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해탈과 열반의 개념조차 정립이 안되어 있는 작자가 열반을 입에 담는다고?

실론섬 2014. 6. 25. 03:09

"지금 여기(dittha dhamma)" 라고 사용되는 경전상의 의미

1) dittha dhamma 혹은 dittheve dhamme 는 '현재'나 '현생(금생)'등의 의미가 있다. 이 경우 중국에서는 현법(現(나타날 현)法)이라고 번역을 하였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보여진 법'이나 '보여진 법에서'라는 해석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현재'나 '지금 여기'나 '금생(현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예를 들어서 과거생과 미래생에 대응하여 금생(현생)의 의미가 되고 또 과거와 미래의 대응으로 현재나 바로 지금 여기등의 의미가 된다. 디가니까야의 62가지 외도들의 사견으로 설명할 때도 이 단어가 나오는데, 이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현법열반론(ditthidhammanibbana vada)이 바로 그것이다.


2) dittha dhamma 는 문자 그대로 '법을 보았다'는 의미로 씌이기도 한다. 경전에는 거의 대부분 붓다의 말말씀을 듣고 이해하여 법의 눈(법안. 法眼.dhamma cakkhu)이 생긴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법의 눈이 생긴 이러한 경우를 경전에서는 정형구로 표현하는데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불혜를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문맥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를 견법(見法)으로 번역을 했는데 문자 그대로 '법의 무상 고 무아를 보았다' '붓다의 가르침(법)의 의미를 보았다' '체득했다'라는 의미이다. 

 

3) dittha dhamma 는 넓은 의미로는 하늘나라의 신이나 과거의 전통 또는 미래의 생에서 삶의 가치의 기준을 구하지 않고 현재 이곳에서 자신의 행위와 그 인과적 의미에서 오로지 진리성을 찾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을 집약하며, 또 좁은 의미로는 실제 수행에 있어서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의 기대등 일체의 불필요한 군더기기를 배제하고 오로지 현재 이 순간에 전념하고자 하는 정념 공부의 특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경전에 자주 나타난다.

 

불교수행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지금 여기'는 dittheva dhamme 혹은 tittha dhamma 로 경전에서는 나타난다. 이 를 중국에서는 이현법중(以現法中) 혹은 현금(現今)으로 옮겼다. 직역을 하면 '보여진 현상법'이고 '지금 여기'로 의역이 된다. 영어로 here and now 라는 것은 바로 이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좀더 부연 설명하자면 '나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을 법(法 dhamma)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라고 번역되는 딧테와 담메(dittheva dhamme)에서 담메(dhamme)는 '법에서'라는 말인데 '지금 여기'라는 표현속에 지금 여기(지금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표현이 다 들어가 있다. 일어나는 현상이란 나라는 존재 즉 오온이 매순간 변화해가며 또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맛지마 니까야등등 경전 곳곳에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오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법)을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라고 강조하고 있다. 


불교의 현법열반과 외도가 지칭한 현법열반의 차이점

이부분은 참괴님도 충분하게 설명을 하였고 저 자신도 1591번 글'불교의 열반은 현법열반이다'라는 글에서 어느정도 밝혀 놓았다. 물론 마성스님의 글도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현법열반'이다라고 강조하시고 불교의 현법열반과 외도의 현법열반이 어떻게 다른지 충분히 밝혀 놓았다. 외도들의 현법열반론이 어떤 것인지 재삼 경전의 문구를 살펴보자.


"... 존자여, 이런 까닭에 이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 것입니다.... 존자여 이런 자아야 말로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 것입니다" ,,,  중략,,, 비구들이여, 여기서 그 사문 바라문들이 5가지 경우로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다고 천명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갈애에 빠져있는 그들이 단지 느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느낌이 견해와 갈애에 의해 동요된 것일 뿐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외도들이 주장하는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는 그 말이 왜 외도의 주장인지 붓다께서 비판하신 이유를 알 것이다. 그들은 자아열반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언제 자아를 인정하고 자아론을 받아 들였는가?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은 첫번째로 버리고 떠나야 하는 사견에 불과한 것이다. 


해탈과 열반의 개념조차 정립이 안되어 있는 작자가 열반을 입에 담는다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법우님들이 알고 있겠지만 연꽃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이라고 수년간 주장을 해왔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 내가 엄중히 몇번이고 해탈과 열반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랬듯이 어느 순간에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이 아니라 '열반'이라고 말을 슬쩍 바꾸었다. 최근 글과 과거의 글을 비교해 보면 세살짜리 어린아이도 그 말바꿈을 알수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작자는 해탈과 열반의 개념조차 정립이 안되어 있고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작자가 자신의 글에서 '긍정적 현법열반론'이니 '부정적 현법열반론'이니 미친사람 중얼거리듯 주절거리고 있다. 붓다는 디가니까야에서 외도들의 열반론을 '자아열반'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현법열반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현법열반론 즉 다시 말해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금생에서 오늘 바로 열반을 획득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정적이니 긍정적이니 하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것이다. 똑같이 불교나 외도나 현법열반론을 주장하지만 불교는 무아를 외도들은 자아를 말하고 있기에 그 차이점을 날카롭게 붓다는 지적하고 또한 외도들의 현법열반이 자아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틀렸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불교의 열반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는 개념인가? 왜 이런 엉터리 궤변이 나오는가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즉 해탈이나 열반의 개념이 전혀 정립이 안되어 있는 작자가 열반을 운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혼자서 미친놈 중얼거리듯 동물들이 아무곳에서나 배설물을 쏟아내듯 입에서 쓰레기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IQ의 차이점이 극명나게 나타나는 경우

불교는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안다. 모태에 두번다시 들지 않음을 안다, 이것의 나의 마지막 몸인 것을 안다, 불사의 문을 열었다, 윤회하지 않음을 안다...등등 여러가지 표현으로 열반을 말하고 있다. 그럼 여기에 열거한 것들이 각자 의미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이걸 가지고 맞느니 틀리느니 한다는 것은 아이큐 차이일 뿐이고 지적이해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현법열반이든 현세열반이든 지금여기서 열반이든 모두다 같은 개념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설명하는 사람의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아이큐나 지적능력이 부족한 듣는자의 문제인가? 각자 판단해 볼 일이다.


단어와 의미와 뜻이 올바르게 전달될 때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경전을 공부하고 교리를 논하는 것은 그 단어에 담긴 의미와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이지 결코 단어가 옳으니 틀렸으니 하는 허망한 잡담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몇번이고 강조한 것이지만 경전의 공부에는 경안(經眼)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말씀하신 의미와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시어경(이티붓다카)는 "이와 같이 세존께서 설하셨고 거룩한 님(아라한)께서 설하였다고 나는 들었다"라고 하고 그리고 다시 "이것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의미이다. 그래서 그에 관해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라고 하고 다시한번 더 "이것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신 의미라고 나는 들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경전과 교리를 어떤 눈으로 봐야하고 어떻게 지혜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번역어가 어떠니 저쩌니 이게 옳으니 틀렸으니 하면서 그 의미와 뜻을 이해할려고 하기 보다는 단어에 함몰되는 것은 결코 불자의 모습이 아니다. 스스로 파멸의 문을 열고 스스로를 파엎는 바보나 하는 짓이다.


소시오패스적인 인간상 

소시오패스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진 정신 장애로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어떤 나쁜 짓을 저질러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파렴치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다.즉 양심은 없고 심장만 뛰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보다 더 심각하고 무섭다고 한다. 참괴님이 자세히 설명했지만 이 모든 현상이 모두다 소시오패스의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예이다. 법답게 질문해도 법답게 대답을 안하고, 잘못을 지적해도 고치지 않고, 가보지도 않은 남방불교에 대해서 온갖 거짓말을 해대며, 알지도 못하는 열반이나 해탈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고 단현님이 말한 것처럼 자신은 최고의 블로거이고 초기불교의 권위자인냥 행세한다.


남방불교권에 와서 직접 빠알리어 경전 한줄을 공부해 본적이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빠알리어 경전에 의거하고 붓다의 말씀에 준해서 글을 쓴다고..? 


그래서 몇년간씩이나 직접 남방사찰에서 수행하고 불교의 모습을 직접 체험한 스님들의 글을 비난하고 각자 번역한 글을 나열해 놓고 나름대로 비교분석한다고..?  


어느 법우님의 글에서 

어느 법우님이 내게 보내 온 글을 허락도 없이 올려서 죄송하고 미안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상황을 이해시키고자 올린다. 너무도 가슴에 절절이 와 닿은 지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허락없이 올린 것에 대해서 법우님의 많은 이해를 바랄 뿐이다. 

 

네 이해합니다. 그런데 몇몇 글을 보니 실론섬님이 연꽃님에게 일침을 가해 제도하시려는 동기를 다소 갖고 계신 것 같아보여 우려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가능성이 없다고 보며, 따라서 귀중한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면, 연꽃님은 블로그 활동에 대한 몰입도가 지나칠 정도이며 (굉장히 오랜 세월에 걸쳐 최소 4-5시간 걸릴 것이 분명한 분량의 글을 하루에 한편씩 올린다는 것을 보아 이리 짐작합니다) 더욱이 파워블로거라는 의미 없는 것에 즐거워하는 모습도 갖고 있지요. 


부처님은 집착을 멸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도를 설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연꽃님은 이를 두루 읽고 갖종 부연설명이 담긴 게시글을 집필하고 있죠. 그런데도 본인 스스로가 과하게 블로그 활동을 탐닉하는 모습과 잉여스러움을 나타내는 지표인 파워블로거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뻐하니 자신이 읽어온 수많은 부처님 말씀에서 어떠한 깨우침을 건지지 못한 상태서 글을 쓰시고 계시는 중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잡다한] 일을 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잡다한] 일을 기뻐하지 않고 [잡다한] 일을 하는 즐거움에 몰입하지 않는 한,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이리 실천하면서 살길 권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이 담긴 글을 두루 읽고서도 지속적으로 넷명성을 추구하거나 블로그 키우기 등등과 같은 무익한 짓에 탐닉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서도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않은채 그저 머리속에만 쌓아두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으로도 헛된 탐닉에 대하여 느끼는 바가 없는 분에게 다른분들이 몇개의 비판글을 띄운다 해본들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