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여덟의 모음 - 6. 고따미 품(Gotamī-vagga. AN8.51-60)

실론섬 2014. 8. 18. 12:40

                           

제6장 고따미 품 gotamī-vagga (AN 8.51-60)

 

gotamīsuttam (AN 8.51-고따미 경)

51.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마하빠지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는 데와다하(Devadaha)의 숫빠붓다(Suppabuddha)의 딸이며, 세존의 어머니인 마하마야(Mahamaya)부인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마하마야 부인이 세존을 낳은 지 7일 만에 돌아가시자 세존을 양육했으며, 세존의 아버지인 숫도다나 왕과 결혼하여 세존의 계모가 되었다. 
*세존께서는 까삘리왓투를 방문하셔서 맨 먼저 난다(Nanda)를 출가시키셨고 7일째 되던 날에 라훌라(Rahula)를 출가시키셨다. 삭까 족과 꼴리야 족 사이에 로히니 강물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 양쪽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이 얼어날 위기에 처했을 때 세존께서 직접 나서서 그들의 왕을 설득하셨다. 왕들은 세존에게 설득되어 마음이 누그러져 각각 250명의 남자들을 세존께로 보냈다. 그 500명의 남자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부인들이 승가에 사람을 보내어 불평을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그들에게 불평이 발생한 것을 아시고 그 500명의 젊은 비구들을 꾸날라 연못(Kunala-daha, 뻐꾸기 연못)으로 데려가서 자신들이 뻐꾸기였을 적에 앉던 돌 위에 앉게 하고서 꾸날라 자따까(Kunala-jataka)의 설법으로 불평을 가라앉힌 뒤에 그 모두를 예류과에 머물게 하였고, 다시 마하와나(큰 숲)로 데려가서 아라한과에 머물게 하셨다. 그들의 마음을 알기 이해 다시 그들의 부인들을 승가로 보내었다. 그들은 '우리가 재가에서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면서 부인들을 돌려보내었다. 그 부인들은 '우리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러니 마하빠자빠띠에게 가서 세존께 출가를 허락받아 달라고 해서 출가합시다.'라고 말하면서 그 500명도 마하빠자빠띠에게 가서 '존경하는 분이시여, 저희들의 출가를 허락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하빠자빠띠는 그 부인들을 데리고 세존께 다가간 것이다.(AA.iv.132)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해주십시요.”
“그만하시오, 고따미여. 그대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요청하지 마시오.”
두 번째로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해주십시요.”
“그만하시오, 고따미여. 그대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요청하지 마시오.”
세 번째로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해주십시요.”

“그만하시오, 고따미여. 그대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요청하지 마시오.”

그러자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께서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구나.’라고 하면서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세존의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그후 세존께서는 까삘라왓투에 원하는 만큼 머무시고 웨살리를 향하여 유행을 떠나셨다. 차례로 유행을 하시어 웨살리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그곳 웨살리에서 큰 숲의 뾰족지붕 강당에 머무셨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삭발을 하고 노란색 가사를 입고 많은 삭까의 여인들과 함께 웨살리로 들어가 웨살리에 있는 큰 숲의 뾰족지붕 강당에 도착하였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사지는 온통 먼지투성이였으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문밖에 서 있었다. 

아난다 존자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사지는 온통 먼지투성이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문밖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보고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고따미여, 당신은 왜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사지는 온통 먼지투성이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문밖에 서있습니까?”

“아난다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고따미여, 그렇다면 여기에 계십시오. 제가 세존께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간청을 해보겠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께서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사지는 온통 먼지투성이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문밖에 서서 ‘세존께서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만하라, 아난다여. 그대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요청하지 말라.”
두 번째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 드렸다.

“세존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께서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사지는 온통 먼지투성이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문밖에 서서 ‘세존께서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만하라, 아난다여. 그대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요청하지 말라.”
세 번째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께서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사지는 온통 먼지투성이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문밖에 서서 ‘세존께서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만하라, 아난다여. 그대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요청하지 말라.”

 

아난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존께서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구나. 그러니 나는 다른 방법으로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세존께 간청을 해야겠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면 예류자나 일래과나 불환과나 아라한과를 실현할 수 있습니까?”

“아난다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면 예류자나 일래과나 불환과나 아라한과를 실현할 수 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여 예류자나 일래과나 불환과나 아라한과를 실현할 수 있다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께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분은 세존의 이모였고 유모였으며, 세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세존을 양육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난다여, 만일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八敬法.팔경법]을 받아들인다면 그녀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 

①비구니가 구족계를 받은 지 100년이 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날 구족계를 받은 비구에게 절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한다.

 

②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거주처에서 안거를 나서는 안된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한다.

*'비구가 없는 거주처(abhikkhuka avasa)'란 사는 곳 부근에 가르침을 듣기 위해 다가가더라도 가르침을 줄 스승(acariya)이 없는 곳을 뜻한다.(AA.iv.135)

 

③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 승가에게 포살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하고 교계를 받아야 한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한다.

 

④비구니는 안거를 마치면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의 두 승가 앞에서 본 것과 들은 것과 의심을 품은 것의 세 가지에 대해서 자자(自恣)를 해야 한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자(自恣. pavarana)'는 석 달의 안거가 끝날 때 모든 대중들이 모여서 석 달간의 생활을 되돌아 보고 반성하는 의식이다. 상윳따 니까야의 복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자란 도닦음을 청정하게 하고 각자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하기 위한 기회를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안거가 끝날 때 행해지는 것인데 이것을 청정해지기 위한 자백이라고 한다.(SAT.i.253)

 

⑤비구니가 무거운 법을 범한 경우에는 두 승가에게 보름간의 참회를 행해야 한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한다.

 

*'무거운 법(garu-dhamma)'이란 무거운 승잔죄(sanghadises-apatti)를 뜻한다.(Ibid)

 

⑥비구니는 두 안거 기간(2년) 동안 여섯 가지 법에 대해 학습계목을 성취한 뒤 식차마나는 두 승가로부터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 가지 법(cha dhamma)'이란 때 아닌 때에 먹지 않는 것 등의 여섯 가지이고, 2년동안 그 여섯 가지 법 가운데서 단 하나의 학습계목도 어기지 않고 완전히 성취한 뒤에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Ibid) 즉 여성은 처음 출가하면 식차마니(sikkhamana)가 되어 2년 동안 6가지 법을 준수한 뒤에 구족계(비구니계)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⑦어떤 이유로도 비구니는 비구에게 거친 말(욕설)을 하거나 비방을 해서는 안된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한다.

 

⑧아난다여, 오늘부터 비구니들이 비구들을 교계하고 가르치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비구들이 비구니들을 [교계하고 가르치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은 금지되지 않는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이러한 여덟 가지 무거운 법을 받아들인다면 그녀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

 

*사미니 – 18세 미만의 출가 여자 수행자   

*식차마나 – 사미니가 18세 때부터 20세까지 2년 동안 여섯 가지 법을 수행하는 단계에서 불려지는 이름(6법 : 살생을 하지 않음, 삿된 음행을

하지 않음, 도둑질을 하지 않음, 거짓말을 하지 않음, 술을 마시지 않음, 때아닌 때에 먹지 않음)

① 비록 백세 비구니일지라도 처음으로 수계한 연소 비구를 보거든 마땅히 일어나서 맞이하고 예배하고 깨끗한 자리를 권하여 앉게 해야 한다.
② 비구니는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지 말아야 하며 또는 파계·파견·파위의 등을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③ 비구니는 비구의 죄를 드러내거나 기억시키거나 자백시키지 못하며 멱죄(覓罪)·설계(說戒)·자자(自恣) 등을 막지 못한다. 비구니는 비구를 꾸짖지 못하고, 비구는 비구니를 꾸짖을 수 있다.
④ 식차마나가 계를 배워 마치면 비구로부터 비구니계를 수계해줄 것을 청해야 한다.
⑤ 비구니는 승잔죄(僧殘罪, 자격이 일시적으로 정지되는 것)를 범하였으면 마땅히 이부승(二部僧) 중에 보름 동안 마나타(대중으로부터 격리된 곳에 머물면서 죄를 참회하는 일)를 행해야 한다.
⑥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 승가에 교계해 줄 것을 청해야 한다.
⑦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곳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해서는 안 된다.
⑧ 비구니가 안거를 마치면 마땅히 비구 승가에 가서 삼사(三事)를 구해야 할 것이니, 즉 보고 듣고 의심한 것을 자자(自恣)하여야 한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이러한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을 배운 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갔다. 가서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따미여, 만일 당신이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을 받아들인다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비구니가 구족계를 받은 지 100년이 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날 구족계를 받은 비구에게 절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거주처에서 안거를 나서는 안됩니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 승가에게 포살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하고 교계를 받아야 합니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구니는 안거를 마치면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의 두 승가 앞에서 본 것과 들은 것과 의심을 품은 것의 세 가지에 대해서 자자(自恣)를 해야 합니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구니가 무거운 법을 범한 경우에는 두 승가에게 보름간의 참회를 행해야 합니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구니가 두 안거 기간(2년) 동안 여섯 가지 법에 대해 학습계목을 성취한 뒤 식차마나는 두 승가로부터 구족계를 받아야 합니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구니는 어떤 이유로도 비구에게 거친 말(욕설)을 하거나 비방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비구니들이 비구들을 교계하고 가르치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비구들이 비구니들을 교계하고 가르치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은 금지되지 않습니다.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따미여, 만일 당신이 이러한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을 받아들인다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마치 장식을 좋아하는 어리고 젊은 여자나 남자가 머리를 감은 뒤 연꽃 화환이나 재스민 화환이나 장미꽃 화환을 얻으면 두 손으로 받아서 몸의 최상인 머리에 놓는 것과 같이, 저는 이러한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을 받아들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을 받아들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난다여, 만일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지 않으면 청정범행은 오래 머물 것이고 정법은 천년을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한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청정범행은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고 정법은 오백년 밖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아난다여, 마치 어떤 가문이든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 가문은 도둑이나 밤도둑의 침입을 받기 쉬운 것과 같이, 여자가 집을 나와 출가하는 그런 법과 율에는 청정범행이 오래 머물지 못한다.

아난다여, 마치 벼를 잘 심은 논에 병충해가 퍼지면 벼를 잘 심은 그 논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여자가 집을 나와 출가하는 그런 법과 율에는 청정범행이 오래 머물지 못한다.

아난다여, 마치 잘 자란 사탕수수 밭에 붉은 뼈처럼 되는 병이 돌면 그 잘 자란 사탕수수 밭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여자가 집을 나와 출가하는 그런 법과 율에는 청정범행이 오래 머물지 못한다.  

아난다여, 마치 남자가 큰 호수에다 오직 미래를 대비하여 제방을 쌓아서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하듯이, 나도 오직 미래를 대비하여 비구니들에게 여덟 가지 무거운 법을 제정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한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ovādasuttam (AN 8.52-교계 경)
52.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에 있는 뾰족지붕 강당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법을 갖춘 비구가 비구니들을 가르치는(교계하는) 자로 선출되어야 합니까?”
“아난다여, 여덟 가지 법을 갖춘 비구가 비구니들을 가르치는 자로 선출되어야 한다. 무엇이 여덟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계를 잘 지켜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문다.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추고, 작은 허물에도 두려움을 보며,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 닦고 익힌다.

그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잘 호지하고 배운 것을 잘 정리한다.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내는 가르침들이 있으니, 그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많이 배우고 호지하고 말로써 익숙해지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꿰뚫는다.

그는 두 가지 빠띠목카를 경(경분별)과 부분적인 것(건도와 보유)으로 상세하게 잘 전승받고 잘 분석하고 잘 설명하고 잘 판별한다. 

그는 선한 말을 하고, 선한 말씨를 가졌고, 예의바르게 말하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갖추었다.. 

그는 비구니 승가에게 법다운 이야기로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할 능력이 있다. 대체로 비구니들의 호감을 사고 그들의 마음에 든다. 

그는 세존을 의지하여 출가하여 물들인 옷을 입은 후로 무거운 법을 범한 적이 없다. 

그는 20안거나 20안거 이상이 되어야 한다.

 아난다여, 이러한 여덟 가지 법을 갖춘 비구가 비구니들을 가르치는 자로 선출되어야 한다.”

 

saṁkhittasuttam (AN 8.53-간략하게 경) 
53.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중각강당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주십시오. 저는 세존께서 설해주시는 그 법을 듣고 홀로 머물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며 지내고자 합니다.”
“고따미여, 어떤 법들이 탐욕에 물들게 하고 탐욕의 사라짐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윤회의 족쇄에 묶이게 하고, 족쇄로부터 벗어남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증장시키고 감소함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크나큰 욕심을 생기게 하고 욕심 없음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만족할 줄 모르게 하고 만족함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무리지어 살게 하고 조용히 홀로 머묾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게으르게 하고 열심히 정진함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공양하기 어렵게 하고 공양하기 쉬움으로 인도하지 않는다고 그대가 알게 되면, ‘이것은 법이 아니고 이것은 율이 아니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이 아니다.’라고 그대는 전적으로 간직해야 한다.


그러나, 고따미여, 어떤 법들이 탐욕이 사라지도록 하고 탐욕에 물듦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윤회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묶임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감소시키고 증장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욕심 없게하고 크나큰 욕심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만족하도록 하고 만족할 줄 모름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조용히 홀로 머물도록 하고 무리지어 사는 것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열심히 정진하게 하고 게으름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공양하기 쉽게 하고 공양하기 어렵게 하지 않는다고 그대가 알게 되면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전적으로 간직해야 한다.”

 

dīghajāṇusuttaṃ (AN 8.54-디가자누 경)
54.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꼴리야에서 깍까라빳따라는 꼴리야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꼴리야의 아들 디가자누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꼴리야의 아들 디가자누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꼴리야(Koliya)는 로히니(Rohini)강을 사이에 두고 사까(Sakya,석가족)와 인접한 공화국 체제를 유지한 나라였다. 꼴리야의 선조가 사꺄의 여인과 결혼해서 꼴리야 나라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사꺄와는 형제국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고 한다.(DPPN)

 

“세존이시여, 저와 같은 재가자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자식들이 많은 집에서 살고 까시에서 생산된 전단향을 사용하고 화환과 향과 치장을 위한 기름를 즐겨 사용하고 금.은을 소유하여 누립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저희들에게 금생의 이익과 행복을 주고 내생의 이익과 행복을 주는 법을 설해주십시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이런 네 가지 법은 좋은 가문의 아들에게 금생의 이익과 행복을 준다. 무엇이 넷인가?
근면함을 갖춤, 보호를 갖춤, 선우를 사귐, 바르게 생계를 유지함이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Vyagghapajja)'라고 부른 것은 그의 습관적이고 전통적인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선조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가문의 남자들은 그렇게 불렸다.(AA.iv.137-138) 여기서 vyaggha는 호랑이를 뜻하고 pajja는 pada(길)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꼴리야족의 남자들은 모두 이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어떤 것이 근면함을 갖추는 것인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농사나 장사나 목축이나 궁술이나 왕의 신하가 되거나 그 이외 어떤 공예의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거기에 숙련되고 게으르지 않으며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고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근면함을 갖추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어떤 것이 보호를 갖추는 것인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정의롭게 법에 따라서 얻은 그의 재물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갖춘다. ‘어떻게 하면 나의 이 재물을 왕이 빼앗아 가버리지 않을까, 도둑이 훔쳐가지 않을까, 불이 태워버리지 않을까, 물이 쓸어 가버리지 않을까, 성품이 나쁜 자가 상속받지 않을까?’라고.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보호를 갖추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어떤 것이 선우를 사귐인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이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 산다. 그곳에는 믿음을 갖추고, 계를 갖추고, 보시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또는 계행이 올바른 젊은이나 계행이 올바른 노인들이 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대화하고 토론한다. 그런 믿음을 갖춘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갖춤을 따라서 실천하고, 그런 계를 갖춘 사람들로부터 계의 갖춤을 따라서 실천하고, 그런 보시를 갖춘 사람들로부터 보시의 갖춤을 따라서 실천하고, 그런 지혜를 갖춘 사람들로부터 지혜의 갖춤을 따라서 실천한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이를 일러 선우를 사귐이라 한다.

 

그러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어떤 것이 바르게 생계를 유지함인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재물의 수입을 알고, 재물의 지출을 알아서, '이렇게 나에게 수입은 지출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에게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지나치게 풍족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궁핍하지도 않은 균형 잡힌 생계를 유지한다. 예를 들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저울로 무게를 재는 사람이나 그의 제자는 저울을 잡으면 이만큼이 내려갔거나 혹은 이만큼이 올라갔다고 안다. 이처럼 좋은 가문의 아들은 재물의 수입을 알고, 재물의 지출을 알아서, '이렇게 나에게 수입은 지출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에게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지나치게 풍족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궁핍하지도 않은 바르게(균형 잡힌) 생계를 유지한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만약 좋은 가문의 아들이 수입은 적은데 호화로운 생계를 꾸려간다면 '이 좋은 가문의 아들은 무화과를 먹듯이 재물을 먹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좋은 가문의 아들이 수입이 많은데도 궁핍하게 생계를 꾸려간다면 '이 좋은 가문의 아들은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좋은 가문의 아들은 재물의 수입을 알고, 재물의 지출을 알아서, '이렇게 나에게 수입은 지출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에게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지나치게 풍족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궁핍하지도 않은 바르게 생계를 유지한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바르게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무화과를 먹듯이 재물을 낭비한다.'라는 것은 마치 무화과(udumbara)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잘 익은 무화과 나무를 흔들면 한 번의 충격으로 많은 과일이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는 그 중에서 먹을 만한 것만 골라서 먹고는 나머지 더 많은 것을 버리고 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수입보다 지출을 더 많이 마들고 재물을 향유한다. 그를 일러 무화과를 먹듯이 재물을 낭비한다고 하는 것이다.(AA.iv.138)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이렇게 재물이 생기면 여자에 빠지고, 술에 빠지고, 노름에 빠지고, 나쁜 친구와 나쁜 동료와 나쁜 벗을 사귀는 네 가지 손실의 문이 있다. 예를 들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네 개의 입수로와 네 개의 배수로를 가진 큰 저수지가 있다. 사람이 그 저수지의 입수로의 문을 닫고 배수로는 문을 열 것이다. 그런데 비도 적절히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그 큰 저수지의 물은 줄어들고 불어나지 않을 것이 예상된다. 이처럼 재물이 생기면 여자에 빠지고, 술에 빠지고, 도박에 빠지고, 나쁜 친구와 나쁜 동료와 나쁜 벗을 사귀는 네 가지 손실의 문이 있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이렇게 재물이 생기면 여자에 빠지지 않고, 술에 빠지지 않고, 노름에 빠지지 않고, 좋은 친구와 좋은 동료와 좋은 벗을 사귀는 네 가지 번영의 문이 있다. 예를 들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네 개의 입수로와 네 개의 배수로를 가진 큰 저수지가 있다. 사람이 그 저수지의 입수로의 문을 열고 배수로의 문은 닫을 것이다. 그런데 비도 적절히 내릴 것이다. 이렇게 그 큰 저수지의 물은 불어나고 줄어들지 않을 것이 예상된다. 이처럼 재물이 생기면 여자에 빠지지 않고, 술에 빠지지 않고, 도박에 빠지지 않고, 좋은 친구와 좋은 동료와 좋은 벗을 사귀는 네 가지 번영의 문이 있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이러한 네 가지 법은 재가자에게 금생의 이익과 행복을 준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네 가지 법은 좋은 가문의 아들에게 내생의 이익과 행복을 준다. 무엇이 넷인가?
믿음의 갖춤, 계의 갖춤, 베풂(보시)의 갖춤, 지혜의 갖춤이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믿음의 갖춤인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믿음이 있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믿음의 갖춤이라 한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계의 갖춤인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고, 음행에 대해 삿된 행위를 멀리 떠나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멀리 떠나고,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을 멀리 떠난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계의 갖춤이라 한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베품의 갖춤인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인색함의 때(오염)가 없는 마음으로 재가에 살고, 아낌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한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베품의 갖춤이라 한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지혜의 갖춤인가?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지혜를 가졌다. 그는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 차리고, 성스럽고, 지혜가 있고,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를 갖추었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지혜의 갖춤이라 한다.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이런 네 가지 법은 좋은 가문의 아들에게 내생의 이익과 행복을 준다.”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근면하고 방일하지 않고 신중한 자는
바르게 생계를 유지하고, 모은 것을 보호한다. 
믿음과 계를 갖추고 인색을 떠난, 구하는 자의 말뜻을 아는 자는 
내생의 축복을 가져오는 길을 항상 깨끗하게 한다.
이러한 여덟 가지 법은 믿음을 가진 재가자에게
두 곳 모두에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진리의 이름을 가진 분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이 보시는 재가자들에게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행복을 위한 공덕을 늘어나게 한다.'

 

ujjayasuttaṃ (AN 8.55-웃자야 경)

55.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꼴리야에서 깍까라빳따라는 꼴리야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웃자야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웃자야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와 같은 재가자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자식들이 많은 집에서 살고 까시에서 생산된 전단향을 사용하고 화환과 향과 치장을 위한 기름를 즐겨 사용하고 금.은을 소유하여 누립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저희들에게 금생의 이익과 행복을 주고 내생의 이익과 행복을 주는 법을 설해주십시오.”

“바라문이여,이런 네 가지 법은 좋은 가문의 아들에게 금생의 이익과 행복을 준다. 무엇이 넷인가?
근면함을 갖춤, 보호를 갖춤, 선우를 사귐, 바르게 생계를 유지함이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어떤 것이 근면함을 갖추는 것인가?
바라문이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농사나 장사나 목축이나 궁술이나 왕의 신하가 되거나 그 이외 어떤 공예의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거기에 숙련되고 게으르지 않으며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고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근면함을 갖추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어떤 것이 보호를 갖추는 것인가?
바라문이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정의롭게 법에 따라서 얻은 그의 재물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갖춘다. ‘어떻게 하면 나의 이 재물을 왕이 빼앗아 가버리지 않을까, 도둑이 훔쳐가지 않을까, 불이 태워버리지 않을까, 물이 쓸어 가버리지 않을까, 성품이 나쁜 자가 상속받지 않을까?’라고. 이것이, 바라문이여, 보호를 갖추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어떤 것이 선우를 사귐인가?
바라문이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이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 산다. 그곳에는 믿음을 갖추고, 계를 갖추고, 보시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또는 계행이 올바른 젊은이나 계행이 올바른 노인들이 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대화하고 토론한다. 그런 믿음을 갖춘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갖춤을 따라서 실천하고, 그런 계를 갖춘 사람들로부터 계의 갖춤을 따라서 실천하고, 그런 보시를 갖춘 사람들로부터 보시의 갖춤을 따라서 실천하고, 그런 지혜를 갖춘 사람들로부터 지혜의 갖춤을 따라서 실천한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이를 일러 선우를 사귐이라 한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어떤 것이 바르게 생계를 유지함인가?
바라문이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재물의 수입을 알고, 재물의 지출을 알아서, '이렇게 나에게 수입은 지출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에게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지나치게 풍족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궁핍하지도 않은 균형 잡힌 생계를 유지한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저울로 무게를 재는 사람이나 그의 제자는 저울을 잡으면 이만큼이 내려갔거나 혹은 이만큼이 올라갔다고 안다. 이처럼 좋은 가문의 아들은 재물의 수입을 알고, 재물의 지출을 알아서, '이렇게 나에게 수입은 지출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에게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지나치게 풍족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궁핍하지도 않은 바르게(균형 잡힌) 생계를 유지한다. 바라문이여,  만약 좋은 가문의 아들이 수입은 적은데 호화로운 생계를 꾸려간다면 '이 좋은 가문의 아들은 무화과를 먹듯이 재물을 먹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좋은 가문의 아들이 수입이 많은데도 궁핍하게 생계를 꾸려간다면 '이 좋은 가문의 아들은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바라문이여, 좋은 가문의 아들은 재물의 수입을 알고, 재물의 지출을 알아서, '이렇게 나에게 수입은 지출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에게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지나치게 풍족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궁핍하지도 않은 바르게 생계를 유지한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바르게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바라문이여, 이렇게 재물이 생기면 여자에 빠지고, 술에 빠지고, 노름에 빠지고, 나쁜 친구와 나쁜 동료와 나쁜 벗을 사귀는 네 가지 손실의 문이 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네 개의 입수로와 네 개의 배수로를 가진 큰 저수지가 있다. 사람이 그 저수지의 입수로의 문을 닫고 배수로는 문을 열 것이다. 그런데 비도 적절히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그 큰 저수지의 물은 줄어들고 불어나지 않을 것이 예상된다. 이처럼 재물이 생기면 여자에 빠지고, 술에 빠지고, 도박에 빠지고, 나쁜 친구와 나쁜 동료와 나쁜 벗을 사귀는 네 가지 손실의 문이 있다.

바라문이여, 이렇게 재물이 생기면 여자에 빠지지 않고, 술에 빠지지 않고, 노름에 빠지지 않고, 좋은 친구와 좋은 동료와 좋은 벗을 사귀는 네 가지 번영의 문이 있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여, 네 개의 입수로와 네 개의 배수로를 가진 큰 저수지가 있다. 사람이 그 저수지의 입수로의 문을 열고 배수로의 문은 닫을 것이다. 그런데 비도 적절히 내릴 것이다. 이렇게 그 큰 저수지의 물은 불어나고 줄어들지 않을 것이 예상된다. 이처럼 재물이 생기면 여자에 빠지지 않고, 술에 빠지지 않고, 도박에 빠지지 않고, 좋은 친구와 좋은 동료와 좋은 벗을 사귀는 네 가지 번영의 문이 있다.

바라문이여, 이러한 네 가지 법은 재가자에게 금생의 이익과 행복을 준다.


바라문이여, 네 가지 법은 좋은 가문의 아들에게 내생의 이익과 행복을 준다. 무엇이 넷인가?
믿음의 갖춤, 계의 갖춤, 베풂(보시)의 갖춤, 지혜의 갖춤이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믿음의 갖춤인가?
바라문이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믿음이 있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믿음의 갖춤이라 한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계의 갖춤인가?
바라문이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고, 음행에 대해 삿된 행위를 멀리 떠나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멀리 떠나고,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을 멀리 떠난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계의 갖춤이라 한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베품의 갖춤인가?
바라문이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인색함의 때(오염)가 없는 마음으로 재가에 살고, 아낌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한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베품의 갖춤이라 한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지혜의 갖춤인가?
바라문이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지혜를 가졌다. 그는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 차리고, 성스럽고, 지혜가 있고,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를 갖추었다. 이것이, 호랑이가 다니던 길에 사는 자여, 지혜의 갖춤이라 한다.   
바라문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은 좋은 가문의 아들에게 내생의 이익과 행복을 준다.”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근면하고 방일하지 않고 신중한 자는
바르게 생계를 유지하고, 모은 것(번 것)을 보호한다. 
믿음과 계를 갖추고 인색을 떠난, 구하는 자의 말뜻을 아는 자는 
내생의 축복을 가져오는 길을 항상 깨끗하게 한다.
이러한 여덟 가지 법은 믿음을 가진 재가자에게
두 곳 모두에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진리의 이름을 가진 분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이 보시는 재가자들에게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행복을 위한 공덕을 늘어나게 한다.'

 

bhayasuttaṃ (AN 8.56-두려움 경)

56. “비구들이여, 두려움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병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종기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쇠살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결박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수렁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비구들이여, 모태에 듦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왜 두려움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에 빠지고 탐욕에 묶인 사람들은 금생에 속한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 속한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두려움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왜 괴로움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에 빠지고 탐욕에 묶인 묶인 사람들은 금생에 속한 괴로움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 속한 괴로움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괴로움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왜 병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에 빠지고 탐욕에 묶인 사람들은 금생에 속한 병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 속한 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병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비구들이여, 왜 종기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에 빠지고 탐욕에 묶인 사람들은 금생에 속한 종기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 속한 종기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종기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왜 쇠살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들을 일컫는 말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에 빠지고 탐욕에 묶인 사람들은 금생에 속한 쇠살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 속한 쇠살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쇠살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왜 결박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에 빠지고 탐욕에 묶인 사람들은 금생에 속한 결박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 속한 결박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결박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왜 수렁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에 빠지고 탐욕에 묶인 사람들은 금생에 속한 수렁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 속한 수렁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흙탕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왜  모태에 듦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에 빠지고 탐욕에 묶인 사람들은 금생에 속한 모태에 듦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 속한 모태에 듦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태에 듦이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일컫는 말이다.”

'두려움, 괴로움, 병, 종기, 쇠살, 결박, 수렁, 모태 모두는 감각적 쾌락이라고 불린다. 

여기에서 그런 즐거움에 빠진 범부 중생들은  다시 모태에 든다.

그러나 비구가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림을 소홀히 하지 않을 때 모태에 들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이 건너기  어려운 늪을 건너서  

태어남과 늙음에 속해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pathamaahuneyyasuttam (AN 8.57-공양받아 마땅함 경1)
57.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요소를 구족한 비구는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무엇이 여덟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계를 잘 지킨다. 계를 잘 지켜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문다.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추고, 작은 허물에도 두려움을 보며,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 닦고 익힌다.
그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잘 호지하고 배운 것을 잘 정리한다.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내는 가르침들이 있으니, 그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많이 배우고 호지하고 말로써 익숙해지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통찰한다.
그는 좋은 친구이고 좋은 동료이고 좋은 벗이다.

그는 바른 견해를 가져서, 바르게 봄을 구족하였다.

그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물게 하는, 높은 마음인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얻는다.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해 낸다.[宿命通]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天眼通]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구족한 비구는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다."

 

dutiyaahuneyyasuttam (AN 8.58-공양 받아 마땅함 경2) 
58.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요소를 구족한 비구는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무엇이 여덟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계를 잘 지킨다. 계율의 항목을 수호하고 지켜서 행동규범을 완성한다.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 닦고 익힌다.
그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잘 호지하고 배운 것을 잘 정리한다.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내는 가르침들이 있으니, 그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많이 배우고 호지하고 말로써 익숙해지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통찰한다.
그는 불굴의 정진으로 머물고 굳세고 분투하고 선한 법들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숲 속에 머물고 외딴 거처를 의지한다.

그는 싫어함과 좋아함을 극복한다. 그는 싫어함이 일어나는 즉시 이를 극복하면서 머문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한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나는 즉시 이를 극복하면서 머문다.

그는 바로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물게 하는, 높은 마음인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얻는다.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구족한 비구는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paṭhamapuggalasuttaṃ (AN 8.59-사람 경1)
59. “비구들이여, 여덟 사람은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무엇이 여덟인가?

예류도,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닦는 자. 일래도, 일래과를 실현하기 위해 닦는 자, 불환도, 불환과를 실현하기 위해 닦는 자, 아라한도, 아라한과를 실현하기 위해 닦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덟 사람은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네 가지 도(道)를 닦는 자와 네 가지 과(果)에 머무는 자들  

지혜와 계와 삼매를 닦는 올바른 존재들로 구성된 이러한 승가가 있다.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공덕을 바라는 생명에게

재생의 기반인 공덕을 짓는 자들에게 승가에 보시한 것이 큰 결실이 있다.'

 

dutiyapuggalasuttaṃ (AN 8.60-사람 경2)
60. “비구들이여, 여덟 사람은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무엇이 여덟인가?

예류자,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닦는 자. 일래자, 일래과를 실현하기 위해 닦는 자, 불환자, 불환과를 실현하기 위해 닦는 자, 아라한, 아라한됨을 위해 닦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덟 사람은 공양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네 가지 도를 닦는 자와 네 가지 과에 머무는 자들  
지혜와 계와 삼매를 닦는 올바른 존재들로 구성된 이러한 승가가 있다.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공덕을 바라는 생명에게
재생의 기반인 공덕을 짓는 자들에게 승가에 보시한 것이 큰 결실이 있다.'



제6장 고따미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