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교만한 자가 태어날 곳은 정해져 있다

실론섬 2014. 6. 6. 15:57

교만한 자가 몸이 무너진 후 태어날 곳은 어디인가? 

이티붓타카(itivuttaka. 여시어경)은 총 112경이 포함되어 있는 경전이다. 그중에서 첫 번째 장 1-6번까지가 중생들이 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즉 탐.진.치와 분노, 멸시 그리고 교만(자만심)등 총 6가지이다. 이것을 버리면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붓다께서 보중한다고 천명할 만큼 중생들이 꼭 버려야할 마음가지이다. 6번경에 보면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 있다.


1.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시고, 아라한(거룩한 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나는 들었다.


"비구들이여, 한가지를 버려라. 그러면 나는 그대들에게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보증한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교만심이 바로 그 한가지이다. 그것을 버리면 나는 그대들에게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보증한다."


2. 이것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이다. 그래서 이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만심으로 우쭐해져 있는 중생들은

나쁜 곳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교만심의 본질을 제대로 통찰한

사람들은 지혜로 그것을 버린다

그것을 버림으로써 그들은 절대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라고 나는 들었다.  

 

교만이란 사전을 찾아보면 "잘난 체하며 겸손함이 없이 건방진 것" 그리고 같은 의미의 자만심이라는 것을 찾아보면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거나 뽐내는 마음" 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반대되는 글들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거나 큰 강물은 소리없이 흐른다"등등이다. 


교만심이 왜 무서운지 왜 교만심을 버리지 못하면 악처에 태어나는지를 연꽃의 경우에 웅변적으로 대변을 하고 있다. 그는 불교도 스님도 스승도 안중에 없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의지할 스님이나 스승조차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일개 재가자 주제에 불교와 스님과 스승을 비난한다.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보다 위에 있고 수승하다고 주장한다. 바로 교만심때문인 것이다. 


이런 교만심은 필연적으로 아집 아상 집착 고집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하여 "자신은 무조건 선이고, 상대방은 무조건 악이다'라는 극단적 이분법적 사고에 빠진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교만심이 결국 이런 망발과 악한 구업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즉 자신이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인 것이다. 쇠는 자신의 내부에서 생긴 녹으로 인하여 스스로 녹슬고 망가진다. 이렇듯 교만심은 쇠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녹처럼 그 자신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죽어서 악처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토론과 질문에 대답을 피하는 이유 - 외도이기 때문에 논파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연꽃은 자신의 글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을 피하는 이유를 붓다의 가르침에 빗대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똥이 가득 담긴 밥상을 가져오면 안받으면 도로 그것이 가져온 사람의 것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연꽃은 여기서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 싸움과 토론/논쟁은 전혀 다른 것이다. 붓다는 세상사람들과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 결코 법 다운 교리논쟁을 피한적은 없다. 경전에는 많은 외도들과의 논쟁과 또한 그들을 찾아가서까지 논쟁과 교화를 서슴치 않았다. 


실론섬이 연꽃의 글에 비판과 잘잘못을 지적하고 글을 올리는 것은 시장잡배들이나 깡패들처럼 몽둥이 들고 싸우고자 하는게 아니다. 법다운 논쟁이나 토론을 하자는 것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글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 또한 비판을 받으면 그에 상응하는 논리적 대응을 하는게 옳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나의 의도를 충분히 알면서도 붓다의 말씀을 함부로 인용하면서 싸움이라는 용어를 동원하여 자신은 싸움이라는 것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한다. 왜 그는 자신만만하게 글을 올리면서도 법다운 토론을 굳이 싸움이라는 단어까지 동원하면서 피하고 또한 법다운 질문에 논리적 대응을 하지 못할까?


그 주된 이유는 그는 외도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밝혔지만 법다운 질문에 얼버무리는 것은 62가지 외도들 중 하나이다. 즉 그가 올리는 글은 불교의 글이 아니다. 붓다의 말씀을 통해서 연꽃이 왜 외도인지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사문.바라문들은 무엇때문에 애매모호한 자가 되어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는가? 첫번째는 유익함(선)과 해로움(불선)을 꿰뚫어 알지 못하여 그의 말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유익함과 해로움을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욕망이나 적개심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유익함과 해로움을 꿰뚫어 알지 못하여 그의 말은 학식있는 사람들에게 논파당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네번째는 멍청하고 대단히 어리석기 때문이다."    


토론과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또다른 이유 - 위선자이고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교만(자만심)과 직결되어 있는 중생의 나쁜 마음이 "위선"과 "거짓말"이다. 그래서 굿타붓타카의 13번째에서는 "비구들이여, 위선을 버려라. 그러면 나는 그대들에게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그리고 25번경에는 고의적인 거짓말에 대해서 "비구들이여, 한가지 일에 있어서 어긋나게 하는 인간에게는 행해지지 못할 어떠한 악업도 없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 한가지 어긋나게 하는 일이란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악처 파멸처 지옥에 태어난다." 라고 엄중히 천명하고 계신다.


그럼 연꽃이 왜 위선자이며 거짓말쟁이인가? 그는 지난번 여러 글에서 남방권 불교를 언급했다. 그리고 마치 자신 스스로가 그곳에서 직접 경험을 하고 본 것처럼 글을 올렸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여행하지 않고 경험하지 않은 것을 마치 그렇게 한듯 여행기나 경험담을 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글을 올려 마치 자신이 남방권 불교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이나 있느냥 행세했다. 또한 엉터리 정보를 주워와서 건축양식이니 불탑이니 불상이니 하면서 모두다 거짓말을 했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반론을 펴고 잘못된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단한번도 자신의 글을 수정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불자의 조건에 대해서도 여러번 글을 올렸다. 연꽃 자신 스스로가 정말로 불교를 비난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밝힐만큼 신심이 깊은지 증명해 보라고 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16가지 재가자의 조건중에서 과연 몇가지를 원만하게 갖추고 있는지 또는 갖출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우선먼저 드러내 보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다. 아마도 그가 정말 신심깊은 불자이고 16가지 갖추어야 할 조건중에 일부라도 갖추거나 또는 갖출려고 노력하는 불자라면 이미 스스로가 아니라더라도 그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증명이 되었을 것 같다. 


그는 간혹 사찰순례기나 또는 절에 간 사진과 글을 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글을 쓰기 위한 목적이지 결코 신심어린 불자가 진심으로 불교를 알고자 사찰을 찾아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자인냥 하면서 찰이나 순례를 가지만 사진만 잔뜩 찍고서 글을 쓰는데 이용하기 바쁘다. 자신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다른 모습은 열심히 올린다. 이것이 위선적이고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사띠(sati)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마음챙김, 마음새김, 알아차림, 온마음등으로 각자 해석하지만 sati 라는 뜻에서 벗어나는 단어는 없다. 연꽃은 계속하여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이 틀렸다고 주장하는데 그 주된 이유가 챙김이라는 단어에는 sati 의 주된 의미중 하나인 '기억'이라는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먼저 사전을 찾아보면 챙김이라는 의미는 '사용하기 위해서 찾아서 한데 모으다'라는 의미이다. 즉 어떤 물건을 찾아서 챙긴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내가 어떤 물건이 무엇에 사용하는 것인지 내것인지 남의 것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상태에서 챙김이라는 행동이 가능하지 않다. 내것이고 내 물건이고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지를 이미 기억하고 있기에 챙기는 행위가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챙김이라는 의미속에는 당연히 기억이라는 함축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사전 기억이 없이 챙기는 행위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이고 아무런 값어치 없는 희론에 불과한 것이다. 새기든 챙기든 알아차리든 온 마음이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sati 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파악하는게 더 중요할 것이다.


‘알아차림, 마음챙김, 새김’등으로 번역한 사띠(sati)는 √smṛ(기억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그 1차적인 의미는 ‘기억(記憶), 억념(憶念), 유념(留念)’이고, 2차적인 의미는 ‘깨어있는 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각성, 명료한 마음, 침착함, 자각, 의식’ 등이다. 중국에서는 염(念)이나 억념(憶念)으로 번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mindfulness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과 함께 경에 빈번히 등장하는 술어로 삼빠쟌나(sampajanna)가 있다. '주의, 사려분별, 판별, 이해, 세밀한 주시’이란 뜻이고 종종 거의 유사한 의미를 지닌 사띠와 함께 쓰인다. 중국에서 정지(正知)로 옮겼고, 그리고 이 사띠와 삼빠쟌나는 경에서 sati-sampajanna와 같이 둘이 결합된 형태로 자주 나오며 중국에서 정념정지(正念正知)로 옮겼다.

 

그리고 sati 와 직접적인 연관이 되는 수행교리가 바로 '사념처(四念處)’로 번역한 사띠빠따나(sati-paṭṭhāna)이다. 이것는 sati(알아차림)+paṭṭhāna(확립)의 합성어로 몸(身, kāya, 신수관), 느낌(受, vedanā, 수수관), 마음(心, citta, 심수관), 마음의 대상(法, dhamma, 법수관)의 네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알아차리는지 몸의 관찰(신수관)중 부를 옮겨와 본다.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고, 서 있거나 앉거나 팔과 다리를 굽히고 펴는 것을 올바로 알아차리고, 옷을 입고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을 올바로 알아차리고,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을 올바로 알아차리고, 잠들고 깨어 있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을 올바로 알아 차린다(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한마디로 "깨어있음" 이다. 해타나 혼침이나 흐리멍텅하거나 무지하거나 어리석다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소멸되는 현상을 꿰뚫어 알아 차리고 통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교는 "깨어 있으라" 라고 하는 것이다. 술을 금지하는 가장 주된 이유도 이것이고 붓다께서는 마지막 열반에 드시는 그 순간까지도 깨어있음을 유지했다. 


이것이 사띠(sati)이다. 아직도 마음챙김이 중요한지 아니면 마음새김이 더 올바른 해석인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 하기전에 그 내용부터 제대로 파악하면 좋겠다. 그러면 챙김이든 새김이든 그게 중요하지 않다. 모두다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