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우루웰라 품 Uruvela-vagga(AN4.21-30)
paṭhamauruvelasuttaṃ (AN 4.21-우루웰라 경1)
2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따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한때, 정등각을 성취한 나는 우루웰라에서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머물렀다. 그때 외딴곳에 홀로 머무는 나에게 이런 마음의 온전한 생각이 떠올랐다.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무는 자는 괴롭게 머문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중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라고.
*아자빨라니그로다(ajapala-nigrodha) 나무는 '염소치기 니그로다 나무'로 옮길 수 있다. 수자따(Sujata)가 고행을 그만두신 세존께 우유죽을 공양올린 곳이 바로 이 나무 아래였다.(J.i.16,69)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에 수차례 이곳을 찾아가셨다고 한다. 사함빠띠 범천이 세존께 법륜을 굴리기를 간청한 곳도 이곳이었으며(Vi.i.5-7), 마라가 세존이 깨달으신 직후에 바로 열반에 드시기를 간청한 곳도 이곳이었다.(D16).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세존께서 정등각을 성취하신 뒤 다섯 번째 7일에 본경과 같은 사유가 일어났다고 밝히고 있다.(AA.iii.24)
한편 주석서는 왜 이 니그로다 나무를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라 부르는강 대해서 몇 가지로 설명을 한다. 첫째, 이 나무의 그늘에서 염소치기들이 쉬었기 때문이며, 둘째 나이든 바라문들이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베다를 암송하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기 때문이여, 셋째 한밤에 염소들에게 의지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UdA.51)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계의 무더기[戒蘊.계온]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것의 완성을 위해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존재 가운데 나보다도 계를 더 잘 갖춘,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보지 못한다.
삼매의 무더기[定蘊.정온]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것의 완성을 위해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존재 가운데 나보다도 삼매를 더 잘 갖춘,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보지 못한다.
지혜의 무더기[慧蘊.혜온]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것의 완성을 위해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존재 가운데 나보다도 지혜를 더 잘 갖춘,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보지 못한다.
해탈의 무더기[解脫蘊.해탈온]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것의 완성을 위해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존재 가운데 나보다도 해탈을 더 잘 갖춘,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보지 못한다.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나는 내가 깨달은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비구들이여, 사함빠띠 범천이 마음으로 내 마음에 일으킨 생각을 알고 마치 힘 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과 같은 빠른 시간에 범천의 세계에서 사라져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때 사함빠띠 범천은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땅에 오른쪽 무릎을 꿇은 뒤 나를 향해 합장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과거의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께서도 오직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렀습니다. 미래의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께서도 오직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현재의 아라한∙정등각이신 세존께서도 오직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무십시오."라고. 사람빠띠 범천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한 뒤에 다시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깨달은 분들도 미래의 깨달을 분들도
현재의 깨달은 분도 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없애주십니다.
모두 정법을 존중하면서 머물렀고, 머물고, 또한 머물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은 분들의 법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면서 위대함을 지향하는 자는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정법을 존중해야 합니다.'
“비구들이여, 사함빠띠 범천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렇게 말한 뒤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비구들이여, 나는 범천의 요청이 나에게 적절하다고 알았기 때문에 내가 깨달은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렀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승가가 위대함을 갖추었을 때 나는 승가도 존중하였다.”
*그러면 언제 세존께서는 승가에 존경을 표하셨는가? 마하빠지빠띠(Mahapajapati)가 꿰매어서 만든 새 옷 두 벌을 보시하였을 때이다. 세존께서는 그때 자신에게 가져 온 그 옷을 두고 '고따미여, 승가에 보시하라. 승가에 보시하면 나를 존경하는 것도 되고 승가를 존경하는 것도 될 것이다.'(M142/iii.253)라고 말씀하시면서 승가에 존경을 표하였다.(AA.iii.26)
dutiyauruvelasuttaṃ (AN 4.22-우루웰라 경2)
22. “한 때에, 비구들이여, 깨달음을 성취한 나는 우루웰라에서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때 비구들이여,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른 바라문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와서는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비구들이여,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고따마 존자여, 우리는 사문 고따마는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난 노년에 이른 바라문들에게 절을 하지도 않고 일어나 맞이하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는다.'라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고따마 존자는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른 바라문들에게 절을 하지도 않고 일어나 맞이하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습니까? 고따마 존자여, 그렇다면 그것은 바른 실천이 아닙니다(적절하지 못합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존자들은 장로에 대해 또는 장로를 만드는 법들에 대해 모른다.'라고.
만약, 비구들이여, 80이나 90이나 100세의 연로한 사람이 있다. 그는 적절하지 않은 때에 말하고, 사실 아니게 말하고, 법에 맞지 않게 말하고, 율에 맞지 않게 말한다. 적절하지 않은 때에 근거 없고 무절제하고, 이익되지 않아서 담아둘 만하지 않은 말을 한다. 그러면 그는 ‘어리석은 장로’라는 이름을 얻는다.
만약, 비구들이여, 검은 머리의 소년이고 축복 받은 젊음을 갖춘 젊은이가 있다. 그는 적절한 때에 말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이익되게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여서 적절한 때에, 근거를 갖추고, 절제되고, 이익되어서 담아둘 만한 말을 한다. 그러면 그는 ‘현명한 장로’라는 이름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장로를 만드는 법이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계를 중시한다(잘 지킨다). 빠띠목카(계목.戒目)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문다. 받아들인 뒤 학습계목들 위에서 닦는다.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바르게 호지하고, 배운 것을 잘 정리한다. 법들은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함 삶을 드러낸다. 이러한 법들을 많이 배우고,만족하고 말에 의해 익숙해지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통찰한다. 높은 마음에 속하고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인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얻는다.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장로를 만드는 네 가지 법이다.”
“들뜬 마음으로 쓸모없이 많이 말하는 사람
침착하게 사유하지 않고, 정법을 좋아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
나쁜 견해를 가지고 존경받지 못하는 그는 장로의 위치에서 멀다.
계를 잘 갖추고 잘 배운 지혜로운 자
단속하고 지혜로운 자는 법에 대해 지혜로써 잘 본다.
모든 법을 통달하고 방치하지 않고 지혜로움
태어남과 죽음이 버려진 자, 범행을 완성한 자
번뇌들이 없는 그를 나는 장로라고 부른다.
번뇌들이 부서진 비구, 그가 장로라고 불린다."
lokasuttaṃ (AN 4.23-세상 경)
비구들이여, 여래는 세상을 깨달았다. 여래는 세상에서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세상의 일어남을 깨달았다. 여래는 세상의 일어남을 버렸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세상의 소멸을 깨달았다. 여래는 세상의 소멸을 실현하였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깨달았다. 여래는 세상의 소멸로 이르는 길을 닦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과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과 함께하는 존재들이 보고, 듣고, 닿아 알고, 인식하고, 얻고, 조사하고, 마음으로 관찰한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래(如來)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은 밤과 집착이 남아있지 않은 반열반에 든 밤의 사이에 말하고 대화하고 가르친 모든 것은 진리이고 거짓이 아니다. 그래서 여래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말하는 대로 행하고, 행하는 대로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대로 행하고, 행하는 대로 말한다고 해서 여래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과 함께하는 존재들 가운데 여래는 정복자이고 정복되지 않은 자이고 모든 것을 보는 자이고 지배자이다. 그래서 여래라고 불린다.”
“모든 세상을 완전한 지혜로 알았기 때문에 모든 세상에서 사실에 부합하고
모든 세상에서 벗어났고, 모든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그는 진정 모든 것을 정복하고, 모든 매듭에서 풀려났다.
최상의 평화, 어디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열반에 닿았다.
그는 번뇌 다한 깨달은 자이다. 괴로움이 없고 의심 잘랐다.
모든 업의 소멸을 성취했으며, 재생의 조건을 부수고 해탈하였다.
그가 그분 세존이신 깨달은 자다. 그는 위없는 사자이다.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성스러운 바퀴를 굴린다.
이렇게 의지처인 깨달은 분에게 가는 신들도 사람들도
함께 와서 위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그를 공경한다.
제어된 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제어된 자, 평화로운 자들 가운데 평화로운 선인
해탈한 자들 가운데 최상으로 해탈한 자, 건넌 자들 가운데 뛰어나게 건넌 자
참으로 이렇게 위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그를 공경한다.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그에게 동등한 사람이 없다.”
kāḷakārāmasuttaṃ (AN 4.24-깔라까라마 경)
24.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께따에서 깔라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사람이 함께하는 존재 가운데 본 것, 들은 것, 닿아 안 것, 인식한 것, 얻은 것, 조사한 것, 마음으로 접근한 것을 나는 안다.
비구들이여,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사람이 함께하는 존재 가운데 본 것, 들은 것, 닿아 안 것, 인식한 것, 얻은 것, 조사한 것, 마음으로 접근한 것(행한 것), 나는 그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았다. 그것은 여래에게 알려졌다. 여래는 그것을 구하지(집착하지) 않는다.
*여래는 여섯 감각의 문을 통한 대상에 대해 갈애나 사견으로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존께서는 눈으로 형상을 보지만 욕탐이 없고 세존께서는 참으로 완전히 해탈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귀로 ... 혀로 ... 몸으로 ... 마음으로 법을 아시지만 세존께서는 욕탐이 없고 세존께서는 참으로 완전히 해탈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 문장으로 번뇌 다한 자의 경지를 설하셨다고 알아야 한다.(AA.iii.38-39)
비구들이여,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사람이 함께하는 존재 가운데 본 것, 들은 것, 닿아 안 것, 인식한 것, 얻은 것, 조사한 것, 마음으로 접근한 것(행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나에게 사실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사람이 함께하는 존재 가운데 본 것, 들은 것, 닿아 안 것, 인식한 것, 얻은 것, 조사한 것, 마음으로 접근한 것(행한 것)을 ‘나는 알기도 하고 알지 못하기도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구들이여,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사람이 함께하는 존재 가운데 본 것, 들은 것, 닿아 안 것, 인식한 것, 얻은 것, 조사한 것, 마음으로 접근한 것을 ‘나는 알지도 않고 알지 못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패배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여래는 보아야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본 것을 생각하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보아야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보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들어야 하는 것을 듣고서 들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듣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들어야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드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닿아 알아야 하는 것을 닿아 알고서 닿아 안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닿아 알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닿아 알아야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닿아 아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인식해야 하는 것을 인식하고서 인식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식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식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식하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여래는 보고 듣고 닿아 알고 인식해야 하는 법들에서 오직 이러하고 이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보다 더 높고 더 뛰어난 다른 이러한 것은 없다고 나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보고 듣고 닿아 안 어떤 것이든 진실로 닿아 안 것이라고 묶여 있다.
자신을 단속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이러한 자는 더 나아가 사실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존재들이 강하게 붙잡고 묶이는 곳에서 이런 화살을 이전에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이것을 알고 본다.
여래들에게는 묶임이 없다."
brahmacariyasuttaṃ (AN 4.25-범행 경)
25. “비구들이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아첨하기 위해서, 얻음과 존경과 명성의 이익을 위해서, 논쟁에서 벗어남의 이익을 위해서 범행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알기를'이라고 범행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단속을 위하여, 버림을 위하여, 바램을 위하여, 소멸을 위하여 이런 범행의 삶을 산다."
“열반에 원만하게 들게 하고, 스스로 알아낸, 단속을 위하고 버림을 위한 범행을
그분 세존은 설했고, 위대한 사람들, 훌륭한 현자들은 이 길을 따랐다.
깨달은 분께서 설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 스승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들은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
kuha-suttam (AN 4.26-속임 경)
26. “비구들이여, 속이고 완고하고 산만하고 인색하고 교만하고 고요하지 못한 비구들은 나의 제자들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비구들이 이 법과 율에서 멀어져버렸다. 그들은 이 법과 율에서 성숙하지 못하고 증장하지 못하고 충만하게 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속이지 않고 완고함이 없고 산만하지 않고 인색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고 고요한 비구들은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비구들은 이 법과 율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 법과 율에서 성숙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된다.”
“속이고 완고하고 산만하고 인색하고 교만하고 고요하지 못한 자들은
정등각이 설한 법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속이지 않고 완고함이 없고 산만하지 않고 인색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고 고요한 자들은
참으로 정등각이 설한 법에서 나아간다.”
santuṭṭhi-suttam (AN 4.27-지족 경)
27. “비구들이여, 네 가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옷 중에서는 분소의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음식 중에서 탁발로 얻은 한 덩이의 음식이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거처 중에서는 나무 아래의 거처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약 중에서는 썩은 오줌으로 만든 약이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할 때 이것이야말로 출가생활(사문됨)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허물이 없고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
거처와 의복과 음식에 대해 마음이 편안하고 가야 할 방향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의 법은 출가생활에 적합하다고 말해진다.
값나가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사문됨을 성취한다.”
ariyavaṃsasuttaṃ (AN 4.28-성자의 계보 경)
28.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자의 계보가 있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고대로부터 전해 오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미래에도)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넷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는 것에 대해 칭찬한다. 그는 옷을 원인으로 부적절한 잘못된 방법을 저지르지 않는다. 옷을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옷을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묶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 벗어남의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용한다. 또한, 그는 어떤 옷으로도 만족하는 것 때문에 자신을 칭송하지 않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거기에 대해 참으로 현명하고 게으르지 않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분명한 앎을 가지고 알아차리는 자는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진 성자의 계보에 서 있다.’라고 불린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떤 탁발음식으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 그는 탁발 음식을 원인으로 부적절한 잘못된 방법을 저지르지 않는다. 탁발음식을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탁발음식을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묶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로서 사용한다. 또한, 그는 어떤 탁발 음식으로도 만족하는 것 때문에 자신을 칭송하지 않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거기에 대해 참으로 현명하고 게으르지 않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분명한 앎을 가지고 알아차리는 자는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진 성자의 계보에 서 있다.’라고 불린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고,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 그는 거처를 원인으로 부적절한 잘못된 방법을 저지르지 않는다. 거처를 얻지 못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거처를 얻더라도 속박되지 않고 묶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위험을 보는 자로서 사용한다. 또한, 그는 어떤 거처로도 만족하는 것 때문에 자신을 칭송하지 않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거기에 대해 참으로 현명하고 게으르지 않고 않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분명한 앎을 가지고 알아차리는 자는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진 성자의 계보에 서 있다.’라고 불린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닦음을 좋아하고 닦음을 기뻐한다. 버림을 좋아하고 버림을 기뻐한다. 또한, 그는 닦음을 좋아하고 닦음을 기뻐하고, 버림을 좋아하고 버림을 기뻐하는 것 때문에 자신을 칭송하지 않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거기에 대해 참으로 현명하고 게으르지 않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분명한 앎을 가지고 알아차리는 자는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진 성자의 계보에 서 있다.’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고대로부터 전해 오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미래에도)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네 가지 성자의 계보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성자들의 계보를 갖춘 비구는, 만약 동쪽 방향으로 머무르면, 오직 그가 싫어함을 극복한다. 싫어함이 그를 제압하지 못한다. 만약 서쪽 방향으로 머무르면, 오직 그가 싫어함을 극복한다. 싫어함이 그를 제압하지 못한다. 만약 북쪽 방향으로 머무르면, 오직 그가 싫어함을 극복한다. 싫어함이 그를 제압하지 못한다. 만약 남쪽 방향으로 머무르면, 오직 그가 싫어함을 극복한다. 싫어함이 그를 제압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비구는 참으로 싫어함과 좋아함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싫어함은 현명한 자를 제압하지 못한다. 다만 현명한 자가 싫어함을 극복한다.
현명한 자는 참으로 싫어함을 극복하는 자이다.
모든 업을 바르게 끊어버리고, 제거된 자를 누가 제지할 것인가?
잠부 강의 금으로 만든 큰 금화와 같은 그를 누가 비난할 것인가?
신들도 그를 칭찬하고 범천도 그를 칭찬한다.”
dhammapadasuttaṃ (AN 4.29-법의 걸음 경)
29.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의 걸음이 있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간탐 없음이 법의 걸음이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며,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성냄 없음이 법의 걸음이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며,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바른 마음 챙김이 법의 걸음이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며,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바른 삼매가 법의 걸음이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며,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간탐하지 않고, 성냄없는 마음으로 머물러야 한다.
마음이 한 끝으로 집중되었을 때, 안으로 삼매를 잘 닦는다."
paribbājakasuttaṃ (AN 4.30-유행승 경)
30.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잘 알려진 유행승들이 십삐니까 강변에 있는 유행승들의 사원에 머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안나바라, 와라다라, 사꿀루다이 유행승과 아주 잘 알려진 다른 많은 유행승들이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저녁 무렵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셔서 십삐니까 강변에 있는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가셨다. 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세존께서는 그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행승들이여, 네 가지 법의 걸음이 있습니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넷입니까?
유행승들이여, 간탐 없음이 법의 걸음입니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성냄 없음이 법의 걸음입니다. ··· 유행승들이여, 바른 마음 챙김이 법의 걸음입니다. ··· 유행승들이여, 바른 삼매가 법의 걸음입니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의 걸음이 있습니다.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스승의 스승들로부터 전승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 간탐 없음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간탐하고 감각적 쾌락들에 깊이 탐닉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와서 말하고 설명해보시오. 나는 그대의 위력을 보겠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참으로 그가 ‘이 간탐 없음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간탐하고 감각적 쾌락들에 깊이 탐닉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 성냄 없음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성냄에 찬 마음을 가졌고 타락한 생각을 품은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와서 말하고 설명해보시오. 나는 그대의 위력을 보겠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참으로 그가 ‘이 성냄 없음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성냄에 찬 마음을 가졌고 타락한 생각을 품은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 바른 마음 챙김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와서 말하고 설명해보시오. 나는 그대의 위력을 보겠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참으로 그가 ‘이 바른 마음 챙김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 바른 삼매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고요하지 않고 마음이 산란한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와서 말하고 설명해보시오. 나는 그대의 위력을 보겠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참으로 그가 ‘이 바른 삼매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런 네 가지 법의 걸음을 비난해야 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네 가지 법다운 말에 의한 비난과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어떤 넷입니까? 만일 존자가 간탐없음의 법의 걸음을 비난하고 거부한다면, 간탐하고 감각적 쾌락들에 깊이 탐닉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존자에게 존경을 받고, 존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만일 존자가 성냄 없음의 법의 걸음을 비난하고 거부한다면, 성냄에 찬 마음을 가졌고 타락한 생각을 품은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존자에게 존경을 받고, 존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만일 존자가 바른 마음 챙김의 법의 걸음을 비난하고 거부한다면,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존자에게 존경을 받고, 존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만일 존자가 바른 삼매의 법의 걸음을 비난하고 거부한다면, 고요하지 않고 마음이 산란한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존자에게 존경을 받고, 존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런 네 가지 법의 걸음을 비난해야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네 가지 법다운 말에 의한 비난과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원인 없음을 말하고, 업지음 없음을 말하고,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는 욱깔라와 왓사반냐의 사람들도 이러한 네 가지 법의 걸음은 비난해야 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비난과 성냄과 질책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성냄이 없는 자, 항상 마음챙기는 자, 안으로 삼매를 잘 닦는 자는
간탐을 제어하는 닦음에 방일하지 않는 자라고 불린다.”
제3장 우루웰라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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