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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의 모음 - 4. 대 품(Mahā-vagga. AN9.32-41)

실론섬 2014. 8. 27. 17:10

제4장 대 품 Mahā-vagga (AN 9.32-41)

 

anupubbavihārasuttaṃ (AN 9.32-차례로 머묾 경)

32. "비구들이여,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이 있다. 무엇이 아홉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
[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이 있다.”

 

anupubbavihārasamāpattisuttaṃ (AN 9.33-차례로 머묾의 증득 경)
33. "비구들이여,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을 설하겠다.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들이 소멸하는 그곳에서, 감각적 쾌락들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그 요소만큼 갈애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건넜고,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감각적 쾌락들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감각적 쾌락들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들이 소멸하고, 감각적 쾌락들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소멸하는 그곳에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그 요소만큼 갈애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건넜고,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있는 제2선(二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소멸하고,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기쁨이 소멸하는 그곳에서, 기쁨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그 요소만큼 갈애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건넜고,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기쁨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기쁨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正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기쁨이 소멸하고, 기쁨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즐거움이 있는 평정이 소멸하는 그곳에서 즐거움이 있는 평정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그 요소만큼 갈애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건넜고,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즐거움이 있는 평정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즐거움이 있는 평정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함(捨念淸淨)이 있는, 제4선(四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즐거움이 있는 평정이 소멸하고, 즐거움이 있는 평정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물질[色. 물질적 현상]에 대한 인식(지각)이 소멸하는 그곳에서, 물질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그 요소만큼 갈애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건넜고,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물질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물질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인식(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물질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는 그곳에서,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그 요소만큼 갈애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건넜고,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한 그곳에서,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삿된 견해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한 그곳에서,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삿된 견해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한 그곳에서,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삿된 견해가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졌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만족해 한 뒤 존경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이다.”

 

nibbānasukhasuttaṃ (AN 9.34-열반의 기쁨 경)
34. 한 때에 사리뿟따 존자는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이시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열반은 행복입니다. 도반들이여, 열반은 행복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우다이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서 느껴지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이라 합니까?”라고.
“도반 우다이여, 여기서 느껴지는 것이 없는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섯입니까?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사유를 수반하며,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습니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을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거친 사유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즐거움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즐거움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평정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평정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물질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물질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공무변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공무변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식무변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식무변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무소유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무소유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뭅니다. 그리고 그는 지혜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합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gāvīupamāsuttaṃ (AN 9.35-소의 비유 경)

35.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경험이 부족하고, 영역을 잘 알지 못하고, 평탄하지 못한 산길을 걷는데 능숙하지 못한 산악의 소가 있다. 그 소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야겠다.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 먹어야겠다.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야겠다.’라고. 그런데 그가 앞 발을 확고하게 잘 내려놓지도 않은 채 뒷 발을 들어 올린다면 그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지 못할 것이고,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 먹지 못할 것이고,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나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야겠다.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 먹어야겠다.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그 장소로 안전하게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 산악의 소는 어리석고, 경험이 부족하고, 영역을 잘 알지 못하고, 평탄치 못한 산길을 걷는데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는 어리석고, 경험이 부족하고, 영역을 잘 알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불선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무는데 능숙하지 못하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닦지 못하고, 많이 익히지 못하고, 잘 확립하지 못한다.

 

그는 ‘나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머물지 못한다. 그는 ‘나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물지 못한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리석고, 경험이 부족하고, 영역을 잘 알지 못하고, 평탄치 못한 산길을 걷는데 능숙하지 못한 그 산악의 소처럼, 비구는 두 가지 모두를 잃었고 두 가지 모두로부터 떨어졌다.'라고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현명하고, 경험이 있고, 영역을 잘 알고, 평탄치 못한 산길을 걷는데 능숙한 산악의 소가 있다. 그 소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야겠다.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 먹어야겠다.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야겠다.’라고. 그가 앞발을 확고하게 잘 내려놓은 뒤 뒷발을 들어 올린다면 그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갈 것이고,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을 것이고,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시게 될 것이다. 또한, ‘나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야겠다.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 먹어야겠다.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그 장소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 산악의 소는 현명하고, 경험이 있고, 영역을 잘 알고, 평탄치 못한 산길을 걷는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는 현명하고, 경험이 있고, 영역을 잘 알고,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불선법(不善法)들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무는 데에 능숙하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잘 확립한다.

 

그는 ‘나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제2선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잘 확립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물리야겠다.’라고. 제3선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잘 확립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제4선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잘 확립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공무변처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잘 확립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식무변처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잘 확립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무소유처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잘 확립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비상비비상처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가까이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잘 확립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을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상수멸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런 증득에 입정하기도 하고 출정하기도 할 때 그의 마음은 유연해지고 준비된다. 마음이 유연하고 준비되면 무량한 삼매가 잘 닦아진다. 무량한 삼매를 잘 닦을 때 그는 완전한 지혜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것이든 완전한 지혜로 실현해야 하는 법들로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마음챙김의 토대가 있을 때, 어디에서든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마음이 유연해지고 준비된다(mudu cittam hoti kammannam)'는 것은 마치 위빳사나의 마음이 춣세간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유연해지고 수행을 견디고 수행에 적합하게 되듯이, 신통지의 기초(abhinna-padaka)가 되는 그의 제4선의 마음도 유연해지고 수행에 적합하게 된다는 말이다.(AA.iv.194-195)
*'무량한 삼매(appamana samadhi)'라는 것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삼매도 무량한 삼매라 하고, 도와 과의 삼매도 무량한 삼매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무량하다는 것은 무량한 대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방법에 따라 잘 익힌 삼매를 '무량한 삼매'라고 알아야 한다.(AA.iv.195)

 

만약 그가 '여러 가지 신통을 실행해야겠다. 즉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기도 해야겠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처럼 닿지 않고 가야겠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처럼 나타나고 사라져야겠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처럼 빠지지 않고 가야겠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 달린 새처럼 해야겠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어야겠다.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쳐야겠다.'라고 원한다면, 그는, 마음챙김의 토대가 있을 때, 어디에서든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만약 그가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天耳界)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사람과 인간의 두 소리를 들어야겠다.'라고 원한다면, 그는, 마음챙김의 토대가 있을 때, 어디에서든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만약 그가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려야겠다. 탐욕을 지닌 마음을 탐욕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탐욕에서 벗어난(떠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겠다.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겠다.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겠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겠다.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겠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겠다. 삼매를 얻은 마음을 삼매를 얻은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삼매에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에 얻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겠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겠다.'라고 원한다면, 그는, 마음챙김의 토대가 있을 때, 어디에서든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만약 그가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해야겠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해야겠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해야겠다.'라고 원한다면, 그는, 마음챙김의 토대가 있을 때, 어디에서든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만약 그가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보야겠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려야겠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 나라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보아야겠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려야겠다.'라고 원한다면, 그는, 마음챙김의 토대가 있을 때, 어디에서든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만약 그가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한다면, 그는, 마음챙김의 토대가 있을 때, 어디에서든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jhānasuttaṃ (AN 9.36-선(禪) 경)

36. “비구들이여, 초선(初禪)을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초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2선을 토오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3선을 통하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4선을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비상비비상처를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상수멸을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초선(初禪)을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한 것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色)이건(물질에 속하고), 느낌(受)이건, 인식(想)이건, 형성(行)이건, 의식(識)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좋아하고, 그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한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궁수나 궁수의 제자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만든 표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서 전광석화와 같이 쏘아서 큰 무리를 쳐부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色)이건(물질에 속하고), 느낌(受)이건, 인식(想)이건, 형성(行)이건, 의식(識)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좋아하고, 그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한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초선(初禪)을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제2선을 통한 ··· 제3선을 통한 ··· 제4선을 통한 번되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한 것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色)이건(물질에 속하고), 느낌(受)이건, 인식(想)이건, 형성(行)이건, 의식(識)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좋아하고, 그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한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궁수나 궁수의 제자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만든 표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서 전광석화와 같이 쏘아서 큰 무리를 쳐부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色)이건(물질에 속하고), 느낌(受)이건, 인식(想)이건, 형성(行)이건, 의식(識)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좋아하고, 그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한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제4선을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한 것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色)이건(물질에 속하고), 느낌(受)이건, 인식(想)이건, 형성(行)이건, 의식(識)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좋아하고, 그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한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궁수나 궁수의 제자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만든 표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서 전광석화와 같이 쏘아서 큰 무리를 쳐부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色)이건(물질에 속하고), 느낌(受)이건, 인식(想)이건, 형성(行)이건, 의식(識)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좋아하고, 그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한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통한 ··· 무소유처를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한 것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色)이건(물질에 속하고), 느낌(受)이건, 인식(想)이건, 형성(行)이건, 의식(識)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좋아하고, 그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한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궁수나 궁수의 제자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만든 표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서 전광석화와 같이 쏘아서 큰 무리를 쳐부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色)이건(물질에 속하고), 느낌(受)이건, 인식(想)이건, 형성(行)이건, 의식(識)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서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좋아하고, 그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한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통한 번뇌들의 부서짐도 나는 말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인식(想)이 함께한 선정의(삼매의) 증득이 있는 만큼 완전한 지혜로 꿰뚫음이 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비상비비상처의 증득과 상수멸의 이 두 경지는 증득에 능숙하고 증득에서 출정하는 것에 능숙한, 삼매를 닦는 비구들이 증득에 들었다가 출정한 뒤에 바르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여기서 왜 비상비비상처를 언급하지 않았는가?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 경지에서는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들도 미세하여 명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식이 함께한 [선정의] 증득[等地]이 있는 한 완전한 지혜로 꿰뚫음이 있다.’는 것은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이 함께한 증득이 있는 한, 거친 법들을 명상하는 자에게 완전한 지혜로 꿰뚫음이 있고, 그는 아라한과를 얻는다. 그러나 비상비비상처는 미세하기 때문에 인식이 함께한 삼매의 증득이라 말하지 않는다.”바르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이것은 고요하고 수승하다.‘라고 궁극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칭송해야 하고 찬양해야 한다는 말이다.(AA.ⅳ.198)

 

Ānandasuttam (AN 9.37-아난다 경) 
3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아난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아난다 존자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반들이여. 
도반들이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는 재가에서도 [출세간법을 증득할 수 있는] 기회를 터득할 수 있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이는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며, 고통과 비애를 사라지게 하고, 옳바른 길에 이르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눈도 있을 것이고 형상들도 있지만 그 형상들의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귀도 있을 것이고 소리들도 있지만 그 영역들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코도 있을 것이고 냄새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혀도 있을 것이고 맛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몸도 있을 것이고 감촉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우다이 존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면 인식을 가진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인식이 없는 자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도반 우다이여, 인식이 있는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인식이 없는 자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인식을 가진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 우다이여, 한때 나는 사께따에서 안자나 숲의 녹야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자띨라가히야 비구니가 내게 다가왔습니다. 와서는 내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습니다. 한 곁에 서서 자띨라가히야 비구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 삼매는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냄을 밀쳐내지 않으며, 애써 노력하여 오염원들을 제지하고 방해한 상태가 아니고, 해탈했기 때문에 확고하며, 확고하기 때문에 지족하고, 지족하기 때문에 안달하지 않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 삼매는 어떤 결실이 있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우다이여, 이렇게 말하자 나는 자띨라가히야 비구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띨라가히야여,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냄을 밀쳐내지 않으며, 애써 노력하여 오염원들을 제지하고 방해한 상태가 아니고, 해탈했기 때문에 확고하며, 확고하기 때문에 지족하고, 지족하기 때문에 안달하지 않는 이 삼매는 완전한 지혜를 결실로 가진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도반 우다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lokāyatikasuttaṃ(AN 9.38-세상의 이치에 능통함 경)

38. 그 무렵 세상의 이치에 능통한 두 명의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바라문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일체를 아는 자, 일체를 보는 자인 뿌라나 깟사빠는 완전한 앎(지.知)와 봄(견.見)을 공언합니다.
‘걷고 있거나 서 있거나 잠자고 깨어있는 나에게 언제나 앎과 봄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끝이 없는 앎에 의해 끝이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일체를 아는 자, 일체를 보는 자인 니간타 나따뿟따도 완전한 앎과 봄을 공언합니다. ‘걷고 있거나 서 있거나 잠자고 깨어있는 나에게 언제나 앎과 봄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끝이 있는 앎에 의해 끝이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이 두 사람은 지혜를 말하면서 서로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는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합니까?”

 

“바라문들이여, 그만하십시오. 이것을 멈추십시오. ‘이 두 사람은 지혜를 말하면서 서로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는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합니까?’라고. 내가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겠습니다.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그 바라문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바라문들이여, 최고의 속력과 걸음걸이를 갖추고 최대의 보폭을 갖춘 네 사람이 사거리에서 네 방향으로 서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의 최고의 속력은 잘 훈련된 궁수가 능숙하고 숙련되어 가벼운 화살로 힘들이지 않고 야자나무의 그늘을 가로질러 맞히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최대의 보폭은 동쪽 바다에서 서쪽 바다를 한 걸음으로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동쪽 방향으로 서있는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그는 백년의 수명을 가졌는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고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 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과 피로를 푸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걷더라도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 것입니다. 그때 서쪽 방향으로 서 있는 사람이 ··· 그때 북쪽 방향으로 서 있는 ··· 그때 남쪽 방향으로 서있는 사람이 말할 것입니다.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그는 백년의 수명을 가졌는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고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 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과 피로를 푸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걷더라도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바라문들이여, 나는 이렇게 달려감에 의해 세상의 끝을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문들이여,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바라문들이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성스러운 율에서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다섯입니까?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사유를 수반하며,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 혀로 인식되는 맛들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觸]들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성스러운 율에서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바라문들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여기, 바라문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여기, 바라문들이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여기, 바라문들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여기, 바라문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여기, 바라문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여기, 바라문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여기, 바라문들이여,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리고 그는 지혜로써 봄에 의해 번뇌들이 다합니다. 이것을, 바라문들이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에 대한 집착을 건넌 자로서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devāsurasaṅgāmasuttaṃ (AN 9.39-신과 아수라의 전쟁 경)

39. “예전에, 비구들이여,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있었다. 비구들이여, 그 전쟁에서 아수라들이 이기고 신들이 패배했다. 패배한 신들은, 비구들이여, 북쪽으로 퇴각했고 아수라들은 추격했다. 그때, 비구들이여, 신들에게 ‘아수라들이 추격하고 있다. 우리는 아수라들과 두 번째 전쟁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두 번째로, 비구들이여, 신들은 아수라들과 전쟁을 했다. 두 번째도, 비구들이여, 아수라들이 이기고 신들이 패배했다. 패배한 신들은, 비구들이여, 북쪽으로 퇴각했고 아수라들은 추격했다. 그때, 비구들이여, 신들에게 ‘아수라들이 추격하고 있다. 우리는 아수라들과 세 번째 전쟁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세 번째로, 비구들이여, 신들은 아수라들과 전쟁을 했다. 세 번째도, 비구들이여, 아수라들이 이기고 신들이 패배했다. 패배한 신들은, 비구들이여, 두려워서 신들의 요새로 들어갔다. 신들의 요새로 들어간 신들에게 ‘이제 공포를 주는 이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머물고 아수라들과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수라들에게도, 비구들이여, ‘신들은 이제 공포를 주는 이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머물 것이고 우리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에, 비구들이여,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있었다. 비구들이여, 그 전쟁에서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들이 패배했다. 패배한 아수라들은, 비구들이여, 남쪽으로 퇴각했고 신들은 추격했다. 그때, 비구들이여, 아수라들에게 ‘신들이 추격하고 있다. 우리는 신들과 두 번째 전쟁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두 번째로, 비구들이여, 신들은 아수라들과 전쟁을 했다. 두 번째도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들이 패배했다. 패배한 아수라들은, 비구들이여, 남쪽으로 퇴각했고 신들은 추격했다. 그때, 비구들이여, 아수라들에게 ‘신들이 추격하고 있다. 우리는 신들과 세 번째 전쟁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세 번째로, 비구들이여, 신들은 아수라들과 전쟁을 했다. 세 번째도, 비구들이여,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들이 패배했다. 패배한 신들은, 비구들이여, 두려워서 아수라의 요새로 들어갔다. 아수라의 요새로 들어간 아수라들에게 ‘이제 공포를 주는 이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머물고 신들과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들에게도, 비구들이여, ‘아수라들은 이제 공포를 주는 이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머물 것이고 우리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물 때, 비구들이여, 그 비구에게 ‘이제 나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나는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마라에게도 ‘이제 비구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비구들이여, 그 비구에게 ‘이제 나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나는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마라에게도 ‘이제 비구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비구들이여, 그 비구에게 ‘이제 나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나는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마라에게도 ‘이제 비구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이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비구들이여, 그 비구에게 ‘이제 나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나는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마라에게도 ‘이제 비구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을 성취하여 머물 때, 이것이 ‘이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고, 세상에 대한 강한 움켜쥠을 건넜다.’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물 때, 이것이 ‘이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고, 세상에 대한 강한 움켜쥠을 건넜다.’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물 때, 이것이 ‘이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고, 세상에 대한 강한 움켜쥠을 건넜다.’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을 성취하여 머물 때, 이것이 ‘이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고, 세상에 대한 강한 움켜쥠을 건넜다.’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을 성취하여 머물면서 지혜로써 봄에 의해 번뇌들이 다할 때, 이것이 ‘이 비구는 마라를 눈이 멀고 발이 없게 만들었다. 마라의 눈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고, 세상에 대한 강한 움켜쥠을 건넜다.’라고 불린다."

 

nāgasuttam (AN 9.40-나가 경) 
40.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힘센 코끼리)가 먹이를 찾아 나섰을 때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가 앞서 가면서 풀끝을 먼저 잘라 먹으면 밀림에 사는 나가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가 먹이를 찾아 나섰을 때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가 앞서 가면서 나무가지를 껶어 잎들을 먼저 먹어버리면 밀림에 사는 나가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가 앞서 가면서 웅덩이의 물을 혼탁하게 만들어버리면 밀림에 사는 나가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자기의 몸을 스치면서 지나가면 밀림에 사는 나가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그때,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나는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나는 풀끝이 잘려나간 풀을 먹고, 꺾어진 나무가지의 잎들을 먹고, 혼탁해진 물을 마시고, 내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내 몸을 스치면서 간다. 그러니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서 혼자 머물러야겠다.’라고. 그는 나중에 무리에서 빠져나와서 혼자 머물면서 풀끝이 잘려나가지 않은 풀을 먹고, 꺾어진 나무가지 잎들을 먹지 않고, 혼탁하지 않은 물을 마시고,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그의 몸을 스치면서 지나가지 않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그때 밀림에 사는 나가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전에 나는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에 둘러싸여 살았다. 나는 풀끝이 잘려나간 풀을 먹었고, 껶어진 나무가지 잎들을 먹었고, 혼탁해진 물을 마셨고, 내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내 몸을 스치면서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서 혼자 머물면서 풀끝이 잘려나가지 않은 풀을 먹고, 겪어진 나무가지의 잎들을 먹지 않고, 혼탁하지 않은 물을 마시고,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그의 몸을 스치면서 지나가지 않게 되었다.’라고. 그는 코로 나뭇가지를 잘라서 그것으로 몸을 문지르고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가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과 왕과 대신들과 외도들과 외도의 제자들에 둘러싸여서 머물 때 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나는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과 왕과 대신들과 외도들과 외도의 제자들에 둘러싸여서 머문다. 그러니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서 혼자 머물러야겠다.’라고. 그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머문다.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악의와 성냄을 제거하여 성냄이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의 정을 일으켜 악의와 성냄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 없이 머문다. 광명상(光明想)을 가져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문다. 안으로 마음이 고요하여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건너서 머문다. 유익한 법들에 아무런 의심이 없어져서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그는 마음의 오염원이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여,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그리고 그는 지혜로써 봄에 의해 번뇌들이 다한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tapussasuttaṃ (AN 9.41-따뿟사 경)

41. 한 때에 세존께서는 말라에서 우루웰라깝빠라는 말라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우루웰라깝빠로 탁발을 가셨다. 우루웰라깝빠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와와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내가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 큰 숲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그대는 여기에 있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낮 동안을 머물기 위해서 큰 숲으로 들어가서 어떤 나무 아래 앉으셨다.

 

그때 따뿟사 장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따뿟사 장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저희 재가자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을 탐합니다. 이처럼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을 탐하는 저희 재가자들에게 출리(出離)라는 것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저는 이 법과 율에서는 젊은 비구들의 마음은 ‘이 출리는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모두 출리(出離)에 들어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렇듯 이 법과 율의 비구들과 많은 사람들 간에 다른 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출리입니다.”

“장자여, 이 논점은 세존을 뵙고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장자여, 같이 세존에게 갑시다. 가서는 이 문제를 세존께 말씀드립시다. 세존께서 우리에게 설명하시는 대로 간직합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라고 따뿟사 장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따뿟사 장자와 함께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따뿟사 장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저희 재가자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을 탐합니다. 이처럼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을 탐하는 저희 재가자들에게 출리라는 것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존자시여, 저는 이 법과 율에서는 젊은 비구들의 마음은 ‘이 출리는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모두 출리에 들어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고 들었습니다. 존자시여, 이렇듯 이 법과 율의 비구들과 많은 사람들 간에 다른 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출리입니다.’라고.”
“참으로 그러하다,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하다, 아난다여.

아난다여, 나도 깨닫기 전, 아직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출리는 좋은 것이다. 멀리 여읨은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출리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출리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되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출리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에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친 사유들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거친 사유가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기 거친 사유들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거친 사유가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거친 사유들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거친 사유가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거친 사유와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거친 사유와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그런 내게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희열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희열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쁨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기쁨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기쁨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기쁨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기쁨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기쁨 없음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기쁨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기쁨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기쁨 없음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물렀다. 

이렇게, 아난다여, 내가 머물 때 기쁨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기쁨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그런 내게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정과 즐거움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평정과 즐거움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평정과 즐거움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에 들어 머물렀다. 

이렇게, 아난다여, 내가 머물 때 평정이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평정이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물질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공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물질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공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물질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공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물렀다. 

이렇게, 아난다여, 내가 머물 때 물질이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물질이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식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공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식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공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식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공무변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개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공무변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무소유처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식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학습하고, 무소유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식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릭혔다. 무소유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물렀다. 
이렇게, 아난다여, 내가 머물 때 식무변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식무변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소유처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무소유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무소유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물렀다.

이렇게, 아난다여, 내가 머물 때 무소유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무소유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상수멸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상수멸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상수멸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에 
들어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지혜로써 봄에 의해 번뇌를 다했다.

 

아난다여, 나는 이러한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을 순서대로나 역순으로 자유롭게 증득하고 출정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 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 대해 내 스스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나는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을 순서대로나 역순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고 깨어났기 때문에 나는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 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 대해 내 스스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내게는 ‘내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내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는 지와 견이 일어났다.”

 
제4장 대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