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다섯의 모음 - 20. 바라문 품(Brāhmaṇa-vagga. AN5.191-200)

실론섬 2014. 7. 21. 20:13

제20장 바라문 품 Brāhmaṇa-vagga(AN 5.191-200)

soṇasuttam (AN 5.191- 개(犬) 경)

191.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오래된 바라문들의 법이 있는데 지금은 개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예전에, 비구들이여, 바라문들은 바라문 여인하고만 관계를 맺었고 바라문이 아닌 여인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바라문들은 바라문 여인이건 바라문이 아닌 여인이건 관계를 맺는다. 
비구들이여, 지금의 개들은 암캐하고만 관계를 맺고 암캐가 아닌 다른 동물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첫 번째 오래된 바라문들의 법이니 지금은 개들에게서나 볼 수 있고 바라문들에게서는 볼 수 없다.

 

예전에, 비구들이여, 바라문들은 바라문 여인이 수태기(受胎期)에 있을 때만 관계를 맺었고 수태기가 아닐 때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바라문들은 바라문 여인이 수태기에 있건 수태기가 아니건 관계를 맺는다. 
비구들이여, 지금의 개들은 암캐가 수태기(受胎期)에 있을 때만 관계를 맺고 수태기가 아닐 때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두 번째 오래된 바라문들의 법이니 지금은 개들에게서나 볼 수 있고 바라문들에게서는 볼 수 없다.


예전에, 비구들이여, 바라문들은 바라문 여인을 사지도 않았고 팔지도 않았으며 사랑으로 함께 만나 교제하며 살았다. 그러나 지금의 바라문들은 바라문 여인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며 사랑으로 함께 만나 교제하며 살기도 한다. 

비구들이여, 지금의 개들은 암캐를 사지도 않고 팔지도 않으며 사랑으로 함께 만나 교제하며 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세 번째 오래된 바라문들의 법이니 지금은 개들에게서나 볼 수 있고 바라문들에게서는 볼 수 없다.


예전에, 비구들이여, 바라문들은 재물, 곡물, 은, 금을 축적해두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바라문들은 재물, 곡물, 은, 금을 축적해둔다. 

비구들이여, 지금의 개들은 재물, 곡물, 은, 금을 축적해두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네 번째 오래된 바라문들의 법이니 지금은 개들에게서나 볼 수 있고 바라문들에게서는 볼 수 없다.


예전에, 비구들이여, 바라문들은 저녁에는 저녁 음식만을 찾았고 아침에는 아침 음식만을 찾았다. 그러나 지금의 바라문들은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고서는 남은 것은 가지고 간다. 
비구들이여, 지금의 개들은 저녁에는 저녁 음식만을 먹고 아침에는 아침 음식만을 찾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다섯 번째 오래된 바라문들의 법이니 지금은 개들에게서나 볼 수 있고 바라문들에게서는 볼 수 없다. 

이러한,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오래된 바라문들의 법이 있는데 지금은 개들에게서나 볼 수 있고 바라문들에게는 볼 수 없다.”

 

doṇasuttam (AN 5.192-도나 경) 
192. 그 무렵 도나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길ㄹ 주고 받은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도나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도나 바라문(Dona brahmana)는 세존 입멸 후에 세존의 사리 배분을 담당한 바로 그 바라문이다.

“고따마 존자시여, 사문 고따마는 늙고 나이 들고 긴 세월을 보냈고 노쇠한 바라문들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고 반기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가 늙고 나이 들고 긴 세월을 보냈고 노쇠한 바라문들에게 이처럼 인사를 하지도 않고 반기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는 것은 온당하지가 않습니다.”
“도나여, 그대도 바라문이라고 인정하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사람에 대해서 바르게 말하면서 말하기를 ‘그 바라문은 모계와 부계 양쪽 모두로부터 순수 혈통을 이어왔고 일곱 선대 동안 태생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베다를 공부하고 만뜨라를 호지하며 어휘와 제사와 음운과 어원에 이어 역사를 다섯 번째로 하는 세 가지 베다에 통달하였고 언어와 문법에 능숙하며 자연의 이치와 대인상에 능통하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두고 바르게 말하면서 말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바라문으로 모계와 부계 양쪽 모두로부터 순수 혈통을 이어왔고 일곱 선대 동안 태생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저는 베다를 공부하고 만뜨라를 호지하며 어휘와 제사와 음운과 어원에 이어 역사를 다섯 번째로 하는 세 가지 베다에 통달하였고 언어와 문법에 능숙하였으며 자연의 이치와 대인상에 능통합니다.”

“도나여, 바라문들의 선조들이 있었다. 그들은 만뜨라를 만들고 만뜨라를 설하는 선인들이었다. 지금의 바라문들은 그 선조들이 노래하고 설하고 모은 오래된 만트라 구절들을 따라 노래하고, 따라 설하고, 설한 것을 다시 따라 설하고, 말한 것을 다시 따라 말하나니, 그들은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웻사미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바라드와자, 와셋타, 깟사빠, 바구등이다. 그들은 다섯 부류의 바라문들을 천명하였나니 범천과 동등한 자, 신과 동등한 자, 범위 내에 있는 자, 범위를 벗어나버린 자, 그리고 다섯 번째로 천한 바라문이다. 도나여, 그대는 이들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저희는 이러한 다섯 부류의 바라문들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희가 바라문이라는 것만을 압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제가 이러한 다섯 부류의 바라문들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법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나여, 그렇다면 들어라. 듣고 잘 마음에 잘 새기도록 하라. 나는 이제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라고 도나 바라문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도나여, 어떻게 바라문은 범천과 동등하게 되는가?

여기, 도나여, 바라문은 모계와 부계 양쪽 모두로부터 순수 혈통을 이어왔고 일곱 선대 동안 태생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48년간을 동정남으로 청정범행을 닦고 만트라를 공부한다. 그렇게 한 뒤 스승을 위해서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 찾지 않는다. 도나여, 어떤 것이 법다운 것인가? 농부처럼 하지 않고, 상인처럼 하지 않고, 소치는 사람처럼 하지 않고, 활쏘는 사람처럼 하지 않고, 왕의 사람처럼 하지 않고, 다른 공예가들처럼 하지 않는다. 그는 탁발하는 발우를 경멸하지 않으면서 오직 탁발행으로 한다.

그는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스승께 바친 뒤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지니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자애[慈]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 연민[悲]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喜]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捨]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도나여, 그는 이러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은 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선처(善處)인 범천의 세상에 태어난다. 
이렇게, 도나여, 바라문은 범천과 동등하게 된다.”

그러면, 도나여, 어떻게 바라문은 신과 동등하게 되는가?

여기, 도나여, 바라문은 모계와 부계 양쪽 모두로부터 순수 혈통을 이어왔고 일곱 선대 동안 태생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48년간을 동정남으로 청정범행을 닦고 만뜨라를 공부한다. 그렇게 한 뒤 스승을 위해서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 찾지 않는다. 도나여, 어떤 것이 법다운 것인가? 농부처럼 하지 않고, 상인처럼 하지 않고, 소치는 사람처럼 하지 않고, 활쏘는 사람처럼 하지 않고, 왕의 사람처럼 하지 않고, 다른 공예가들처럼 하지 않는다. 그는 탁발하는 발우를 경멸하지 않으면서 오직 탁발행으로 한다.

그는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스승께 바친 뒤 아내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 찾지 않는다. 도나여, 어떤 것이 법다운 것인가? 그는 스스로 사지도 않고 남들이 판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녀를 위해 손에 물이 뿌려진 바라문 여인을 찾는다. 그는 바라문 여인하고만 관계를 맺고 끄샤뜨리야의 여인이나 와이샤의 여인이나 수드라의 여인이나 천민의 여인이나 사냥꾼의 여인이나 죽세공의 여인이나 마차공의 여인이나 거지의 여인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는 임산부와 관계를 맺지 않고 젖먹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수태기가 아닌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도나여, 왜 바라문은 임산부와 관계를 맺지 않는가? 도나여, 만일 바라문이 임산부와 관계를 맺게 되면 사내아이건 여자아이건 불결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산부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러면, 도나여, 왜 바라문은 젖먹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가? 도나여, 만일 바라문이 젖먹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되면 사내아이나 여자아이는 불결하게 젖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젖먹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러면, 도나여, 왜 바라문은 수태기가 아닌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가? 도나여, 그에게 바라문 여인은 감각적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요, 놀이를 위한 것도 아니요,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라문에게 바라문 여인은 후손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후손을 위해서 성관계를 한 뒤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지니고 집을 나와 출가한다. 그는 이렇게 출가하여,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이러한 네 가지 선정을 닦은 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선처(善處)인 천상에 태어난다.

이렇게, 도나여, 바라문은 신과 동등하게 된다.”

*‘[그녀를 위해] 손에 물이 뿌려진’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 : “그는 어떤 집에 혼기가 된 딸이 있으면 가서 그 집 대문 앞에 선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하면 ‘그런 나는 48년간 동정남으로 청정범행을 닦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릴 터이니 당신은 저에게 당신 딸을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는 딸을 데려와서 그의 손에 물을 뿌리고는 준다. 그는 그녀를 위해 그의 손에 물이 뿌려진 그 부인을 데리고 간다.”‘그런데 바라문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청정범행을 닦고서 부인을 찾는가?’ ‘일생 내내 청정범행을 닦을 수 없는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사견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들에겐 이런 사견이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자는 가문의 대를 끊은 자이다. 나중에 그들은 지옥에 떨어진다.’라고.(AAT.ⅲ.57~58)

 

그러면, 도나여, 어떻게 바라문은 바라문의 범위 내에 있는가?
도나여, 여기 바라문은 모계와 부계 양쪽 모두로부터 순수 혈통을 이어왔고 
일곱 선대 동안 태생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48년간을 동정남으로 청정범행을 닦고 만뜨라를 공부한다. 그렇게 한 뒤 스승을 위해서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 찾지 않는다. 도나여, 어떤 것이 법다운 것인가? 농부처럼 하지 않고, 상인처럼 하지 않고, 소치는 사람처럼 하지 않고, 활쏘는 사람처럼 하지 않고, 왕의 사람처럼 하지 않고, 다른 공예가들처럼 하지 않는다. 그는 탁발하는 발우를 경멸하지 않으면서 오직 탁발행으로 한다.

그는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스승께 바친 뒤 아내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 찾지 않는다. 도나여, 어떤 것이 법다운 것인가? 그는 스스로 사지도 않고 남들이 판 것을 받아 들이지도 않고 그녀를 위해 손에 물이 뿌려진 바라문 여인을 찾는다. 그는 바라문 여인하고만 관계를 맺고 끄샤뜨리야의 여인이나 와이샤의 여인이나 수드라의 여인이나 천민의 여인이나 사냥꾼의 여인이나 죽세공의 여인이나 마차공의 

여인이나 거지의 여인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는 임산부와 관계를 맺지 않고 젖먹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수태기가 아닌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도나여, 왜 바라문은 임산부와 관계를 맺지 않는가? 도나여, 만일 바라문이 임산부와 관계를 맺게 되면 사내아이건 여자아이건 불결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산부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러면, 도나여, 왜 바라문은 젖먹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가? 도나여, 만일 바라문이 젖먹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되면 사내아이나 여자아이는 불결하게 젖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젖먹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러면, 도나여, 왜 바라문은 수태기가 아닌 여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가? 도나여, 그에게 바라문 여인은 감각적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요, 놀이를 위한 것도 아니요,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라문에게 바라문 여인은 후손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나여, 그는 딸이나 아들을 낳아 그 아이가 주는 행복감에 애착이 생겨서 가정에 머물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지니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는다. 그는 오래된 바라문들의 범위 내에 머물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다. 바라문이 오래된 바라문의 범위 내에 머물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에 바라문의 범위 내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도나여, 바라문은 바라문의 범위 내에 있다.

 

그러면, 도나여, 어떻게 바라문은 바라문의 범위를 벗어나 버리는가?

여기, 도나여, 바라문은 모계와 부계 양쪽 모두로부터 순수 혈통을 이어왔고 일곱 선대 동안 태생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48년간을 동정남으로 청정범행을 닦고 만뜨라를 공부한다. 그렇게 한 뒤 스승을 위해서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 찾지 않는다. 도나여, 어떤 것이 법다운 것인가? 농부처럼 하지 않고, 상인처럼 하지 않고, 소치는 사람처럼 하지 않고, 활쏘는 사람처럼 하지 않고, 왕의 사람처럼 하지 않고, 다른 공예가들처럼 하지 않는다. 그는 탁발하는 발우를 경멸하지 않으면서 오직 탁발행으로 한다.

그는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스승께 바친 뒤 아내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도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도 찾는다. 그는 스스로 사기도 하고 남들이 판 것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녀를 위해 손에 물이 뿌려진 바라문 여인을 찾기도 한다. 그는 바라문 여인이건 끄샤뜨리야 여인이건 와이샤 여인이건 수드라 여인이건 천민의 여인이건 사냥꾼의 여인이건 죽세공의 여인이건 마차공의 여인이건 거지의 여인이건 관계를 맺는다. 그는 임산부와도 관계를 맺고 젖먹이는 여인과도 관계를 맺는다. 수태기가 아닌 여인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에게 바라문 여인은 감각적 쾌락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놀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즐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후손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오래된 바라문들의 범위 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 버린다. 바라문이 오래된 바라문들의 범위 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버렸기 때문에 바라문은 바라문의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도나여, 바라문의 범위를 벗어나버린다.

 

그러면, 도나여, 어떻게 바라문은 천한 바라문인가?
여기, 도나여, 바라문은 모계와 부계 양쪽 모두로부터 순수 혈통을 이어왔고 일곱 선대 동안 태생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48년간을 동정남으로 청정범행을 닦고 만뜨라를 공부한다. 그렇게 한 뒤 스승을 위해서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도 찾는다. 
도나여, 어떤 것이 법답지 않은 것인가? 그는 농부처럼 하기도 하고 상인처럼 하기도 하고 소치는 사람처럼 하기도 하고 활쏘는 사람처럼 하기도 하고 왕의 사람처럼 하기도 하고 다른 공예가들처럼 하기도 하고, 탁발하는 발우를 경멸하지 않으면서 탁발행으로도 한다. 그는 스승에게 드릴 보시를 스승께 바친 뒤 아내를 찾는다. 법다운 방법으로 찾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도 찾는다. 그는 스스로 사기도 하고 남들이 판 것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녀를 위해 손에 물이 뿌려진 바라문 여인을 찾기도 한다. 그는 바라문 여인이건 끄샤뜨리야의 여인이건 와이샤의 여인이건 수드라의 여인이건 천민의 여인이건 사냥꾼의 여인이건 죽세공의 여인이건 마차공의 여인이건 거지의 여인이건 관계를 맺는다. 그는 임산부와도 관계를 맺고 젖먹이는 여인과도 관계를 맺고 수태기가 아닌 여인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에게 바라문 여인은 감각적 쾌락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놀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즐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후손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모든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이런 그에게 바라문들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바라문이라고 공언하면서 왜 이런 모든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합니까?’라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를 들면, 존자들이여, 불은 깨끗한 것도 태우고 더러운 것도 태우지만 그것 때문에 불이 더럽혀지진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만약 바라문이 이런 모든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더라도 바라문은 그것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습니다.’라고. 도나여, 이런 모든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바라문은 천한 바라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렇게. 도나여, 바라문은 천한 바라문이 된다.

 

도나여, 바라문들의 선조들이 있었다. 그들은 만뜨라를 만들고 만뜨라를 설하는 선인들이었다. 지금의 바라문들은 그 선조들이 노래하고 설하고 모은 오래된 만트라 구절들을 따라 노래하고, 따라 설하고, 설한 것을 다시 따라 설하고, 말한 것을 다시 따라 말하나니 그들은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웻사미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바라드와자, 와셋타, 깟사빠, 바구등이다. 그들은 이러한 다섯 부류의 바라문들을 천명하였다. 범천과 동등한 자, 신과 동등한 자, 범위 내에 있는 자, 범위를 벗어나버린 자, 그리고 다섯 번째로 천한 바라문이다. 도나여, 그대는 이들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렇다면 저희는 천한 바라문의 행동 범위 조차도 채우지 못합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불가사의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법(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saṅgāravasuttam (AN 5.193-상가라와 경) 
193. 그 무렵 상가라와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집니까? 하물며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사로잡히고 감각적 쾌락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에 붉른 랙이나 노란 심황이나 남색의 쪽이나 심홍색의 꼭두서니가 섞여 있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사로잡히고 감각적 쾌락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랜 암송한 만뜨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타오르는 불 위에 놓아서 물이 끓어 넘치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이끼와 수초로 덮여 있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히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과 후회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바람에 흔들리고 움직이고 소용돌이치고 물결치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히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과 후회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고 의심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흐리고 혼탁하고 진흙투성이고 어둠 속에 놓여 있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고 의심에 압도되어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그때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해지지 않나니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바라문이여,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감각적 쾌락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붉은 랙이나 노란 심황이나 남색의 쪽이나 심홍색의 꼭두서니와 섞여 있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감각적 쾌락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성냄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이미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타오르는 불 위에 놓지 않아서 물이 끓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성냄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이끼와 수초로 덮여있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비춰보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과 후회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소용돌이치지 않고 물결치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들뜸과 후회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시 바라문이여,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의심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흐리지 않고 혼탁하지 않고 진흙투성이가 아니고 어둠 속에 놓여 있지 않으면 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의심에 압도되지도 않고서 머물고 또한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 때, 그때 그는 자기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남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둘 모두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그때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암송한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이런 원인과 이런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한 만트라들도 분명하지 않나니 하물며 암송하지 않은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라문이여, 그리고 이런 원인과 이런 조건 때문에 어떤 때에는 오래 암송하지 않은 만트라들도 분명해지나니 하물며 오래 암송한 것들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불가사의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법(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kāraṇapālīsuttaṃ (AN 5.194-까라나빨리 경)
194.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뾰족지붕 건물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까라나빨리 바라문이 릿차위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다. 까라나빨리 바라문은 멀리서 오고 있는 삥기야니 바라문을 보았다. 보고서 삥기야니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서는 까라나빨리 바라문(Karanapali brahmana)의 원래 이름은 빨라(Pala)였는데 왕가(王家)의 일을 시킨다고 해서 즉 감독하는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까라나빨리라고 불리었다고 설명하고 있다.(AA.iii.311-312)
*삥기야니 바라문(Pingiyani brahmana)는 본경과 다음 경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본경과 다음 경을 통해서 그의 탁월한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삥기야니 존자는 이른 아침에 어디에서 오는 길입니까?”

“존자여, 나는 사문 고따마를 친견하고 오는 길입니다.”

“삥기야니 존자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문 고따마는 지혜를 성취했습니까? 생각건대, 현명한 자입니까?”

“내가 누구이길래, 존자여, 그런 내가 사문 고따마의 지혜의 성취를 알겠습니까? 참으로 대등한 사람이어야 그가 사문 고따마의 지혜의 성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삥기야니 존자는 사문 고따마를 아주 높이 찬탄합니다.”

“내가 누구이길래, 존자여, 그런 내가 사문 고따마를 찬탄할 것입니까? 확실히 그분 사문 고따마는 신과 인간 가운데 으뜸이라고 거듭 찬탄됩니다.”

“무슨 이유를 보기에 삥기야니 존자는 사문 고따마에게 이런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존자여, 으뜸의 맛을 즐긴 사람은 다른 저열한 맛들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존자여, 경(經)이든, 응송(應頌)이든, 수기[授記]이든, 미증유법(未曾有法)이든 그분 고따마 존자의 법을 들을 때마다 다른 평범한 사문∙바라문들의 교설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존자여, 배고품과 지친 사람이 꿀 덩어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는 맛볼 때마다 순수하게 달콤한 맛을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존자여, 경이든, 응송이든, 수기이든, 미증유법이든 그분 고따마 존자의 법을 들을 때마다 즐거움을 얻고 마음의 만족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존자여, 어떤 사람이 노란 전단향이든 붉은 전단향이든 전단향 나무 조각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아랫부분이든 중간부분이든 윗부분이든 냄새를 맡을 때마다 순수하게 향기로운 냄새를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존자여, 경이든, 응송이든, 수기이든, 미증유법이든 그분 고따마 존자의 법을 들을 때마다 환희와 만족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존자여, 어떤 사람이 고통스럽고 큰 병을 앓는 환자입니다. 그를 위해 유능한 의사가 원인과 함께 병을 치료할 것입니다. 이처럼, 존자여, 경이든, 응송이든, 수기이든, 미증유법이든 그분 고따마 존자의 법을 들을 때마다 슬픔∙비탄∙고통·번민이 줄어듭니다.

 

예를 들면, 존자여, 맑고 쾌적하고 투명하고 시원한 물이 담긴, 아름다운 둑으로 둘러싸인 매혹적인 호수가 있습니다. 열기에 압도되고 열기에 고통받아 지쳐있고 두렵고 목마른 사람이 올 것입니다. 그가 그 호수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시고 나면 모든 걱정과 피곤함과 열기가 진정될 것입니다. 이처럼, 존자여, 경이든, 응송이든, 수기이든, 미증유법이든, 그분 고따마 존자의 법을 들을 때마다 모든 걱정과 피곤함과 더위가 진정됩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까라나빨리 바라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 옷을 입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세존에게 인사한 뒤에 감흥을 세 번 읊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절합니다(귀의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절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절합니다."라고.


경이롭습니다, 삥기야니 존자여. 불가사의합니다, 삥기야니 존자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듯,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삥기야니 존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삥기야니 존자여,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법(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합니다.

삥기야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아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합니다.”

 

piṅgiyānīsuttaṃ (AN 5.195-삥기야니 경)
195.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뾰족지불 건물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오백 명의 릿차위들이 세존을 방문했다. 어떤 사람은 파랬는데,  피부색이 파랗고 파란 옷을 입었고 파란 장식품으로 치장했다. 어떤 사람은 노랬는데, 피부색이 노랗고 노란 옷을 입었고 노란 장식품으로 치장했다. 어떤 사람은 붉었는데, 피부색이 붉고 붉은 옷을 입고 붉은 장식품으로 치장했다. 어떤 사람은 하얗는데, 피부색이 하얗고 하얀 옷을 입었고 하얀 장식품으로 치장했다. 그러나 참으로 세존께서는 용모와 명성에서 그들을 능가하셨다.

 

그때 삥기야니 바라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그것을 말해 보시오, 삥기야니여.”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자 삥기야니 바라문은 세존의 면전에서 적절한 게송으로 찬탄했다.


“마치 향기로운 꼬까나다 연꽃(붉은 연꽃)이  

향기를 품고 만개하듯이  

허공에서 빛나는 태양처럼  

빛나는 부처님(눈부시게 빛나는 분)을 보라.”

 

그러자 그 릿차위들은 오백의 윗옷으로 삥기야니 바라문을 감쌌다. 그리고 삥기야니 바라문은 그 오백의 윗옷으로 세존을 감쌌다.

 

그때 세존께서는 릿차위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릿차위들이여, 세상에서 다섯 가지 보배의 출현은 얻기 어렵습니다. 어떤 다섯 가지입니까?
세상에서 여래∙아라한∙정등각의 출현은 얻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여래가 선언한 법
과 율을 가르치는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을 배워 아는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을 배워 알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닦는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무상(無常)-무아(無我)-연기(緣起)]을 알고, 만들어진 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릿차위들이여, 세상에서 이런 다섯 가지 보배는 얻기 어렵습니다.”

 

mahāsupinasuttaṃ (AN 5.196-큰 꿈 경)
196.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은 다섯 가지 큰 꿈을 꾸었다. 어떤 다섯 가지인가?

 

*대인이 꾸고 또 큰 뜻의 징후이기 때문에 '큰 꿈들(maha-supina)'이라 한다. 꿈을 꾸는 것은 네 가지 이유로 인해 꾼다. 사대(四大)의 부조화 때문에, 전에 경험했기 때문에, 신이 [여러 대상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징후로서 꾼다. ... 그러나 본경에서 설하는 이 다섯 가지 꿈은 범부는 꿀 수 없고, 대왕, 전륜성왕, 상수제자, 벽지불, 정등각도 꿀 수 없다. 오직 일체지를 가진 보살 한 분만이 꿀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보살은 왜 꿈을 꾸었는가? '내일 부처가 될 것이다'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AA.iii.316)
즉 정등각(붓다)도 이런 꿈은 꾸지 않고 오직 보살만이 깨달음을 실현하기 바로 전날에 이러한 다섯 가지 큰 꿈을 꾼다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이 큰 대지는 큰 침상이었고, 산의 왕 히말라야는 베게였고, 왼손은 서쪽 바다에 닿았고, 오른 손은 동쪽 바다에 닿았으며 , 두 다리는 남쪽 바다에 닿았다.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이런 첫 번째 큰 꿈을 꾸었다.

 

다시,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띠리야라는 풀이 배꼽에서 자라서 구름에 닿은 뒤에 멈추었다.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이런 두 번째 큰 꿈을 꾸었다.

 

다시,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검을 머리의 흰 벌레들이 두 발로부터 올라와서 양 무릎을 덮었다.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이런 세 번째 큰 꿈을 꾸었다.

 

다시,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다른 색깔의 새 네 마리가 네 방향으로부터 온 뒤에 모두 흰색이 되었다.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이런 네 번째 큰 꿈을 꾸었다.

 

다시,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은 똥으로 된 큰 산 위에서 똥에 의해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경행을 하였다.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이런 다섯 번째 큰 꿈을 꾸었다.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이 큰 대지는 큰 침상이었고, 산의 왕 히말라야는 베개였고, 왼손은 서쪽 바다에 닿았고, 오른 손은 동쪽 바다에 닿았고, 두 다리는 남쪽 바다에 닿았는데,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 그런 바른 깨달음을 위하여 이런 첫 번째 꿈을 꾸었다.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띠리야라는 풀이 배꼽에서 자라나서 구름에 닿은 뒤에 멈추었는데,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여덟 가지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八支聖道=팔정도]를 깨달은 뒤에 신과 인간들에게 잘 선언하였다. 그런 바른 깨달음을 위하여 이런 두 번째 꿈을 꾸었다.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검은 머리의 흰 벌레들이 두 발로부터 올라와서 양 무릎을 덮었는데, 비구들이여, 많은 흰 옷을 입은 많은 재가자들이 살아있는 내내 여래에게 귀의하였다. 그런 바른 깨달음을 위하여 이런 세 번째 꿈을 꾸었다.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다른 색깔의 새 네 마리가 네 방향으로부터 온 뒤에 모두 흰 색이 되었는데, 비구들이여, 끄샤뜨리야와 바라문과 와이샤와 수드라의 이런 네 계급의 사람들이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에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뒤 위없는 해탈을 실현하였다. 그런 바른 깨달음을 위하여 이런 네 번째 꿈을 꾸었다.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이 똥으로 된 큰 산 위에서 똥에 의해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경행을 하였는데, 비구들이여,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은 여래는 그것을 욕심내지 않고 묶이지 않고 홀리지 않고 위험을 보는 자 벗어남의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용한다. 그런 바른 깨달음을 위하여 이런 다섯 번째 꿈을 꾸었다.


비구들이여,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던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이런 다섯 가지 큰 꿈을 꾸었다.”

 

vassa-sutta (AN 5.197-비 경)
197.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비를 내리게 하는 매개체가 있다. 점성가들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점성가들의 눈도 [이것을 알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무엇이 다섯인가?


비구들이여, 허공 위에 불의 요소[火界, 火大]가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먹구름이 생겨 떠다니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비를 내리게 하는 원인이니 점성가들도 알지 못하고 점성가들의 눈도 [이것을 알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다시 비구들이여, 허공 위에 바람의 요소[風界, 風大]가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먹구름이 생겨 떠다니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두 번째 비를 내리는 원인이니 점성가들도 알지 못하고 점성가들의 눈도 [이것을 알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다시 비구들이여, 아수라의 왕 라후가 손으로 물을 모아서 큰 바다로 내던진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번째 비를 내리게 하는 원인이니 점성가들도 알지 못하고 점성가들의 눈도 [이것을 알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름의 신들이 취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번째 비를 내리게 하는 원인이니 점성가들도 이것을 알지 못하고 점성가들의 눈도 [이것을 알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다시 비구들이여, 인간들이 정의롭지 못하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다섯 번째 비를 내리게 하는 원인이니 점성가들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점성가들의 눈도 [이것을 알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vācāsuttam (AN 5.198-말(語) 경)

198.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춘 말은 좋은 말이어서 잘못 말한 것이 아니고 비난받을 일이 없고 현자들에 비난받지 않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바른 시기에 하는 말, 진실한 말, 온화한 말, 이익을 주는 말, 자애로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춘 말은 좋은 말이어서 잘못 말한 것이 아니고 비난받을 일이 없고 지자들에게 비난받지 않는다.”

 

kulasuttam (AN5.199-가문 경) 
199.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비구들이 어떤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섯 가지 경우로 많은 공덕을 쌓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비구들이 어떤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마음이 맑아진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천상으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올바른 길을 실천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비구들이 어떤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반기고 경의를 표하고 자리를 권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높은 가정에 태어남으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바른 길을 실천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비구들이 어떤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인색함의 때를 씻어버린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영향력을 가지도록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바른 길을 실천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비구들이 어떤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능력과 힘이 되는 대로 나누어 가진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재물을 가지도록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바른 길을 실천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비구들이 어떤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질문을 하고 답을 하고 법을 듣는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지혜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바른 길을 실천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비구들이 어떤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다섯 가지 경우로 공덕을 쌓는다.”

 

nissāraṇīyasuttaṃ (AN 5.200-벗어남 경)
200.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벗어남의 요소가 있다. 어떤 다섯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감각적 쾌락들에(쾌락들의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감각적 쾌락들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감각적 쾌락들에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출리(出離)에 마음을 기울일 때 그의 마음은 출리에 대해 다가가고(들어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마음은 잘 행해졌고 잘 닦아졌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감각적 쾌락들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감각적 쾌락들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남이라고 선언되었다.

 

*'감각적 쾌락들에 마음을 기울인다(kamam manasikaroto)'는 것은 부정함을 [대상으로 한] 선(禪)으로부터 출정한 뒤 마치 [부정상(不淨想)이라는] 약(gada)을 가지고 [감각적 쾌락이라는] 독(visa)을 검증하는 것처럼 검증을 하기 위해서 감각적 쾌락을 향하여 마음을 적용시킨다는 뜻이다.(AA.iii.321)
*'해탈하지 않는다'의 원어는 na vimuuccati 이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nadhimiccati(확신하지 않다)로 설명하고 있다.(AA.iii.321)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분노(악의)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분노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분노에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음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분노하지 않음에 대해 다가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마음은 잘 행해졌고 잘 닦아졌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분노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분노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분노의 벗어남이라고 선언되었다.

 

*이것은 자애를 통한 禪(선.metta-jhana)이 분노(vyapada)로부터 벗어남(nissarana)을 말한다.(AA.iii.322)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폭력(잔인함)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폭력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비폭력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비폭력에 대해 다가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마음은 잘 행해졌고 잘 닦아졌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폭력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폭력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폭력의 벗어남이라고 선언되었다.

 

*이것은 연민을 통한 선(karuna-jhana)이 폭력으로부터 벗어남을 말한다.(Ibid)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물질들(색.色)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물질들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물질 없음[무색.無色]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물질 없음에 대해 다가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마음은 잘 행해졌고 잘 닦아졌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물질들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물질들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물질들의 벗어남이라고 선언되었다.

 

*이것은 무색계의 선(arupajjhana)이 물질로부터 벗어남을 말한다.(Ibid)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有身, sakkāya, 五取蘊]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자기 존재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자기 존재 있음의 소멸에 마음을 기울일 때 마음은 자기 존재 있음의 소멸에 다가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마음은 잘 행해졌고 잘 닦아졌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자기 존재 있음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자기 존재 있음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기 존재 있음의 벗어남이라고 선언되었다.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에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은 순수한 상카라(行, 형성된 것)들을 파악한 뒤에 아라한과를 얻은 순수 위빳사나를 하는 자(sukkha-vipassaka)가 과의 증득으로부터 출정한 뒤에 검증을 하기 위해 [나 등으로] 집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를 향하여 마음을 적용시킨다는 뜻이다.(Ibid)
햔편 [불변하는]자기 존재가 있음은 오취온을 뜻한다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 

 

그에게 감각적 쾌락의 소망도 잠재하지 않고, 분노의 소망도 잠재하지 않고, 폭력의 소망도 잠재하지 않고, 물질들의 소망도 잠재하지 않고, [불변하는] 자기 존재 있음의 소망도 잠재하지 않는다. 그는 감각적 쾌락의 소망을 위한 잠재성향들도 없고, 분노의 소망을 위한 잠재성향들도 없고, 폭력의 소망을 위한 잠재성향들도 없고, 물질들의 소망을 위한 잠재성향들도 없고, 자기 존재 있음의 소망을 위한 잠재성향들도 없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잠재성향이 없고, 갈애를 잘랐고, 족쇄를 풀었고, 자만을 바르게 철저히 알아서 마침내 괴로움을 끝냈다.’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벗어남의 요소가 있다.”

 

 

제20장 바라문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