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담미까 품 Dhammika-vagga(AN 6.43-53)
nāgasuttaṃ (AN 6.43-코끼리 경)
43.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애 았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사왓티로 탁발을 하러 들어가셨다. 사왓티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오셔서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동쪽 숲의 녹자모 강당으로 가서 낮 시간을 머물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동쪽 숲(동원림,pubbarama)은 사왓티의 동쪽 성문 밖에 있는 숲이다.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무시면서 낮 동안에는 이 동쪽 숲에서 지내셨다고 한다.(DhpA.i.413;MA.i.369) 이곳에 위사카(Visakha)가 세존과 승가를 위해서 녹자모 강당(미가라마따,Migaramatu-pasada)를 지었다.
*녹자모 강당은 미가라마따(녹자모,鹿子母)라고 불렸던 위사카가 동쪽 숲을 막대한 돈으로 구입하고 지은 2층으로 된 건물이었다. 각층에는 각각 500개씩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세존께서 후반부 20여 년을 사왓티에서 머무실 때 이곳과 아나타삔디카 승원을 번갈아 가면서 머무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많은 경들이 이곳에서 설해진 것으로 나타난다.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동쪽 숲의 녹자모 강당으로 가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셔서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동 꼿타까로 목욕을 가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와 더불어 동 꼿타까로 목욕을 가셨다. 동 꼿타까에서 목욕하고 나오셔서는 가사 하나만을 입고 몸을 말리고 계셨다.
그때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코끼리인 세따가 여러 가지 북과 악기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동쪽 꼿타까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들이여, 오, 참으로 왕의 코끼리는 잘 생겼습니다. 오, 참으로 왕의 코끼리는 멋있습니다. 오, 참으로 왕의 코끼리는 우아합니다. 오, 참으로 왕의 코끼리는 훌륭한 몸을 가졌습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우다이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오직 코끼리가 크고 우람하고 훌륭한 몸을 가졌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존자들이여, 오, 참으로 이런 영웅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입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라도 크고 우람하고 훌륭한 몸을 가졌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오, 참으로 이런 영웅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입니다.’라고 말합니까?”
“우다이여, 사람들은 크고 우람하고 훌륭한 몸을 가진 코끼리를 보고도 ‘오, 참으로 이런 영웅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입니다.’라고 말하고, 사람들은 크고 우람하고 훌륭한 몸을 가진 말을 ··· 크고 우람하고 훌륭한 몸을 가진 소를 ··· 크고 우람하고 훌륭한 몸을 가진 뱀을 ··· 크고 우람하고 훌륭한 몸을 가진 나무를 ··· 크고 우람하고 훌륭한 몸을 가진 사람을 보고도 ‘오, 참으로 이런 영웅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다이여, 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이 사는 인간의 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삿되고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은 자를 나는 영웅이라 부른다.”
*'영웅'으로 옮긴 원어는 naga이다. naga 라는 단어는 단지 코끼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龍)도 naga 라고 불리고 영웅이나 위대한 사람도 naga 라고 불린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참으로 이렇게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다이여, 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이 사는 인간의 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삿되고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은 자를 나는 영웅이라 부른다.’라고.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잘 말씀하신 이것을 듣고 이런 게송으로 기뻐합니다.”
“인간으로서 깨달은 분, 자신을 길들이고, 삼매를 닦는
범천의 길을 걷는, 마음의 평화로움에서 기뻐하는
모든 법들의 저쪽에 이르신 분, 사람들이 그분을 존경하고 신들도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아라한이시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모든 족쇄를 끊었고 오염원의 숲으로부터 열반으로 오셨으며
암석에서 정련된 황금처럼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남을 기뻐하고
히말라야가 다른 산들을 능가하듯이
저는 이제 영웅을 묘사할 것입니다.
그는 나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온화함과 해코지 않음이 영웅의 두 앞발이고
금욕과 청정범행은 영웅의 두 뒷발이며
큰 영웅은 믿음의 코를 가졌고
평정의 흰 상아를 가졌고
목은 마음 챙김, 머리는 지혜, 코 끝은 법을 사유함
배는 법에 대한 열정, 꼬리는 홀로 머묾입니다.
그는 선정을 닦고 위안을 기뻐하고
안으로 삼매에 잘 들어있습니다.
걸을 때에도 삼매에 들어있고
서 있을 때에도 삼매에 들어있으며
누울 때에도 삼매에 들어있고
앉아있을 때에도 삼매에 들어있습니다.
그는 모든 곳에서 단속합니다.
이것이 영웅이 갖춘 것입니다.
비난받을 일이 없이 먹으며 비난받으며 먹지 않습니다.
먹을 것과 덮을 것을 얻지만 축적하는 것을 피합니다.
미세하든 거칠든 모든 족쇄와 속박을 잘라버리고
어디를 가든 바라는 것 없이 갑니다.
백련이 물에서 생겨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에 젖지 않고
달콤하고 매력적인 향내를 가지듯이
그와 같이 세존께서도 세상에 잘 태어나셨지만
세상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고 세상의 물에 젖지 않는 홍련과 같습니다.
큰 불이 타오르더라도 땔감이 없으면 꺼지듯이
형성된 것들이 고요해지면 적멸이라고 말해집니다.
뜻을 잘 드러내는 이러한 비유를 현자가 설하였으니
영웅이 설한 영웅을 큰 영웅들은 알 것입니다.
탐욕을 여의고 성냄을 여의고
어리석음을 여의고 번뇌가 다한
영웅은 몸을 버리신 뒤 번뇌 없이
반열반에 드실 것입니다.
migasālāsuttaṃ (AN 6.44-미가살라 경)
44.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오전에 옷 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미가살라 청신녀의 집으로 갔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미가살라 청신녀가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가서 아난다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미가살라 청신녀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 존자시여, 범행을 닦은 자와 범행을 닦지 않은 자, 둘 모두 다음 생에 같은 곳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아난다 존자시여, 저의 아버지 뿌라나는 성행위의 저속함을 여의고 홀로 범행을 닦으면서 사셨습니다. 그가 임종하자 세존께서는 일래자가 되어서 도솔천의 몸을 받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저의 아버지의 형제인 이시닷따는 범행을 닦지 않고 재가의 삶에 만족하여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그가 임종하자 세존께서는 그도 일래자가 되어서 도솔천의 몸을 받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여, 범행을 닦은 자와 범행을 닦지 않은 자 둘 모두 다음 생에 같은 곳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세존께서 설하신 이 법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누이여,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맛지마 니까야] 법탑 경(M89)에 의하면 뿌라나(Purana)와 그의 형제인 이시닷따(Isidatta)는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의 시종이었고, 왕은 세존께 그들의 세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AA.iii.374)
아난다 존자는 미가살라 청신녀의 집에서 탁발음식을 받아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는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미가살라 청신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미가살라 청신녀가 제게 다가와서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습니다. 한 곁에 앉아서 미가살라 청신녀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범행을 닦은 자와 범행을 닦지 않은 자, 둘 모두 다음 생에 같은 곳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아난다 존자시여, 저의 아버지 뿌라나는 성행위의 저속함을 여의고 홀로 범행을 닦으면서 사셨습니다. 그가 임종하자 세존께서는 일래자가 되어서 도솔천의 몸을 받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저의 아버지의 형제인 이시닷따는 범행을 닦지 않고 재가의 삶에 만족하여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그가 임종하자 세존께서는 그도 일래자가 되어서 도솔천의 몸을 받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여, 범행을 닦은 자와 범행을 닦지 않은 자 둘 모두 다음 생에 같은 곳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세존께서 설하신 이 법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미가살라 청신녀에게 ‘누이여,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난다여,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고, 여자의 몸을 가져 여자의 인식을 가진 미가살라 청신녀가 누구인가(청신녀가 뭐길래)? 그녀가 어떻게 남자의 기능에 속한 지혜를 안단 말인가?(다른 사람들의 갈 곳에 대한 앎을 가졌겠는가?) 아난다여, 세상에는 여섯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친절하며 행복하게 산다. 동료수행자들도 그와 함께 사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지 않고, 많이 배우지도 않고, 견해로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도]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퇴보로 향하게 되고 특별함으로(성취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퇴보하는 자이지 특별함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일시적 해탈(samayika vimutti)도 얻지 못한다.'라는 것은 자주자주 법을 들음으로써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환희와 희열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Ibid)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친절하며 행복하게 산다. 동료수행자들도 그와 함께 사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로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도] 철저하게 알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특별함으로 향하게 되고 퇴보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특별함으로 갈 뿐 퇴보로 가는 자가 아니다.
거기서, 아난다여, 사람을 평가하는 자들이 말한다. ‘이 사람도 이러한 법들을 가졌고 저 사람도 이러한 법들을 가졌다. 그런데 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저열하고 한 사람은 수승하단 말인가?’라고. 이런 말은 그들에게 오랜 세월 손해가 되고 괴로움으로 이끈다.
아난다여, '여기 어떤 사람은 친절하며 행복하게 산다. 동료수행자들도 그와 함께 사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로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도] 철저하게 알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특별함으로 향하게 되고 퇴보로 향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아난다여, 이 사람은 앞의 사람보다 더 뛰어나고 더 수승하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뒤의 사람은 법의 흐름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 둘의 차이를 여래 말고는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사람들에 대해 평가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아야 한다. 참으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는 자는 파멸한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탐욕도 일으킨다. 그리고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지 않고, 많이 배우지도 않고, 견해로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도]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퇴보로 향하게 되고 특별함으로(성취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퇴보하는 자이지 특별함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탐욕도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로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도] 철저하게 알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특별함으로 향하게 되고 퇴보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특별함으로 갈 뿐 퇴보로 가는 자가 아니다.
거기서, 아난다여, 사람을 평가하는 자들이 말한다. ···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을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말의 의도적 행위들도 일어난다. 그리고 그는 [들어야 법도] 듣지 않고, 많이 배우지도 않고, 견해로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도]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퇴보로 향하게 되고 특별함으로(성취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퇴보하는 자이지 특별함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말의 의도적 행위들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로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도] 철저하게 알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특별함으로 향하게 되고 퇴보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특별함으로 갈 뿐 퇴보로 가는 자가 아니다.
거기서, 아난다여, 사람을 평가하는 자들이 말한다. ‘이 사람도 이러한 법들을 가졌고 저 사람도 이러한 법들을 가졌다. 그런데 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저열하고 한 사람은 수승하단 말인가?’라고. 이런 말은 그들에게 오랜 세월 손해가 되고 괴로움으로 이끈다.
아난다여, '여기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말의 의도적 행위들도 일어난다.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로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도] 철저하게 알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특별함으로 향하게 되고 퇴보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특별함으로 갈 뿐 퇴보로 가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아난다여, 이 사람은 앞의 사람보다 더 뛰어나고 더 수승하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뒤의 사람은 법의 흐름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 둘의 차이를 여래 말고는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사람들에 대해 평가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아야 한다. 참으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는 자는 파멸한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고, 여자의 몸을 가져 여자의 인식을 가진 미가살라 청신녀가 누구인가(청신녀가 뭐길래)? 그녀가 어떻게 남자의 기능에 속한 지혜를 안단 말인가?(다른 사람들의 갈 곳에 대한 앎을 가졌겠는가?) 아난다여, 세상에는 이런 여섯 부류의 사람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뿌라나가 계를 갖춘 것처럼 이시닷따도 계를 갖추었다면, 여기서 뿌라나의 태어날 곳(行處)은 이시닷따가 아닌 다른 이의 태어날 곳과 같았을 것이다. 아난다여, 만약 이시닷따가 지혜를 갖춘 것처럼 뿌라나도 지혜를 갖추었다면, 여기서 이시닷따의 태어날 곳은 뿌라나가 아닌 다른 이의 태어날 곳과 같았을 것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이 두 사람은 각각 하나의 구성요소가 결핍되어 있었다."
*'하나의 구성요소가 결핍되어 있다(ekanga-hina)'는 것은 각자 하나의 덕(guna)의 구성요소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뿌라나는 계에 의해 특별했고 이시닷따는 지혜에 의해 특별했다. 뿌라나의 계는 이시닷따의 지혜와 같은 경지였고, 이시닷따의 지혜는 뿌라나의 계와 같은 경지였다.(AA.iii.376)
iṇasuttaṃ (AN 6.45-빚 경)
45.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가난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한 사람이 빚을 내면, 그것도 세상에서 감각적 캐락을 즐기는 자에게 괴로운 것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한 사람이 빚을 내면서 이자를 지불하기로 약속하면, 그것도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괴로운 것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한 사람이 이자를 약속했지만 제 시간에 이자를 지불하지 못하여 책망을 받으면, 그것도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괴로운 것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한 사람이 책망을 받더라도 지불하지 못하여 그를 성가시게 따라붙으면, 그것도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괴로운 것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한 사람이 자신을 성가시게 따라붙더라도 지불하지 못하여 포박을 당하면, 그것도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괴로운 것인가?”
“그렇습니다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가난한 것도 괴로운 것이고,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빚내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이자를 지불하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책망 받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성가시게 따라붙는 것도 괴로운 것이고,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에게 포박을 당하는 것도 괴로운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믿음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없고, 선한 법들에 대해서 부끄러운 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정진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지혜가 없는 사람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율에서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한 사람이라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한 사람은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믿음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뉘우칠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부끄러운줄 아는 힘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정진이 없고,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 지혜가 없기 때문에 몸으로 삿된 행위를 저지르고 말로 삿된 행위를 저지르고 마음으로 삿된 행위를 저지른다. 이것이 그가 빚을 내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이러한 몸으로 짓는 삿된 행위를 덮기 위해 삿된 바램을 가진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원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말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몸으로 애를 쓴다. 이것이 그가 이자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이러한 말로 짓는 삿된 행위를 덮기 위해 삿된 바램을 가진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원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말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말로써 애를 쓴다. 이것이 그가 이자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이러한 마음으로 짓는 삿된 행위를 덮기 위해 삿된 바램을 가진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원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말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이라고 마음으로 애를 쓴다. 이것이 그가 이자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그를 두고 계를 잘 지키는 동료 비구들이 ‘이 존자는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처신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책망을 받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그가 숲에 머물거나 나무 아래 머물거나 빈 집에 머물 때 뉘우침과 함께하는 삿되고 해로운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이 그를 성가시게 따라붙음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한 사람은 몸으로 삿된 행위를 저지르고 말로 삿된 행위를 저지르고 마음으로 삿된 행위를 저지른 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지옥의 속박에 묶이거나 축생계의 속박에 묶인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처럼 단단하고, 이처럼 혹독하고, 위없는 유가안온(열반)의 성취에 장애가 되는 다른 어떤 속박도, 비구들이여, 나는 보지 못한다.”
가난한 것과 빚을 갚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서 괴로움이라 불린다.
빚을 내어 사용하는 가난한 자는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는 성가시게 그를 따라붙고, 그는 묶인다.
감각적 쾌락을 얻고자 갈망하는 자에게 이렇게 묶이는 것은 참으로 괴로움이다.
그와 같이 성스러운 율에서 믿음이 없고
뉘우칠 줄 아는 힘이 없고 부끄러운줄 아는 힘이 없고
삿된 업을 결정짓는 자는 몸으로 삿된 행위를 하고 말로 삿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삿된 행위를 한 뒤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하고 바란다. 그는 몸과 말과 마음이 흔들리고
여기저기서 거듭하여 삿된 업을 증장시킨다.
삿된 업을 짓는 어리석은 그는 알면서 삿된 업을 짓는다.
빚을 내어 사용하는 가난한 자는 고통을 겪게 된다
마음속의 괴로움이 그를 성가시게 따라붙고
마을에서나 숲에서나 뉘우침이 생긴다.
삿된 행위를 짓는 어리석은 그는 알면서 삿된 업을 짓는다
그는 어떤 모태에 들거나 혹은 지옥에 묶인다.
이렇게 묶이는 것은 참으로 괴로움이다. 현자는 그것에서 벗어난다.
법답게 얻은 재물에 의한 보시는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재가에 사는 믿음 있는 자는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행복, 양면의 얻음이 있다.
이와 같이 재가자들의 보시는 공덕을 증장시킨다.
그와 같이 성스러운 율에서 믿음이 확립되고
뉘우칠줄 아는 힘이 있고 부끄러운줄 아는 힘이 있고 지혜가 있고
계로써 잘 단속하는 이러한 사람은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얻고 평정에 확고하여 성스러운 율에서 행복하게 사는 자라고 불린다.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다섯 가지 장애를 부수고
선정에 들어서 마음을 한곳에 모으게 되고 현명하고 마음 챙기는 자가 된다
이와 같이 모든 족쇄의 부서짐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안 뒤에
모든 곳에서 집착하지 않아 바르게 마음이 해탈한다.
이렇게 바르게 해탈한 자에게 만약 존재의 부서짐에 대해
'나에게 해탈은 부동이다.’라는 그런 앎이 있다면
그것은 구경의 앎이고, 위없는 행복이고, 이것이 슬픔 없고,
오염이 없고, 안온인 최상이 빚 없음이다.”
mahacundasuttam (AN 6.46-마하쭌다 경)
4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마하쭌다 존자는 쩨띠에서 사하자띠에 머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마하쭌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존자이시여" 라고. 마하쭌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마하쭌다 존자(ayasma Maha-Cunda)는 쭌다 존자로도 불리고 쭌다까(Cundaka) 존자로도 불리고, 쭌따 사미(Cunda Samanuddesa)로도 불린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의 동생이었으며 구족계를 받은 후에도 이 사미라는 호칭이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DA.iii.907) 한때 그는 세존의 시자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Thag A.ii.124;J.iv.95등)
사리뿟따 존자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 즉 쭌다(Cunda), 우빠세나(Upasena), 레와따(Revata)와 세 명의 여동생 즉 짤라(Cala), 우빠짤라(Upacala), 시수빠짤라(Sisupacala)가 있었는데 모두 출가하였다고 한다.(DhpA.ii.188)
*쩨띠(Ceti)는 세존 당시 인도중원의 16국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북인도의 분델칸드(Bundelkhand)지역이라고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은 삼매를 닦는 비구들을 비난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삼매를 닦는 이들이다. 우리는 삼매하는 이들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삼매하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삼매하고, 도대체 어떻게 삼매하는가?’라고.
이 경우에는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삼매를 닦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닦는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여기 삼매를 닦는 비구들은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을 비난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이들이다.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이들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경솔하고 거들먹거리고 우쭐대고 수다스럽고 산만하게 말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분명하게 알아차림[正知]이 없고 집중되지 못하며 마음이 산란하고 감각기능이 제어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은 무슨 법에 열중하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법에 열중하고, 도대체 어떻게 법에 열중하는가?’라고.
이 경우에는 삼매를 닦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닦는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여기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은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만 칭송하고 삼매를 닦는 비구들은 칭송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삼매를 닦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닦는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여기 삼매를 닦는 비구들은 삼매를 닦는 비구들만 칭송하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은 칭송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삼매를 닦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닦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도반들이여, 이렇게 닦고 익혀야 합니다.
‘법에 열중하는 우리는 삼매를 닦는 비구들을 칭송하리라.’라고.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고 익혀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도반들이여, 불사(不死)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 이러한 경이로운 사람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반들이여, 이렇게 닦고 익혀야 합니다.
‘삼매를 닦는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을 칭송하리라.’라고.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고 익혀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도반들이여, 심오한 뜻의 경지를 지혜로 통찰해서 보는 이러한 경이로운 사람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paṭhamasandiṭṭhikasuttaṃ (AN 6.47-스스로 보아 알 수 있음 경1)
47. 그 무렵 몰리야시와까 유행승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몰리야시와까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지혜 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주석서에 의하면 몰리야시와까 유행승(Moliyasivaka paribbajaka)의 원래 이름은 시와까였으며 머리에 상투(moli)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몰리야시와까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옷을 입는 유행승이었다고 한다.(SA.iii.81)
“그렇다면, 시와까여, 나는 여기서 그것을 되묻겠습니다. 그대에게 좋아 보이는대로 말하십시오. 시와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에게 안으로 탐욕이 있으면 ‘내게는 안으로 탐욕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그대에게 안으로 탐욕이 없으면 ‘내게는 안으로 탐욕이 없다.’라고 알아차립니까?”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시와까여, 그대가 안으로 탐욕이 있으면 ‘내게는 안으로 탐욕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안으로 탐욕이 없으면 ‘내게는 안으로 탐욕이 없다.’라고 알아차릴 때, 이렇게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지혜 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와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에게 안으로 성냄이 있으면 ··· 안으로 어리석음이 있으면 ··· 안으로 탐욕과 함께한 법들이 있으면 ··· 안으로 성냄과 함께한 법들이 있으면 ··· 안으로 어리석음과 함께한 법들이 있으면 ‘내게는 안으로 어리석음과 함께한 법들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그대에게 안으로 어리석음과 함께한 법들이 없으면 ‘내게는 어리석음과 함께한 법들이 없다.’라고 알아차립니까?”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시와까여, 그대가 안으로 어리석음과 함께한 법들이 있으면 ‘내게는 안으로 어리석음과 함께한 법들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안으로 어리석음과 함께한 법들이 없으면 ‘내게는 안으로 어리석음과 함께한 법들이 없다.’라고 알아차릴 때, 이렇게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지혜 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탐욕(lobha) 등의 셋은 세 가지 해로움의 뿌리를 보이신 것이고, 탐욕과 함께한 법(lobha-dhamma)등의 셋은 그것과 관련된 법을 뜻한다.(AA.iii.380)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 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dutiyasandiṭṭhikasuttaṃ (AN 6.48-스스로 보아 알수 있음 경2)
48. 그 무렵 어떤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몰리야시와까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지혜 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시와까여, 나는 여기서 그것을 되묻겠습니다. 그대에게 좋아 보이는대로 말하십시오. 시와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에게 안으로 탐욕이 있으면 ‘내게는 안으로 탐욕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그대에게 안으로 탐욕이 없으면 ‘내게는 안으로 탐욕이 없다.’라고 알아차립니까?”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시와까여, 그대가 안으로 탐욕(애욕)이 있으면 ‘내게는 안으로 탐욕이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안으로 탐욕이 없으면 ‘내게는 안으로 탐욕이 없다.’라고 알아차릴 때, 이렇게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지혜 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에게 안으로 성냄이 있으면 ··· 어리석음이 있으면 ··· 안으로 몸의 삿된 행위를 지녔으면 ··· 안으로 말의 삿된 행위를 지녔으면 ··· 안으로 마음의 삿된 행위를 지녔으면 ‘내게는 안으로 마음의 삿된 행위를 지녔다.’라고 알아차리고, 그대에게 안으로 마음의 삿된 행위를 지니지 않았으면 ‘내게는 안으로 마음의 삿된행위를 지니지 않았다.’라고 알아차립니까?”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이시여.”
“바라문이여, 그대가 안으로 마음의 삿된 행위를 지녔으면 ‘내게는 안으로 마음의 삿된 행위를 지녔다.’라고 알아차리고, 안으로 마음의 삿된 행위를 지니지 않았으면 ‘내게는 안으로 마음의 삿된 행위를 지니지 않았다.’라고 알아차릴 때, 그와 같이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지혜 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선서이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둣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 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khemasuttaṃ (AN 6.49-케마 경)
49.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케마 존자와 수마나 존자가 사왓티에서 어둠의 숲에 머물렀다. 케마 존자와 수마나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케마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내가 더 뛰어나다.’거나, ‘나와 동등하다.’거나, ‘내가 더 못하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렇게 케마 존자는 세존께 말씀드렸고 스승께서는 동의하셨다. 케마 존자는 ‘스승께서는 나의 말에 동의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수마나 존자는 케마 존자가 물러간 지 오래지 않아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내가 더 뛰어나다.’거나, ‘나와 동등하다.’거나, ‘내가 더 못하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렇게 수마나 존자는 세존게 말씀드렸고 스승께서는 동의하셨다. 수마나 존자는 ‘스승께서는 나의 말에 동의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세존께서는 케마 존자와 수마나 존자가 물러간 지 오래지 않아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비구들이여,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이와 같이 궁극의 지혜를 설명한다. 의미는 분명하게 말하지만 자기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금은 웃으면서 궁극의 지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나중에 곤경에 처하게 된다."
더 뛰어나지도 않고, 더 열등하지도 않고, 동등함을 가까이 하지도 않는다(드러내지도 않는다).
태어남은 다했고 족쇄에서 풀려 난 사람은 삶을 완성하는 범행을 실천한다.
indriyasaṃvarasuttaṃ (AN 6.50-근[根]의 단속 경)
50. “비구들이여,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못할 때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못하는 자에게 계행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계행이 없을 때 계행을 파한 자에게 바른 삼매는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바른 삼매가 없을 때 바른 삼매가 없는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여실지견.如實知見)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있는 그대로 봄이 없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이 없는 자에게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이 없을 때 염오(싫어하여 떠남)와 탐욕의 사라짐이 없는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가지와 잎이 없는 나무가 있다. 그 나무의 새싹도 자라나지 못하고 껍질이 완전하지 못하고 연한 목재가 완전하지 못하고 심재가 완전하지 못한 것과 같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감각기능의 단속이 없을 때 감각기능의 단속을 하지 못한 자에게 계행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바른 삼매가 없을 때 바른 삼매가 없는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있는 그대로 봄이 없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이 없는 자에게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은 상실해버린다.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이 없을 때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이 없는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비구들이여, 감각기능을 단속할 때 감각기능을 단속하는 자에게 계행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계행이 있을 때 계행을 갖춘 자에게 바른 삼매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바른 삼매가 있을 때 바른 삼매를 갖춘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있는 그대로 봄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을 갖춘 자에게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이 생길 때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을 갖춘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가지와 잎이 있는 나무가 있다. 그 나무의 새싹도 자라나고 껍질이 완전하고 연한 목재가 완전하고 심재가 완전한 것과 같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감각기능을 단속할 때 감각기능을 단속하는 자에게 계행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바른 삼매가 있을 때 바른 삼매를 갖춘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있는 그댈 봄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을 갖춘 자에게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이 생길 때 염오와 탐욕의 사라짐을 갖춘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ānandasuttaṃ (AN 6.51-아난다 경)
51.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도반 사리뿟따여, 비구가 배우지 못한 법을 배우고, 배운 법을 잊어 버리지 않고(혼란스럽지 않고), 이전에 마음에 와 닿은 법들이 마음에 남아있고, 모르던 것을 알게됩니까?”
“도반 아난다여, 아난다 존자는 많이 배운 분입니다. 아난다 존자가 아는 것을 말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도반 사리뿟따여, 잘 마음에 새겨 들어십시오. 나는 이제 설명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 도반 사리뿟따여, 비구는 경(經),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問答)이라는 아홉 가지 법을 배웁니다. 그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남들을 위해 상세하게 법을 설하고,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남들을 위해 상세하게 법을 가르치고,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상세하게 암송하고,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마음으로 생각해 보고 지속적으로 고찰해 보고 마음으로 숙고해 봅니다. 그는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을 지니고, 법(경장)에 숙달되고, 율[장]에 숙달되고, 논모(論母)에 숙달된 장로 비구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안거를 지냅니다. 적당한 때에 그들에게 가서 ‘존자들이시여,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의문을 말하고 질문을합니다. 그 장로 비구들은 그에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명확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의심되는 법에 대해서 의심을 없애줍니다. 이렇게, 도반 사리뿟따여, 비구가 배우지 못한 법을 배우고, 배운 법을 잊어 버리지 않고(혼란스럽지 않고), 이전에 마음에 와 닿은 법들이 마음에 남아있고, 모르던 것을 알게됩니다.”라고.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도반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반이여. 아난다 존자는 이것을 이렇게 잘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난다 존자가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을 갖추었다고 명심합니다. 참으로 아난다 존자는 경(經), 응송(應頌),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問答)이라는 아홉 가지 법을 배웁니다. 아난다 존자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남들을 위해 상세하게 법을 설하고, 아난다 존자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남들을 위해 상세하게 법을 가르치고, 아난다 존자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상세하게 암송하고, 아난다 존자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마음으로 생각해보고 지속적으로 고찰해보고 마음으로 숙고해 봅니다. 아난다 존자는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을 지니고, 법(경장)에 숙달되고, 율[장]에 숙달되고, 논모(論母)에 숙달된 장로 비구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안거를 지냅니다. 적당한 때에 그들에게 가서 ‘존자들이시여,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의문을 말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 장로 비구들은 그에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명확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의심되는 법에 대해서 의심을 없애줍니다.”
khattiyasuttam (AN 6.52-끄샤뜨리야 경)
52. 그 무렵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끄샤뜨리야들은 무엇에 목적을 두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에 확고하고,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귀결점으로 합니까?”
“바라문이여, 끄샤뜨리야들은 재물에 목적을 두고, 지혜를 추구하고, 힘에 확고하고, 땅을 집착하고, 지배를 귀결점으로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바라문들은 무엇에 목적을 두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에 확고하고,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귀결점으로 합니까?”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은 재물에 목적을 두고, 지혜를 추구하고, 만뜨라에 확고하고, 제사를 집착하고, 범천의 세계를 귀결점으로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장자들은 무엇에 목적을 두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에 확고하고,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귀결점으로 합니까?”
“바라문이여, 장자들은 재물에 목적을 두고, 지혜를 추구하고, 기술에 확고하고, 일을 집착하고, 일의 완수를 귀결점으로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여인들은 무엇에 목적을 두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에 확고하고,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귀결점으로 합니까?”
“바라문이여, 여인들은 남자에 목적을 두고, 장신구를 추구하고, 아들에 확고하고, 경쟁하는 여인이 없음을 집착하고, 지배를 귀결점으로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도둑들은 무엇에 목적을 두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에 확고하고,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귀결점으로 합니까?”
“바라문이여, 도둑들은 가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움켜쥠을 추구하고, 무기에 확고하고, 어둠을 집착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음을 귀결점으로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사문들은 무엇에 목적을 두고,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에 확고하고,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귀결점으로 합니까?”
“바라문이여, 사문들은 인욕과 온화함에 목적을 두고, 지혜를 추구하고, 계에 확고하고, 무소유를 집착하고, 열반을 귀결점으로 합니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께서는 끄샤뜨리야의 목적과, 추구와, 확고함과, 집착과, 귀결점을 아십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바라문의 목적과 추구와 확고함과 집착과 귀결점을 아십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장자의 목적과 추구와 확고함과 집착과 귀결점을 아십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인의 목적과 추구와 확고함과 집착과 귀결점을 아십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도둑의 목적과 추구와 확고함과 집착과 귀결점을 아십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사문의 목적과 추구와 확고함과 집착과 귀결점을 아십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 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appamādasuttam (AN 6.53-불방일 경)
53. 그 무렵 어떤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러한 하나의 법이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러한 하나의 법이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그 하나의 법입니까?”
“바라문이여, 방일하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입니다.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땅위에서 걸어 다니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포함됩니다.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으뜸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방일하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이니,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뾰족 지붕이 있는 집의 서까래들은 모두 꼭대기로 이르고 꼭대기로 향하고 꼭대기로 모입니다. 꼭대기가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방일하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이니,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갈대를 꺾는 사람이 갈대를 꺾어서 윗부분을 잡고 앞뒤로 흔들고 아래로 내려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방일하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이니,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망고가 주렁주렁 열린 것을 줄기째 자르면 그 줄기에 달려있는 모든 망고가 다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방일하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이니,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어떤 왕이든지 그들 모두는 전륜성왕에 복속됩니다. 전륜성왕이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방일하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이니,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어떤 종류의 별 빛이라 하더라도 그 모두는 달빛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달빛은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방일하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이니,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그 하나의 법이니, 그것을 닦고 많이 익히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잘 성취하여 머물 수 있습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 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dhammikasuttaṃ (AN 6.54-담미까 경)
54.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담미까 존자가 고향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고향에는 일곱 군데의 거주처가 있었다. 그런데 담미까 존자는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을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때리고) 말로써 화나게 했다. 그러자 담미까 존자가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은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는 텅 비어버렸다.
*담미까 존자(ayasma Dhammika)는 꼬살라의 바라문 출신이다. 그는 제따 숲을 승가에 기증하던 날에 청정한 믿음이 생겨서 출가하였다고 한다.(ThagA.ii.127)
그러자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으로 승가에 보시를 해왔다. 그런데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온 비구들이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가 텅 비어버렸다. 무슨 이유와 무슨 조건 때문에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온 비구들이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가 텅 비어버렸는가?’라고.
다시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담미까 존자가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을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다. 담미까 존자가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은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는 텅 비어버렸다. 그러니 우리가 담미까 존자를 떠나도록 해야겠다.'라고.
그래서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은 담미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담미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담미까 존자는 이 거주처로부터 떠나십시오. 존자는 여기서 머물고 싶은 만큼 오래 머무셨습니다.”라고.
그러자 담미까 존자는 그곳을 떠나서 고향에 있는 다른 거주처로 갔다. 그곳에서도 담미까 존자는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을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때리고) 말로써 화나게 했다. 그러자 담미까 존자가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은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는 텅 비어버렸다.
그러자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으로 승가에 보시를 해왔다. 그런데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온 비구들이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가 텅 비어버렸다. 무슨 이유와 무슨 조건 때문에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온 비구들이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가 텅 비어버렸는가?’라고.
다시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담미까 존자가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을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다. 담미까 존자가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은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는 텅 비어버렸다. 그러니 우리가 담미까 존자를 떠나도록 해야겠다.'라고.
그래서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은 담미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담미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담미까 존자는 이 거주처로부터 떠나십시오. 존자는 여기서 머물고 싶은 만큼 오래 머무셨습니다.”라고.
그러자 담미까 존자는 그곳을 떠나서 고향에 있는 또 다른 거주처로 갔다. 그곳에서도 담미까 존자는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을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때리고) 말로써 화나게 했다. 그러자 담미까 존자가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은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는 텅 비어버렸다.
‘우리는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으로 승가에 보시를 해왔다. 그런데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온 비구들이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가 텅 비어버렸다. 무슨 이유와 무슨 조건 때문에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온 비구들이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가 텅 비어버렸는가?’라고.
다시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담미까 존자가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을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다. 담미까 존자가 욕하고 비방하고 해코지하고 밀치고 말로써 화나게 한 거주처에 머물기 위해 찾아 온 비구들은 떠나고 아무도 머물지 않아 거주처는 텅 비어버렸다. 그러니 우리가 담미까 존자를 떠나도록 해야겠다.'라고.
그래서 고향에 사는 신도들은 담미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담미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담미까 존자는 이 거주처로부터(고향에 있는 일곱 군데 거추저) 떠나십시오."라고.
그러자 담미까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에 의해 일곱 군데의 고향 거주처 모두에서 쫓겨났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라고.
다시 담미까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세존께 가야겠다.’라고.
그래서 담미까 존자는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고향을 떠나서 라자가하에 있는 독수리봉 산으로 가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담미까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담미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세존이시여, 저는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에 의해 일곱 군데의 고향 거주처 모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만 하라, 담미까 바라문이여, 여기저기서 그들은 그대를 떠나도록 하였고 그대는 여기저기를 떠나서 이제 내 곁에까지 왔다.
*모든 경에서 세존께서는 출가 제자들을 호칭할 때는 예외없이 이름만 부르시거나 이름을 모르는 경우에는 그냥 '비구여'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여기서는 담미까를 부르실 때 '담미까 바라문이여'라고 재가자였을 때 그의 신분을 넣어서 부르고 계신다. 이러한 재가자를 호칭하는 방법이다. 아마 세존께서는 그를 꾸짖기 위해서 이런 호칭을 사용하신 듯 하다.
예전에, 담미까 바라문이여, 바다를 건너 무역하는 상인들이 육지를 찾는 새를 데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육지의 방향을 놓친 그들은 배에서 육지를 찾는 새를 날려 보냈다. 새는 동쪽 방향으로 갔다가 남쪽 방향으로 가고 서쪽 방향으로 가고 북쪽 방향으로 가고 위로도 가고 중간방위로도 간다. 만일 새가 모든 방향으로부터 육지를 발견하면 그 방향의 길잡이가 된다. 그러나 만약 새가 모든 방향으로부터 육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 배로 되돌아 온다. 이처럼, 담미까 바라문이여, 여기저기서 그들은 그대를 떠나도록 하였고 그대는 여기저기를 떠나서 이제 내곁에까지 왔다.
예전에, 담미까 바라문이여, 꼬라위야 왕에게 다섯 개의 큰 가지를 가졌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으며 아름다운 숩빠띳타라는 큰 니그로다 나무가 있었다. 담미까 바라문이여,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는 12요자나의 둘레였고 뿌리는 5요자나에 퍼져 있었다. 담미까 바라문이여,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는 큰 열매들이 열렸는데 마치 작은 물통만 했고, 열매들은 마치 깨끗하고 달콤한 벌꿀과도 같았다. 담미까 바라문이여, 큰 그로다 나무 숩빠띳타의 하나의 가지에 달린 열매들은 왕이 내전의 여인들과 함께 먹었고, 다른 하나의 가지에 달린 것은 군대가 먹었고, 다른 하나의 가지에 달린 것은 성읍과 수도의 백성들이 먹었고, 다른 하나의 가지에 달린 것은 사문∙바라문들이 먹었고, 다른 하나의 가지에 달린 것은 짐승과 새가 먹었다. 담미까 바라문이여, 누구도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의 열매들을 지키지 않았고, 그들은 서로간에 열매를 해치지 않았다.
그런데 담미까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의 열매를 원하는 만큼 먹은 뒤 가지를 꺾어버리고 떠났다. 그러자 담미까 바라문이여,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에 거주하는 신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경이롭구나. 참으로 놀랍구나. 저 악한 사람이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의 열매를 원하는 만큼 먹은 뒤 가지를 꺾어버리고 떠나디니,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는 이제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그래서, 담미까 바라문이여,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았다.
그러자 담미까 바라문이여, 꼬라위야 왕이 신들의 왕 삭까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담미까 바라문이여, 그때 신들의 왕 삭까는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를 내리게 하여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를 쓰러뜨리고 뿌리를 뽑아버리는 그러한 신통력을 나투었다. 그러자 숩빠띳타 니그로다 나무에 사는 신은 괴롭고 슬퍼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면서 한 곁에 서 있었다.
그때 담미까 바라문이여, 신들의 왕 삭까가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에 사는 신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에 사는 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이여, 그대는 왜 괴롭고 슬퍼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면서 한 곁에 서있는가?'
'존자시여, 강한 바람을 동반하 비가 내려서 제가 마무는 곳을 쓰러뜨리고 뿌리를 뽑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이여, 그런데 그대가 나무의 법에 확고한데도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려 그대가 머무는 곳(거주처)을 쓰러뜨리고 뿌리를 뽑아버렸는가?'
'존자시여, 어떻게 너무가 나무의 법에 확고하게 머뭅니까?'
'신이여, 여기 뿌리를 원하는 자들은 나무의 뿌리를 가져가고, 껍질을 원하는 자들은 껍질을 가져가고, 잎사귀를 원하는 자들은 잎사귀를 가져가고, 꽃을 원하는 자들은 꽃을 가져가고, 열매를 원하는 자들은 열매를 가져간다. 그러나 그 신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쾌해하지 않는다. 신이여, 이렇게 나무의 법에 확고하게 머문다.'
'존자시여, 제가 나무의 법에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려 제가 머무는 곳을 쓰러뜨리고 뿌리를 뽑아버렸습니다.'
'만약, 신이여, 그대가 머무는 곳이 예전처럼 된다면, 그대는 나무의 법에 확고하겠는가?'
'존자시여, 저는 나무의 법에 확고할 것입니다. 제가 머무는 곳이 예전처럼 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담미까 바라문이여, 신들의 왕 삭까는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를 내리게 하여 큰 니그로다 나무 숩빠띳타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신통을 나투었다. 이처럼 담미까 바라문이여, 사문의 법에 확고하였는데도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이 그대를 일곱 군데 거주처 모두에서 떠나도록 하였겠는가?”
“그런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사문의 법에 대해 확고합니까?”
“여기 담미까 바라문이여, 사문은 모욕을 당해도 모욕으로 되갚아서는 안되고, 화내는 자에게 화로써 되갚아서는 안되고, 싸움을 걸어와도 싸움으로 되갚아서는 안된다. 이렇게 담미까 바라문이여, 사문은 사문의 법에 확고하다.”
“세존이시여, 저는 사문의 법에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사는 재가자들이 저를 일곱 군데 거주처 모두에서 떠나도록 하였습니다.”
“예전에, 담미까 바라문이여, 교단의 창시자이고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수넷따라는 스승이 있었다. 그리고 담미까 바라문이여, 수넷따 스승에게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수넷따 스승은 제자들에게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는 법을 설하였다. 담미까 바라문이여, 수넷따 스승이 범천의 세상에 태어난 법을 설할 때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담미까 바라문이여, 수넷따 스승이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는 법을 설할 때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 세계에 태어났다.
예전에, 담미까 바라문이여, 교단의 창시자이고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무가빡카라는 스승이 있었다. ··· 아라네미라는 스승이 있었다. ··· 꿋달라까라는 스승이 있었다. ··· 힛티빨라라는 스승이 있었다. ··· 조띠빨라라는 스승이 있었다. 그리고 담미까 바라문이여, 조띠빨라 스승에게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조띠빨라 스승은 제자들에게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는 법을 설하였다. 담미까 바라문이여, 조띠빨라 스승이 범천의 세상에 태어난 법을 설할 때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담미까 바라문이여, 조띠빨라 스승이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는 법을 설할 때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 세계에 태어났다.
담미까 바라문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단의 창시자이고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났고, 수백 명의 제자들의 무리를 거느린 이러한 여섯 스승들에게 거친 말을 하고 비난하고 오염된 마음을 가진 자는 많은 악덕을 쌓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담미까 바라문이여, 교단의 창시자이고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났고, 수백 명의 제자들의 무리를 거느린 이러한 여섯 스승들에게 마음이 타락한 사람이 거친 말을 하고 비난하고 오염된 마음을 가진 자는 많은 악덕을 쌓을 것이다. 그런데 견해를 갖춘 한 사람에게 거친 말을 하고 비난하고 오염된 마음을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더 많은 악덕을 쌓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다른 외도들에게 거친 말을 하고 비난하고 오염된 마음을 갖는 것은 동료 수행자들에게 거친 말을 하고 비난하고 오염된 마음을 가져 자신의 공덕을 파버리는 것처럼 그만큼의 공덕을 파버린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담미까 바라문이여, 이렇게 닦아야 한다. '우리는 동료 수행자들에 대해 오염된 마음을 가진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담미까 바라문이여, 이렇게 닦아야 한다.”
'수넷따와 무가빡카와 아라네미 바라문이 있었고
스승인 꿋달라까와 제자인 핫티빨라가 있었다.
조띠빨라 고윈다는 일곱 왕의 궁중 제관이었고
이들 유명한 여섯 스승들은 과거에 비폭력을 실천했다.
그들은 세속의 비린내가 없었고 연민으로 해탈하였으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족쇄를 풀었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읜 뒤 범천의 세상에 태어났다.
그들에게 수백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도 세속의 비린내가 없었고 연민으로 해탈하였으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족쇄를 풀었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읜 뒤 범천의 세상에 태어났다.
탐욕에서 벗어나고 삼매에 든 그들 외도의 스승들에 대해
타락한 마음과 생각으로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많은 악덕을 쌓는다.
만약 세존의 제자인 견해를 갖춘 비구를
타락한 마음과 생각으로 비난하는 사람
이 사람은 그것보다 더 많은 악덕을 쌓는다.
잘못된 견해를 제거한 착한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
이런 사람은 성스러운 승가의 일곱 번째 사람이라 불린다.
*일곱 번째 인간 : ①아라한과-②아라한도-③불환과-④불환도-⑤일래과-⑥일래도-⑦예류과-⑧예류도 ㅡ 그러므로 견해를 갖춘 자는 예류과(豫流果)를 성취한 자 즉 예류자(預流者)인 것을 알 수 있다.
감각적 쾌락들에 대해 욕망을 모두 여의지 못했고 다섯 가지 기능들이 약한
그러나 믿음과 마음 챙김과 정진과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족한
그러한 비구를 공격하면 먼저 자신을 해치게 된다.
자신을 해치고 그 다음에 남을 해친다.
자신을 보호하는 사람에게 밖도 보호된다.
그래서 해침 당하지 않은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담미까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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