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아홉의 모음 - 3. 중생의 거처 품(Sattāvāsa-vagga. AN9.21-31)

실론섬 2014. 8. 22. 00:47

제3장 중생의 거처 품 Sattāvāsa-vagga (AN9.21-31)

thānasuttam (AN 9.21-경우 경)
21. “비구들이여,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웃따라꾸루 인간들은 삼십삼천의 신들과 잠부디빠 인간들을 능가한다. 무엇이 셋인가?
내 것이라는 것이 없고, 움켜쥠이 없고, 수명이 정해져 있는 특별함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웃따라꾸루 인간들은 신들과 잠뿌디빠 인간들을 능가한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삼십삼천의 신들은 웃따라꾸루 인간들과 잠부디빠 인간들을 능가한다. 무엇이 셋인가?
하늘의 수명과 하늘의 아름다움과 하늘의 행복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삼십삼천의 신들은 웃따라꾸루 인간들과 잠부디빠 인간들을 능가한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잠부디빠 인간들은 웃따라꾸루 인간들과 삼십삼천의 신들을 능가한다. 무엇이 셋인가?
용감함과 마음 챙김과 여기서 청정범행을 닦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삼십삼천의 신들은 웃따라꾸루 인간들과 삼십삼천의 신들을 능가한다.”

*수미산 주위에는 네 대륙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잠부디빠(Jambudipa), 아빠라고야나(Aparagoyana), 웃따라꾸루(Uttarakuru), 뿝바위데하(Pubbavideha)이다. 잠부디빠는 남쪽에 있는 대륙이며 우리와 같은 인간이 사는 곳이다. 아빠라고야나는 서쪽에, 웃따라꾸라는 북쪽에, 뿝바위데하는 동쪽에 있는 대륙이다. 중국에서는 이 넷을 각각 남섬부주, 서우화주, 동승신주, 북구로주로 옮겼다.
**'내 것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amama)'은 갈애가 없는 것을 말한다. '거머쥠이 없다는 것(apariggaha)'은 '이것은 내것이다.'라고 거머쥠이 없음을 말한다. 수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들의 수명은 천 년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음 생에 갈 곳도 정해져 있다. 이곳에서 죽어 오직 천상(sagga)에 태어난다.
*신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마음 챙김이 굳건하지 못하고, 지옥 중생들은 몹시 고통스럽기 때문에 마음 챙김이 굳건하지 못한다. 그러나 잠부디빠 인간들은 행복과 고통이 섞여있기 때문에 마음 챙김이 굳건하다. 

assakhaḷuṅkasuttaṃ (AN 9.22-망아지 경)
22. “비구들이여, 세 종류의 망아지와 세 부류의 젊은 사람과, 세 종류의 좋은 말과 세 부류의 좋은 사람과, 세 종류의 고귀하고 혈통 좋은 말과 세 부류의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에 대ㅠㅐ 설명할 것이다.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 종류의 망아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망아지는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망아지는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망아지는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종류의 망아지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 부류의 젊은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을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그의 [지혜의] 속력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법과 율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피해갈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용모를 갖추지 못함이라고 나는 말한다. 아울러 그는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지 못한다. 이것이 그의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 못함이라고 나는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그의 속력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법과 율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하고 피해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용모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지 못한다. 이것이 그의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 못함이라고 나는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이것이 그의 속력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그는 법과 율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하고 피해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용모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는다. 이것이 그의 균형 잡힌 몸매라고 나는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어떤 젊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부류의 젊은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 종류의 좋은 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좋은 말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좋은 말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좋은 말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종류의 좋은 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 부류의 좋은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좋은 사람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부류의 좋은 사람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좋은 사람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는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좋은 사람은 말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는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존재이다. 이것이 그의 속력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법과 율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하고 피해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용모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는다. 이것이 그의 균형 잡힌 몸매라고 나는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어던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부류의 좋은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세 종류의 고귀하고 혈통 좋은 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말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말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말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종류의 고귀하고 혈통 좋은 말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세 부류의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성취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의 속력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법과 율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피해갈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용모의 갖추지 못함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지 못한다. 이것이 그의 균현 잡힌 몸매의 갖추지 못함이라고 나는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은 갖추었지만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를 통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성취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의 속력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법과 율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하고 피해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용모라고 나는 나는 말한다. 그는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지 못한다. 이것이 그의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 못함이라고 나는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를 갖추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를 통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성취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의 속력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법과 율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하고 피해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용모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는다. 이것이 그의 균형 잡힌 몸매라고 나는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어떤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은 속력과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부류의 고귀하고 혈통 좋은 사람이다.”

taṇhāmūlakasuttaṃ (AN 9.23-갈애를 뿌리로 함 경)
23. “비구들이여, 갈애를 뿌리로 하는 아홉 가지 법들을 설하겠다. 이제 그것을 들어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갈애를 뿌리로 하는 아홉 가지 법들인가? 
갈애를 인연으로 한 구함, 구함을 인연으로 한 얻음, 얻음을 인연으로 한 분별, 분별을 인연으로 한 욕심, 욕심을 인연으로 한 탐냄, 탐냄을 인연으로 한 집착, 집착을 인연으로 한 간직, 간직을 인연으로 한 인색, 인색을 인연으로 한 지킴, 이들 아홉의 갈애의 뿌리에 수반되어 갖가지 세간사의 다툼과 죄와 허망한 말들이 생겨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갈애를 뿌리로 하는 아홉 가지 법들이다.”

 

sattavasasuttam (AN 9.24-중생의 거처 경)
24. “비구들이여,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가 있다. 무엇이 아홉가지인가?
비구들이여,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중생의 거처이다. (여러 몸과 각기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
비구들이여, 몸은 여럿이되 동일한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여기서 초선[初禪]을 닦아서 태어난 범중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중생의 거처이다.
비구들이여, 몸은 동일하되 각기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중생의 거처이다.
비구들이여, 동일한 몸과 동일한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중생의 거처이다.
비구들이여,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무는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중생의 거처이다.
비구들이여,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무는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중생의 거처이다.
비구들이여,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무는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중생의 거처이다.
비구들이여,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무는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덟 번째 중생들의 거처이다. 
비구들이여,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무상유정(無想有情)에 들어 머무는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아홉 번째 중생들의 거처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아홉 가지 중생들의 거처가 있다.”

paññāsuttaṃ (AN 9.25-지혜 경)
25. “비구들이여, 비구가 지혜로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아주 굳건하게 할 때), 비구들이여, 그에게 이런 말은 적절하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지혜에 의한 마음을 잘 확립하는가?
‘나의 마음에 탐욕이 없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성냄이 없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탐욕과 함께하는 것이 없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성냄과 함께 하는 것이 없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어리석음과 함께 하는 것이 없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나의 마음이 욕계 존재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나의 마음이 색계존재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나의 마음이 무색계 존재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 비구들이여, 그에게 이런 말을 적절하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silāyūpasuttaṃ (AN 9.26-돌기둥 경)

26. 한 때에 사리뿟따 존자와 짠디까뿟따 존자가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렀다. 거기서 짠디까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비구가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하였을 때, 그 비구가 이렇게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법을 설합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사리뿟따 존자가 짠디까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짠디까뿟따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그런 법을 설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 그 비구가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적절합니다.라고. 도반 짠디까뿟따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하였을 때 그 비구가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합니다.’”라고.

 

두번 째도 짠디까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 그 비구가 이렇게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법을 설합니다.”라고.

두 번째도 사리뿟따 존자가 짠디까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짠디까뿟따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 그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합니다.라고. 도반 짠디까뿟따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하였을 때, 그 비구가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절적하다.’”라고.

 

세번 째도 짠디까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 그 비구가 이렇게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법을 설합니다.”라고.
세 번째로 사리뿟따 존자가 짠디까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짠디까뿟따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 그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합니다.라고. 도반 짠디까뿟따여, 데와닷따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하였을 때, 그 비구가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안다.’라고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절적하다.’”라고.

 

*사리뿟따는 세번이나 짠디까뿟다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는 사리뿟따의 설법이 아니라 사리뿟따에 의한 데와닷따의 설법 내용의 소개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하는가?

‘나의 마음에 탐욕이 없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성냄이 없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탐욕과 함께 하는 것이 없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성냄과 함께 하는 것이 없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나의 마음에 어리석음과 함께 하는 것이 없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나의 마음이 욕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나의 마음이 색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나의 마음이 무색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한다. 이렇게, 도반들이여, 바르게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에게 만약 눈으로 인식될 형상들이 눈의 영역에 강하게 들어온다 해도 그것들은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고, 마음과 섞이지 못한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며, 다시 그는 사라짐을 관찰한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16꾹꾸까 길이가 되는 돌기둥이 있다. 그 가운데  8꾹꾸까는 땅속에 박혀있고, 8꾹꾸까는 땅 위에 나와있다. 만약, 그때 동쪽에서 비를 동반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하더라도 그 돌기둥을 흔들지 못하고 요동치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때 서쪽에서 ···그때 북쪽에서 ··· 그때 남쪽에서 비를 동반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하더라도 그 돌기둥을 흔들지 못하고 요동치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도반들이여, 돌기둥의 끝이 깊이 묻혀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바르게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에게 만약 눈으로 인식될 형상들이 눈의 영역에 강하게 들어온다 해도 그것들은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고, 마음과 섞이지 못한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며, 다시 그는 사라짐을 관찰한다.

 

만약, 귀로 인식될 소리들이 강하게 ··· 코로 인식될 냄새들이 강하게 ··· 혀로 인식될 맛들이 강하게 ··· 몸으로 인식될 감촉들이 강하게 ··· 마음으로 인식될 법들이 강하게 마음의 영역에 강하게 들어온다 해도 그것들은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고, 마음과 섞이지 못한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며, 다시 그는 사라짐을 관찰한다."라고.

 

**본경은 사리뿟따 존자는 '마음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bhikkhuno ca cetasa cittam supariitam)'라고 나타나고 짠디까뿟따 존자는 '마음에 의해 마음을 확립하였을 때(bhikkhuno cetasa cittam suparicitam)라고 나타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본경은 앞의 paññāsuttaṃ (AN 9.25-지혜 경)에서 붓다는 [지혜에 의해 마음을 잘 확립하였을 때.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paññāya cittaṃ suparicitaṃ hoti]으로 설명하는 것과 비교해서 이해해야 한다. 즉 붓다는 '혜(慧)에 의한 마음의 확립 → 깨달음이지만, 데와닷따는 마음에 의한 마음의 확립 → 깨달음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존께서는 혜(慧)[지혜]에 의한 마음(心)의 해탈을 설하고, 데와닷따는 정(定)[삼매]에 의한 마음(心)의 해탈을 설한 것을 알 수 있다. 

 

paṭhamaverasuttaṃ (AN 9.27-원망 경1)

27. 그 무렵 아나따삔디카 장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나따삔디카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고, 예류도를 얻기 위한 네 가지 요소를 갖출 때, 그가 원하면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나에게 지옥은 다했고, 축생의 모태는 다했고, 아귀계의 영역은 다했고,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은 다했다. 나는 흐름에 든 자[예류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 해탈이 확실한 자,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다.’라고.

 

어떤 다섯 가지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는가? 
장자여, 생명을 해치는 자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의 조건으로부터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고,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한다(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을 경험한다).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는,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을 일으키지 않으며,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지 않으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하지 않는다.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에게 이렇게 그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는다.

 

장자여,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는 ···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자는 ··· 거짓을 말하는 자는 ···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해 방일하게 머무는 자는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해 방일하게 머무는 행위의 조건으로부터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고,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한다.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난 자는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도 일으키지 않으며,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도 일으키지 않으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하지 않는다.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에게 이렇게 그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는다.

 

예류도를 얻기 위한 어떤 네 가지 구성요소를 갖추는가?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세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믿음을 갖춘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법(가르침)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믿음을 갖춘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승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믿음을 갖춘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으니, 저 네 쌍의 분들[四雙] 여덟 단계에 계신 분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복전[福田]이시다.’라고.

 

'깨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벗어나게 하고), 현자들이 칭찬하고, (성취한 것을) 움켜쥐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계를 갖춘다.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러한 다섯 가지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고, 또 그가 예류도를 얻기 위한 이러한 네 가지 구성요소를 갖출 때, 그가 원한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지옥을 다했고, 축생의 모태를 다했고, 아귀계를 다했고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을 다했다. 나는 흐름에 든 자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 해탈이 확실한 자,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다.’라고.”

 

dutiyaverasuttaṃ (AN 9.28-원망 경2)
28.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고, 예류도를 얻기 위한 네 가지 요소를 갖출 때, 그가 원하면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나에게 지옥은 다했고, 축생의 모태는 다했고, 아귀계의 영역은 다했고,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은 다했다. 나는 흐름에 든 자[예류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 해탈이 확실한 자,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다.’라고.

어떤 다섯 가지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는가? 
비구들이여, 생명을 해치는 자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의 조건으로부터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고,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한다(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을 경험한다).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는,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을 일으키지 않으며,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지 않으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하지 않는다.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에게 이렇게 그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는다.


비구들이여,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는 ···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자는 ··· 거짓을 말하는 자는 ···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해 방일하게 머무는 자는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해 방일하게 머무는 행위의 조건으로부터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고,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일으키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한다.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난 자는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도 일으키지 않으며,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도 일으키지 않으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하지 않는다.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에게 이렇게 그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는다.

예류도를 얻기 위한 어떤 네 가지 구성요소를 갖추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세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믿음을 갖춘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법(가르침)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믿음을 갖춘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승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믿음을 갖춘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으니, 저 네 쌍의 분들[四雙] 여덟 단계에 계신 분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복전[福田]이시다.’라고.


'깨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벗어나게 하고), 현자들이 칭찬하고, (성취한 것을) 움켜쥐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계를 갖춘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러한 다섯 가지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고, 또 그가 예류도를 얻기 위한 이러한 네 가지 구성요소를 갖출 때, 그가 원한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지옥을 다했고, 축생의 모태를 다했고, 아귀계를 다했고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을 다했다. 나는 흐름에 든 자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 해탈이 확실한 자,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다.’라고.”

 

āghātavatthusuttaṃ (AN 9.29-미워하는 이유 경)

29. “비구들이여, 미움이 생기는 아홉 가지 원인이 있다. 무엇이 아홉인가?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다.’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칠 것이다.’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다.’ 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다.'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손해를 끼칠 것이다.’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었다.’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이 사람 내가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이익을 줄 것이다.’라는 생각에 미움에 묶인다. 
비구들이여, 미움이 생기는 이러한 아홉 가지 원인이 있다.”

 

āghātapaṭivinayasuttaṃ (AN 9.30-미움의 정복 경)
30. “비구들이여, 아홉 가지 미움을 정복하는 것이 있다. 무엇이 아홉인가?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손해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이익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미움을 정복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아홉 가지 미움을 정복하는 것이 있다.”

 

anupubbanirodhasuttaṃ (AN 9.31-차례로 소멸함 경)

31. “비구들이여, 아홉 가지로 차례로 소멸함이 있다. 무엇이 아홉인가?”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다섯 가지 장애가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 기쁨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소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 물질의 인식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을 증득한 자에게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아홉 가지 차례로 소멸함이 있다.”

 


제3장 중생의 거처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