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넷의 모음 - 4. 바퀴 품(Cakka-vagga. AN4.31-40)

실론섬 2014. 6. 22. 11:24

제4장 바퀴 품Cakka-vagga(AN4.31-40)

 

cakkasuttaṃ (AN 4.31-바퀴 경)

31.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바퀴가 있어서 이것을 갖춘 신들과 인간들은 네 가지 바퀴를 굴리고, 이것을 갖춘 신들과 인간들은 오래지 않아 재물이 많고 가득하게 된다. 어떤 네 가지인가?

적절한 지역에 사는 것, 고결한 사람을 의지하는 것(도움을 받는 것),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 그리고 전생에 지은 공덕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바퀴가 있어서 이것을 갖춘 신들과 인간들은 네 가지 바퀴를 굴리고, 이것을 갖춘 신들과 인간들은 오래지 않아 재물이 많고 가득하게 된다.

 

“적절하게 선택한 지역에서 성스러운 벗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을 바르게 하고, 전생에 공덕을 지은 사람,

곡식과 재물, 명성과 명예, 행복이 그에게 생긴다.”

 

saṅgahasuttaṃ (AN 4.32-따르게 함 경)

32.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따르게 함의 토대가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보시, 자애로운 말, 이로운 행위, 함께 함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따르게 함의 토대이다."

 

“보시와 사랑스러운 말과 이로운 행위

여기저기 적절한 곳에서 법들 가운데 함께하는 것 

이런 따르게 함들은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바퀴의 비녀장과도 같다.

 

이렇게 따르게 함이 없ㅂ다면 자식을 낳은 어머니도

자식을 기른 아버지도 자부심과 공경을 얻지 못할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따르게 함을 바르게 관찰하기 때문에

위대함 얻고 칭송받는다.”

 

sīha-sutta (AN 4.33사자 경)

“비구들이여, 동물의 왕 사자가 해거름에 굴에서 나왔다. 굴에서 나와서는 기지개를 켰으며, 기지개를 켠 뒤 사방을 두루 굽어봤다. 사방을 두루 굽어본 뒤 세 번 사자후를 토했다. 세 번 사자후를 토한 뒤 초원으로 들어갔다.

비구들이여, 짐승들은 동물의 왕인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는 대부분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고 전율에 빠진다. 동굴에 사는 것은 동굴에 들어가고 물에 사는 것은 물에 들어가고 숲에 사는 것은 숲으로 들어가고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비구들이여, 마을이나 성읍이나 수도에서 견고한 밧줄에 묶인 왕의 코끼리라도 역시 두려움에 떨면서 그 포승줄을 자르거나 끊어 버리고 대소변을 배설하면서 이리저리 날뛴다.

비구들이여, 동물의 왕인 사자는 짐승들 가운데서 이처럼 크나큰 능력이 있고 이처럼 크나큰 힘이 있고 이처럼 크나큰 위력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다.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

그분은 법을 설한다. 

‘이런 것이 자기 존재[有身, 五蘊]이다. 이런 것이 자기 존재의 일어남이다. 이런 것이 자기 존재의 소멸이다. 이런 것이 자기 존재의 소멸에 이르는 바른 길이다.’라고.

 

*'자기 존재[有身.유신]'는 sakkaya를 옮긴 것이다. 이 술어는 sat(있음)+kaya(몸)의 합성어이며 그래서 중국에서는 유신(有身)으로 번역했다. 여기서 유신이란 나라는 존재 즉 오취온을 뜻한다. 주석서는 '고유성질과 역활과 한계와 정의와 테두리를 통해서 모두 다섯 가지 집착하는 무더기를 보여주신 것이다(AA.iii.72)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신은 우리에게 유신견(skkaya-ditthi) 즉 나라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로 잘 알려져 있다. 

 

비구들이여, 비록 신들이 용모가 수려하고 아주 행복하고 높은 천상의 궁전에서 오랜 시간을 머문다 하더라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서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고 전율에 빠진다. 

‘존자들이여,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항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우리는 무상한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우리 자신들이 견고하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우리는 견고하지 못한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우리 자신들이 영원하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우리는 참으로 무상하고 견고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고, 자기 존재, 즉 오온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여래는 신을 포함한 세상에서 이처럼 크나큰 능력이 있고 이처럼 크나큰 힘이 있고 이처럼 크나큰 위력이 있다.”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견줄 이 없는 스승이신 세존께서

완전한 지혜로 알아 법 바퀴 굴리고 자기 존재와 자기 존재의 일어남과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팔정도를 설하셨다.

 

긴 수명을 가졌고 아름답고 명성을 가진 신들조차도

아라한, 해탈하신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의 말씀을 들은 뒤

사자 앞의 다른 동물들처럼 두려움과 전율에 빠졌다.

‘오, 참으로 우리는 존재의 무더기를 넘어서지 못했고, 무상하구나.’라고 하면서.”

 

aggappasādasuttaṃ (AN 4.34-으뜸의 믿음 경)

34.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으뜸가는 믿음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발이 없거나, 두 발을 가졌거나, 네 발을 가졌거나, 여러 발을 가졌거나, 물질을 가졌거나, 물질이 없거나, 인식을 가졌거나, 인식이 없거나,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생들과 비교할 때, 여래∙아라한∙정등각이 그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그들에게 으뜸에 대한 분명함이 있다. 또한, 으뜸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자들에게 으뜸가는 과보가 있다.

 

비구들이여, 형성된 법들[유위법.有爲法]과 비교할 때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八支聖道, 팔정도]이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그들에게 으뜸에 대한 분명함이 있다. 또한, 으뜸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자들에게 으뜸가는 과보가 있다.

 

비구들이여, 형성된 법들[유위법.有爲法]이나 또는 형성되지 않은 법[무위법.無爲法]과 비교할 때, 탐욕의 사라짐, 갈증의 제거, 번뇌의 뿌리 뽐음, 집착의 부서짐, 윤회의 끊음, 소멸, 열반인 바램이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바램의 법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그들에게 으뜸에 대한 분명함이 있다. 또한, 으뜸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자들에게 으뜸가는 과보가 있다.

 
비구들이여, 승가와 따르는 자들의 무리들과 비교할 때, 네 쌍의 분들[四雙]이요, 여덟 단계에 있는 분들[[八輩], 이분들은 세존의 제자들인 승가이니, 공양 올려 마땅하고, 시중들어 마땅하고, 보시하여 마땅하고, 합장드려 마땅하고,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복전[福田]인 여래의 제자들의 승가가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승가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그들에게 으뜸에 대한 분명함이 있다. 또한, 으뜸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자들에게 으뜸가는 과보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으뜸가는 믿음이 있다."

 

“으뜸가는 분명함을 가진 자들, 으뜸가는 법을 알고 있는 자들, 

보시받을만 하고, 위없는 으뜸인 깨달으신 님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자들에게

탐욕을 벗어나고 고요하고 행복하고 으뜸인 법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자들에게

위없는 복전인 으뜸인 승가에 대한 분명함이 있는 자들에게

으뜸에게 대한 보시를 행한 자들에게

으뜸가는 수명과 용모와 명성과 존경과 행복과 힘이라는 으뜸가는 복(福)이 늘어난다.

으뜸에게 보시를 한 현명한 자, 으뜸가는 법에 집중된 자 

신이 된 자나 인간은, 으뜸을 성취하여 즐거워한다.”

 

Vassakāra-sutta (AN 4.35-왓사까라 경)

35.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가다의 대신인 왓사까라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왓사까라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왓사까라 바라문(Vassakara brahmana)은 마가다 왕인 아자따삿뚜의 대신이었다.(D16). 율장을 통해서 보면 그는 선왕 빔비사라 때도 대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경처럼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도 세존과 나눈 대화가 나타나며 맛지마 니까야의 소치는 목갈라나 경(M108)을 통해서 세존이 입멸하신 후에 제자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난다 존자와 나눈 대화가 기술되어 있다. 디가 니까야의 대반열반경(D16)에는 같은 마가다의 대신인 수니다와 함께 왓지를 공격하기 위해서 빠딸리 마음에 도시를 건설하는 감독관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따마 존자시여, 네 가지 법을 구족한 자를 일러 우리는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자라고 하고 위대한 사람[大人]이라고 천명합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여기 그는 많이 배운 자여서 '이것이 이 말의 뜻이고 저것이 저 말의 뜻이다.'라고 듣는 대로 그 말한 것의 뜻을 압니다.

그는 마음 챙김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최상의 마음 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전에 행하고 오래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챙깁니다. 

그는 재가의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여러 가지 소임들을 열심히 하는 자입니다. 그는 거기에 숙련되고 게으르지 않으며 그러한 검증을 구족하여 충분히 실행하고 충분히 준비하는 자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이러한 네 가지 법을 구족한 자를 일러 우리는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자라고, 위대한 사람[大人]이라고 천명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저의 말이 기뻐할 만한 것이라면 고따마 존자께서는 기뻐하십시오. 만일 저의 말이 반박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고따마 존자께서는 반박하십시오.”

 

“바라문이여, 나는 그대의 말에 기뻐하지도 않고 반박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바라문이여,  나는 네 가지 법을 구족한 자를 일러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자라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천명합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닦고 익힙니다. 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성스러운 방법 즉 선함과 유익함에 확고하게 됩니다.

바라문이여, 그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는 생각은 무엇이건 그러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건 그러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는 사유는 무엇이건 그러한 사유를 일으킵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유는 무엇이건 그러한 사유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처럼 그는 생각 일으킴에 대해서 마음의 자유자재함을 얻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는 높은 마음에 속하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는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얻고, 원하는 대로 얻고, 원하는 만큼 얻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그대의 말에 기뻐하지도 않고 반박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바라문이여, 나는 이러한 네 가지 법을 구족한 자를 일러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자이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천명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 이러한 훌륭한 법을 말씀하시니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고따마 존자께서 이러한 네 가지 법을 구족하고 계시다고 간직하겠습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께서는 많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익히고 닦습니다. 존자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성스러운 방법 즉 선한 법과 유익한 법에 확고하게 됩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께서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는 생각은 무엇인건 그러한 생각을 일으키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건 그러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는 사유는 무엇이건 그러한 사유를 일으키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유는 무엇이건 그러한 사유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생각 일으킴에 대해서 마음의 자유자재를 얻습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께서는 높은 마음에 속하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는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얻고, 원하는 대로 얻고, 원하는 만큼 얻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께서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무십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비웃는 말투로 나에게 모욕을 주지만 그대로 나는 그대에게 다시 말하겠습니다.

참으로 나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익히고 닦습니다. 나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성스러운 방법 즉 선한 법과 유익한 법에 확고하게 됩니다.

참으로 나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는 생각은 무엇이건 그러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나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건 그러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나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는 사유는 무엇이건 그러한 사유를 일으킵니다. 나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유는 무엇이건 그러한 사유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생각 일으킴에 대해서 마음의 자유자재를 얻습니다.

참으로 나는 높은 마음에 속하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는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얻고, 원하는 대로 얻고, 원하는 만큼 얻는 자입니다.

참으로 나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모든 중생들이 죽음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그분은 아셨고

신과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서올바른 법을 설하셨다.

그분을 친견하고 [말씀을] 들은 뒤 많은 사람들은 청정한 믿음을 가진다.

길과 길 아님에 능숙하고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번뇌가 없으신 분

마지막 몸을 가지신 깨달으신 님이야말로 위대한 지혜를 가진 위대한 사람이라 불린다.”

 

doṇasuttaṃ (AN 4.36-도나 경)

36. 한 때에 세존께서는 욱깟타와 세따뱌 사이에 난 대로를 따라가고 계셨다. 그 무렵 도나 바라문도 욱깟타와 세따뱌 사이에 난 대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도나 바라문은 세존의 발자국에서 천 개의 바큇살과 테와 중심부가 있어 일체를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을 보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참으로 경이롭구나. 참으로 놀랍구나. 참으로 이것은 인간의 발자국이 아닐 것이다.'라고. 그때 세존께서는 길에서 벗어나서 어떤 나무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확립하여 앉아 계셨다. 세존의 발자국을 따라온 도나 바라문은 어떤 나무 아래 앉으셔서 편안하고 믿음을 주고 감각기능[根]들이 고요하고 마음도 고요하고 최상의 제어를 통한 삼매를 성취하고 제어되고 신중하고 자제된 기능으로 용처럼 앉아 계시는 세존을 보았다. 보고서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존자께서는 신이 되실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신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존자께서는 간답바가 되실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간답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존자께서는 약카가 되실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약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존자께서는 인간이 되실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인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존자께서는 신이 되실 것입니까?’라고 질문받으면 존자께서는 ‘바라문이여, 나는 신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존자께서는 간답바가 되실 것입니까?'라고 질문받으면 존자께서는 '바라문이여, 나는 간답바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존자께서는 약카가 되실 것입니까?'라고 질문받으면 '바라문이여, 나는 약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존자께서는 인간이 되실 것입니까?’라고 질문받으면 ‘바라문이여, 나는 인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존자께서는 무엇이 되실 것입니까?”

 

“어떤 번뇌들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나는 신이 될 것인데, 나에게 그런 번뇌들은 제거되고 뿌리가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어떤 번뇌들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나는 간답바가 될 것인데 ··· 어떤 번뇌들이 벼려지지 않는 다면 나는 약카가 될 것인데 ··· 어떤 번뇌들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나는 인간이 될 것인데, 나에게 그런 번뇌들은 제거되고 뿌리가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물에서 생겨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을 벗어나서 물에 젖지 않고 피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바라문이여, 세상에서 태어났고 세상에서 자란 나는 세상을 이긴 뒤 세상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고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나를 스스로 깨달은 이(Buddha. 붓다)라고 명십하십시오.”

 

“신으로 태어나게 하거나 하늘을 나는 간답바가 되게 하거나

약카가 되게 하거나 인간이 되게 하는

그런 번뇌들은 나에게 다하고, 부서지고, 줄기가 말라버렸습니다.

 

아름다운 백련이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나는 세상에 젖지 않습니다(더렵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사람입니다.”

 

aparihāniyasuttaṃ (AN 4.37-퇴보하지 않음 경)

37.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퇴보할 수 없고 열반에 가깝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계를 갖추고, 감각기능들의 문을 잘 보호하고, 음식에서 적당량을 알고, 깨어있음에 전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계를 갖추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계를 중시한다(잘 지킨다). 빠띠목카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문다. 받아들인 뒤 학습계목들 위에서 닦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계를 갖춘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감각기능(근)들의 문을 잘 보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으로 형상을 보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부분상[受]을 붙잡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눈의 근[眼根]이 보호되지 않은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간탐과 고뇌)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닦으며, 길들이기 위해서 닦으며,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법(마음현상)을 인식(지각)하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부분상을 붙잡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마음의 근[意根]이 보호되지 않은채,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제어하기 위해서 닦으며, 길들이기 위해서 닦으며,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음식의 적당량을 아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공양 받은 음식에 대해 바른 생각으로 관찰한다.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요,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아니요,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요, 보기 좋게 가꾸고자함도 아니니, 다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이 몸을 유지하여 청정수행을 돕기 위함이다. 바른 관찰로써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만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않겠다. 이와 같은 모든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  계속 평온하게 머물며 닦고 익히기 위해 이 공양을 받는다.'라고.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음식의 적당량을 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깨어있음에 전념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 동안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밤의 초경에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한밤중에는 발로써 발을 포개고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을 인식하여 마음에 새기고 오른쪽 옆구리가 바닥에 닿도록 하여 사자처럼 눕는다. 밤의 삼경에는 일어나서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깨어있음에 전념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퇴보할 수 없고 열반에 가깝다.”

 

“계에 확고하고, 감각기능들을 단속하고

음식의 적당함을 알고 깨어있음에 전념한다.

 

이렇게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노력하며 머무는 자는

선법을 닦아서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성취한다.

 

불방일을 기뻐하는 비구는 방일에서 두려움을 보아서

퇴보할 수 없고, 열반에 가깝다."

 

patilīnasuttaṃ (AN 4.38-홀로 머무는 자 경)

38. “비구들이여, 비구는 혼자만의(편향된) 견해를 버린 자, 모든 추구(갈망)를 포기한 자,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가 고요한 자, 홀로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비구는 어떻게 편향된 견해를 버린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범부인 사문∙바라문들에게 범부의 편향된 견해들이 있다. 즉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다.’라거나, ‘세상은 무한하다.’라거나, ‘생명은 몸과 같은 것이다.’라거나, ‘생명은 몸과 다른 것이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런 편향된 견해들이 있다. 비구는 그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버리고, 포기하고, 토하고, 벗어나고, 몰아내고, 없애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편향된 견해를 버린 자이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모든 추구를 포기한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의 추구를 버리고, 존재의 추구를 버리고, 범행의 추구를 고요하게 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모든 추구를 포기한 자이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가 고요한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의 의도적 행위가 고요한 자이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홀로 머무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나는 있다’라는 자만심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홀로 머무는 자이다.

비구는 혼자만의(편향된) 견해를 버린 자, 모든 추구(갈망)를 포기한 자,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가 고요한 자, 홀로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감각적 쾌락의 추구와 존재의 추구와 범행의 추구와 함께

이렇게 진리에 닿는 자는 견해의 토대를 쌓는다.

 

모든 탐욕이 사라지고, 갈애가 부서져 해탈한 자에게 

추구들은 놓아지고, 견해의 토대는 뿌리 뽑힌다.

 

평화롭고, 마음챙기고, 고요하고, 정복되지 않는 그 비구

자만의 관통으로부터 깨달은 자, 그가 홀로 머무는 자라고 불린다."

 

ujjayasuttaṃ (AN 4.39-웃자야 경) 

39. 그 무렵 웃자야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웃자야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께서도 제사를 칭찬합니까?”라고.

“바라문이여, 나는 모든 제사를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바라문이여, 나는 모든 제사를 칭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바라문이여, 소을 죽이고 양을 죽이고 닭과 돼지들을 죽이고 다양한 생명들을 죽이는 거친 제사를, 바라문이여, 나는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아라한이나 아라한도의 길에 들어선 분들은 이런 거친 제사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라문이여, 소를 죽이지 않고, 양을 죽이지 않고, 닭과 돼지를 죽이지 않고, 다양한 생명들을 죽이지 않는 거칠지 않은 제사를, 바라문이여, 나는 칭찬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아라한이나 아라한도의 길에 들어선 분들은 이런 거칠지 않은 제사에 참석합니다."

 

“말의 희생과 사람의 희생, 말뚝을 던지는 제사, 소마즙을 바치는 제사

[대문을 열고] 크게 공개적으로 지내는 제사

이런 제사는 많은 희생이 있지만 큰 결실이 없다.


염소와 여러 염소들과 소들, 여러 생명들을 죽이는 곳,

바른 길을 가는 위대한 현자들은 그 제사에 가지 않는다.

 

염소와 여러 염소들과 소들, 여러 생명들을 죽이지 않는 곳,
동물들을 죽이지 않는 제사에서 그들은 가문을 이어서 항상 보시합니다.
바른 길을 가는 위대한 현자들은 그 제사에 간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제사를 지내게 시키니, 그 제사는 큰 결실이 있다.
참으로 그런 제사를 지내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이 있고 더 나쁜 것은 없다.
제사는 위대하고, 신들은 기뻐한다."

 

udāyīsuttaṃ (AN 4.40-우다이 경)

40. 그 무렵 우다이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웃자야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께서도 제사를 칭찬합니까?”라고.
“바라문이여, 나는 모든 제사를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바라문이여, 나는 모든 제사를 칭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바라문이여, 소을 죽이고 양을 죽이고 닭과 돼지들을 죽이고 다양한 생명들을 죽이는 거친 제사를, 바라문이여, 나는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아라한이나 아라한도의 길에 들어선 분들은 이런 거친 제사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라문이여, 소를 죽이지 않고, 양을 죽이지 않고, 닭과 돼지를 죽이지 않고, 다양한 생명들을 죽이지 않는 거칠지 않은 제사를, 바라문이여, 나는 칭찬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아라한이나 아라한도의 길에 들어선 분들은 이런 거칠지 않은 제사에 참석합니다."

 

“적절한 때에 적합하게 지내는 거칠지 않은 제사(살생을 포함하지 않은 제사) 

세상의 장막을 벗겼고, 세상에서 시간과 태어날 곳을 넘어선

범행을 닦는 제어된 자들은 그런 제사에 참석한다.

 

"만약 제사와 슈랏다에 어울리는 공양물을 올린 뒤에
범행을 닦는 자, 보시를 올려 마땅한 그들에게 분명한 마음을 가지고 보시한다면
제사에 능숙한 깨달은 분들은 그런 제사를 칭찬한다.

 

*제사는 일반적인 제사를 뜻하고, 슈랏다는 바라문들이 죽은 자에게 올리는 제사를 뜻한다.

 

보시 받을만한 자들에 대해 행해진 잘 공양되고, 잘 바쳐지고, 잘 성취된
제사는 풍요롭고, 신들도 기뻐한다.

 

믿음이 있고 지혜로운 현자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렇게 베푼 뒤에
행복한 세상에 태어난다."

 

 

 

제4장 바퀴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