에 이 세상은, 생각건대 큰 지옥처럼, 사람들로 가득 찼었다. 마을과 성읍과 수도들은 닭이 날아가서 앉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지금은 사람들이 없어지고 줄어들었습니까? 마을도 마을이 아니게 되고, 성읍도 성읍이 아니게 되고, 수도도 수도가 아니게 되었습니까?”
“바라문이여, 지금의 사람들은 비법(非法)을 좋아하는 것을 유쾌해하고, 일어난 탐욕에 속박되고, 삿된 법에 빠져 있습니다. 비법(非法)을 좋아하는 것을 유쾌해하고, 일어난 탐욕에 속박되고, 삿된 법에 빠진 그들은 예리한 칼을 가지고 서로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지금은 사람들이 없어지고 줄어들었습니다. 마을도 마을이 아니게 되고, 성읍도 성읍이 아니게 되고, 수도도 수도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지금의 사람들은 비법(非法)을 좋아하는 것을 유쾌해하고, 일어난 탐욕에 속박되고, 삿된 법에 빠져 있습니다. 비법(非法)을 좋아하는 것을 유쾌해하고, 일어난 탐욕에 속박되고, 삿된 법에 빠진 그들에게 하늘은 때에 맞춰 비를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기근이 들고, 작황이 나쁘고, 줄기는 하얗게 되고, 잎사귀는 떨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지금은 사람들이 없어지고 줄어들었습니다. 마을도 마을이 아니게 되고, 성읍도 성읍이 아니게 되고, 수도도 수도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지금의 사람들은 비법(非法)을 좋아하는 것을 유쾌해하고, 일어난 탐욕에 속박되고, 삿된 법에 빠져 있습니다. 비법(非法)을 좋아하는 것을 유쾌해하고, 일어난 탐욕에 속박되고, 삿된 법에 빠진 그들에게 약카들은 비인간인 맹수들을 풀어 놓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지금은 사람들이 없어지고 줄어들었습니다. 마을도 마을이 아니게 되고, 성읍도 성읍이 아니게 되고, 수도도 수도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주석서에는 약카의 우두머리가 흉포한 약카들을 인간들에게 보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AA.ii.257)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 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vacchagottasuttaṃ (AN 3.58-왓차곳따 경)
58. 그 무렵 왓차곳따 유행승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왓차곳따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사문 고따마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나에게만 보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나의 제자들에게만 보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제자들에게는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없다. 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있고, 다른 사람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없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오직 나에게만 보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나의 제자들에게만 보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제자들에게는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없다. 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있고, 다른 사람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없다.’라고 사문 고따마는 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따마 존자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따마 존자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까?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고따마 존자가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고따마 존자를 비방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왓차꼿따 유행승(Vaccagotta paribbajaka)은 라자가하의 왓차라는 족성을 가진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다. 그래서 왓차꼿따(왓차라는 족성을 가진 자)라고 부른다.(ThgA.i.235)
"왓차여, ‘오직 나에게만 보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나의 제자들에게만 보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제자들에게는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없다. 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있고, 다른 사람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없다.’라고 사문 고따마는 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태가 말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왓차여, 다른 사람을 보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은 세 사람을 방해하고, 세 사람을 위험하게 한다. 어떤 세 가지인가?
보시하는 자의 공덕을 방해하고, 보시받는 자의 얻음을 방해하고, 먼저 자신이 파괴되고 손상된다.
왓차여, 다른 사람을 보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은 이런 세 사람을 방해하고, 세 사람을 위험하게 한다.
왓차여, 나는 이렇게 말한다.
'마을 입구의 웅덩이나 마을 가까운 곳의 더러운 웅덩이에도 생명이 있고, 거기에 접시를 씻거나 잔을 씻는 사람이 ‘여기에 사는 생명이 먹게 되기를!' 이라면서 남기는 것을 인연으로도 공덕이 온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니 사람에 대한 보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또한, 왓차여, 나는 계를 중시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큰 공덕을 말한다. 계를 경시하는 사람에게는 아니다. 그는 다섯 가지를 버리고, 다섯 가지를 갖춘다.
어떤 다섯 가지를 버리는가?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고, 해태와 혼침을 버리고, 들뜸과 후회를 버리고, 의심을 버린다.
이런 다섯 가지를 버린다.
어떤 다섯 가지를 갖추는가?
무학(無學)의 계의 무더기를 갖추고[계온(戒蘊)], 무학의 삼매의 무더기를 갖추고[정온(定蘊)], 무학의 지혜의 무더기를 갖추고[혜온(慧蘊)], 무학의 해탈의 무더기를 갖추고[해탈온(解脫蘊)], 무학의 해탈지견의 무더기를 갖춘다[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
이렇게 다섯 가지를 버리고, 다섯 가지를 갖춘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큰 결실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검은색이든, 흰색이든, 붉은색이든, 누런색이든
점박이든, 비둘기색을 가졌든 이렇게 소들과 관련해서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이든 짐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는
길든 황소가 오직 짐을 나른다. 색깔로 짐 싫는 소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간들 가운데서는 끄샤뜨리야, 바라문, 와이샤, 수드라, 불가촉천민의
어느 가문에 태어나든지
이들 가운데 누구든지 길들어 좋은 품행을 가진 자가 생긴다.
정의로운 자, 계를 갖춘 자, 진실을 말하는 자,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있는 자
생사를 버린 자, 온전히 청정범행을 실천한 자
짐을 내려놓은 자, 윤회에서 벗어난 자, 할 일을 해 마친 자, 번뇌 없는 자,
모든 법의 저편으로 갔고, 집착하지 않아서 꺼진 자인
오직 더러움 없는 그 밭에서 보시는 풍성한 결과가 있다.
어리석은 자, 알지 못하는 자, 지혜 없는 자, 배우지 못한 자는
평화로운 자를 섬기지 않고, 밖의 외도에게 보시한다.
평화롭고, 지혜가 있고, 현자들에 의해 존경받는 분들을 섬기는 사람들
그들에게 선서에 대한 믿음이 뿌리로부터 확고하다.
그들은 신들의 세상으로 간다. 아니면 이 세상의 좋은 가문에 태어난다.
현명한 자들은 점진적으로 열반을 성취한다.
tikaṇṇasuttaṃ (AN 3.59-띠깐나 경)
59. 그 무렵 띠깐나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띠깐나 바라문은 세존의 면전에서 삼명(三明)을 구족한 바라문들을 칭찬했다.
“이렇게도 삼명을 갖춘 바라문이 되고, 저렇게 삼명을 갖춘 바라문이 됩니다.'"라고.
“그것과 관련해서,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은 어떻게 바라문들의 삼명을 선언합니까?”
“여기,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은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으로부터 잘 태어난 순수 혈통이고, 태생에 관한 토론에서 일곱 선조까지 멸시당하지 않고, 비난받지 않습니다. 베다를 공부하고, 만트라를 전승합니다. 세 가지 베다와 제사어휘와 음운과 어원과 다섯 번째로 역사를 통달했고, 베다의 문장에 숙달됐고, 문법을 알고, 대중철학과 대인상에 대해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은 삼명을 선언합니다.”
*'삼명(三明)'으로 옮긴 원어는 tevijja 인데 불교에서는 삼명을 가진 혹은 세 가지 명지를 가진 자를 뜻한다. 불교에서 삼명은 본경에서 설하시듯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세 가지이다. 그러나 바라문들에게 삼명은 바로 세 가지 베다에 통달한 자를 말한다.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바라문들의 삼명을 선언하는 것과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가 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고따마 존자시여, 성스러운 율에서는 어떻게 삼명을 갖춘 자가 됩니까? 저에게 고따마 존자께서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여.”라고 띠깐나 바라문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바라문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심일경성.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합니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첫 번째 명지[明知]를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천상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두 번째 명지를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쾌락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고,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압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세 번째 명지를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이 생긴 것입니다.
변함없이 계를 지니고, 신중하게 선(禪)을 닦는 자의
마음은 숙달되고 집중되고 잘 삼매를 닦는다.
어둠이 밀려나고, 현명하고, 삼명(三明)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신과 인간들에게 이익을 주고, 모든 [선하지 않은 법을] 것을 버린 그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삼명을 갖춘 분, 혼란없이 머무는 분
마지막 몸을 가진 그분, 고따마 깨달은 분을 공경합니다.
이전의 존재 상태를 아는 분, 천상과 지옥을 보는 분
그리고 태어남의 부서짐을 성취한 분, 바른 지혜로 완성한 성자.
이런 세 가지 명지에 의해 삼명을 갖춘 바라문이 된다.
나는 그것을 삼명을 갖춘 자라고 말하지 말로만 그렇게 불리는 다른 자를 나는 삼명을 갖춘 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바라문이여,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가 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 가운데 삼명을 갖춘 자와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는 다릅니다. 이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에 비해 바라문들 가운데 삼명을 갖춘 자는 십육 분의 일의 가지도 없습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 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jāṇussoṇisuttaṃ (AN 3.60-자눗소니 경)
60. 그 무렵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제사를 지낼 공물이 있고, 조상에게 올릴 음식이 있고, 훌륭한 사람에게 올릴 음식이 있고, 보시할 다른 물건이 있는 사람은 삼명을 갖춘 바라문에게 보시해야 합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삼명은 무엇입니까?”
“여기,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은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으로부터 잘 태어난 순수 혈통이고, 태생에 관한 토론에서 일곱 선조까지 멸시당하지 않고, 비난받지 않습니다. 베다를 공부하고, 만트라를 전승합니다. 세 가지 베다와 제사어휘와 음운과 어원과 다섯 번째로 역사를 통달했고, 베다의 문장에 숙달됐고, 문법을 알고, 대중철학과 대인상에 대해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은 삼명을 선언합니다.”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바라문들의 삼명을 선언하는 것과 성스러운 율에서의 삼명을 가진 자는 다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고따마 존자시여, 성스러운 율에서는 어떻게 삼명을 가진 자가 됩니까? 고따마 존자께서 저에게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가진 자가 되는 법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바라문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합니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첫 번째 명지[明知]를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천상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두 번째 명지를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쾌락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고,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압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세 번째 명지를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이 생긴 것입니다.
'계와 의식을 갖추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삼매를 닦는 자
그의 마음은 숙달되고, 집중되고, 삼매를 잘 닦는다.
그는 이전의 존재 상태를 경험하고, 하늘과 지옥을 본다.
그리고 태어남의 부서짐을 성취했고, 바른 지혜가 완성된 성자이다.
이런 삼명에 의해 삼명을 갖춘 바라문이 된다.
그것을 나는 삼명을 갖춘 자라고 말한다. 단지 말로만 그렇게 불리는 다른 자를 나는 삼명을 구족한 자라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바라문이여,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가 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 가운데 삼명을 갖춘 자와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는 다릅니다. 이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에 비해 바라문들 가운데 삼명을 갖춘 자는 십육 분의 일의 가지도 없습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 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saṅgāravasuttaṃ (AN 3.61-상가라와 경)
61. 그 무렵 상가라와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우리 바라문들은 스스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다른 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기도 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거기서 스스로 제사를 지내는 자와 다른 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는 자는 모두 많은 사람들에 대한 공덕의 실천을 실천하는 것이니 곧 제사로 인한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러나 어떤 가문이든지 또는 그 가문의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자기 하나만을 길들이고, 자기 하나만을 고요하게 하고, 자기 하나만을 완전한 열반으로 향합니다. 이렇게 이것은 한 사람에 대한 공덕의 실천을 실천하는 것이니 곧 출가로 인한 것입니다.”라고.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에 의하면 상가라와 바라문(Sangarava brahmana)은 라자가하에서 오래된 건문을 수리하는 감독관이었다고 한다. 그는 '상윳따 니까야' 몇몇 경에도 나타나는 상가라와 바라문과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주석서에 의하면 그는 아난다 존자가 재가자였을 때 친구였다고 한다.(SA.i.266)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이제 그대에게 다시 물어 볼 것입니다. 그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설명하십시오. 바라문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아라한[araham]이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며, 깨달은 분(buddho)이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세존)(bahgava)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오라! 이런 길이 있고 이런 닦음이 있다. 나는 그 길을 의지하여 닦아서 위없는 범행에 속한 것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그것을 선언한다. 오라! 그대들도 그와 같이 닦아라. 그와 같은 방법으로 닦는 그대들도 위없는 범행에 속한 것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 스승은 법을 설하고 다른 사람들은 진실을 얻기 위해 닦는다. 그리고 그들은 수백, 수천, 수십만 명이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렇게 이것이 있을 때, 출가로 인한 이것은 한 사람을 위한 공덕의 실천입니까, 또는 많은 사람을 위한 공덕의 실천입니까?”
“고따마 존자여, 이렇게 이것이 있을 때, 출가로 인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공덕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아난다 존자가 상가라와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 두 가지 실천 중에 어떤 실천이 옳다고 봅니까? 필요로 하는 것도 더 적고, 하는 일도 더 적지만 더 많은 결실과 더 많은 이익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했을 때, 상가라와 바라문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고따마 존자와 아난다 존자처럼, 이것들은 나에게 훓륭하고 칭찬할만합니다.”
두 번째도 아난다 존자는 상가라와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라문이여, 나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들이 그대에게 훌륭합니까? 또는 어떤 것들이 그대에게 칭찬할만합니까?'라고. 바라문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 두 가지 실천 중에 어떤 실천이 옳다고 봅니까? 필요로 하는 것도 더 적고, 하는 일도 더 적지만 더 많은 결실과 더 많은 이익이 있습니까?'라고.”
두 번째도 상가라와 바라문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고따마 존자와 아난다 존자처럼, 이것들은 나에게 훌륭하고 칭찬할만합니다.”
세 번째도 아난다 존자가 상가라와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라문이여, 나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들이 그대에게 훌륭합니까? 또는 어떤 것들이 그대에게 칭찬할만합니까?'라고. 바라문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 두 가지 실천 중에 어떤 실천이 옳다고 봅니까? 필요로 하는 것도 더 적고, 하는 일도 더 적지만 더 많은 결실과 더 많은 이익이 있습니까?'라고.”
세 번째도 상가라와 바라문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고따마 존자와 아난다 존자처럼, 이것들은 나에게 훌륭하고 칭찬할만합니다.”
그러자 세존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 번이나 상가라와 바라문은 아난다로부터 법에 맞는 질문을 계속 받고 있지만,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해주어야겠다.'라고. 그래서 세존께서는 상가라와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왕궁에서 대신들이 모여앉아 함께 대화하는 중에 어떤 주제가 있었습니까?”
“고따마 존자여, 왕궁에서 대신들이 모여앉아 함께 대화하는 중에 이런 주제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더 적은 비구들이 있었지만, 더 많은 비구가 인간을 넘어선 법들인 신통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많은 비구가 있지만, 더 적은 비구들이 인간을 넘어선 법들인 신통변화를 보여준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왕궁에서 대신들이 모여앉아 함께 대화하는 중에 이런 주제가 있었습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세 가지 이적((示導)이 있습니다. 무엇이 셋입니까? 신통에 의한 이적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이적과 가르침에서의 이적입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무엇이 신통에 의한 이적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다양한 신통을 실행합니다. 하나가 되었다가 여럿이 됩니다.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됩니다. 드러났다가 사라집니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습니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습니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습니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 달린 새와 같습니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습니다. 브라흐마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칩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신통에 의한 이적이라고 불립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무엇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이적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드러난 모습(因相.인상)을 통해 지적합니다. 그대의 생각(意)은 이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생각은 그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마음은 저러하다고, 그는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드러난 모습을 통해 지적하지 않고, 인간이거나 인간이 아닌 이, 천신등의 말을 듣고 지적합니다. 그대의 생각은 이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생각은 그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마음은 그러하다고, 그는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이가 있어 드러난 모습을 통해 지적하지 않고 인간이거나 인간이 아닌 이, 천신등의 말을 들어 지적하지 않고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통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에 의한 소리를 듣고 지적합니다. 그대의 생각은 이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생각은 그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마음은 그러하다고, 그는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드러난 모습으로 지적하지 않고, 인간이건 인간이 아닌 이, 천신등의 말을 들어 지적하지 않고,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통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에 의한 소리를 들어 지적하지 않고, 거친 사유도 없고 미세한 사유도 없는 삼매에 들어가 마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와 같이 그대의 마음의 형성력이 향하는 대로 바로 그와 같이 그 마음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참으로 그와 같은 사유를 사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그는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이적이라고 불립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무엇이 가르침에서의 이적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이와 같이 훈계합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고, 그와 같이 사유하지 말라. 이와 같이 마음을 먹고, 그와 같이 마음을 먹지 말라. 이와 같이 끊고, 그와 같이 갖추어 머물러라'라고.
바라문이여, 이것을 가르침에서의 이적이라고 불립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세 가지 이적입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세 가지 이적 중에 어떤 이적이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나서 좋다고 생각합니까?”
“고따마 존자여, 거기 이 이적에서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신통을 실행합니다. 자께서는 이러한 이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다양한 신통을 행한다. 하나가 되었다가 ··· 브라흐마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칩니다.' 고따마 존자여, 이 이적은 오직 그것을 행하는 자만이 그것을 경험합니다. 오직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만 그것이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이 이적은 나에게 환상이 함께한 것처럼 보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이 이적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습니다. '여기에 어떠한 이가 있어 드러난 모습(因相.인상)을 ···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이 이적도 오직 그것을 행하는 자만이 그것을 경험합니다. 오직 그것을 행하는 자만에게만 그것이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이 이적도 나에게 환상이 함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고따만 존자여, 이 비범에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고, 그와 같이 사유하지 말라. 이와 같이 마음을 먹고, 그와 같이 마음을 먹지 말라. 이와 같이 끊고, 그와 같이 갖추어 머물러라'라고. 고따마 존자여, 오직 이 이적이 이런 세 가지 이적 중에 이런 이적이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나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에 의해서 잘 말해진 이것만큼 우리는 이런 세 가지 이적을 구족한 고따마 존자를 받아들입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는 여러 가지 신통변화을 실행합니다. 하나가 되었다가 ··· 위력을 미칩니다. 고따마 존자는 거친 사유도 없고 미세한 사유도 없는 삼매에 들어가 마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와 같이 그대의 마음의 형성력이 향하는 대로 바로 그와 같이 그 마음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참으로 그와 같은 사유를 사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고따마 존자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고, 그와 같이 사유하지 말라. 이와 같이 마음을 먹고, 그와 같이 마음을 먹지 말라. 이와 같이 끊고, 그와 같이 갖추어 머물러라'라고."
“바라문이여, 나는 거의 비난하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설명하겠습니다. 바라문이여,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실행합니다. ··· 위력을 미칩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거친 사유도 없고 미세한 사유도 없는 삼매에 들어가 마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와 같이 그대의 마음의 형성력이 향하는 대로 바로 그와 같이 그 마음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참으로 그와 같은 사유를 사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바라문이여, 나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고, 그와 같이 사유하지 말라. 이와 같이 마음을 먹고, 그와 같이 마음을 먹지 말라. 이와 같이 끊고, 그와 같이 갖추어 머물러라'라고.”
“그런데 고따마 존자여, 고따마 존자 외에 이런 세 가지 이적을 갖춘 다른 비구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이런 세 가지 이적을 구족한 비구들은 백 명, 이백 명, 삼백 명, 사백 명, 오백 명이 아니라 거기서 더 넘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 비구들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바로 이 비구승가에 있습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 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제6장 바라문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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