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56상윳따 - 제5장 절벽 품(SN56:41-SN56:50. Papāta-vagga)

실론섬 2014. 9. 7. 15:41

제5장 절벽 품  
Papāta-vagga  

lokacintāsuttaṃ (SN 56.41-세상을 생각함 경)

11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전에,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야겠다.’라며 라자가하에서 나가서 수마가다 호수로 갔다. 가서는 수마가다 호수의 언덕에 앉아서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비구들이여, 그 사람이 수마가다 호수의 언덕에서 네 무리의 군대[코끼리-마차-기마-보병]가 연꽃의 줄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미쳤다. 나는 정신이 나갔다(제정신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는 보았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그 사람은 라자가하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의 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쳤습니다. 나는 정신이 나갔습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라고.
‘여보시오,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미치고 어떻게 제정신이 아닙니까?’
‘여기, 존자이시여, 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야겠다.’라며 라자가하에서 나가서 수마가다 호수로 갔습니다. 가서는 수마가다 호수의 언덕에 앉아서 세상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네 무리의 군대가 연꽃의 줄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존자이시여, 이렇게 나는 미쳤고, 이렇게 나는 정신이 나갔습니다. 내가 본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보시오, 참으로 그대는 미쳤고, 참으로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대가 본 것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그런 그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본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것이 아니다. 예전에, 비구들이여,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비구들이여, 그 전쟁에서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들이 패했다. 비구들이여, 패한 아수라들은 두려워서 신들을 속이기 위해 연꽃 줄기를 통해서 아수라의 도시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세상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다.’라거나, ‘세상은 무한하다.’라거나, ‘생명(목숨)과 몸은 같은 것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른 것이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들은 이익을 가져오지 못하고, 청정범행의 시작이 아니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평안)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생각들은 이익을 가져오고, 청정범행의 시작이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papātasuttaṃ (SN 56.42-낭떠러지(절벽) 경)
1112.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들이여,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서 빠띠바나 봉으로 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빠띠바나 봉으로 가셨다. 어떤 비구가 빠띠바나 봉에 큰 절벽(낭떠러지)을 보았다. 보고서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절벽은 참으로 큽니다. 세존이시여, 이 절벽은 많은 두려움을 줍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이 절벽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다른 절벽이 있습니까?”
“비구여, 이 절벽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절벽이 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절벽이 이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절벽입니까?”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行. 형성]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해한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한 뒤에 태어남의 절벽에서도 떨어지고, 늙음의 절벽에서도 떨어지고, 죽음의 절벽에서도 떨어지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의 절벽에서도 떨어진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에 의한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들은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해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은 뒤에 태어남의 절벽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늙음의 절벽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죽음의 절벽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의 절벽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에 의한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해탈한다. '그들은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mahāpariḷāhasuttam (SN 56.43-대열뇌(大熱惱) 경)
1113. “비구들이여, 대열뇌라는 지옥이 있다. 거기에는 눈에 보이는 형상은 무엇이든지 원하지 않는 것만 보이고 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것만 보이고 좋아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보이고 마음에 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무엇이든지 ··· 코로 맡아지는 냄새는 무엇이든지 ··· 혀로 맛보아지는 맛은 무엇이든지 ··· 몸으로 감촉되는 촉감은 무엇이든지 ··· 마음으로 식별되는 법(마음현상)은 무엇이든지 원하지 않는 것만 식별되고 원하는 것은 식별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것만 식별되고 좋아하는 것은 식별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식별되고 마음에 드는 것은 식별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열뇌의 지옥은 참으로 큽니다. 세존이시여, 이 열뇌의 지옥은 많은 두려움을 줍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이 열뇌의 지옥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다른 열뇌의 지옥이 있습니까?”

“비구여, 이 열뇌의 지옥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다른 열뇌의 지옥이 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열뇌의 지옥이 이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열뇌의 지옥입니까?”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行. 형성]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해한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한 뒤에 태어남의 열뇌의 지옥에서도 떨어지고, 늙음의 열뇌의 지옥에서도 떨어지고, 죽음의 열뇌의 지옥에서도 떨어지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의 열뇌의 지옥에서도 떨어진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에 의한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들은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해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은 뒤에 태어남의 열뇌의 지옥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늙음의 열뇌의 지옥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죽음의 열뇌의 지옥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의 열뇌의 지옥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에 의한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해탈한다. '그들은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kūṭāgārasuttam (SN 56.44-뾰족지붕 경)
1114.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나는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지 않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지 않고,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지 않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지 않고, 바르게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나는 뾰족지붕 집의 아래층을 만들지 않고 위층을 만들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나는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지 않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지 않고,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지 않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지 않고 바르게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누가 말하기를 ‘나는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 뒤에 바르게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나는 뾰족지붕 집의 아래층을 만들고 나서 위층을 만들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나는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 뒤에 바르게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vālasuttam (SN 56.45-머리카락 경) 
1115.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大林]의 뾰족지붕 건물에 머물고 계셨다.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웨살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는 많은 릿차위 청년들이 공회당에서 궁술 수련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멀리서 작은 열쇠구멍을 통해서 화살을 쏘기도 하고 실수하지 않고 먼저 쏜 화살의 화살 깃을 다시 다른 화살로 적중시키기도 하였다.

아난다 존자는 이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이들 릿차위 청년들은 잘 훈련이 되었구나. 참으로 이들 릿차위 청년들은 아주 잘 훈련되었구나. 참으로 멀리서 작은 열쇠구멍을 통해서 화살을 쏘기도 하고 실수하지 않고 먼저 쏜 화살의 화살 깃을 다시 다른 화살로 적중시키기도 하다니!’라고.

아난다 존자는 웨살리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걸식에서 돌아와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하여 웨살리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많은 릿차위 청년들이 공회당에서 궁술 수련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작은 열쇠구멍을 통해서 화살을 쏘기도 하고 실수하지 않고 먼저 쏜 화살의 화살 깃을 다시 다른 화살로 적중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게 ‘참으로 이들 릿차위 청년들은 잘 훈련되었구나. 참으로 이들 릿차위 청년들은 아주 잘 훈련되었구나. 참으로 멀리서 작은 열쇠구멍을 통해서 화살을 쏘기도 하고 실수하지 않고 먼저 쏜 화살의 화살 깃을 다시 다른 화살로 적중시키기도 하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것이 더 행하기 어렵고 더 성취하기 어렵겠는가? 멀리서 작은 열쇠구멍을 통해서 화살을 쏘기도 하고 실수하지 않고 먼저 쏜 화살의 화살 깃을 다시 다른 화살로 적중시키기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곱 가닥으로 쪼개진 머리카락을 화살촉으로 꿰뚫는 것인가?”

“세존이시여, 일곱 가닥으로 쪼개진 머리카락을 화살촉으로 꿰뚫는 것이 더 행하기 어렵고 더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아난다여, 그렇지만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 것이 더 꿰뚫기 어려운 것을 꿰뚫는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andhakārasuttam (SN 56.46-암흑 경)
1116. “비구들이여, 암흑으로 덮여 있고 칠흙 같이 어두우며 우주의 틈새에 놓여 있는 끝없이 깊고 텅 빈 곳이 있어, 그곳에는 큰 신통력과 큰 위력을 가진 해와 달도 빛을 비추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암흑은 참으로 큽니다. 세존이시여, 이 암흑은 많은 두려움을 줍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이 암흑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다른 암흑이 있습니까?”

“비구여, 이 암흑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다른 암흑이 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다른 암흑이 이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두려움을 주는 암흑입니까?”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行. 형성]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한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해한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한다.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을 행한 뒤에 태어남의 암흑에서도 떨어지고, 늙음의 암흑에서도 떨어지고, 죽음의 암흑에서도 떨어지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의 암흑에서도 떨어진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에 의한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들은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아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해하지 않고, 늙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 인도하는 행들도 행하지 않은 뒤에 태어남의 암흑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늙음의 암흑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죽음의 암흑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의 암흑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에 의한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해탈한다. '그들은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paṭhamachiggaḷayugasuttaṃ (SN 56.47-구멍이 있는 멍에 경1)
1117.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하나의 구멍만을 가진 멍에를 큰 바다에 던져 넣을 것이고, 거기에 눈 먼 거북이가 있을 것이다. 그 거북이는 백 년 만에 한 번씩 위로 올라올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 년 만에 한 번씩 위로 올라오는 그 눈먼 거북이가 그런 하나의 구멍이 있는 멍에에 목을 넣을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만일 가능하다 해도 참으로 그것은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나 이따끔 가능할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백 년 만에 한 번씩 위로 올라오는 그 눈먼 거북이가 그런 하나의 구멍이 있는 멍에에 목을 넣는 것은 아주 빠른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한번 파멸처(악도)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곳에는 법다운 행위가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유익한 행함이 없고, 공덕을 행함이 없다. 비구들이여, 그곳에는 서로서로 잡아먹는다. 약육강식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네 가지를 보지 못함인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를 보지 못함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dutiyachiggaḷayugasuttaṃ (SN 56.48-구멍이 있는 멍에 경2)
1118.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이 대지가 하나의 물이 될 것이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하나의 구멍만을 가진 멍에를 던져 넣을 것이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은 그것을 서쪽으로 몰고 갈 것이고,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그것을 동쪽으로 몰고 갈 것이며, 북쪽에서 부는 바람은 그것을 남쪽으로 몰고 갈 것이고, 남쪽에서 부는 바람은 그것을 북쪽으로 몰고 갈 것이다. 거기에 눈먼 거북이가 있을 것이다. 그 거북이는 백 년 만에 한 번씩 위로 올라올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 년 만에 한 번씩 위로 올라오는 그 눈먼 거북이가 그런 하나의 구멍이 있는 멍에에 목을 넣을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백 년 만에 한 번씩 위로 올라오는 그 눈먼 거북이가 그런 하나의 구멍이 있는 멍에에 목을 넣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목을 넣는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이 인간의 몸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행운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행운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세상을 비추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이 인간의 몸을 받았다.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세상에 출현하였다.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paṭhamasinerupabbatarājasuttaṃ (SN 56.49-산의 왕 시네루(수미산) 경1)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산의 왕 수네루에 일곱 개의 완두콩만한 자갈을 올려 놓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올려 놓은 일곱 개의 완두콩만한 자갈들과 산의 왕 시네루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가?“

"세존이시여, 산의 왕 시네루가 더 많습니다. 올려 놓은 일곱 개의 강낭콩만한 자갈들은 적습니다. 올려 놓은 일곱 개의 완두콩만한 자갈들은 산의 왕 시네루에 비교하여 헤아릴 것도 없고, 비교할 것도 없으며, 불명확한 부분도 없습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견해를 갖추고 실현한 제자에게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있는 괴로움은 적다. 최대 일곱 번의 태어남은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이전의 괴로움 무더기와 비교하여 헤아릴 것도 없고, 비교할 것도 없으며, 불명확한 부분도 없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dutiyasinerupabbatarājasuttaṃ (SN 56.50-산의 왕 시네루 경2)
1120.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산의 왕 시네루가 일곱 개의 완두콩만한 자갈들을 남긴채 완전히 부서지고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상의 왕 시네루와 남아있는 일곱 개의 완두콩만한 자갈들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가?”  

“세존이시여,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산의 왕 시네루가 더 많습니다. 남아있는 일곱 개의 완두콩만한 자갈들은 적습니다. 남아있는 일곱 개의 완두콩만한 자갈들은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산의 왕 시네루와 비교하여 헤아릴 것도 없고, 비교할 것도 없으며, 불명확한 부분도 없습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견해를 갖추고 실현한 성스러운 제자에게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있는 것은 적다. 최대 일곱 번의 태어남은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이전의 괴로움의 무더기와 비교하여 헤아릴 것도 없고, 비교할 것도 없으며, 불명확한 부분도 없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제5장 낭떠러지 품이 끝났다.