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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상윳따 - 제6장 담론 품(SN46:51-S4N6:56. Sākaccha-vagga)

실론섬 2014. 7. 9. 16:20

제6장 담론 품
Sākaccha-vagga (SN 46.51-56)

 

āhārasuttaṃ (SN 46.51-자양분 경)
232.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장애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의 자양분과 자양분이 아닌 것을 설하겠다. 그것을 들어라.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아름다운 표상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지 않게(지혜롭지 않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악의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악의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적의를 일으키는 표상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악의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악의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권태로움, 나른함, 무기력함, 식곤증, 정신적 태만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들뜸(산만함)과 후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들뜸과 후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의심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의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의심의 토대인 법들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많이 기울이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의심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의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토대인 법들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마음 챙김으로 이뤄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무익한 법들, 비난할 것이 없는 것과 비난받아 마땅한 법들, 저열하거나 뛰어난 법들, 악(惡)과 선(善)으로 상반되는 법들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일곱 가지 법들이 있어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①탐구함 ②토대를 깨끗이 함 ③기능(五根)을 조화롭게 닦음 ④지혜 없는 사람을 피함 ⑤지혜로운 사람을 친근함 ⑥심오한 지혜로 행해야 할 것에 대해 반조함 ⑦이것을 확신함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으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11가지 법이 있어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①악처 등의 두려움을 반조함 ②이점을 봄 (③가야할 길의 과정을 반조함 ④탁발한 음식을 공경함 ⑤[정법의] 유산의 위대함을 반조함 ⑥스승의 위대함을 반조함 ⑦태생의 위대함을 반조함 ⑧동료수행자들의 위대함을 반조함 ⑨게으른 사람을 멀리함 ⑩부지런히 정진하는 자를 친견함 ⑪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토대인 법들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이다.  

註) “나아가서 11가지 법이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①세존을 계속해서 생각함(佛隨念) ②법을 계속해서 생각함(法隨念) ③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僧隨念) ④계를 계속해서 생각함(戒隨念) ⑤관대함을 계속해서 생각함(捨隨念) ⑥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함(天隨念) ⑦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止息隨念) ⑧거친 자를 멀리 함 ⑨인자한 자를 섬김 ⑩신심을 일으키는 경들을 반조함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편안함(고요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편안함(고요함)과 마음의 고요함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일곱가지 법이 고요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①좋은 음식을 수용함 ②안락한 기후에 삶 ③편안한 자세를 취함 ④적절한 노력 ⑤포악한 사람을 멀리함 ⑥몸이 고요한 사람을 친견함 ⑦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사마타의 표상과 산란함(흔들림)이 없는 표상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11가지 법이 있어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①토대를 깨끗하게 함 ②모든 기능들을 고르게 조절함 ③표상에 대한 능숙함 ④적당한 때에 마음을 분발함 ⑤적당한 때에 마음을 절제함 ⑥적당한 때에 격려함 ⑦적당한 때에 평온하게 함 ⑧삼매에 들지 않은 사람을 멀리함 ⑨삼매에 든 사람을 친근함 ⑩禪과 해탈을 반조함 ⑪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토대인 법들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아서 완성하기 위한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다섯 가지 법이 있어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①중생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 ②상카라(行)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 ③중생과 상카라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사람을 멀리함 ④중생과 상카라에 대해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친근함 ⑤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부정한 표상[不淨相]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부정한 표상(asubha-nimitta)'이란 시체가 부푼 것 등의 열 가지 부정함의 대상인 법들이다.(SA.iii.165)  

*“나아가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다. 그것은 ①부정한 표상을 지님(배움) ②부정함을 닦기에 전념함 ③감각의 문들을 잘 단속함 ④음식에서 적당함을 앎 ⑤훌륭한 도반(선지식)을 만남 ⑥적절한 대화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제거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아라한도에 의해서 완전히 제거된다.(SAT.iii.165)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악의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악의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자심해탈]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악의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악의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서 악의를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나니 그것은 ①자애의 표상을 지님(배움) ②자애를 닦기에 전념함 ③자기 자신이 바로 업의 주인이며, 상속자임을 명심함 ④이에 관해 거듭해서 숙고함 ⑤훌륭한 도반 ⑥적절한 대화이다.(SA.iii.166)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시도의 요소와 인내의 요소와 노력의 요소가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서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다. 그것은 ①과식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 ②자세를 바꿈 ③광명상(光明相)을 마음에 새김 ④옥외에 머묾 ⑤훌륭한 도반 ⑥적절한 대화이다. 해태와 혼침은 아라한도에 의해서 완전히 제거된다.(SA.iii.166)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들뜸과 후회는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고요한 것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들뜸과 후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서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다. 그것은 ①[경을] 많이 배움 ②[경을] 탐구함 ③계율을 숙지함 ④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분들을 친견함 ⑤훌륭한 도반 ⑥적절한 대화이다. 들뜸은 아라한도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후회는 불환도에서 완전히 제거된다.(SA.iii.167)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의심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의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유익하지 않은 법들, 비난받을 것이 없는 없는 것과 비난받아야 마땅한 법들, 저열한 것과 뛰어난 법들, 선과 악으로 상반되는 법들이 있다. 거기에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이고 많이 행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의심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의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한 여섯 가지 법들이 있다. 그것은 ①[경을] 많이 배움 ②[경을] 탐구함 ③계율을 숙지함 ④[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짐 ⑤훌륭한 도반 ⑥적절한 대화이다. 의심은 예류도에서 완전히 제거된다.(SA.iii.167)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토대인 법들이 있다. 거기에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유익하지 않은 법들, 비난받지 않은 것과 비난받아야 마땅한 법들, 저열한 것과 뛰어난 법들, 선과 악으로 상반되는 법들이 있다. 거기에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법에 대한 선별로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시도의 요소와 인내의 요소와 노력의 요소가 있다. 거기에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더욱 증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구성된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토대인 법들이 있다. 거기에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이다. 거기에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사마타의 표상과 산란함이 없는 표상이 있다. 거기에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인가?
비구들이여,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인 법들이 있다. 거기에 마음을 기울임을 많이 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일어나게 하고,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더욱 증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닌 것이다.”

 

pariyāyasuttaṃ (SN 46.52-방법 경)  
233.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다. 그때 그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사왓티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사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라고. 

 

그래서 그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사원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그 비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야 한다.’라고. 도반들이여, 참으로 우리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야 한다.’라고. 여기 법을 설하는 것과 가르침의 근본에서 사문 고따마와 우리들에게 어떤 차이, 어떠한 특별함, 어떤 다른 점이 있습니까?”

 

그때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반박하지도 못했다. 인정하지도 반박하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났다. ‘우리는 세존의 앞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알아봐야겠다.’라면서. 그리고 비구들은 사왓티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희들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사왓티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사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사원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한 쪽에 앉았습니다. 한 쪽에 앉은 저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야 한다.’라고. 도반들이여, 참으로 우리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아야 한다.’라고. 여기 법을 설하는 것과 가르침의 근본에서 사문 고따마와 우리들에게 어떤 차이, 어떠한 특별함, 어떤 다른 점이 있습니까?'라고. 그때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반박하지도 못했습니다. 인정하지도 반박하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났습니다. ‘우리는 세존의 앞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알아봐야겠다.’라면서."

 

“비구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들이여, 다섯 가지 장애가 열 가지가 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열 네 가지가 되는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질문을 받은 외도 유행승들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고, 더 나아가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이 그들의 영역 아닌 곳에 있기 때문이다(한계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사람이 사는 세계를 위해, 여래나 여래의 제자 또는 여기와 다른 곳에서 들은 뒤에, 이 질문들에 대한 설명에 의해 마음을 만족하게 할 자를 나는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다섯 가지 장애가 열 가지가 되는 방법인가?

비구들이여, 내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도 장애이고 외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도 장애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되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악의는 장애이고 외적인 악의도 장애이다. '악의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되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해태도 장애이고 혼침도 장애이다. '해태와 혼침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들뜸도 장애이고 후회도 장애이다. '들뜸과 후회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한 의심은 장애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의심도 장애이다. '의심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다섯 가지 장애가 열 가지가 되는 방법이다.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해태와 혼침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나태함이 해태(thina)'이고, 무기력함이 혼침(middha)이다. 분발심이 없어 무기력하고 활기가 없어 피로하다는 뜻이다. 해태는 분발이 없는 특징을 가진다. 정진을 없애는 역활을 한다. 뒤처지는 것을 나타난다. 혼침은 일에 적합하지 못한 특징을 가진다. [마음의 문을] 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게으름으로 나타난다. 혹은 졸음과 수면으로 나타난다. 권태, 하품 등에 대해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기울임이 이 둘의 가까운 원인이다.(XIV.167)

“‘내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란 자신의 오온에 대해서 생긴 욕탐을 말하고, ‘외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란 남들의 오온과 [무정물 등]에 대한 욕탐이다.”(SA.iii.137)  
“‘내적인 성냄’이란 자신의 손이나 발 등에 대해서 생긴 적의를 말하고, ‘외적인 성냄’이란 남들의 것들에 대해서 생긴 적의를 말한다.”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해태와 혼침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나태함이 해태이고, 무기력함이 혼침이다. 분발심이 없어 무기력하고 활기가 없어 피로하다는 뜻이다. 이 가운데서 해태는 분발이 없는 특징을 가진다. 정진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처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혼침은 일에 적합하지 못한 특징을 가진다. [마음의 문을]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게으름으로 나타난다. 혹은 졸음과 수면으로 나타난다. 권태, 하품 등에 대해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기울임이 이 둘의 가까운 원인이다.”   
“들뜬 상태가 들뜸이다. 그것의 특징은 바람결에 출렁이는 물처럼 고요하지 않음이다. 마치 바람에 부딪혀 흔들리는 깃발처럼 동요하는 역할을 한다. 마치 돌에 맞아 흩어지는 재처럼 산란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마음이 동요할 때 그것에 대해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을 기울임이 가까운 원인이다. 마음의 산만함이라고 알아야 한다.” 
“악한 것을 행하였음이 악행을 했음이다. 그것의 상태가 후회이다. 나중에 속을 태우는 특징을 가진다. [좋은 일을] 행하지 않은 것과 [나쁜 일을] 행한 것을 슬퍼하는 역할을 한다. 뉘우침으로 나타난다. 행함과 행하지 아니함이 가까운 원인이다. 노예의 근성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 청정도론 - 
“내적인 법들에 대한 의심이란 [‘나는 누구인가?’하는 등의] 자신의 오온에 대해 혼란함을 말하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의심이란 여덟 가지 외적인 경우에 대한 큰 의심을 말한다. 여덟 가지 큰 의심이란 불, 법, 승, 계, 과거, 현재, 미래, 연기를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열네 가지가 되는 방법인가?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한 마음챙김도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마음챙김도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해 지혜로써 조사하고(고찰하고) 철저히 조사하고 완전하게 검증하는 것도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해 지혜로 조사하고 철저히 조사하고 완전하게 검증하는 것도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몸에 속한 정진도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마음에 속한 정진도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이 있는 희열(기쁨)도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거친 사유가 없고 미세한 사유가 없는 희열도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몸의 편안함(고요함)도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마음의 편안함도 무엇이든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있는 삼매도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도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한 평정도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평정도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이다.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열네 가지가 되는 방법이다.”


*몸의 고요함이란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의] 세 가지 무더기들의 둔감함을 가라앉힘을 말하고 마음의 고요함이란 의식의 무더기의 둔감함을 가라앉힘을 말한다.   

 

aggisuttaṃ (SN 46.53-불 경)
234.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갔다. (앞의 방법 경과 같이 펼침)


“비구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들이여, 마음이 나태해져 있을 때는 어떤 깨달음의 요소들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어떤 깨달음의 요소들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입니까? 마음이 산만해져 있을 때는 어떤 깨달음의 요소들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어떤 깨달음의 요소들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질문을 받은 외도 유행승들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고, 더 나아가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이 그들의 영역 아닌 곳에 있기 때문이다(한계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사람이 사는 세계를 위해, 여래나 여래의 제자 또는 여기와 다른 곳에서 들은 뒤에, 이 질문들에 대한 설명에 의해 마음을 만족하게 할 자를 나는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나태해져 있을 때는 편안함(고요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 나태해져 있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 그 이유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작은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그 불에 젖은 풀들을 넣고, 젖은 쇠똥을 넣고, 젖은 나무토막을 넣고, 물을 끼얹으며 바람을 불 것이고 흙을 뿌릴 것이다. 참으로 그 사람은 작은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이 나태해져 있을 때는 편안함(고요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 나태해져 있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 그 이유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나태해져 있을 때에는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수행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다(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나태해져 있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가 쉬운 것이 그 이유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작은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그 불에 마른 풀들을 넣고, 마른 쇠똥을 넣고, 마른 나무토막을 넣고, 앞에서 바람을 불 것이고, 흙을 뿌리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그 사람은 작을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이 나태해져 있을 때에는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수행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다(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나태해져 있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가 쉬운 것이 그 이유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산만해져 있을 때는(들떠 있을 때는)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 산만해져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 그 이유이다(들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어려운 것이 그 원인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큰 불을 끄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그 불에 마른 풀을 넣고, 마른 쇠똥을 넣고, 마른 나무토막을 넣고, 앞에서 바람을 불 것이고, 흙을 뿌리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그 사람은 큰 불을 끌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이 산만해져 있을 때는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고,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 산만해져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 그 이유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산만해져 있을 때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 산만해져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가 쉬운 것이 그 이유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큰 불을 끄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그 불에 젖은 풀은 넣고, 젖은 쇠똥을 넣고, 젖은 나무토막을 넣고, 물을 끼얹으며 바람을 불지 않을 것이고, 흙을 뿌릴 것이다. 참으로 그 사람은 큰 불을 끌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이 산만해져 있을 때는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고,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고,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의 닦음을 위해서는 적당한 때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 산만해져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가 쉬운 것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마음 챙김은 항상 유익한 법이라고 나는 말한다.”

 

*소금과 향료처럼, 다방면에 유능한 궁중 대신처럼,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고 나는 말한다는 뜻이다. 마치 소금과 향료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것처럼, 마치 다방면에서 유능한 대신이 전쟁의 업무든 정치적인 업무든 호위하는 업무든 모든 것이 능통한 것처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라앉은 마음을 분발하게 하는 이런 모든 것은 마음챙김에 의해서 성취된다, 마음챙김 없이는 이러한 것을 성취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SA.iii.171)  

 

mettāsahagatasuttaṃ (SN 46.54-자애와 함께함 경)
235.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꼴리야에서 할릿다와사나라는 꼴리야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하여 할릿다와사나로 들어갔다. 그때 그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할릿다와사나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사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그래서 그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사원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라고. 

도반들이여, 참으로 우리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라고. 여기 법을 설함과 가르침의 근본에서 사문 고따마와 우리에게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름이 있습니까?”

 

그때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반박하지도 못했다. 인정하지도 반박하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났다. ‘우리는 세존의 앞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알아봐야겠다.'라면서. 그리고 비구들은 할릿다와사나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하여 할릿다와사나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희들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할릿다와사나로 탁발을 가는 것은 너무 이르다. 우리는 지금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사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이 머물고 있는 사원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한 쪽에 앉았습니다. 한 쪽에 앉은 저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라고. 도반들이여, 참으로 우리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물러라. ’라고. 여기 법을 설함과 가르침의 근본에서 사문 고따마와 우리에게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름이 있습니까?' 그때 저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부정하지도 못했습니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났습니다. ㅡ '우리는 세존의 앞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알아봐야겠다.'라면서.”


“비구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들이여,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자심해탈.慈心解脫)은 어떻게 닦여진 것입니까?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결실(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입니까? 도반들이여, 연민에 의한 마음의 해탈(비심해탈.悲心解脫)은 어떻게 닦여진 것입니까?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결실(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입니까? 비구들이여, 기뻐함에 의한 마음의 해탈(희심해탈.喜心解脫)은 어떻게 닦여진 것입니까?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결실(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입니까? 비구들이여, 평정에 의한 마음의 해탈(사심해탈.捨心解脫)은 어떻게 닦여진 것입니까?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결실(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질문을 받은 외도 유행승들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고, 더 나아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이 그들의 영역 아닌 곳에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세계, 하늘사람이 사는 세계를 위해, 여래나 여래의 제자 또는 여기와 다른 곳에서 들은 뒤에, 이 질문들을 위한 설명으로 마음을 만족하게 할 자를 나는 보지 못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은 어떻게 닦여진 것인가?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결실(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애를 수반하고,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자애를 수반하고,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문다. 또는 그는 청정함을 통한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지혜를 가진 비구가 더 높은 해탈을 체득하지 못할 때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은 청정함(깨끗함)이 그 정점(궁극)이라고 나는 말한다.

 

*'혐오스럽지 않은 것(appatikula)'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중생에 대한 혐오스럽지 않음과 형성된 것(行)에 대한 혐오스럽지 않음이다. 여기서 혐오스럽지 않은 것이란 원하는 대상(ittha vatthu)을 뜻한다.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patikula-sanni)'라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인식을 가지는 것(anittha-sanni)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머무는가? 부정상(不淨想)으로 충만하거나 무상이라고 마음을 기울인다.(SA.iii.171)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자애를 가득 펴거나 혹은 요소(界,dhatu)일 뿐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둔다. 이렇게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지고' 머문다.(SA.iii.290)
*이렇게 하여 비구는 자애를 통해서 세 가지나 네 가지 선(禪)을 성취한 뒤 그것을 기초로 삼아서 위빳사나를 증장시켜서 아라한됨을 증득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위빳사나와 더불어 도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성자들의 신통(ariy-iddhi)을 보여준다.(SA.iii.172)
*'깨끗함(청정함)을 통한 해탈(subha-vimokkha)'은 여덟 가지 해탈(8해탈) 가운데 세 번째이다. 
*자애에 머무는 자에게는 중생들이 혐오스럽지 않다. 그때 혐오감이 없는 것에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혐오감이 없는 청정한 푸른 색깔 등에 대해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자애는 깨끗함을 통한 해탈을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깨끗함이 정점이라고 설하셨다.”(청정도론.IX.120)  
*주석서에 의하면 이 가르침은 자애를 통한 禪을 기초로 한 뒤 형성된 것들을 명상하여 아라한됨을 증득할 수 없는 자를 위해서 설하신 것이라고 한다. 같은 방법은 아래의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정을 통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의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SA.iii.172)

그러면 비구들이여, 연민을 통한 마음의 해탈은 어떻게 닦여진 것인가?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결실(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연민을 수반하고,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연민을 수반하고,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문다. 또는 그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장애)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허공에 걸림이 없는 공무변처를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지혜를 가진 비구가 더 높은 해탈을 체득하지 못할 때 연민에 의한 마음의 해탈은 공무변처가 그 정점이라고 나는 말한다.

 

*연민에 머무는 자가 몽둥이로 때리는 등 물질로 인한 중생의 고통을 관찰할 때 연민이 일어나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위험을 잘 알게 된다. 그가 물질에 대한 위험을 잘 알기 때문에 땅의 까시나 등 가운데서[그가 명상했던] 어떤 까시나를 제거하여 물질로부터 벗어남인 허공에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연민은 공무변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무변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청정도론. Ⅸ.121)   

그러면 비구들이여, 기뻐함에 의한 마음의 해탈은 어떻게 닦여진 것인가?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결실(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기뻐함을 수반하고,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기뻐함을 수반하고,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문다. 또는 그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識]’라고 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지혜를 가진 비구가 더 높은 해탈을 체득하지 못할 때 기뻐함에 의한 마음의 해탈은 식무변처가 정점이라고 나는 말한다.

 

*“더불어 기뻐함에 머무는 자가 갖가지 기쁨을 가져올 원인으로 인해 기쁨이 일어난 중생의 의식을 관찰해 더불어 기뻐함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더불어 기뻐함에 머무는 자의 마음은 의식을 이해하는데 친숙해져 있다. 그가 순서에 따라 얻은 공무변처를 초월한 뒤 허공의 표상을 자기의 영역으로 삼는 의식으로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더불어 기뻐함은 식무변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식무변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였다.(청정도론. Ⅸ.122)    


그러면 비구들이여, 평정에 의한 마음의 해탈은 어떻게 닦여진 것인가?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결실(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평정을 수반하고,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
평정을 수반하고,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는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약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정하게 머문다. 또는 그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지혜를 가진 비구가 더 높은 해탈을 체득하지 못할 때 평정에 의한 마음의 해탈은 무소유처가 그 정점이라고 나는 말한다.

 

*“평정에 머무는 자는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고통으로 벗어나기를, 이미 얻은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말기를.’이라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행복(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구경법의 순서에 따라 얻은 식무변처를 초월한 뒤 구경법인 의식의 부재 – 이 부재에는 고유성질이 없다. - 에 마음을 가져갈 때 어려움 없이 마음이 그곳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평정은 무소유처를 위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해탈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소유처가 정점이라고 설하셨다.(청정도론. Ⅸ.123) 

 

saṅgāravasuttaṃ (SN 46.55-상가라와 경)
236.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상가라와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고따마 존자여, 하지만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집니까? 하물며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바라문이여, 욕탐(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에 사로잡히고, 욕탐·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욕탐·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하지 않으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석서는 다섯 가지 장애의 각각에 대해서 세 가지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①禪을 통해서 억압하여 벗어남 ②위빳사나를 통해서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벗어남 ③도를 통해서 근절하여 벗어남이다.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부정(不淨)함에 의한 초선을 통해서 억압하여 벗어나고, 아라한도를 통해서 근절하여 벗어난다.(여기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단지 감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에 대한 욕망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2) 악의는 자애에 의한 초선을 통해서 억압하고, 불환도를 통해서 근절한다. (3) 해태와 혼침은 광명상(즉 태양이나 보름달의 원반 같은 밝은 빛을 가시화하는 것을 뜻함)을 통해서 억압하고, 아라한도를 통해서 근절한다. (4) 들뜸과 후회는 사마타를 통해서 억압한다. 들뜸은 아라한도를 통해서 후회는 불환도들 통해서 근절한다. (5) 의심은 법의 구분을 통해서 억압하여 벗어나고, 예류도를 통해서 근절한다.(SA.iii.174)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에 붉은 랙이나 노란 심황이나 남색이나 심홍색의 염료가 섞여 있습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타오르는 불 위에 놓고 열을 가해 열이 물을 끓입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이끼와 수초로 덮여 있습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바람에 흔들리고 움직이고 소용돌이치고 물결칩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흐리고 혼탁하고 진흙투성이고 어두운 곳에 놓여있습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위의 문구들은 욕탐(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욕탐(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에 사로잡히고, 욕탐·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욕탐·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둘 모두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오래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하지 않으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라문이여, 욕탐·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욕탐·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에 압도되지 않은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욕탐·악의·해태와 혼침·들뜸과 후회·의심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 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보고,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보고, 둘 모두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봅니다.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뜨라들도 분명해지니 암송한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에 붉은 랙이나 노란 심황이나 남색이나 심홍색의 염료가 섞여 있지 않습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고 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타오르는 불 위에 놓지 않고 열을 가하지 않고 열이 물을 끓이지 않습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고 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이끼와 수초로 덮여 있지 않습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고 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소용돌이치지 않고 물결치지 않습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고 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맑고 혼탁하지 않고 진흙이 없고 밝은 곳에 놓여있습니다.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춰보면 있는 그대로 알고 볼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고 장애가 아니고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어서 닦고 많이 행함으로써 명지와 해탈의 결실(과.果)의 실현으로 인도합니다. 무엇이 일곱입니까? 바라문이여,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고 장애가 아니고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어서 닦고 많이 행함으로써 명지와 해탈의 결실의 실현으로 인도합니다. ···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 희열(기쁨)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는 덮개가 아니고 장애가 아니고 마음의 오염원이 아니어서 닦고 많이 행함으로써 명지와 해탈의 결실의 실현으로 인도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듯, 혹은 가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사람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법)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법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abhayasuttaṃ (SN 46.56-아바야 경)
23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바야 왕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아바야 왕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뿌라나 깟사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지 못함과 보지 못함에는 원인도 조건도 없다. 원인도 조건도 없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앎과 봄에는 원인도 조건도 없다. 원인도 조건도 없이 알고 본다.’라고.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왕자여, 알지 못함과 보지 못함에는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습니다.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왕자여, 앎과 봄에는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습니다.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알고 봅니다.”

 

*아바야 왕자는 라자가하의 빔비사라 왕과 웃제니의 미인이었던 빠두마와띠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으며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이 된 아자따삿뚜와는 이복형제였다. 율장에 의하면 그는 세존의 주치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와까 꼬마라밧짜가 갓난아기로 버려진 것을 주워서 기른 사람이기도 하다. 맛지마 니까야 ‘아바야 왕자 경’에 의하면 그는 니간타 나따뿟따의 신도였는데 사문 고따마를 논파하라는 니간타 나따뿟따의 말에 따라 세존을 논파하러 갔지만 오히려 세존의 말씀을 듣고 세존의 재가신도가 되었다. 그는 훗날 아버지가 시해되자 마음이 심란하여 출가하였으며 아라한이 되었다.(ThigA.39)

 

“그러면 세존이시여, 알지 못함과 보지 못함에는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입니까? 어떻게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까?”

“왕자여, 욕탐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욕탐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욕탐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때, 왕자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함에는 이것도 원인이고, 이것도 조건입니다. 이렇게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또한, 왕자여, 악의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악의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 해태와 혼침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 들뜸과 후회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 의심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의심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할 때, 왕자여,  알지 못함과 보지 못함에서 이것도 원인이고, 이것도 조건입니다. 이렇게도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왕자여, 이것들의 이름은 장애들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장애들입니다. 선서시여, 참으로 장애들입니다. 각각 하나씩의 장애에만 압도되어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다섯 가지 장애들 모두에 압도되는 것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세존이시여, 앎과 봄에는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입니까? 어떻게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알고 봅니까?”
“여기, 왕자여, 비구는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습니다. 그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봅니다. 왕자여, 앎과 봄에는 이것도 원인이고, 이것도 조건입니다. 이렇게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알고 봅니다.

 

다시, 왕자여, 비구는 ···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욕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내놓음에 이르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습니다. 그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를 닦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봅니다. 왕자여, 앎과 봄에는 이것도 원인이고, 이것도 조건입니다. 이렇게도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알고 봅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왕자여, 이것들의 이름은 깨달음의 요소들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깨달음의 요소들입니다. 선서시여, 참으로 깨달음의 요소들입니다. 각각 하나씩의 깨달음의 요소만 갖추어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것입니다. 그러니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 모두를 갖추는 것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독수리봉산에 올라오느라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했는데 이제 다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법을 철저히 알아 차렸습니다.”




제6장 담론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