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여섯의 모음 - 6. 대 품(Mahā-vagga. AN6.55-64)

실론섬 2014. 8. 1. 20:55

제6장 대 품 Mahā-vagga(AN 6.55-64)

 

soṇasuttaṃ (AN 6.55-소나 경)

5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소나 존자는 라자가하에서 차가운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외딴 곳에서 홀로 머무는 소나 존자에게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세존의 제자들은 열심히 노력하면서 머문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나는 집착을 없애지 못했고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우리 집은 부유하다.
나는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지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가서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지어야겠다.’라고.

 

*차가운 숲(Sitava)은 본경에서 보듯이 라자가하 근처에 있는 숲이다. 이곳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처음으로 세존을 만났다고 한다.(Vin.ii.155f;ThagA.i.124)
그리고 본경의 소나 꼬리위사 존자도 세존으로부터 명상주제(kammatthana)를 받아서 차가운 숲의 이 공동묘지에서 정진을 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AA.i.236)

 

세존께서는 마음으로 소나 존자의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을 아시고 마치 힘 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처럼 재빠른 시간에 독수리봉 산을 떠나 차가운 숲에 있는 소나 존자의 앞에 나타났다. 새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고 소나 존자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소나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나여, 외딴 곳에서 홀로 머무는 그대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가? 
‘세존의 제자들은 열심히 노력하면서 머문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나는 집착을 없애지 못했고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집은 부유하다. 나는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지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가서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지어야겠다.’라고.”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전에 재가자였을 때 류트의 연주에 능숙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류트의 활줄이 지나치게 팽팽한데도 그 류트는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에 적합하게 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류트의 활줄이 지나치게 느슨한데도 그 류트는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에 적합하게 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그러나 그대의 류트의 활줄이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고 적당한 줄의 상태로 맞추어졌을 때 그 류트는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에 적합하게 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소나여, 지나친 노력은 들뜸으로 이끌고 느슨한 노력은 나태함(게으름)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소나여, 그대는 노력을 적절하게 유지해야 한다. 다섯 가지 근[五根]의 균등함을 철저히 알아야 하고 거기서 표상(相.nimitta)을 붙잡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소나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처럼 소나 존자를 이런 훈계로 가르친 뒤에 마치 힘 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처럼 재빠른 시간에 차가운 숲에서 사라져 독수리봉 산에 나타나셨다.

 

*'기능들의 균등함을 철저히 알아야 하고(꿰뚫어야 하고)'란 믿음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의 균등함에 확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믿음은 지혜와, 지혜는 믿음과, 정진은 삼매와, 삼매는 정진과 연결되는 것이 다섯 가지 그능의 균등함에 확고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이롭기 때문에 항상 강해야 한다. 연결 방법은 청정도론에 설명되어 있다.(AA.iii.390)
*'표상을 붙잡는다(취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 기능의 균등함이 있을 때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표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삼매의 표상, 위빳사나의 표상. 도의 표상, 과의 표상을 취한다는 말이다.(AA.iii.390-391)

 

소나 존자는 그 뒤에 노력을 적절하게 유지하였고 다섯 가지 근의 균등함을 철저히 알았으며 거기서 표상을 붙잡았다(취하였다). 은둔하여 홀로 머물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문 소나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을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그래서 소나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아라한을 성취한 소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세존께 찾아가야겠다. 가서 세존의 앞에서 구경의 지혜를 말씀드려야겠다.'라고.

소나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아서 소나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이고,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 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비구는 여섯 가지 경우에 대해 확신(분명함)이 있습니다. 출리에 대한 확신이 있고, 멀리 떠남(여읨)에 대한 확신이 있고, 성냄 없음에 대한 확신이 있고, 갈애의 소멸에 대한 확신이 있고, 집착의 소멸에 대한 확신이 있고, 어리석지 않음(혼란스럽지 않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존자는 오직 믿음에 의해 출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구나.’라고.

세존이시여, 그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존이시여,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이미 획득한 것에 더하기 위해서 해야 할 바를 자신에게서 찾아보지 못하는 비구는 탐욕이 소멸하였고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출리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성냄이 소멸하였고 성냄을 떠났기 때문에 출리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소멸하였고 어리석음을 떠났기 때문에 출리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존자는 얻음(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갈망하면서도 멀리 떠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구나.’라고. 
세존이시여, 그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존이시여,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이미 획득한 것에 더하기 위해서 해야 할 바를 자신에게서 찾아보지 못하는 비구는 탐욕이 소멸하였고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멀리 떠남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성냄이 소멸하였고 성냄을 떠났기 때문에 멀리 떠남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소멸하였고 어리석음을 떠났기 때문에 멀리 떠남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존자는 삿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계금취.戒禁取)을 가져 본질로부터 되돌아가면서도 성냄 없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구나.’라고.  

세존이시여, 그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존이시여,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 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이미 획득한 것에 더하기 위해서 해야 할 바를 자신에게서 찾아보지 못하는 비구는 탐욕이 소멸하였고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성냄 없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성냄이 소멸하였고 성냄을 떠났기 때문에 성냄 없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소멸하였고 어리석음을 떠났기 때문에 성냄 없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탐욕이 소멸하였고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갈애의 소멸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성냄이 소멸하였고 성냄을 떠났기 때문에 갈애의 소멸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소멸하였고 어리석음을 떠났기 때문에 갈애의 소멸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탐욕이 소멸하였고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집착의 소멸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성냄이 소멸하였고 성냄을 떠났기 때문에 집착의 소멸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소멸하였고 어리석음을 떠났기 때문에 집착의 소멸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탐욕이 소멸하였고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어리석지 않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성냄이 소멸하였고 성냄을 떠났기 때문에 어리석지 않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소멸하였고 어리석음을 떠났기 때문에 어리석지 않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바르게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에게 만약 눈으로 인식되는 강한 형상들이 눈의 영역에 들어온다 해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고, 또한, 사라짐을 따라가며 이어 봅니다. 만약 귀로 인식되는 강한 소리들이 ··· 코로 인식되는 강한 냄새들이 ··· 혀로 인식되는 강한 맛들이 ··· 몸으로 인식되는 강한 감촉들이 ··· 만약 마음으로 인식되는 강한 법(마음현상)들이 마음의 영역에 들어온다 해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고, 또한, 사라짐을 따라가며 이어 봅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틈이 없고 균열이 없고 한 덩어리로 된 바위산이 있습니다. 거기에 만약 동쪽에서 강한 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더라도 그 바위산을 흔들지 못하고, 진동시키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합니다. 거기에 만약 서쪽에서 ··· 거기에 만약 북쪽에서 ··· 남쪽에서 강한 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더라도 그 바위산을 흔들지 못하고, 진동시키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와 같이, 세존이시여, 바르게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에게 만약 눈으로 인식되는 강한 형상들이 눈의 영역에 들어온다 해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고, 또한, 사라짐을 따라가며 이어 봅니다. 만약 귀로 인식되는 강한 소리들이 ··· 코로 인식되는 강한 냄새들이 ··· 혀로 인식되는 강한 맛들이 ··· 몸으로 인식되는 강한 감촉들이 ··· 만약 마음으로 인식되는 강한 법(마음현상)들이 마음의 영역에 들어온다 해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고, 또한, 사라짐을 따라가며 이어 봅니다."

 

'출리에 대한 확신, 멀리 떠남에 대한 확신  
성냄 없음에 대한 확신, 집착의 소멸에 대한 확신
갈애의 소멸에 대한 확신, 어리석지 않음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는 
감각장소들의 일어남을 본 뒤에 마음은 바르게 해탈합니다.

이렇게 바르게 해탈하여 마음이 평화로운 비구는 
이미 행해진 것에 더 할 것이 없고, 해야 할 바가 없습니다.
한 덩어리로 된 바위산이 바람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 현상들은 
그것이 원하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간에 그러한 비구를 흔들지 못합니다.
안정되고 잘 해탈한 마음은 사라짐을 따라가며 이어 봅니다.'

 

phaggunasuttaṃ (AN 6.56-팍구나 경)

56. 그 무렵 팍구나 존자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팍구나 존자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연민하는 마음을 내시어 팍구나 존자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동의하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셔서 팍구나 존자에게 가셨다. 팍구나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팍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만 되었다, 팍구나여. 침상에서 일어나려 하지 말라. 여기 이미 마련된 자리가 있으니 나는 여기 앉을 것이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신 뒤 팍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팍구나여, 그대는 견딜만한가, 회복 될 것은가? 괴로운 느낌이 진정되고 더 심하지는 않은가?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고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견딜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진정되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힘센 사람이 예리한 칼로 머리를 쪼갤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저에게 거센 바람이 머리를 내리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견딜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진정되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힘센 사람이 튼튼한 가죽 끈으로 머리를 동여맬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저에게 머리에 심한 두통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견딜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진정되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능숙한 백정이나 백정의 조수가 날카로운 소 잡는 칼로 배를 도려낼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엄청난 바람이 제 배를 도려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견딜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진정되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힘센 두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양팔을 잡고 숯불구덩이 위에서 굽고 태울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저에게 몸에서엄청난 열이 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견딜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진정되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겠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중병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팍구나 존자에게 법을 설하시고 격려하시고 분발하게 하시고 기쁘게 하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셨다. 그리고 팍구나 존자는 세존께서 가신 뒤 오래지 않아 임종하였다. 그가 임종할 때 감각의 근들은 지극히 맑았다.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팍구나 존자가 세존께서 돌아가신 뒤 오래지 않아 임종하였습니다. 그가 임종할 때에 감각의 근들은 지극히 맑았습니다.”

“아난다여, 팍구나 비구의 감각의 근들이 왜 지극히 맑지 않았겠는가! 아난다여, 팍구나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법의 가르침을 들은 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아난다여, 바른 시간에 법을 듣고 바른 시간에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에는 여섯 가지 이익이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할 때 여래를 친견하게 된다. 여래는 그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낸다. 그는 그러한 법의 가르침을 듣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바른 시간에 법을 경청하는 첫 번째 이익이다.

 

아난다여,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할 때 여래를 친견하지 못하지만 여래의 제자를 친견하게 된다. 여래의 제자는 그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낸다. 그는 그러한 법의 가르침을 듣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바른 시간에 법을 경청하는 두 번째 이익이다.


아난다여,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는 임종할 때 여래를 친견하지 못하고 여래의 제자를 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사유하고 관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한다. 그가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사유하고 관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할 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바른 시간에 법을 경청하는 세 번째 이익이다.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는 마음이 해탈하였다. 그러나 재생의 근거를 파괴한 위없는 열반을 대상으로는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는 임종할 때 여래를 친견하게 된다. 여래는 그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낸다. 그는 그러한 법의 가르침을 듣고 재생의 근거를 파괴한 위없는 열반을 대상으로 마음이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바른 시간에 법을 경청하는 네 번째 이익이다.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는 마음이 해탈하였다. 그러나 재생의 근거를 파괴한 위없는 열반을 대상으로는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는 임종할 때 여래를 친견하지는 못하지만 여래의 제자를 친견하게 된다. 여래의 제자는 그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낸다. 그는 그러한 법의 가르침을 듣고 재생의 근거를 파괴한 위없는 열반을 대상으로 마음이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바른 시간에 법을 경청하는 다섯 번째 이익이다.

 

아난다여,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는 마음이 해탈하였다. 그러나 재생의 근거를 파괴한 위없는 열반을 대상으로는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는 임종할 때 여래도 친견하지 못하고 여래의 제자도 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사유하고 관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한다. 그가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사유하고 관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할 때 재생의 근거를 파괴한 위없는 열반을 대상으로 마음이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바른 시간에 법을 경청하는 여섯 번째 이익이다.


아난다여, 바른 시간에 법을 듣고 바른 시간에 의미를 자세히 살펴볼 때 이러한 여섯 가지 이익이 있다.”

chaḷabhijātisuttaṃ (AN 6.57-여섯 가지 태생 경)
57.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뿌라나 깟사빠는 여섯 부류의 태생을 천명하였습니다. 검은 태생을 천명하였고, 푸른 태생을 천명하였고, 붉은 태생을 천명하였고, 황색의 태생을 천명하였고, 하얀 태생을 천명하였고, 최상의 하얀 태생을 천명하였습니다(선언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거기서 뿌라나 깟사빠에 의해 천명된 검은 태생은 양을 도살하는 자들, 돼지를 도살하는 자들, 새를 잡는 자들, 사슴 사냥꾼들, 사냥꾼들, 어부들, 도둑들, 도둑을 죽이는 집행관들, 죄수들, 혹은 다른 잔인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입니다. 

 

세존이시여, 거기서 뿌라나 깟사빠에 의해 천명된 푸른 태생은 가시와 함께 머무는 비구들과 누구든지 업을 설하고 결실 있음을 설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입니다.  

 

*'가시와 함께 머무는 비구들(bhikkhu kantaka-vuttika)sasana)'이란 사문(samana)들을 말한다.(AA.ii.394)
그러나 복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비구들이란 불교 교단의 비구들이다. 그들은 욕망과 탐욕을 갖고 필수품을 수용한다고 뿌라나 깟사빠는 생각하기 때문에 네 가지 필수품에다가 가시를 넣어두고 수용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시와 함께 머무는 자라고 한다. ... 혹은 이런 이름을 가진 외도 출가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특별히 고행에 전념하기 때문에 마치 가시 위에서 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시와 함께 머무는 자'라고 한다. 이 두 번째 선택에 준해서 가시와 함께 머무는 자란 사문을 뜻한다고 주석서에서 설명했다.(AAT.iii.115)

 

세존이시여, 거기서 뿌라나 깟사빠에 의해 천명된 붉은 태생은 한 벌의 옷만을 입는 니간타들입니다.

 

세존이시여, 거기서 뿌라나 깟사빠에 의해 천명된 황색의 태생은 나체 수행자들의 제자인 흰옷을 입는 재가자들입니다.

 

*주석서와 복주석서에 의하면 외도 유행승들 가운데는 옷을 입는 유행승(channa-paribbajaka)과 옷을 입지 않는 유행승(nagga-paribbajaka)이 있었으며 이 가운데 옷을 입지 않는 유행승을 나체 수행자(acela)라 부른다.(DA.ii.349;DATi.472)

 

세존이시여, 거기서 뿌라나 깟사빠에 의해 천명된 하얀 태생은 아지와까들과 여자 아지와까들입니다.

 

세존이시여, 거기서 뿌라나 깟사빠에 의해 천명된 최상의 하얀 태생은 난다 왓차와 끼사 상낏짜와 막칼리 고살라입니다.

세존이시여, 뿌라나 깟사빠는 이러한 여섯 부류의 태생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난다여,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뿌라나 깟사빠가 천명한 이러한 여섯 부류의 태생에 동의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아난다여, 가난하고 무일푼이고 궁핍한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원하지도 않는데 그에게 고깃덩이를 잘라주면서 ‘여보게, 당신은 이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난다여, 그와 같이 뿌라나 깟사빠는 사문∙바라문들이 동의하지도 않은 여섯 부류의 태생을 천명하였다. 마치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능숙하지 못한 사람에 의한 천명처럼.

 

*'들판을 모르는 자(akhettannu)'란 태생의 들판을 모르는 자를 말한다.(Ibid)

 

아난다여, 나는 이제 여섯 부류의 태생을 천명한다. 듣고 잘 사고하라. 이제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를 받들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여섯 부류의 태생인가?
아난다여, 여기 검은 태생들과 같은 어떤 사람은 검은 법을 생겨나게 한다. 

아난다여, 여기 검은 태생들과 같은 어떤 사람은 흰 법을 생겨나게 한다. 

아난다여, 여기 검은 태생과 같은 어떤 사람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열반을 생겨나게 한다. 

아난다여, 여기 하얀 태생과 같은 어떤 사람은 검은 법을 생겨나게 한다. 

아난다여, 여기 하얀 태생과 같은 어떤 사람은 하얀 법을 생겨나게 한다. 

아난다여, 여기 하얀 태생과 같은 어떤 사람은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열반을 생겨나게 한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검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검은 법을 생겨나게 하는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낮은(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이다. 가난하고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고 생계가 힘든 불가촉천민, 죽세공, 사냥꾼, 마차 수리공, 청소부의 집안이다. 그곳에는 음식과 옷이 어렵게 얻어진다. 그리고 그는 용모가 추하고, 안색이 나쁘고, 키가 작고, 병약하고, 외눈이거나, 기형이거나, 절름발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과 마실 것과 의복과 탈 것과 화환과 향과 바르는 것과 침상과 거처와 등불을 충분하게 얻지 못한다. 그는 몸으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 말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한다. 그는 몸으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 말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한 것을 원인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이렇게, 아난다여, 검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검은 법을 생겨나게 한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검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하얀 법을 생겨나게 하는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낮은 집안에서 태어난 자이다. 가난하고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고 생계가 힘든 불가촉천민, 죽세공, 사냥꾼, 마차 수리공, 청소부의 집안이다. 그곳에는 음식과 옷이 어렵게 얻어진다. 그리고 그는 용모가 추하고, 안색이 나쁘고, 키가 작고, 병약하고, 외눈이거나, 기형이거나, 절름발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과 마실 것과 의복과 탈 것과 화환과 향과 바르는 것과 침상과 거처와 등불을 충분하게 얻지 못한다. 그는 몸으로 선한 행위를 하고, 말로 선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한다. 그는 몸으로 선한 행위를 하고, 말로 선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한 것을 원인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에 나아가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 이렇게, 아난다여, 검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하얀 법을 생겨나게 한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검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열반을 생겨나게 하는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낮은 집안에서 태어난 자이다. 가난하고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고 생계가 힘든 불가촉천민, 죽세공, 사냥꾼, 마차 수리공, 청소부의 집안이다. 그곳에는 음식과 옷이 어렵게 얻어진다. 그리고 그는 용모가 추하고, 안색이 나쁘고, 키가 작고, 병약하고, 외눈이거나, 기형이거나, 절름발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과 마실 것과 의복과 탈 것과 화환과 향과 바르는 것과 침상과 거처와 등불을 충분하게 얻지 못한다. 그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지혜를 무력화시키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에 마음을 확고하게 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들을 있는 그대로 닦아서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열반을 생겨나게 한다. 이렇게, 아난다여, 검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열반을 생겨나게 한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하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검은 법을 생겨나게 하는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높은 집안에 태어난 자이다. 부유하고 많은 재물과 많은 재산과 많은 금은과 많은 재화와 수입과 많은 가산과 곡식을 가진 부유한 끄샤뜨리야 가문이나 부유한 바라문 가문이나 부유한 장자의 집안이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사랑스럽고 뛰어난 안색의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음식과 마실 것과 의복과 탈 것과 화환과 향과 바르는 것과 침상과 숙소와 등불을 충분히 얻는다. 그는 그는 몸으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 말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한다. 그는 몸으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 말로 선하지않은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한 것을 원인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이렇게, 아난다여, 하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검은 법을 생겨나게 한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하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흰 법을 생겨나게 하는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높은 집안에 태어난 자이다. 부유하고 많은 재물과 많은 재산과 많은 금은과 많은 재화와 수입과 많은 가산과 곡식을 가진 부유한 끄샤뜨리야 가문이나 부유한 바라문 가문이나 부유한 장자의 집안이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사랑스럽고 뛰어난 안색의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음식과 마실 것과 의복과 탈 것과 화환과 향과 바르는 것과 침상과 숙소와 등불을 충분히 얻는다. 그는 몸으로 선한 행위를 하고 말로 선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한다. 그는 몸으로 선한 행위를 하고 말로 선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한 것을 원인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에 나아가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 이렇게, 아난다여, 하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흰 법을 생겨나게 한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하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열반을 생겨나게 하는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높은 집안에 태어난 자이다. 부유하고 많은 재물과 많은 재산과 많은 금은과 많은 재화와 수입과 많은 가산과 곡식을 가진 부유한 끄샤뜨리야 가문이나 부유한 바라문 가문이나 부유한 장자의 집안이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사랑스럽고 뛰어난 안색의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음식과 마실 것과 의복과 탈 것과 화환과 향과 바르는 것과 침상과 숙소와 등불을 충분히 얻는다. 그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지혜를 무력화시키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에 마음을 확고하게 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닦아서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열반을 생겨나게 한다. 이렇게, 아난다여, 하얀 태생들과 같은 사람이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열반을 생기게 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여섯 부류의 태생이다.”

 

āsavasuttaṃ (AN 6.58-번뇌 경)
58.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 받아 마땅하고, 시중받아 마땅하고, 보시 받아 마땅하고, 합장 받아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복전[福田]이다. 무엇이 여섯인가?
비구들이여,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하는 번뇌들은 단속하면 없어진다. 

수용함으로써 없애야 하는 번뇌들은 수용하면 없어진다.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하는 번뇌들은 감내하면 없어진다.

피함으로써 없애야 하는 번뇌들은 피하면 없어진다.

버림으로써 없애야 하는 번뇌들은 버리면 없어진다.

닦음으로써 없애야 하는 번뇌들은 닦으면 없진다.

 

무엇이, 비구들이여, 단속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눈의 근(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눈의 근을 잘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번뇌와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눈의 근을 잘 단속하면서 머무는 자에게 그러한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없다. ···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귀의 근을 잘 단속하면서 머문다. ···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코의 근을 잘 단속하면서 머문다. ···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혀의 근을 잘 단속하면서 머문다. ···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몸의 근을 잘 단속하면서 머문다. ···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마음의 근을 잘 단속하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마음의 근을 날 단속하지 못하고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마음의 근을  단속하며 머무는 자에게 그러한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없다. 비구들이여, 잘 단속하지 못하고 머무는 자에게는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잘 단속하면서 머무는 자에게는 그러한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없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단속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 비구들이여, 수용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수용함으로써 없애야 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의복을 수용한다. '오직 추위를 물리치고, 더위를 물리치고, 날파리∙모기∙바람∙뙤약볕∙파충류와 닿는 것을 물리치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 위해서다.'라고. 
그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음식을 수용한다.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고,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고, 보기 좋게 가꾸고자함도 아니니, 다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이 몸을 유지하여 청정범행을 돕기 위함이다. 바른 관찰로써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만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 계속 평온하게 머물며 닦고 익히기 위해 이 공양을 받는다.'라고. 

그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거처를 수용한다. '다만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파리와 모기, 비바람과 태양열, 여러 곤충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다만 이와 같은 계절의 변화로부터 일어나는 위험을 막아, 한적한 곳에서 닦고 익히기 위해 이 거처를 사용하겠다.'라고.

그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수용한다. '다만 병듦의 고통스런 느낌으로 일어난 화내는 해로움을 제거하기 위함이니, 병듦에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최상의 자유로움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것을 수용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수용하며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없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수용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수용함으로써 없애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 비구들이여, 감내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감내한다.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날파리∙모기∙바람∙뙤약볕∙파충류에 닿음과, 불쾌하고 거친 말들을 견디고, 몸에 생겨난 괴롭고 날카롭고 예리하고 고통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느낌들을 감내한다. 비구들이여, 감내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내하며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없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감내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 비구들이여, 피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피함으로써 없애야 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고, 사나운 말을 피하고, 사나운 소를 피하고, 사나운 개를 피하고, 뱀, 나뭇등걸, 가시덤불, 오물 구덩이와 마을 주변의 더러운 물웅덩이를 피한다. 그는 앉아 있는 그 적절하지 않은 자리, 행동하고 있는 그 적절하지 않은 영역, 현명한 동료 비구들을 나쁜 형편에 처하게 할 수 있도록 교제하는 그 저열한 도반들을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피한다.
비구들이여, 피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며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없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피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피함으로써 없애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 비구들이여, 제거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제거함으로써 없애야 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일어난 악의에 찬 생각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이미 일어난 해코지하려는 생각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비구들이여, 제거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거하면서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없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제거하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제거함으로써 없애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 비구들이여, 닦으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닦음으로 없애햐 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냄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念覺支]를 닦는다. ··· 법에 대한 선별(간택)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를 닦는다. ···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를 닦는다. ··· 희열(기쁨)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喜覺支]를 닦는다. ··· 편안함(안온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를 닦는다. ···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定覺支]를 닦는다. 여기 비구는 지혜롭게 숙고하여 분리됨에 의지하고 탐냄의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捨覺支]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닦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닦으면서 머무는 자에게 걱정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이 없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닦으면 없어지는 번뇌들이라서 닦음으로써 없애야 한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 받아 마땅하고, 시중받아 마땅하고, 보시 받아 마땅하고, 합장 받아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복전[福田]이다."

 

dārukammikasuttaṃ (AN 6.59-다루깜미까 경)
5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나디까에서 벽돌집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다루깜미까 장자(나무장사를 하는 장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다루깜미까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자여, 그대의 가문에서는 보시를 합니까?”
“세존이시여, 저희 가문에서는 보시를 합니다. 세존이시여, 숲에 머물고 탁발음식만 수용하고 분소의를 입는 아라한이거나 아라한도에 들어선 비구들에게 저의 가문은 보시를 합니다.”

“장자여, '이분들은 아라한이거나, 이분들은 아라한도에 들어선 분들이다.'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자손들로 북적거리고 까시에서 산출된 전단향을 사용하고 화환과 향과 연고를 즐겨 사용하고 금과 은을 지니는 재가자인 그대가 알기는 어렵습니다.

 

장자여, 만일 숲 속에 머무는 비구가 들뜨고, 거만하고, 변덕스럽고, 수다스럽고, 산만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리고, 분명한 알아차림이 없고, 삼매를 닦지 않고, 마음이 혼란하고, 감각의 근이 제어되지 않으면,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비난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숲속에 머무는 비구가 들뜨지 않고, 거만하지 않고, 변덕스럽지 않고, 수다스럽지 않고, 산만하지 않고, 마음 챙김을 확립하고, 분명한 알아차림을 가지고, 삼매를 닦고, 마음이 집중되고, 감각의 근이 제어되면,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칭송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마을 부근에 머무는 비구가 들뜨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비난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마을 부근에 머무는 비구가 들뜨지 않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칭송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비구가 들뜨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비난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비구가 들뜨지 않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칭송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공양의 초대를 받는 비구가 들뜨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비난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공양의 초대를 받는 비구가 들뜨지 않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칭송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분소의를 입는 비구가 들뜨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비난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분소의를 입는 비구가 들뜨지 않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칭송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장자들이 공양한 가사를 입는 비구가 들뜨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비난받습니다. 장자여, 만일 장자들이 공양한 가사를 입는 비구가 들뜨지 않고 ··· 그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칭송받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승가에 보시해야 합니다. 그대가 승가에 보시를 하면 마음에 청정한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대가 청정하게 믿는 마음을 가지면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에 나아가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저는 오늘부터 승가에 보시를 하겠습니다.”

 

hatthisāriputtasuttaṃ (AN 6.60-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경)
6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탁발을  마치고 돌아와 오후에 집회장에 함께 모여 앉아 아비담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거기서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 존자가 장로 비구들이 아비담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방해했다. 그러자 마하꼿티따 존자가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 존자는 장로 비구들이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계속해서 끼어들어 방해하지 마십시오. 코끼리의 아들 찟따 존자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말하자 코끼리의 아들 찟따 존자의 도반인 비구들이 마하꼿티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꼿티따 존자는 코끼리의 아들 찟따 존자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코끼리의 아들 찟따 존자는 현자입니다. 코끼리의 아들 찟따 존자는 장로 비구들과 함께 아비담마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라고.

 

*주석서에 의하면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 존자(ayasma Citta Hatthi-sariputta)는 사왓티에 사는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이었으며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일곱 번이나 출가와 환속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그는 전생에 환속하려는 비구에게 재가의 삶을 칭송하면서 환속하라고 권했기 때문에 금생에 일곱 번이나 환속하는 이와 같은 과보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서로 미세하게 다른 단어들의 뜻에 대해서 능통하였다고도 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 환속은 바로 본경에서 마하꼿티따(Maha-Kotthita) 장로가 아비담마를 설할 때 끼어들어 반론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환속하여 이삼 일 후에 뽓타빠다를 찾아갔고 뽓타빠다는 「디가 니까야」 제1권 뽓타빠다 경에 나타나 있듯이 그를 데리고 세존께 왔다고 한다.(DA.ii.379) 그는 세존의 설법을 정확하게 이해하였으며 그래서 다시 출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곧 아라한이 되었다.  

 

“도반들이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이것을 알기란 어렵습니다. 여기, 도반들이여, 어떤 사람은 스승을 의지해서 머물거나 다른 존중할 만한 동료 수행자들을 의지해서 머물 때는 거듭 기뻐하고, 거듭 보호되고, 거듭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승으로부터 멀어져버리고 존중할 만한 동료 수행자들로부터 멀어져버리면, 그는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과 왕과 왕의 대신들과 외도들과 외도의 제자들과 교제하며 머뭅니다. 이처럼 교제하고 친밀하고 제어되지 않고 쓸모없는 말을 하며 머무는 그에게 탐욕이 마음을 오염시켜 버립니다. 그는 탐욕으로 오염된 마음 때문에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를 들면, 도반들이여, 들판에서 풀을 뜯곤 하던 황소가 밧줄에 묶이거나 외양간에 갇혔는데, 누군가 말하기를 ‘들판에서 풀을 뜯곤 하던 황소는 다시는 들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말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들이여, 들판에서 풀을 뜯곤 하던 그 황소는 밧줄을 끊거나 외양간을 부수고 다시 들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어떤 사람은 스승을 의지해서 머물거나 다른 존중할 만한 동료 수행자들을 의지해서 머물 때는 거듭 기뻐하고, 거듭 보호되고, 거듭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승으로부터 멀어져버리고 존중할 만한 동료 수행자들로부터 멀어져버리면, 그는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과 왕과 왕의 대신들과 외도들과 외도의 제자들과 교제하며 머뭅니다. 이처럼 교제하고 친밀하고 제어되지 않고 쓸모없는 말을 하며 머무는 그에게 탐욕이 마음을 오염시켜 버립니다. 그는 탐욕으로 오염된 마음 때문에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 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나는 초선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사거리 대로에 소나기가 내리면 먼지는 가라앉지만 흙탕물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말하기를 ‘이제 사거리 대로에 다시는 먼지가 일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말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들이여, 그 사거리 대로에 사람들이 많이 왕래할 것이고 소와 짐승들이 많이 왕래할 것이고 바람과 태양이 습기를 말려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먼지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 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나는 초선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나는 제2선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마을이나 성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호수가 있는데 거기에 소나기가 내리려서 물이 혼탁해지면 조개껍질도 자갈과 조약돌도 가려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말하기를 ‘이제 저 호수에 다시는 조개껍질도 자갈과 조약돌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말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들이여, 사람들이 그 호수의 물을 마실 것이고 소와 짐승들이 마실 것이고 바람과 태양이 습기를 말리고 물이 깨끗해 질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조개껍질과 자갈과 조약돌도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나는 제2선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나는 제3선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은 사람은 간밤에 만든 식은 밥엔 흥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말하기를 ‘이제 저 사람은 다시는 음식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말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들이여,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은 사람의 소화가 되기 전까지는 다른 음식을 원하지 않겠지만 소화가 되고 나면 다시 음식을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나는 제3선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나는 제4선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산의 협곡에 호수가 있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물결이 일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말하기를 ‘이제 저 호수에 다시는 물결이 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말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들이여, 동쪽에서 강한 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호수에는 물결이 일고, 서쪽에서 강한 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호수에는 물결이 일고, 북쪽에서 강한 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호수에는 물결이 일고, 남쪽에서 강한 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호수에는 물결이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나는 제4선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모든 표상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나는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를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이 네 무리의 군대와 더불어 원정을 떠나 어떤 숲에서 하룻밤 야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나는 코끼리 소리와 말 소리와 전차 소리와 보병의 발자욱 소리와 큰 북 소리, 작은 북 소리, 고동 소리, 징소리, 고함소리 때문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그런데 누가 말하기를 ‘이제 저 숲에서 다시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말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이 그 숲에서 떠나면 다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모든 표상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나는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를 얻었다.’라고 하면서 비구들과 ··· 교제하며 머뭅니다. ···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animitta ceto-samadhi)'란 깊은 위빳사나와 함께한 삼매(balava-vipassana-samadhi)를 뜻한다.(AA.iv.40)
깊은 위빳사나와 함께한 이 삼매는 영원하다는 표상 등이 없기 때문에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라 한 것이다.(AAT.iii.177)

 

그 뒤에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 존자는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의 도반 비구들은 마하꼿티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 꼿티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마하꼿티따 존자는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가 이러이러한 경지를 증득했지만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았습니까? 아니면 신들이 ‘존자시여,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이러이러한 경지를 증득했지만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존자께 이런 뜻을 알려주었습니까?”

“도반들이여, 나는 마음으로써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의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았고 신들도 역시 나에게 이런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의 도반 비구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이러이러한 경지를 증득했지만 청정한 삶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비구들이여, 찟따는 오래지 않아서 다시 출가하게 될 것이다.”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오래지 않아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다시 출가하였다. 그리고 그리고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물렀다. 그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majjhesuttaṃ (AN 6.61-중간 경)

6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와서 집회장에 함께 모여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숫따니빠따』 「도피안 품」의 「멧떼야의 질문」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도피안 품(Parayana)」은 숫따니빠따의 마지막 품(제5장)이다. 본서 전체에서 도피안 품의 게송에 대한 질문은 제1권 아난다 경(A3.32)과 제2권 삼매 경(A4.41)과 본경에 나타나고 있고, 본서 난다마Ek 경(A7.50)에서는 난다마따 청신녀가 도피안 품을 노래로 읋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상윳따 니까야 등에도 나타난다. 앗타까 품(제4장)의 게송도 다른 니까야에서는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들어서 학자들은 예외 없이 숫따니빠다 도피안 품과 앗타까 품을 최고층(最古層)의 세존의 가르침으로 인정하고 있다.

 

'양 극단을 안 뒤에 지혜로운 자는 중간에서 더럽히지 않는다.

나는 그를 대인이라 부른다. 그는 여기서 바느질하는 여인을 넘어섰다.'라고.

*'바느질 하는 여인(sibbani)이라 불리는 갈애를 건넜다는 뜻이다.(AA.iii.403)

 

도반들이여, 무엇이 한 극단이고, 무엇이 두 번째 극단입니까? 무엇이 중간이고, 누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까?”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와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감각접촉[觸]이 한 극단이고, 감각접촉이 일어남이 두 번째 극단이며, 감각접촉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참으로 갈애가 이런저런 존재들의 태어남을 위하여 그것을 바느질합니다(꿰맵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라고.

 

*감각접촉이란 현재의 자신의 존재(atta-bhava,오온)을 뜻한다. 그것은 감각접촉을 통해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의 부분이다. 감각접촉의 일어남이라는 것은 미래의 자신의 존재를 뜻한다. 그것은 현재의 존재에서 쌓은 감각접촉을 조건으로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분이다. 감각접촉의 소멸이란 열반을 뜻한다.(Ibid) 

*즉 갈애가 두 개의 자신의 존재라 불리는 감각접촉과 감각접촉의 일어남을 깁고 꿰맨다는 뜻이다.(Ibid)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과거가 한 극단이고, 미래가 두 번째 극단이며, 현재가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참으로 갈애가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남을 위하여 그것을 바느질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즐거운 느낌이 한 극단이고, 괴로운 느낌이 두 번째 극단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참으로 갈애가 이런저런 존재들의 태어남을 위하여 그것을 바느질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정신[名]이 한 극단이고, 물질[色]이 두 번째 극단이며, 의식[識]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참으로 갈애가 이런저런 존재들의 태어남을 위하여 그것을 바느질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內處]가 한 극단이고,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가[六外處]가 두 번째 극단이며, 의식[識]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참으로 갈애가 이런저런 존재들의 태어남을 위하여 그것을 바느질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有身]이 한 극단이고,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의 일어남이 두 번째 극단이며,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참으로 갈애가 이런저런 존재들의 태어남을 위하여 그것을 바느질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우리 모두는 각자의 앎에 따라 설명을 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우리는 세존께 갑시다. 가서 세존께 이러한 뜻을 말씀을 드려서 세존께서 저희들에게 설명해주시는 대로 호지합시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장로 비구들은 그 비구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장로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장로 비구들은 이제까지 있었던 대화를 빠짐없이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누구의 말이 잘 말한 것입니까?”

“비구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방편적으로 잘 말하였다. 나는『숫따니빠따』「도피안 품」의「멧떼야의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했다.

 

'양 극단을 안 뒤에 지혜로운 자는 중간에서 더럽히지 않는다.
나는 그를 대인이라 부른다. 그는 여기서 바느질하는 여인을 넘어섰다.'라고.

 

이제 그대들은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장로 비구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감각접촉[觸]이 한 극단이고, 감각접촉의 일어남이 두 번째 극단이며, 감각접촉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이다. 참으로 갈애가 그런저런 존재들의 태어남을 위하여 그것을 바느질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완전한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한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된다.”라고.

 

purisindriyañāṇasuttaṃ (AN 6.62-사람의 기능에 대한 앎 경)

6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대중과 함께 꼬살라에서 유행을 하시다가 단다깝빠까라는 꼬살라들의 성읍에 도착하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길을 벗어나 어떤 나무 아래에 가셔서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고 비구들은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단다깝빠까로 들어갔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아찌라와띠 강으로 목욕을 갔다. 아지라와띠 강에서 목욕을 하고 나와서 가사 하나만을 입고 몸을 말리고 있었다. 어떤 비구가 아난자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세존께서 ‘데와닷따는 죽은 뒤에 악처, 지옥에 떨어져 일 겁(劫)을 머물 것이고 [참회로]용서 받을 수 없다.’라고 하신 것은 그것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하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면 어떤 신이 말한 것을 듣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도반이여, 세존께서 그렇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아찌라와띠 강으로 목욕을 갔습니다. 아지라와띠 강에서 목욕을 하고 나와서 가사 하나만을 입고 몸을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비구가 제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 아난다여, 세존께서 ‘데와닷따는 죽은 뒤에 악처, 지옥에 떨어져서 일 겁을 머물 것이고, 용서 받을 수 없다.'라고 설명하신 것은 그것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하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면 어떤 신이 말한 것을 듣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세존이시여, 그 비구에게 ‘도반이여, 세존께서 그렇게 설명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그 비구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이거나 장로라면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자일 것이다. 어떻게 내가 분명하게 설명한 것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난다여, 내가 이렇게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하고 설명을 한 사람은 데와닷따 이외에 어떤 사람도 나는 보지 못한다. 아난다여,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데와닷따에게서 밝은 법을 보았더라면, 나는 ‘데와닷따는 죽은 뒤에 악처, 지옥에 떨어져서 일 겁을 머물 것이고,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털끝만큼도 데와닷따에게서 밝은 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데와닷따는 죽은 뒤에 악처, 지옥에 떨어져서 일 겁을 머물 것이고,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설명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오물로 가득한 한길이 넘는 오물구덩이가 있다. 거기에 사람이 머리까지 빠질 것이다. 비록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의 번영을 바라고 이익을 바라고 유가안온을(열반) 바라면서 그를 오물구덩이에서 꺼내주려 하는 어떤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가 오물구덩이에 완전히 빠졌기 때문에 그를 잡고 끌어올릴 오물이 묻지 않은 곳을 털끝만큼이라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아난다여, 나는 털끝만큼이라도 데와닷따에게서 밝은 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데와닷따는 죽은 뒤에 악처, 지옥에 떨어져서 일 겁을 머물 것이고 용서 받을 수 없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가 인간의 근(기능)에 대한 앎을 분석할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는가?”

“세존께서 사람의 근에 대한 앎을 분석하실 적절한 때입니다. 세존이시여, 적절한 때입니다. 선서시여, 세존의 말씀을 듣고서 비구들은 마음에 새길 것입니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善法)도 불선법(不善法)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는 선한 법들이 사라졌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선함의 뿌리가 잘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선함의 [잠재적 성향으로부터] 선함이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미래에 쇠퇴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훼손되지 않았고 썩지 않았고 바람과 햇빛에 손상되지 않았고 상하지 않았고 안전하게 보관된 뿌리를 잘 내리는 씨앗들이 비옥하여 잘 준비된 땅에 심어졌다. 그러면 아난다여, 그대는 그 씨앗들이 잘 자라나고 증장하고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알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처럼,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善法)도 불선법(不善法)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는 선한 법들이 사라졌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선함의 뿌리가 잘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선함의 [잠재적 성향으로부터] 선함이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미래에 쇠퇴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의 근에 대한 앎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미래에 법의 일어남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다시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도 있고 불선법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사라지고 선법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선하지 않음의 뿌리(불선근.不善根)가 잘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선하지 않음의 잠재적 성향으로부터 선하지 않음이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미래에 쇠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훼손되지 않았고 썩지 않았고 바람과 햇빛에 손상되지 않았고 상하지 않았고 안전하게 보관된 뿌리를 잘 내리는 씨앗들이 넓은 바위에 뿌렸다. 그러면 그대는 그 씨앗들이 잘 자라지 못하고 증장하지 못하고 풍성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알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처럼,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도 있고 불선법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불선법들은 사라지고 선법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선하지 않음의 뿌리(불선근.不善根)가 잘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선하지 않음의 잠재적 성향으로부터 선하지 않음이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미래에 쇠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의 근에 대한 앎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미래에 법의 일어남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다시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도 있고 불선법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밝은 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다. 이 사람은 전적으로 삿된 불선법들을 갖춘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훼손되었고 썩었고 바람과 햇빛에 손상된 씨앗이 비옥하여 잘 준비된 땅에 심어졌다. 그러면 아난다여, 그대는 그 씨앗들이 잘 자라지 못하고 증장하지 못하고 풍성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알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처럼,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도 있고 불선법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밝은 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다. 이 사람은 전적으로 삿된 불선법들을 갖춘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의 근에 대한 앎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미래에 법의 일어남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들 말고 여기에 상응하는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을 천명하실 수 있습니까?”

“아난다여, 천명할 수 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들도 불선법들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는 선법들이 사라졌고 불선법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선함의 뿌리가 잘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하게 뿌리 뽑히고 말 것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미래에 쇠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이글거리며 불타는 숯불이 넓은 바위에 놓여있다. 그대는 이 숯불이 타오르지 않고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알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아난다여, 저녁에 해가 질 때, 아난다여, 광명은 사라지고 어둠이 나타날 것이라고 그대는 알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아난다여, 저녁에 밤이 반이나 지난 시간일 때, 아난다여, 광명은 사라지고 어둠이 나타날 것이라고 그대는 알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처럼,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들도 불선법들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는 선법들이 사라졌고 불선법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선함의 뿌리가 잘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하게 뿌리 뽑히고 말 것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미래에 쇠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의 근에 대한 앎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미래에 법의 일어남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들도 있고 불선법들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는 불선법들은 사라지고 선법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선하지 않음의 뿌리가 잘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히 뿌리 뽑히고 말 것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미래에 쇠퇴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화염으로 이글거리며 불타는 숯불이 마른 풀 더미나 장작더미에 던질 것이다. 그대는 이 숯불이 타오르고 크게 번질 것이라고 아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아난다여, 밤이 지나고 새벽에 태양이 떠오를 때, 아난다여, 그대는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이 드러날 것이라고 알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아난다여, 정오에 밥 먹을 때에 어둠은 사라졌고 광명이 드러났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처럼,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들도 있고 불선법들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는 불선법들은 사라지고 선법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선하지 않음의 뿌리가 잘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히 뿌리 뽑히고 말 것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미래에 쇠퇴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 차린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의 근에 대한 앎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미래에 법의 일어남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다시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들도 불선법들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는 불선법은 털끝만큼도 없다. 이 사람은 전적으로 밝고 비난받을 일이 없는 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바로 지금·여기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꺼져서 식은 숯불을 마른 풀 더미나 장작더미에 던질 것이다. 그대는 이 숯불이 타오르지 않고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알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처럼, 아난다여, 나는 여기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 선법들도 불선법들도 있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에게는 불선법은 털끝만큼도 없다. 이 사람은 전적으로 밝고 비난받을 일이 없는 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바로 지금·여기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알아차린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사람의 근에 대한 앎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이렇게도 아난다여, 여래는 미래에 법의 일어남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이해하여  안다.

 

여기서, 아난다여, 앞의 세 부류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쇠퇴하지 않는 존재고, 한 사람은 쇠퇴하는 존재고, 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떨어질 존재다. 여기서, 아난다여, 뒤의 세 부류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쇠퇴하는 존재고, 한 사람은 쇠퇴하지 않는 존재고, 한 사람은 완전한 열반에 드는 존재다.”

 

nibbedhikasuttaṃ (AN 6.63-꿰뚫음 경)
63. “비구들이여, 꿰뚫음의 방법에 대한 법문을 설할 것이다.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엇이그 꿰뚫음의 방법에 대한 법문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인연과 기원(원인과 근원)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과보를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느낌(경험.受)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인식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번뇌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업을 알아야 한다. 업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업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업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업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인연과 기원(원인과 근원)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과보를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라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이런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쾌락을 불러 일으키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 혀로 인식되는 맛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들은 감각적 쾌락이 아니다. 성스러운 율에서 이것들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라고 불린다.

 

사유를 통해서 생긴 사람의 애욕이 감각적 쾌락이다.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감각적 쾌락이 아니다.  

사유를 통해서 생긴 사람의 애욕이 감각적 쾌락이다.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단지 사실로서 머물 뿐이고

여기서 현명한 사람들은 애욕을 길들인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들의 인연과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觸]이 감각적 쾌락의 인연과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들의 차이점인가? 
비구들이여, 형상들에 대한 감각적 쾌락이 다르고, 소리들에 대한 감각적 쾌락이 다르고, 냄새에 대한 감각적 쾌락이 다르고, 맛에 대한 감각적 쾌락이 다르고 감촉에 대한 감각적 쾌락이 다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감각적 쾌락들의 차이점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들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이 있을 때는 늘 공덕과 연결되거나 악덕과 연결된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만들게 하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이 감각적 쾌락들의 과보라 한다. 

 

*'공덕이 된다'는 것은 천상의 감각적 쾌락을 바라서 선행을 성취하여 천상 세계에 태어난 자의 존재는 공덕이 된다고 한 것이고, 나쁜 행을 가득 채워 지옥에 태어난 자의 존재는 '악덕이 된다'고 하였다.(AA.iii.407)


비구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들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의 소멸이 감각적 쾌락들의 소멸이다. 오직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 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감각적 쾌락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감각적 쾌락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감각적 쾌락들의 원인과 근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감각적 쾌락의 차이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감각적 쾌락의 과보를 이렇게 철저히 알고, 감각적 쾌락의 소멸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감각적 쾌락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철저히 알 때, 그는 감각적 쾌락들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인연과 기원(원인과 근원)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과보를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꿰뚫음(nibbedhika)'이란 이러한 서른여섯 가지 경우(형상에 대한 감각적 쾌락 등 여섯에다 감각적 쾌락, 그들의 원인, 그들의 차이점 등 여섯을 곱하면 서른여섯이 됨)를 꿰뚫는 뛰어난 행위(settha-cariya)라고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청정범행이라 불리는 도(megga)를 감각적 쾌락의 소멸이라고 설했다.(Ibid)

 

'비구들이여, 느낌(경험.受)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즐거운 느낌, 괴로움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 느낌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들의 인연과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觸]이 느낌들의 원인과 근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들의 차이점인가?

비구들이여,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이 있고, 비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이 있다.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이 있고 비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이 있다.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고 비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느낌들의 차이점이라 한다.

 

*'비세속적(niramisa)'이란 것은 출가 생활에 바탕을 둔 것을 말한다.(DA.iii.775)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들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느낌이 있을 때는 늘 공덕과 연결되거나 악덕과 연결된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만들게 하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이 느낌들의 과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의 소멸이 느낌의 소멸이다. 오직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느낌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느낌들의 원인과 근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느낌들의 차이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느낌들의 과보를 이렇게 철저히 알고, 느낌들의 소멸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느낌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철저히 알 때, 그는 느낌들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느낌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인연과 기원(원인과 근원)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과보를 알아야 한다. 느낌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인식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형상의 인식, 소리의 인식, 냄새의 인식, 맛의 인식, 감촉의 인식, 법의 인식의 여섯 가지 인식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인식들의 인연과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觸]이 인식들의 인연과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인식들의 차이점인가?

비구들이여, 형상들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소리들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냄새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맛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감촉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법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인식들의 차이점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인식들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인식이 있을 때는 늘 그것에 어울리는 인습적 표현이라는 과보가 생긴다고 나는 말한다. 인식할 때 마다 항상 인습적인 표현을 하나니, 인식하는 자는 항상 이와 같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인식의 과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인식들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의 소멸이 인식의 소멸이다. 오직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인식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인식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인식들의 원인과 근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인식들의 차이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인식들의 과보를 이렇게 철저히 알고, 인식들의 소멸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인식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철저히 알 때, 그는 인식들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인식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인연과 기원(원인과 근원)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과보를 알아야 한다. 인식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인식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번뇌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번뇌, 존재의 번뇌, 무명의 번뇌의 세 가지 번뇌가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뇌들의 인연과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이 번뇌들의 원인과 근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뇌들의 차이점인가? 

비구들이여, 지옥으로 인도하는 번뇌가 있다. 축생의 모태로 인도하는 번뇌가 있다. 아귀계로 인도하는 번뇌가 있다. 인간 세계로 인도하는 번뇌가 있다. 천상 세계로 인도하는 번뇌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번뇌들의 차이점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뇌들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번뇌가 있을 때는 늘 공덕과 연결되거나 악덕과 연결된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만들게 하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이 번뇌들의 과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번뇌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무명의 소멸이 번뇌의 소멸이다. 오직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번뇌를 이렇게 철저히 알고, 번뇌들의 원인과 근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번뇌들의 차이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번뇌들의 과보를 이렇게 철저히 알고, 번뇌들의 소멸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번뇌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철저히 알 때, 그는 번뇌들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번뇌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업을 알아야 한다. 업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업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업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업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의도(意圖)가 업(業)이라고 나는 말한다. 의도한 뒤에[의도하면서] 몸에 의해, 말에 의해, 마음(意)에 의해 업(業)을 짓는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인연과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觸]이 업들의 인연과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차이점인가?

비구들이여, 지옥에서 과보를 겪어야 하는 업이 있다. 축생의 모태에서 과보를 겪어야 하는 업이 있다. 아귀계에서 과보를 겪어야 하는 업이 있다. 인간 세계에서 과보를 겪어야 하는 업이 있다. 천상 세계에서 과보를 겪어야 하는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업들의 차이점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업의 과보는 세 가지라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금생에 일어나거나 혹은 다음 생에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업들의 과보라 한다.

 

*그 과보를 금생에 경험하는 것을 dittheve dhamme라 표현했고, 바로 다음 생에서 그 과보를 경험하는 것을 upapajja라 표현했고, 세 번째 생부터 시작해서 윤회하는 과정에서 어떤 생에 그 과보를 경험하는 것을 apare va pariyaye라 표현했다.(AA.v.77)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의 소멸이 업의 소멸이다. 오직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업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업들의 원인과 근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업들의 차이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업들의 과보를 이렇게 철저히 알고, 업들의 소멸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업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철저히 알 때, 그는 업들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업들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은 이와의 만남도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 [五取蘊]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인연과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과 근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차이점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있고, 빨리 사라지는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차이점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과보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괴로움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것에 정신이 혼미해진 어떤 사람은 한탄하고 비탄해 하고 통곡하고 절규하고 울부짖는다. 어떤 괴로움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것에 정신이 혼미해진 어떤 사람은 '누가 이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한 구절로 된 주문이나 두 구절로 된 주문을 아는 자가 없는가?’라고 밖에서 찾는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은 어리석음이라는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고, 애써 구하는 과보를 가져오는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과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갈애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오직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원인과 근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차이점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과보를 이렇게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이렇게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철저히 알 때, 그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 꿰뚫음의 방법에 대한 법문이다.”

 

sīhanādasuttam (AN 6.64-사자후 경) 
64. “비구들이여, 여래에게는 여서 가지 여래의 힘이 있다. 이러한 힘에 의해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한다. 무리에게 사자후를 토한다. 브라흐마의 바퀴를 [梵輪]을 굴린다. 무엇이 여섯인가?


비구들이여, 여래는 곳을 곳으로, 곳이 아닌 곳을 곳이 아닌 것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곳을 곳으로, 곳이 아닌 곳을 곳이 아닌 것으로, 있는 그대로 아는 이것이  여래가 지닌 여래의 힘이다. 이러한 힘에 의해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한다. 무리에게 사자후를 토한다. 브라흐마의 바퀴를 굴린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래는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을 받을 때, 곳으로부터의 그리고 원인으로부터의 업의 과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을 받을 때, 곳으로부터의 그리고 원인으로부터의 업의 과보를 있는 그대로 아는 이것이 곧 여래가 지닌 여래의 힘이다. 이러한 힘에 의해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한다. 무리에게 사자후를 토한다. 브라흐마의 바퀴를 굴린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래는 선정과 해탈과 삼매와 선정의 상태에 관련하여, 번뇌에 대해, 청정에 대해, 벗어남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선정과 해탈과 삼매와 삼매의 상태(증득.等地)에 관련하여, 번뇌에 대해,청정에 대해, 벗어남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아는 이것이 곧 여래가 지닌 여래이 힘이다. 이러한 힘에 의해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한다. 무리에게 사자후를 토한다. 브라흐마의 바퀴를 굴린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래는 수많은 다양한 이전에 살았던 곳을 기억한다.[宿命通]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비구들이여, 여래가 수많은 다양한 이전에 살았던 곳을 기억하는 이것이 곧 여래가 지닌 여래의 힘이다. 이러한 힘에 의해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한다. 무리에게 사자후를 토한다. 브라흐마의 바퀴를[梵輪]을 굴린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래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여러 중생들이죽고 태어나는 것을 보신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세계에 태어난다'라고. 
비구들이여, 여래가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여러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을을 여실하게 알아차리는 이것이 곧 여래가 지닌 여래의 힘이다. 이러한 힘에 의해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한다. 무리에게 사자후를 토한다. 브라흐마의 바퀴를 굴린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래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지녀, 현재의 법을 스스로 철저히 알고, 겪어 알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녀, 현재의 법을 스스로 철저히 알고, 겪어 알아, 구족하여 머무는 이곳이 곧 여래가 지닌 힘이다. 이러한 힘에 의해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공언한다. 무리에게 사자후를 토한다. 브라흐마의 바퀴를 굴린다.

여기서, 비구들이여, 만일 다른 사람들이 여래에게 다가와서, 곳을 곳으로, 곳이 아닌 것을 곳이 아닌 것으로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로 무장하여 여래에게 질문을 하면, 여래는 곳을 곳으로, 곳이 아닌 것을 곳이 아닌 것이라고 있는 있는 그대로 아는 그 지혜에 따라서 그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한다.

여기서, 비구들이여, 만일 다른 사람들이 여래에게 다가와서,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을받을 때, 곳으로부터의 원인으로부터의 업의 과보를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로 무장하여 여래에게 질문을 하면, 여래는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을 받을 때, 곳으로부터의 원인으로부터의업의 과보를 있는 그대로 아는 그 지혜에 따라서 여래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면 그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한다.

여기서, 비구들이여, 만일 다른 사람들이 여래에게 다가와서, 선정과 해탈과 삼매와 선정의 상태에 관련하여, 번뇌에 대해, 청정에 대해, 벗어남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로 무장하여 여래에게 질문을 하면, 여래는 선정과 해탈과 삼매와 선정의 상태에 관련하여, 번뇌에 대해, 청정에 대해, 벗어남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아는 그 지혜에 따라서 여래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면 그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한다.


여기서, 비구들이여, 만일 다른 사람들이 여래에게 다가와서, 수많은 다양한 이전에 살았던 곳을 기억하여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宿命通]로 무장하여 여래에게 질문을 하면, 여래는 수많은 다양한 이전에 살았던 곳을 기억하여 있는 그대로 아는 그 지혜에 따라서 여래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면 그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한다.


여기서, 비구들이여, 만일 다른 사람들이 여래에게 다가와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남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로 무장하여 여래에게 질문을 하면, 여래는 중생들이 죽고 태어남을 있는 그대로 아는 그 지혜에 따라서 여래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면 그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한다.


여기서, 비구들이여, 만일 다른 사람들이 여래에게 다가와서, 번뇌가 다함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로 무장하여 여래에게 질문을 하면, 여래는 번뇌가 다함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에 따라서 여래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면 그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한다.


비구들이여, 곳을 곳으로, 곳이 아닌 것을 곳이 아닌 것으로,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는 마음이 잘 집중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잘 집중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을 받을 때, 곳으로부터의 그리고 원인으로부터의 업의 과보를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도 마음이 잘 집중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잘 집중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선정과 해탈과 삼매와 선정의 상태에 관련하여, 번뇌에 대해, 청정에 대해, 벗어남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도 마음이 잘 집중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잘 집중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수많은 다양한 이전에 살았던 곳을 기억하여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도 마음이 잘 집중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잘 집중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죽고 태어남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도 마음이 잘 집중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잘 집중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다함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도 마음이 잘 집중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잘 집중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삼매는 지혜를 얻는 닦음과 익힘이며, 삼매에 들지 못함은 나쁜 닦음과 익힘이다.”

 

 

 

제6장 대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