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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의 모음 - 5. 로히땃사 품(Rohitassa-vagga. AN4.41-50)

실론섬 2014. 6. 22. 12:52

제5장 로히땃사 품 Rohitassa-vagga(AN.41-50)

 

samādhibhāvanāsuttaṃ (AN 4.41-삼매수행(三昧修行) 경)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삼매의 닦음(삼매수행.三昧修行)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하면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하면  지(知)와 견(見)의 얻음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하면 마음 챙기고 알아차림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하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삼매의 수행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닦고 많이 행하면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하면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닦고 많이 행하면 지와 견의 얻음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광명상(光明想)에 주의를 기울이고, ‘낮처럼 밤을, 밤처럼 낮을' 이라며 낮의 인식을 확립한다. 이렇게 열려있고 덮여있지 않은 마음으로 빛나는 마음을 닦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하면 지와 견의 얻음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닦고 많이 행하면 마음 챙기고 알아차림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는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느낌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한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인식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한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히면 마음 챙기고 알아차림으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닦고 많이 행하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삼매의 수행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五取蘊)들의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짐을 이어보면서(관찰하며) 머문다. 

‘이것이 물질(물질적 요소)이다. 이것이 물질(색)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감수작용)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지각작용)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형성작용)이다. 이것이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식별작용)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닦고 많이 행하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삼매의 닦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삼매의 닦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점에 대해서 이미『숫따니빠따』「도피안 품」「뿐나까의 질문」에서 설하였다.”

 

"세상의 높고 낮은 것을 지혜롭게 알아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고요하고 집착없고 괴로움 없고 갈애 없는 자

그는 태어남과 늙음을 건넜다고 나는 말한다.”

 

pañhabyākaraṇasuttaṃ (AN 4.42-질문에 대한 대답 경)

42. “비구들이여,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런 네 가지가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질문은 확실하게(단언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질문은 분석해서 대답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질문은 되물어서 대답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질문은 대답을 보류해야 한다(무응답). 비구들이여,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런 네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은 확실하게 말해야 하고, 음은 분석해서 말해야 한다. 

세 번째는 되물어야 하고, 네 번째는 보류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그것들을 법에 맞게 아는 사람

사람들은 그런 비구를 네 가지 질문에 능숙한 자라고 부른다.

 

그는 다른 이가 공격하기 어렵고 정복하기 어려운 사람, 심오하고 공격하기 어려운 사람

이익과 손해에서 양면으로 영리한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손해를 피하고, 이익을 붙잡는다.

이익을 실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질문(ekamsa-vyakaraniya)'등에 대해서 그 뜻은 다음과 같다.
'눈은 무상합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물론입니다. 무상합니다.'라고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단언적으로(ekamsena)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다.  
'무상하다는 것은 눈을 말합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귀도 무상하고 코도 무상합니다.'라고 분석한 뒤에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분석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vobhajja-vyakaraniya)이다.  
'눈처럼 귀도 그러하고 귀처럼 눈도 그러하지요?'라고 물으면 '무슨 뜻으로 물은 것입니까?'라고 되물은 뒤에 '본다는 의미로 물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무상하다는 뜻으로 물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렇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되물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patipuccha-vyakaraniya)이다.  
'생명이 곧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몸은 다릅니까?'라는 등의 질문에 대해서는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보류(제쳐두어야)한다. 이것이 보류해야 하는(thapaniya) 질문이다.(AA.ii.308-309)

 

kodha-sutta (AN4.43-분노 경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분노를 중시하지만 정법을 중시하지 않고, 위선을 중시하지만 정법을 중시하지 않고, 이득을 중시하지만 정법을 중시하지 않고, 존경을 중시하지만 정법을 중시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정법을 중시하지만 분노를 중시하지 않고, 정법을 중시하지만 위선을 중시하지 않고, 정법을 중시하지만 이득을 중시하지 않고, 정법을 중시하지만 존경을 중시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분노와 위선을 중시하고 이득과 존경을 중시하는 비구들

정등각이 설한 법에서 향상하지 못한다.

과거에 정법을 존중하면서 머물렀고 현재에도 정법을 존중하면서 머무는 자들

정등각이 설한 법에서 참으로 향상한다.”

 

분노 경2(AN 4.44) 

44. “비구들이여, 네 가지 바르지 못한 법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분노를 중시하지만 정법을 중시하지 않고, 위선을 중시하지만 정법을 중시하지 않고, 이득을 중시하지만 정법을 중시하지 않고, 존경을 중시하지만 정법을 중시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바르지 못한 법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정법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정법을 중시하지만 분노를 중시하지 않고, 정법을 중시하지만 위선을 중시하지 않고, 법을 중시하지만 이득을 중시하지 않고, 정법을 중시하지만 존경을 중시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정법이다.”

 

“분노와 위선을 중시하고   이득과 존경을 중시하는 비구는

바른 법들에서 향상하지 못한다.

마치 썩은 씨앗은 좋은 땅에서도 싹을 틔우지 못하듯이,

과거에 정법을 존중하면서 머물렀고

현재에도 정법을 존중하면서 머무는 자들

그들은 법에서 향상한다. 약초가 좋은 땅에서 잘 자라듯이.”

 

rohitassasuttaṃ (AN 4.45-로히땃사 경)

45.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띠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멋진 용모를 가진 신의 아들 로히땃사가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고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신의 아들 로히땃사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습니까?”

“로히땃사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로히땃사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이러한 훌륭한 법을 말씀하시니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옛날 로히땃사라고 불리는 선인(仙人)이었습니다. 저는 보자라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신통을 가져서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빨라서 마치 훈련되고 숙련된 궁수가 힘들이지 않고 화살을 쏘아서 야자나무의 그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화살처럼 빨랐으며, 저는 걸음걸이가 커서 동쪽의 바다에서 서쪽의 바다를 한 걸음으로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속력을 갖추었고 이러한 큰 걸음걸이를 가졌기에 제게는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제겐 아직 백년의 수명이 남아있어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과 피로를 제거하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걸었지만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제게 세존께서는 ‘로히땃사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이러한 훌륭한 법을 말씀하시니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로히땃사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로히땃사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로히땃사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바른 길을 천명한다.”

 

걸어감에 의해 닿아지지 않지만 세상의 끝은 언제 어느 때나 있다.
세상의 끝에 닿은 뒤에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은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끝에 도달하고 범행을 완성한
현명한 자는 세상을 잘 안다.
스스로 완전히 평화로운 자는 세상의 끝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갈망하지 않는다."

 

dutiyarohitassasuttaṃ (AN 4.46-로히땃사 경2)

46.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밤이 지나자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지난밤에 신의 아들 로히땃사가 밤이 아주 깊었을 때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고서 나에게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신의 아들 로히땃사는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나는 신의 아들 로히땃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로히땃사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신의 아들 로히땃사는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로히땃사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이러한 훌륭한 법을 말씀하시니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저는 옛날 로히땃사라고 불리는 선인(仙人)이었습니다. 저는 보자라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신통을 가져서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빨라서 마치 능숙한 궁수가 훈련을 통해서 힘들이지 않고 화살을 쏘아서 야자나무의 그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화살처럼 빨랐으며, 저는 걸음걸이가 커서 동쪽의 바다에서 서쪽의 바다를 한 걸음으로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속력을 갖추었고 이러한 큰 걸음걸이를 가졌기 때문에 제게는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제게 백년의 수명이 남아있어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 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과 피로를 제거하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걸었지만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제게 세존께서는 ‘로히땃사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이러한 훌륭한 법을 말씀하시니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나는 신의 아들 로히땃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로히땃사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로히땃사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로히땃사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바른 길을 천명한다.’라고.”

 

“걸어감에 의해 닿아지지 않지만 세상의 끝은 언제 어느 때나 있다. 
세상의 끝에 닿은 뒤에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은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끝에 도달하고 범행을 완성한 
현명한 자는 세상을 잘 안다. 
스스로 완전히 평화로운 자는 세상의 끝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갈망하지 않는다."

suvidūra-sutta (AN 4.47-원거리 경)

47. “비구들이여, 네 가지 원거리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하늘과 땅이 첫 번째 서로 먼 것이다. 바다의 이쪽 해변과 저쪽 해변이 두 번째 서로 먼 것이다.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과 지는 곳이 세 번째로 먼 것이다. 바른 법과 바르지 않은 법이 네 번째 서로 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원거리이다.”

 

“하늘과 땅은 서로 멀고 바다의 저쪽 해변도 이쪽과 멀고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도 지는 곳과 멀다고 한다.

그러나 바른 법과 바르지 않은 법의 사이는 이보다도 더 멀다고 한다.

 

현명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일시적이지 않아서

머무는 동안 내내 그 본성을 버리지 않지만

무지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즉시에 흐트러져 버린다.

그러므로 바른 법은 바르지 않은 법과 아주 멀다.”

 

visākha-sutta  (A4:48-위사카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빤짤리의 아들 위사카 존자가 집회소에서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며 해탈에 관계되고 갈애와 삿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는 법다운 이야기로 비구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다.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홀로 머묾을 풀고 일어나셔서 집회소로 가셨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아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누가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단어와 문장을 갖추어 갈애와 삿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집회소에서 법에 관한 이야기로 비구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는가?”

“세존이시여, 빤짤리의 아들 위사카 존자가 집회소에서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며 해탈에 관계되고 갈애와 삿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는 법다운 이야기로 비구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빤짤리의 아들 위사카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위사카여, 장하고도 장하구나. 위사카여, 그대가 집회소에서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며 해탈에 관계되고 갈애와 삿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는 법다운 이야기로 비구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다니 참으로 장하구나.”

 

“현자가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 섞여있을 때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한다.

말을 하더라도 불사(不死)의 길을 설할 때

사람들은 그를 알게 된다.

 

법을 설하고 밝혀라. 선인들의 깃발을 드날려라.

선인들은 잘 설하신 법을 깃발로 삼는다.

법이야말로 선인들의 깃발이기 때문이다.”

 

viipallāsa-sutta (AN4.49-뒤바뀜 (전도.顚倒) 경)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인식(想)의 전도, 마음(心)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무상에 대해 항상이라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해 즐거움이라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무아에 대해 자아(나)라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부정에 대해 깨끗하다는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인식에 의한 뒤바뀜, 마음에 의한 뒤바뀜, 견해에 의한 뒤바뀜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인식(想)의 전도, 마음(心)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인식의 전도되지 않음, 마음의 전도되지 않음, 견해의 전도되지 않음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무상에 대해서 무상이라는 인식의 전도되지 않음, 마음의 전도되지 않음, 견해의 전도되지 않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괴로움이라는 인식의 전도되지 않음, 마음의 전도되지 않음, 견해의 전도되지 않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아에 대해서 무아라는 인식의 전도되지 않음, 마음의 전도되지 않음, 견해의 전도되지 않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부정(不淨에 대해서 부정이라는 인식의 전도되지 않음, 마음의 전도되지 않음, 견해의 전도되지 않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인식의 전도되지 않음, 마음의 전도되지 않음, 견해의 전도되지 않음이 있다.

 

무상에 대해 항상이라는 인식을 가진, 괴로움에 대해 즐거움이라는 인식을 가진, 무아에 대해 자아라는,

부정에 대해 깨끗하다는 인식을 가진 중생들은 전도된 인식을 가진 것이어서 마음이 뒤집히고, 삿된 견해

때문에 상처 받는다. 마라의 족쇄에 묶여서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얻지 못하는 그 사람들,

태어남과 죽음으로 이끌리는 중생들은 윤회한다.

 

빛을 비추는 분인 깨달은 분들이 세상에 출현할 때, 그 깨달은 분들은 괴로움의 가라앉음으로 이끄는 법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 께달은 분들에게 배운 뒤에 그들은 지혜를 가지게 되고, 스스로 마음을 성취한다.

무상을 무상으로부터 보고, 괴로움을 괴로움으로부터 본다. 무아에 대해 무아라고,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고 본다.

바른 견해를 가져서 모든 괴로움을 극복한다.”

 

upakkilesa-sutta (AN 4.50-오염원 경)

50. “비구들이여, 네 가지 달과 태양의 오염원이 있다. 이들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달과 태양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구름은 달과 태양의 오염원이다.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달과 태양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안개는 달과 태양의 오염원이다.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달과 태양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연기와 먼지는 달과 태양의 오염원이다.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달과 태양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라후(일식과 월식)는 달과 태양의 오염원이다.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달과 태양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달과 태양의 오염원이다. 이들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되면 달과 태양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사문∙바라문들의 오염원이 있다. 이들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되면 사문∙바라문들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취하도록 하는 음료등을 취하고 그것을 마시는 것을 멀리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첫 번째 사문∙바라문들의 오염원이다.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사문∙바라문들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성행위를 하여 성행위를 멀리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두 번째 사문∙바라문들의 오염원이다.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사문∙바라문들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금과 은을 받아서 금과 은을 받는 것을 멀리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세 번째 사문∙바라문들의 오염원이다.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사문∙바라문들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삿된 생계수단으로 생계를 유지하여 삿된 생계수단을 멀리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네 번째 사문∙바라문들의 오염원이다.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된 사문∙바라문들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사문∙바라문들의 오염원이다. 이들 오염원에 의해서 오염되면 사문∙바라문들은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다.”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탐욕과 성냄에 오염되고 무명에 가려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고 취하도록 하는 음료등을 마시고 성행위를 즐긴다.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어리석어 금과 은을 받으며 삿된 생계수단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태양의 후예인 깨달은 자, 이런 것들을 오염원이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에 오염된 사문∙바라문들은 찬란하지 않고 빛나지 않는다.

청정하지 않고 티끌이 있고 어리석으며 어두움에 뒤덮였고

갈애의 노예이고 갈애에 묶여있다. 

그들은 거친 몸만 키워서 다시 태어남으로 달려간다.”

 

 

제5장 로히땃사 품이 끝났다. 

 

첫 번째 50개 경들의 묶음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